항상 거짓말쟁이 그레데 사람 2

2011년 7월 5일 화요일 오후 2:20:57  김대식


(딛 1:1, 개역) 『하나님의 종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인 바울 곧 나의 사도 된 것은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의 믿음과 경건함에 속한 진리의 지식과』
(딛 1:2, 개역) 『영생의 소망을 인함이라 이 영생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영원한 때 전부터 약속하신 것인데』
(딛 1:3, 개역) 『자기 때에 자기의 말씀을 전도로 나타내셨으니 이 전도는 우리 구주 하나님의 명대로 내게 맡기신 것이라』
(딛 1:4, 개역) 『같은 믿음을 따라 된 나의 참 아들 디도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구주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

(딛 1:5, 개역) 『내가 너를 그레데에 떨어뜨려 둔 이유는 부족한 일을 바로잡고 나의 명한 대로 각 성에 장로들을 세우게 하려 함이니』
(딛 1:6, 개역) 『책망할 것이 없고 한 아내의 남편이며 방탕하다 하는 비방이나 불순종하는 일이 없는 믿는 자녀를 둔 자라야 할지라』
(딛 1:7, 개역) 『감독은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책망할 것이 없고 제 고집대로 하지 아니하며 급히 분내지 아니하며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구타하지 아니하며 더러운 이를 탐하지 아니하며』
(딛 1:8, 개역) 『오직 나그네를 대접하며 선을 좋아하며 근신하며 의로우며 거룩하며 절제하며』
(딛 1:9, 개역) 『미쁜 말씀의 가르침을 그대로 지켜야 하리니 이는 능히 바른 교훈으로 권면하고 거스려 말하는 자들을 책망하게 하려 함이라』
(딛 1:10, 개역) 『복종치 아니하고 헛된 말을 하며 속이는 자가 많은 중 특별히 할례당 가운데 심하니』
(딛 1:11, 개역) 『저희의 입을 막을 것이라 이런 자들이 더러운 이를 취하려고 마땅치 아니한 것을 가르쳐 집들을 온통 엎드러치는도다』

(딛 1:12, 개역) 『그레데인 중에 어떤 선지자가 말하되 그레데인들은 항상 거짓말장이며 악한 짐승이며 배만 위하는 게으름장이라 하니』
(딛 1:13, 개역) 『이 증거가 참되도다 그러므로 네가 저희를 엄히 꾸짖으라 이는 저희로 하여금 믿음을 온전케 하고』
(딛 1:14, 개역) 『유대인의 허탄한 이야기와 진리를 배반하는 사람들의 명령을 좇지 않게 하려 함이라』
(딛 1:15, 개역) 『깨끗한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깨끗하나 더럽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에게는 아무 것도 깨끗한 것이 없고 오직 저희 마음과 양심이 더러운지라』
(딛 1:16, 개역) 『저희가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니 가증한 자요 복종치 아니하는 자요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니라』


그레데 사람은 항상 거짓말쟁이다 라고 성경이 말하고 있습니다.
그럼 그 당시에는 그렇다 치고 지금 이순간 그 지역의 사람은 아직까지도 거짓말쟁이일까요?

지금까지 아니다면 그렇다면 성경이 사기를 치는 겁니까?

거짓말쟁이는 그레데 에서만 살까요? 사실은 모든 인간은 거짓말 쟁이입니다.
그것도 항상입니다. 항상

그렇다면 성경은 모든 사람이 거짓말 쟁이다 그것도 항상 이라고 말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레데 라는 지역을 국한 시켜서 말하고 있습니다.

물론 성경 전체에서는 모든 인간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날 때부터 악하고 수에 칠 가치도 없다고 합니다. 거짓의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레데 라고 특정지역을 운운한 것은 그 당시의 복음사건이 그레데 지역과 연관된 사건에서 벌어지고 있는 무대로써 작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 우리는 그 그레데가 어디인지도 모르고 물론 검색하면 나오겠지요.
본적도 없고. 가본적도 없는 입장에서 이 말씀을 접하게 되면
특정 장소가 아니라 우리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되는 식으로 말씀이 쳐들어 오게 되는 겁니다.

자 그렇게 되면 우리가 졸지에 그레데 사람이 되어버리고
그레데 사람처럼 항상 거짓말쟁이인 존재가 되어버린 입장에서 말씀을 접하게 되는 겁니다.

마치 실로암 망대 (탑)이 무너져서 많은 사람이 다치거나 죽고 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실로암 무너진 상황과 연관이 없는 자들이 저 사람들은 저주 받아서 그렇다
재수 더럽게 없어서 그렇다 라고 하니까

졸지에 그 소릴 예수님이 듣고서는 그 다음은 너 차례거든 이라고 말해 버리면 뭐가 됩니까?

절대로 절대로 막살지 않을 거야 라고 다짐을 했는데 어쩔수 없이 안막살고는 못배기는 상황이 되어 버렸습니다. 거짓말 절대로 안할거야 했는데 거짓말 안하고는 못배기는 상황이 되어버렸습니다.(불의한 청지기 비유가 그러합니다. 기생 라합의 거짓말이 그러합니다.)

그레데 사람이 남의 사람 이야기 인줄로만 알았는데
정작 내가 그레데 사람 꼴이 되어버린 입장에서 거짓말 그것도 항상 즉 꼬리에 꼬리를 무는 돌려막기 거짓말인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는 연다발로 터져버리면 저 거짓말 한 놈을 능지처참하렷다? 라고 했던 다윗이 돌려막기 하다가 도리어 그 놈이 바로 너다 이 나쁜놈아 라고 했을때에

이것이 과연 다윗만의 이야기냐? 항상 거짓말 쟁이인 그레데 사람만의 문제냐 라는 것입니다.

내가 만약 ~~~~~~~ 우 우 우
항상 거짓말 할때면
누가 나를 건져내 줄껍니까?

결국은 이것은 비록 우리가 다윗과 같은 살인자요, 모태를 부정당해야 할 자요(욥), 그레데 사람처럼 항상 거짓말쟁이 임에도 불구하고, 차이내시고 빼내시는 작업이, 아무리 항상 거짓말이 만연해 있을지라도 그 빼내는 분리작업이 지금 현재도 벌어지고 있다는 겁니다. 그것이 은사라는 선물이다 라는 겁니다. 성령은 주무시지도 쉬지도 않습니다. 우리의 행함과 상관없이 말이죠. 마치 다윗이 내가 주께만 범죄했는데 나를 순전케 했다는 것과 같습니다. 그 밧세바사건 때문에 정직한 영이 아무리 들따 봐도 없었는데, 그 철저한 단절을 격고(화로다 나는 망하게 되었도다) 그 간격을 매울 길이 없는데, 아무것도 행한 것 없이(롬4장) 정직한 영을 주시더라 새마음을 주시더라 라는 겁니다. 그것이 성령이라는 선물(은사)입니다.

(딛 3:4, 개역) 『우리 구주 하나님의 자비와 사람 사랑하심을 나타내실 때에』
(딛 3:5, 개역)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딛 3:6, 개역) 『성령을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풍성히 부어 주사』
(딛 3:7, 개역) 『우리로 저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후사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딛 3:8, 개역) 『이 말이 미쁘도다 원컨대 네가 이 여러 것에 대하여 굳세게 말하라 이는 하나님을 믿는 자들로 하여금 조심하여 선한 일을 힘쓰게 하려 함이라 이것은 아름다우며 사람들에게 유익하니라』
(딛 3:9, 개역) 『그러나 어리석은 변론과 족보 이야기와 분쟁과 율법에 대한 다툼을 피하라 이것은 무익한 것이요 헛된 것이니라』


거짓말 때문에 재판관에게 간 이야기가 있습니다.

솔로몬 재판입니다.

두 사람 중 누가 거짓말 쟁이인가 는 관심 없습니다. 어차피 모든 인간은 거짓말하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그 거짓말 때문에 누가 죽었고 또 앞으로 누가 죽게 되는 음모가 그 배후에 가려져 있기 때문에 그 거짓을 밝히는 입장이 되고 만 겁니다.

빼도 박도 못하도록 말이죠.

그런데 재판 꼬라지 하고는 참으로 부정하고 부당하고 부조리한 불의한 판결을 내립니다.

마치 성의없듯이 당사자에게 섭섭할 정도입니다. 야들아 그만 싸워라 둘이 쪼개서 가지면 될 것 아니니?

여봐라! 당장 아기를 둘 로 갈라서 두 창녀에게 각각 나누어 주어라 이것이 공의다 공평

그럼요 그럼요 라고 한 쪽 창녀는 현명하신 판단입니다 라고 외치고 신나라 하면서 다른 한 쪽 창녀를 거봐 내가 뭐랬어 이 나쁜 거짓말 쟁이 창녀야!! 왕이시여 정말 공평하십니다.

그러나 다른 한 쪽 창녀는 청천벽력이 떨어져 한없이 무너집니다. 세상에나 세상에나 이런 부당거래가 어디있습니까? 당신 재판관 맞아요? 이럴수는 없습니다. 차라리 날 죽이고 제발 이 아이를 가르지 마세요. 날 죽이세요. 당신은 불공평 합니다. 하실 수만 있다면 제발 이 잔을 옮겨주십시오.

왕은 아까전만 해도 시건방지게 다리떨며 삐딱하게 앉아서 귀찮은 듯이 둘로 쪼개 줬뿌라 라는 태도를

급수정 하여서 눈빛을 예리하고 날카롭게 째려보면서 이 어미를 뚫어져라 보고 저 어미를 뚫어져라 쳐다봅니다.

하나는 신나는 표정이고. 또 하나는 썩어 뭉개진 마음입니다. 감히 고개를 못 듭니다. 자신 때문에 무슨 기구한 운명인지 아이가 죽어야 할 판국이니 말입니다. 그럴수는 없습니다. 차라리 날 죽여라 이놈들아. 그것도 재판이라고 하느냐? 차라리 날 죽여라.

신나게 웃던 한 쪽 창녀가 그래 그래 그렇게 발악해야지 어차피 판결은 결정났고
너 마저도 그렇게 막살기로 행패를 부리면 나야 일석이조고 큭큭큭 속으로 중얼거리면 웃겨죽는다고 배를 잡습니다.

이미 법은 결정났어. 넌 법을 너무 몰라
법 대로 해야지 법

얼마나 뛰어난 판결이니? 둘로 나누면 안 싸우고 좋잖아. 얼마나 공평해. 정의롭잖아.

[역시 하나님은 화평 화평 평강 평강의 하나님 이시로다. 주님을 찬양합니다.]

거봐 평강이잖아. 이 평강을 왕이 선물해 주는데 어서 받아야지, 감히 거부하면서 막살면 되겠니?

그런데 갑자기 왕은 정작 그 판결을 뒤 엎어버립니다. 자기가 판결한 그 판결을 깨고 다시 새로운 판결을 내립니다. 언약갱신처럼 말이죠.

약속을 깨는 겁니다. 그리고 다시 재판결과를 발표합니다. 저 웃는 여자를 죽여라.
(맞습니다. 스가랴 서에 나타난 여호수아 제사장의 더러운 옷으로 마귀가 고소하니까 마귀 보란 듯이 그 옷을 새옷으로 갈아입히는 여호와 하나님의 해학. 십자가(해학, 처음자리)는 그래서 미쁩니다.)

솔로몬 왕은 자기에게 막행패 부린 여인에게 재판의 승리를 안겨줍니다.
갑자기 그 여인이 부끄 부끄 부끄가 됩니다. 막행패 부렸던 것이 부끄러워졌습니다.

왕이시여 아니 아까전 까지는 아이를 죽이시라 하더니? 이제는 살리십니까?
제가 놀랬잖습니까? 그것도 모르고 욕했습니다. 미워했숩니다. 이제는 어찌할꼬? 어찌할꼬?

그러나 왕은 누구 구원해주고 살려주고 누가 죽는 것에 관심없습니다. 누가 거짓말쟁이고 누가 안막살기를 하고도 관심 없습니다.

자신의 지혜가 영광이 되는 것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흘리신 피만 관심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피만이 마귀 보란 듯이 흘리는 피 이기 때문입니다. 단번에

그 지혜가 부르짖음 즉 요청이 들어왔고
그 요청은 지혜에 딱 맞는 상한심령을 찾는 것입니다. 어찌하죠 어찌하죠. 나는 망했군요,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입니다. 주님께 행패부려 십자가에 못 박았군요. 형제들아 어찌할꼬? 그 자체가 성령이 임한 강림한 날 희년입니다. 나 용서 받았다. 이 내용을 어깨에 매고서 온 동네 구석 구석을 돌아다니는 겁니다. 베드로가 그 증거인입니다.

(행 2:37, 개역)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왕은 의인이 필요 없습니다. 법 잘 지키고, 안막살기하는 자는 필요없습니다. 죄인만 부르시는 왕입니다. 용서의 왕 중의 왕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긍휼만을 높이기 위함이다. (일만달란트탕감비유)

성령의 소욕은 피에 맞는 죄인만을 찾을 뿐입니다.

이 말이 얼마나 악마들이 듣기에는 기분나쁠까요? 그것을 증거하니 바로 반응이 오더군요. 얼굴 뻘개 가지고 말이죠.

단순한 노멀한 악마들이 아닙니다. 정의를 부르짖는 악마, 공의를 외치는 악마.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악마. 광명한 천사의 탈을 쓴 악마. 교회에서 시키는대로 다 했다고 자부하는 악마. 말씀을 꼬박 꼬박 다 지키는 악마. 내가 언제 아버지 말씀을 어긴적이 있습니까? 라고 따지는 탕자의 형인 맏아들 악마.

영화 시카고 라는 뮤지컬 영화가 있습니다. 그 영화에 나오는 주인공 여자는 마치 다윗처럼 살인죄를 저질러서 범죄하게 되었는데, 어떤 변호사를 만났는데 그 변호사는 자신의 변호실력만을 믿는 아주 불의한 변호사였다.(블랙잭 이라는 만화도 생각나네요) 그래서 이 둘의 만남이 결국은 해방(자유)로 이어지는데

문제는 뮤지컬 즉 쇼입니다. 쇼. 아예 노골적으로 딱 까놓고서 누가봐도 불의한 이 두 사람은 까놓고서 막살기를 자기유익을 쫏아 하고 있는데 정작 그것을 비난하는 주변의 정의로움과 올바름과 바르게 산다는 것을 추구하는 자들이 이 두 불의한 사람이 지나가는 곳마다 속내가 들추어져서 더 악한자임의 가면이 벗겨진다는 것을 누가 블로그에 영화평을 한 것을 봤습니다.

그러든 말든 둘은 그저 자기변호실력만 리차드 기어는 우쭐댈 뿐이고 또 르네 젤위거 는 남자 꼬시는 것 밖에 모릅니다. 아예 즐기고 있습니다 즐겨.

감옥 안에 있지만 할 것 다 하고 있고,
감옥 밖에서 손가락질하고 있는 자유하다는 자들은 정작 감옥살이처럼 이들을 주목하는 중독에 빠져있습니다. 완전 코메디죠 코메디(해학) 감옥속에서 나오는 소리만 귀를 쫑긋 내세우면서 말이죠.

주객이 전도되었습니다. 이것이 쇼입니다. 쇼. 뮤지컬의 무대요 배경입니다.

악마가 천사가 되어버리고 천사라고 빡빡 우기는 누가봐도 천사였던 자들은 악마로 역전되는
안과 밖이 뒤 바뀐 것처럼 말입니다. 팔을 어긋맞게 하십니다.

그래서 지혜는 우리에게 자신의 지혜만을 드러내기 위해서
십자가만을 드러내기 위해서
장난(해학=채널돌리기)을 치십니다. 즉 해석망상(거짓말)을 펼치십니다.
(열심이 특심인 나만 남았나이다. 어딜 장난질? 내 장난질이 더 재미있찌롱 7천명 남겼다. 엘리야는 외칩니다. 따봉 !!! 대따 최고 대따 최고 장난 아니다 따봉.)

[거짓말이] 보란 듯이, [거짓말을] 하십니다.
한 하나님(우상) 보란 듯이, 두 하나님이 증거하십니다.(제사장 하나님 제물된 예수님)

그리고 그 [거짓말이] 지켜보고 있는 바로 코 앞에서, [뒤로빼돌리기]를 하는 불륜을 펼칩니다.

그리고 드디어 재판관 앞에 서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그레데 사람은 항상 거짓말쟁이다 라는 말이 참되도다 할 정도면
결국 모든 인간은 항상 거짓말쟁이다 라는 말이 됩니다.

그리고 그 항상 거짓말쟁이 속에서 빼내시는 방법을 펼치시는데 그것이 십자가 라는 불의한 비리인 뒤로빼돌리기 입니다.

(딛 1:4, 개역) 『같은 믿음을 따라 된 나의 참 아들 디도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구주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
(딛 1:5, 개역) 『내가 너를 그레데에 떨어뜨려 둔 이유는 부족한 일을 바로잡고 나의 명한 대로 각 성에 장로들을 세우게 하려 함이니』


그 뒤로 빼내기가 바로 디도를 떨어뜨림입니다. 그레데 라는 동네에 말이죠.
그 이유는 바로 잡으라 라는 것인데 뒤로빼내기로 바로잡는겁니다. 그것이 바로 직분 곧 은사를 부여한 겁니다. 인간의 행함을 유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빼내기는커녕 도로 갇히는 꼴입니다. 오로지 불쌍히 여김 뿐입니다. 베드로의 장난으로 다시 돌아갈수 없습니다.(몇번 용서할까요?)(딛 3:5, 개역)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이러 이러한 자를 세우라는 것입니다. 왜? 그레데 라는 거짓말의 세계에서 빼내시기 위해서 말입니다. (저는 이 부분을 볼때에 사사(판관)들이 생각납니다. 참으로 어중이 떠중이를 다 세웠지요. 누가봐도 참 미쁘지요? 미쁠까요? 시험들기에 딱입니다. 입다라는 산적을 주일학교반사로 세우고, 삼손같은 기생오라비를 장로로 세우고 말이죠. 참 잘도 돌아가겠다 그죠?)

(딛 3:5, 개역)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딛 3:6, 개역) 『성령을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풍성히 부어 주사』
(딛 3:7, 개역) 『우리로 저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후사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딛 3:8, 개역) 『이 말이 미쁘도다 원컨대 네가 이 여러 것에 대하여 굳세게 말하라 이는 하나님을 믿는 자들로 하여금 조심하여 선한 일을 힘쓰게 하려 함이라 이것은 아름다우며 사람들에게 유익하니라』
(딛 3:9, 개역) 『그러나 어리석은 변론과 족보 이야기와 분쟁과 율법에 대한 다툼을 피하라 이것은 무익한 것이요 헛된 것이니라』
(딛 3:10, 개역) 『이단에 속한 사람을 한두 번 훈계한 후에 멀리 하라』

그런데 지금 현재로 따지면 정말 순수하게 그대로 행해보면
아무도 직분 받을자가 없습니다. 굳게 하기는커녕 다 허물어질것이 뻔합니다.

이 믿음 굳게 세워라 캐놓고 거짓말하는 창녀 라합이 예수님의 족보에 오르니
족보보고 실족하지 않겠습니까?

목사도 못 세울 판국입니다. 목사가 믿음이 있을 리가 있겠습니까?

거짓말 안하기 조차도 기본적으로 안되는 판국에

(딛 1:6, 개역) 『책망할 것이 없고 한 아내의 남편이며 방탕하다 하는 비방이나 불순종하는 일이 없는 믿는 자녀를 둔 자라야 할지라』
(딛 1:7, 개역) 『감독은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책망할 것이 없고 제 고집대로 하지 아니하며 급히 분내지 아니하며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구타하지 아니하며 더러운 이를 탐하지 아니하며』
(딛 1:8, 개역) 『오직 나그네를 대접하며 선을 좋아하며 근신하며 의로우며 거룩하며 절제하며』
(딛 1:9, 개역) 『미쁜 말씀의 가르침을 그대로 지켜야 하리니 이는 능히 바른 교훈으로 권면하고 거스려 말하는 자들을 책망하게 하려 함이라』
(딛 1:10, 개역) 『복종치 아니하고 헛된 말을 하며 속이는 자가 많은 중 특별히 할례당 가운데 심하니』
(딛 1:11, 개역) 『저희의 입을 막을 것이라 이런 자들이 더러운 이를 취하려고 마땅치 아니한 것을 가르쳐 집들을 온통 엎드러치는도다』

이런 자를 교회에 직분자로 세웠다고 자신있게 말한 교회는 그 어디에도 없는 현재의 실정입니다.

현재만 불가능한게 아니라. 그 당시도 마찬가지였다고 입니다.

왜 그런데 사도바울은 이런 것을 참으로 뻔뻔스럽게 외치고 있는 것일까요?
진짜 그런 사람이 있어서 눈에 보이는 그런 사람 믿고 그런 이야기를 한 것일까요?
아니면 다짜고짜 그런 사람 단 한 사람도 없어도, 말씀만 관심이 있기 때문에 말씀대로 외친것일까요?

사람이 말씀의 조건에 맞아서 외치거나 또는 직분으로 세운 것이 아니라,
딱 맞는 사람이 나타나서 아 이제 이 말씀을 외쳐도 안뻘쭘하겠지? 라고 해서 외치는 것이 아니라,
말씀 스스로가 그렇게 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인간은 그런 말씀에 부합될 수도 없을뿐더러 그런 직분의 역할에 맞는 조건을 갖출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없으면 더 잘 되었구요. 새로 맹글면 되지요 뭐, 말씀이 하시면 하는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그 은사는 이미 이~~~미 주어진채로써
저들과의 차이를 내어버립니다. 아무것도 한 것도 없이 말입니다.
맞습니다. 결국 상대적인 직분이요 상대적인 은사인데인간은 자기 속에서 자신의 조건을 찾을려고 하는 것이니 어지간히 미쁘겠습니다 그려?
3초 지나면 작심삼일이 무너지는데?

그래가지고 무슨 수로 거짓말 쟁이로부터 그레데에서 빼낼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미 빼내졌음을 누리는 것이 바로 은사라는 선물입니다.

그러면 당연히 따라오는 것이 있습니다.
사건입니다. 즉 충돌이요 싸움입니다. 즉 이질성이 발생했다는 뜻입니다.

한 집단 속에서 동질성의 요소가 있다면 분리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한 집단 속에 가두어도 이질성의 요소가 있다면
반드시 갈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혼입니다. 이혼. 파경. 분리. 갈라서기, 분쟁
때려죽어도 같이 못 살겠다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이라는 선물입니다. 은사죠.

그 갈라지게 하는 요소가 바로 은사입니다. 은사가 아니고서는 갈라지는 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은사는 싸우도록 만듭니다. 전쟁이라는 뜻입니다. (화평을 주러 온줄 아느냐? 검이다. 불질르러 왔다. 불화를 주러 왔다.(마 10:34, 개역)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눅 12:51, 개역)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쟁케 하려 함이로라』

아무리 쌍둥이 형제라도 약속이 한 쪽만을 집어넣으면 두 갈래로 쩍 하고 갈라지듯이 말입니다.

이 약속 때문에라도
안갈라지고는 못배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레데 사람의 항상 거짓말쟁이 라는 것은
약속 앞에서, 약속의 개입 앞에서 어떻게 갈라지는지를 보여주는 배경이 되는 것입니다.

거짓말쟁이 에게 이질적인 요소는 안거짓말 즉 참말일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참말쟁이 에게 이질적인 요소는 그렇다면 뭘까? 거짓말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왕이 아닌 일반백성들도 다 알고, 할줄아는 지혜라면
왕 만의 지혜는 무엇일까? 왕이 아니면 나올수 없는 지혜라면 뭘까요?

그것은 바로 거짓말쟁이에게는 더 거짓말쟁이로 그래야 부끄 부끄 부끄, 즉 꼬끼오 꼬끼오 꼬끼오입니다.
그리고 안거짓말쟁이에게는 더 나은 안거짓말쟁이로 그래야 부끄 x 3  꼬끼오 x 3입니다.
그 속에 교묘하게 감추인 악마성 원수성을 담는 닭 울음이다는 겁니다.
유대인 즉 시아버지 유다에게는 걸림돌 x 3 로써
헬라인 즉 이방인에게는 어리석음 x 3 로써 다가가는 겁니다.

가인의 잘 드린 제사에 더 나은 제사인 아벨이 제물되는 제사요.
애굽왕 지혜의 견고한 성전(수십년 지은)에 더 나은 성전인 3일 만에 세우는 제사요.

그것이 바로 다윗 왕이 알게된 지혜입니다. 그것이 표출 되는 것이 솔로몬 왕의 지혜입니다.
얼마나 성전 짖고파서 안달이 났던자 아닙니까? 그런데 결국 세워진 황금성전인 솔로몬 성전을 다 허물어집니다. 그것이 지혜가 하신 일입니다. 헛되고 헛되니 다 헛되도다. 백합화 보다 못한 것들아 ~~~~ . 그리고 유대인도 못 짖는 다윗 자손인 다윗의 주가 짖는 성전입니다.

주께서 내 주께 , 나를 원수 삼으시고 그런 원수된 나를 발등상(성전) 삼아 우편에 놓이시는,
그것이 바로 마귀 보란 듯이 세워진,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교회입니다.
(또 스가랴서 이야기 해야겠죠. 마귀가 아무리 고소 송사 밀까부듯이 조사해도
허물이 다 덮여진 새옷을 대제사장 여호수아에게 더러운 옷 벗기고 입히시는 겁니다.)

사랑은 모든 허물을 덮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소욕은 피에 맞는 죄인만 찾습니다. 누구 보란 듯이 ~~~~ 아에 약을 올려요 약을.

유대인에게는 율법을 넘어서야 하는 율법 외의 한 의로써의 지혜이어야 하고
동시에 그런 율법을 다 충족하면서도 즉 남을 사랑하는 것은 율법의 완성이어야 함이고

동시에 이방세계 즉 지혜로운 자의 지혜를 꺼꾸러 뜨리는 지혜여야 합니다.
이 두가지를 둘다 동시에 충족 시키는 지혜이어야 합니다.

역으로 말하면

유대인의 죄도 넉넉히 사하고 넉넉히 이기는 사랑이어야 하고
이방인의 죄도 넉넉히 사하고 모든 허물을 덮는 사랑이어야 합니다.
둘다 다 충족 시켜야 함과 동시에

둘 서로의 앙숙인 관계에 둘 다 양쪽으로부터의 공격을 시기를 질투를 받는 것이어야 합니다.

참 어렵다 그죠.

그럼 뭘까? 그런 지혜 뭘까요?

어렵게 생각할 것 없습니다. 아주 아주 쉽습니다.

어린아이도 다 아는 것이다. 그러나 어른에게는 숨겨진 비밀입니다. 비밀(수수께끼 장난)

(마 11:24, 개역)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하시니라』
(마 11:25, 개역)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마 11:26, 개역)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마 11:27, 개역)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그것이 바로 빈터입니다. 두 하나님이 (아버지와 아들 외에는) 만든 사건 십자가입니다.
휘장을 찢을자는 아들 예수님 뿐입니다. 낙랑공주 말이죠.

(벧전 4:8, 개역)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잠 10:12, 개역) 『미움은 다툼을 일으켜도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우느니라』

왕 자신을 찢는 것이다. 이것이 [거짓말]입니다. 이제 수수께끼 풀리셨죠. 누가 생각나나요? 삼손 그렇죠 딩동댕

에이 설마 왕이 자기자신을 찔러? 무슨 수로, 거짓말이야 !!
저들에게는 거짓말로 들려야만 합니다. 미련하고 어리석기는 말야 ~~~~~(너희는 못하나, 할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다 하십니다.)

그리고 다른 한쪽에서는 절대로 아니되옵니다 마마. 왕이 죽다니요? 절대로 아니되옵니다 마마 (졸지에 걸림돌이 되는 거북스럽게 한없이 거리끼는 것입니다. 부담 백배 천배 만배 땡땡땡 종이 울린다. 펀치 날리니 종이 울려버리는 바람에. 주여 주님이 종 울려버리면 우리의 행함은 뭐가 됩니까? 고정하소서 마마. 아니되옵니다 마마. 절대로 십자가를 지시면 안됩니다.)

그러나 왕의 지혜는 오로지 자신의 영광 밖에 관심 없다고 했습니다. 인간의 정에 안속습니다. 인간의 눈물기도라는 장난, 회개라는 장난, 금식이라는 장난에 안 속습니다. 도리어 그것들은 왕의 지혜의 그릇에 담겨 왕이 흘린 용서의 피에 발림당해야 할 것입니다.

붙잡든지 말리든지 욕하든지 비나얄 거리든지 오로지 푯대를 향할 뿐입니다.

그런데 이 두 세력에 갑자기 손을 잡고
유대와 로마가 손을 잡고 드디어 왕이 자기 스스로 죽겠다고 하니
이제야 우리 세상이 될 것입니다.

아들마저 죽이면 이 포도원은 우리 차지가 될 것입니다.

(마 21:38, 개역) 『농부들이 그 아들을 보고 서로 말하되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고 그의 유업을 차지하자 하고』
(마 21:39, 개역) 『이에 잡아 포도원 밖에 내어쫓아 죽였느니라』

(마 21:40, 개역) 『그러면 포도원 주인이 올 때에 이 농부들을 어떻게 하겠느뇨』
(마 21:41, 개역) 『저희가 말하되 이 악한 자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은 제 때에 실과를 바칠만한 다른 농부들에게 세로 줄지니이다』

(마 21:42, 개역)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 함을 읽어 본 일이 없느냐』
(마 21:43, 개역)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
(마 21:44, 개역)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저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하시니』
(마 21:45, 개역)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의 비유를 듣고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알고』
(마 21:46, 개역) 『잡고자 하나 무리를 무서워하니 이는 저희가 예수를 선지자로 앎이었더라』


왕의 지혜는 오로지 자신의 지혜의 영광에만 관심을 두는데 여기에 반드시 거짓이 딸려옵니다. 그 거짓을 통해서 영광받기 위함입니다. (애굽 군사를 통해서 영광받으셨듯이)

돌의 관심사는 깨뜨리고 가루로 만들어 흩어버리는 것만 관심있습니다.

마찬가지로 거짓의 관심사는 참말이냐 거짓이냐? 막살기냐? 안막살기냐? 그거 관심없습니다. 정작 관심사는 유업입니다. 소유물에만 관심 있습니다. 추상적인 어느정도가 거짓말인지? 어느정도가 참말인지? 그거 다 장난입니다. 어느정도까지가 안막살기고. 어느정도까지가 막살기인지 그거 다 쇼입니다. 말장난입니다.

유럽 곧 소유물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즉 악마는 인간만을 차지하면 됩니다. 그것 자체가 그들이 부여받은 역할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레데 에 디도를 떨어뜨려 놨습니다.

악마의 소욕이 있는 곳에 성령의 소욕을 떨어뜨려 놓았던 겁니다.

그 직분자들이 거짓말 단 한 개도 안하는 자인가? 하는자인가? 그거 관심없습니다.

판대기가 그런 사소한 것 따지는 판대기가 아닙니다.

악마의 소욕이 있는 판대기에 일부러 떨어뜨려놓은 겁니다.
두 소욕의 싸움 구조는 성령이 알아서 하지 내 소관이 아닙니다.

그래서 다윗이 내가 주께만 범죄했군요 나는 깨끗합니다.

지금 자신이 떨어뜨려진 판대기가 나의 사소한 감정인 개인살인사건이 아니라
판대기에 놓여졌다는 겁니다. 그러니 그것을 보기 위해서 사소한 것을 찢어버리는 겁니다.
그래서 눈에 확 드러나는 것입니다.

화로다 화로다 나는 망하게 되었도다

어 그런데 판대기가 달라졌네요.

그렇다 바로 그거다. 판대기에서의 두 소욕의 싸움판이 벌어졌는데
무슨 개인 사적인 구원 따지고 개인의 경건생활 따지고, 회개 금식 눈물 다 소용없다.
백날 해봐라 죽은 아기 살려낼수 있는가요?

어느 판대기에서 노는줄도 모르고 자꾸 사제생각을 하고 있죠.

(딤후 2:3, 개역) 『네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지니』
(딤후 2:4, 개역) 『군사로 다니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군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

그래서 은사를, 직분을 즉 성령의 소유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선물로 말이죠. 약속한 성령 말입니다.

나의 안막살기 그거 내놓으라고? 천만의 말씀!!
그렇다면 나의 막살기 정신을 매도하지 말라고? 그것도 천만의 말씀 !!

그런 것은 마귀가 비웃습니다.

정작 군사는 군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 분만의 막살기 입니다.

예수님의 막살기(거짓말)를 외칠줄 모르는 자는 그레데의 거짓말쟁입니다.

한쪽만 화나게 하는 것이 아니죠. 유대인과 이방인 양쪽다 화나게 하는 막살기여야 합니다.

안막살기는 유대인 저들의 주특기입니다. 종교꾼들의 특징입니다. 전혀 거리끼는 것이 없는 실족할 필요도 없는 것을 갖추는 것입다. 주요무기, 아이템

과연 누가 걸려 넘어지겠습니까? 안막살기가 걸림돌 입니까?

또한 안막살기는 이방인에게서의 지혜 중의 지혜입니다. 전혀 어리석음이 될수 없습니다. 다들 쌍수를 들고 환영하는 바 입니다. 욕하는 놈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니 싸울일도 없고, 사건도 발생할 이유도 없습니다.

그런데 사도들은 그런 이방나라에 너희가 죽인 예수 라고 퍼트리고 다니니 소동만 일어날 뿐입니다.

그래서 성령이 아니고서는
은사가 아니고서는(성령의 소욕)

이 피를 증거할 자는 아무도 없는 겁니다.

이 피는, 이 십자가는 자신과 딱 맞는, 딱 포개어지는 것을 즉 짝을 찾습니다.

(마 9:13, 개역)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바로 죄인입니다. 죄인만이 십자가에 못 박은 장대 높이 달린 예수님을 쳐다보고 상한심령이 된자입니다. 그것도 목 부러뜨림을 당해서 본 인자에게 달린 자신의 얼굴을 보게됨을 당한자 말입니다.

불뱀에게 물려놓고서도 물린적 없다고 그런 헛소리에 아예 귀를 기울이지도 않는 이방인과
또 불뱀에게 물렸는데 불뱀 쳐다보라고? 장난하냐? 약을 다오 기적을 다오 라고 악한세대가 구하는 표적을 구하는 자에게 요나의 표적은 자신의 장난(요나의 장난 = 나 자살했뿔래? 나 순교 하면 구원해 주겠지= 행함장난)을 죽어도 안 받아주시는 예수님의 장난(십자가=요나의 표적) 앞에서 거리끼는 걸림돌이 되는 것입니다.

누구 보란 듯이? 제대로 화를 낼 수밖에 없는 존재 보란 듯이 말입니다.

우리 속에 있는 원수성 악마성(항상 거짓말쟁이, 장난) 보란 듯이 ....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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