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의 소원

마가복음 2011. 7. 7. 14:06

죄의 소원

2011년 7월 7일 목요일 오전 7:59:05  김대식


(창 4:7, 개역)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가인의 제사, 형 에서, 그리고 사울 왕 등등

이들의 특징은 한마디로 선하다 라는 겁니다. 착하다. 그리고 하나님께 잘 할려는 자세.
정말 정성을 다하여서 제사를 잘 드렸다는 점입니다.

대립된 인물들 거론해 보면 거의 다 그런식입니다.
또 누가 있을까요? 두 아들 비유에서의 탕자의 형 맏아들 도 그러하구요. 참 착해요.

그런데 이들의 특징은 아무리 선한 모습을 완벽하게 갖추어도 정작
죄의 소원을 넘지 못하더라 라는 겁니다. 선을 행했다면 말이죠.
그런데 선의 모양은 갖추었을진정 정작 죄의 소원을 못 넘어섰다면
주위의 사람들로부터 아무리 선한 사람이다 라고 평생을 칭찬받아도 소용없는 헛짖입니다.

(딤후 3:5, 개역)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즉 이들의 하나님은 자신과 일치가 된 자신의 투사로서의 하나님인데
가짜하나님인 증거는 바로 유에서 유를 창조하는 방식입니다.
그것이 바로 차이가 나는 아벨의 제사를 통해서 나타납니다.

차이가 난다는 말은 저들의 방식에서 빼내기를 했다는 겁니다.
결국 아벨은 혼자가 아니였던 겁니다. 누가 개입을 했습니다.
그래서 아벨의 제사는 차이가 날 수 밖에 없습니다.
참하나님의 제사 방식은 바로 간격을 벌렸다가 다시 그 간격을 좁히는 방식입니다.
즉 무에서 유, 아무도 따라하는 것 조차도 불가능한 간격벌리기죠? 단절입니다.
다시 그 벌어진 간격을 좁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연합이라고 합니다. 세례. 할례. 십자가. 빈터. 처음자리 말이죠.

즉 죄의 소원이라는 간격을 역시나 다윗이나 베드로나 아벨이나 다 격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부에서 율법 외에 한 의가 개입함으로써 그 간격이 벌어졌다가 다시 좁혀지는 겁니다.

아벨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간격이 생깁니다.
이것을 가인은 넘어설수가 없는 겁니다. 그래서 더 나은 제사 라고 합니다.

형 에서는 아무리 품성 좋고 가족들에게 기쁨이 되는 사냥한 고기로 아비를 기쁘게 할지언정
정말로 장자 답게 행동할 지언정
형 에서에게는 아무리 해도 죄의 소원을 못 넘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아무리 못때빠진 약탈자 사기꾼이고 남도 속이지만 지도 속고 하지만
동생 야곱에게는 형 에서 에게는 없는 것이 있습니다. 죄의 소원을 넘는 겁니다.
바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요셉이 있는 겁니다.

사울 왕은 모든 인간들의 선택에서 왕이 되었습니다. 적어도 왕이란 비교대상에서 밀까부듯이 초정밀 조사 하여서 하자가 없고 실수가 없는 인물이어야 함을 전제로 한 선택입니다.
누가 생각납니까? 맞습니다. 가인의 제사가 생각납니다.
그런 초정밀 조사를 통해서 진정한 합격품의 종결자로써 왕이 백성들의 손에 의해 세워집니다.

그러나 정작 주님은 뒤로 빼돌리는 인물을 따로 구축합니다. 다윗입니다.
다윗은 그야말로 하자 품입니다. 불량품입니다.
나중에 어른이 되어서 철 좀 들어볼려고 하니까
그 불량품이 어딜 가겠습니까? 죄의 소원을 지가 지 힘으로 이겨볼려고 하니 웃기는 거죠.
그래서 동산 중앙에 가장 잘 보이는 선악나무를 심어서 먹음직 보암직 지혜롭게할 탐스러움을 두니까 따먹었듯이, 얼른 여인을 취하고서는 정작 율법의 수호왕 노릇을 하고 있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주님께서 내어버려두시지 않으시고 간섭하십니다. 너 죄의 소원 니 손으로 해결할려고 해? 오냐 어디까지 가나 보자. 하고서는 연달아 쓰리 직구를 던지니 손도 못써보고 아웃 됩니다.

죄의 소원을 내 힘으로 해결할려고 했습니다. 주여 제가 주께만 범죄했사오니 함 봐주세요.
오냐 봐줄게. 죄의 소원은 내 소관이야. 너 소관이 아니야.
라고 말도 안되는 엉터리로 예수님의 족보에 진루 하더라 진출하더라 말이죠.
말도 안되는 엉터리 뒤로빼돌리기 합격입니다.

사울 왕은 백날 지 혼자 해야 하는데
다윗 왕은 백날 지 혼자 하던 것 다 빼앗기고 둘이 짜고 치는 고스톱으로 반칙으로 다 이기는 겁니다.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즉 사울은 아무리 성령을 맛보아도 도로 자기가 그 자리를 차지해 버리는 죄의 소원이
자기를 자기가 장악하고 있지만

다윗은 무슨 짖을 해도 주님이 차지 하고 있으니
그 간격 벌렸다가 다시 좁혀지는 희생안타 (성령의 놀라운 탄식 : 상한심령) 덕분에 예수님의 족보에 정식도 아닌 뒤로빼돌리기로 들어가게 되는 겁니다.

그래야 정식으로 들어가지 않은 것에서 마귀 보란 듯이
마귀들이 여전히 활동하는 역할이 주어짐으로써 그 근거로 예수님의 선하심이 높여지고 영광이 되는 겁니다.

얼레리 꼴레리 정식으로 못들어갔데요. 뒷문으로 들어갔데요. 라는 놀림 비아냥 속에서 말이죠.

마귀의 소원이 덮친자는 정식으로 들어갈려고 발악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안막살기 운동입니다.

성도란 독자적인 표현이 아닙니다.
상대적인 표현입니다.
세상사람과의 차이성의 표현으로써 그 속에서 빼내었다는 겁니다.
두 집단이 있는데 분리 되어 있는데 그 둘 중에 하나를 택했다는 것이 아니라.
한 집단 뿐인데 그 속에서 빼내기를 해서 차이가 생겨났다는 뜻에서 성도입니다.
성도는 독자적인 표현이 아니다는 겁니다.

그런데 정작 성도가 막살기 라는 표현을 이해를 못하고 있습니다.

막살기란 안막살기 속에서 빼내었다는 뜻입니다. 죄인이라는 의미와 같습니다.

심지어 죄인이라는 의미 조차도 성화론자는 새생명운동본부는 말귀를 못 알아먹습니다.

상대적인 의인에게서 빼돌렸다는 겁니다. 오죽하면 도둑이라는 표현을 예수님 자신을 도둑으로 묘사했을 정도이니 말이죠.
그러니 고만 고만 죄 죄 죄 그만캐라 라고 귀를 막는 이유가 그런 겁니다.
어지간히 깨끗한가 봅니다. 더러운 부정적인 단어를 입에 담기 싫타 라는 결백증환자처럼 말이죠.

베드로에게는 가룟유다에게는 없는 것이 덮쳤습니다.
둘 다 자기 열심히 예수님을 사랑할려고 무지 무지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둘 다 죄의 소원을 넘기에는 택도 없습니다.

다만 베드로에게만 그 간격을 꼬끼오로 벌려 버리시고 다시 십자가의 죽음으로써 좁혀 버리십니다.

이것을 욥기로 치면 엘로힘 하나님과 여호와 하나님의 차이입니다.
한 개의 하나님과 두 개의 하나님의 차이입니다.

두 개의 하나님이란 두 개의 점을 찍는 하나님이다 라는 뜻입니다. 이중분절의 하나님
즉 십자가의 죽음 점을 찍고 부활의 점을 찍는 이 분이 선하다 라는 겁니다.
(자신이 세운 언약을 자신이 깨고 = 언약깨기, 다시 새로운 언약으로 자기가 다 이루는 = 언약갱신 하나님 이것을 배신이미지 라고 합니다. 쉬운설명으로 낙랑공주 휘장을 찢는. 즉 사랑이미지입니다. 자기자신을 찢는 자기를 부인하는, 하나님(인간)을 부정하는 예수님.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 이것을 선하다 라고 합니다. 인간에게는 반드시 악하다 이지요. 자신들을 허물어 버리니까요.)

다른 선은 없습니다. 바보들. 안막살기가 선한게 아니다니깐요.
선함이란 두 개의 점을 찍는 것을 선하다 라는 겁니다. 그리고서는 내용물을 채웁니다.
전쟁을 통해서 즉 소욕을 통해서. 광야는 그 싸워 이긴 전리품을 채우는 겁니다. 원망담기죠.
(원망한 세 가지 물증, 깨어진 십계명 두 돌판, 만나를 담은 항아리. 아론의 싹난 지팡이)

그 증거를 앞장세우는 겁니다. 이것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이 눈에 아무 증거 아니 보여도 믿음만을 내세웁니다.
그래 나 주께만 범죄했다. 우짤래 우짤래 뭐 뭐 뭐 그러나 주님은 날 깨끗케 했다. 우짤래 뭐 뭐 뭐
참 뻔뻔하지요.

그래서 동시성이라고 했습니다.
간격을 벌려서 아무도 못 들어오게 함과 동시에 (죄의 소원 덮친 가인은 때려죽어도 못 들어오도록)
간격을 좁혀서 성령의 탄식 즉 뒤로빼돌리기로만(아벨: 허무) 들어가게 되는 예수님족보 라는 겁니다.

예수 안 이라는 겁니다.

오호라 나는 망하게 되었구나 곤고한 자로다. 간격 벌렸죠.
예수 안에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 간격 좁혔죠.

이 무슨 해괴망측한 소리입니까? 죄의 소원인 인간의 언어에서는 구사할수 없는 언어입니다.
수수께끼인 비밀이기 때문입니다. 두 점을 찍다니?

박윤진 성도님이 말했듯 언어란 욕망의 주체를 드러낸다고 했습니다.
소욕(욕망)입니다.

육의 소욕의 언어 속에서 성령의 소욕의 언어가 말이 되지도 않는 모순 그 자체, 거짓 그 자체입니다.

육의 소욕이 들끓는 속에서 사랑과 믿음 이라는 용어가 남발할 때
그 소리를 할 줄 모른다고 얼마나 비아냥 거리겠습니까?

성령의 소욕은 피에 맞는 죄인만 찾습니다.

베드로가 그 소리 남발 하다가 작살이 났습니다. 어딜 사기를 치냐 말이죠.
사단아 내 뒤로 썩 물러가라 라고 말이죠.
(그리고 예수님을 세번 부인한 그 죄책감은 이미 인간으로서의 한계를 넘어설 정도입니다.
그 어떤 죄책감도 넘어서지 못합니다. 잊지를 못합니다. 삭제는 사랑뿐입니다. 외부에서 찾아오심 뿐입니다.
눈물 많이 흘려도 죄를 씻지 못합니다. 믿으면 됩니다. 주님이 사랑하시면 말이죠. 그래서 사랑하실려고 3가지 물증을 잡는 겁니다. 너 쪽에서의 사랑은 어차피 죄의 소원도 못 넘고 죄책감도 그 죄책감은 결국 살인의지이니까 못 넘기에 포기하라고 너의 사랑을, 모호한것, 포기하라고 잡은 증거물입니다. 누구 보란 듯이 마귀죠, 마귀)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드로에게 두 개의 점이 찍히는 사랑이 덮쳐집니다.
분명히 꼬끼오 세 번 했는데 그래서 그 간격이 벌어졌는데
다시 그 간격을 좁히는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는 음성이,
얼굴이 덮쳐집니다. 그 얼굴을 얼굴과 얼굴이 만나는 겁니다. 부분으로 보던 것 다 물러가는 겁니다. 모호한 의문의 것이 다 물러가고 실상을 비로소 만납니다. 실상이 덮친자에게는 이제 겁이 없죠. 사랑은 두려움이 없죠. 교회라는 그림자가 아무리 공갈협박해도 안속습니다. 실상이 덮쳤는데요 뭘?

이런 아들의 소원을 우리가 무슨 수로 조작해서 나를 내가 내 스스로 뒤로빼돌리기를 할수 있겠습니까?

(마 11:25, 개역)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마 11:26, 개역)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마 11:27, 개역)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마 11:28, 개역)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해도 소용없습니다. 어차피 참 잘 드린 제사를 자기 스스로 배반 배신 때려야 하기 때문에 그 모순성을 넘어서거나 극복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막살아라는 겁니다. 예수 안에서 말이죠.

그것도 독자적인 표현이 아니라. 누구 보란 듯이 네 맞습니다.
죄의 소원 덮친 인간들(악마) 보란 듯이 말입니다.

그래야 착한 인간들이 갑자기 강퍅해 지는 악마성이 드러날 것 아닙니까?

상대적인 의미이기에

그래서 죄인은 그 성령의 은사 때문에 전쟁의 촉발점으로써의
눈에 보이지 않는 두 세계의 전쟁을 이 땅에 가시화 시키는

뻔뻔스러운 막살기(탄식=십자가=뒤로 빼돌리기)를 몸에 지니는

세상의 지혜가 해석할 수 없는 수수께끼입니다.
유대인의 기적이 먹혀들지 않는 도리어 역으로 걸림돌이 되는 요나의 표적입니다.

십자가를 헛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 말이죠.

(고전 1:17, 개역)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침례를 주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케 하려 하심이니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고전 1:18, 개역)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이 더 나은 선을 마다하고, 안쳐다보고
자신의 선함으로, 그것도 모양새만 그럴싸 하게 갖춘 또 미흡한 선을 어줍잖게 갖출려고 안막살기를 하겠다는 심뽀야 말로 가증한 것을 성전에 가득채우는 것이 아닐까요? 그것도 조심 조심하면서, 두려워 떨면서. 정결을 갖추고, 말함부로 하지않고, 정성을 다해서 바치는,

백날 해도 두 개의 점 사이의 3일 꼬기오 세 번(부정한 물증- 도장 도장끈 지팡이)을 못 넘습니다. 죄의 소원 못 넘어요. 선하지 않기 때문이요. 선한 모양새를 금박으로 입힌 가짜입니다. 선한 것을 내놓아야지요. 맞습니다. 없습니다. 그래서 감히 고개도 못 듭니다. 아무것도 한게 없거든요. 안막살았다는 것이 내놓을 꺼리가 안됩니다. 그게 무슨 자랑이라꼬?

(짝이미지가 있어야 합니다.
아벨에게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제사가 짝으로 멀리 간격이 벌어져 있지만 주 안에서는 간격이 없는 하나된 짝입니다. 믿음으로 말이죠.
동생 야곱에게는 요셉이라는 짝이 있습니다. 죽었다가 살아난 사랑하는 여인에게서 낳은 요셉 말이죠. 그 요셉이 글쎄 은잔시험을 통해서 3가지 시험으로 다말사건을 물증으로 잡잖아요.
다윗은 잘 아실테고 짝이 있습니다. 여디디야 라는 3가지 부정을 담은 짝이 있습니다.
베드로는 꼬끼오 죠. 우리도 그 3가지 물증으로 간격을 마귀보란 듯이 벌리고, 단절, 다시 그 단절 속에서 십자가의 피로 좁히는 주님의 사랑이 탄식이(뒤로빼돌리는 부정이) 주님의 부활하심(막살아낫뿌심-인간 허락도 없이 무덤 벌컥 벌컥 여시는) 빈터를 처음자리를 마련하시는 겁니다. 새 영을 부으시리라)

탕자는 아무리 봐도 세리는 아무리 봐도 다윗은 아무리 봐도 자기에게서 선이 나오지 않음을 처음 안 겁니다. 그래서 원뿌리를 뽑아달라고 근원자리를 날려버리는 폭격요청을 합니다. 생일을 저주하고, 모태를 저주하고, 처음부터 잘못 되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처음자리를 갈아 없어버립니다. 상한심령으로 교체 하는 것이 성령의 탄식입니다. 십자가 라는 처음자리로 그 빈터로 몰아가도록 기도 합니다.

왜? 기도 외에는 안되니까 (귀신 쫏아내 주세요. 나 라는 귀신을 멸하소서 라고)
정직한 영, 새 영이 없음을 알고, 십자가를 거두지 마옵소서 라고, 요청하는 겁니다.

(시 51:10, 개역)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시 51:11, 개역)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헐라 헐라 헐라 나를 헐라 ~~~~~

(요 2:17, 개역)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
(요 2:18, 개역) 『이에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예수께 말하기를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뇨』
(요 2:19,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요 2:20, 개역) 『유대인들이 가로되 이 성전은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뇨 하더라』
(요 2:21, 개역)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ps

11-07-07 13:54    

간격을 좁힌다? 약간 좀 표현이 어설픈데 그냥 그 두 간격 사이에, 빈터 그대로를 밀어붙이면 다들 쭐꾸덕 미끄러지겠지요. 아무도 그 미끄러운 빈자리에 앉았다가는 실족케 넘어질 뿐입니다.

그러나 사랑하시는 자는 그 빈터 속에서 풍덩하고 빠지면 넉넉한 사랑이 넘치겠지요. 꽉찬 느낌처럼 말이죠. 매일 떨어지는 만나는 부족하지도 않게 일용할 양식처럼, 심지도 않았음에도 공짜로 누린 그 끊을수 없는 사랑을 받았던 것처럼 ... (미끄러지든 발가벗겨지든 미말에 둔 구경꺼리가 되든 말든 상관없이)

죄의 소원이 우리를 늘 끊고자 도살할 양 같이 여겨도 그 십자가 사랑에서 끊어자 없듯이

(롬 8:35, 개역)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협이나 칼이랴』
(롬 8:36, 개역)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롬 8:37, 개역)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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