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28 : 어린아이와의 전쟁

어린아이와의 전쟁 VS  누가 크냐

2011년 7월 7일 목요일 오전 11:46:20  김대식


(막 9:33, 개역) 『가버나움에 이르러 집에 계실새 제자들에게 물으시되 너희가 노중에서 서로 토론한 것이 무엇이냐 하시되』
(막 9:34, 개역) 『저희가 잠잠하니 이는 노중에서 서로 누가 크냐 하고 쟁론하였음이라』
(막 9:35, 개역) 『예수께서 앉으사 열두 제자를 불러서 이르시되 아무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사람의 끝이 되며 뭇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하시고』
(막 9:36, 개역) 『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안으시며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막 9:37, 개역)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
(막 9:38, 개역) 『요한이 예수께 여짜오되 선생님 우리를 따르지 않는 어떤 자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 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를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
(막 9:39, 개역) 『예수께서 가라사대 금하지 말라 내 이름을 의탁하여 능한 일을 행하고 즉시로 나를 비방할 자가 없느니라』
(막 9:40, 개역)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니라』
(막 9:41, 개역) 『누구든지 너희를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가 결단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막 9:42, 개역) 『또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바다에 던지움이 나으리라』
(막 9:43, 개역)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버리라 불구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
(막 9:44, 개역) 『(없음)』
(막 9:45, 개역) 『만일 네 발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버리라 절뚝발이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막 9:46, 개역) 『(없음)』
(막 9:47, 개역)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빼어버리라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막 9:48, 개역) 『거기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막 9:49, 개역) 『사람마다 불로서 소금 치듯함을 받으리라』
(막 9:50, 개역)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하시니라』

 

인간은 점점 자라면서 악마라는 얼굴임이 밝혀 집니다.
그러나 그런 악마의 얼굴임을 부인하고 그저 어릴적의 순수했던 자신의 얼굴을 찾고자
소위 행복을 찾고자 오늘도 부지런히 하루 하루를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보니 어제 행복이라는 한국영화를 봤습니다.
보고 난 뒤에 요양원을 찾는 제 모습이 한심스러웠습니다.
올 겨울은 좀 따뜻한 곳이 있으면 혹시나 해서 말이죠. 백날 해보세요 되나?

그런데 그 영화를 보니 이 말씀과 너무 잘 맞습니다.
행복은커녕 인간은 개 버릇 남 못주도록 되어 있습니다.

담배를 40년간 피워온 사람이 무슨 수로 담배를 끊겠습니까?
인간은 어리석습니다. 끊는다는 것이 말이 안됩니다.
담배가 그 인간을 놓아주어야 놓여짐을 당하는 겁니다.
그것도 모르고 담배 끊었다고 간증하고 돌아다니는 것은 다른 이윤이 있기 때문이지
담배랑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면 담배가 비웃죠.

술을 끊겠다고요? 말도 안되는 소리죠. 죄의 소원을 끊겠다고요. 죄 그 자체인 인간이 무슨 수로 죄를 끊겠습니까? 죄가 비웃습니다 죄가.

앞의 사건은 왜 우리는 귀신을 못 쫏아내느냐 라는 사건이였습니다.
오늘 본문은 누가 크냐 라는 싸움이 벌어지는 사건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싸움이 아닙니다. 전쟁도 아니고요.
진짜 전쟁을 주님쪽에서 제시 합니다.

어린아이를 누가크냐 라는 제자들의 논쟁 속에 집어넣습니다.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라

라는 아주 이상한 소리를 하십니다.

어린아이 영접은 곧 예수님 영접이고
예수님 영접은 예수님 영접이 아니라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을 영접한다.

여기서 부정의 단어가 있습니다. 이것이 무슨 의미냐 라는 겁니다. 마치 수수께끼 같습니다.

이 말은 역으로 추적해서 들어가면

인간은 어린아이 하나도 영접할 마음이 추호도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영접할 리도 없다는 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너희는 너희 자신만을 영접하기 때문에 나오는 결과는 누가 크냐 라는 것 뿐이다 라는 겁니다. 그러니 그것이 과연 섬김이라는 은사와 곧 성령의 소욕에 전쟁의 상황에 놓여질 육의 소욕이 아니냐 라는 겁니다.

그 전쟁이 바로 어린아이와의 전쟁입니다. 성령의 소욕의 전쟁 방식이 바로 요나의 표적의 방식인 십자가 이듯이

어린아이와의 전쟁하는 방식으로 너희들은 대치된 상태다 라는 겁니다. 즉 너희는 마귀다 라는 겁니다. 마귀가 아니고서야 누가 크냐? 라는 싸움을 할 리가 없습니다.

결국 섬김이란 어린아이 하나를 집어 넣는 겁니다. 무능과 어리석음과 걸림돌을 집어넣는 것이 섬김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딴소리 합니다. 아니 예수님 그게 아니라. 귀신을 내어 쫏는 사건을 보고 따라하고 흉내내어서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쫏아내었지만 정작 우리와는 함께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못하도록 금하였습니다. 예수님 이름을 도용한 저작권 훼손 문제이니 막아야 합니다.

(막 9:38, 개역) 『요한이 예수께 여짜오되 선생님 우리를 따르지 않는 어떤 자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 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를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

(막 9:38, 공동) 『요한이 예수께 "선생님, 어떤 사람이 선생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보았는데 그는 우리와 함께 다니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그런 일을 못하게 막았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막 9:38, 한글킹) 『요한이 주께 대답하여 말씀드리기를 "선생님, 우리를 따르지 않는 어떤 사람이 주의 이름으로 마귀들을 쫓아내는 것을 보았는데, 우리를 따르지 않는 사람이기에 못하게 하였나이다."라고 하니』

그런데 예수님은 금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막 9:39, 개역) 『예수께서 가라사대 금하지 말라 내 이름을 의탁하여 능한 일을 행하고 즉시로 나를 비방할 자가 없느니라』
(막 9:40, 개역)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니라』
(막 9:41, 개역) 『누구든지 너희를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가 결단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막 9:42, 개역) 『또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바다에 던지움이 나으리라』

도리어 우리를 위하는 자 라고 하십니다.

이 말은 참아이러니 하게도 제자들 지들은 저작권 훼손 마음대로 해 놓고서는 말이죠. 남들이 정작 하는 것은 배아픈 겁니다. 그래서 섬김이라는 것은 독자적인 자신들의 행동에서 찾아야 한다는 취지가 아니라. 그렇게 되면 경쟁이 되죠. 누가 크냐? 누가 근육이 더 발달 되었느냐? 누가 더 많이 그 근육을 많이 사용하느냐? (그러니까 누가 크냐 라는 싸움 뿐입니다.)

그런 취지의 섬김이 아니라. 판대기를 설명하기 위해서 어린아이를 중앙에 놓고서
섬김이라는 의미를 영접이라는 표현으로써 판대기를 설명합니다. 판대기 즉 구조죠 구조.

(막 9:41, 개역) 『누구든지 너희를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가 결단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막 9:42, 개역) 『또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바다에 던지움이 나으리라』

영접(대접)은 곧 실족이라는 상대적인 의미로 다시 재설명 됩니다.

즉 뭡니까? 지금 제자들의 누가 크냐 라는 싸움이 이미 실족케 하고 있는 모습이다는 겁니다. 개개인의 삶을 따지고 있으니 말이죠.

아 그럼 실족케 안하도록 해야지? 안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더 나아가서 영접해야지 아이들아 나는 너희들을 앞으로 영접할게?

그런 말이 아닙니다.
개개인의 행동에 대한 문제를 지적하는것이 아닙니다.

실족케 할 수 밖에 없는 너희의 모습을 지적받는 것이 바로 어린아이를 하나 세워 지적하시는 예수님의 사랑이 섬김이다는 겁니다. 즉 부정적집단화 입니다. 개인 한 사람 한사람을 따지는게 아니다. 전체를 부정화 시키는 성령입니다. 판대기 협곡을 고르게 평탄케 하는 작업인 겁니다.

우리는 그렇게 예민하게 살수 없습니다. 육의 소욕에 이미 갇혔기에 누가 크냐 라는 생존경쟁 속에 살고 있습니다.

그렇기 떄문에 어린아이 라도 세워서 빼내시겠다는 겁니다. 그것이 판대기입니다.
너는 그 판대기에 갇혔지만
즉 죄의 소원이라는 판대기에 갇혔지만
이 섬기는 자 예수님의 섬김 때문에
그 판대기 육의 소욕에서 빼내어서 다른 판대기 성령의 소욕에 옳기겠다 라는 겁니다.

아 그러면 누가 크냐 싸움 안하겠네요?
아닙니다. 누가 크냐 싸움 안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어린아이가 되어 실족케 되어 연자맷돌이 목에 달리워 빠져야하는 자가 된다는 겁니다.
본인이 어린아이로 인해 빼내임을 당했듯이 동일합니다. 이것은 행함문제가 아니라 믿음문제 입니다.
성령이 임한자는 결국 어린아이와 같은 자 이기 때문에 육의 소욕과 부딧히는 대립적인 존재가 된다는 뜻입니다.
(누가 크냐 라는 어른의 상대적인 의미로써의 어린아이 이듯이 말이죠.)

이것이 두 소욕을 드러내는 방식인 판대기입니다. 섬김입니다. 은사인 선물입니다.
(성령은 부정적집단 판대기 입니다. 죄라는 육을 담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육의 소욕은 죄의 소원처럼 선함만을 갖추어야 겨우 겨우 가리우는 겁니다.
그것도 가렸느냐 라고 확 벗겨버리는 겁니다. 무화과 나뭇잎을 벗겨서 가죽옷으로 하듯이 그리스도의 옷이 아니면 다 벗겨버리는 겁니다.)

도저히 죽었다 깨어나도 우리는 섬기기가 아예 안되는 자입니다. 그럼요 우리는 못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하십니다.
할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자들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다. 하셨습니다.
이것을 아예 흉내낼 생각 마세요. 자기가 자기를 빼돌릴 생각도 마시고요.
그냥 덮치는 겁니다. 우리는 이미 어린아이를 실족케 했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밖았습니다. 그 어린아이 되셔서 실족케 되어 연자맷돌에 달려 빠져죽은 예수님이 우리를 다시 살리렸습니다. 그래서 두 점을 찍는 겁니다. 어린양되신 주님이 말입니다.

어린아이 영접은 나를 영접이고 나를 영접은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한다 라고 이 아니요가 뭐냐 하면

두 점을 찍는다는 뜻입니다. 빈터 입니다. 자기부정. 이중분절(바닥의 바닥)

인간의 언어 공식에서는 도저히 풀리지가 않는 소리입니다.

뭐 역사적 해석? 뭐 해석맥락? 뭐 해석 범주? 백날 동원해 보세요 풀리나?
주께서 내 주께 라는 말도 유대인 성경박사들이 못 푼 판국에 과연 지금까지의 해석에 풀렸나요?

[주께서 내 주께] 풀어보세요.

앞의 주가 긍정이 되지 않는 이상 뒤의 주가 나올수가 없는데
어떻게 앞의 주가 부정이 되어야만 뒤의 주가 성립이 어떻게 되느냐 말이죠.

말도 안되죠 말도.

즉 쉽게 말해서 예수 믿습니다. 믿는다 라고 말했으면 적어도 산을 옮길줄 알아야 합니다.
그것도 겨자씨 만한 믿음입니다. 큰 믿음 필요도 없습니다. 겨자씨 만한 아주 작은 믿음입니다. 어린아이입니다. 어린 믿음.

그런데 인간들은 저거들끼리 믿음이라고 추겨세워주면서 교회에서 대화를 한다 말이죠. 예수님 앞에서는 또 안그러척하고서 또 인간끼리 있으면 또 달라지고.

지금 그래서 제자들 끼리 싸움이 벌어진 겁니다. 누가 크냐

이 얼마나 우리를 제대로 지적해주시고자 한 들추어내주심 아닙니까?
지적 받으면 됩니다.

그 섬김이 그 지적이 그 영접이 바로 짤라내기 라는 할례입니다. 십자가입니다.
그것이 아니고서는 연합 즉 이 소리가 무슨 소리인줄 모르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짤려서 수치가 물러간 할례당한 입장에서 보니 비로소 연합 즉 세례가 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어린아이를 세우심이 마땅한 겁니다.
그리고 어린아이를 영접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소욕 전쟁이라는 판대기에 성령의 소욕인 어린아이를 집어 넣으심으로써
죄를 짤라내시는 방식입니다.

인간이 왜 크고자 할까요? 이유는 딱 하나입니다.
가인의 제사처럼 제사 잘 드릴려고입니다.
사울 왕처럼 전쟁을 잘 이겨서 이스라엘 왕 다운 왕이 되고픈 겁니다.
형 에서처럼 형다운 형 되고픈 아비 마음에 쏙 드는 장자가 될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맏아들처럼 아버지 말씀 단 한번도 어긴적 없이 아버지를 잘 섬기고파서입니다.
청년 부자도 동일하죠. 계명 단 하나도 어릴적부터 어긴적 없이 지켜서 앞으로 더 잘지키고파입니다.

문제는 이것이 모두다 죄의 소원 즉 넘지 못하는 짖입니다.

(창 4:7, 개역)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이것을 다른 말로 독자성입니다. 독자성
구지 아버지의 긍휼이 필요없이 자신이 할 수 있수 있다는 겁니다.
아버지의 불쌍히 여기심이 매일 매일 필요없이, 은사를 안 주셔도 혼자 할 수 있다는 독자성입니다. 그것이 바로 악함입니다. 악함

그런데 예수님은 그 악함에 차이나는, 독자성에 차이나는,
연줄을 이야기 합니다. 짝 줄, 수갑.

도저히 불가능한 예수님을 죽인, 어린아이를 물에 빠뜨려 죽이는 점 하나를 찍고
그런 도저히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 없는 죄의 소원에 갇힌 기정사실을 밝혀내시고서는
말도 안되는 뒤로빼돌리기의 합격이라는 점을 찍어서

그 두 점의 간격을 아무도 못 믿도록 벌려놓고서는 엉뚱한 놈에게는 안믿고는 못배기도록 그 간격을 좁혀서 공짜로 주시는 겁니다.

이 방식 외에는 다른 방식의 사함은 없습니다. 피흘리심 뿐입니다.
이 피흘리심의 어리석은 방식만을 확장 증식 시키는 것이 바로
섬김입니다.

이 성령의 소욕이 아니고서는 주님의 섬김을 받을 길이 없습니다.
우리 보고 섬기라는 소리가 아닙니다.

매일 매일 어린아이 소자를 연자맷돌에 달아 빠뜨려 죽이는데 뭘 섬겨요?

그 어린아이의 섬김을 받으라 라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찍어내는 짤라내는 수치를 물러가게 하는 방식이다는 겁니다. 할례죠.

(막 9:43, 개역)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버리라 불구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
(막 9:44, 개역) 『(없음)』
(막 9:45, 개역) 『만일 네 발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버리라 절뚝발이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막 9:46, 개역) 『(없음)』
(막 9:47, 개역)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빼어버리라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막 9:48, 개역) 『거기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막 9:49, 개역) 『사람마다 불로서 소금 치듯함을 받으리라』
(막 9:50, 개역)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하시니라』

손을 찍어내고, 발을 짤라내고, 눈을 뽑아내라는 겁니다.
우리 손으로 못하니까 주님이 섬김으로써 하신다는 겁니다.

소금 치임을 당하는 겁니다.

너가 소금이 되어서 소금 칠 생각 하지 말고
소금으로부터 소금 뿌림을 당하는 그 섬김을 받으라 라는 겁니다.

이것이 성령의 소욕인데 바로 어린아이의 전쟁의 방식이다는 겁니다.
무능하고 어리석고 거리끼는 젖먹이 전쟁은 육의 전쟁 방식이 아니다는 겁니다.

(시 8:2, 개역) 『주의 대적을 인하여 어린 아이와 젖먹이의 입으로 말미암아 권능을 세우심이여 이는 원수와 보수자로 잠잠케 하려 하심이니이다』

(마 21:16, 개역) 『예수께 말하되 저희의 하는 말을 듣느뇨 예수께서 가라사대 그렇다 어린 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케 하셨나이다 함을 너희가 읽어 본 일이 없느냐 하시고』

남이 아닌 나 자신을 원수로 삼으시는 전쟁인 젖먹이 전쟁이다는 겁니다.

인자는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러 오신 겁니다.
어린아이가 이런 식으로 지금 제자들 누가 크냐 라는 소욕 속에 있는 제자들을 빼내기하기 위해서 섬기는 방식이 바로 찍어내어 짤라내는 단절 차단 절단 분리의 방식이 성령의 소욕이다는 겁니다.

우리는 자꾸 아 그러면 육의 소욕 버리고 성령의 소욕 편에 설랍니다 라고 한 쪽으로 서면 된다고 보지만 그것은 허용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두 세계를 보여주는 마당터입니다. 그렇다면 사건이 터질 때 마다 보이지 않는 두 세계를 보여주도록 되어 있지. 한 쪽 편에 선 자신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바로 독자성입니다.

주님 자신의 영광을 받기 위함인데 우리는 선한편이라는 공식만 추구하니
그것이 악하지 않느냐 라는 겁니다.

비록 그럴지라도 주님은 두 세계를 우리 속에서 보여줍니다.
그래서 두 점의 간격을 벌리셨다가 좁히셨다가를 우리 속에서 다 보여주는 증인이 되는 겁니다.

지금 제자들 보세요
예수님이 죽으셨다가 다시 사셔서 두 점을 찍고서는 성령을 선물로 주시기 전 까지는
백날 백날 예수님 편에 서고자 하는 그런 좋은 의도는
주님이 하나도 안 받아주십니다.
주님은 오로지 제자들이 보지 못하는 마귀만을 겨냥해서 일하시기 때문이니
백날 좋은 편에 서보세요? 그런다고 욕 안 얻어먹나?
욕먹는 그 자체가 사랑이니까 말이죠. 사생아 에게는 매도 없습니다.
우리는 매일 매일 성령으로부터 지적 받는 겁니다.

자기가 성경 볼줄 안다고 해석해서 자기가 성경말씀 지킨다고 나서면
왜 성령이 필요합니까? 밧데리 근육이 떨어졌을 때 보충 비상 밧데리 입니까?
아예 나서지 못하도록 짤라내기 위해서 성령을 주신 겁니다.

그럼 그 짤리는 것을 보고
우아 우아 내가 이렇게 사랑 받다니
많이 탕감 받은자가 많이 사랑하죠.

그런데 그것 때문에 주변에서 비아냥 거리는 겁니다.
얼마나 탕감받는 짖을 언제까지 할꺼냐고?
그것도 남이 아닌 가족이 같이 믿는다는 교회사람들이. 목사가 더 비아냥 거리는 겁니다.

왜 이런 십자가의 어리석은 방식이 아니면 안되는 겁니까?

십자가는 구원용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마귀는 구지 필요 없습니다.

십자가는 마귀를 겨냥한 주님의 다 이루심입니다.
인간 구원 다 이루었다 아닙니다.

인간이 마귀이니까 말이죠.

도리어 인간의 구원을 막는 십자가입니다. 구원을 짤라내는 십자가입니다.
청함을 받은 자 다 짤라내고 택함을 입은자 딸랑 한 명 예수님만 구원하는 십자가입니다.
이 부조리를 인정하겠냐? 말이죠.

이 부조리가 믿겨지면 두 점을 찍어주시겠지요.
그러나 믿는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 합니다.
어딜 감히 천국갈려고 해? 인간들이 천국간다는 자체가 문제입니다.
땅에 살아야지 왜 천국까지 기어 갈려고 말이죠.
가봤자 무슨 수로 버틸껍니까? 오죽 하면 나 돌아갈래 라고 애굽으로 다 돌아갔잖아요.

그 광야가 바로 성령의 소욕입니다. 짤라내고 막고 차단하고 삭제하고 뿌랏뿌고
오늘날 교회는 다 장난으로 다니고 있지만 그 당시 광야교회는 살벌했습니다.

성령의 소욕인 유월절 어린양의 피 에 맞는 죄인을 찾는 겁니다.
아무도 죄인이 없습니다. 의인이라고 다 짤렸습니다. 탈락 탈락

그저 평생을 누가 크냐? 집에서든 사회에서든 직장에서든 학교에서든 교회에서든
전 지구가 들썩 들썩 누가 크냐 라는 소식 뿐입니다.

어린아이의 섬김은 뉴스에서 조차도 다룰 가치가 없는 겁니다.

젖먹이의 전쟁이 뉴스에 나온적이 있던가요?
역사 책에 나온적 있나요?
그 잘난 역사적 해석, 해석맥락, 해석 범주에

젖먹이 전쟁이 언급이 된 적 있을까요?

없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성경말씀 전체를 젖먹이 전쟁으로 도배를 합니다.
마귀 보란 듯이 말이죠.

꼬끼오(닭 울음 세 번) 전쟁입니다. 도장 도장끈 지팡이 전쟁입니다.
이것이 십자가 전쟁 곧 법궤 전쟁, 증거궤(3가지 증거물) 전쟁, 언약궤 전쟁인 약속 전쟁입니다.

너가 나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를 사랑하는 사랑전쟁입니다.

이 사랑 외에는 다 짤림을 당하는 것이 바로 어린아이를 영접하는 겁니다.
섬김입니다.
실족치 않는 겁니다.

짤리지 않으면 늘 누가 크냐 라는 시험을 자기가 자기를 괴롭히는 그 독자성에
그 원수성에 그 악마성에 말려드는 겁니다.

시험 드는 겁니다.

얼마나 미쁜가요? 어린아이와의 전쟁에 놓여진 상황이 말이죠.
늘 짤려야함을 당해야하는, 섬기는 이로부터 말이죠.


기도하겠습니다.

어린아이 같이 되지 않으면 결단코 천국에 가지 못한다고 어린아이를 세워서 우리 앞에 놓으셨습니다. 어린아이라는 어리석은 존재가 되기 싫어서, 무능하고 작고 미약함이 되기 싫어서, 교회에서 근육자랑 해왔고 큰능력을 받고자 왔는데 정작 주님은 무능한자로 부터, 어린아이로 부터 섬김을 받으라고 하십니다.

바로 예수님으로부터 섬김을 받으라 라고 하신 말씀인줄 압니다.

용서를 매일 매일 받으라는 그 말씀 앞에서
왜 뭐가 부족해서 또 지적하시는지? 또 야단치시고 간섭하시는지?
그 매가 아니면 자녀가 아님을, 사랑이 아님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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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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