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29 : 기이한 부정

2011년 7월 12일 화요일 오전 9:03:16  김대식


(막 10:1, 개역)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 유대 지경과 요단강 건너편으로 가시니 무리가 다시 모여들거늘 예수께서 다시 전례대로 가르치시더니』
(막 10:2, 개역)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나아와 그를 시험하여 묻되 사람이 아내를 내어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
(막 10:3, 개역) 『대답하여 가라사대 모세가 어떻게 너희에게 명하였느냐』
(막 10:4, 개역) 『가로되 모세는 이혼증서를 써주어 내어버리기를 허락하였나이다』
(막 10:5, 개역)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너희 마음의 완악함을 인하여 이 명령을 기록하였거니와』
(막 10:6, 개역) 『창조시로부터 저희를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으니』
(막 10:7, 개역)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막 10:8, 개역)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막 10:9, 개역)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더라』
(막 10:10, 개역) 『집에서 제자들이 다시 이 일을 묻자온대』
(막 10:11, 개역) 『이르시되 누구든지 그 아내를 내어버리고 다른데 장가드는 자는 본처에게 간음을 행함이요』
(막 10:12, 개역) 『또 아내가 남편을 버리고 다른데로 시집 가면 간음을 행함이니라』
(막 10:13, 개역) 『사람들이 예수의 만져주심을 바라고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꾸짖거늘』
(막 10:14, 개역) 『예수께서 보시고 분히 여겨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의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막 10:15, 개역)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고』
(막 10:16, 개역) 『그 어린 아이들을 안고 저희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시니라』


예수님이 지나가는 곳 마다 소동이 일어납니다. 그 혼돈을 야기시키고 다시 그 혼돈을 잠재우는 새창조가 일어납니다. 아니 잠재우기는 커녕 그 소동은 더더욱 증식 확장이 됩니다. 단절과 차단 분리가 더더욱 말이죠. 나로 인하여 실족치 않는자는 복이 있도다 하셨으니깐요.

그런데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아 소동이 일어났고 다시 새창조가 일어났으면 새창조 믿어주지 뭐 라고 그 새창조가 마치 우리가 믿을수 있는 것으로 생각합니다만 사실상 그 새창조란 도저히 믿기 불가능한 겁니다.

왜냐하면 그 새창조는 기존의 것을 파괴 시키지 않는 이상은 받아들이기 힘든 거부대상 1호 이기 때문입니다. 또 자기 쪽에서 아무리 믿고파도 믿을수 없습니다. 새창조의 몫이지 우리 몫인 우리 숙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즉 새창조 스스로가 선택하고 있습니다. 새피조물을 말이죠. 새피조물이 새창조를 믿어대는 것이 아니라. 아무리 자신을 새피조물이라고 우겨도 새피조물과 옛피조물의 차이점은 자신의 믿음에 있지 않다 라는 것을 아는 겁니다.

결국 새창조가 지나가는 자리에는 반드시 두 패로 나누어지는 현상이 벌어지는 겁니다. 그 두패로 나누어진 상태에서 항상 새피조물은 자신의 기이한 부정 속에 놓여진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새피조물이 되었다고 새생명의 운동을 펼치는 자는 이 기이한 부정 자체가 이해가 되지 않게 됩니다. 이 차이입니다.

지금 예수님은 인간들의 결혼과 이혼 문제에 있어서 예수님의 지혜를 요구받고 있습니다. 그 지혜를 토대로 수정한 것을 수정하고 보완할 것은 개혁하겠다는 것입니다. (악한세대가 기적을 구하듯이 말이죠. 그러나 예수님이 보여줄 표적은 요나의 표적인 십자가 뿐입니다.)

즉 이것은 법의 사고방식입니다. 사랑은 없지만 법으로써 결혼으로 인한, 또는 이혼으로 인한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겁니다.

결국 실질적으로 자신들에게서 일어나는 문제와 법과의 간격을 좁혀보겠다는 시도입니다. 법은 이 현실적인 죄 문제를 따라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법이 앞서지 못하고 죄에 의해 뒤처지면 자신들의 시스템이 무너지기 때문에 미리 앞당겨 늘 걱정하는 겁니다.

얼마나 이것이 사랑보다 현실적인 문제였으면 바리새인이 질문하고도, 다시 제자들까지도 질문하게 되는 겁니다. 늘 벌어지고 있는 문제이다 라는 겁니다. 그런 바람 잘날 없는 이혼 문제는 결국 법이라는 가위로, 도끼로 썩은 부분을 갈라내는 것이 낫다는 식입니다. 감옥에 보내는 식이다는 겁니다.

결혼이야 말로 이스라엘과 하나님 사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관계성인데 이 관계성을 실질적인 자신의 결혼생활에서는 뜻하지 않게 파탄의 행보를 보이면 결국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않는다는 사고방식이 유대인이면, 기독교인이면 더 강박증으로 자리잡게 되는 겁니다.

남자는 결혼할 때 나 이 숙제 성공했어요 라는 식입니다. 마치 성공 실패냐 라는 식으로 따진다는 겁니다. 그러나 여자는 관계성으로 따집니다. 그 결혼식의 분위기는 어땠고 날씨도 어땟고 누가 누가 왔으며, 오신 손님들이 누가 왔는지 특히 어떤 표정인지를 다 기억할 정도로 관계성을 보는 겁니다. 아 나는 이렇게 사랑 받고 있구나를 말이죠.

그런 입장에서 남자는 이혼문제는 곧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성공이냐 실패냐는 더 크게 자리잡게 되는 겁니다. 여자는 지금 당장 남편이랑 관계가 깨어진 이상, 하나님께 영광이니 뭐니 그게 무슨 소용이 있느냐 라는 겁니다. 이미 모든 관계가 뒤틀어졌는데 말이죠. 그래서 바로 우울증걸린 환자처럼 재를 뒤짚어 쓰고 죽은자 모드로 빠져버립니다. 외부에게 건져주는자 없으면 이미 사망 그 자체인 셈입니다. 과거 같으면 시형제결혼법이 있어서 구제가 가능했지만 지금은 기업이 없는 시대에, 또 이웃사랑실천을 남의 눈을 의식하면서 하는 시대에는, 더더욱 이혼까지 요청하는 시대에는 말도안되는 시대가 된 겁니다. 거기에다가 그런 인간의 탐욕에, 법까지 그 탐욕을 들어주는 빌미로써 작용하게 되니 걷잡을수 없는 식으로 이혼문제는 확산되고 있습니다.

그런 와중에도 인간들이 겨우 할 수 있는 짖은, 법을 어떻게 하면 좀더 멋들어지게 완벽하게 할수 있느냐 하는 점입니다. 이것이 바로 죄의 소원에 제대로 걸려든 인간의 악마성입니다.

어떻게 하면 이런 이혼이 남발하는 가운데서도 법을 사수하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법은 그런 와중에도 이혼을 요청하는 인간의 손을 들어주면서 그 커미션으로 법사수 법 유지 비용에 사용되는 겁니다. 성전도 항상 이런 식입니다. 성전 사수의 방식이 똑같습니다. 이혼요구 법으로 들어주는 대신에 그 비용으로 법을 유지시키는 겁니다. 선은 없으면서 선의 모양을 갖추는 비용을, 선하지 않는 비용으로 충당하는 식입니다. 그러니 가증한 것이 성전에 세워지는 겁니다. 곧 인간이라는 자아가 자기를 위한 우상이 곧 탐욕이 성전에 세워지는 겁니다. 목사의 탐욕을 핑계될 수가 없는 것이 그런 목사를 세우는 교인 또한 같은 탐욕이기 때문입니다.

(마 19:7, 개역) 『여짜오되 그러하면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 증서를 주어서 내어버리라 명하였나이까』
(마 19:8, 개역) 『예수께서 가라사대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을 인하여 아내 내어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

하나님과 피조물인 인간의 관계는 결혼의 관계 즉 은혜의 관계 였습니다. 인간끼리의 결혼에는 주님은 관심 없습니다.  주님 자신의 결혼관계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은혜의 관계 속에 법이 개입이 됩니다. 법이 개입이 된다는 것은 곧 죄가 개입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하나님과 인간은 은혜라는 사랑의 관계 속에서의 결혼 곧 한 몸을 이루는 합하여짐인데
이제는 사랑이 아니라, 은혜가 아니라.

법 과 행함이 개입하게 됨으로써 법과 결혼하는 셈이 된 겁니다. 행함과 결혼한 셈입니다.
행함이 되지 않으면 언제든지 이혼할 판국에 놓여진 법적관계가 되고 만 겁니다.

법과 결혼한 것은 은혜가 아니라 완악함입니다.

행함이 아니라 믿음이다 라고 아무리 말해줘도 말귀 못알아먹는 이유는 완악하기 떄문입니다. 그렇다면 그 완악함 때문에 이혼증서를 자기들이 요구하니까 써줄 수밖에 없는 겁니다.

이 이혼 상태가 됨으로써 결혼의 귀중함을 알 듯이, 마치 아프면 건강함의 감사함을 알 듯이 그 결핍상태 곧 불뱀에게 물린 상태임을 알고, 마귀에게 장악된 죄의 소원 아래 갇혀버렸음을 알았을때에 긍휼 곧 사랑의 소중함을 알게 하시는 겁니다.

성전에 두 사람 중에 세리가 고개도 들지 못하고 주여 저는 죄인입니다 라고 고백했고, 탕자가 모든 것을 탕진한 후에야 아버지의 사랑을 쳐다보고 간 것처럼 말이죠. 참 여기서 그들이 주체가 아니라 또 말귀 못알아먹지 말고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마음이 있었던 겁니다.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이것이 짝이 되어 포개어 지는 겁니다. 독자적으로 아는 것은 소용없습니다.

그런데 그 결핍상태가 더더욱 저들의 완악함을 부채질 하는, 갈라지게 하는 나누임 곧 분리현상을 더더욱 간격을 벌려놓게 되는 겁니다. 그 부조리에 대한 분노의 방식이다는 겁니다. 이것이 저들의 아비 마귀가 장악안 인간의 참모습입니다. 흙의 본래의 모습인 겁니다.

그 부조리는 마귀를 잡기 위한 주님의 싸움이요 전쟁인데 자신의 전쟁이 되어버리니 그 부조리는 죄의 소원 보다 더 겹겹이 넘기 힘든 겁니다. 죄의 소원도 불가능한데 아들의 소원까지 넘어설려고 하니 말이죠.

(마 11:27, 개역)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그러니까 구원을 자기 손으로 쟁취, 믿음으로 자신의 숙제로 보는 겁니다. 행함을 주장하는 자들은 바로 이것이 덮쳐버린 겁니다. 완악함. 이혼증서를 요구하는 모습과 똑같습니다.

참으로 공교롭게도 이번에 유명한 명작을 봤습니다. [지붕위의 바이올]린 이라는 영화를 봤는데 참 기가막힌 타이밍이였습니다. 본문의 내용과 참 딱 들어맞습니다.

제목은 많이 들어봤고 유명한 노래 션 라이즈 션 셑 해는 뜨고 해는 지고 라는 노래는 들어봤던 노래였지만 영화는 처음 봤습니다.

어 그런데 처음부터 영화가 유대인의 생활상 즉 1905년 러시아 우크라이나 지방의 작은 마을 유대인 부락의 생활상을 담았는데 처음부터 결혼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끝부분으로 갈수록 유대인은 그 사회에서 쫏겨나는 어디에도 정착할수 없는 이방인 취급을 당하는 이혼의 신세를 한가정의 삶의 운명과 중첩시켜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유목주의 노마니즘

그것이 함축된 것이 바로 노래, 썬 라이즈 썬 셑, 해는 뜨고 해는 지고, 이 땅의 삶이 고달픈 이방의 삶이다. 어디에도 머리 둘 곳 없는 나그네의 삶이다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 영화에서 결혼이란 무엇인가를 보았습니다.
결혼이란 이혼을 통하지 않고서는 그 결혼의 비밀을 알수가 없습니다.
이혼한 적도 없는 데 어떻게 결혼했다는 말입니까?
말이 모순 되죠? 이해할 길이 없죠. 참말로 기이한 부정입니다.

오히려 반대이어야 하지 않나요?
결혼한적이 없는데 어떻게 이혼했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라는 식으로 말이죠.

결혼이란 한 몸의 비밀을 간직한 겁니다. 저거들 좋아라고 결혼하는게 아니다고 했습니다. 창조의 비밀을 담는 겁니다. 약속의 비밀을 담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한 몸은 이혼한적이 없는데 어떻게 이 한 몸의 비밀을 담겠습니까?

왜 제가 그 영화를 보고 힌트 삼았으냐 하며는 유대인은 모든 인간의 대표성을 담은 제사장나라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인생이 이런거다 라고 담아내면서 정작 비밀을 담은 원래의 취지를 그들은 여전히 모르고 있다는 겁니다.

즉 선악을 담은 육체의 대표성을 보여주고 그것과 이혼하는 약속을 보여줘야 하는데
어라? 선악을 담은 육체의 인생을 대표적으로 보여주고서는 끝나버리는 겁니다.
그런식으로 유대인은 결국은 돈과 연관이 되어버리는
모든 세계의 주도권을 쥔 경제 문학 과학 철학 문화 사회현상 모든 것의 대표자로 우뚝 서버리고 말았습니다.
그것과 왜 이혼해야 하는지를 모르는 겁니다.

그러니 이혼 한 적이 없으니 결혼할 리가 없지요. 합해지지 않은 겁니다.
도리어 십자가는 가장 그들에게는 걸림돌이 되는 식입니다. 십자가야 말로 유일한 할례요 세례요 연합인데
할례를 행함으로써 그 손이 졸지에 우상이 되어버렸습니다. 할례를 하는 손이요 할례를 당하는 몸이요 결국 자기의 몸을 자기가 구원하는 손할례 입니다. 마음의 할례를 행하실 주님의 날카로운 뿔이 없는 겁니다.

그것이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모세에게 이혼을 요구하는 완악함입니다. 써줘 버려야지요. 법에 가두어버립니다. 갇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인간의 완악함을 들추어냄과 동시에 따로 뒤로빼돌려 챙긴 자기신부 곧 결혼할 한 몸을 챙겨놓음으로써 간따나 완악함에 빠진 유대인에게 더 갑절로 열받게 강퍅하게 만들어서 그 결혼의 비밀 즉 한 몸의 운명을 더더욱 노골적으로 보여줍니다.

유대인의 손에 죽음으로써 저들은 약속의 비밀을 잡는 기회를 더더욱 자신들의 발로 차버리는 식으로써 이방인에게 구원이 돌아가게 되는 식으로써 한 몸의 비밀 결혼의 비밀인 십자가를 보여주는 겁니다. 더더욱 거리끼는 방식인 기이한 부정으로 말이죠.

십자가의 방식이 아니고서는 결혼이라는 개념이 성립이 안되는 그 십자가의 영광을 보여주는 겁니다.

그렇기에 결혼개념을 가장 법으로 잘 쥐고 잘 장악하고 있는 그 유대인들을 통해서 결혼의 의미를 제대로 보여주는 겁니다.

왜? 결혼(십자가)이야 말로 그들에게는 거리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걸림돌입니다.

법적인 보장아래에서의 법적 결혼을 그들은 완악함으로써 보장받기를 원했는데(유에서 유, 법에서 법, 행함에서 행함)

법이 날라가 버린 상태의 은혜와 사랑의 결혼 개념은 예수님에게서 처음으로 나온것이기 때문입니다. 곧 십자가의 죽음으로써 이룬 사랑이기 떄문입니다. 무에서 유입니다. 믿음에서 믿음으로, 사랑에서 사랑으로

그래서 이혼을 거쳐서 결혼의 의미를 드러내시는 겁니다.
원수 됨에서 피흘리심으로써 화목케 된 결혼입니다.
잃어버렸다가 되찾은 사랑입니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결혼입니다. 이것이 기이한 부정입니다.

예수님은 평상시 인간들이 자기들 버릇대로 법으로 포장하고
모든 것을 법으로 서로 서로를 포장하는 가운데서 예수님 조차도 법으로 포장할려는 그 속에서, 그 무리 속에서

느닷없이 아이를 하나 데리고 오십니다. 이 어린아이가 내게 오는 것을 막지 말라고 하십니다.

(막 10:13, 개역) 『사람들이 예수의 만져주심을 바라고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꾸짖거늘』
(막 10:14, 개역) 『예수께서 보시고 분히 여겨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의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그리고 그 결혼 이혼 문제로 논쟁이 된 그 무리 속에서 이 어린아이 하나를 중첩시켜서
이 이런아이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런 자의 것이다 라고 말이죠.

마치 이 부분은 미리암이 한 입에서 찬송이 나고 또 다시 한 입에서 저주가 나는 식으로 모세의 온유함을 비방합니다. 모세의 온유함으로 가장 비천하고 얼굴이 검은 못난이 중에 못난이 구스여인를 아내로 취하는 것에서 미리암의 완악함이 드러납니다.

구스여인이 이 어린아이처럼 사건의 구멍으로써 시선을 집중시킵니다. 구스여인이 아니였다면 소동이 벌어질리가 없지요. 그러나 모세의 온유는 이 구스여인과 가장 잘 맞는 짝 입니다.

성령의 소욕이 피와 가장 잘 맞는 죄인을 찾는 것입니다. 그래야 육의 소욕이, 완악함이 발악을 합니다.

그런 미리암조차도 구스여인과 같은 입장이 되어서 그 완악함과 이혼케 되는 모세의 긍휼을 바라는 기도 덕분에 그 죽은 피부들이 다시 새살이 돋기 시작하는 불쌍히 여김이 포개어 지는 덧입게 되는 겁니다.

애굽왕 바로왕의 강퍅함에서 벗어났다고 찬송을 했던 미리암 이지만 정작 그 찬양이 우리는 뭔지도 모르고서 외치고 있기 때문에 늘 주님의 온유하심으로 또 배워야 하고 또 배워야 하는 겁니다.

(마 11:24, 개역)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하시니라』
(마 11:25, 개역)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마 11:26, 개역)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마 11:27, 개역)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마 11:28, 개역)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 11:29, 개역)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마 11:30, 개역)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또 또 또 배워야 하는 겁니다.
우리는 소돔과 고모라와 이혼을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완악한 나 자신으로부터 이혼을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종말이 아니고서야 무엇이겠습니까?
심판이야 말로 주님의 온유하심입니다. 단절 삭제 분리 차단 나누임 말입니다.

주님의 겸손 앞에서 박살이 나야 하는 우리의 완악함은, 배움에 고개를 돌리지 마자 곧잘 목이 곧아져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것과 이혼해야 하고 다시 주님과 결혼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심판을 맞이해야 하는 겁니다. 종말을 임신해야 하는 겁니다.

이 어린아이 하나는 제자들로부터 금하여짐을 당한 부정적인 존재입니다. 애들은 가라입니다.
또 제자들이 막아서는 존재입니다. 도저히 용납할수 없고 허용할 수 없는 금지곡과 같은 존재입니다.

그러나 정작 저들의 입에서 나는 찬양소리야 말로
인간의 결혼체제(누구와 합했는지? 법 마귀 선악과)를 허물어 뜨리는 소동이 되는 부정한 자들이 되고 마는 겁니다.

(마 21:13, 개역) 『저희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드는도다 하시니라』
(마 21:14, 개역) 『소경과 저는 자들이 성전에서 예수께 나아오매 고쳐 주시니』
(마 21:15, 개역)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의 하시는 이상한 일과 또 성전에서 소리질러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 아이들을 보고 분하여』
(마 21:16, 개역) 『예수께 말하되 저희의 하는 말을 듣느뇨 예수께서 가라사대 그렇다 어린 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케 하셨나이다 함을 너희가 읽어 본 일이 없느냐 하시고』

어른들은 자신들의 손으로 이룬 교회와 같은 바벨탑체제 곧 법체제 속에서 (교리체제, 신학체제, 철학체제)
소경과 어린아이와 젖먹이들의 찬미는 소동꺼리에 해당되는 부정한 것들입니다.
감옥소에 가두어 버리야 할 질서를 파괴 시키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바로 그 어린아이를 중앙에 세우시고서는
처음자리인 근본의 바닥을 뜯기 시작하십니다.

약하고 어리석고 부정한 그 어린아이가 (현장에서 간음하다가 잡힌 여인도 마찬가지)
바로 결혼이냐 이혼이냐 어느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느냐? 로 자기유익을 챙기는
자신의 거룩을 챙겨 천국보험계약에 위배되지 않고 천국을 타 낼수 있는 그 계약에

어린아이(부정성)는 근본바닥을 뜯어냅니다.

이혼한적도 없는 자들이 어떻게 결혼을 한다는 말입니까?

금지당하고 막힘당하고 거부당하고 잃어버림을 당하는 구스여인의 처지,
현장에서 간음하다가 잡혀 율법에 돌삐 맞아 죽임을 당하는 처지,
그런 잃어버림의 처지가 되어 본적 없는 자들이 어떻게 되찾음이 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이것을 기이한 부정 이라고 합니다. 바닥을 뜯어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라는 부정 불륜으로 처음자리(사랑)라는 근원을 뜯습니다.

죽은 적도 없는데 어떻게 다시 살아날수가 있다는 거냐 말입니다.

짤린 적도 없는데(고자: 할례, 세례, 십자가)? 접붙임이 어떻게? (천국은 저희 것)
심판 받은 적도 없는데 어떻게 구원을? 희년을 자유를 해방을?

마 25장의 3가지 비유는 종말의 상황입니다. 종말의 영이 덮친적이 없는데 어떻게 아들의 영을 받을수가 있다는 겁니까?

제명 당한 적도 없는데?  뒤로빼돌리기는 라는 부조리는 없습니다. 수치를 반대로 물려주죠.

또 이래 말하니까 그것이 조건이 된냥 자기 쪽에서 조건 갖추기를 해 버리면 그것은 또 뭐가 됩니까?
역시나 자기가 자기를 짤랐다가 자기가 도리어 자기를 뒤로빼돌리기를 한다는 것은
역시나 외부의 개입이 없는 것 아닙니까? 여진히 법적 구색만을 갖출 뿐이기에 사랑이 없는 겁니다.

이것이 한 개의 하나님인 바로 엘로힘 이라는 겁니다. 두 개의 점은 예수님 혼자만 찍습니다.

사랑은 여기 있습니다. 너희가 사랑한 것이 아니요입니다. 화목제물에만 있습니다. 결혼제물인 십자가입니다.

어린아이는 부정적으로 취급받고 있는 상태에서 예수님이 중앙에 세우십니다.
이 부정으로써 모든 어른들의 세계를 뜯어냅니다.
바닥을 뜯어보니 결혼 상담 이혼 상담 등등의 모든 질문 그 자체가 사랑이 없고
어떻게 하면 법의 모양의 구색을 갖추어서 어떻게 해서든 하나님 나라를 차지해 보겠다는 심뽀가

이 말도 안되는 기이한 부정인, 기이한 모순덩어리인 어린아이로부터 발각을 당하는 겁니다.

아이들이 언제 그 딴거 걱정이나 하던가요?
행함이냐? 안행함이냐? 그런거 따지던가요?
젖먹이는 법의식이 없습니다,.

이 기이한 부정은 우리들을 구멍을 뻥 뻥 뻥 뚫습니다.
십자가는 우리를 부끄 부끄 부끄 로 만들어 버립니다.

(롬 12:19, 개역)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롬 12:20, 개역)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우리는 심판자가 아닙니다. 도리어 심판자로부터 매일 매일 심판 당해야 함을 마땅히 여길자입니다.

그 심판을 어린아이를 통해서 바닥을 뜯어내고
무능하기 짝이 없는 십자가로 바닥을 뜯어내니

오히려 완악함은 더더욱 강퍅함으로써 우리는 거부하고 있는 겁니다.

이런 우리 속의 완악함을 들추어내시는 것이 사랑입니다.
이 사랑 아니면 우리는 우리 속에 있는 악마를 지적 받을 길이 없습니다.



주여 우리를 우리 죄악에서 건져 주시옵소서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마 6:8, 개역) 『그러므로 저희를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마 6:9, 개역)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마 6:10, 개역)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마 6:11, 개역)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마 6:12, 개역)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마 6:13, 개역)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Posted by 김 대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