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07/19 09:11

피 아버지


피 아버지

2011년 7월 13일 수요일 오전 9:17:50  김대식


약속의 아버지는 자신의 약속 외에는 관심이 없다. 곧 십자가의 용서의 피다.
그 용서의 피를 높이고자 사건을 벌리시는데 그 사건은 항상 마귀보란 듯이 펼쳐진다.
왜냐하면 약속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싸움이기 때문이다.

(창 3:15, 개역)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창 3:16, 개역)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창 3:17, 개역)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그 자신의 싸움에 특이한 족속이, 없는데서 새로 맹글어져서 그 특이한 싸움의 목격자로써 동행하게 된다.  그 동행(결혼,연합,할례)은 바로 누구의 시기를 의도적으로 유발케 하는 방식이다. 거기에 동원이 되는 자들이 할례족속 세례족속 연합족속 곧 십자가족속이다. 육을 끊침당하고 약속과 합한 약속의, 언약의 무리이다. 그렇기에 사건도 동일하다. 약속만을 드러내는 전쟁이요 사건이다.

이 싸움의 구조에 놓여졌다는 증거는 아무리 이 약속을 이 싸움을 거부하고 싶어도 거부 못하는 이유가 바로 여자는 잉태하는 고통에 놓여졌다는 것이다. 독자적인 잉태의 고통은 소용없다. 예수님의 십자가에서의 새언약을 다 이루시는 잉태하는 고통과 합해져야 한다. 곧 창조다.

또 남자는 땀을 흘림으로써 소산을 얻음으로써 피를 흘리시는 그 십자가의 저주를 당하심으로써 열매 곧 용서의 열매와 포개어져야 하지, 독자적인 수고로, 땀 흘림으로 인한 소산물 획득은 도리어 시험에 들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어지는 소산물 제사가 바로 가인과 아벨의 제사로 이어진다.

예수님은 탕자의 비유로 인해 이 가인과 아벨의 제사를 다시 확대하신다.

누가 피 남편 곧 피의 아버지에 합한 자 인가를 말이다. 그 땀 흘림이 자신의 땀흘림인가? 아버지의 피 흘림인가? 그 피에 맞는 아버지의 소욕에 합한자를 찾는 것이다.

맏아들은 아버지가 시키는대로 했다. 그래서 짤렸다,
그러나 탕자는 아버지의 피에 딱 맞는 막살아 버린 그야말로 탕자다.

탕자 곧 막살기의 달인

이 죄인 중의 괴수가 아버지의 온유와 겸손함에 딱 맞는 자였다.

맏아들은 구지 아버지의 피 흘림이 필요가 없다. 자력으로 충분하다.
그래서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기독인이나?

모조리 아버지의 피 흘림이 구지 필요가 없다. 자력으로 충분히 아버지를 사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력이라는 밧데리 근육이 떨어지면 잠깐 충전하기 위해서 아버지의 피가 그때만 활용하면 된다는 장난을 치고 있다.

(마 11:24, 개역)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하시니라』
(마 11:25, 개역)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마 11:26, 개역)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마 11:27, 개역)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마 11:28, 개역)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 11:29, 개역)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마 11:30, 개역)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과연 그것이 가버나움에서 빠져나올수 있는 생각일까? 아니 자력으로 충분하니 빠져나올 생각 조차도 할 수 없다.

소돔과 고모라에서 과연 빼내어 질수 있을까?

아버지가 시키는일 한번도 어긴적 없는 맏아들 싸움? 그것이 과연 사랑(십자가) 싸움인가?
제자들의 누가 크냐 싸움? 이것이 약속 싸움인가?
모세에게 이혼증서 요구한 싸움? 이것이 과연 피 싸움인가?
피 싸움은 바로 그런 세계에서 빼내기를 하신다.

그런 맏아들로부터 빼내기 하시는 탕자(막살기의 달인)를 뒤로빼돌리는 반칙이다.
그런 제자들로부터 빼내기를 하시는 어린아이천국이다.
그런 이혼 으로부터 빼내기를 하시는 젖먹이 찬미이다.
왜? 도대체 왜? 그것들은 소돔과 고모라이기 때문이고.
그것들은 그 심판, 그 종말을 통과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종말과 심판을 패쓰 통과 할수 있는 것은 피 뿐이다.

피 아버지는 심판과 종말을 통과할수 있는 것을 제시한다.
심판도 종말도 통과 하지도 못하는
맏아들의 열심(시키는대로 어긴적 없이 안막살기)은 심판을 통과하지 못한다.
누가 크냐 라는 제자들의 싸움은 종말을 통과하지 못한다.
바른 결혼관 이혼하지 않는 아버지께 영광돌리는 싸움은 십자가의 죽음을 통과하지 못한다.

오로지 예수님의 피흘리심으로써 피발림만이
성령의 소욕에 딱 맞는 죄인에게만 뿌려지는 요나의 표적만이

심판에서 빼내임을 당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아버지를 이렇게 부른다.

피 아버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것만 챙기는 아버지
잃어버렸다가 되찾은 것에 바지 벗겨지라고 기뻐하는 아버지
즉 상대적인 전혀 기쁘지 않은 맏아들과 차이나는 아버지의 사고방식인 피
그 피만 기뻐하시는 아버지다.)


(눅 15:1, 개역)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눅 15:2, 개역)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원망하여 가로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눅 15:3, 개역)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 비유로 이르시되』
(눅 15:4, 개역)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도록 찾아 다니지 아니하느냐』
(눅 15:5, 개역) 『또 찾은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눅 15:6, 개역)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았노라 하리라』
(눅 15:7, 개역)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눅 15:8, 개역) 『어느 여자가 열 드라크마가 있는데 하나를 잃으면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찾도록 부지런히 찾지 아니하겠느냐』
(눅 15:9, 개역) 『또 찾은즉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잃은 드라크마를 찾았노라 하리라』
(눅 15:10, 개역)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

(눅 15:11, 개역) 『또 가라사대 어떤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
(눅 15:12, 개역) 『그 둘째가 아비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비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눅 15:13, 개역) 『그 후 며칠이 못되어 둘째 아들이 재산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허비하더니』
(눅 15:14, 개역) 『다 없이한 후 그 나라에 크게 훙년이 들어 저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눅 15:15, 개역)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하나에게 붙여 사니 그가 저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눅 15:16, 개역) 『저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을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눅 15:17, 개역) 『이에 스스로 돌이켜 가로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눅 15:18, 개역)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눅 15:19, 개역)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눅 15:20, 개역)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 돌아 가니라 아직도 상거가 먼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눅 15:21, 개역) 『아들이 가로되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하나』
(눅 15:22, 개역)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눅 15:23, 개역)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눅 15:24, 개역)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저희가 즐거워하더라』
(눅 15:25, 개역) 『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웠을 때에 풍류와 춤추는 소리를 듣고』
(눅 15:26, 개역) 『한 종을 불러 이 무슨 일인가 물은대』
(눅 15:27, 개역) 『대답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그의 건강한 몸을 다시 맞아 들이게 됨을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니』
(눅 15:28, 개역) 『저가 노하여 들어가기를 즐겨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눅 15:29, 개역) 『아버지께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눅 15:30, 개역)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눅 15:31, 개역)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눅 15:32, 개역)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았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ps 
이근호 목사 쳐다보다 망한 놈들 수십년동안 보아 왔다.
또 십자가마을 쳐다보다 망한 놈들도 수없이 보아왔다.
교회 쳐다보다 망한 놈들은 더 억수로 많이 많이 보아 왔다.

전혀 미쁘지 못한 시험들꺼리를 왜 쳐다보는가?

올무(의문의 법, 모호한 것)인지도 모르고 말이다. 바보들.

(갈 3:1, 개역)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명료하고 또렷한 주님의 피흘리심이 있는데?
전혀 피 흘린적도 없는, 약속도 아닌 것들을 뭐가 미쁘다고?

왜 인간의 말을 듣는가!! 이 멍청한 것들아.
이제는 딴 목사 말 듣는단다 ㅋㅋㅋㅋㅋㅋ

피는 예수님만 흘리셨다. 요나의 표적을 보기 싫어하기에 그딴거를 찾는 것이다.

 
 
 
이한례  11-07-13 11:05  

십자가 : 다 이루었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성도  11-07-13 11:49 
 
정죄함은 자기의를 드러내는도다 (고린도후서 3장24절)
 
 
김대식  11-07-13 12:03  

몽둥이로 개 패듯이 패겠다는 놈이 ?  ㅋㅋㅋㅋㅋ
원수 갚는 일은 심판의 주 예수님께 맡기시길 ~~~~

(롬 12:19, 개역)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

죄책감과 복수심 그리고 살인의지 vs 기이한 부정

2011년 5월 23일 월요일 오전 11:09:40  김대식


들뢰즈의 철학은 지금까지의 모든 사상을 다 혼합? 통합? 합체시켜서 다시 그 틀을 탈주하고자 하는 궤도이탈의 몸부림을 보여준다. 이것이 신학에서는 개혁주의이다.

뭔가 새로운 창조 곧 생성이라는  - 되기를 추구하는 것이다.

마치 새생명의 삶 이라는 모토처럼 말이다.

(그래서 그 순수하기 짝이 없는 거룩에 조금이라도 흡집이 나거나 완벽하지 못하면 놀랍게도 그런 열심 중의 열심을 아무리 보여도 결론은 자살이요 아무것도 모르겠다 라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것이 가룟유다요 노무현이요 철학자들의 결론인 자살이다. 물론 신학도 마찬가지이다. 자살하면 벌 받는다 라는 법 지키기에 빠져있기에 이미 심판받은 것이다. 이미 말이다.
이 의문과 모호함은 결국은 자신을 자기가 심판 내리는 법으로 귀결된다.
행함이란 곧 법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무한한 탈주의 - 되기는 놀랍게도 다시 처음의 자리로 되돌아가고자 하는 신의 심판으로 이어진다. 아냐 아냐 이것은 내가 만든 적 없어 라고 토기장이가 토기를 무수히도 깨뜨리고 다시 만들고 또 깨고 또 깨고 하듯이 말이다.

그것을 하나님의 형상 회복이라고 운동하는 바리새인의 묵시운동처럼 처음의 자리인 기관없는 신체(신;하나님)를 추구한다. 곧 사랑이다.

문제는 그 사랑이 두 가지의 사랑이다. 곧 두 개의 잉여다.

놀랍게도 들뢰즈는 이 기관 없는 신체를 유기체(곧 신학)과 대비시키고 더 나아가서
살과 뼈(들뢰즈는 뼈와 피로써 표현)의 결정체인 여자 - 되기 곧 아담이 이름을 붙인 생명을 그 생명의 의미를 담은 창조성의 여자 - 되기 (생명 - 되기) 로써 기관없는 신체를 주장한다. 새생명의 삶이다. 새로운 나를 위해 이전의 기관을 부정하는 기이한 부정 곧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처럼 말이다.

내 뼈 중에 뼈요 살 중에 살이다. 이것이 여자 - 되기 이다.
무에서 유의 창조를 추구한다.

그러나 새롭다 라는 것은 반드시 인간의 부정성을 거쳐서 나온 의미로서의 새로움이다. 곧 십자가다.

그런데 인간에게서의 새로움이란 옛 이전 것의 부정을 거쳐서 기이한 부정을 하는 것이다.
왜 기이한 것인지는 모른다. 미래가 기이할 것이다 라는 막연함이다. 뭔지 모르기에 새롭지 않겠는가 라는 것이다. 이것이 모든 철학 모든 학문 모든 신학의 주 내용이다. 반복된다.

그러나 그런 유에서 유의 창조는 여자 하기 이다.
(예를들어서 기도하기와 기도되기의 차이를 말하자면 기도하기는 있는데서 그 있는 유를 어떻게 좀더 좋은상태로 되도록 하기 위함이다 이것이 이방인이 구하는 기도요 중언부언 말을 많이 하여야 된다는 시간채우기 공간채우기 말 많이 채우기의 결핍채우기로써 일치성을 추구한다. 그러나 기도되기는 없음에도 바라는 것이다. 사실상 바라지도 않는데 왜 없으니까 그 바라는 바가 덮쳐져서 원치도 않는 것을 구하게 된다. 추호도 구하고 싶은 마음이 추호도 없는데도 불구하고 구하는 영이 덮쳐져서 그것도 불가능한 것, 없는 것을 구한다. 바랄수 없는 중에도 바란다. 그것이 바로 그의 나라와 그의 의 다. 이것이 기도 되기다. 즉 애굽왕을 강퍅케 하신 것도 여호와요, 그 강퍅으로 인해 졸지에 핍박받게 되니 구하게 되는 울부짖음을 듣고 이제야 애굽을 치는 근거를 마련하신 것이다. 즉 창조 생성이라는 의미 없었는데 졸지에 우발적으로 발생한 발생적 기도 의 의미의 - 되기란 자작극이였다는 것이다. 누구의 도저히 땅에서는 생각지도 못했던 발상이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 거짓정보를 흘리고 딴 새 정보를 갈아타면 늦게나다 그 발생적인 것을 인간이 스폰지처럼 흡수 통합하여서 또 따라잡기를 하는 것이다. 그러면 예수님은 그들의 임금삼기 임금하기를 뿌리치고 탈주하여 도망치신다. 유에서 유를 본 기적을 악한세대로 취급하고 요나의 표적을 보여준다. 임금 되기 인데 인간의 종교성은 기꺽 임금하기 뿐이다. 자기 신체 기준이기 때문이다. 불의한 재판관에게 벌어진 사태는 기도하기가 아니라 기도 되기이다. 과부가 하나님도 두려워 하지 않는 재판관에게 죽자사자 귀찮게 한다. 애굽왕 바로왕(유에서 유-바벨탑)에게 모세가 귀찮게 하는 이것이 바로 기도 되기 이다. 즉 기도 되기란 충돌이요 수셔댐이요 싸움걸기, 붙이시기 전쟁인 십자가이다.)

두 잉여의 싸움은 바로 여자 되기와 여자 하기의 싸움이다.
두 언약의 싸움이다.
두 아들의 싸움이다. (이스라엘의 '아들-되기' 냐? 예수님이 아들 되심이냐?)
두 보호자의 싸움이다.
하나는 내가 사랑하겠다 라고 하고 또 하나는 아니야 내가 사랑할꺼야의 싸움이다.
베드로와 그 베드로의 사랑을 배신하는 예수님의 커플(포개짐:범법자의 사랑) 정념이다. 곧 십자가 사랑이다.
(바리새인 니고데모 식으로 하자면 어떻게 남자인 제가 여자 되기가 됩니까? 다시 모태에서 들어갔다 나와야 합니까? 문제는 여자로 다시 태어났다고 해도 유에서 유이다. 자기가 이미 있음을 전제로 하고 이전 것은 지나갔다고 해 본들 여전히 이전 것은 있다. 그 이전 것이 지나가지 않고 새것이라고 해 본들 결국 십자가를 거부하기는 매 마찬가지이다.
그렇다면 똑같은 바리새인 즉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 사도바울이나 우물가의 여인을 대비시켜서 그 차이를 보자. 니고데모는 예수님으로부터 죄를 들추임 당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물가의 여인은 죄이기 때문에 감추었던 과거를 들추임 당한다. 들추는 자의 주체가 타인이다. 사도바울은 자신의 열심에서 추호도 나올수 없는 신념 뿐이다. 이미 자기가 자신을 가두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신념으로 죽여버린 스데반의 죽음을 그 부정을 자신이 잇는다. 누구십니까? 라는 외부의 타인 때문이다. 시작은 내부가 아닌 외부에서 시작된다. 그것을 새롭다 라고 한다. 구약은 내부에 가두어 버린다. 외부에서 오는자가 없다면 풀자가 없다. 그런데 구약에 가두어짐이 없는 자들이 외부의 메시아를 기다리는 것은 결국 내부를 더욱더 돋독히 해줄 메시아를 기다린 것이다. 그 메시아가 마귀가 심었고, 예수님은 우물가의 여인의 과거를 캐내듯 옛남편의 의문성을 캐내면서 그 내부를 깨뜨린다. 그래서 죽음도 자기 죽음이 아니라 기이한 부정은 예수님의 부정이어야 한다. 나의 자기부인인 회개가 아니라, 예수님의 낮아지심의 부정인 것이다. 그것을 발판으로써 새생명의 삶을 살고 구원을 더욱더 증식 시키는 것이 아니라, 더더욱 예수님의 부정을 퍼트리는 것이다. 저들에게는 악마일 뿐인 예수님을 말이다. 앞의 것으로 포개어 지는 것이 아니라, 뒤엣것으로 포개어 진다. 곧 십자가다. 누구와 중첩 커플이 되었는가 이다. 나를 구원하는 하나님 인가? 내가 핍박한 나사렛 예수 인가?)

그러나 베드로는 그 십자가를 하나님의 저주이기에 사랑이 될 수가 없다고 본다.
그것은 너 생각이고 대중의 욕망이고
하나님의 욕망은 그 저주 그 심판을 거쳐 오라는 것이다.

인간의 욕망체제는 곧 그 신의 심판의 자리에서 기관 없는 신체를 찢어버리는 것이다.
사랑을 찢어 버리는 것이다. 마치 인간이 중간에 막힌 담을 헐어버리고 율법을 지켜서 완성해서 사랑을 이루겠다는

그런데 예수님은 그것이 바로 악마다 라고 하신다.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사람의 일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않는구나

그것은 내 일이지 너가 할 일이 아니다 라고 예수님의 숙제라고 하신다. 곧 선악을 아는 것은 주님만이 알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인간은 선악을 이미 알아버렸고, 마치 성(sex)=사랑에 눈 떠 버렸고, 눈이 밝아버렸고, 뭐가 옳고 뭐가 나쁜 것인지 알아버린 오이디푸스처럼 이제 그 죄책감은 더더욱 복수심의 살인의지로 불태우게 된다. 이유없다. 아버지를 죽이는 길 만이 이 저주를 푸는 길이다.

죄의 소원이 삼켜버려 죄 아래 갇혀서 다스림을 받게 되는 것이다. 죄가 인간을 다룬다.

(창 4:7, 개역)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여기에 여호와 하나님은 이미 쇠고랑을 찬 인간에게 더더욱 가혹한 율법을 그들에게 채운다.
이중 수갑이다. 요셉은 언약말씀을 응하게 하기 위해 이중 수갑 발이 착고에 차이고, 몸이 쇠사슬에 차이야 하는 약속인 애굽에서 객이 됨을 이루어야 한다. 그런데 이것이 창조다. 기이한 부정으로써의 창조요 십자가로 확장된다. 아니 처음자리 곧 기관없는 신체가 십자가였다. 물론 들뢰즈가 말하는 기관없는 신체란 자기 신체에서 출발해서 자기 신체에서 답을 찾을려고 했지만 정작 착고에 차이거나 쇠사슬에 차이는 신체는 아니였다.

예수님이 가시면류관을 쓰시고 십자가를 어깨에 지고 심지어 발고 손이 못에 박히고 창에 옆구리를 찌리심은 마치 유월절 어린양을 갈기 갈기 찢음과 같다.

머리 짜르고 몸통을 가르고 사지 팔다리인 손과 발을 못 박음으로써 법대로 6조각을 내어 범법자를 철두철미하게 모호한 의문의 법으로 처형했다.

제대로 인간의 법 아래에 숨어버린 그 죄책감(수치)을 파고 들어간 것이다.

누가 누구에게 걸려든 것인가? 모든 인간인 첫 아담과 마귀는 마지막 아담 예수님에게 걸려든 것이다.

이 수치를 짤라낼 길이 없다. 자신이 찌른 그 십자가를 도리어 자신이 믿어야 할 판국이다.
유일한 그 수치 곧 죄책감을 짤라내는 할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악마는 그 십자가가 밉다. 어떻게 하면 저 십자가를 무효화 시키는 짖으로 평생 죄책삼을 안고 살더라도 빚진 마음으로 죄를 짖이 않는 새생명의 긍정의 삶을 살면된다고 자신들 마음대로 입법을 세운다. 죄책감은 결국 입법이 되고 그 법을 침법하면 살인을 행해 버린다. 가인의 제사란 곧 가인의 법이다. 늘 입법을 요구한다. 보호해 달라는 법 이마표다.

그러나 그런 가인의 법에 아벨의 제사는 범법이다. 그래서 처형이다.

주의 전을 사모하는 사랑은 곧 살인으로 이어진다.

그 성전이라는 법을 깨뜨리는 예수를 도저히 참을수 없어 가만히 둘 수가 없다.
하나님의 법으로 처형해야 한다. 갈기 갈기 찢어 죽어야 하는 것이다.

신학이란 그런 무능하고 무법하고 무력한 싫어버린바 된 것을 참을수가 없어서 갈기 갈기 찢는 것이다.

이 죄책감(수치)에 대한 인간의 처방은 거룩함에 더욱더 매진하는 것이다.
교회에서, 가정에서, 국가에서, 사회에서 그 어떤 집단에서든 수치스러운 인간이 되지 않을려고 함이다.

그러면 그럴수록 살인의지를 더욱더 억눌린채 기회를 노리고 있다.
(막상 수치스러운 인간이 되었을때에 한꺼번에 폭발하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의 정의 곧 긍정성을 외치는 자들이 특히 돈이라는 부정에 빠졌을때에 자살해 버린다. 결국 인간의 신앙도 돈 문제에서는 턱하고 걸림돌에 걸려버린다. 차리리 뻔뻔스럽게 전두환처럼 낯짝 뚜거운 인간이 더 낫다. 저런 낯짝 뚜껍고 뻔뻔스러운 인간이 될 빠에 자살하겠다는 심뽀가 개혁주의이다. 정의를 과연 언제까지 외칠수 있을까? 인간의 신체 자체가 부정한데 말이다. 사망아 너가 쏘는 것이 뭐냐? 정의로울수록 거룩할수록 열심히 특심일수록 사망의 맹렬한 쏘임에 이겨낼 재간이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 차라리 그 죄책감이란 결국 자기가 자기를 속이는 속임수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자기를 자기가 심판한다. 웃낀다. 법도 속임수인데 말이다. 그 속임수로부터 차라리 배신 당해야 할 것이다. 애초부터 이길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음을 아는 것이 바로 죄인임을 아는 것이다. 이것을 모르는 것이 바로 개혁주의요 성화론이요 바리새인이요 생성(창조)의 철학 노마니즘이다)

애굽을 칠려고 곧 우상(인간의 신체)를 칠려고 정작 요셉을 착고에 차이고 쇠사슬에 채이도록 하기 위함은 저들의 제사인 법을 깨뜨리기 위함이다.

여자의 후손은 뱀의 머리를 친다. 뱀의 소욕을 하지 못하도록 말이다.
그러나 뱀 또한 여자의 후손의 발꿈치를 친다. 여자의 후손의 소욕을 하지 못하도록 말이다.

(갈 5:17, 개역)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이 두 욕망은 때로는 약자로써 강함을 추구하고, 때로는 강자로써 약함을 추구한다.
서로 서로가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편법이든 군사전략이든 뭐든지 서로의 대치성으로써 자신들의 소욕을 채우고자 한다.

그런데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그 소욕을 다 이루었다 라고 선언해 버렸다.

이미 패하기로 되어 있는 마귀는 괜히 예수님을 죽여버리는 때를 허비해 버렸다.

지연 시킬수가 없었다. 주님의 뜻대로 해야만 하도록 되어 있기 때문이다.
불공평이다. 똑같은 조건에서의 전쟁이 아니라 이미 지도록 되어 있는 전쟁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들은 저들의 맡은바의 역할대로 자기백성인 지옥백성을 만들기 위해서 끝까지 사투 해야만 한다. 9번 무너져도 10번 다시 일어나야만 하는 불굴의 의지가 심겨져 버렸기 때문에 하기 싫어도 하도록 되어 있다.

왜 이런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하는고 하니 지금 주님이 펼치시는 사건에서 마귀는 그냥 물러서지 않구나 끝까지 복수하고 그 마귀의 값을 톡톡히 한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래서 죄책감과 복수심이라는 제목을 달아봤다.

가인의 죄책감은 곧 법을 요구한다. 구원을 요구한다. 그래서 이마표를 하나님이 부여한다.
이제는 그 이마표가 자신의 구원의 정당성이 된다. 마치 유대인의 선택설(사랑함)이 예수님을 죽이는데 활용이 되듯이 말이다. 인간의 사랑은 곧 예수님을 향한 미움이다. 곧 이방인 약자에 대한 미움이 된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미움받는 잃어버린 자로 오는 것이다. 마치 데칼코마니 쌍둥이의 대칭점을 일부러 이룰려고 하듯이 말이다. 선악이다.
(죄책감은 나중에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그 권리를 결집시켜 보니 권력 곧 힘이 된다. 살인의지로 변모한다. 자신도 자기가 자기 스스로 심판했듯이 예수님도 심판해 버린다. 가룟유다는 예수님을 팔아넘겨 심판해 버렸듯이 자신도 심판한다. 자신이 선택했기에 자기 소유물을 자기 마음대로 할 권리를 행사한 것이다. 아벨의 제사를 선택한 하나님에 대해, 자신도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다고 응수 한다. 나도 내 마음대로 심판해 버리는 동생을 죽였습니다. 이것이 처음부터 죄책감을 가질 소유할 권리도 없는 인간이 법을 쥐게 되니 처음에는 죄책감으로 수치를 가릴려고 했지만 그 할례행하는 손할례가 결국 힘이 되고 권력이 되어 그 행함의 권력으로 예수님 까지 죽여버린다. 왜? 그런 손할례를 철두철미하게 지키든 말든 이미 가인제사와 상관 없는 예수님의 제사를 받기로 작정 되어있기에 그것을 알고 비로소 강퍅함으로 예수님을 죽여버리는 것이다. 아벨이 죽는 방식과 똑같다. 정작 기이한 부정성은 예수님의 이런 십자가예정이다. 십자가를 도출하기 위해서 사건을 이런 식으로 배치시킨 것이다. 그러나 기관 없는 신체로 주장하던 ,신체 없는 기관으로 주장하던. 결국은 자신의 숙제로 말하는 것이 철학자들의 한계이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으로부터 부정당하지 않는다.- 죄 지적 받지 않는다. 그래서 부정당한다. 반대를 위한 반대, 바닥의 바닥, 부정의 부정이다.)

그 이마표의 입법성은 국가 체제의 원본인 기관없는 신체으로써의 국가 바벨탑이 되듯이 방주와 짝을 이룬다. 이것이 인간의 어쩔수 없는 죄의 소원인 선악의 덮침이다. 모든 성경말씀은 은혜 뿐인데 놀랍게도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선악 뿐이다. 먹음직 보암직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러운 말씀 뿐이다. 그래서 지키는 명령어 뿐이다고 한다.

예수님 조차도 선악으로써만 본다.

우리는 이 선악을 거쳐야 한다. 지독한 미움을 받도록 되어있다. 그래서 왜 예수님이 지독한 편애를 받은 남은자인지를 알아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입법자로써 범법자를 거룩한 법 하나님의 법으로 실행하는 것이다. 곧 처형이다. 우리가 가야할 길을 본으로써 먼저 가셨다. 우리가 파 놓은 함정에 주님이 너끈히 가셨다면 우리 또한 그 함정인 불 속으로 들어감이 마땅하다. 그러니 그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짖인가? 철저한 모순이다. 자기가 파 놓은 함정에 예수님을 선악으로 죽여놓고서는 이제는 그것이 은혜의 길 십자가의 생명의 길임을 알고 같은 노선에 따라가니 참으로 어리석은 것이다. 지옥의 저주의 문을 활짝 활짝 열어재껴놓고 자신들은 내몰라라하고 빠져버리고 배제되고 누락되어 버리니 말이다. 창조한테 다 떠넘겨버리고 뻔뻔스럽게 지옥문 열어 마귀들과 싸움만 붙이고 말이다.

이것이 여성 되기 이다. 창조 곧 생명 되기 이다. 생명이라면 과연 죽음의 저주의 문을 활짝 열어도 상관이 없는 것이다. 과연 음부의 권세가 이기는 자인지 아닌지를 도리어 원수의 문을 열어버리는 것이다. 졸지에 예루살렘이 원수의 성문이자 동시에 시온의 문인 구원의 문이다. 

(창 24:60, 개역) 『리브가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우리 누이여 너는 천만인의 어미가 될지어다 네 씨로 그 원수의 성문을 얻게 할지어다』

모든 시간과 곧 역사와 모든 공간 곧 모든 사건을 압축시켜보면 한 장소와 한 시간에서 벌어지는 것이다. 곧 신체다. 신체를 깨고 그 신체 속에서 알까기를 하듯이 약속을 끄집어 내는 것이다. 언약은 그렇게 드러나는 것이다. 이 약속의 몸을 얻고자 예수님은 도리어 내어줌은 당하는 것이다.

(고전 9:19, 개역)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고전 9:20, 개역) 『유대인들에게는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고전 9:21, 개역)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는 자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고전 9:22, 개역) 『약한 자들에게는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이니』

값주고 산 몸이기 때문이다. 이제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다.
소유성이 이전 되었다. 값을 치르고 목숨값인 피 값을 치르고 샀으니 주님 마음대로의 소유성이다.

이것이 여성 되기 이다. 여자가 여성 되기 한다는 뜻이 아니라. 되기란 창조요 여성이란 생명성이다는 것이다. 어려운 내용이니 반대의 의미를 말하면 그 차이성 때문에 쉽다.

여성 되기의 반대말이 남성되기가 아니다. 반대의 의미를 유기체가 된다는 것이다. 조직화 시스템 갖추는 것이다. 여성되기를 시스템으로 갖추어 버리면 그것은 더 이상 여성되기가 아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오늘날에도 자행되고 있다.

주님 쪽에서는 떡 줄 생각도 안하고 있는데 인간 쪽에서 자기들 끼리 김칫국부터 마시는 자들이 있다. 바로 교회다. 구약의 이스라엘 역사가 이러하다. 주님이 오시기 까지는 알수 없는데 이미 자신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다 라고 선언을 하는 입장에서
바로 그런 배경을 깔고 과연 하나님의 백성인지 아닌지를 하나님의 백성의 반대인 이방인 또는 거룩한 민족의 반대인 더럽고 저주받은 세리 강도 창녀 등등을 자신의 백성으로 삼아서 복음을 펼치니 아니나다를까 그들이 본색이 악마의 자식임이 드러났다.

오늘날도 동일하다. 차라리 우리가 세리요 강도요 창녀요 가라지인 심판 받을 자리에 있었다면 긍휼을 받을 텐데

이미 따 놓은 당상으로써 성전 안에 두 사람인 바리새인과 세리의 차이성은 곧 지옥과 천국의 차이성으로써 영원히 갈라버리는 간격을 바로 한 성전 안에서 벌려놓는 것이다.

성전이란 응축점 이다. 시간(역사)와 공간(신체)를 압축시켜서 그 속에서 갈라지는 현상을 보여주는 창조라는 마당터로써의 스크린 영상을 표현 발휘한다. 그래서 가라지와 알곡은 공존한다. 미리 심판을 앞당겨 펼치고 자신들은 예외로 두고 있는 그 정당성과 책임성은 바리새인이다. 그러나 그 심판 앞에서 마땅함을 알고 긍휼을 바라는데 놀랍게도 그 심판성에 예수님이 뛰어든 것에서 세리와 같은 기이한 부정성의 인물들은 도리어 이 일 때문에 배치되어야 했음을 알게 된다.

그 기이한 부정성은 곧 믿음이다. 믿음이 곧 예수님이 부정한 불임의 여성으로 만들었고, 죽은자와 방불한 고자로 만들었고,

(히 11:12, 개역) 『이러므로 죽은 자와 방불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에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이 생육하였느니라』
(히 11:19, 개역)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히 11:35, 개역)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를 부활로 받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하였으며』

(롬 4:17, 개역) 『기록된 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의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
(롬 4:24, 개역)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롬 6:4, 개역)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침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롬 6:7, 개역)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
(롬 6:9, 개역)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사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롬 6:11, 개역)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
(롬 6:13, 개역)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의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롬 7:4, 개역)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이니라』
(롬 8:11, 개역)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롬 10:7, 개역) 『혹 누가 음부에 내려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내려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것이라』

이것은 오직 산 자인 산 영 되신 예수님의 일하심의 영광을 높이기위함이다. 우리가 죽었다가 다시 사는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영광을 온 우주 만방에 펼치시기 위해서 우리가 그 영광을 얻게 되어 만방에 외치기 위함이다.

그래서 범법자로 태어났어야만 하는 것이다. 강도로 태어나야만 했고, 창녀로 태어났어야 했고, 고자로 태어났어야 했고, 세리로 태어났어야 하는 것이다.

이 기이한 부정성은 그야말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이다. (성화론자들의 하나님 형상 회복운동은 그 반대다. 그야말로 기관없는 신체이다. 개혁주의다. 고정화 되지 않고 유기체 조직 시스템이 되지 않고 묵시라는 종말운동을 펼치면서 그런 자신의 신체가 되기를 말이다. 그러니 자기 숙제인 셈이다. 늘 끊임없이 자기부인을 하면서 회개하는 삶이다. 종말의 삶이다. 의인으로 살아야 한다. 교회에 덕이 되며 회개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기도란 곧 회개란 무능한 인간임을 불쌍히 여겨달라는 자기육체를 찢는 것이다. 곧 죽음이다. 죽어 마땅한 죄인임을 아는 것이다. 그런데 무능하니까 유능하게 해달라고 하는 식이다. 덕스러운 인간이 되어야지 수치스러운 인간이 되지 않도록 해달라는 것이다. 할례를 거꾸로 해석한 것이다. 손할례를 정당화 하지, 마음의 할례 곧 유능하게 해달라는 그것을 죄로 여기고 그 죄를 짤라내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더더욱 곤고하게 해 달라는 식이다. 그런 기도 들어주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해 주겠다는 식이다.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복수심과 살인의지는 더더욱 크게 되는데 말이다.)

곧 죄인으로 오심이다. 이런 주의 주 되심은 의인이 된 선악을 아는 하나님과 같이 된 인간의 그 하나님을 깨고자 함이다. 임마누엘 전쟁이다. 내부에서 한 성전에서 영원히 갈라버린다.

즉 성전이 된 인간의 신체에 대한 기이한 부정 즉 반대를 위한 반대로써 반드시 깨겠다는 것이다. 어 그런데 안 깬다. 도리어 예수님 자신의 신체를 깨 버리신다. 주의 주 되심이다.
주가 주를 치신다. 그리고 그 치신 부정의 자리를 생성 곧 창조하심으로써 여성 되기를 이루신다. 이 여성 되기의 모태에서 왜? 유일한 생명이기에 그것도 죽었다가 살아난 경험, 잃어버렸다가 되찾은 경험으로써의 십자가 라는 부정의 모태에서 난 새로운 후손들이 이 모태에서 태어나지도 않은 자들과의 충돌 속에서 기이한 현상을 만들고 유발하고 창조하고 흡집내며 더더욱 확장 시키는 것이다. 그 현상을 종말이라고 한다.

그래서 사랑을 잔인하고 폭력적이다 라고 한다. 인간의 신체에서의 사랑은 그 반대이다. 미움의 대상이 없다. 조건은 자신의 신체만을 건드리지 않는 이상 늘 모든 것을 사랑하며 모든 것을 포용 수용한다. 이런 욕망으로만 가득찬 신체이다.

그러나 십자가의 사랑은 폭력적이다. 질투적이다. 시기한다. 바로 폭력없는 사랑을 증오한다. 미움의 대상이 없는 그 사랑을 질투한다. 그래서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무조건적으로 그 신체를 흡집내고 수셔대고 깨뜨린다. 이것이 빼내기의 방식이다. 차이내기의 방식이다.

이 기이한 부정성은 강도 만들기 곧 여성 되기 이다. 주님이 새로 창조한 것이다. 부정성이라는 이름으로써의 저들과의 차이성 내기 이다.

아담이 정죄 했던 그 여자 하와가 도리어 생명으로써 칭송 받는다. 나에게서 나올 수 없는 생명을 차이성으로 본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에 살을 바로 정죄함을 거쳐서 정죄함이 없는 기이한 부정성인 십자가를 거쳐서 보는 것이다.

이런 과정이 아닌 것은 아무리 의롭게 갖추어도 곧 수치를 가릴려는 죄책감일 뿐이요
그 죄책감은 곧 복수심으로써 살인을 품은 것이다.

그리고 그 살인의 강퍅성은 기이한 부정성인 범법자의 미끼(예수님) 됨으로써(십자가), 감추고 싶어도 감출수 없는 속내 들추기로 인해 들추어지는 것이다. 악은 악의 값을 하도록 말이다.


(마 23:35, 개역) 『그러므로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너희가 죽인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 땅 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가리라』


(마 23:27, 개역)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마 23:28, 개역)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
(마 23:29, 개역)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쌓고 의인들의 비석을 꾸미며 가로되』
(마 23:30, 개역) 『만일 우리가 조상 때에 있었더면 우리는 저희가 선지자의 피를 흘리는데 참예하지 아니하였으리라 하니』
(마 23:31, 개역) 『그러면 너희가 선지자를 죽인 자의 자손됨을 스스로 증거함이로다』

(마 23:32, 개역) 『너희가 너희 조상의 양을 채우라』
(마 23:33, 개역)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마 23:34, 개역)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선지자들과 지혜있는 자들과 서기관들을 보내매 너희가 그 중에서 더러는 죽이고 십자가에 못 박고 그 중에 더러는 너희 회당에서 채찍질하고 이 동네에서 저 동네로 구박하리라』


(마 23:35, 개역) 『그러므로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너희가 죽인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 땅 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가리라』
(마 23:36, 개역)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것이 다 이 세대에게 돌아가리라』
(마 23:37, 개역)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 하였도다』
(마 23:38, 개역)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 바 되리라』
(마 23:39, 개역)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할 때까지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트랙백 보내기 댓글 쓰기


티스토리 툴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