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이란 없는 겁니다.

2004-09-27 09:55:41  이름 : 김대식


인간이 가지고파 안달한 믿음은 자기를 살리는 쪽으로 흐릅니다. 일종의 기술습득입니다. 믿음이란 기술이 있어야지만 척박한 종교활동 속에서 살아남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인정받죠. 그래서 너도나도 제시된 인물의 믿음을 따라잡기 하는 겁니다. 자기를 위한 것이면 곧 뭐죠? 우상이지요. 뭐든지 다 끌어모읍니다. 영웅적인 믿음을 추구하기 마련입니다. 유대인들은 아브라함도 모세도 우상화 한 기술자이기에 정작 예수님을 거부한 겁니다. 우리가 본능적으로 추구하고자 하는 믿음도 다 그런 방향입니다. 반드시 자기자랑이 따라붙습니다. 못이기지요. 남들이 부추겨 주는데 어떻게 거부하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의 믿음은 자기를 죽이는 쪽으로 갑니다. 하나님의 믿음은 자기 독생자를 버리시는 쪽으로 갑니다. 여기에 한 다리 걸쳐서 인간은 자신의 믿음으로 크로스 합쳐질수가 있습니까? 인간의 상상은 어떻게든 합쳐져서 예수님의 믿음 덕분에 날 좀 살려보고자 날 좀 구원시켜보고자 몸부림치는 식의 믿음이지만 정작 예수님은 마땅히 죽어야함을 제시하기에 인간의 믿음은 모두 허상임을 고발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믿음은 아무도 눈치 채질 못합니다. 초라한 믿음, 사람들이 원치 않는 믿음, 사람들이 싫어하는 믿음만으로만 등장하시니 차라리 그 믿음 가졌다간 패가망신할까봐 서로서로 피하고픈 믿음입니다. 뭐 그런데 딴사람은 몰라도 나는 예수님을 믿을꺼야? 뻥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인간이 꿈꾸는 믿음은 자기를 살릴수도 없을 뿐더러 남도 같이 자폭시키는 결과 뿐입니다. 모든 인간의 믿음으로 예수님을 죽인 사건이 십자가의 사건이니깐요.

예수님의 믿음은 이런 인간의 믿음을 고발하고 죽음으로 달려갑니다. 즉 예수님의 믿음이 모든 인간의 믿음을 더더욱 자극시켜 십자가의 사건을 유발케 한 것입니다. 원망하기 싫어도 원망하게 되고, 죽이기 싫어도 죽도록 합니다. 모두다 뱀에 물려 죽어가는 실체를 보여주시는 겁니다. 그런데도 그 속에서 믿음이 나온다고요? 막혔는데요 어떻게 (롬 3:19).

이런 뱀에 물려 있는 실체를 폭로하시고, 예수님의 믿음은 뱀의 정체, 죽음을 제거 하시는 원수 잡기를 시도하십니다. 인간의 믿음은 이런 것에 관심 없습니다. 그저 자기 구원만 챙기면 땡이니깐요. 예수님의 믿음이 원수 문제를 해결함으로 비로소 그 전쟁에서 끄집어낸, 그 거룩한 전쟁의 승리로 빼앗아 온 전리품에게 양자를 삼고, 자신의 믿음의 옷을 입힘으로 자기 의에 참예케 합니다. 믿음을 선물로 주시는 겁니다. 받게된 믿음 선물이니 그저 우리는 아무것도 한 것이 그저 값없이 받게된 겁니다. 그러니 그 믿음의 선물로 자기 믿음을 과시하거나 자랑으로 삼지 못하지요. 반대로 예수님의 믿음을 과시하며 예수님의 믿음을 자랑하는 증인이지요. 그저 의인이신 분의 믿음을 날마다 공급 받으며 사는 겁니다.

믿음 축적하기, 믿음 쌓기, 믿음 키우기, 믿음 성장케 하기, 바로 이런것이 종교라는 마약이 중독시킨 결과물들입니다. 이런 자들에게 날마다 공급 받아 그분의 믿음으로 산다고 한다면 얼마나 짜증날 일이 또 어디있겠습니까? 자기 믿음 다 날라가 버리는데...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는 이 말씀을 접하는 우리는 믿음은 우리가 지켜야할 사항으로 보고 있으며 의인은 그 지키는 믿음으로 달성할수 있다고 보고있지만

가만히 보니 의인에게만 해당되는 믿음입니다. 즉 의인은 없죠. 그러니 믿음도 없는 겁니다.

(합 2:4)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의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니라 그러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5-8 남은자

의인 아닌 자들의 마음은 교만, 정직치 못함이 바로 죄인의 믿음 아니겠습니까? 인간이 믿음을 소유하면 늘 교만하고, 자기를 포장하기 마련 아니겠습니까.

(롬 3:10) 『기록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시 53
(롬 3:11)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롬 3:12)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롬 3:13)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롬 3:14)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롬 3:15) 『그 발은 피 흘리는데 빠른지라』
(롬 3:16)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롬 3:17)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롬 3:18) 『저희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분명 없습니다. 없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누구를 제시하며 누구의 믿음이 나타났음을 증거합니까?

(롬 3:19)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롬 3: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롬 3:21)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롬 3:22)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롬 1: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인간의 믿음이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한다? 아니지요. 예수님의 의가 나타나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지요 어제 말한 아브라함의 믿음은 독자적 노선을 걷는 믿음이 아니라 예수님의 믿음이 나타나야만 완성되는 믿음의 족보인 겁니다. 결국 그림자죠, 실체를 드러내기 위한 그림자 진짜 믿음의 조상은 족보원조는 누구입니까? 예수님입니다. 그 예수님을 기준으로해서 그림을 그린다면 예수님을 그리고 빛이 비취이므로 그림자가 예수님의 발 밑으로 쭈욱 그려지는데 제일 끝의 그림자에 누가 있는 것입니까(다시 말해 그림자의 처음이 누구죠)? 아브라함 이더라는 겁니다. 그러니 아브라함은 예수님의 때를, 자기 믿음의 결과물을 기다린게 아니라, 자기 그림자 믿음의 실체를 기다려야만 하는 겁니다. 그림자 믿음이라는 표현은 실체가 있기에 나타난 그림자입니다. 실체 없인 그림자도 없지요. 그러면 따지지요 그림자 믿음도 믿음아니냐? 왜 자꾸 무시하냐. 그림자는 그림자인 자기를 목적으로 그림자 짖지 않지요. 실체가 없다면 그림자는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 소용없음을 미리 실체 앞에 실토하겠죠.  

(히 10:38)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히 11:6)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예수님의 믿음 없이는 기쁜소식 즉 복음이란 없습니다.

바로 히 11장에 나타난 믿음의 선배들은 예수님의 믿음을 미리 앞당겨 보여줌으로, 오늘날 현대교회의 탐욕적인 믿음과 대조를 이룹니다. 즉 히 11장의 믿음의 선배들은 예수님믿음처럼 자꾸 부정적인 방향으로 달려갑니다. 죽었더라 고난받더라 마치 아벨의 족보처럼 말이죠.  인간의 믿음은 자기를 살리는 방향인데 저들은 자꾸 죽었더라 방향으로 돌진합니다.

그러니 실체인 예수님의 그림자 맞지요 맞습니다 맞고요. 그렇기에 예수님의 믿음을 증거하는 증인으로 삼은거지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믿음 곧 십자가의 믿음을 증거하는 증인으로 세움을 받은 겁니다. 믿음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기에 그 믿음은 인간이 아닌 예수님에게서 나타난 유일한 믿음 아닐까요? 

(마 17:5)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벧후 1:17) 『지극히 큰 영광 중에서 이러한 소리가 그에게 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실 때에 저가 하나님 아버지께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느니라』


Re..믿음!!!

2004-09-29 10:32:28 조회 : 474     이름 : 이근호

헬라 철학자 파르메니데스는, '있다'와 '이다'를 구분하지 않았습니다.
믿음이 '없다'에서 '없다'라는 것은 '아니다'라는 말로 이해하면 됩니다.
즉 '아닌 것'은 '존재할 가치가 없는 것'과 통하기 때문입니다.

마치 인간은 '살아 있음"이라고 주장하고 싶겠지만
'네가 살아있다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라는 말과 같은 겁니다.(요한계시록 3:1) 

왜냐하면 가치없이 살아 있음은 '실상은 죽은 자'가 되고 그리고 결국 '없는 자'가 되는 겁니다.

이로서 인간에게는 '믿음이 없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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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생활 포기하기 

2011-07-17 07:57:19  이근호


“아, 지친다 지쳐” 아무리 좋은 직장이라고 매일 같은 일을 반복하면 지치기 마련, 아무리 예쁘고 좋아했던 사람이라도 매일같이 대하면 지치기 마련, 아무리 수다에 능한 사람이라도 자주 만나면 대화 내용이 뻔하고 지루해서 들어주는 고역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소위 신앙생활이라는 것도 이렇게 얼마 안가서 이렇게 지칠 수밖에 없는데 대략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교회에 나가서 교회가 짜놓은 1년 치 스케줄 따라 하기. 둘째, 정기적으로 벌리는 사적인 기도 시간과 조용히 성경 읽기 시간 갖기. 셋째로, 착한 마음을 많이 품어 과연 나에게 선한 행함이 나오는지 수시로 점검해서 자신을 신앙인으로 확인해 보기이다. 그런데 오랜 기간 동안 이 세 가지를 되풀이 하다보면 이것도 짜증나고 싫증난다. 그래서 첫째 교회 출석하기는 ‘가끔’ 하기로 한다. 그것도 교회에 평소에 보고 싶은 사람의 소식이 궁금할 때 겸사겸사해서 교회에 들린다.

둘째, 기도하기와 성경 읽기는 평소대로 하지만 그렇게 많은 시간을 쏟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읽어봤자 다 아는 내용이요 새로울 게 없고, 기도해봤자 내가 생각해도 거지같은 기도라서 하나님께서 안 들어줄 것이라는 뻔하기 때문이다. 셋째, 주변에 알아 줄 사람도 없는데 홀로 신앙인척 착한 행동해 봤자 나만 바보 된다. 그래서 착한 마음, 착한 행위는 나중에 시간적 여유가 있고 생활이 어려움을 없을 때 한꺼번에 집중적으로 하기로 마음먹는다. 그 때 열심히 하면 하나님께서 나보고 기특하다고 고개 끄덕거려 주시리라 여긴다.

바로 이것이 오늘날 교회 안에는 오락만 살아남는다. 예배라는 오락과 하나님을 거론하면서 노닥거리는 소꿉장난들이다. 당연히 자주하면 지루하고 짜증나고 권태롭다. 사람 만나는 것도 싫다. 왜냐하면 뻔 한 오락이기 때문이다. 처음 시작할 때도 오락으로 시작했고 나중에도 오락의 일종으로 마감된다. 오락이나 취미생활을 자주 바꾸어 주어야 맛이 난다. 오락이 사람을 위해서 있지 결코 사람이 오락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다. 오락에 미쳐 버리면 안 된다. 취미 생활에 전부는 거는 것은 도박에 빠진 사람과 다를 바 없다. 교회생활이나 신학 탐구나 남의 교회 비판하기나 하나님이나 예수나 성경공부나 율법이나 기도하기나 전도하기나 봉사하는 것이나 남의 사이트에 들락거리는 것도 모두 오락이다. 심지어 철학 공부하는 것도 오락이요 고상해보이기까지 하는 시간 때우기의 일환이다.

처음 할 때는 신나지만 얼마 안가서 지루해서 짜증난다. 인생 사는데 있어 뭐니 뭐니 해도 돈, 이 돈 버는 재미만큼 따라 갈만한 것이 없다. 돈이 안 벌리니, 돈 버리는 기회를 갖지 못했으니 그 시간만큼을 때우는 식으로 하나님에게 쬐게 신경 써 본 것이다. 지금이라도 돈 벌 수 있는 행운이 찾아온다면 그딴 신앙생활도 일거에 포기할 만반의 마음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 인간이다. 돈 버는 오락이 최고다. 따라서 인간이란 처음부터 재미를 위해 죽고 재미에 사는 존재다. 예수님이 없는 지옥이라도 인간들 끼리 재미있게 사는 곳이라는 그 ‘재미’를 위해 지루한 천국을 포기할 자들이 인간들이다.

참된 교회란 천국을 위해서 있는 곳이다. 따라서 정말 재미없어야 한다. 처음부터 재미없어야 한다. 처음부터 마음에 드는 사람이 없어야 한다. 처음부터 죽은 시체놀이를 해야 한다. 모두가 모두를 쳐다보면서 좀비나 유령 보듯이 해야 한다. 살아있는 생동감이란 아예 기대조차 하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사방이 십자가에 쏟아진 예수님의 피 범벅이기 때문이다. 이 안에 제발 신앙생활을 하지 말자. 그냥 피 안에서 살자.
 
 

이한례  11-07-17 11:24 
 
마귀에게 사로잡혀 있는 자는 도저히 신앙생활을 포기할 수 없다.
그들의 아비는 마귀이기 때문에 아비가 주는 모든 영광을 누리고 있는데 어떻게 포기할 수 있겠는가.

다만 이렇게 마귀에게 종노릇 하고 있는 줄도 모르고 있는데
어느날 보쌈해서 탈출시켜 준 자들만 그 탈출구에서 나온 후에야
마귀에게 갇혀 있었던 사실을 알게 되죠.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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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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