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30 : 구원(소유)을 버리면 누가 구원을 얻는가?

2011년 7월 18일 월요일 오후 10:52:21  김대식


소유(복)로 인한 불안 근심의 부자청년(버리는 행위를 소유한 제자)과
            vs  저주(핍박: 십자가) 받기를 원하는 3일 만에 다시 살아나시는 예수님


(막 10:17, 개역) 『예수께서 길에 나가실새 한 사람이 달려와서 꿇어 앉아 묻자오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막 10:18, 개역)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막 10:19, 개역) 『네가 계명을 아나니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 말라, 속여 취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
(막 10:20, 개역)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
(막 10:21, 개역)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가라사대 네게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막 10:22, 개역)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고로 이 말씀을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
(막 10:23, 개역) 『예수께서 둘러 보시고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도다 하시니』
(막 10:24, 개역) 『제자들이 그 말씀에 놀라는지라 예수께서 다시 대답하여 가라사대 얘들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떻게 어려운지』
(막 10:25, 개역) 『약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신대』
(막 10:26, 개역) 『제자들이 심히 놀라 서로 말하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 하니』
(막 10:27, 개역) 『예수께서 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그렇지 아니하니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막 10:28, 개역) 『베드로가 여짜와 가로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나이다』
(막 10:29, 개역)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막 10:30, 개역)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막 10:31, 개역)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막 10:32, 개역)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 서서 가시는데 저희가 놀라고 좇는 자들은 두려워하더라 이에 다시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자기의 당할 일을 일러 가라사대』
(막 10:33, 개역)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기우매 저희가 죽이기로 결안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주겠고』
(막 10:34, 개역) 『그들은 능욕하며 침 뱉으며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니 저는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니라』


인간 세계에서의 재물 곧 돈은 복과 같은 개념이 됩니다. 복이 아니라면 인간이 할짖이 없어서 평생을 돈 버는(소유) 일에 매진하겠습니까? 일이 아무리 가치가 있다고 해도 그 일로 인한 잉여가 없다면 즉 재물이라는 복이 없다면 인간은 그 일에 반드시 저주를 퍼붓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현재에 와서 그 직장에 아무리 20-30-40년을 청춘을 바쳤다고 해도 막상 오늘 당장 하루살이의 월급 품삯을 주지 않으면 남들도 이 직장의 부조리를 알게 해야 한다고 데모를 하고 나와 같이 재수 없는 일을 당하지 말라고 그 회사의 일을 하지 말라고 일일이 말리면서 다닐것입니다. 자신에게 더 이상 가치가 없게된 일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물건도 마찬가지입니다. 물건이라는 잉여물이 정작 나에게 쓰임새가 있어야 하는데 돈주고 구입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도리어 피해를 주고 신경쓰이게 만들어 버리면(돈 먹은 커피 자판기 처럼) 도리어 그 물건에 대한 악플을 남겨서 이 물건을 사지 말도록 하는 겁니다. 즉 저주를 퍼붓는 식입니다. 자판기를 발로 차고 난리 칩니다.

그러나 정작 복이라는 재물에, 돈에 저주를 퍼붓는 자는 없습니다. 인간의 공동분모인 욕망에 저주를 퍼붓는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이 세상에 없습니다.

자신에게 로또가 당첨이 되어서 갑자기 졸부가 되면 남들의 부러움을 사지
넌 저주 받았구나  화로다 나는 망하게 되었구나
안됐구나 쯧쯧쯧 하는 자는 없습니다. (10명의 문둥병자 중 1명의 문둥병자)

정작 로또 당첨 된 자신 부터도 나는 저주 받았구나 재를 뒤짚어 쓰면서 죽은자가 되었구나 하는 자는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늘 아침에 눈만 뜨면 복권살까 라는 생각으로 가득차 있지
그 생각 한다는 자체로 나는 망해야 마땅한 자 이구나 저주 속에 있구나
저주 받았구나 라고 인식이 될꺼 같으면 누가 복권을 사겠습니까?
복권 생각만 해도 괜히 활력소가 되는 판국에 말이죠.

뭐 이런 현상을 뇌를 속인다는 심리가 있다는 둥 하던데 (뇌를 속여라)
긍정의 뇌 도파민을 활성케 한다는 둥 그런 일종의 심리겠죠.
(뇌를 속이겠다는 그 생각은 뇌가 아니고서 누구인지? 행복한 착각, 도파민의 유혹 등등)

그만큼 상대적으로 인간의 삶이란 것이 피폐하다는 겁니다. 원래는 이게 처음의 본래 모습이 아니었다는 증거죠. 그렇다고 달리 방법이 없습니다. 제목을 저렇게 했다고 아 그럼 안소유해야지 무소유해야지 하면 안됩니다. 이미 인간은 자신의 육체를 가진 이상 소유에 소유당하는 어쩔수 없는 환경에 처한 겁니다.

오늘 그 유명한 부자청년 이야기가 나옵니다. 문제는 이 뒷이야기가(제자들 놀라는 사건) 더 중요합니다.

부자청년은 세상의 흐름을 일찍 파악했습니다. 부요함을 부요함 답게 즉 복스럽게 하는 것은 이 복이 누구로부터 왔는가를 아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경외에 대한 율법을 완벽하게 지키고자 더더욱 노력합니다. 얼마나 기특합니까?

마태복음에서는 부자청년이라고 했고(마 19:16) 누가복음에서는 어떤 관원 (눅 18:18) 즉 유대인 지도자 로 표현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인 마가복음은 한 사람으로 표현되었습니다.

누가봐도 이 부자는 노말한 참 수수한 겸손한 부자이지
교만한 부자가 아님을 알수 있습니다. 그것도 젊은 나이의 부자입니다.
즉 젊은 나이에 겸손한 부자는 잘 없다는 겁니다. 대부분 젊은 나이의 부자이면 이미 돈에 넘어간 자입니다. 그런데 젊은데도 불구하고 이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것을 안다는 것은 엄청난 가장 수준 높은 성화론자입니다.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 동급입니다.

예수님께 묻는 자세가 특이합니다. 무릎을 꿇습니다. 그리고 선한 선생님 이라고 표현합니다. 이 얼마나 자신을 낮추는 자세가 아닌지요?

얼마나 완벽합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족한 것이 어느것인지 지적해 달라는 겁니다.

이런 부자청년은 모든 사람들의 부러움을 다 갖춘자이므로 예수님과의 잘 맞는 그야말로 함께 일하고 함께 동행한다면 금상첨화 인 사람일 것입니다. 비단 자체가 비싸고 곱고 아름다운데 거기에다가 중첩으로 꽃까지 더해지면 잉여의 잉여입니다. 복 중의 복입니다.

자 그런데 이런 분위기에 남들의 부러움의 시선을 한 껏 받는 그 부자와 함께한 그 시선에
재를 뿌리듯 초를 치는 사람은 바로 예수님입니다.

아예 소통 자체를 차단합니다. 난 선하지 않다 왜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 라고 말씀하십니다.

소통의 요소를 깡끄리 모조리 다 차단합니다.

즉 말 짤라먹는 개무시를 하는 식입니다.

난 너랑 말 썩을 이유 없거든? 내가 잘 못 들었나?
뭐 내가 선하다고?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분이 없는데 내가 잘못들었나?

일단 무릎꿇고 선한 선생이여 라는 말은, 즉 상호인정 상호기만 상호위선은 먹혀들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겠습니까? 라는 것은 아직 남아있습니다.

이 영생을 부자청년은 시도합니다.

너는 계명을 알겠지? 살인하지 않기, 간음하지 않기, 도적질하지 않기, 거짓 증거하지 않기, 속여 취하지 않기, 네 부모를 공경하기를 알고 있지

네 압니다 제가 하나님의 거룩한 계명을 어릴적부터 다 지켰습니다. 모두 다.

이 말을 듣고 예수님께서 딱 하나가 부족하다고 합니다.

(마 19:21, 개역)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눅 18:22, 개역) 『예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이르시되 네가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나눠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막 10:21, 개역)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가라사대 네게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어 그런데 다른복음서와 차이나는 것이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라는 표현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알려주시는 것이 뭔고 하니

너의 소유를 다 팔아서 가난한 자에게 주고
천국 곧 영생의 나라에 들어가고자 한다면 나를 쫏으라 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 때문에 부자청년은 근심하고 돌아서 갑니다.

여기서 우리는 부자청년의 모습이 우리와 동일함을 인정해야 합니다.
뒤에 나오는 또 다 버렸다고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쫏아왔다고 한 제자들의 모습도
부자청년과 동일한 모습임을 우리는 또한 동일한 모습임을 알아야 합니다.

즉 소유성입니다.

소유에 인간은 마음이 가 있습니다.

즉 이것이 뭔고 하니 바로 율법 노선입니다.
다른 표현으로 하면 행함노선입니다.

영생을 달라고 하면서 정작 이들은 부자청년과 제자는 여전히 행함 노선인 율법노선을 놓지 않는 겁니다. 그래서 신앙생활 하지 말라고 하는 겁니다. 믿음이란 없다고 하는 겁니다.

http://www.crossvillage.org/board/index.php?doc=program/board.php&bo_table=column&wr_id=1591


인간에게 즉 육체에게 나올수 있는 것은 율법노선인 행함 노선입니다. 즉 소유성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다른 노선을 제시하는데 곧 사랑노선입니다. 지혜노선입니다. 그것이 바로 어리석음입니다. 지혜란 어리석음입니다. 율법에 대비해서 말입니다.

양심(도덕,윤리,예의,참선,참지혜) 이라는 이방의 지혜에 대비해서도 역시나 어리석음입니다.

둘 다 에게서 어리석음은 걸림돌입니다. 즉 부딧히는 충돌이 된다는 겁니다. 충돌이란 한 쪽이 깨어지지 않고서는 잠잠해 질 리가 없다는 겁니다. 하늘에 두 개의 태양이 없듯이 말이죠.

즉 예수님도 자신의 소유성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소유성은 어리석음이라는 노선의 소욕입니다.

이 두 소욕의 충돌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라는 말씀이 등장하는 겁니다. 그 사랑이 바로 영생의 비밀을 알려주시는 겁니다.

그러나 이미 부자청년에게는 불안이라는 근심이 이미 덮쳤습니다.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라는 말이 (아랍의 속담) 있듯이
사실상 율법을 지켰다는 그 행위 자체가 이미 영혼을 잠식한 불안상태입니다.
부요함이라는 소유성 자체가 이미 불안한 것입니다.

로또 당첨 되면 행복할 것 같았는데 정작 진짜 불안은 그 때부터 시작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육체라는 박스 자체가 부요함을 담아서 소유하든
율법을 지켜서 행함을 소유하든
영생을 담아서 소유하든

정말 정말 웃끼는 것은 소쿠리 박스 자체가 불안한 새는 바가지 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다 버려라 라고 하시는 겁니다.

소유를 버리면 또 소유를 버린 나를 또 담습니다. 이것을 지적하시는 것이
부자청년을 근심으로 따돌려 놓고서

부자가 왜 천국에 못 들어가는지를 제자들에게만 쏙딱 쏙딱 부자 뒷담 까듯이 둘러보시고 알려주시는 겁니다.

그런데 정작 놀라는 것은 제자들입니다.

재물이 있는 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심히 어려운지

약대가 즉 낙타가 바늘 귀를 통과 하는 것이 불가능 함에도 불구하고 쉬운 것은

대조적으로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더 더 더 더 불가능하다는 겁니다.

무슨 말 장난도 아니고 말이죠.

그러니 근심하고 돌아선 부자청년이 지금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정작 제자들 자신들이 더 큰 문제로 다가오니까 놀라는 겁니다.

사랑한다 캐놓고서는 근심케 맹글어 등돌려 보내버리고서는
이제는 제자들을 향해서 그러시고 있다는 것에 막상 당하고 있는 제자들도 지금 심히 심히 놀라고 있는 겁니다.

(막 10:26, 개역) 『제자들이 심히 놀라 서로 말하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 하니』

아니 구원 받을 조건을 다 갖추었는데 그 구원의 조건을 다 버리면 누가 구원 받겠습니까?

지금 예수님은 아예 구원을 차단하시고 있군요 라는 겁니다. 맞습니다. 딩동댕

그러나 여기서 항상 눈치 없고 융통성 없는 베드로는(곧 우리들의 대표성) 아냐 아냐 남들은 몰라도 나는 주님을 사랑해 라고

자신의 예수님에 대한 사랑을 여전히 소유성으로써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저는요 물고기 잡는 그물을 버렸거든요 즉 생계를 버리고, 직업도 버리고, 가족도 버리고, 모두 다 버렸거든요. 그래서 주님을 쫏았거든요. 저 근심하고 등돌리고 돌아선 부자청년과 같지 않음을 하나님께 감사하나이다.

여기에 예수님은 또 부자청년에게 하셨듯이 초를 칩니다.

모든 것을 버린자는 백배나 받되 영생을 안 받고는 못배긴다. 단 핍박(저주) 받기 겸해야 한다.

결국은 이 말은 하나 마나 한 소리 아닙니까? 안된다는 소리 아닙니까?
맞습니다. 강조에 강조입니다.

(막 10:27, 개역) 『예수께서 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그렇지 아니하니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그래서 앞서서 이 말씀을 하신 겁니다. 인간은 안 된다 라는 겁니다.

(막 10:31, 개역)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단 핍박을 받는 저주가 동행해야 하는데 그것이 먼저 된 자 나중되고 나중된자 먼저 되게 하는 식이다는 겁니다.

자 그럼 왜 인간은 안된다는 말입니까?
되게 하면 안될까요? 핍박 까짓꺼! 저주? 까짓꺼? 소유하죠 뭐 행하죠 뭐,
문제는 행하든 소유하든 담든 상관없이 담아도 아무런 의미가 없는 이유는 담아본들 새는 바가지인 그릇이 문제라는 겁니다. 소유해도 의미 없는 것이 박스가 문제입니다. 문제.

뭘 할까요? 어떻게 살까요? 영생 받기 위해서 구원받기 위해서? 어떤 조건을 갖출까요.
아무리 아무리 질문하고 묻고 행하고 실천해도
새는 바가지인 옛부대는 옛부대일 뿐입니다.

그러니 차라리 담지 마세요 담아보면 정작 근심이 닥칩니다.
왜 불안이 닥치는 고 하니 줄줄줄 새어나가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불안한게 아니라, 불안이 인간에게 덮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어떤 소유성도 (특히 믿음이라도) 불안을 떨칠수가 없습니다.
불안이 절대로 놓아주질 않습니다. 불안이 인간 보다 강합니다.
인간이 소유하는게 아니라, 소유가 인간을 소유합니다.
인간이 죄를 짖는 것이 아니라. 죄가 인간을 죄 짖게 하는 인간을 장악하는 겁니다.
죄가 인간을 가지고 놀고 있는 겁니다. 불안이 인간을 가지고 놉니다.

그 놀이에 부자청년은 예수님에게 까지 장난을 치는 겁니다.
신앙놀이 장난 말입니다.

이것은 제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믿기로 신앙으로 예수님하고 장난칠려고 시도하는 겁니다.

그러나 주님은 너희들은 마귀에게 갇혔다 라는 것을 알려주시는 사랑을 보여주십니다.
분명 오늘 본문에 마귀는 안 보입니다. 언급도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미 마귀에게 잠식당한 부자청년을 통해서
덩달아 제자들까지 포함해서

이 마귀의 정체를 밝히시는 겁니다.

율법을 지켰다는 소유성 곧 행함을
또 그것이 잘못 되었다면 누가 구원을 받겠는가 라고 놀라는(불안해 하는) 제자들의 행위
거기에다가 한 술 더 떠서 나는 지금 이 순간 예수님이 지금 말씀하시는 그 내용 다 지켰지롱 이라고 다른 제자들 보다 우월성을 소유한 베드로의 헹위까지

이 모든 것을 예수님은 해결하셔야만 하시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겁니다.

결국 부자청년이 말하는 영생은 예수님의 죽음 곧 예루살렘이라는 지정된 장소(원수의 성문)에서 반드시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율법시스템에 의한)에게 넘겨져서 저희가 죽이기로 결안되고 또 반드시 유대인 단독이 아닌 이방인(로마)까지 합세함으로써 이방인에게 넘겨져서 그들은 능욕하고 침뱉고 채찍질 하며 죽일것이니 이는 삼일만에 살아나야 하기 때문이다. 라는 겁니다.

즉 이것은 예언된바입니다. 부자청년은 예언 되지도 않은 것을 소유 했노라고 구원의 영생의 조건인냥 내세우지만

또 제자들은 부자청년이 못하는 행위를 자신들은 소유했다고 구원의 조건으로써 하늘나라 들어가는 조건으로써 내세우지만 그것은 예언된 바가 아닙니다.

예언된 것만 됩니다. 그 예언된 것이 뭡니까?


율법 노선(행함노선) 입니까? 아닙니다. 어리석은 지혜노선입니다.
(이번 부산 강의에 상세히 나옵니다.)
http://www.crossvillage.org./board/index.php?doc=program/board.php&bo_table=lecture04&page=1&wr_id=370

일부러 율법노선인 행함노선을 피해서 이루는 겁니다. 그것이 지혜입니다.
십자가의 어리석은 죽음의 노선이 예언된 바이지
그것이 영생이지
율법으로는 영생이 아닙니다. 도리어 율법은 모든 인간을 죄 아래 가두기 위함입니다.
죄인이라는 조건을 만들기입니다.
즉 인간이 사랑한 것이 아니라 주님 쪽에서 사랑한다는 것을 알기 위해
화로다 망해야 하는 군요 라는 죄인만들기 이다.
그래서 율법의 완성이신 예수님 쪽에서 찾아오시는 죄인을 부르시는 의사인데
도리어 그것 조차도 인간 스스로가 소유해 버리니까
죄인이라고 말하는 의인이 된 의의 옷을 소유한 자가 되어버린 겁니다.

예수님이 죄인을 부르러 오셨지 의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 아니거든요.
인간은 따집니다. 죄인이라는 조건 갖추었잖아? 소유했잖아 라고 말이죠.

그러나 소유는 또 불안합니다. 그래서 차라리 남들에게 욕먹지 않는 조건은 의의 옷을 입었다는 믿음을 소유해 버리는 겁니다. 어차피 예수님이 준 것인지 자신의 자아도취인 성경지식인지 누가 조사해서 밝혀낼 것도 아니니 말이죠. 다수에게 먹혀 드는 소리이면 된 거죠 뭐.

그러나 의의 옷을 소유한 그 소유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의의 옷 자체가 자체발광 자기영광을 드러내는 겁니다. 죄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육과 함께 운명을 합니다. (양자와 아들의 차이는 양자는 아들이 아니다는 뜻입니다. 죄수 복에 피가 발려서 특별사면조치된 것이지 그 죄수복에 발린 피가 스스로 영광 받기 위해서 죄수복을 벗기지 않습니다. 그래서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힌 여인이 율법의 옷을 입은 의인의 옷에 의해 정죄 받는 겁니다. 예수님의 피를 드러내기 위해서 양쪽다 걸려드는 겁니다. 아니 누가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힌 역할을 하고 싶겠냐 말이죠? 아무도 없습니다.)

(롬 8:15, 개역)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갈 4:6, 개역) 『너희가 아들인 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죄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죄 라는 먹보다 더 검은 죄에 흰눈 같이 흰 눈이 덮쳐지듯이, 붉은 피가 그 죄 위에 덮쳐지는 겁니다. 아무리 죄를 보고자 피를 훔쳐서 파내려 가도 죄를 발견할 수가 없는 겁니다. 여인아 나도 너를 정죄치 않는다.

(요 8:10, 개역)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요 8:11, 개역)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라]』

피를 높이기 위해서 죄인을 늘 가지고 노시는 겁니다.
(가시떨기나무에 여호와의 불꽃이 붙음으로써 기이한 부정이지, 불꽃독단이나? 나무가 쇠나무로 돌변해서 동행하는 것이 아님)

마귀도 주님께 영광 돌리는 일만 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애굽왕과 애굽군사를 통해서 영광 받으심)

(사 1:18, 개역)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되리라』

그래서 죄라는 허물을 보시지 않겠다 하시는 것이고, 정죄치 않겠다는 것은 자신의 피를 죄와 대비해서 높이고자 함이지. 죄인을 높이고자 하는 이유가 아닙니다. 죄인에서 의인이 되었다고 그 의인 됨을 높이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누가 왜 했냐 라는 겁니다.

피가 했다는 겁니다. 왜? 그랬는데?

여기서 중요합니다. 어리석기 때문입니다. 이 어리석음이 바로 순종 곧 예언된 대로 고지곳대로 시키는대로 했다는 겁니다. 이것만이 창세전에 예정된 겁니다. 곧 십자가입니다. 이 어리석음 만이 예정된 겁니다. 인간은 반대입니다. 어리석음을 절대로 외칠수가 없습니다. 안어리석음만을 (먹음직 보암직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운) 외치도록 되어 있습니다. 인간의 소욕인 욕망과 부합되기 때문에 돌삐 맞아 죽을 리가 없습니다. 즉 소동과 충돌을 피하는 방식만을 추구합니다.

그런데 인간이 구원 받는 것이 예정 되었다고 하니 예언된 바를 밝히신 예수님의 말씀에 그 인간 구원이 안 나옵니다.

(막 10:32, 개역)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 서서 가시는데 저희가 놀라고 좇는 자들은 두려워하더라 이에 다시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자기의 당할 일을 일러 가라사대』
(막 10:33, 개역)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기우매 저희가 죽이기로 결안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주겠고』
(막 10:34, 개역) 『그들은 능욕하며 침 뱉으며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니 저는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니라』

이 말씀에 어디 인간 구원이 있습니까? 인간 구원이 있다면 놀라지 않죠. 근심하거나 불안하고 두려워할 필요가 없지요. 평상시 우리의 생각과 딱 들어맞으니까요? 일치성 이것이 파시즘의 종교 아닙니까?

그런데 구원의 목적인 종교를 깹니다. 아니 어디에 이 말씀이 창세전의 인간 구원이 있다고 합디까? 도리어 바로 그런 자들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고 삼일에 다시 사시는 것만이 예언된 바 곧 창세전에 기록된 바 된 영생인 겁니다.

이 노선이 아닌데도
부자청년은 엉뚱한 것을 소유 했다고 들고 오니 튕기는 겁니다.
그것을 보고 제자들도 튕기는 겁니다. 구원의 조건을 소유했으니 말이죠.
여기에다가 베드로까지 지금 이순간의 예수님의 말씀에 조건 맞는자는 자신 뿐이다 라고
역시나 자신의 소유성을 내밀다가 튕기는 겁니다.

다 튕겨버리는 겁니다. 무엇이? 영생이 말이죠.
왜죠? 창세전에 예정된 것 가지고 온나 라는 겁니다. 엉뚱한 것 가지고 오지 말고 말이죠.

그것은 십자가 밖에 없습니다.

또 오해하기를 십자가 믿기, 십자가 죽음 실제로 실천하기, 이것을 하라는 말일까요?

아닙니다. 주님이 하신것만 보시면 됩니다. 우리가 하는 것 백날 해도 거들또 안보고 튕가버립니다.

왜? 창세전에 예정 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언자들이 예언한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거짓 영에 속한 자의 말을 듣지 마세요.

우리는 저의 말만 들으면 됩니다. 목사도 쳐다볼 꺼리 깜이 되지 않습니다.
교회도 쳐다볼 꺼리도 안됩니다.

말씀을 실천했다고 하는 사람을 봐 봤자. 실망 근심만 더 됩니다.
차라리 초반에 실망하도록 주님께서 사건을 벌리심이 더 낫습니다.

이 땅의 보이는 것 즉 소유 성에서는 빨리 실망해버리는 것이 낫습니다.
아예 기대를 걸지 마시길 바랍니다.
특히 나 자신, 자기자신에게서는 더더욱 빨리 실망해 버려야 합니다.

재물을 복이라고 보고 있는 뇌의 속임수에 늘 속으니 말이죠. 나를 내가 속이는 겁니다.
그래서 안속을라꼬 교회에 다니고, 예수님을 믿어도 역시나 더 속 습니다.

결국 예수님 쪽에서 조치를 취해야 하는 겁니다.
그래서 모세는 변화산에서 별세해 주세요 라고 외치는 겁니다.
자기가 율법을 외쳐놓고 정작 탈락될 자이기 때문이기 때문입니다.
엘리야도 마찬가지입니다. 선지자 노릇을 해도 심지어 죽음을 격지 않고 승천을 해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림자 역할입니다. 실체가 아니기 때문에 실체에게 요청하는 겁니다.
죽어주세요 라고 말이죠. 왜 별세를 운운할까요? 창세전에 예정된 것이 딱 이것 하나 밖에 없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이라는 섬김 곧 믿음이 이루어 지길 원합니다 라고 해야지 내 믿음으로 예수님을 믿기를 원합니다 해 본들 소용없습니다. 창세전의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미 그것은 모세 엘리야 다 했잖아요?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창세전의 예정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도 못하는 것을 부자청년이 갖추어서 예수님께 나아가지만 튕기지 않았습니까?
부자청년이 튕기는 판국에 우리는 오죽하겠습니까?
제자들도 놀라는 판국에?
베드로도 튕기는 판국에?

왜 튕깁니까? 창세전에 예정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로지 십자가의 어리석은 죽음만이 튕기지 않는 영생입니다.
그것이 다음의 구절에서는 섬김으로 증거 됩니다.

그러나 그 어떤 인간도 섬김 자체도 불가능함을 역시나 튕겨버림 당함으로써 보여주십니다.

모든 인간들이 튕가버린 것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그 튕겨버린 증거로써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주춧돌이 되게 하는 그 어리석음만이
창세전에 예정된 것으로써 영생을 증거하십니다.

영생을 소유하고 했던 자가 그 부자청년이
정작 최종 소유코자한 영생에 의해
자신의 소유물들이 의미없음을 무용지물로써 지적당하는 그 사랑을
들통나는 겁니다.

영생으로부터 장악 당해야 하는 겁니다.

그것이 싫어서 도망칩니다. 근심하고 돌아섭니다.
놀라서 두려워 합니다.

영생으로부터 장악 당하는 것을 이루고자 예수님은 창세전에 예언된 바를 이루고자 오신 겁니다.

율법노선이 아닌 어리석은 지혜노선은 이렇게 우리의 소욕을 다 들추어내시면서 말입니다.

미리 우리 주머니에 있는 마귀가 심었던 것을 다 빼앗기는 것이
주님의 사랑입니다.

이 사랑 이 십자가 때문에 나 자신도 십자가에 못 박히는 그 빼앗김
나를 홀라당 빼앗기는 유일한 것은 십자가 뿐입니다.

(빌 1:21, 개역)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빌 1:22, 개역)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가릴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빌 1:23, 개역) 『내가 그 두 사이에 끼였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
(빌 1:24, 개역) 『그러나 내가 육신에 거하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


기도하겠습니다.

예수님 , 모든 소유를 버리라고 하니 또 버렸다는 행위를 소유해 버립니다.
그 정도로 우리는 구제불능이기에 창세전에 예정된 바인 십자가에서 다 이루십니다.

이 십자가의 저주를 주님께서 내 대신 받아 주심을 감사합니다.

예루살렘을 예정하시고, 대제사장과 서기관 그리고 이방인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는 것 외에는 예언 된 것이 아니오니, 십자가의 죽으심과 3일 만에 다시 사심만이 창세전에 예정 된 것 이오니
그 외에 다른 것 부자청년의 계명 지키기, 가난한 자에게 전 재산 다 주기, 모든 소유를 팔아 버리는 무소유, 이런 것은, 먼저 된 자 나중되고 나중 된자 먼저 되게 할수가 없음을 알게 하소서.

아들까지 내어주신 사랑을 보여주셔도 우리는 내 소유물에 내가 도리어 장악당하고 있습니다. 내 믿음에 내가 속고 있습니다. 내 신앙에 내가 속고 있습니다.

맞습니다. 인간의 믿음은 그저 복수심 이였다는 것을 십자가만이 알려주셨습니다. 창세전에 예정된 것만이 알려주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미쁘시사 나에게도 속지 않으시고 마귀에게도 속지 않으시고
어떤 누구에게도 속지 않으시고 시험들지 않으심으로써
창세전에 예정된 단 하나 십자가의 사랑을 이루셨습니다.

그 십자가를 쳐다볼수 있도록 예수님의 믿음이 끝까지 우리를 붙잡아 주시옵소서

우리를 이 악마의 소유 세계 속에서 건져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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