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Angst essen Seele auf Ali :  Fear Eats the Soul 19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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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를 보고서

2011년 7월 19일 화요일 오후 10:41:13  김대식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Angst essen Seele auf Ali :  Fear Eats the Soul 1974)


사랑은 이질적인 불륜이다. 늙은 미망인 청소부 여인에게 독일 속의 이방인 아랍계의 모로코인 젊은 알리가 우발적으로 만남을 갖게 된다. 나이 차이가 20살이 넘는다.

둘은 너무나 외로움과 삶의 무의미 속에서 서로의 그리움을 채워주는 사랑을 시작한다.

사랑이 시작되게 되니 아무런 문제가 없는 그 일상들이 갑자기 구멍이 뻥뻥 뚫리듯이 온갖 사건들이 이 불륜을 뛰어넘는 사랑 앞에서 시샘을 부리면서 뻥뻥 터지게 된다.


사랑의 흔적으로써 표적으로써 마리아가 임신케 된다. 졸지에 그렇게 친근하고 평상시에 자신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나누어 주면서 도움을 주던 이웃들도. 그 임신(사랑의 열매)로 인해 졸지에 그 이웃들이 돌삐를 들고 달려든다.

숨어있던 모습들이 드러났다.

모세의 온유로 구스여인을 취하게 되니 미리암 뿐만아니라 사실상 미리암은 대표성이다. 모든 교회(구원 선택받았다는 백성) 돌삐 들고 한결같이 돌던질 판국이다.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힌 여인도 마찬가지이다.
비싼 향유를 땅에 아깝게스리 허비한 예수님의 발을 씻긴 여인도 마찬가지이다.

다들 돌 삐 던진다. 그냥 던지면 살인이다. 그 살인을 가장 고귀하고 숭고한 바로 믿음을 가미시켜야 한다. 곧 법이다. 행함이다. 정의를 실천하는 행함이 있는 믿음이다. 그래야 정당하다. 그 살인을 가장 거룩한 법으로 포장해야만 기념비가 되기 때문이다. 기념되지 않을 것 같으면 돌 들 이유도 처음부터 없었다.

최대한 그 불안은 법으로 칭칭감아야 한다. 튀어나오면 안된다. 법만 나오면 만사오케이다.

그래서 그 불안과 근심을 감추기 위해 부자청년을 어릴적부터 하나님의 거룩한 계명을 지켜왔다. 혹시나 또 혹시나 모르니 불안이 튀어나오지 않도록 할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선생을 모셔서 자문을 구하는 것이다. 그것도 가장 고귀한 선한 선생을 모셔 놓고 말이다.
날라리 선생을 모시면 그 감추이고자 한 것이 튀어나온다. 안된다. 최고의 선한 선생이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악한 것이다.

과연 선함이 그 악한 짖에 말려들까?

그래서 모든 전 재산을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주라고 하신다.
말이 좋아서 나누어 주라는 거지

사실상 도둑놈이다. 다 빼앗는 강탈이요 겁탈이요 강간이다.

무슨 사이비 교주가 나타나서 순결한 자신의 신체를 흡집을 내는 순결을 빼앗는 강간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 동안 36년 동안 공든탑을 거룩한 성전으로 우뚝 세웠건만 그 구원의 문을 고자 만들 듯이 짤라 버리듯 허물어 뜨린다.

고이 고이 간직한 처녀의 순결을 마음껏 유린하면서 흡집을 내는 겁탈로 성전을 빼앗아 버린다.

구원의 문을 찢어버린다.

구원의 문? 웃끼시네?

구원의 문을 36년 동안 짖는 자와 단 3일만에 짖는 자와의 경합

한 쪽은 허물어 질까봐 불안을 감춘채로 짖고 짖고 가리우고 가리우는
무화과 나뭇잎 가리개다. 가리개를 없애버리면 더 이상 가릴개 없다. 고인 물로써 끊임없이 씻어야 한다. 남들이 보기에 완벽하게 그 불안과 근심을 가렸다. 그 결핍을 완벽한 파시즘 곧 하나님과 나와의 일치성으로써 곧 율법지킴으로써 성전 사수로써 가렸다. 행함으로 말이다.

또 다른 한 쪽은 차라리 벗겨버린다. 그런 미흡하기 짝도 없는 가리개 수치를 아예 대 놓고 짤라서 물러가게 한다. 떼구르르 수치가 물러간다. 뭘 믿고? 외부에서 흘러 나오는 끊임없이 제공되는 생명수 믿고 말이다.

그 믿음이 요나의 표적으로써 모든 가리래를 짤라버린다.

허물어 버린다. 헐라 헐라 헐라

불안(음부의 권세)을 감추고자 세웠던 그 구원을 문을
정작 음부의 권세를 이기는 요나의 표적(사랑)만이 제거해 버리고 헐어버린다.

그리고서는 그것을 확대 시키고자 세상에 발가벗겨진채로 능욕꺼리로써
내던져 진다.

삼손 이라는 기생오라비 개 망나니를 건드리다가 결국 요나의 표적을 건드리는 식으로
반드시 법과 맞물리는 어리석은 불륜의 방식이다.

뭔가가 깨어질까봐 들통날까봐 자신들의 쓰레기 됨을 반대로 흡집난 자들에게 퍼붓도록 하게 하는 그 선악을 건드린다.

영화는 그 어떤 사랑도 없는 그 파시즘으로 똘똘똘 하나로 뭉쳐진 사회조직을
이 불륜의 가정파괴범 늙인 청소부 여인의 불륜의 사랑으로
온 구석 구석을 다 포크레인으로 바닥을 파고 파고 또 판다. 온갖 쓰레기가 다 감추어져 있었다.

그러자 갑자기 온건정책으로 좋은게 좋은거다 라고 화친을 청하면서 자기유익으로 이용해 먹는다. (베드로 나는 저 부자청년과 같지 않음을 감사하나이다. 모든 재산 가족을 버리고 주를 쫏았나이다.)

그 어떤 것도 창세전에 예정된 예루살렘(구원의 문)을 허무는 구원이 아니다.
바닥의 바닥, 종말의 종말이 아니다.

십자가의 죽음의 점 찍고, 3일 이라는 간격을 벌리고,  3일 만에 다시 살아나시는 부활의 점을 찍는

능욕을 받는 그 어리석은 지혜의 노선은 아니다. 그저 행함의 노선일 뿐이다.

구원을 날려 버리는 구원이다.

이 주께서 내 주께의 방식

이것이 창세전에 예정된 주의 주 되심의 방식인
너희가 죽인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다고 외치는 십자가 다.

그 십자가 앞에서만 벌벌 떠는 불안이 차라리 솔직하다.
강한 것 앞에서 모든 것을 빼앗겨도 상관없기 때문이다.
(외부에서 끊임없이 제공되는 흐르는 물, 생명수다.)

(빌 2:12, 개역)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그러나 다른 것, 창세 전에 예정되지도 않은 것에 불안해 할 필요도 없고.
창세전에 예정 되지도 않은 행함으로 불안을 억지로 가리울 필요도 없다.

(갈 3:1, 개역)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http://www.neoimages.co.kr/news/view/1187

과거 한국에 주둔한 미군들에게 몸을 팔아서 동생들 자식들을 먹여살린 어머니와 누나들 처럼
파독 간호사 이야기를 하면서 영화평을 한 사이트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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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Angst essen Seele auf Ali :  Fear Eats the Soul 1974)

일상적 파시즘의 시대에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다시 보기

http://www.neoimages.co.kr/news/view/1187


“초창기 파독 간호사들의 일은 딱딱하게 굳어버린 시체를 닦는 일이었는데 워낙 일을 잘해 호평을 받았다. 서독 언론들은 이들을 '코아니쉐 엥겔(한국 천사)'이라고 불렀다”

이는 1970년대 한국 경제성장의 '종자돈' 역할을 했던 파독 간호사에 관한 일화다. 당시 서독은 한국에 1억5천만마르크의 상업차관을 제공하려 했지만 우리나라에게 보증을 서줄 외국은행은 없었다. 결국 3년 동안 간호요원 2천명과 광부 5천명을 파견하고 이들의 봉급 송금 창구를 독일은행 코메르츠방크(Commerzbank)가 맡는 조건으로 이 은행이 지급보증을 서줌으로써 차관을 받을 수 있게 됐다. 광원과 간호사들의 파독 계약조건은 ‘3년간 한국으로 돌아올 수 없고 적금과 함께 한 달 봉급의 일정액은 반드시 송금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서독 정부는 이들이 제공할 3년 치 노동력과 그에 따라 확보하게 될 노임을 담보로 1억5000만 마르크의 상업차관을 한국 정부에 제공했다. 2차 세계대전으로 수많은 젊은이가 희생돼 산업인력이 부족한 서독과 민생고 해결이 급했던 한국의 이해가 맞아 떨어진 까닭이다. 이후 70년대 중반까지 1만 여명의 간호사와 1만 명에 가까운 광부가 독일로 파견되었으며 이 돈은 월남전 참전 대금과 함께 경부고속도로 건설과 중공업 부흥에 기여한 종자돈이 됐다. 우리는 이역만리서 약소국 국민에게 가해졌을 편견과 수모를 견디면서 동생과 가족을 부양했고 조국근대화에 초석이 된 이들의 눈물을 기억해야한다. 라인 강가에 뿌린 그 눈물이 한강의 기적을 일구어냈음을 잊지 말아야한다.

그로부터 30여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다민족사회로 진입하는 과정의 몸살을 앓고 있다. 1991년부터 시작된 산업연수생제도가 1992년 말 중소기업(특히 3D 직종)의 인력난을 해소하기 위한 방편으로 수정된 이후 외국인 근로자의 한국행은 봇물을 이루게 되었다. 어떤 이는 산업연수생의 이름으로 또는 불법취업, 불법체류자의 신분으로 또 다른 이는 고급기술, 경영관리, 교육계종사자라는 폼 나는 명칭으로 말이다. 국내에 근무하는 고급기술 인력의 대다수가 백인이면서 영어권 국가출신이라면 산업연수생과 불법취업자는 유색인종이면서 동남아국가에서 온 이들이다. 영어를 유창하게 사용하고 하얀 피부를 지닌 외국인이라면 호감과 동경 속에 우월적 지위를 획득한 반면, 유색인이고 낙후된 직종에서 일하는 동남아 노동자라는 이유만으로 그들이 받는 천대와 수모는 말로 다 할 수 없을 정도다. 파스빈더가 바라본 1970년대 독일사회 역시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전범국가라는 오명을 뒤집어쓴 채 이를 악물고 경제개발에 박차를 가하던 독일인들 사이에서 암암리에 피어오르던 파시즘. 국가와 민족의 이름으로서가 아니라 사회구성원 개인들 면면에 스며든 ‘일상의 파시즘’의 준동이 그것이었다. 그러므로 파스빈더의 영화 속 인물들의 모습이 오늘, 외국인근로자에게 불평등과 편견의 아픈 기억을 안겨주는 우리사회 구성원들 위에 고스란히 중첩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파스빈더에 대하여

영화를 읽기 이전에 감독인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 Rainer Werner Fassbinder에 대해서 잠시만 거론하고 넘어가자. 뉴 저먼 시네마의 기수인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는 1982년 37세 나이로 요절할 때 까지 13년의 시간동안 40여 편의 작품을 내놓을 정도로 왕성한 활동을 보인 감독이다. 개인과 집단 사이의 관계에 몰두한 그는 거의 언제나 사회의 관점에서 개인의 관계를 바라보았다. 독일의 나치주의 잔재를 심각하게 다루고 있는 그의 작품은 문학에서의 ‘하인리히 뵐 Heinrich Boll’이나 ‘귄터 그라스 Gunter Wilhelm Grass’의 작품과 비교될 수 있을 것이다. 과거극복이라는 주제로 문학작품에서도 많이 다루어지는 파시즘은 파스빈더에게 매체 현실로서 부각되며, 이는 그의 멜로드라마 영화 이외에도 다른 여러 장르에서도 혼합된 이미지로 나타난다.

파스빈더는 다양한 장르와 주제를 가지고 독일현실의 부정성을 비판하면서 약간의 리얼리즘을 찾으려는 시도한 감독이다. 그의 영화가 보여주는 상호 텍스트성뿐 아니라, 영화와 문학, 영화와 연극, 영화와 미술 등 예술형식이 융합되어 이루어진 상호매체성은 예술형식을 변형시키려는 그의 끊임없는 이러한 시도들의 연속으로 보아야 한다. 이는 또한 포스트모더니즘의 영상미학과 매체문화를 고찰하는데 간과할 수 없는 한 특징이기도 하다.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_ Angst Essen Seele Auf](1974)는 그에게 큰 영향을 끼친 헐리우드 감독 ‘더글라스 서크 Douglas Sirk’의 멜로드라마 영화 [천국이 허락하는 모든 것_ All That Heaven Allows](1956)과 유사성을 지니고 있다. 또한 하층사회의 성도덕과 연관된 사회 비판의식이 파스빈더의 멜로드라마를 사랑과 고통을 부각시키는 전통적 멜로드라마 영화와 구별 짓게 한다. 서크가 자본주의 미국사회의 가부장적 부조리에 대해 비판했다면, 파스빈더는 전후 독일사회에 남아있는 파시즘의 잔재를 끊임없이 비판함으로써 경종을 울려온 감독이고, 결국 뉴 저먼 시네마 감독 중 끊임없는 논란거리를 제공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_ (Ali : Fear eats the soul)

우열은 상대성의 소치다. 그리고 상대성이란 하나의 기준이 전제가 되는 개념이다. 무엇을 기준으로 삼느냐에 따라서 우열은 뒤바뀔 수 있다. 키를 예로 들자면 감을 따는 것에는 키가 작은 것이 핸디캡으로 작용할 것이고 밤을 줍는 것에는 키가 큰 것이 핸디캡이 될 수 있다. 하지만 본래 사람들이 밤보다 감을 훨씬 더 선호한다면 어떨까. 키 큰 사람들만 득세할 게 뻔하고 그것은 곧 계급적 불평등으로 이어진다. 역사상 자본만큼 절대적으로 인간을 매료시킨 것은 없었다. 자본이 척도가 되어 강자와 약자가 갈리고 신분의 높낮이가 발생했다. 이처럼 수학의 세계를 벗어나 현실로 옮겨오면 우열은 상대성의 소치가 아닐 수도 있다. 가장 상대적이면서 가장 모순 되게 차별의 대상이 되는 것이 바로 인종이다.


아랍인들이 드나드는 바에 늙은 미망인 에미가 비를 피하기 위해 들어오면서 영화는 시작된다. ‘알리’라고 불리는 모로코 남자가 늙은 미망인 ‘에미’의 집에서 하룻밤을 지내는 동안, 그 둘은 외로움이라는 공통점을 찾아내고 이내 같이 생활하게 되지만, 이방인에 대한 주위사람들의 편견과 경멸은 그들의 행복조차 불안으로 자리하게 만든다. [불안은 영혼을 잠식 한다]의 주인공인 알리는 모로코인이면서 독일 땅에 산다. 숱한 인종 차별을 겪는 그는 그래도 키프키프하게 살려고 하지만 주변 사람들은 그를 키프키프하게 봐주질 않는다. ‘키프키프’란 ‘괜찮다.’ 라는 뜻의 아랍어이다.


이 영화가 만들어진 1974년 독일사회는 전후의 상처를 딛고 라인 강의 기적을 일구고 있었다. 그 배경에 ‘개’로 취급받던 아랍계 소수민족과 유색인종들의 땀과 노력이 스며들어 있었음은 물론이다. 영화 속 알리는 독일사회에서 천대받는 소수민족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인물이다. 6명이 한 방에 생활하며 돈을 버는 그들을 독일인들은 노동자원으로만 취급하며 동물 취급을 한다. “아랍인은 개, 독일인은 주인”이라던 알리의 말 역시 이런 이유에서이다. 어디서도 안식할 수 없었던 알리에게 에미는 구원의 천사처럼 다가오게 된다. 하지만 파스빈더가 주목한 것은 이방인과 독일인, 젊은 남자와 나이든 여자 사이의 로맨스가 아니다. 이들 사이에서 피어나는 생경한 로맨스는 파스빈더가 그의 작품에서 줄곧 다뤄온 소재일 뿐이다. 영화 속 로맨스는 되살아나려는 파시즘의 망령을 비판하기 위한 환경을 제공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파스빈더는 에미와 알리의 로맨스를 둘러싼 저변에서 피어오르던 당대 사회의 공기를 세밀하고 포착하고 있었던 것이다.

파시즘은 파스빈더의 영화에서 반복적이고 강박적으로 제기되는 주제이다. 역사적 파시즘과 직접적인 관련을 지니고 있는 [마리아 브라운의 결혼_ Die Ehe Der Maria Braun](1979), [릴리 마를렌_ Lili Marleen](1981), [베로니카 포스의 동경_ Die Sehnsucht Der Veronika Voss](1982) 이외에도 그의 여러 영화에서 파시즘은 욕망, 힘(권력), 물신화된 현실의 담론과 연관해서 역사적 주관성을 인식하는 과정에서 주제화된다. 특히 [마리아 브라운의 결혼]에서 파스빈더는 20세가 후반 독일 중산층의 성장을 자본주의와 가부장적 착취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았고, 이를 배경으로 여성의 삶을 다양하게 묘사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이 영화에서도 그는 독일 중산층의 인종차별을 통한 파시즘 준동의 기운을 ‘알리’ 의 근원적 불안을 내세워 경종을 울리고 있는 것이다.


파스빈더의 영화 속 여성의 이미지는 주로 희생자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때론 여성이 아닌 동성애자들의 모습으로 변환되기도 한다. 그의 영화 속 여성은 에로틱의 대상이라기보다는 부정의 미학을 보여주는 알레고리로 나타난다. 그리고 그들의 상대 이성 또는 동성의 주인공은 파스빈더의 염세주의적 세계관을 표현하는 인물이다. 즉 이방인, 노동자, 동성연애자, 유대인, 흑인, 때로는 선동자로 등장하는 이들은 나치즘 및 자본주의 현실에 저항하거나, 아웃사이더로서 다른 사람에게 학대를 당하면서 죽음으로 내몰리는 자들이다. 지중해 연안 국가에서 이주해 온 노동자들을 폄하하는 의미를 지닌 [카첼마허_ Katzelmacher](1969), [천사들의 그림자_ Schatten Der Engel](1976)뿐 아니라, 대부분의 파스빈더 영화가 독일사회에 잔존하고 있는 일상적 파시즘 문제를 다루고 있음을 증명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영화에서 ‘알리’를 죽음으로 내모는 설정은, 단순히 피해자로서의 남성을 보여주려 했다기보다는 이방인인 모로코 남성, ‘알리’로 통칭되는 유색인종에 대한 굴절된 사회의식을 극명하게 드러내기 위한 전략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가끔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 오히려 불안 할 때가 있다. 너무나 고요하고 잔잔해서 무언가 큰 폭풍이 몰려올 것 같은 상황, 아무런 문제가 없이 일이 술술 풀리는 것이 불안한 상황을 누구나 한번쯤 맛보았을 것이다. 에미와 알리 역시 불안함과 위태로움으로 가득 찬 결혼 생활을 하고 있었다. 주위 사람들은 ‘오래 가지 못할 것이다’ 라며 조롱을 했고 그들의 파멸을 지켜보는 것이 사명인양 갖은 훼방을 놓고 있다. 그러나 정작, 우려했던 불안은 주변인의 시선이 누그러질 때 즈음에 그 고요한 상황에서 현실로 나타나게 된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현실화 된 불안이 외부로부터의 압력이나 강제된 현실이 아닌, 두 사람 내부에서 피어나고 있다는 점이다. 또한, 두 사람의 불안이 근원적으로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인종과 문화를 넘어서는 삶의 문제와 직결된다. 에미가 가진 불안이 주위환경과 주변인들의 멸시로 인한 어렵게 얻은 사랑의 파멸을 걱정하는 것이라면, 알리는 좀더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불안이다. 이미 비인간적인 대접을 받으며 바닥 생활을 경험했던 그였기에, 한 순간 비참한 유색인종의 굴레 속으로 재차 침몰할 것에 대한 불안감이 스며들고 있었던 것이다. (필자가 위 영화제목을 표기함에 있어 독일어 원제를 놔두고 영어제목을 쓴 이유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알리와 에미의 결혼생활이 자리를 잡아갈 때 즈음, 무의식적이고 습관적인 그녀의 태도는 독일인 전형의 모습을 띠면서 알리에게 불안감을 가중시키게 된다. 여행에서 돌아오자마자 알리가 한 것이라고는 가구를 지하실로 옮기는 이웃을 도와주는 노동에 가까운 일과, 에미의 친구들에게 건장한 아랍인 남자의 몸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것은 그녀를 만나기전 알리가 독일인들에게서 받은 경멸적 태도와 크게 다르지 않다. 게다가 남편인 알리가 먹고 싶어 하는 ‘쿠스쿠스’를 싫어한다고 당당히 말하는 모습은, 에미 역시도 어쩔 수 없는 독일인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알리와의 결혼으로 인해 주변인으로부터 소외당했던 그녀가, 유고슬라비아인 동료에 대한 의도적 따돌림을 묵인하는 장면을 통해서 파스빈더는 독일사회에 다시금 살아나려는 파시즘의 기운을 통렬하게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파스빈더의 영화관습대로 두 사람 모두가 마음의 상처를 입게 된다.


일상의 파시즘

전후 독일의 경제부흥은 온전히 스스로의 힘으로 이룬 것이 아니었다. 뛰어난 과학기술과 근면성을 바탕으로 한 인적자원이 있었지만, 정작 유럽의 공산화를 우려한 미국의 적극적 경제지원이 없었다면 라인강의 기적도 쉽사리 얻을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여기에 유색인종들과 소수민족의 노동력이 뒷받침 되지 않았던들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런 시기에 독일인들은 그들 자신의 힘으로 경제성장을 이룬 양 자만에 가득 차, 게르만 우월주의의 불씨를 지피고 있었던 것이다. 영화의 첫 장면에서부터 마지막 까지도 에미는 자본주의의 상징이자 원조국상품인 콜라를 마시고 있다. 또한 에미와 알리를 경멸하던 사람들 모두가 자본주의적 사유방식에 깊게 물들어 있다는 점에서 파스빈더의 비판은 파시즘에 대한 것과는 다른 방향성을 가진다. 에미의 아들은 맞벌이를 위해 그녀에게 용서를 청하고, 이웃의 부인은 가구를 보관할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가장 큰 지하실을 가진 그녀에게 화해의 손길을 내민다. 슈퍼 주인은 신생 대형마켓에 빼앗긴 단골확보의 차원에서 에미의 비유를 맞추게 된다. 이렇듯 파스빈더는, 자본주의와 파시즘의 기운이 뒤엉킨 독일중산층의 부조리와 정체성 모호한 생활방식을 향한 비판의 도구로 에미와 알리의 관계를 비극으로 몰고 간다. 가련하고 늙은 여주인공의 아픔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자기 목적대로 기능하도록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파스빈더는 훗날 자신의 저서에 이렇게 쓰고 있다.

「사물이 사실적일 수 록 더 환상적이다.」

앞서 말했듯이, 파스빈더가 전후 독일사회에서 간파한 일상의 파시즘과 한국사회와 국민들 내면에 잠재된 일상의 파시즘은 서로 다르지 않다. 이를테면 그것은 강대국 뒤에 숨어 약소국국민을 경멸하고 천대하는 오늘날 우리들 모습과 같으며, 영화 속 70년대 독일중산층의 모습과 하나도 다를 게 없다는 것이다. 불과 30년 전 우리들의 누이와 삼촌은 독일의 광부나 간호사로 또 중동의 근로자로 파견되어 조국근대화에 일익을 담당하면서 이민족으로서의 편견과 수모를 감수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는 인간이 역사에게서 아무것도 배우는 것이 없다는 것을 알려준다”던 토인비 Arnold Toynbee의 말처럼, 에미와 알리의 이야기는 지금, 여기 한국에서도 현재진행형이다. 이 땅에서 살아가는 수많은 동남아 노동자들과 불법취업자들이 노동착취와 공포 속에서 힘겨운 삶을 버텨내고 있기 때문이다. 정작 그들의 땀과 눈물이 있었기에 우리가 IMF를 이겨냈고 우리들이 기피하는 1차 산업의 숨통을 이어갈 수 있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무엇보다 외국인 노동자를 통해 우리들의 자존심이 고양되었음을 부정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우리가 그들에게 해준 것은, ‘한강에서 뺨 맞고 종로에서 화풀이’와 하나도 다를 게 없었다. 그것은 미국 땅에서 유색이민자이기에 겪어야 했던 설움과 편견이 태평양 넘어 이 땅으로 전이된 것이며, 고참에게 많이 맞은 사람이 고참이 되어 오히려 더 무서운 고참병이 된다는 식의 앙갚음일 뿐이었다.

파시즘은 국가와 정권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다. 가족 혈연 민족주의로 대변되는, 밑으로부터의 문화기제가 견고하게 쌓아짐으로 형성된 일상화된 파시즘이 오히려 더 위험하다. 정권은 한시적이지만 일상의 파시즘은 유구하기 때문이다. 필자는 알리의 눈물을 잊을 수 가 없다. 파스빈더는 그의 눈물을 통해 인간에게 내면화된 일상적 파시즘의 징후를 발견하고 고발한다. 그것이 무서운 것은 영화 속 인물들의 눈물과 고통이 30년 전 독일 땅에서 차별과 냉대를 감수하고 조국하늘만을 바라보며 열심히 일했던 우리들 누이의 눈물과도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들에게 내면화된 파시즘을 어떻게 제거할 것인가.

2007.06.19

백건영(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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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 (Rainer Werner Fassbinder)


1. 베로니카 포스의 갈망(Die Sehnsucht Der Veronika Voss:Veronika Voss)
2. 로라(Lola)
3. 릴리 마를렌(Lili Marleen)
4. 제3세대(Die Dritte Generation:The Third Generation)
5. 마리아 브라운의 결혼(Die Ehe Der Maria Braun:The Marriage Of Maria Braun)
6. 독일의 가을(Deutschland Im Herbst:Germany In Autumn)
7. 13달인 어느 해에(In Einem Jahr Mit 13 Monden:In A Year Of 13 Moons)
8. 양지로의 여행(Despair:Despair - Eine Reise Ins Licht)
9. 볼비저(Bolwieser)
10. 너희가 나를 사랑하기만을(Ich Will Doch Nur, Dass Ihr Mich Liebt:I Only Want You To Love Me)
11. 중국식 룰렛(Chinesisches Roulette:Chinese Roulette)
12. 퀴스터스 부인의 천국 여행(Mutter Kusters Fahrt Zum Himmel:Mother Kusters Goes To Heaven)
13. 폭스와 그의 친구들(Faustrecht Der Freiheit:Fox And His Friends)
14.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Angst Essen Seele Auf:Ali: Fear Eats The Soul)
15. 에피 브리스트(Effi Briest:Fontane Effi Briest)
16. 노라 헬머(Nora Helmer)
17. 사계절의 상인(Der Handler Der Vier Jahreszeiten:The Merchant Of Four Seasons)
18. 페트라 폰 칸트의 쓰디쓴 눈물(Die Bitteren Tranen Der Petra Von Kant:The Bitter Tears Of Petra Von Kant)
19. 브레멘의 자유(Bremer Freiheit:Bremen Freedom)
20. 미국인 병사(Der Amerikanische Soldat:The American Soldier)
21. 왜 R씨는 미쳐 날뛰는가?(Warum lauft Herr R. Amok?:Why Does Herr R. Run Amok?)
22. 저주의 신들(Gotter Der Pest:Gods Of The Plague)
23. 사랑은 죽음보다 차갑다(Liebe Ist Kalter Als Der Tod:Love Is Colder Than Death)
24. 카쩰마허(Katzelmacher)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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