닭이 먼저인가? 계란이 먼저인가?

2011년 11월 16일 수요일 오전 11:02:09


팔로우(흐름:잉여:유량)가 먼저인가? 스톡(저량)이 먼저인가?

도시가 먼저인가? 시골이 먼저인가?

여기에 철학자들은 도시가 먼저로써 시골을 생산한다고 했다.

“1”이 먼저인가? “0”이 먼저인가?

아브라함 자손이 먼저인가? 돌삐가 먼저 인가?
창조가 먼저 인가? 십자가가 먼저 인가?
하나님이 먼저 인가? 예수님이 먼저 인가?
유물이 먼저인가? 정신이 먼저인가?


잉여라는 유물(물건 재료)를 가지고서 인간들은 누가 먼저인가를 예수님 앞에서까지 따진다.
처음과 나중 되시는 분은 예수님 밖에 없다. 즉 하나님이 아니다. 예수님 뿐이다.
여기에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이 알파와 오메가를 들이댄다.

과연 그 잉여는 누구를 말하기 위함일까? 벡터인가?

인간은 자기가 자신을 그 잉여의 벡터 속에 집어넣는 구원의 방식인 제사를 택한다.
여기에 항상 상대적으로(즉 이런 먼저 되었다고 우기는 자들이 반드시 나타남으로써 후차적으로써) 또 다른 또 하나의 제사를 들이댄다.

그 제사를 “더 나은” 이라는 표현으로써 더 나은 제사 라고 지칭이 되지만
항상 대중적인 가치에 반드시 무시받는 잉여로써 들이댄다.

창녀와 세리와 강도가 먼저 잉여의 나라에 들어간다 라고 했다.
먼저 된자 나중 되고 나중 된자 먼저 된다고 했다.

이는 예수님 자신이 잉여에 속아넘어가도록 속이는 자로써
또는 도둑으로써
또는 침략자로써 재산을 거들내는 전쟁의 방식으로써
진멸자 소멸자 종말자 심판자로써
잉여 자체의 가치를 높이고 있다.

인간에게 추앙받는 잉여란 가짜임을(진짜로 철썩같이 믿고 있는 그 생산성에 썩어버리는 좀벌레를 풀어서 퍼트리는 방식)

자신이 몰고온 가짜로 취급받을 수밖에 없는 잉여를 들이댄다.

기적을 요구하는 유대인에게
더 나은 기적인 요나의 표적을 들이대면서
악마가 기적을 요구하고 그런 악한세대가 기적을 탐한다고 숨겨진 우상을 가시화 시킨다.
(인간 저마다의 하나님을 십자가를 거쳐 보니 다 가짜로 판명이 된다. 가짜일 뿐이랴? 악마다. 예수님은 이미 인간들의 메시아가 악마임을 밝혀 놓고서 비로소 하나님나라를 드디어 전파하신다. 그 하나님 나라에 악마들의 속성은 반드시 들추어지면서 증거되는 식이다. 이 원수성이 바로 우리 속에 가득함을 들추어내면서 말이다. 곧 살인의지 복수심이다.)

인간의 생산성인 믿음이 바로 살인의지라니?
설마?

그러나 이 살인의지인 인간의 생산성 곧 믿음은
예수님의 살과 피라는 영생을 주는 양식 앞에서
그렇게 꼭꼭 숨겨두었던 악마성이
어이없게도 술술술 노골적으로 고삐풀린양 발가벗겨지듯이 들통난다.

에이 우리가 무슨 식인종입니까? 사람의 살과 피를 먹게?
우리는 좀비가 아닙니다.

나의 살과 피를 먹지 않는 자는 나와 상관이 없다.

도통 무슨 소리인지? 아예 율법을 노골적으로 어기란 소리 아냐?

예수님의 수많은 기적을 보고 따라왔던 자들은 비로소 단절되듯이 다시는 쫏지 않는다.
여기에다가 제자들에게 까지 왜 너희들도 가지? 라고 인간 쪽에서의 신뢰로 다진 우정따위는 아예 안중에도 없이 떠날려면 떠나라 라는 식이다.

지혜(잉여)는 이렇게 인간의 지혜(믿음)를 치고서 들어온다.
그리고서는 새로운 잉여를 창출해 낸다.

전혀 잉여 다운 모습이 아예 없는 잉여
도리어 잉여는커녕 저주와 개죽음 뿐인 껄끄러운 부담을 잔뜩 뒤짚어 씌울 뿐이다.

살과 피를 먹어서 예수님과 상관있는 자가 되고프나
그랬다가는 인간세계에서는 범법자가 되어야 한다.
율법 파괴 이기 때문이다.
저주받은 무생산자
막사는 나쁜놈 악마 취급받는 창녀 세리 강도 매국노 살인자 불의한놈 불효자 등등

살과 피를 안먹자니
예수님과 상관 없는 자가 된다.
이 땅에서는 별탈없이 지낼수 있으나 천국을 탐하는데 있어서 상당한 대략난감이 생긴다.
모든 잔여물의 잉여투자를 예수님에게 했는데
도리어 그런 이유로 예수님에게 짤려야 할 판국이니
그 예수님을 무슨 수로 뜯어먹어야 하는 식인종이 되는가 말이다.


자 그렇다면 처음부터 인간이란 그 어떤 생산성이 없었다.
처음부터 그 생산성은 십자가 라는 긍휼의 불쌍히 여겨주시는 자궁 외에는 다른 태가 없었다.

그 태가
다른 태 보다 더 나은 태 이다.

열국의 어미인 사라는
애굽족장으로부터 팔림으로써 그들의 태를 모조리 닫게 만들어 버리는
불임의 태이다.

이 [없음]이라는 0이, 이 십자가가,
저 [있음]이라는 1의 생산성을 모조리 차단하는 것이다.

결국 이 십자가의 태가 생산한 생산물이
창녀 세리 강도 였다. 십자가를 드러내기 위해서 말이다.
역으로 태어난 자들이다.
숫자 1 2 3처럼 역사적 시간적 공간적 순차의 인과관계로 태어난 자들이 아니라
야이로의 딸처럼 역으로 딸이 아비 야이로를 태어나도록
그 숫자를 치는 “0”으로써
기존의 모든 생산물을 거부하는
역순의 지혜가(어리석은 걸림돌로 취급받는 버림받는 지혜)
더 나은 생산을 표출하는 식이다.

그것이 달리다굼이다. 깨어나라
딸이 아니다. 아비야 깨어나라.
나사로가 아니다. 울고 있는 자들이다.
죽은 딸이 아니라 자고 있을 뿐이다. 일어나라 무덤이 없다.
도리어 깨어날 자들은 주변인들이 눈이 번쩍 거린다.

나만 남았나이다 라고 외쳤건만? 다 죽고 나만 잉여물로 남아 이게 무슨 잉여물이냐
이게 무슨 생산물이냐? 예수님 일 제대로 한 것 맞는냐 따졌건만?
왜 제대로 했는 것 맞는데? 라고 7천을 남겨놨지롱 앞에서 입에 막힌다.
감히 감히 힐문하다니?
얼마나 일을 참 제대로 하셨으면 남이 아닌 내가 제대로 따졌기 때문에
참으로 제대로 일 하신 것이 맞다는 것이다.
왜? 내가 먼저가 아니라 십자가가 먼저이고
그 십자가의 생산물이 나이기에
나의 원망을 제대로 표출시키신 것 보니
십자가가 제대로 생산한 것 맞다는 것이다.

이것이 십자가의 생산물이 아닌자들이 보기에는 전혀 앞 뒤 안맞는
모순 덩어리요 배신이요 죄와 피의 결합이기에
더러워 보인다.
미련해 보인다.
전혀 잉여스럽지 않아 보인다.
도리어 악마적이다.

그런데 도리어 다구친다.
뭐 너희가 아브라함 자손이라고?  누구 마음대로?

모든 유물은 십자가를 드러내기 위해서 나타난 생산물이다.
너희가 보기에 아무 생산성이 없어 보이는 무동의 무생명의 저 돌삐가(광야)
너희들의 생산성(자손이란 태어났다는 잉여개념이다. 자녀 - 누구의 생산물 창조물) 보다
훨씬 더 낫다 라고 하신다.

이 단절성인 십자가가 유일한 참생산이다.

짤려진 생식기(할례)에서 어떻게 생산물이 날수 있을까?(십일조)

고자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를 증거한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소리이다.
그러나 고자 아닌 자들의 하나님 나라 외침 보다 훨씬 더 낫다.

불의한 청지기가 빛의 자녀 보다 훨씬 복음의 진수를 보여주는데 더 낫다.

비싼 향유를 깨뜨린 여인이, 가난한자들을 위해서 구제하는 것 보다 훨씬 더 낫다.
참생산인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재촉하기 때문이다. 미리 앞당겨서 장사치른다.
남들이 들으면 기절초풍할 소리를 거리낌없이 참으로 뻔뻔스럽게 아주 당당하게
너무 너무 노골적으로 대개방 방출 땡처리 하듯이 공개해 버린다. 이것이 비밀이다.

도통 무슨 소리인지 알 길이 없도록 하는 것이다.

이런 십자가의 생산성 곧 부정적 집단 보편성은
인간 쪽에서 출발한 손으로 지은 그 어떤 생산성 보다
훨씬 더 나은 제사이다.

나쁜 제사가 아니다. 제사는 제사이긴 한데
잉여는 잉여이긴 한데 남을 살리는 생산은 아니다.
그저 자족하는 자기 챙기기 밖에 안된다.
부자 청년도 그랬고. 지옥간 부자(거지 나사로 이야기에 나오는)도 그랬다.
이것이 악마적이다.

잉여의 참 취지는 남을 살려야 한다.

우리에게는 그런 능력이 없다.

도리어 살려줌을 당해야 할 입장이다.
이런 참생산의 잉여 곧 십자가를 매일 매일 쳐다보지 않는자는
또 십자가로부터 매일 매일 끌어당김 당하지 않는자는

자신이 구축한 잉여로 인해
자기 무덤이 되는 것이다.
좀벌레가 파고들어서 썩은 것이 된다.

0 이란 무덤이 없는 자 이다.

0 이라는 무가치성이 인간이 매긴 가치성(잉여생산)을 뒤짚어 엎어버린다.

선악과를 따먹으면 개미처럼 된다. 토끼처럼 된다. 라고 유혹하면 과연 유혹이 되는가?
자신들 보다 못한데? 즉 잉여적이지 않는 가치성이다.
자신들 보다 나은 가치성은 오로지 하나님 뿐이며
하나님만이 최고봉의 가치이다.
그래서 유혹이 된다.

선악나무가 먼저인가? 생명나무가 먼저인가?
생명나무는 죽음이라는 결핍이 되어서 비로소 영생하고자 따먹고픈 최고의 가치가 후차적으로 발생하지 선악나무를 따먹기 전까지는 전혀 잉여적이지 않다. 무가치 하자. 후차적인 순서로 밀려난다.

이렇게 인간들이 매기는 가치의 순서에 무조건 반대의 방식만이 주님의 가치성이 된다.
일만달란트 탕감받는 순간 그 임금이 가치있게 되는 것이 아니라
탕감받은 자신이 가치있게 된 것을 일부러 옆에 삼백데나리온 빚진자 지나가도록 해서
물에 빠드리는 잉여다. 마귀가 심은 잉여성을 들추어내기 위함이다.

모든 것을 소멸시키는 불 속에
무가치해 버리는 불 속에서 진정한 가치를 생산하신다.
종말 심판 저주의 십자가가 참으로 무시받는 가운데서
참된 가치성을 드러내듯이

심판 속에 아니면 인간은 곧잘 자신에게 가치를 두기 마련이다.
그래서 십자가가 매일 매일 불태워 주지 않으면 우리는 썩고 좀벌레가 먹는것들은 가치있는냥 착각 속에 빠질 수밖에 없다.

이런 십자가의 사랑 만이, 매일 매일 아궁이 속으로 집어 넣는 사랑만이 아니면
그 어떤 생산물도 거짓임을 드러낼수가 없다.

(마 6:19, 개역)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
(마 6:20, 개역)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저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
(마 6:21, 개역)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마 6:22, 개역)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마 6:23, 개역)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하겠느뇨』

(마 6:24, 개역)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마 6:25, 개역)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마 6:26, 개역)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마 6:27, 개역)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마 6:28, 개역)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마 6:29, 개역)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마 6:30, 개역)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마 6:31, 개역)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마 6:32, 개역)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마 6:33, 개역)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마 6:34, 개역)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


PS

1이 먼저가 아님을 나중에 나타난 0을 통해서 밝혀진다.
0이 먼저 였음을 말이다.

이 없음을 통해서 있음을 다 부끄럽게 만드는 지혜만이 참지혜이다.
십자가의 어리석은 지혜만이

신의 자리에 오른 모든 인간의 지혜를 꺽어버린다.(교회가 먼저가 아니라, 나중에 나타난 교회의 머리를 통해서
그 빈자리에 앉은 머리를 짤라내는 또 다른 머리를 통해서비로소 교회가 새롭게 생산된다. 교회 속에서 교회가 이중분절로써 나타나는 것이다.
이것이 어리석은 십자가의 지혜이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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