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멸망보고서 Dooms Day Report 2012

2012년 5월 1일 화요일 오후 12:42:47  김대식

 

어제 이 영화를 보고 배꼽잡았다. 얼마나 웃기는지
그리고 이번주에 들었던 감동적인 설교에 나오는 내용과
같은 내용들이 나왔다.
두 번째 내용인 깨달음을 얻은 로봇의 해탈
시뮬라시옹이 더 원본같고
원본이라고 우기는 인간은 두려움에 떨고

스탠다드 어롱 컴플랙스 stand alone complex (쌍둥이의 역설) 가 어제 설교에도 나왔듯이
여기서도 나왔다.

다행히 마지막 내용은 아빠가 아끼는 당구공 8번을 파손시킨
빵꾸똥꾸의 변이된 아이디를 가진
여자아이가 인터넷쇼핑으로 8번공을 값싸게 구입해서
자신의 죄악을 가리우고자 택배를 요청하고
(마리아의 간구 요청 기도)

빨랑 그 파손된 공을 버렸는데
그 버린 공이 블랙홀 구멍에 빠져버리니
이 사건이 중첩이 되어서
건축자의 버린돌이 주춧돌 머릿돌이 되고자
2년 뒤에 지구로 충돌하고자 달려오는 혜성 계류별(해품달)이 되었다.
덕분에 지구인들은 멸종하였고
택배주문을 한 그 아이 가족만은 노아방주 안에서 살아남은 노아가족처럼 살아남았는데
딸랑 4명만 남았는데
이것이 얼마나 웃기던지 (해학이다 전복 전이)

택배주문을 하는 덕분에 (종말 택배 주문, 심판 주문 택배 - 마리아의 기도)
그야말로 생일날 도착한 종말이라는 선물은 신나는 새로운 세상을 맞이하게 된다.
정말로 정말로 신날 것 같았다. 팔광 광땡 ㅋㅋㅋ

빨랑 주님이 오셨으면

 

이 영화는 마치
낙타 사자 어린아이와 같은 순서의 흐름으로 변형되어 흘러간다.

성경목차처럼 말이다. 구조다 판대기다.

썩은 사과를 먹은 창세기 곧 선악과 따먹은 사건이다.

괜히 정녕죽으리라 라는 수고한 무거운 짐을 괜히 알아버려서
평생을 무거운 짐을 지고 가는 낙타다.

썩은사과는 인간기계를 이루는 소스가 된다.
재영토 탈영토 초영토로써 썩은사과는 확대 재생산으로 재활용이 되고 먹고 사랑하고 기도한다.

괜히 먹었어 괜히 어떻게 어떻게 뾰료롱  헌술은 헌부대에 새술은 새부대에  ...

 

그 다음은 괜히 먹었어 라는 율법(양심)이라는 거룩을 어떻게 이루나 라는 사자다.
해탈해야 자유자가 된다는 숙제풀기이다. 수수께끼 놀이 곧 주사위 놀이다.
이루면 사자인데 못이루면 저주다. 졸지에 갇혀버렸다.
마음은 하나님의 법을 원하는데 육체는 유혹을 이길수가 없다.
해탈만이 자유다. 그러나 그 자유 전에 반드시 거쳐야 하는 갈등
(기계는 죽음이 뭔지 모르기 때문에 두려워할 이유가 아예 없다.
두려움 원천 단절이다. 죽음단절이다. 그러나 평생을 죽기를 무서워 떠는 인간은
기계가 되어 본적이 없기 때문에 죽음에 두려워 떤다. 그래서 더욱더 수상하게 없는 자유에 매달린다.)

마지막 계시록 종말은 망각의 어린아이다. 어린아이되기 여자되기
어린아이는 뭐든지 신난다.
망각하기 때문에
뭐든지 새롭다.
무능자 되기
잉여 되기

어린양 앞에서 모든 진지하고 심각하게 굴었던 것들은 모두 거짓으로 밝혀진다.

마침 이번주 설교가 꼭 철학내용같다고 농으로 강이아빠랑 대화했는데
그 내용이 또 우발적으로 인류멸망보고서 라는 영화에 그대로 나온다.

낙타 사자 어린아이 로 이어지는변형된 주름 압축 함축도
쭈우욱 펼쳐보면

무조건 예가 되는 인자의 몸을 말하기 위한 판대기 배경 몸
내 뒤에 오실분은 내가 감당치 못하는
신들메 풀기도 버거운 (아니요가 없는 새 몸 새 머리 새 피조물)
그는 흥하고 나는 망해야하는 몸이다 라는 것을 펼치는 카페트펼치기위한 몸이다. 카페트 바디 해품달

싸뿐히 즈려 밟고 가소서  윽 윽 윽 ㅋㅋㅋㅋ

인간이란 자기 몸에 미쳐있기에
그 몸을 치지 않는 이상
그 미쳐버린 악마의 세계에서 빠져나올길이 없다.
그래서 멸망보다 더 기쁜소식이 없다.

어린양이라는 인자만이
그 인자의 제사만이
종말을 재촉하는 택배 만이
인자를 배달해 달라는
나무에 들려야만 하는 인자만이

처음 곧 창세전에 있었던 그 십자가 라는 예정을 이루는 것이다.

다 이루었다.

넉넉한 이 십자가의 피 용서 승리를 끊을자 있을까?

무지개에 대한 언급도 이번 설교에 나오는데
얼마전에 언급한 안돼 라는 글에서도 적었듯이
파도가 넘어오지 못하도록 한 배려가
심판이 넘어오지 못하도록 한 불쌍히 여기심이다.

[ 안 ~ 돼 ~~~~

http://www.crossvillage.org/board/index.php?doc=program/board.php&bo_table=meari&sselect=wr_name&stext=%B1%E8%B4%EB%BD%C4&page=1&page=1&wr_id=491

http://crosslamb.tistory.com/1200

마치 심판이 넘어오지 못하도록 해운대 라는 영화에서 파도가 육지를 범하지 못하도록 막고 또 막고 하는 것이다.
(마침 이 부분이 생각나서 검색했는데 역시나 해운대 영화가 2009년 7월 이니까 그때 수요설교였는데 바로 딱 나왔다. 엥 개봉날짜도 똑같네
 http://www.woorich.net/board/index.php?doc=program/board.php&bo_table=wednesworship&sselect=wr_content&stext=%C6%C4%B5%B5&soperator=0&page=1&wr_id=687
  렘 5:19-25 (징벌 원인) 2009년 7월 22일 ) ]

 

그 무지개를 거두고
예루살렘성전을 철수시켰을때에
비로소 그 불쌍히 여기심이 얼마나 감사했는지
그리고 지금이 펼쳐지는 이 심판이 그 불쌍히 여겨주심을 근거로한
감사함인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빵꾸똥꾸의 어린아이가 커서 배두나의 4차원 미소를 보면서
얼마나 배꼽잡았는지
그 신나는 새로운 놀이터에서 신나게 노는 어린아이의 망각세계

너의 죄를 기억지도 않겠다는 허물을 덮어버리심이

넉넉하게 해운대의 쓰나미처럼 밀려온다.

(잠 10:12, 개역) 『미움은 다툼을 일으켜도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우느니라』

(벧전 4:8, 개역)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어 저녀석 또 날라왔네
오늘은 왠지 구슬피 들리네
주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저 같은 죄인도 용서 해 주시다니요? 
사랑해 주시다니요 말도 안돼요 ~~ 돼요 ~~ 돼요~~~

됀다니까요!! 감사합니다. 주여

여디디야 여디디야 여디디야 라고 쥐저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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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woorich.net/board/index.php?doc=program/board.php&bo_table=amworship&page=1&wr_id=1299


큰 환란과 진노(눅 21:20-24)

이름 : 이근호

2012-04-22 13:29:11
 
본문 : 누가복음 21 : 20-24 제목: 큰 환란과 진노

형벌과 진노가 언급되는 이유는 유대인들이 살던 그 땅에 이미 성전이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전 중심으로 일하십니다. 성전이 파괴되면서 그 근처에 있는 자들이 먼저 화를 당하기 마련입니다. 그동안 대단히 위험한 곳에 살고 있었던 자들이 유대인들입니다. 동시에 그들은 하나님의 분노를 듬뿍 담은 인생으로서 세상만방에 증거거리가 될 수가 있습니다. 이처럼 세상에 ‘하늘과 땅이 연결되는 중심처’가 있다는 말은 희망처럼 들릴 수는 있지만 실은 위기의 상황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 인간들만의 세상이라면 구태여 중심처를 만들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서로 평등하고 동등한 대우를 받고 살면 바로 그곳이 유토피아입니다. 그 누구도 지배하지 않고 그 누구로부터 지배받지도 않는 세상, 그래서 자기하고 싶은 대로 사는 것, 자체가 곧 행복이요 진리가 되는 현실, 이것보다 더 멋진 세상이 또 있을까요! 문제는 성전의 등장으로 인하여 인간은 혼줄 난다는 사실입니다. 성전이 제대로 운영되지 못한 책임을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묻겠다는 겁니다. 하늘과 땅이 유일하게 통하는 그 공간이 불길에 휩싸이고 이방군대로부터 짓밟힌다는 것은, 성전 주변의 환경이 철저하게 이방종교적이었다 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성전은 세상의 질을 나타내는 측정기와 같습니다. 성전 안에서만 이루어지는 제물 태우는 매서운 진노의 불길이, 성전이 와해되면서 밖으로 쏟아지게 됩니다. 성전은 자체적으로 하나님의 진노가 밖으로 번지지 않기 위한 자체적인 장치가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장치가 고장 나면 걷잡을 수 없이 불길을 파급됩니다. 이렇게 해서 예수님의 예언은 성전이 진정으로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말해주는 내용입니다. 자신이 죽어 마땅함을 어떤 뜻으로 이해했느냐를 묻습니다. 성전건립 취지를 놓고서 하나님과 인간의 생각이 상충된다는 말입니다.
 


큰 환란과 진노 120429  이름 : 이근호
2012-04-29 12:50:35
 
큰 환란과 진노(눅 21:20-24)

2012년 4월 29일                       본문 말씀: 누가복음 21:20-24

(눅 21:20, 개역) 『너희가 예루살렘이 군대들에게 에워싸이는 것을 보거든 그 멸망이 가까운 줄을 알라』
(눅 21:21, 개역)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며 성내에 있는 자들은 나갈지며 촌에 있는 자들은 그리로 들어가지 말지어다』
(눅 21:22, 개역) 『이 날들은 기록된 모든 것을 이루는 형벌의 날이니라』
(눅 21:23, 개역) 『그 날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니 이는 땅에 큰 환난과 이 백성에게 진노가 있겠음이로다』
(눅 21:24, 개역) 『저희가 칼날에 죽임을 당하며 모든 이방에 사로잡혀 가겠고 예루살렘은 이방인의 때가 차기까지 이방인들에게 밟히리라』


멸망이란 구원의 필수 코스입니다. 멸망 없이 구원되는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멸망 없이 구원을 시도한다면 멸망이라는 코스를 밟지 않았기 때문에 엉뚱한 곳으로 우회한 바가 됩니다. 즉 터널을 통과해야 저편 세계에 도달할 수 있는데 터널 들어가지가 무서워하기에 검은 터널이 없는 곳으로 가면서 두리번거리다가 현재 자기편에 그대로 머물러 버립니다.

오늘 본문의 핵심은, 하나님의 창조 작업에 있어, 우리 인간들의 심판이 필수적이며 그것이 단순한 사고나 사건이 아니라 배후에 어떤 분이 화를 내시고 있다는 사실과 관련 있다는 겁니다. 보통 사람들은 사건이나 사고가 일어나면 우연적이거나 아니면 같은 인간들의 횡포라고 여깁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세상을 향하여 화를 내시고 분노하시는 결과로서 사건과 사고가 일어난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러한 분노의 시범조로 먼저 이스라엘에게 일어납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나라만이 성전을 품고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품고 있는 현실은 여타의 이방나라의 현실과 다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이런 하나님의 언약 취지를 몰랐습니다. 세상이라는 이름의 현실이란 마치 지도상에 찍힌 점들의 집합이라서 만약 배후에서 누가 큰 손으로 지도를 움쳐지면 그 모든 나라들은 같이 망가지고 찌그러질 뿐입니다. 같은 평면 위에 놓여 있는 처지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에서 특수함을 갖는 것은 곧 성전을 가졌을 경우 뿐입니다.

성전이란 거룩한 하늘과 더러운 세상을 가름하는 ‘경계선’을 말합니다. 도저히 건너고 싶어서 너무 거룩하고 너무 고귀하기에 참여할 수 없는 세계가 경계선의 안의 세계입니다. 이 이스라엘 세계는 성전에서 터져 나오는 구원의 능력으로 뒤덮어서 가능합니다. 그런데 바로 그 성전의 경계선 취지가 이스라엘의 배반으로 둑이 터지듯이 세상으로 쏟아져내려가게 됩니다.

“하나님의 진노”라는 취지를 품고서 말입니다. 성전은 이방인과 하나님 백성을 가름하는 경계선 역할을 해왔습니다. 한 쪽은 하나님의 이름이 없이 사는 곳이요 다른 한 쪽은 하나님의 이름의 힘으로 사는 곳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산다’의 의미를 모아지기 위해서는 이 경계선은 지속적으로 이동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번잡스러운 상황은 성전이 갖고 있는 그 경계성이 제대로 기능과 역할이 발휘하는 그런 때가 들이닥친다는 겁니다. 이 성전의 와해와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이 무슨 관계가 있을까요? 예수님이 지닌 ‘하나님의 이름’의 윤곽은 성전의 무너짐과 조를 이루면서 진행됩니다.

요한복음 2:19-22에서,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유대인들이 가로되 이 성전은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뇨 하더라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및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

현 세상이 오로지 하나님의 이름이 계시는 성전으로 인하여 버텨왔다는 사실을 말해주기 위해서 그동안 가짜 행세한 것들을 지우는 작업과 더불어 세상의 큰 혼란을 야기시키십니다. 46년간과 3일간을 비교해봅시다. 46년에 비해서 3일은 너무나 짧아 보입니다. 하지만 사실에 있어 정반대입니다.

3일에 비해서 46년은 너무나도 얕고 짧습니다. 4600년 걸려도 지을 수 없는 성전을 예수님은 단 3일만에 지었기에 그 3일에 품고 있는 무게는 인류의 전 역사만큼이 무겁고 무겁습니다. 그 무게 있는 성전을 보여주기 위해 가벼운 성전들은 가볍게 파멸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파멸의 가벼움’입니다.

파멸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정보는 예수님의 죽으심은 이 세상 모든 가옥과 건축물이 다 성전이 된다 해도 대체할 수 있는 사항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즉 ‘어디에 계신다’가 ‘죽음’으로서 대체 표현이 가능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성전이 어디 있다고 말하지 말고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모든 것이 성전되는 것이 가능하다고 말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곧 모든 곳이 성전으로 합당치 않다는 말도 됩니다. 성전이 없는 곳도 이 세상이요 그러하기에 모든 것이 성전이라는 말이 비로소 성립되는 것도 가능합니다. 어느 곳에 성전이 없기에 비로소 모든 곳이 성전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성전 파괴와 더불어 세상 멸망 수순에 접어든 것입니다.

이런 면이 가능한 것은 예수님의 몸이 지닌 특수성 때문입니다. 이 특수성은 물론 이스라엘 나라의 특수성으로 설명이 가능합니다. 외부 나라가 이스라엘을 공격하려면 그들은 필히 ‘어린양 피흘림’의 장벽에 부딪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직면한다는 겁니다. 즉 이스라엘 어린양의 피 흘리심이 무관심한 그 틈을 타서만 그들은 이스라엘을 공격하고 파괴시킬 수 있다는 겁니다.

이스라엘마저 이방화가 된다는 말은 모든 하나님의 계획이 무산되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반대로 제대로 정상적으로 성취되고 있다는 말이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경계선 안의 새로운 시간과 공간은 기존의 인간들의 현실관으로서는 접근조차 허락하지를 않기 때문입니다.

기존의 인간의 현실관은 자기 것만을 사수하는 현실관입니다. 그 현실관 속에서 사람들은 자꾸만 신이나 외부에다 자기 질문을 퍼붓습니다. “존재야 존재야 이 세상에서 누가 제일 예쁘냐”고 말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새로운 모집하는 이스라엘에 대해서 도리어 예수님께서 이렇게 물으십니다.

“너희들은 강탈하고 탈취하고 너희들 것이라고 여기는 모든 것을 빼앗는 나를 너희는 누구라고 보느냐?”고 말입니다. 그러면 참 이스라엘에 속한 사람은 이렇게 답변하게 됩니다. 니다. “나의 모든 것과 나의 목숨까지 뺏아가는 분은 그리스도시오 하나님이십니다.”고 말입니다.

그동안 인간들은 자기 것을 사수하기 위해 명분들을 끌어 모읍니다. ‘억지스러운 인생’입니다. 그런 것은 다 자신을 수치스럽지 않는 존재로 버티기 위함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식으로 수치를 감추려는 자는 다 지옥에 집결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품은 선과 착함은 그 사람을 지옥으로 데려가기 때문입니다.

차라리 복음으로 인하여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는 고백이 나올 때 심판마저도 감사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어린양의 피로 인하여 이미 경계선 너머에 속했음을 감사하는 자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25강-눅21장 20-24(큰 환난과 진노)120429-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누가복음 21장 20절에서 24절까지입니다.

누가복음 21:20-24
“너희가 예루살렘이 군대들에게 에워싸이는 것을 보거든 그 멸망이 가까운 줄 알라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찌며 성내에 있는 자들은 나갈찌며 촌에 있는 자들은 그리로 들어가지 말찌어다 이 날들은 기록된 모든 것을 이루는 형벌의 날이니라 그 날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니 이는 땅에 큰 환난과 이 백성에게 진노가 있겠음이로다 저희가 칼날에 죽임을 당하며 모든 이방에 사로잡혀 가겠고 예루살렘은 이방인의 때가 차기까지 이방인들에게 밟히리라.”


그날은 환난의 날이고 진노의 날이라고 합니다. 단순히 화산이나 지진이 일어나면 그 땅에 살던 사람들에게는 불행한 날이지요. 그러나 집에 전기합선 되어서 화재가 났다 치면 ‘내가 앞으로 어떻게 살까?’ 단순히 그 문제지요. 하지만 ‘누가 내게 진노했지? 누가 나에게 이렇게 화를 냈을까?’ 이렇게 분노한다든지 감정적인 이유 때문에 그쪽이 화를 내서 나라는 이쪽이 당한다는 원인과 결과를 우리는 이 땅에서 찾을 수가 없습니다. 일본에서 지진이 났다, 누가 화를 무지 낸 모양이다, 이런 식으로 일본의 지진을 추적해서 ‘아, 당신이 화를 냈구나.’라는 것을 정당화 시킬 수 있는 증거를 우리가 잡을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타이타닉이 뒤집어졌다, 그럴 때 배가 빙산에 부딪혀서 파선했구나, 이렇게는 다들 알고 있는데 ‘누가 화를 냈단다. 누가 화를 못 참아서 배를 뒤집었대.’라는 식의 정당한 원인을 누가 이야기할 수 있느냐 그 말입니다. 세상에서 사건 사고가 빈번하게 일어나도 누가 진노했다든지 누가 화를 내서 이런 현상이 일어났다는 것을 엮을 수 있는 안목이 우리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당하기는 된통 당해놓고 하나님 믿을 수 있는 기회는 놓쳐버리고,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거예요.

환난 날에 형벌이 주어지고 이 백성들이 이방인의 손에 잡혀갈 것이다, 라고 할 때 여기 20절에 보면 ‘멸망’이라는 단어가 나오거든요. 이게 무슨 뜻이냐, ‘의도적이다.’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내가 의도적으로 예루살렘을 멸망시켰다.’ 그렇게 보시면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 멸망당한 예루살렘이 그냥 이방군대에 의해서 멸망을 당하거든요. 만약 우리가 예루살렘의 주민이라면 그리고 내가 살고 있는 예루살렘에 재앙이 일어났다면, ‘누구야, 누가 살기 좋은 마을을 힘들게 해. 누구야, 이방인인 너희들이야? 너희는 이제 죽었어.’라고 같은 인간들에게서 그 원인을 찾기 쉽잖아요. 가만있는데 강도가 들어왔다, 그러면 ‘강도 너 죽었어. 복수할거야.’라고 나오지요. 사람이 무슨 화를 당하면 그 원인을 추적해보면 ‘너야, 너 기다려. 내가 가만 안둘 거야.’ 이렇게 되는 것이 인간인데 예수님께서는 ‘그 원인이 이방인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너희들이 섬기는 이 하나님한테 있다는 생각을 왜 품지를 못하고 있느냐.’ 그 말입니다.

평소에 살아가는 그 정신, 사고방식이 어떠하기에 ‘나는 하나님 잘 섬기는데 저 사람들이 나에게 해코지를 했다.’ 왜 자꾸 원인을 같은 인간에게 찾느냐 그 말이지요. 그 자체가 줄이 끊어졌으니 그 자체를 문제 삼아서 하나님이라는 것이 네가 생각하는 그런 식의 하나님이 아니라는 거예요. 그것은 가짜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예루살렘, 이스라엘도 할 말이 있어요. ‘하나님, 우리보다 이방인이 더 나쁜 것을 주께서 아시잖아요. 그러면 이방인을 멸망을 시켜야지 지금 성전을 가지고 하나님을 잘 섬기고 있는 우리에게 진노를 퍼붓고 우리에게 화를 퍼붓고 우리로 하여금 멸망을 당하게 하고, 아이 밴 자들, 젖먹이는 자들은 화가 있을 찌어다, 왜 이렇게 지독하게 진노를 쏟아 부으십니까? 그쪽은 우리보다 더 나쁜데.’라는 생각이 들것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그게 바로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다.’ 하는 겁니다. 그게 무슨 말이냐 하면, ‘너희들 가운데 성전이 있었잖아.’ 그러면 이스라엘 쪽에서 ‘성전이 있는 것도 죄입니까? 성전이 있는 것은 축복이라고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성전 있음이 축복이지 어떻게 이것이 저주가 되는 겁니까?’ 하나님께서 이렇게 이야기하시는 거예요. ‘성전이 있다는 것은 하늘나라와 이 지상의 경계선이 특별히 너희들 지평위에 먼저 선점해서 지상에 있는 경계선으로 자리 잡았다.’ 그 말입니다. 이 말은 무슨 말이냐, ‘그동안 이스라엘 너희들이 다른 이방인들과 다름없이 죄를 짓고 있었지만 하늘나라의 거룩한 주둔지, 하나님의 이름이 계시는 주둔지로 인하여 그동안 너희들은 혜택을 입어 왔다.’는 겁니다.

5월 5일 날 특강의 주제가 ‘언약’인데 그때도 그런 이야기를 하겠습니다만, 하나님께서 물로 세상을 심판하시되 그 다음부터는 너희가 어떤 짓을 해도 홍수로서 심판 안하겠다는 것은 무지개라는 것이 그 보호막이 핵우산처럼 둘러쳐 있는 겁니다. 그것이 언약이에요. 그것과 똑같은 원리로 이스라엘은 다른 나라 벌 받을 때 같이 벌 받아야 될 똑같은 인간들이지만 특별히 너희에게는 거룩한 성전이 있음으로서 그동안 하나님께서 자비와 긍휼로 불쌍히 여기심과 용서라는 혜택을 그동안 입어왔는데 그것을 지금 철수하겠다는 겁니다.

철수했을 때 비로소 그전에 느끼지 못했던 것, ‘아, 우리가 이 정도로 하나님의 저주와 분노를 유발할 요인을 품고서 살아왔었구나. 그런데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을 화내게 할 만한 요소가 가득 차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우리를 이렇게 지켜준 것은 하나님의 또 다른 면, 하나님의 또 다른 면, 저주를 축복으로 저주를 용서함으로 바꾸어주는 장치가 바로 성전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에게 동반해서 살아왔던 겁니다. 그리고 그 장치가 철수되고 새로운 방식의 죄 용서장치가 주어지는데 그때 사 비로소 제대로 된 이스라엘, 제대로 된 천국백성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게 뭐냐, 성전의 취지와 의미를 완성시키는 성전이 주어지는데 그 성전은 건물도 아니고 부동산도 아니고 죽었다가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의 돌보심입니다. 구닥다리는 가라, 그 말이지요. 성전이라는 것이 공간적으로 점유해서 그 성전을 순례한다고 해서 복 받는다는 그 아이디어에서 나는 철수해 가겠다는 겁니다. 가버리고 이제는 ‘너희들이 안고 있는 공간과 시간과 상관없이 임의로 내가 너희에게 다가서면 네가 이 세상 어디에, 하늘 끝에 있을지라도, 바다 끝에 있을지라도, 땅속에 있을지라도 너희들은 용서받고 사랑받는, 구원받는 관계로서 성립할 수 있는 능력을 내뿜을 수 있는 성전, 너희들이 어디에 처박혀 있더라도 용서가 안 될 수 없고 용서가 될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진 그런 능력을 가지고 있는 새로운 의미의 성전, 그 성전이 등장’할 차례가 되는 거예요.

그 교체지점에서 기존의 모든 것들은 깔끔하게 철수되어야 되는데 그 뜯는 작업 속에서 ‘우리는 저주받아 마땅하고 하나님의 분을 유발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습니다.’가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 드러남의 의미를 아는 사람만이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새로운 성전의 취지도 같이 알고 있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지금 여기 이 엠프를 뜯어내고 새로운 것을 설치했습니다. 이것만 덜렁 설치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고 이것과 함께 온 오디오 자체의 환경까지 다 바뀌었어요. 이것은 바로 덮는 환경, 우리를 덮어씌우는 주변이 바뀌는 것을 의미하는 겁니다. 이 모든 공간자체가 바뀌는 것이지요.

그동안 알았던 우리의 시공간을 떠나서 주께서 제공하시는 새로운 시공간 안에 푹 싸이게 되면 우리는 새로운 성전의 효과를 누리게 되는 겁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현실자체가 기존의 현실관 가지고 하나님 믿고 예수 믿으려고 하지 말라는 말이지요. 새로운 현실 안에서 새롭게 등장하신 그 예수를 믿어야지 기존의 환경, 기존의 종교생활 가지고 주님과 엮여보려고 시도를 하게 되면 그것은 멸망당하는 이스라엘 꼴이 나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러면 주님께서 가져온 새로운 현실에서는 우리가 예수 믿는 것이 어떤 양상으로 드러나느냐는 겁니다. 이것이 중요한 문제로 드러나는 거예요.

사도행전 1장 9절-11절에 보면 “이 말씀을 마치시고 저희 보는데서 올리워 가시니 구름이 저를 가리워 보이지 않게 하더라 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흰 옷 입은 두 사람이 저희 곁에 서서 가로되 갈릴리 사람들이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지금 사라졌어요. 제자들이 믿던 예수님이 사라졌습니다. 어디로 갔느냐는 겁니다. 오셔서 아버지 이야기 했어요. ‘너희들이 알지 못하는 아버지는 나를 통해서만 연결되지 너희들로서는 연결되지 않는다. 베드로야, 네가 아무리 오고 싶어도 내가 가서 처소를 마련하지 않으면 너는 엉뚱한 하나님을 믿고 있는 것뿐이다. 이 예수님과 아버지와 함께 있기 때문에, 그리고 너희들과는 함께 있지 않기 때문에 내가 다시 너희에게 오게 되면 너희도 내 아버지 집에 있게 된다.’ 그렇게 되거든요.

그런데 그렇게 이야기한 예수님이 사라졌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모든 신은 다 가짜라는 뜻입니다. 가짜고 그 진짜 신은 따라잡을 수가 없다는 거예요. 왜, 예수님은 제자들손에 잡히지 아니하고 제자들 보는 앞에서 구름타고 사라져 버렸기에 그렇습니다. 닭 좇던 개꼴이 된 거예요. 제가 광주강의에서 그런 예를 들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으려고 수십 년을 애를 써요. 나중에는 믿고자 또 믿고자 해도 숨이 찹니다. 그러다가 털썩 주저앉으면서 ‘이 현실에서 주님 믿으려고 악착같이 애를 썼는데 더 이상 숨이 차서 예수 못 믿겠습니다. 저는 그만 따라가렵니다.’ 그럴 때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고래~? 그러려므나!’

제자들도 그렇게 된 거예요. 제자들도 그랬던 겁니다. ‘나는 예수 모른다.’고 부인했던 그 제자들, 따라잡을 수 있는 메시야, 따라 잡을 수 있는 하나님은 전부 다 가짜였던 것입니다. 죽지 않는 신은 신이 아니에요.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가 죽지 않고 신을 믿기 보다는 살아 있으면서 신을 믿어서 산채로 신의 나라에 들어가려고, 내가 살아 있듯이 신도 살아 있어서 서로 교류하면서 좋은 관계 유지하면서 천국에 들어간다는 아이디어를 끄집어 낸 거예요. 그것을 주께서는 거부합니다. ‘네가 나 죽는데 따라 올수나 있나? 네가 구름 탈 때 한 번 타볼래? 네가 손오공이냐?’

우리가 구름 타봐야 무게를 못 이기고 푹 빠져버리지요. 우리가 어떻게 구름을 탑니까? 구름이라는 것은 물방울이 언 고체상태가 기체 상태로 변한 것에 불과한데요. 솜털같이 가벼운 거기에 어떻게 우리가 올라섭니까? 우리가 학교에서 배운 것은 물리적이고 생물학적이고 화학적인 것뿐이고 우리는 그 환경 속에 놓여 있을 뿐인데요. 제가 아까 앰프 바뀐 이야기 했지요. 환경 달라지는 이야기 했지요. 우리는 기존이 환경가지고 주님을 붙잡아서 주님을 내 주님으로 삼아서 천국 가겠다고 그런 식의 쇠뇌를 교회 안에서 당하면서 학습 받고 교육받고 있는 거예요. 그게 뭐냐, 다 가짜라는 겁니다. 백날 해보세요, 헉헉거리기만 하지요. 십일조만 해도 힘이 부치는데 교육관 짓는 것 까지 하려니 헉헉거리지요. 헉헉거리다 못해 자기 속에서 타협하고. ‘여기까지입니다. 더 이상 침범하지 마세요. 여기는 우리 생활 영역입니다.’ 누가 뭐라고 했어요? 자기가 알아서 그래놓고는.

게다가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심판 이야기를 하니까 사람들은 겁을 집어먹는 겁니다. ‘심판, 유다나라가 심판받았대, 하나님 잘못섬기고 우상 섬겼다는 이유로 심판받았어.’ ‘그래? 그러면 그들은 나쁜 인간이네.’ ‘나쁜 인간이니까 심판받지.’ ‘그러면 우리는?’ ‘우리는 심판 안 받지. 우리는 훌륭하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어요. 사람은 심판이라고 할 때 자꾸 간격을 생각해요. 심판해서 모든 것이 없어지고 새롭게 창조된다, 이렇게 생각하는데 하나님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심판이 창조의 절차 중에 하나입니다. 모든 것을 주님 중심으로 세상을 만드실 때 그 중간에 끼어드는 순서, 절차가 심판이에요.

얼마 전에 교회 백주년 기념식에 갔는데 거기에 순서가 지워져 있잖아요. ‘다음에는 기도할 목사님을 소개합니다. 증경 총회장되시고…….’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그럴 때 우리는 ‘기도순서, 빨리 지나가라. 무슨 소리 하는지 안다.’ 그 다음에 ‘찬송이 있겠습니다.’ 그 다음에 ‘설교하겠습니다.’ 이렇게 순서가 있지 않습니까? 기도를 길게 한다고 해서 치우지는 않는다는 말이지요. 심판을 한다는 것은 순서인데 우리는 성질이 급해서 심판한다는 소리에 삐져버렸어요. ‘주여, 심판하지 마시고 그냥 오소서.’ 이렇게 되는 거예요.

이것이 단지 성질 급한 정도가 아니고 내가 꾸리고 있고 내가 자리 잡고 있는 이 세상을 어떤 일이 있더라도 사수하려는 성질이 있습니다. 그동안 모든 내 것, 청춘마저 바치고 자존심과 명예 체면까지 쏟아 부었는데 이것이 다친다면 하나님께서는 일 잘못하고 있다고 손가락질을 하고 싶은 생각이 가득한 거예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네가 네 것이라고 여기는 것을 흡수해서 이것을 녹여서 전체적으로 예수님의 나라를 만들고자 하는 겁니다. 지금 내 소유라고 하는 그 소유권을 주님께서 지워버리고 내 것이라고 여기는 그것, 내 남편, 내 자식, 내 교회, 그것마저 양초처럼 녹여서 예수님의 소속된 나라로, 새 하늘과 새땅을 만드는 재료로 삼고자 하거든요.

그런데 우리는 그 원대한 계획을 알지 못하고 지금 내가 느끼는 이 현실, ‘이 현실은 손대지마. 그것 건드리면 나는 안 믿을 거야.’ 이렇게 버티는 거예요. 쉬운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지도가 이렇게 있다 할 때 여기 대한민국이 있고 그 위에 북한이 있고 동해 건너 일본이 있지요. 지도상으로 보면 일본은 일본주장하고 한국은 한국주장하고 북한은 북한 주장하고, 그렇지요. 서로 군대를 창설해서 서로 주시하면서 대적하지요. 그런데 이 주보가 지도라면 큰 손이 있어서 이것을 꾸겨버리면 어, 내 바탕, 내 근본, 내 기초, 기 존재의 기반, 이것을 꾸겨버리면 일본이나 북한이나 다 같이 꾸겨지는 휴지조각에 있는 옆자리 이웃에 불과한 거예요.

이것을 구기시는 현실을 모르고 사람들은 이렇게 펴놓았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렇게 생각하고서 ‘여기서 여기까지는 내 것, 여기서 여기까지는 내 것.’ 이렇게 되는 겁니다. 예수 믿는다는 것은 뭐냐, 이렇게 주님께서 얼마든지 우리를 구길 수 있다는 것을 용납하는 거예요. ‘구겨주세요. 저는 그저 주님의 손바닥에 있는 하나의 점이고 지도에 불과합니다. 손바닥 접어버리면…….’ 이것이 제가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고 시편에 나오는 이야기에요. ‘우리 인생이란 것은 주님의 손바닥 위에 있기 때문에 접어버리면 이것은 없는 것 같사오니.’라고 이미 신앙을 아는 사람은 그런 고백을 했다는 말이지요.

네 것, 내 것 맞는데 주님 앞에서는 그것이 의미가 없다 이 말이에요. 여러분이 잘 아시는 백설 공주이야기가 나오지요. 새로 들어온 왕비가 백설 공주를 쫓아내고서 거울보고 하는 말이 ‘거울아, 거울아, 이 세상에서 누가 제일 예쁘냐?’ 할 때 그 말은 뭐냐 하면 ‘존재야, 존재야, 이 세상에서 누가 제일 예쁘냐?’ 하는 말입니다. 왜 거울에게 물어보느냐하면 거울은 모든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거울은 모든 존재의 총괄이기 때문에, 거울은 모든 존재의 종합이고 하나의 덩어리기 때문에 그 앞에서 ‘나는 얼마나 예쁘냐’를 묻는 겁니다.

‘존재야, 내 존재의 기반이야, 아니면 내가 모르는 것까지 다 알고 통하고 있는 존재야, 이 세상에서 누가 제일 예쁘냐, 네가 존재의 보기에 누가 제일 예쁘냐.’ ‘왕궁에서는 왕비님이 제일 예쁩니다.’ ‘고래!~’ 기분 좋았다는 말이죠. ‘그런데 나라 밖에서는 백설 공주가 제일 예쁩니다.’ ‘어, 백설 공주?’ 사람들은 항상 자기가 자기에게 수고하고 애쓰고 봉사하고 충성을 다한 것을 옳다고, 이것이 유일한 현실이라고 잡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는답시고 자꾸 물어요.

‘주님은 누구십니까?’ 그러니까 이것은 ‘예수님, 예수님, 이 나라에서 누가 제일 예쁩니까? 예수님, 예수님, 이 나라에서 누가 제일 똑똑합니까? 우리 중에서 누가 제일 기도를 잘 합니까?’ 그 물음 자체가 내가 그동안 꾸며온 이 현실이 제발 참된 현실이라고 좀 동조를 해주세요, 라는 식으로 묻는 거예요. ‘하나님, 제가 지금 제대로 된 정상적인 존재지요?’라고 묻고 싶은 거예요. 그것을 호응해 달라는 식으로 하는 겁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그 현실자체를 근본적으로 뒤집어버립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은 화내시고 진노하시고 분노하시거든요. 그런 꼴을 주님께서는 못 봐요. 내가 몸담고 있는 이 현실이 전부라고 여기는 그 꼴을 못 본다고요.

그래서 주님은 반대로 나가요. ‘네가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네가 나를.’ 다시 말해서 내가 너의 가진 모든 것을 탈취하고 심판하고 너의 것이라고 여긴 것을 강탈하고 빼앗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고 묻는 거예요. 너의 건강을 빼앗고 너의 건강을 부흥되지 못하게 만들고 너의 집안에 우환 생기게 하는 나를 너는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라고 묻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이렇게 답변해야 돼요. 나의 모든 것을 빼앗고 나의 건강도 빼앗고 나를 죽음으로 몰아넣고 나를 사랑하는 사람을 일찍 보내는 그 분이 나의 주님이십니다, 라는 그 고백이 나오느냐는 말입니다.

그게 바로 살아계신 주님이십니다. ‘주는 살아계신 하나님이요, 주는 그리스도시오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심판을 하든 내 현실을 망가뜨리든 거기에 대해서 네가 반대의사, 섭섭한 마음을 갖고 있다는 자체가 너 자신부터 가짜가 되는 거예요. 자기 자신이 누군지를 몰라, 그럴 수밖에 없지요. 맨 날 눈만 뜨면 거울아, 거울아, 내 존재가 얼마나 정당하게 존재하고 있는지를 네가 편들어 다오, 맨 날 이런 식으로 하는 거예요. 주님께서는 그냥 심판이 아니고 분노함으로 심판하는 이 절차가 필수입니다. 이것은 인간이 죄지었다고 생겨난 것이 아니고 반드시 거쳐야 돼요. 당연히 거쳐야 되는 필수절차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시는데 있어서 심판이 창조의 재료가 되는데 우리는 그 심판, ‘어린애들과 젖먹이는 자들에게 환란이 있다.’고 하니까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사나, 이렇게 나온다는말이지요. 다시 말씀드립니다. 이스라엘은 이방인과 차이가 나요. 본문 24절에 봅시다. “저희가 칼날에 죽임을 당하며 모든 이방에 사로잡혀 가겠고 예루살렘은 이방인의 때가 차기까지 이방인들에게 밟히리라.” 이방인이 세 번 나오거든요. 이스라엘과 이방인, 이것은 확실한 경계선입니다. 거룩한 자와 거룩하지 못한 자, 지옥 갈 자와 천국 갈 자, 확실한 경계선입니다.

그 경계선은 이스라엘 가운데 성전이 존재하기 때문에 발생된 효과입니다. 그런데 성전이 있기에 이방인과 이스라엘을 구별한 그 경계선은 지금 하늘나라와 인간나라 사이에 있는 그 경계선이 역사적인 모양새로 우리에게 드러난 거예요. 하도 사람들이 천국 가봤어, 하나님 봤어, 천국이나 가보고 나서 천국을 이야기 해, 하도 이 따위 소리를 많이 하고 시편에도 ‘하나님을 본 자가 누구냐, 하나님은 없다.’ 하는 소리들이 많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런 경계선을 가지고 일하신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 시범조로 성전을 이스라엘 나라에 장착을 시켜놓은 겁니다.

그 성전은 어떤 죄를 지어도 그 성전의 피만 있으면 용서가 된다는 기이한 현상이 일어나는 거예요. 이스라엘 나라 생길 때 어린양의 피로 말미암아 피를 발랐더니 이스라엘은 살았고 피 바르지 않은 애굽사람들은 다 죽었어요. 이 자체가 얼마나 인간의 예상을 뛰어넘는 기이한 현상입니까? 아주 이상한 현상이에요. 전혀 이 현실에서 뽑아낼 수 없는 아이디어라는 말이지요. 현실에서 뽑아낼 수가 없지요. 주님께서는 다른 현실을 생각하고 있는데. 숨어 있는 현실, 예수님 중심으로 새 하늘과 새 땅이 이루어지는 그 현실을 이 세상에 지도상의 점같이 존재하는 인간들이 알 턱이 있습니까? 그 지도를 꾸겨버리면 다 한 뭉치가 되어버리는데, 그것이 다 엉뚱한 현실이고 환상에 불과하고 모든 것이 다 가짜인데요.

심판한다고 하거든 반기세요. 심판을 진즉에 해야 돼요, 라고. 심판 하는 것을 왜 우리가 기뻐하고 반겨야 하느냐하면 심판 할 만큼 지금 다른 성전이 마련되어 있다는 뜻이거든요. 애 밴 여인이 애 유산되어버리고 젖먹이 애가 죽는 화가 있을찌라도 그 화를 제공하신 분이 바로 우리 주님이라는 그 생각이 들게 되면 그 사람은 그러한 절차로서 이쪽에서 저쪽으로 경계를 넘어가는 하나의 계기가 되는 겁니다. 그렇다, 우리가 주님을 잘못 생각했구나, 내 것을 키워주고 내 것을 챙겨주는 주님이 아니고 내 것을 빼앗고 내 것을 심판하고 강탈하고 내 것을 빼앗아서 불사를 수 있는 권한을 가진 그분이 내가 그동안 몰랐던 나의 진정한 주님이었구나, 라는 것을 아는 거예요.

죽어야 날 수 있는 분을 이런 저런 심판을 통해서 미리 만날 수 있는 행복을 맛보는 겁니다. 이것을 생각하면 그동안 목사들에게 교회에서 사기 당한 것을 생각하면 이것은 진짜 분통이 터지지만 그런 목사들을 배치한 이유가 결국 같은 통속이었다는 거예요. 교회는 개혁되어야 하고 겸손한 목사는 돈을 밝히지 말아야 되고, 저는 돈 밝히고 있으면서……, 여러분, 우리 속에 있는 선이라는 것이 우리를 지옥으로 인도하는 거예요. 우리 속에 있는 착함이.

마태복음 10장 28절에 보면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를 두려워하지 말며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는 자를 두려워하라.” 예수님이 생각하는 현실은 인간심판이란 간호사가 엉덩이에 주사 놓는 거예요. ‘아가야, 아프다. 바늘 들어갈 때 약간 아프다. 참아라.’ 그러나 애들 입장에서는 심판이죠. ‘간호사 아줌마 저에게 왜 이렇게 화를 내십니까?’ ‘이거 맞아야 장티프스 안 걸리는 거야. 아프더라도 참아, 응? 아이고, 잘 참는다.’ 하고 주사 놓는 겁니다. 이것은 바로 예수님이 자기 몸에다가 주사 놓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왜 저에게 이런 어려움을 줍니까?’ ‘네 몸이 네 몸이 아니고 내 몸이거든?’

네 속에 생명의 주사를 놔야 네가 나 있는 곳에서 영원히 동거하면서 살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따끔합니다. 따끔한 게 너무 따끔해서 문제지만. 사실 아프기만 해서 구원받는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아파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너무너무 많은 거예요. 이유도 모르고 원인도 알 수 없는데 매일같이 얻어터지면서 끝까지 자기 잘났대요. 나는 하나님 앞에 할 도리를 다 하고 난 아직도 저 교회 안 나가는 사람보다 착하다, 그런 것을 계속해서 쥐고 있는 겁니다. 한 고집 하는 거예요.

그 말은 뭐냐, 부끄럽다는 거예요. 여러분, 부끄러운 것을 숨길 데는 한군데 밖에 없습니다. 지옥가면 그 부끄러워하는 인간들 다 그리로 숨어들어 옵니다. 부끄러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성경에 있는 말씀이에요. ‘내가 복음을 아나니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그 전에는 남 앞에 과시할 것들이 따로 있었어요. ‘나는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며 율법에 흠이 없다.’ 그런 것으로 자기 부끄러움을 가렸던 시절에 사울이었던 시절인데 이제는 그 껍데기가 말끔하게 벗어지면서 ‘이제는 나는 복음을 알고 어느 누구 앞에서도 복음으로 인하여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사람이라 하는 것은 자꾸 자기부끄러움을 남에게 드러내지 않기 위해서 몸부림을 치면서 사는 거예요. 그것을 저는 억지스러운 인생이라 하는데 자꾸 명분을 만들어요. ‘거울아, 거울아, 나는 어떤 명분을 만들면 내가 남에게 인간답게 살 수 있느냐?’를 자꾸 찾고 있어요. 그렇게 자꾸 명분을 찾다 보니 억지스러운 거예요. 자기의 위선과 거짓을 가릴만한 명분을 자꾸 찾다 보니 그렇게 찾은 명분을 한꺼번에 쓰레기 취급당하려 하니 편해질 수가 없고 반발하면서 뛰쳐나가지요. ‘피? 피만 있으면 다 그래?’하고 피식 웃지요.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리모델링하는데 이것은 뜯어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미 계약을 그렇게 한 주인은 여기도 뜯어주시고, 여기도 뜯어주시고, 이렇게 뜯어주시기를 원하는데 군대생활 하다가 충성, 하고 군복무하고 와보니 집을 다 뜯어내고 있거든요. 갑자기 나타난 아들이 집을 다 뜯어내는 것을 보고 ‘아저씨가 뭔데 멀쩡한 남의 집을 다 뜯어서 망치나?’ 하면서 횡포를 부릴 때 마침 아버지가 동사무소에서 볼일 다 보고 돌아와서 ‘너 왜 일하시는 아저씨에게 횡포냐?’ ‘우리 집 뜯어내잖아요.’ ‘당연히 뜯어내야지. 지금 리모델링 하고 있는데.’

뜯기는 인생, 그것이 신자고 안 뜯기려고 버티는 인생, 불신자입니다. 자꾸만 자기가 도배를 해요. 명분을 찾는다는 말입니다, 명분을! 자꾸 이유를 달고 변명하는 거예요. 내가 가진 것으로 부끄러워하지 않고자 하는 것은 기존에 가짜 현실입니다. 이것은 진짜 현실이 아니에요. 그 안에 소복이 숨어서, 마치 애들 병정놀이 할 때 아지트를 만들 듯이, 그 안에 숨어서 빵, 빵, 하고 총싸움 놀이 하듯이. 그 버릇이 크고 늙어서까지 변하지를 않아요.

뜯어내 주시는 그 고마우신 하나님. 그러면 주께서 사전에 어떤 것을 준비하셨기에 주께서 마음대로 뜯어낼 수가 있는가? 요한복음 2장에 보면 성전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저 성전이 몇 년 동안 지었느냐?’ 46년을 지었는데 아직 다 짓지도 못했어요. 유럽에 가면 150년, 200년 동안 지은 것들이 수두룩합니다.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내가 삼일동안 짓겠다.’ 46년이 깁니까, 3일이 깁니까? 우리보기에는 46년은 길고 3일은 짧아 보이지요. 3일이 4천 6백년보다 더 깁니다.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건널 수 없는 그 경계선, 그 경계선을 예수님이 직접 성전이 되셔서, 우리가 건널 수 없던 것을 이제는 건널 수 있도록 모든 능력을 장만하는데 3일 걸렸습니다. 이 3일 동안 예수님 뭘 하셨습니까? 물 위를 걸었습니까? 오병이어 기적을 베풀었습니까? 그것은 3일 동안에 한 것이 아니에요. 3일 동안 한 것은 뭐냐, 인간이 아무리 해도 건널 수 없는 그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의 바다를 주님께서 죽으셨다가 3일째 살아나는 거예요. 무엇을 건너셨습니까? 무엇을 건너오신 것입니까? 저주를 건너오신 것이고 죄의 무거운 처벌을 건너오신 것이고 지옥의 불을 건너오신 겁니다.

지옥이 불을 건너오신 그 성전에 합류한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이것은 처자식도 못 따라와요. 친한 친구도 그곳에 합류될 수가 없습니다. 주님이 불러줘야 거기에 합류되지 자기 힘으로 가려고 들면 나중에 헉헉거립니다. 이것도 지켰습니다, 제자훈련 열두 단계 다 했습니다, 십일조 다 했습니다, 찬양도 했습니다, 마음을 낮추라고 해서 마음을 낮췄습니다, 마음을 낮춰서 갈 수 있는 나라가 아니에요. 마음 낮추는 것도 다 수작입니다. 제가 어제 기독교 모임에서 그런 설교 했거든요.

축복은 뭐냐, 축복은 마음 낮추는 것도 아니에요. 무엇이 축복인가, 겸손도 축복이 아니라면 무엇이 축복인가, 예수님이 우리에게 버림받았다는 사실을 아는 그것이 이미 같은 한 통속이 되었다는 뜻이에요. 남들이 넘을 수 없는 경계선 넘어 예수님 세계에 들어왔다 그 말이지요. 주여, 나 같은 인간, 쓸데없는 인간 위해서 주께서 대신, 내가 차마 아까워서 버릴 수없는 이 간닥거리는 목숨, 하지만 주님께서 과감하게 나 같은 인간 위해서 목숨 버린 그것이 우리에게는 축복입니다. 내가 이 목숨가지고 교회를 몇 군데 세우고 전도하고 강의하고 설교하고, 이것은 축복도 아닙니다.

내가 받은 것은 주께서 내 대신 돌아가셨다는, 주께서 버림받아서 내가 주의 나라에서 주의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 새로운 현실이 나에게 덮쳤다는 그 것, 우리는 이 생각을 언뜻 언뜻 하지만 오래 가지를 않기 때문에 주께서 또 다시 교회 나가면 뜯는 작업을 시작합니다. 뜯는 것이 주님의 취미에요. 이번에 또 무엇을 뜯어볼까, 얘가 지금 무슨 환상에 빠져 있지, 환상되는 바로 그것을 뜯어버려야겠다, Boys be ambtious, 옳다구나, 소망, 이것을 한 번 뜯어볼까? 우리는 그런 의미에서 기도하는 재미를 느껴야 됩니다.

기도하는 재미는 뜯겨져 나가는데서 예상 못할 기도가 나옵니다. 오늘도 내 모든 꿈과 가짜 현실을 뜯어내시니 내가 생각하지 못한 현실에 소속되어 있다는 사실을 들추어내면서 날 강탈해 가시는 주님이 나의 살아계신 주님이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이 사실을 우리가 무슨 수로 알았겠습니까? 아마 주님 구름타실 때 같이 올라타 보면 알거예요. ‘주님, 저 사람 아주 작게 보이는데요?’ ‘그때는 아주 크게 보였지?’ ‘베드로도 작게 보이네요.’ ‘지상에 있을 때는 베드로도 엄청나게 여겼지? 수제자라고 까불 때 네가 기 팍 죽었지? 그런데 위에서 보니까 아무것도 아니지?’ ‘아무것도 아니네요.’

같이 구름타고 올라가면서 경계선 너머에 있으면서 우리는 알 수 있는 겁니다. ‘주님, 저 이방인?’ ‘이방인도 때가 되면 다 멸하게 되어 있어. 저것도 정리하게 되어 있고 저것도 정리하게 되어 있어. 그것이 내 숙제고 내 업무니까 너는 내가 하는 일을 그저 지켜보기만 하면 돼.’ 그것을 이 구름위에서 하지 말고 그 구름을 싹 벗겨서 지금 이 몸을 가지고 우리가 사귀고 있고 맞닥뜨리고 있는 이 봄 날에, 이 일반적인 현장 속에서 그 대화, 소곤거리는 즐거움과 기쁨이 있어야 돼요. 그것을 자기만 알고 싶어서 남에게 공개를 안 하니까 문제지만.

그런 소곤거림이 여러분에게 있는 줄 압니다. 제가 언급 따로 안 해도 늘 소곤거리는 그 재미, 즐거움, 속닥거리는 그 재미. 바로 심판이라는 것이 그렇게도 우리는 무섭고 떨렸습니다. 그런데 누가복음 본문을 다시 보게 되면 그것이 주께서 창조하시는 하나의 절차요 순서로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에 우리 마음이 편안하고 느긋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렇게 외칩니다. ‘주여, 어서 오시옵소서. 오셔서 모든 가짜를 작살내 주옵소서. 그리고 저도 가짜였습니다. 가짜라는 것을 지적해주시는 주님이 바로 진짜 주님이었습니다.’ 하는 고백, 여러분의 고백이 되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무엇 때문에 분노하고 무엇 때문에 걱정했고 무엇 때문에 염려해 왔었습니까? 거울아, 거울아, 맨 날 자기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두리번거리면서 살아왔던 것, 내 것 지키기 위한 그것이 삶의 이유고 목적이었고 말도 안 되는 명분이었다는 사실, 이 가짜 덩어리를 어린양의 피로써 아예 페인트칠을 해 주셔서 피 속에서 오히려 그것이 가짜임을 즐거워하는 저희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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