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의 맛 The Taste Of Money, 2012

http://movie.daum.net/moviedetail/moviedetailMain.do?movieId=64124




(베이컨의 조각난 신체 같은 느낌이다. 뽀샾없이 후딱만들었는데 흐릿한 모호한 문자가 오히려 더 잘살려진듯 하다)

 

그 맛    --  백현진

저기 멀리서 당신이 내게 손짓하네
나는 당신을 아네! 당신은... 돈

나는 당신을 먹네 찢어 씹어 먹네
당신은 맛있네 당신은 돈

나는 당신을 먹고 또 먹네
돈 냄새가 나니 또 뜯어먹네
그 맛이 화끈하여 난 녹아 흐르네
나는 부득이 당신이 되네

바위에 앉아서 생각해 보네
의자에 앉아서도 생각을 하네

당신 생각을 돈 생각을
돈! 당신 생각을! 당신의 그 맛을!
당신은 바로 나 나는 바로 당신
금빛 먼지 속에서 우리는 돈

우리는 돈 우리는 돈
우리는 돈 우리는 돈

돈은 돈 돌고 돈 돈
돈은 나 돈은 곧 너
돌은 돈 돌은 너와 나
돌아버린 우리는 돈

우리는 돈
우리는 돈
우리는 돈
우리는 돈
돈 먹고 돈 먹고 돈 돈 먹고 먹고
너 먹고 나 먹고 이 집 주고 저 집 주고 씨앙



요약정보
드라마 | 한국 | 115 분 | 개봉 2012-05-17 |
홈페이지
국내 money2012.kr
제작/배급
휠므빠말(제작), 시너지(배급), 롯데엔터테인먼트(배급)
감독
임상수
출연
김강우 (주영작 역), 백윤식 (윤회장 역), 윤여정 (백금옥 역), 김효진 (윤나미 역), 마우이 테일러 (에바 역)  출연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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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욕이라는 홈파기 - 돈의 맛

2012년 5월 25일 금요일 오후 4:04:56  김대식


일단 재미없다. 단 하녀 라는 영화를 본 사람에게 말이다.
그리고 이미 mb정권의 비리를 나꼼수 나친박 등등의 프로그램을 들어본 자들에게서는 스토리가 뻔한 내용이다.
만약 전혀 모르는 자들에게서는 감독의 의도가 그들에게는 잘 먹혀들 것이다.
지루하다고 강이아빠는 말했으나 나는 그래도 재미없지만 무지 키득 키득거리며 웃으며 봤다.

하녀를 초반부에 접하면 딱 박정희 이야기 임을 보게 된다.
뒤에 가면 오죽하면 갑자기 이상하게 결말을 짖는다.
(이렇게 해서라도 감독은 세상을 전복시키고 싶어서 몸부림치듯 아주 찝찝하게 끝나는 장면으로 기억에 남았다)

이 영화도 중간에서 후반부로 갈수록 이상하게 결말짖는다.
갑자기 눈먼자들의 도시의 마직막 장면처럼 세상을 정화시키는 정화수가 뿌려진다. 오죽 답답했으면 ㅋㅋㅋㅋ

그래서 이 영화를 보면서 딴생각을 하면서 봐야했다.
하녀는 이미 중첩된 이야기로써 당연하고
써틀아일랜드 라는 영화와 중첩시켜 아니 저절로 중첩이 되더만!!
(자본주의라는 정신분열증을 어떻게 탈출할것인가?)

또 다윗왕의 비리
솔로몬 황금성전을 중심으로 한 궁전 내부의 내막들을 연상하면서 보니
(선악과 즉 돈의 맛을 미리 맛본 이상 어떻게 빠져나갈것인가?)

보는 내내 나는 웃서워서 혼자 키득 키득 거렸다.
(돈 섹스 권력이 삼위일체가 되어서 나올 때 마다 정사신에서 혼자 키득 웃어댓으니원 완전또라이로 봤을 것이다.
강이아빠는 옆에서 속이 안좋아서 배알이를 하며 방귀로 탈 초토화 시켰지만 ㅋㅋㅋㅋ)

아무튼 보는 내내 배꼽잡고 웃었다.
전혀 웃기지도 않은 내용들이지만 말이다.

여기서 하녀에서처럼 물이 무지 무지 많이 나온다.
물은 고이면 썩고
흐르면 생명수처럼 맑다.

물은 마치 이데올로기처럼 없는 부재성이다.
그런데 그 부재라는 빈자리를 누가 앉는가에 따라서
물은 썩거나 살인의 죽음이 되고
반대로 물이 흐르면 속죄의 정화수가 되는 생명수가 된다.
(어쩌면 나는 이 두 영화의 주인공을 돈도 권력도 아닌 물이라고 하고 싶다. 물의 상태? 이동? 등등에 따라서 인간들은 배치물에 지나지 않는다. 사건의 중심은 물이라고나 할까?)

빈자리 라는 부재성의 결핍을
어떻게 채울 것인가?
무슨수로?

이것이 그들이 문제를 푸는 방식이다. 등장인물들은 늘 물 속에서 정화시킨다.
물이 그들의 답이다. 성전청결처럼 그들은 늘 물을 뿌린다.

그러나 말라꼬 채울려고 하는가? 그칸다고 깨끗해지나? 그냥 냅뚜면 된다.
정답은 누가 와야 한다는 것이다.

마침 오늘 어머니랑 아침식사를 하면서 이런 대화를 했다.
보좌가 여호와 하나님께서 좌정해 있다면 아무 문제가 없다.
그런데 보좌가 비워 있는 부재의 상태가 되면
이상하게 사건이 뻥뻥뻥 터진다.

비워있는 그 부재를 견디지 못하는 자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 천상의 일들이 땅에 비쳐져서 마치 스크린처럼 영사기에 비쳐서
하얀 바탕에 깔리는 것이 바로 역사이다. 스크린화 이다.

사울왕이 그 빈자리를 견디지 못해서 그 결핍을 채우는데 있어서
사무엘 선지자는 숨어서 훔쳐본다.

걸려라 걸려라 걸려라 (바비킴 : 터져라 토져라 터져라!! 궁민~~~~~잉)

딱 걸렸어 잡았다. 올무쳐놓은 그물에 드디어 말려든 것이다.

그들은 항상 바른소리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제사를 안지키고는 못배기는 것이다.
탕자 이야기의 맏아들이 그렇다.

가인은 제사를 안드린 것이 아니다. 제사를 안지키고는 못배기도록 되어 있다.
비워있는 빈자리의 부재성을 견딜수가 없기 때문이다.
(돈 맛, 선악 맛을 알기에 제사 안지키고는 못배긴다.) 

선악이라는 돈 맛을 알았기 때문이다. 돈 맛을 알아버린 이상
돈과 일심동체가 된다. 인간이 돈을 따먹어 맛보는 것이 아니라
돈이 인간을 따먹고 맛보고 있다.
하나님과 같이된 이데올로기가 되어버린다.
없던 허구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가장 실제적인 권력이 되어버린다.

그래서 오늘 아침 어머니랑 했던 이야기가 바로 이번주 설교에서 나왔던 이야기라서
천상의 보좌 이야기를 했던 것이다.

그래서 바른 소리를 한다는 것은 결국 안지키고는 못배기는 제사와 같다.
(율법지키기, 말씀지키기, 행함, 명령어, 산상수훈(율법강화)지키기, 십계명지키기, 주일성수, 안식일, 십일조, 연보, 손으로 지은 성전사수, 성화되기)

그러나 오히려 그들은 걸려든 것이다. 말려든 것이다.

제사가 아닌 순종이다.
제사가 아닌 더 나은 제사이다.
제사가 아닌 인애와 자비를 원하신다.

그래서 행함이 아닌 누구냐를 봐야 한다.(인물로 바뀐다는 의미를 모른다. 그저 문자라는 기호에 그 징후에 빠진다.)
(인애와 자비를 원한다고 하니까 인애와 자비를 자기가 또는 인간 쪽에서 추구할려고 한다. 오히려 안되고 내 쪽에서 도저히 나올수 없는 불가능성 즉 단절성임을 알아야 외부에 외치는 것이다. 이것을 회개 자기부정이라고 한다. 그래서 아벨은 누가 좀 개입해 달라고 누구를 외치는 족보를 형성하게 된다. 일명 [죽었더라 족보]이다. [누락족보] [단절족보] [배제족보] [차단족보] [실족족보] 곧 예수님의 족보이다.)

아벨의 제사는 누구가 개입해야 합니다 라는 외치고서 죽는다.
아브라함 제사 또한 누가 와야 합니다 라고 외치는 믿음을 처음으로 제시했다.
단절성을 격고서 말이다. 자신의 제사가 곧 행함이 단절 되고서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누가 개입했음을 보고서 말이다.
딴 누구의 제사를 본 것이다.

그것을 믿었다. 자신이 드린 것은 그저 그 실체의 그림자임을 믿었기 때문이다.
그림자를 믿은게 아니라, 실체가 있음을 말이다. 실체를 믿은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때를 보고 기뻐했다. 자기 제사는 전혀 안 기쁘다. 딴 분의 제사를 보고
인간이 아닌 분의 제사 말이다. 멜기세덱을 격었듯이 말이다.

그런데 반드시 지키고야 마는 자들은 놀랍게도 바른소리 하는 자들이다.

어머니에게 “어머니!! 놀랍게도 말이죠, 철학자들이 지금까지 책들을 쓰고
수많은 글들을 평생을 걸면서 적어도 참재미있게도 바른소리 사실적인소리 진리같은 발언
등등 엄청나게 말을 했어도
단 한마디
누구이다 라는 소리를 한 적이 없다는 것이 참으로 신기하고 놀라워요” 라고 했다.

오로지 누구다 라고 말하는 책은 유일하게도 성경말씀 밖에 없다.
왜? 성령이 적었기 때문이다. 인간을 펜으로 삼아 도구로 삼아서 말이다. 성령 외에는 없다.
심지어 신학자들 목사들이 쓴 책들이나 신학책들도 바른소리하는데 미쳐있지
누구입니다 라는 소리를 못하고 있다.

바른소리를 반드시 제사를 지키고야 말겠다는 것이다.

이런 인간에게 유일하게 홈파기를 하는 것은 바로 누구다 라고 외치는 십자가 밖에 없다.

십자가는 그야말로 모욕 중의 모욕이다.

부정의 부정이다.

곧 사랑이다.

사랑만이 인간들의 바른소리 심지어 감독의 그 바른소리
인간들이 반드시 지키고야 말겠다는 제사

그것을 유일하게 홈파는 것은 십자가의 사랑 뿐이다.

왜?

반드시 지키고야 말겠다는 제사를 홈파는 유일한 것은 더 나은 제사 뿐이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서도 하녀들이 마음껏 건드려도 되는 미끼로 작용한다.
첫 번째 영화인 하녀에서도 결국 하녀로써 하녀의 죽음으로써 박정희 정권을 홈파겠다는
감독의 의도처럼
두 번째 영화인 돈의 맛에서도 돈의 맛으로써 홈을 파겠다는
칼로 서는 자는 칼로 망한다는 것을 남기겠지만
정작 그 바른 소리는 허공에 메아리 치는 공허한 소리일 뿐이다.
전혀 홈파기가 될 수가 없다.

오히려 mb정권이 몰락하기를 바라는 그 마음들을 홈파기하는 것이 바로
다윗 정권의 건재함 즉 든든하게 자리잡고 있는 것이 제대로된 홈파기 일 것이다.
다윗 정권이 든든하게 건재해 있다는 것이 견딜수 없도록 모욕적이기 때문이다.

어디 그 뿐이야? 든든히 건재함에 모욕당하는데 있어서
오히려 이런 더러운 인간이 예수님의 족보에 들어가다니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피의 명료하기 짝이 없는 또렷한 차이성이 명백히 드러나는 것이다.
일급 살인자가? 예수님의 족보에 당당히???

사랑은 오로지 탕자(죄인 중의 괴수: 죄인 중의 죄인)에게만 해당된다.
탕자 스스로도 용서할수 없는
자신을 미워하는 그 미움을
바꾸는 것이
사랑이다.

그 긍휼의 개입에
모욕상품이 3가지 개입됨으로써
살진송아지 금가락지 황금망토 라는 부정한 유물3가지로써
도저히 제사를 지키고야만 자의 입장에서는 도저히 견딜수 없는 모욕이기에
십자가 라는 모욕을 견딜수 없도록
홈판데 또 파고, 파인 홈에 홈파기를 더욱더 하는 것이
십자가의 용서이다.

그러나 바른소리하는 인간들은 그 부재성을 채운 명분으로써 결핍을 채웠기에
십자가가 그 증거인 십자가 앞에서는 유구무언 할 말이 없다.

제사 보다 순종
제사 보다 더 나은 제사 앞에서
모욕이라는 홈파기로써

보좌라는 그 부재성에 누가 등장해야함을 보게 되는 것이다.

바로 어린양이다. 보잘 것 없다고 갈기 갈기 찢어죽여버린 어린양
내 죄를 전가시켜서 늘 이용꺼리로써 사용한 마음껏 무시했던 그 어린양이
보좌에 앉을 줄이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린양이 보좌에 앉음으로써
비로소 든든하게 되었다고 하는 이들은
이 땅을 흔들어 대는 요동함에
바른소리를 외치는 것이 아니라
어린양이 보좌에 앉았다고 비로소 머리를 들어서 외칠 것이다.

인자가 나무에 달려 높이 들려야 하리니

라는 이 기쁜소식에

아무리 세상이 돈의 맛에 미쳐서 바른소리를 외치든 말든
일부러 그런 자들을 세움으로써

인자가 나무에 높이 달려야 한다는 이 홈파기를 무시함으로써
정작 돈의 맛 단 한 개도 못본자라 할지라도
유구무언케 하신다.

이 세상의 모든 인간과 악마세계에 유일하게
그들을 모욕하는 것은 홈파기는

인자가 나무에 달려 들려야 한다는 이 홈파기야 말로 십자가의 사랑이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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