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언약)을 위한 비언약 공부


참으로 가혹한 예수님이시다.
복음을 위해 언약공부를 시키시는 것이 아니라
비언약 공부를 시키신다.
언약공부 시켜도 할까말까할 정도의 농띠 중에 농띠인데
신학도 공부 안하는 판국에
철학을 왜 공부 시키시는지 알 수가 없다.

정 그러시면 똑똑한 놈들 새비렸는데, 천지삐까리로 널려있는데
난독증에다가 책과는 원수진지가 오래인데 ㅋㅋㅋ
차라리 몸으로 때우던 때가 무지 무지 좋았다. 몸이 이렇게 빨리 갈 줄이야  ㅋㅋㅋ
왜 하필이면 돌대가리인 아이큐 90도 안되는 나를 공부시키실려고 하는지 알길이 없다.
왜 하필 접니까? 케 보이 ~~~ ㅋㅋㅋ

그러나 막상 책들이 공부하기 싫어하는 나에게 달려드면
안 보이는 것들이 보인다. 아 이것도 죄였구나, 세상에나 세상에나 저것도 죄였네? 라고 새삼스럽게 말이다.

이런 것들을 거쳐서 예수님을 보게 되면
주여 도대체 당신은 누구십니까?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일 뿐입니다 라는 말 밖에 나오지 않는다.
감히 막먹을려고 했고, 예수님을 이용해서 되도않는 나를 사수하고자 하는 모든 짖꺼리가 허사로 들통나니 말이다.

이들은 과히 천재들이다. 이런 천재들의 고뇌를 보니 참으로 눈물겹다.
이렇게 눈물겹게 고뇌를 펼쳐도 그들은 모호한 의문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다가 죽을 뿐이다.
그 바톤을 이어받아서 현재의 철학자나 신학자들이 아무리 긍정 긍정 평강 평강을 외쳐도
냉혹한 십자가라는 현실 앞에서는
전복은 커녕 완악한 강퍅함으로 일관할 뿐이다.

이들도 이런 판국인데 나야 백번 만번 지옥가야 뻔하지 않는가
종말이 장난이 아니다. 종말의 이 무시무시한 현실이 밝히보이는데 말이다.
그런데도 뻔뻔스럽게 이 십자가의 피에 사로잡혀
싸돌아 놀기 바쁜 나를 붙잡아 놓고 공부시키시니
온 몸에 좀이 수셔셔 견디질을 못한다
썩은 몸이 견디질 못한다.
그래서일까? 아예 몸을 제대로 치셨으니 말이다.

(고후 12:7, 개역)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고후 12:8, 개역) 『이것이 내게서 떠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고후 12:9, 개역)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고후 12:10, 개역)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

사단의 가시를 뺄려다가 도리어 제대로 깊숙히 박아 놓으셨다.
그러나 이것도 은혜일 뿐이다.

공부는 결국 지식쌓기가 아니라 자기부인인 셈이다. 아뿔사 쥐뿔도 아무것도 모르면서 설쳐댓구나를 말이다.
힘의 단절인 할례다. 십자가다. 차단이다. 차이내기인 거룩이다. 곧 은혜다.


-----

혹시 노트북 안쓰고 집에 그냥 놔두시는 분들 있으시면 저에게 주시길 바랍니다.
허리가 아파서 오래 의자에 앉을수가 없으니
철학 단어 검색하고자 필요해서 요청합니다.

아니면 스마트폰(mp3) 와이파이 되는 공기계 (정상해지된) 있으시면
사용하지 않으실 거면 저에게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일일히 종이로 복사할수가 없어서 그러니 사용하지 않는 분들은 저에게 주십시요.


연락 053-626-1177 김대식 crosslamb@hanmail.net



요한계시록신학강의 2010 - 2012.zip

보내주실때 주소를 남겨주시면 이근호목사의 책을 보내드리겠습니다.
저에게 갑자기 책을 보내와서 책이 많이 생겼기에 보내드릴수 있습니다.
혹 저에게 없더라도 교회에 문의해서 원하시는 책을 구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

니체와 철학을 읽다가 느낀점이 뭔고하니

철학 곧 형이상학이란 무엇 이라는 질문으로 출발한다.
지혜가 무엇이지? 사랑이 무엇이지? 인간이란 무엇이지?
그래서 그것을 구성하는 재료 (질료)를 찾고 그 재료로 파악해 보는 것이다.
그런데 항상 모호하다 답이 나오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런데 그런 철학을 뒤 엎어버린 자가 있다.
니체는 형이상학은 무엇이냐 로 해서는 안되고 누구냐 로 해석해야 한다고 말이다.
진리가 무엇이냐 라는 질문이 진리가 누구냐 라는 질문으로 바뀌어져야 한다고 말이다.

그 누구냐가 명료한 답을 이끌어낸다. 곧 초인이다. 아마 인자의 변형을 말하는듯 싶다.
인자라고 말해 버리면 또 숭배해 버리는 기독교 꼴이 나는 것을 싫어한듯 하다. (별걱정 다 했다.)
비언약을 형성하는 것도 주님이 알아서 할 것인데 말이다.

(이런 형이상학의 무엇이냐 라는 물음의 출발조차, 선악이라는 양심에서 못벗어나도록 한 주님의 조치인 셈이다.
결국 비언약의 세계 조차도 예수님이 철저하게 세밀하게 조성하신다. 거기에서 한발짝도 못 벗어나도록 말이다.
자기들 멋대로 비언약을 벗어날수가 없다. 언약도 마찬가지이다. 반드시 비언약인 가인의 역할을 하는 놈이 가인의 역할에서 못 벗어나야, 아벨처럼 언약에서 못벗어나는 예수님의 운명이 덮쳐진자가 발생하기 마련이다. 이런 비언약과 언약의 대립을 위해 주님은 지금도 부지런히 거짓선지자에게 악령을 붓고자 열심이시다. 그리고 요엘서처럼 언약의 백성에서 원인없는 결과로써 성령을 부으신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 이에게 용서의 사귐을 부으신다.)

(욜 2:28, 개역) 『그 후에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욜 2:29, 개역) 『그 때에 내가 또 내 신으로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
(욜 2:30, 개역) 『내가 이적을 하늘과 땅에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 기둥이라』
(욜 2:31, 개역)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 같이 변하려니와』
(욜 2:32, 개역)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이는 나 여호와의 말대로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서 피할 자가 있을 것임이요 남은 자 중에 나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자가 있을 것임이니라』

(행 2:16, 개역) 『이는 곧 선지자 요엘로 말씀하신 것이니 일렀으되』
(행 2:17, 개역)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행 2:18, 개역) 『그 때에 내가 내 영으로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저희가 예언할 것이요』
(행 2:19, 개역) 『또 내가 위로 하늘에서는 기사와 아래로 땅에서는 징조를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로다』
(행 2:20, 개역)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리라』
(행 2:21, 개역)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하였느니라』

무엇이냐 라는 율법의 물음에서
의문의 증서에 적힌 것은 찢어진다.
(술어는 백날 풀어도 소용없다. 감히 건방지게 대상으로 삼고, 목적으로 삼아버렸으니 의문은 죽이는 것 뿐이다.
주어의 등장으로 졸지에 술어는 헛짖꺼리를  했음에 손 놓게 된다.)

(고후 3:6, 개역) 『저가 또 우리로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케 하셨으니 의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임이니라』

과연 누가 찢었는가?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누가 꾀더냐?
(십자가 덕분에 상대적인 인물 누가가 누구인지 등장한다. 이제 모든 의문은 풀렸다. 마귀만을 상대로한 예수님의 숙제로써 말이다.)

안식이 누구냐? (안식일이 무엇이냐? 며칠? 등등의 의문이 사라졌다.)
(십일조도 몇분의 몇이냐가 아니라 무엇이냐가 아니라, 누구냐로,
찬양도 누구냐, 기도도 누구냐로 결정된다. 교회도 누구냐로 결정된다. 머리로 결정되는 구체적인 주체인 머리로 게임오바다.
이 명료함이 의문이 찢겨지지 않는 자들에게는 여전히 안색이 변하게 될꺼리 밖에 안되는 걸림돌이요 거치는 반석인 거리끼는 지혜가 될 뿐이다.)

휘장을 찢고
지성소의 막힌 담을 헐어서
"무엇이 되었던 천국""천국이 무엇이냐?" 라는 하나님나라, 죽어서 가는 천국은 없듯이, 대상이 되고 숭배의 이데올로기가 된 천국은 없고, 그 의문은 사라졌고,

천국이 집적 찢겨진 허물어진 담장은 넘어와서
명료하게 차이내는
직접 천국이가 인간을 대상으로 삼아서 긍휼의 그릇 진노의 그릇으로 직접 나누신다.
그리고 마귀 보란 듯이 사귐을 가진다.

그것이 십자가이다. 무엇이 아닌 살아 꿈틀거리는 주체로써
활동하신다. 이제는 그 십자가를 보며 누가 달렸는데? 누가 찔렀는데?

라는 구체적인 누구만이 남을 뿐이다.

이 두 점을 찍고 이 세상을 갈라버린다. 찢어버린다.

종말이란 무엇이냐가 아니라

누구냐 로 말이다. 짝꿍이 되는 그 누구(신랑) 누구가(신부=종말에만 졸지에 우발적으로 생겨버린)

종말로써 이 땅을 불태워 버리는 것이다.

종말은 누가 나타나느냐로
징후들을 카페트 깔고 등장한다.

기생라합은 간담이 녹아서 빨리 오기를 기다리고 기다렸다. 누구 누구를 말이다.

그래서 이제는 누구냐 로 정립이 된다. 이것이 숭배가 아닌 사귐으로 변이되는 것이다.

Posted by 김 대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