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둥병과 제사장 관계(요나의 표적) (눅 5:12-16)



(눅 5:12, 개역) 『예수께서 한 동네에 계실 때에 온 몸에 문둥병 들린 사람이 있어 예수를 보고 엎드려 구하여 가로되 주여 원하시면 나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하니』

(눅 5:13, 개역)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가라사대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문둥병이 곧 떠나니라』

(눅 5:14, 개역) 『예수께서 저를 경계하시되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또 네 깨끗케 됨을 인하여 모세의 명한 대로 예물을 드려 저희에게 증거하라 하셨더니』

(눅 5:15, 개역) 『예수의 소문이 더욱 퍼지매 허다한 무리가 말씀도 듣고 자기 병도 나음을 얻고자 하여 모여 오되』

(눅 5:16, 개역) 『예수는 물러가사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시니라』



일단 오늘 본문은 표면적으로 보기에는 문둥병자 한 사람을 고쳐놓고서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하시고서는 오직 제사장에게만 증거케 하시고


병고친 소문이 퍼지자 사람들이 몰려 왔는데 고치시기는커녕

한적한 곳으로 도망가서 거기서 기도하신다는 내용입니다.


즉 병고쳤는데 그 소식을 듣고온 병자들은 안고쳤다는 표면적인 내용으로 보인다는 겁니다.


마귀의 3가지 시험을 통해서 무엇을 느꼈습니까?

예수님은 고아 과부 나그네의 하나님이 되시러 오신게 아니다 라고 했습니다.

이웃 사랑 하라 라고 온게 아니다 라고 했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마귀의 주장이라고 했습니다.

마귀는 제발 고아 과부 나그네의 하나님이 되어 달라고 요구합니다.

유대인이 역사상 기다려온 그 메시아가 되어 달라고 마귀가 주장합니다.


예수님은 거부했다고 했습니다.


누가복음의 특징은 이방인 딸랑 한명을 선택해서 대조적으로 비교해 유대인의 선민사상을 깨뜨리고자 함입니다.


자 그렇다면 오늘 본문도 문둥병자 모든 병자를 고치시는게 목적이 아니라

제사장의 기능을 고발하시는 겁니다. 곧 유대사회를 고발하는 겁니다.
마귀의 출처 곧 마귀의 소욕을 들추어내는 겁니다.


제사장은 죄와 연관된 자가 된게 아니라

도리어 제사장이 의인의 자리가 되어버렸습니다.
그 빈공터가 인간의 자리가 되어버린 겁니다. 누락의 자리인데 말입니다.

마치 의사가 병과 연관된 기능이 된게 아니라
도리어 돈벌이로서의 의사가 되어버린 식입니다.
인간 의인 자리, 인간 의사 자리가 되어버린 겁니다. 거룩의 자리가 아니라...


그러니 정작 문둥병자(부정한 자=죄인)가 그들 사회에 있다는 것은

의사가 없다는 뜻입니다. 거룩이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희년은 그 땅을 정화시키는 겁니다. 피를 뿌려서 말입니다.
심판성을 부어 버리는 겁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의사(의인)라는 자들이 그 사회에 너무 많은 겁니다.
그럼 그들이 죄인의 죄를 감당하는 기능에 활용이 되는게 아니라


도리어 저런 죄인과 같지 않음을 감사하나이다 라는 바리새인처럼

의인의 자리를 돋보이게 하기 위한 죄인과의 거리두기로써 작용이 되는 겁니다.


자 그럼 예수님은 육의 소욕에서의 희년을 완성하는게 아니라

도리어 너희는 갇혀 있다는 것을 도리어 명료하게 부각 시키는 겁니다.


그게 바로 악마에게 갇혀진 모습이다 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문둥병자를 고치시고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게 하시고

오직 제사장에게만 보이라 라는 겁니다.

이것이 희년입니다, 문둥병자(부정한 닭)를 통해서 제사장자리를 날려버리는 겁니다. 빈자리 만들기 입니다.


마치 이것은 문둥병자 자체가 하나의 유물처럼 작용이 되어서

암행어사 출도요 라는 메시지를 담은 마패 역할을 

문둥병 고침을 받은 이 문둥병자는 제사장에게 자신의 신체를 들이대는 겁니다.
마패가 변사또를 날려버리는 식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은 구원해 줄려고 환장한 자가 아닙니다.

신처럼 또는 신과 연합케 만들어 주겠다는 인간들의 요구를 들어 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래서 도망쳐서 숨어버리는 겁니다.
도리어 인간의 자리를 날려버리는 겁니다.
부정한 자로써 의인이라고 자처하는 자의 자리를 날리는 빈자리만들기 입니다.


오병이어의 이적을 행하니까

예수님을 임금 삼을려고 따라오는 자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도망칩니다.

따라 옵니다.

또 도망칩니다.

따라잡아 묻습니다. 왜 자꾸 도망치십니까?


너희가 나를 임금 삼고자 하는 이유는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배부른 까닭이다 라고 하십니다.


(요 6:13, 개역) 『이에 거두니 보리떡 다섯 개로 먹고 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에 찼더라』

(요 6:14, 개역) 『그 사람들이 예수의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

(요 6:15, 개역)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가 와서 자기를 억지로 잡아 임금 삼으려는 줄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 가시니라』


즉 예수님을 자기 배를 위한 우상으로 삼고자, 육의 소욕을 채우고자 예수님을 믿겠다는 것을

예수님이 도망쳐 버리시는 겁니다.

제사장 자리가, 기적의 자리가 저들의 소욕을 그대로 말해 주는 겁니다.


악한 세대가 기적을 요구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보여주시고자 하는 표적은 요나의 표적입니다.


즉 메시지를 담은 싸인으로써, 그 육의 소욕을 깨뜨리러 왔다는 암행어사 출도요 라는 마패이다는 겁니다.


표적을 봤다면 단절성을 느껴야 하는 겁니다.
열 명의 문둥병자 중에 아홉은 단절성을 못 느끼고 곧 멸망할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버렸습니다.
나머지 한 명 사마리아 문둥병자 너도 가지왜? 심판이 여기있는데 어디를 갑니까!!
저는 고침 받을 자격이 없음을 고침을 받고서 비로소 안 겁니다.

그럼 죽었구나 라고 복창해야할 판국인 심판인데

나는 죽어도 마땅한 자입니다 라고 외쳐도 시원찮을 판국인데


지금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의 병을 예수님을 통해서 병고치는데 신경쓰고 있는 겁니다.

악한 세대가 요구하는 기적만 받았다 소유했다로 끝나는 겁니다. 어차피 시공간이 그를 다시 병들게 합니다.

어쩔수 없겠지만(육의 소욕이니 뭐)


그 속에서 정작 예수님의 목적은 따로 있는 겁니다.

문둥병자 한 사람을 고쳐서 제사장 에게 보이시는 겁니다.


자 그럼 다른 문둥병자도 내 병고쳐 주세요 라는 것이 목적으로 삼을게 아니라

자신의 신체를 마치 애굽왕 바로왕에게 가서 피 제사 드려야 한다고 하듯

자신의 신체를 그런식으로 보이면서 예수님 곧 암행어사가 왔다 라고 마패를 보여주듯

자신의 신체를 보여줘야 하는 겁니다. 그 부끄러운 몸을 말입니다.

(곧 교회(춘향이)는 자신이 갇혔다 라는 것만 드러낼 뿐이지
자신이 자신 스스로를 변사또에게서 벗어날수 있는 입장을 보일수 없습니다.
그 몫은 암행어사 이몽룡의 몫인 예수님의 숙제 입니다. 교회는 그저 미끼입니다.)


그러면 당연히 그 사회의 대표자들은 여호와가 누군데? 난 모르는데? 라는 반응을 유발케 하는 겁니다.


문둥병(춘향이)은 그런식으로 작용하는 것이지

내 병 고쳐달라고 작용하는게 아닙니다.


고아 과부 나그네를 위한 예수는 없습니다.

주객이 뒤바뀐 겁니다.

예수님을 위한 고아 과부 나그네 입니다.


예수님을 위한 고아 과부 나그네가 그때 그때 창조되는 겁니다. 우발적이다는 겁니다.

마귀의 소욕을 드러내기 위해서 고아 과부 나그네가 예수님 쪽에서 발생하지
(예수님의 소욕으로써의 고아 과부 나그네,
곧 사망의 그늘에 폭삭 주저 앉은자. 흑암의 지옥 백성, 개같은 이방인이지,
고아의 기업, 과부의 남편, 나그네의 임금으로써의 육의 소욕을 위한 예수는 우상, 곧 유대인의 메시아)


마귀의 주장처럼 고아 과부 나그네를 위한 예수가 되어라 라는 소욕을 채워주러 오신게 아니다는 겁니다.


자 그럼 오늘 제목처럼 문둥병과 제사장의 관계는 바로 십자가를 말하기 위한 관계인 겁니다. 십자가의 이중성입니다.


그런데 문둥병자 본인에게도 제사장은 그저 나를 고쳐줘야할 자로 취급해 버리고

병고침을 받으면 더 이상 제사장의 기능직은 나(문둥병자)와 무관해 져버리는 식이 됩니다. 물론 보험은 들겠지만 말이죠.


마치 10명 중에 아홉명의 문둥병자 유대인을 고치니까, 그 결핍을 해결이 되니 자기자리로 가 버리는 식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한 명의 사마리아 문둥병자는 돌아갈 자리 조차도 주께서 없애버리니

못 가는 겁니다. 결국 문둥병자는 예수님(처름자리)을 드러내기 위해서 가고 싶어도 못 가도록

요나의 표적이 임해 버린 겁니다.


그렇듯 문둥병자와 제사장의 관계는

마치 죄인을 부르러 온 구원자를 드러내기 위한 관계인 셈입니다.


그렇기에 문둥병자는 제사장을 드러내기 위해서 계속해서 문둥병의 상태에 놓여지게 되는 겁니다.
병을 고쳐도 문둥병자이다는 겁니다. 관계성을 드러내는 은사로써 말입니다.

아무리 문둥병이 깨끗하게 고침을 받아도
그는 역시나 예수님이 의사임을 드러내는 문둥병자 역할을 죽을때까지 계속 하는 겁니다.

(죄수복을 입은채로 자유 곧 특별사면 뻘건 도장을 등 뒤에 박고서 외치는 겁니다.
오로지 눈에 보이지 않는 관계성만 들이대는 겁니다.
제사장은 그런 관계성을 정작 본인이 펼쳐야 하는데 졸지에 부담 백배가 되는 꼴입니다.
문둥병자가 대신 펼치고 있고, 졸지에 예수님은 그런 관계로써 제사장에게 보이라고 하는데,
그 기능을 못 펼치게 되니 예수님에 대한 적개심이 바로 제사장으로 부터 유대사회 전체로 퍼지는 첫 출발지로써
그 소욕의 처음자리를 들추어내시는 겁니다.
구약대로 하는대도 불구하고 미워죽는 겁니다.
예수님은 미운 짖만 또 골라서만 하고 있고요.
즉 죄인으로 새창조함이, 죄인 중의 괴수로 만드심이 애굽왕을 강퍅케 하는 기능을 하는 겁니다.
유대안울 강퍅케 하는 겁니다, 지독한 편애 곧 불쌍히 여기심이 저들을 강퍅케 하는 겁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모든 기능은 마귀보란듯이 입니다.)


죄인 중의 괴수 즉 문둥병 중의 문둥병이다는 겁니다.
문둥병을 해결해서 떨쳐 버리는게 아니라
더더욱 문둥병의 이중성(반복성)으로써 단절을 보여주는 겁니다. 차이로써의 반복 말입니다.

마치 바보로 살지 않기 위해 바보로 살기 처럼 말입니다.


문둥병 고침 받았으니 이제는 문둥병자 아니다 라고 유대사회로 되돌아간 9명이 아니라

문둥병 고침 받아도 여전히 나는 죄인일 뿐인 예수님을 떠날 수 없는 자 곧 죄인 중의 괴수입니다 라는
계속해서 주님이 불쌍히 여겨주셔야만 하는 자 입니다 라는 겁니다.


바로 예수님 쪽에서 발생, 우발적으로 발생(교회) 시킨 문둥병자(문둥병 중의 문둥병)이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 문둥병자는 가짜 제사장을 그러내는데 사용되는 미끼로써

제사장에게 자신의 신체를 보이는 겁니다.


암행어사 출도요 라는 종말을 외치는 겁니다.
즉 문둥병자의 신체는 암행어사의 징후인 겁니다.

성도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징후 입니다.
그렇다면 주의 자리를 내어 놓아야 합니다.
애굽 왕은 비로소 발악합니다. 바리새인도 발악합니다. 제사장도 발악합니다.
주의 징후물을 보고서 말입니다. 마패 ~~~~


거기에 사용되고 있는 것에 종말의 종말로써의 영광에 참예 된 겁니다.


구원 받은 한 쪽 강도 즉 십자가상의 강도도 그런 식으로 사용되는 겁니다.


거룩의 징후로써 말입니다.

거룩은 두 패로 가르니까 말입니다. 한 쪽 강도와 다른 한 쪽 강도로 말입니다.

자 그러면 이 마패를 본 제사장은 얼른 자신의 옷을 벗어던져 버리고

예수님을 제사장으로 모셔야 합니다.


그런데 참 재미있는 것은

도리어 제사장이라는 직분이 예수님을 보는 시선이 자신의 자리를 위협하는 이단으로 밖에 안 보인다는 겁니다.


그럼 이단 처리반이 있기에 자신은 신경쓸 필요가 없겠지만

주님은 이 한 놈의 제사장을 흔듬으로써

전체 제사장 사회를 흔들어 버리는 하나의 계기로 삼는 겁니다.


마귀가 눈치는 채니! 그냥 넘어갈수가 없는 겁니다.

하나의 응축점이 전체 영역을 건드리는 하나의 대표성으로써 작용하는겁니다.


그것을 문학용어에서 뭐라 카더라? 복선? 기억이 안나는데 하여튼 그런 겁니다.


그것을 성취하시고 사람들이 몰려 오니까 숨어버리시는 겁니다.


오병이어도 동일합니다. 배고픔을 해결하러 온게 아니라

천국에는 이런 것이다 라는 차이성을 맛배기로 보여주시고

차이성을 부각 시키시는 겁니다.

그 증거가 임금 삼을려고 따라 잡는 겁니다.

즉 천국 맛배기로 보여주면 그 다음 부터는 그 결핍성이 더욱더 커져서

임금 안 삼고는 못 배기는 

잉여의 맛에 뿅가버린 겁니다. 돈 의 맛 ~~~
제대로 낙인 거죠. 비로소 말려든 겁니다.


그러나 정작 차이성의 부각은 이 땅은 악마의 세상이라는 것이 부각이 된 겁니다.

괜히 잉여의 맛을 봐 버리고서는

이 땅의 악마의 세상이라는 것을 알아버렸고

천국의 샘플 맛도 맛 봐 버렸고

그래서 예수님을 따라 갈려고 했는데 예수님은 안 받아주고


이 얼마나 광야에서의 이스라엘의 모습과 너무 너무 동일한 모습이 아니고 뭐겠습니까?
중간에 걸려 낑겨버린 목걸림 현상이다는 겁니다.
소리가 나오지도 않고
그렇다고 들어가지도 않는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받은 자는 적으니라를 보여주기 위한 소품으로써 작용이 된 겁니다.


사귐의 관계는 예수님에게만 해당되는 권리이니 말이죠.


그러니 이런 사람들은 문둥병과 제사장의 관계는 관심 없이

병자로써 중간에 낑겨 버린 겁니다.

그러면 오로지 병자 아닌 자들을 부러워 할 뿐인 겁니다.

차라리 이 땅이 악마의 세계라는 것을 몰랐으면 차라리 나았을 껄껄껄


나 애굽으로 돌아갈래, 이 땅이 마귀의 땅이라는 것을 몰랐을 때로 돌아갈래.

오병이어의 기적을, 그 잉여를 맛 보기 전으로 돌아갈래,

라고 해도 소용이 없는 겁니다.


그 광야라는 교회에서 다 죽는 겁니다.

처음부터 이스라엘은 광야교회로써 죽음이라는 심판성을 보여주는 자들이였습니다.
이스라엘은 이 땅에 살고자 하는 자들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펼치시는 그 기적이 마냥 좋은게 아닙니다.

진정으로 문둥병 중의 문둥병자에게만 좋은소식이요 기쁜소식입니다.


병이 없어 건강자 라고 하더라도 십자가가 밝히 보인다면
자신은 문둥병자요, 자신은 죄인 중의 괴수일 뿐임을 밝히 보여주는 들추어내어 주는 
그 십자가가 좋은 소식이요 아름다운 소식인 겁니다.


건강하든 병든 몸이든 주님 보시기에는 역시나 갇힌 몸일 뿐인 겁니다.


예수님은 문둥병자를 문둥병 그 자체로써 제사장에게 보여

레위기에 있는 그대로 행하게 하시는게 아니라

고쳐서 왜 깨끗케 되었는지를 증거케 하시는 것이 목적이였습니다.


그럼 그쪽 반응 곧 제사장의 반응은 구약의 말씀을 성취하시는 분으로써
싸인 곧 메시지 마패를 보냈으면 그 메시지에 대한 반응이 나타나야 하는데 그 반응이 없습니다.


즉 무시 해 버립니다.


이 말은 주님이 참 제대로 사건의 편지인 문둥병자를 참으로 적절하게 잘 보냈다는 겁니다.


서로의 소욕을 무시하는 것이 싸움의 전초입니다.

싸움의 근거가 되는 겁니다.


그들은 늘 일상에 벌어지는 이단들의 활동으로 보이겠지만 말이겠지요.


그러나 도둑같이 오는 가나안을 침략하는 천국은 가나안 전쟁처럼 쥐도새도 모르게 벌어지는 겁니다.


문둥병과 제사장의 관계가 십자가의 소욕으로써 작용하지 못하니까

이 둘의 관계는 소욕의 전쟁으로 작용함으로써


마치 첫 충돌의 아주 작은 사소하기 짝이 없는, 그러나 커다란 우주의 전쟁을 암시하는 복선으로써 작용하는 겁니다.


지금 제사장들은 발 등에 떨어진 불을 못 보고 있습니다.


이것은 춘향전에서 변사또가 지금 분위기를 파악 못하고 잔치(평강이다)를 벌리는 것과 같습니다.


암행어사의 몰골을 오히려 잔치의 여흥으로써 활용할 정도이니 얼마나 무지한지 모릅니다.

그래서 시 한수를 적어 보이니

그것을 삥둘러 앉은 소위 사대부 양반들이 하나 둘 씩 돌삐를 던질려다가 돌삐 놓고 하나 둘 씩 사라지는 것처럼 자꾸 자꾸 이빨 빠지듯이 술술 빠져나가는 겁니다.


그 평강의 잔치의 일상이 졸지에 썰렁한 얼음 분위기처럼 휭하니 텅빈 공간이 되어가는 겁니다.


변사또가 뭣 땜에 그리들 다들 바쁘다고 돌아가는지 뭔데 라고 이몽룡이 적은 그 싯구절을 읽는 겁니다.


간담이 서늘할 정도로 덜덜덜 떨게 되는 거죠.


바로 예수님이 보여주시는 표적은 간담이 서늘할 정도로 덜덜덜 떨게 되는 표적이지


내 병을 고쳐서 그 동안의 결핍을 채울 수 있는 만회할수 있는 건강을 되찾는 개념의 표적이 아니다는 겁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얼른 머리를 쳐박고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입니다.


비로소 나를 제대로 죄인 중의 괴수로 만드시는 심판의 주를 제가 제대로 만났군요 라는 겁니다.


이 심판주를 만나는 겁니다. 이 마패(요나의 표적)를 보고 벌벌벌 떠는 겁니다.



문둥병자와 제사장의 관계는 바로 이 심판성이라는 거룩을 보여주는 관계입니다.

거룩의 관계입니다.


그래서 거룩의 전이가 어떻게 이루어졌길래

문둥병이 깨끗케 되는 지를 보여주는 거룩성을 보여주는 관계 말입니다.


그런데 변사또 는 도리어 죄인들을 가지고서 자신의 자리를 높이는데 활용을 하는 겁니다.

거룩의 관계를 즉 이스라엘과 여호와 하나님의 관계를

즉 죄와 피의 관계를


육의 소욕으로 만들어 버린 겁니다. 그래놓고 신만들기를 외치는 겁니다.


바로 이것이 유대사회 즉 제사장 사회를 장악한 마귀의 세계임을


너희는 이런 마귀에 갇혔다 라고 들통내시면서

문둥병자를 제사장에게 보이시는 겁니다.


즉 이 모든 것이 철저하게 성령의 소욕에 의해서 펼쳐지는 배치물로써 작용하는 겁니다.

심지어 예수님 조차도 성령으로만 일하십니다.


문둥병과 제사장의 관계

죄인과 예수님의 관계

죄와 피의 관계

원수와 사랑의 관계


우리는 각기 제 갈길로 가는 양 같은자와 우리의 죄악을 예수님께 모두 담당시키시는 자와의 관계


(사 53:6, 개역)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막사는 자와 막사는 모든 허물을 다 덮어버리는 사랑하시는 자와의 관계

(잠 10:12, 개역) 『미움은 다툼을 일으켜도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우느니라』

(벧전 4:8, 개역)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이 십자가의 관계만을 보여주는 관계로써


성령의 소욕을


육의 소욕이 판을 치는 악마의 세계 속에서 펼치시는 겁니다.


이 침노가 아니면, 이 질투가 아니면, 기쁜 소식 곧 평강은 없습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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