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례 범하기, 구원 범하기 (행 15: 1- 11)

구원 차단하기



(행 15:1, 개역)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 하니』

(행 15:2, 개역) 『바울과 바나바와 저희 사이에 적지 아니한 다툼과 변론이 일어난지라 형제들이 이 문제에 대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및 그 중에 몇 사람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에게 보내기로 작정하니』

(행 15:3, 개역) 『저희가 교회의 전송을 받고 베니게와 사마리아로 다녀가며 이방인들의 주께 돌아온 일을 말하여 형제들을 다 크게 기쁘게 하더라』

(행 15:4, 개역) 『예루살렘에 이르러 교회와 사도와 장로들에게 영접을 받고 하나님이 자기들과 함께 계셔 행하신 모든 일을 말하매』

(행 15:5, 개역) 『바리새파 중에 믿는 어떤 사람들이 일어나 말하되 이방인에게 할례주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행 15:6, 개역) 『사도와 장로들이 이 일을 의논하러 모여』

(행 15:7, 개역) 『많은 변론이 있은 후에 베드로가 일어나 말하되 형제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이 이방인들로 내 입에서 복음의 말씀을 들어 믿게 하시려고 오래 전부터 너희 가운데서 나를 택하시고』

(행 15:8, 개역) 『또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와 같이 저희에게도 성령을 주어 증거하시고』

(행 15:9, 개역) 『믿음으로 저희 마음을 깨끗이 하사 저희나 우리나 분간치 아니하셨느니라』

(행 15:10, 개역) 『그런데 지금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

(행 15:11, 개역) 『우리가 저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 줄을 믿노라 하니라』



언약은 두 소욕을 충돌시키는 그 배경 속에서 드러납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 두 소욕의 경계선이 모호하게 됩니다.
그래서 새언약이라면 반드시 옛언약과의 충돌속에서 그 차이성을 드러내는 겁니다.

당연히 옛언약도 새언약과의 충돌 속에서 그 옛언약의 정당성을 추구하는 겁니다.

그림자 값을 제대로 한다 말입니다.


그러나 실상이 왔음에도 불구하고 그 그림자를 계속 붙잡는 것은

실상에 대한 모욕입니다. 모욕 !!!! 돈의 맛  모욕

그렇게 모욕 적일수가 없는 겁니다. 모욕  

누가 모욕적인데요? 옛언약이 모욕적이다는 겁니다.

새언약이 모욕당한다매요?

옛언약이 모욕스러워서 새언약에게 뒤짚어 씌우는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모욕이 묻지를 않습니다.

저주도 묻지 않습니다. 죽음도 사망의 권세도 그 어떤 것도 묻지 않습니다.

도리어 그 십자가의 피가 발릴까봐 싶어서 다들 도망치는 식입니다.


오히려 새언약은 참으로 뻔뻔하고 당당합니다.
죽여라 죽여, 마치 함정수사, 알리바이 형성을 위해서 말입니다.


모욕을 묻힐려고 다가갔다가 도리어 자신이 들고있는 그 모욕(돌삐)에 도로 묻힐 판국이니 말입니다.
땅에 쓱쓱쓱 손가락으로 쓰고 있으니 단 한 사람도 남지 않고 다 가버리니까 말이죠.

그러니 빨랑 돌삐를 내려놔야지 들고 있으면 있을수록 자신만 낭패 당하는 겁니다.


당황하셨어요? 저도 많이 당황했습니다. 놀랐셨죠? 고객님 저도 많이 놀랐습니다.

그 한 건도 못한 자들이 도리어 남에게 그 의문의 법을 뒤짚어 씌울려고 하니 말입니다.

네 맞습니다 고객님. 돈 때문입니다. 돈 때문에 옛언약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것이 두 소욕의 문제로 두 세계의 얼굴로 대치상황을 이루는 겁니다.

한 쪽은 어쩔수 없이 의문의 법의 얼굴을 할 수 밖에 없고,

다른 한 쪽은 어쩔수 없이 의문으로 하지 않는 얼굴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한 쪽은 돈돈돈 하고 있는데 다른 한 쪽은 공짜 공짜 공짜 라고 하니

얼마나 대조적입니까? 돈 카면 인간이 눈이 반짝이듯이, 공짜 하면 더욱더 눈이 반짝 합니다.
얼마나 외설적입니까? 돈 외치는 자들(외설적)에게서마저 외설적이어야만 합니다.

돈을 외치는 자들에게 돌삐 맞아 죽을 판국에 놓인 겁니다. 공짜 카니까 말입니다.

그런데 정작 돌삐 맞아 죽든, 안죽든 상관없이 이미 주 안에서 항상 사는 자이고

돌삐(의문의 법)을 든 자들은 이미 죽어 있는 자들이기에, 살려고 돈돈돈 외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공짜 하는 놈은 죽여버려야 하는 겁니다.
당황하셨죠? 이미 죽었는데 살려고 하니 말입니다.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 라는 프로그램을 본적이 많았는데

한결같이 이 꼬마 아이들이 부모가 있고 조부모도 있고 그런 와중에도

자기 생존을 자기가 챙겨야 하니 벌써부터 돈돈돈 하는 겁니다. 아이가 벌써?
우리 어릴적에는 종이돈 주면 쓸줄 몰랐습니다. 동전 돈만 주면 실컷 먹었고
그리고 놀꺼리가 너무 너무 많았습니다.
그런데 요즘 아이는 돈 없으면 놀 수가 없습니다. 주변이 전부 다 돈을 내어야만 즐길수 있도록
삥듣는 기계장치들 뿐입니다. 아이들이 놀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벌써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너무 많이 지는 모습에
주님이 만든 적이 없는 인간이라는 것을 보게 됩니다.
아니 인간이 아니지요 그야말로 괴물이지요. 괴물.

아 맞구나 이게 첫 아담의 모든 모습을 보여주는 구나 라고
선지자의 모습으로써 그 징후를 나타내고 있음을 봤습니다.
마지막 아담이 와야 한다는 거죠. 처음 아담을 찢어버리는 마지막 아담 말입니다.


아무도 그 멍에 에서 벗어날수가 없구나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구나를

그 프로를 보면 늘 느꼈습니다. 아이가 때쓰고, 과잉 행동에 주의력결핍장애 ADHD 까지

그야말로 병덩어리 그 자체로 태어난, 모친의 죄 중에 태어난 겁니다.


그래서 다른 태에서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라고 아이들이 그런식으로 외치는 겁니다.

이미 죽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살려주세요 라고 외칩니다. 어른들은 무시하지만 아이들은 외칩니다.


그런데 아직 안 죽었다고

그리고 그렇게 된 것은 율법 즉 할례를 지켰다고 애들은 가라 우리는 어른이다 라고 보는 겁니다.

아니 이미 넌 죽었어 라고 알려주는 율법을 거꾸로 해석한 겁니다. 갇혔는데? 안 갇혔다고?
불뱀에게 물렸는데, 전혀 물린적 없다고 우기는 것이 율법 지키기 입니다.

행하고 지키면 된다고 보는 거죠. 그런데 그 몸 기준이 사실 [딴 몸]을 말하고 있는데 말이죠.
자신의 엉터리 몸을 통해서 딴 몸이 와야 한다는 것을 외쳐야 하는데 ...


여기에 베드로는, 그냥 베드로가 아니라 사도 베드로는 


(행 15:10, 개역) 『그런데 지금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


어찌하여 시험 곧 넘어뜨릴려고 하느냐 라고 뒤짚어 씌웁니다.

그것도 하나님을 언급하면서 말입니다.


아니 바리새인이 하나님을 넘어뜨릴려고 시험할까요?

무슨 수로 넘어뜨립니까? 하나님이 손에 잡혀야 뒤짚어 넘어뜨릴 것 아닙니까?


그런데 왜 오바를 합니까? 왠 오바? 그 과잉오바를 하는 이유가 뭡니까?


그러나 사실 바리새인은 남이 아닌 자신들이 외치고 있는 그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 맞습니다.

어쩌구리? 지금 이 글을 쓰는 너도 같은 패거리냐? 넘어지는 하나님을 본적있냐?
하나님을 본적도 없으면서 어떻게 하나님이 시험 받았다고 장담하냐?

넘어지는 하나님이면 그게 무슨 하나님이냐? 아이고 배꼽잡네? 신이 죽다니!!


바로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그들과 우리가 죽였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인정하라 말이죠. 사실 십자가에 못박으라 라고 외쳐 죽였지 않았습니까?
행함과 율법 지킴 때문에 말입니다.


인정 못하겠다. 


그럼 말이 안통하는 거죠. 두 소욕의 경계선이 모호하지 않고 선명하게 그어지니 감사한 일이지요.


뭐가 감사해? 그럼 다시 하나님을 모욕했는지, 넘어뜨렸느지 다시 해봐! 해보면 알 것 아냐?


주님은 한 번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도 충분합니다. 단 번에 제사 다 드렸습니다.

다시 드릴 필요가 없습니다.


뭐여 이 궤변은?


당황하셨지요 고객님 저도 당황했습니다. 그러나 걱정 마십시오

그 재현은 사도들 그리고 성령을 입은 자들이 다시 그 십자가 사건을 재현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이미 익히 아는 예수님은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영을 입은자들이 등장함으로써
십자가의 사건은 오늘날도 교회에서 반복이 됩니다. 교회가 그들을 죽이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유대인 내부에서 두 패로 갈려져서


한 쪽은 영원한 언약인 할례 안식 선민을 가지고서 자신들의 소욕을 드러내고자

이방인과 충돌해야만 하고


또 다른 한 쪽은 그 이방인을 통해서 십자가의 새언약으로 할례를 범하고 안식을 범하고

심지어 오늘 본문처럼 구원 오로지 유대인만 구원받는다는 그 철칙 중에 가장 중요한 철칙인 유대인만 구원,

그 구원을 이방인도 아닌 유대인인 사도들이 이방인 편들면서 유대인만의 구원을 막 범해 버리는 겁니다.


그리고서는 적반하장 인냥 하나님을 왜 시험하냐고 따지고 있으니

기가막히고 코가막히는 겁니다.


구원이란 긍휼의 대상물이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대상이 범위가 확 넓어져 버리니까

원가지였던 이스라엘이 그럼 구약의 역사는 뭐가 되냐고?

반칙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 스스로가 범죄하는 식이 된다고

하나님이 범죄(거짓말) 할 리가 없잖아 라고 나오는 겁니다.

결국 하나님의 편에 서서 하나님을 변호하고자

이들 사도들의 행각을 방해하러 나서는 겁니다.

방해하고파서가 아니라 바로 자신들의 질서가 깨어지기 때문입니다.


마치 시골 농촌에 갑자기 신식문명이 들어오게 되니까

무당부터 시작해서 마을 어른들까지 그 신식문명을 막을려고

마을 사람들이 동요되지 못하도록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냥 전기 넣을려고 전기기사가 갔을뿐인데, 인터넷 기사가 갔을 뿐인데.

그 전기기사를 무당이 마을 사람들을 몰고와서 쳐죽여버리는 것처럼 말이지요.

정작 그 마을 자녀들 곧 후세대는 그 전기의 혜택을 받고 공부하고 학교가고 악기배워 노래도 하는데 말입니다.
무당 자식도 마찬가지로 혜택받고 사는데?


또 북한에서 자신들의 결집상태를 와해하는 자본주의를 막을려다가 

도리어 늦게 배운 도둑질이 더 무섭다고

체제붕괴 때문에 얼마나 전전긍긍하는지?


얼마전에 북한 시민이 남한으로 그렇게 어렵게 탈출했다가

자본주의의 냉혹한 몰인정의 권모술수에 질려버려서

다시 북으로 올라갔는데

북에서는 그것을 과거처럼 처형하지 않고

자발적으로 돌아오겠끔 체제선전으로 더욱더 활용하더라 말입니다.


그러나 그 단순한 북한시민은 그 권모술수가 북한에서도 많이 안당해봐서 그렇지

당해본 사람은 도리어 더 심했으면 심했지 북한도 마찬가지다 라고 할 것입니다.


즉 어디를 가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그럼 권모술수가 없는 그 상태는 과연 권모술수가 없어서 그렇게 유지되는 것일까요?

오히려 권모술수 때문에 그렇게 유지되는 겁니다.

돈이요 자본이요 잉여 때문입니다.


낮에 간음한 음탕한 년 이라고 분명히 돌삐 들어놓고서는

밤에 자신도 여자를 보고 간음하는 마음을 가지는 셈입니다.

스마트폰 없는 사람은 인간 대우 못 받습니다. 무시받는 왕따죠.

즉 이데올로기가 형성되는 겁니다.

이 이데돌로기를 치는 방식이 더 나은 이데올로기 입니다. 더 나은 외설적인 이데올로기 말이죠.
이데올로기의 이중성 처럼 말입니다.

http://www.youtube.com/watch?feature=player_detailpage&v=rXGwHGVACBE&t=43


이것은 두 소욕의 문제이다 라는 겁니다.


플라톤이 이것을 아주 짧게 두 단어로 표현합니다. 정치

정치라고 말입니다. 바로 간택의 문제이다는 겁니다. 

한 쪽을 배격하지 않는 이상, 다른 한 쪽을 세울수가 없는 겁니다.

이것을 철학자들은 플라톤의 최대의 단점이요 실수이다 라고
그리스가 무너진 이유가 바로 이 배타성이라고 합니다. 소욕이지요. 선택 곧 구원

사실은 배타적이라서 망한게 아니라, 충분히 배타적이지 못해서 망한 겁니다. 더 나은 배타는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그 대안이 로마 입니다. 그 배타성을 보안해서 배려했습니다.
그랬던 로마도 망했습니다. 왜 망했느냐? 너무 개방(배려)해서 그런 겁니다.
그러나 로마가 망한 이유도 사실은 너무 개방해서가 아니라,
헬라인이 지혜가 없어서 망한게 아니라 너무 지혜로워서 망한 겁니다.
더 나은 지혜인 어리석은 십자가의 지혜를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너 나은 외설적인 배려 긍휼을 거부한 겁니다.

아니 거부당한 겁니다. 헬라인 자신들에게 충분히 지혜와 사랑이 있는데
구지 새로운 긍휼과 지혜와 사랑을 받아들이겠습니까? 배부른 판국에? 말라꼬?


이것을 다시 성경에서는 구원 이라고 합니다. 구원 곧 두 소욕의 정치성이다는 겁니다.


이 정치성인 간택의 문제 곧 구원의 문제에

두 소욕이 정면충돌한 것이 오늘 본문입니다.


성경 어디를 봐도 이방인 구원은 없다 라고 하나님이 장담한 문제라고

복음을 전하는 현장에서 사도들에게 유대인들이 시비를 걸게 됩니다.
구약의 전통을 건드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유대 그리스도인들도 헷갈리기 시작하면서 요동됩니다.

이 문제는 사도바울의 서신에서도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문제가 되는 겁니다.

바울이 가는 곳 마다 터지는 문제입니다. 아니 바울이 아예 그 문제를 건드립니다.


곧 구원과 직결이 되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해결 된 것처럼 보일까요?

놀랍게도 오늘날 까지 이 문제는 해결되지 않은 것처럼 이어지고 있습니다만

사실은 그 자체가 해결이 되었기 때문에 계속 그 충돌이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겁니다.
너무 너무 충분하게 해결이 되었기 때문에 그런 충돌이 지금도 풍부하게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 완료성이 풍부하다는 증거로써 말이지요.


그래야 계속 쭉쭉 갈라지고 다툼이 벌어지고 두 패로 갈려져 다시 또 두패로 또 두 패로

계속해서 분절의 분절 , 이 분절의 이중성이 바로 구원의 이중성이다는 증거입니다.

구원의 구원이다는 거죠. 얼마나 구원이 풍부하면 그 풍요성이 계속해서 분절 분절
쪼개지고 갈라지고 분리되고 구분되고 쉼도 없습니다. 얼마나 거룩의 풍요함입니까?


바로 이것이 구원 문제는 주님이 직접 다루신다는 것입니다.
그 어떤 누구도 선점하거나 손대거나 건드릴수 없도록

늘 구원을 범하면서 구원을 이루십니다.
구원을 차단하는 구원


그러니 먼저 된자 나중 되고, 나중 된자 먼저 되는 겁니다.

에셔의 작품 낮과 밤을 보면, 낮에서 밤 다시 낮 다시 밤 또 다시 낮 그리고 밤
헤겔이 심심하면 말하는 밤 밤 밤 세계의 밤(전지적 가카시점)에 대한 이야기가 아마 그런 의미인 듯 싶네요.
무한증식이다는 겁니다. n-1. 사건의 무한증식. 십자가의 무한증식(차이의 반복)



이렇게 구원 문제로 인한 충돌은 지금도 쉼이 없이 계속 됩니다.

예수님 자신이 십자가로 이 둘의 구분 즉 이방인과 유대인이라는 구분을 없애버렸습니다.


자 여기서 또 착각하시면 안됩니다. 평등주의이구나 남녀평등 뭐뭐뭐 인종 평등 뭐뭐뭐

이런식으로 보시면 안됩니다.

인간의 손에 주어진 구분 방식을 없애버렸다는 뜻입니다.

즉 이 말은 더 심한 구분이 있다는 겁니다. 더 심한 배타성이다는 겁니다.

인간 손의 구분이 얼마나 외설적인지를 더 심한 외설성이 와서 들추어냈다는 겁니다.

더 나은 외설성으로 앞의 인간의 외설성은 외설 축에도 못 끼이도록 만드는

너무 너무 심한 외설성으로 구별 짖겠다 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 더 나은 외설성 앞에서 깨개갱 호구가 되는 것은 당연한 겁니다.


(마 5:17, 개역)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

(마 5:18, 개역)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마 5:19, 개역)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마 5:20, 개역)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이방인과 유대인의 구분으로써의 구원이 없어져 버리니까

할례자와 무할례자의 구분으로써의 영원한 할례 언약이 범하여 지니까

구원이 모호해지고 할례가 모호해 지는게 아니라

오히려 더 강화가 되어서 (폐하러 온게 하니라 완전케 하려 함)

(스데반 집사의 설교 중)

(행 7:48, 개역) 『그러나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시나니 선지자의 말한 바』

(행 7:49, 개역) 『주께서 가라사대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짓겠으며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뇨』

(행 7:50, 개역) 『이 모든 것이 다 내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냐 함과 같으니라』

(행 7:51, 개역)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가 항상 성령을 거스려 너희 조상과 같이 너희도 하는도다』

(행 7:52, 개역) 『너희 조상들은 선지자 중에 누구를 핍박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저희가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행 7:53, 개역) 『너희가 천사의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하니라』

(행 7:54, 개역)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저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롬 2:22, 개역) 『간음하지 말라 말하는 네가 간음하느냐 우상을 가증히 여기는 네가 신사 물건을 도적질하느냐』

(롬 2:23, 개역) 『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

(롬 2:24, 개역)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로 인하여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

(롬 2:25, 개역) 『네가 율법을 행한즉 할례가 유익하나 만일 율법을 범한즉 네 할례가 무할례가 되었느니라』

(롬 2:26, 개역) 『그런즉 무할례자가 율법의 제도를 지키면 그 무할례를 할례와 같이 여길 것이 아니냐』

(롬 2:27, 개역) 『또한 본래 무할례자가 율법을 온전히 지키면 의문과 할례를 가지고 율법을 범하는 너를 판단치 아니하겠느냐』

(롬 2:28, 개역) 『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롬 2:29, 개역)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마음판의 할례자가 아니면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다 지옥이다는 겁니다.


행함을 없애버리는 행함을 하라는 겁니다. 곧 믿음입니다.

행함을 포기하는 행함을 하지 않으면 너 지옥 가 라는 겁니다.
회개(죽음)를 거부하는 회개(죽음)를 하지 않으면 죽음 뿐이다는 겁니다.

아니 행함을 없애는 행함은, 역시나 행함 아닌가요?

믿음을 없애는 믿음은, 그 역시나 믿음 아닌가요?

구원을 없애는 구원은, 그 역시나 구원 아닌가요?


유대인 이방인의 구분을 없애버림으로써의 구원이 범해지니까 평등한 샘샘이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강화가 되어서 구원에 합당한 열매를 맺지 아니하면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모조리 다 지옥에 집어 넣겠다는 겁니다.


즉 그 열매로 그 나무를 알 듯이

그 사람이 말하고 행동하는 것으로 인해
그 사람의 주인이 누구인가를 즉 마음이 어떤지를 안다는 겁니다.


(잠 18:20, 개역) 『사람은 입에서 나오는 열매로 하여 배가 부르게 되나니 곧 그 입술에서 나는 것으로하여 만족케 되느니라』

즉 누구든지 성령으로 나지 않는 자는 다 지옥입니다. 백년믿었던 오늘 믿었던,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손 할례가 아닌 마음판의 할례 즉 단절의 단절이 아니면 그 단절의 강화가 아니면
이해가 안되는 말씀만 하시는 겁니다, 육에 속한 자는 도통 믄 말인지를 알길이 없도록

처음자리 곧 나무로 결정이 되는 겁니다.


(마 7:16, 개역)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찌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마 7:20, 개역)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눅 6:44, 개역) 『나무는 각각 그 열매로 아나니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또는 찔레에서 포도를 따지 못하느니라』

(눅 6:45, 개역) 『선한 사람은 마음의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


그래서 얼굴을 표층이라고 합니다. 제일 끝에 나타난 것입니다.

곧 징후입니다. 그렇다면 그 얼굴을 끝으로 밀어내고 있는 것은 안의 것들입니다.

그 마음상태 건강상태 이런 모든 것들이 그 얼굴에 표출이 되는 겁니다.

마음이 아프거나 건강상태가 안 좋으면 아무리 숨길려고 해도 얼굴에 다 나타나기 마련입니다.


이것은 곧 말과 행동으로써 나타남으로써 그 속의 상태를 표출한 겁니다.

임금의 얼굴이 바로 암행어사 입니다. 거지행세로 오니 다들 거지인줄 착각한 겁니다.
임금의 긍휼로 먹고 사는 것이 백성입니다. 곧 거지입니다.
자신이 거지이기에 거지로 온 임금이 거지가 아닌 임금의 낮아지심으로 보이는 겁니다.
그런데 거지로 보이는 자는 자신이 곧 거지가 아니다는 겁니다. 즉 선악시선입니다.
은혜(공짜시선)가 속에 없기에
가시나무에서는 무화과를 찔레나무에서 포도를 딸수 있다고 착각하는 시선이다는 겁니다.

(눅 6:44, 개역) 『나무는 각각 그 열매로 아나니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또는 찔레에서 포도를 따지 못하느니라』

왜 착각하는 오류의 해석을 하느냐? 거지로만 보이지 임금의 얼굴로 보이지 않는 이유가 바로
마음이 임금의 얼굴을 보기 싫어하기 때문에 그 징후가 딱 포착이 된 겁니다.
미끼로써 얼룩(거지얼굴)이 응시가 되니 시비걸지 않고서는 못배기는 거죠.
왜? 선악나무의 열매를 먹었기에 나만 임금이기에 시비걸수 밖에 없지요.


이것을 나무와 열매의 관계성으로 표현 한 겁니다.
그 관계성 곧 사귐(사랑-이몽룡과 춘향)을 증폭케 하기 위해, 어두움이 변사또로 등장하고 배경으로 깔려야 하듯...

열매를 통해 아 그 나무가 어떤 나무인가를 알 듯이 말입니다. 관계성을 드러내는 겁니다.


1구원(믿음, 행함, 회개)을 없애는 2구원은, 그 역시나 구원 아닙니까?

1번 구원이 아니라 2번 구원입니다.
즉 앞의 1번 구원은 나의 구원을 없애는, 2번 구원자가 와야 한다는 겁니다.

앞의 1번 회개인 나의 회개를 없애는, 2번 회개인 회개자가 와야 한다는 겁니다

구원을 없애는 구원, 할례를 없애는 할례, 회개를 없애는 회개

곧 인물입니다. 아주 구체적인 인물, 곧 마지막 아담. 종말의 아담 말입니다.
첫아담에 속한 나를 치는 그 마지막 아담.
첫아담에 속한 모든 아담을 겨냥한 마지막 아담이라는 겁니다.
십자가에 못 박으러 온 그 마지막 아담
그 종결자만 쳐다 보라는 겁니다.

나와 동떨어진 인물이 아니라 아주 구체적인 인물,
나를 쑥 등떠밀어서 종말 속으로 집어 넣어버리는 그 인물,
나를 원수 삼고, 나를 대적으로 삼아서 전쟁을 벌리시는 그 인물, 그 구체적인 인물.

그렇기 위해서는 사건 속에서 봐야 합니다.

그 사건이 바로 십자가 사건인데 왜 구체적인가?

바로 내 손에 죽으러 왔기 때문입니다. 그것만 구체적인게 아닙니다.
그런 나를 구체적으로 심판 속으로 집어넣는 그 구체성
이 두 간격의 점을 구체적으로 점찍는 그 간격 속에서 은혜를 보게 하시는 겁니다.

사람 미치고 환장할 노릇입니다.

졸지에 내 숙제는 모조리 사라지고 주님 숙제만이 덩그라니 남게 됩니다.
주님의 숙제가 뭔가요? 예수님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나(원수)를 용서하느냐! 마느냐! 라는 숙제.

십자가에 달려 죽는 그 한 쪽 강도와 같습니다. 부끄러운 구원이 아니라

우리도 그런 상황만으로만 구원하시겠다는 겁니다. 그 처지가 되지 않으면 그 십자가의 용서를

뻔뻔스럽게 받아들일수가 없는 겁니다. 안그러면 자꾸 쪽팔리는 용서이기에
자꾸 뭔가를 보답한답시고 행하겠다는 것은,
은혜를 법으로, 공짜를 돈(가치)으로,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는 기념비로 바꾸겠다는 것입니다.
누가 꾀더냐?

(갈 3:1, 개역)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갈 3:2, 개역) 『내가 너희에게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

(갈 3:3, 개역)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갈 3:4, 개역) 『너희가 이같이 많은 괴로움을 헛되이 받았느냐 과연 헛되냐』

(갈 3:5, 개역)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듣고 믿음에서냐』


내 숙제가 사라진 세계가 되어버리면 그 세계가 얼마나 낯설게 되는지 모릅니다.

참 낯섭니다. 나를 들었돠 놨다 들었돠 놨다. 그야 말로 요물입니다. 요 ~~~ 물

그런데 더 더 더 낯설게 그런 나를 용서 해 버리면 이것 보다 더 낯설어 버리는게 없습니다.

왜? 법을 어기면서 반칙 중에 반칙이거든요. 용서 받는 본인도 용납 자체가 안되는 겁니다.

반칙 하면서 까지 왜 용서하지? 난 용서 받을 자격 자체가 안되는데?
나는 죄인 중의 괴수인데! 나를 더더욱 죄인 중의 괴수로 만드시는데!!
뭐지? 뭐지? 허걱


예수님이 이렇게 외치십니다. 당황하셨어요 고객님?

아까 보이싱 피싱 사기단 유대교(모든 종교의 대표성, 기독교도 동일한 사기집단) 보다

더 더 더 외설적인 예수님이 당황하셨어요 고객님! 저도 당황 했습니다.

십자가를 지시지 않으시면 구원 없습니다.

구원이 된 줄 알았는데 유대인도 구원이 안된다고 해서 많이 놀랐셨죠 고객님?

저도 구원을 준 적이 없는데 구원을 받았다고 해서 많이 놀랬습니다 고객님.


아니 언제 그렇게 바뀌었죠? 왜 구원이 안되는 거죠?

혹시 고객님, 안식일 어긴적 없으시고요? 네 없어요

어 그럼 할례를 어긴적 없으시고요? 네 없어요

어 그럼 창세전 생명책에 기록 안 된 적 없으시고요? 어 그것은 제가 모르죠. 태어나지 않았을때니까요 


거기서 누락이 되었습니다 고객님!!  뭐라구요?????????


이건 뭐 놀리는 것도 아니고

율법 왜 어겼느냐? 왜 안지켰느냐 라는 것 보다

더 외설적인 부조리로, 단절의 단절로, 부조리의 부조리로 
곧 태어나기도 전에, 아예 결정해 놓은 상태로 몰아붙이는 겁니다.
나무와 열매의 관계성입니다.
생명나무와 연관 되시나요 고객님? 전 선악나무와 연관되는데요?
거기서 누락 되었습니다. 고객님

이 보다 더 외설적인 부조리가 어디있겠습니까? 있으면 나와보라 하세요!

태어나기도 전에 [에서]는 미워하기로 작정했고? [야곱]은 사랑하기로 작정했다고?

(롬 9:13, 개역)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롬 9:14, 개역)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롬 9:15, 개역)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롬 9:16, 개역)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그런데 말입니다. 그것뿐만이 아닙니다.(그것이 알고 싶다.)

성경 전체가 다 부조리 뿐입니다.

바리새인 곧 유대인이 율법을 지킨다는 자체가 부조리 인데
오늘날로 치면 기독교인들이 원수를 사랑하자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자 라는 것 자체가
세상 사람도 그것은 거짓말이다 라고 다 알고 있는 부조리인데
(기독교 본인들만 모르죠, 자기교회 등록하는 사람에게만 사랑을 베푸겠다고 하니 사실은 등쳐 먹는 거지만,
그래서 남의 교회 등록하면 안되죠. 꼭 자기 교회)

그런 유대인마저도 쳐 버리는, 당황하고 낯설게 하는 더 나은 부조리까지

이렇게 되면 모조리 다 부조리요

그 와중에 그냥 한 번 부조리가 아닌, 두 번 부조리의 부조리, 부조리의 이중성,

부조리를 치는 부조리까지 등장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겁니다.


유대인의 부조리를 없애는 부조리, 

유대인의 부조리 보다 더 나은 부조리인,
부딧히는 돌, 실족케 하는 거리끼는 걸림돌인 십자가가 오지 않으면 안된다는 겁니다.
그들 마저도 걸려 넘어뜨리는 십자가가 아니면 인자를 누가 쳐다 보겠습니까?

그래서 율법강화입니다. 율법도 못 지키는 바리새인보다 더 나은 율법강화로써 십자가에서 다 이루어 버리십니다.


십자가는 그야말로 부조리 그 자체입니다.

나 라는 원수를 사랑하겠다는 부조리보다 더한 부조리가 이 세상에 어디 있나요?

나 같은 죄인을? 그것도 예수님을 죽인 그 당사자를, 도리어 죽은 예수님이 날 살리겠다고 하니?


이것은 그야말로 말도 안되는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구원도 의미가 없고

교회도 의미가 없고

눈에 보이는 것들은 그야 말로 안개요 의미가 없는 겁니다.

그런 것들은 나의 죄를 위해 피 흘리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생생하게 또렷하고 명료한 것은, 오직 내 죄 때문에 피 흘린 분이 눈에 보이지 않는 심판주 이다는 겁니다.
안 보이는 분이 또렷하다니 우찌 언어의 이런 한계점에서 달리 말할 방법이 없습니다.

누가 꾀더냐!!!!


졸지에 너무 너무 미쁜 겁니다. 미쁜 마음이 들고픈 마음도 없었는데

갑자기 쳐들어 오니까 말입니다.


그 빼돌림의 반칙을 더욱더 풍성하게 하기 위해서

구원에 대한 확신을 가진 자들(유대인)이 더욱더 풍성하게 달려 들어서

그 충돌이 맹렬하게 드러내시는 겁니다.
구원의 풍성함을, 마음판의 할례 곧 십자가를 풍성케 하심입니다.


오늘 본문이 너무 너무 재미 있는 상황입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적반하장 격으로 기가막히고 코가막힌다는 겁니다.

두 소욕이 너무 너무 또렷하게 그 경계선을 긋고 있는 물과 기름같이 충동하고 있는 팽팽한 상황 때문입니다.


바리새인은 이들 사도들이 하나님의 일 곧 모세 율법에 할례를 지키는 일을 방해하는

이방인의 구원은 있을수 없다고 공격하고


사도들은 바리새인에게 어찌 너희와 너희 조상도 지키지 못한 멍에를 이방인에게 짐지울려고 하느냐
이런 ~~ 하나님을 시험하는 자들아 라고


이거 뭐 말이 안통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 싸움이 지금도 동일합니다.

교회 패거리들은 항상 자기들도 지키지 못하는 것들을 지울려고 합니다.

이웃을 사랑하라 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성령을 입은 자들은 너나 잘하세요 라고, 하나님을 시험하는 자들이라고, 바리새인과 똑같은 자들이라고


왜냐 선물을 모독하기 때문입니다. 이방인에게도 선물이 주어지니까 안돼? 안돼? 라고 하는 겁니다.
선물을 조작하는데 있어서 유대인에게만 이라는 외설성에,
주님의 더 나은 외설성은 너가 그렇게 상대적으로 미워하는 그 사람을 일부러 구원해 버리니까

졸지에 낚여 버리는 겁니다.


바로 이런 십자가의 거리끼는 이 방식을 유대인들은 빼자 라는 겁니다.
헬라인들은 너무 유치한 어리석은 지혜다. 빼자 빼.

왜 자기 보다 더 부조리 하니까 쪽팔린다는 겁니다. 자신들의 부조리까지 들통내면서 등장하니 말이죠.


안된다 집어 넣겠다는 것이 성령의 소욕 곧 주님의 고집입니다.

너희들 부조리 보다 더 나은 부조리가 아니면 이방인이 무슨수로 구원 받겠냐 라고
다윗도 이 처음자리 이방인처럼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범죄를 용서받는 그 처음자리에서 구원되었다.

또 기여이 이방인을 언급하니까 더 열받게 하는 겁니다.
처음자리 이야기 하는데 더러운 이방인 이야기 나오면 우엑 우엑 거리는 겁니다.
오죽하면 베드로 꿈에 나타날정도로 몸뚱아리 자체가 마귀의 숙주 노릇을 한 겁니다.

간따나 미워 죽겠는데 오히려 색동옷을 입혀버리겠다고 하니, 

그 선물을 갈기 갈기 찢어서 재수 없게 사자한테 물려 죽었다고 거짓을 말하겠다고 만들어 버리는 겁니다.
문제는 그들이 자유의지로 한 것이다 라고 착각하겠지만 사실은 그것이 바로 강요된 선택인 겁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어리석은 지혜입니다.

상대적으로 저들은 가장 지혜로운 짖을 했다는 자부심이 들도록 만들어 버리겠다는 겁니다.



자 이렇게 이런식으로 서로가 서로를 공격하는
그 다툼과 충돌이 아직까지도 같은 문제 같은 양상으로 나타나는 겁니다.
어쩌면 이 예루살렘에서 벌어지는 문제는 앞으로 바울이 가는 곳마다 벌어질 문제요

아니 바울이 그 문제들을 더 활성화 시키는 셈이요

오늘날 성령께서 교회마다 이런 문제를 터트리실 겁니다.

그래서 교회의 교회

즉 교회에서 교회를 빼내시는 반칙을 벌리실 겁니다.
이스라엘 속에서 이스라엘 빼내기 곧 예수님 빼내기 입니다. 유일한 남은자 말입니다.

이 얼마나 풍요한 말씀입니까?


자기도 못지키면서 남에게 멍에를 지우는 쪽과

오로지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누가 꾀더냐? 라는 

교회도 눈에 비이지도 않고 오직 십자가만 증거하는 쪽과의 대립


이 두 소욕을 팽팽하게 또 풍성하게 하기 위해서

주님은 가짜 교회도 양성화 시키는 겁니다.

자본주의를 그 권모술수가 가득한 곳을

일부러 주님의 소욕을 보여주기 위해서 말이죠.

갑자기 어느날 확 빠져나기는 일이 생기면

주님이 하신 일임을 우리는 인간의 행동이 아닌

주님의 행동을 보게 될 것입니다.


구원의 장치를 세우고 사수할려는 자들과

그런 눈에 보이는 것을 없앨려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자꾸 말하는 자와의 대립 말입니다.


그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바로 우리를 강퍅케 하는 십자가의 무조건적인 용서입니다.

인간의 구원을 취소시켜버리고

인간구원을 거부하고 단절 시키는 십자가야 말로

우리에게서는 유일한 참 소망입니다.

(히 7:19, 개역) 『(율법은 아무 것도 온전케 못할지라) 이에 더 좋은 소망이 생기니 이것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가느니라』


(히 7:18, 개역) 『전엣 계명이 연약하며 무익하므로 폐하고』

(히 7:19, 개역) 『(율법은 아무 것도 온전케 못할지라) 이에 더 좋은 소망이 생기니 이것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가느니라』

(히 7:20, 개역) 『또 예수께서 제사장 된 것은 맹세 없이 된 것이 아니니』

(히 7:21, 개역) 『(저희는 맹세 없이 제사장이 되었으되 오직 예수는 자기에게 말씀하신 자로 말미암아 맹세로 되신 것이라 주께서 맹세하시고 뉘우치지 아니하시리니 네가 영원히 제사장이라 하셨도다)』

(히 7:22, 개역) 『이와 같이 예수는 더 좋은 언약의 보증이 되셨느니라』

(롬 13:8, 개역)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롬 13:9, 개역)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롬 13:10, 개역)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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