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자가 일어난게 아니라 큰 선지자가 일어나심 (눅 7:11-16)



(눅 7:11, 개역) 『그 후에 예수께서 나인이란 성으로 가실새 제자와 허다한 무리가 동행하더니』

(눅 7:12, 개역) 『성문에 가까이 오실 때에 사람들이 한 죽은 자를 메고 나오니 이는 그 어미의 독자요 어미는 과부라 그 성의 많은 사람도 그와 함께 나오거늘』

(눅 7:13, 개역)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눅 7:14, 개역) 『가까이 오사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눅 7:15, 개역) 『죽었던 자가 일어앉고 말도 하거늘 예수께서 그를 어미에게 주신대』

(눅 7:16, 개역)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가로되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 하고 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아 보셨다 하더라』



누구 말 마따나 [없음]은 없습니다 라고 말하는 무식한 자들이 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장사죠.

죽음은 없습니다 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예수님은 바로 이 [죽음] 곧 [없음]을 가지고서 일하십니다. 

오직 죽음으로만, 오직 [없음]으로만, 부재로만 일하십니다.


이것은 인간의 죽음은 죽음의 가치도 쳐 주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인성에 한 과부에게 독자가 있습니다. 

그 독자가 죽어서 그 시체를 메고 많은 사람들이 나옵니다.


예수님은 그 과부를 봤습니다. 그리고 불쌍히 여기시사 울지 말라고 하십니다.

단순한 위로 차원에서 하신 예의상 한 말일까요?

아닙니다. 여기서 계류 곧 침범이 일어납니다.

죽음에 도전하는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냥 묵묵히 그 결과만을 받아들여야만 할 뿐입니다.

이것이 무능한 인간의 세계요

죄가 지배하는 세상입니다. 마귀세상입니다.


그런데 속수무책인 이 죽음의 세계에 주님은 이 사망의 권세에 도전하십니다.

그 결과는 뭘까요? 역시나 죽음입니다.


아니 죽는 줄 뻔히 알면서 죽음에 도전하다니? 미친 것 아니야?


그러나 진짜 사랑이다면, 정말로 사랑이 맞다면 

사랑만이 이 사망에 대해 도전하고 시기 질투합니다.


그래서 불쌍히 여기신 것입니다. 울지 말라 하십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제목을 죽은자가 살아났다가 아닙니다.

오히려 죽은 청년, 그 과부의 독자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남은 의미가 없습니다.


맞습니다. 이 의미 없음이라는 이 부재성을 다시 재분절 시키는 것입니다.


없음의 없음이요, 단절의 단절이요, 죽음의 죽음이요, 사망의 사망입니다. 이것이 이중성 곧 사랑입니다.


청년이 죽었다가 다시 사는 것은 의미 없습니다. 부활도 아닙니다. 어차피 다시 죽도록 되어 있습니다.

청년이 불쌍해서가 아닙니다. 과부가 불쌍해서 입니다.


여기서 주님이 부여하신 사건에서의 사람들의 반응이 아주 아주 희한한 낯설은 표현이 나타납니다.


바로 큰 선지자가 일어나셨습니다. 또 하나님이 백성을 돌아보셨다 라고 외칩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의 핵심입니다.

즉 이 말은 백성들이 외친소리가 아니라, 성령이 들어가서 백성들의 입을 통해서 외친 소리입니다.
다시말해서 사적인 견해가 아니라, 주님의 사건을 말하기 위한 조치로써의 성령의 자작극입니다.


이 사건 지도는 이렇습니다.


큰 선지자가 일어났다는 말은 무슨 말일까요?
말라기 선지자 이후로 선지자는 단절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사실상 이스라엘은 끊침바 된 것입니다.


즉 단절이 전제로 되었고 그 단절 속에서 단절의 단절이 바로 큰 선지자가 일어남입니다.

즉 단절을 다시 새롭게 이어준다는 것이 아니라

그 단절을 구체화 하고서 그 단절에 다시 단절을 제대로 보여주는 선지자의 일어남입니다.


이것은 마치 지난 주에 사도행전에서 살펴본 바 대로

무너진 다윗의 장막을 다시 세울자가 누구냐 라는 것입니다.

(행 15:16, 개역) 『이 후에 내가 돌아와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또 그 퇴락한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키리니』

(행 15:17, 개역) 『이는 그 남은 사람들과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모든 이방인들로 주를 찾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큰 선지자 이다는 것입니다. 그럼 그 선지자는 이스라엘을 위한 선지자이어야지

이방인을 위한 선지자가 되면 안되는데 사도행전 15장은 반대로 말합니다.
즉 단절의 단절입니다.

오히려 이스라엘을 위한 선지자가 아니라, 이방인을 위한 선지자가 세워짐으로써,
확대되는 선지자 곧 큰 선지자가 일어난 것입니다.
이스라엘에게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배신이야 배신 ㅋㅋㅋ


이스라엘의 단절이 오히려 단절의 단절로써 이방인의 세계까지 확장 된 것입니다.


이것이 주의 주 되심이라고 했습니다. 주의 이중성.


즉 이스라엘 만의 주가 아니라

천국의 주만 아니라


천국만 챙기고자 천국에 합당치 못한 비거룩만을 쫏아내는 것이 아니라

지옥의 주 까지 되셔서, 온 우주의 주가 되심으로 인해

지옥까지 쳐들어가 비거룩을 작살 곧 심판하시겠다는

주의 이중성 곧 주의 주 되심입니다.


주님께서 [주-되기]를 [주의 주-되기]로 확장 하셨습니다. 탈영토 재영토 하신 것입니다.
언약파기와 언약갱신처럼 말입니다.


이방인을 왜 취하시는 걸까요? 언약을 파기 하시면서 까지 말입니다.

원가지 이스라엘도 안 되는 판국에, 이방인은 더더욱 안될껀데 말입니다.

그것은 주의 이름을 위한 것입니다. 원인 없는 결과요,

이유없이 무조건 사랑인 처음자리이기 때문입니다. 

빈공터 빈자리가 원래의 이스라엘 자리요 처음자리 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이 이스라엘의 자리인 첫사랑의 자리를 제대로 명료하게 하십니다.


무너진 장막을 다시 세울자 있습니까? 무너진 처음자리 말입니다. 

탐욕으로 메워진 빈공터.

겨우 인간이 부리는 재주는 로마와 손잡고 예루살렘 성전만을 사수할수 있도록 

사망의 권세와 타협하는 길 뿐입니다. 

교회만 건드리지 않는다면 사망의 권세를 허용하겠다는 심뽀입니다.

웃기죠 웃기잖아? 


주님은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교회라는 미끼를 통해 미움을 구체화 하는데!! 

고난과 핍박을 명료하게 하시는데 말입니다. 즉 그 만큼 뜨거운 사귐이다는 겁니다.

(롬 8:32, 개역)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롬 8:33, 개역)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롬 8:34, 개역)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롬 8:35, 개역)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협이나 칼이랴』

(롬 8:36, 개역)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롬 8:37, 개역)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롬 8:38, 개역)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롬 8:39, 개역)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그러나 저들은 그래놓고 율법이라는 멍에 곧 의문의 증서를 자기도 안지키면서 지킨냥
남을 정죄할 뿐이죠. 아니 정죄할 수 밖에 없습니다.
행한것이 드러날려면 행하지 못한 자는 타켓이 될 수 밖에 없어야 자신의 행함이 드러나니까 말입니다.

이런 짖은 지금도 여전합니다.


사망의 권세와 타협하는 것이 인간의 외설성입니다. 그래놓고 율법 곧 말씀뒤에, 십자가 뒤에 숨어버립니다.


법궤 뒤어 숨는다고 법궤가 속아 넘어가던가요? 언약은 외칩니다.
이 숨은 놈 여기 있다네 어서 잡아가라 라고 ...그 다음 너 차례야 라고 ...


무너진 장막은 다시 세울수 없습니다.
세상과의 타협으로 손잡고 예루살렘성전 유지가 기특해 보일지라도 ...


오히려 더 단절 시켜 버리듯


이 성전을 헐라 하십니다. 발칵 뒤짚어 집니다.


3일만에 다시 세우겠다 라고 단절의 단절로써 더욱더 그 간격을 벌려 버리는 겁니다.


그리고 자신의 몸도 같이 허물어 버리십니다. 단절의 단절입니다. 도대체 우짤려구?


단절의 단절만이 제대로 된, 다시는 무너지지 않는 성전

곧 모든 사람들이 기도하는 하나님의 집을 세우시는 것입니다.

(마 21:13, 개역) 『저희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드는도다 하시니라』

(막 11:17, 개역) 『이에 가르쳐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도다 하시매』

(눅 19:46, 개역) 『저희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도다 하시니라』


인간은 기껏 돈 바꾸는 교회만을 짖고 세울 뿐입니다. 강도의 본부 아지트죠.

돈과 복을 바꾸는 제사만 할 뿐입니다. 환전상이요 그 중간에서 커미션만 챙기는 거죠.


그런 말씀 지키기 밖에 할 뿐입니다. 이윤 때문입니다. 자기를 위하여.


이런 외설성에 더 나은 외설성.  외설성의 외설성, 이중 외설성인 사랑이라는 불륜만이


그런 되도 않는 의문의 증서를 찢어버릴수가 있습니다.

가로막힌 담을 허물어 버릴수가 있습니다.


도대체 누가 저런 되도 않는 의문의 것으로 서로가 서로를 가로막아서

참된 것을 못 보게 하는 것일까요?


그래서 큰 선지자란 이어주는 개방이 아니라

반대로 단절의 단절 곧 자신의 신체를 내어주는

제물이 되는 자가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나의 죄를 위해 제물 될 자가 아니면 말을 들을 이유가 없습니다.

내 죄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는 자

오직 그의 말만 들으면 됩니다. 목사말 말라꼬 듣습니까?


이제는 되도 않는 의문의 제사 따위는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두 번 물 길러 오지 않도록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가 왔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뻔뻔스럽게 받아 마시면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두 번째 오늘 본문의 핵심인 [백성을 돌아보심] 입니다.


즉 이 말은 백성을 돌아보지 않았다는 전제성이 있습니다.

역시나 단절입니다.


(눅 7:16, 개역)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가로되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 하고 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아 보셨다 하더라』


그럼 이제까지는 백성을 돌아보시지 않았기에, 단절이었는데,

이제는 자기 백성을 돌아 보심이 되었으니 개방 곧 이어짐이 된 것이네?
끊어진 다리가 다시 원상 복구가 되었네?


아닙니다. 역시나 단절의 단절입니다.
문제는 백성이 곧 대상인 백성이 이스라엘이 아니기에

이어졌다는 개방성을 외쳐도 소용이 없습니다. 백성이 달라졌어요 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사라졌으니 백성은 없습니다. 아니 백성도 없는데 어쩌실려구??
아니 이스라엘이 원래 처음부터 부재였습니다. 없음 이라는 빈공터였습니다.


그래서 그 [없음]이라는 부재성을 구체화(간격벌리기) 하시고서는

다시 백성을 세우시는 것입니다.


새창조 하시는 것입니다. 백성마저도 새롭게 만드십니다.
죄인을 만드십니다. 아주 특이한 존재입니다. 죄인 중의 괴수입니다.


그래서 백성의 백성입니다. 백성 조차도 이중성입니다. 죄인의 죄인. 이중성이죠.


백성의 백성-되기? 이스라엘의 이스라엘-되기?

이스라엘을 포기하는 이스라엘?

죄인이기를 포기하는 죄인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고후 5:13, 개역)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만일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

(고후 5:14, 개역)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고후 5:15, 개역)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고후 5:16, 개역)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아무 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체대로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이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고후 5:17, 개역)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이것이 바로 새이스라엘 입니다.


사도행전에서 새로운 용어가 바로 이런 의미에서 나옵니다. 바로 그리스도인 입니다.

또는 그리스도 안 이라는 그리스도 안에 거한 자 라는 의미입니다.

이 그리스도 예수 안 이라는 표현은 12사도에게서 무지 무지 많이 표현되고 있습니다.

특히 바울 서신은 더 심합니다.

유다서에서는 이것을 사랑 안이라고 했습니다.


(롬 8:39, 개역)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엡 1:4, 개역)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요일 4:18, 개역)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유 1:21, 개역)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기를 지키며 영생에 이르도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라』


예수님을 그냥 사랑이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사랑 그 자체

결국 사랑은 아무에게나 붙이는 것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죽음을 거쳐서 그 단절 속에서의 단절인 부활을 하신 첫열매만이 사랑입니다.


결국 부활 곧 우리가 할례 또는 십일조 또는 안식일에 대해서 앞에서 나누었듯이

이것은 단절을 다시 잇게 해주는 개방이 아니라

오히려 단절을 더 단절 시키는 의미로써

부활은 다시 산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예수님의 죽음에, 같이 뛰어드는, 죽음의 재생산입니다.

십자가의 죽음의 확대 재생산 증폭입니다. 이것이 선물 개념이다 라고 했습니다. 증여, 잉여


종말의 종말입니다.


오늘 본문에서의 핵심 큰 선지자의 일어남과 또 백성을 돌아보심은


누가복음 1장에 세레요한의 태어남으로 인한 그의 부친 제사장 사가랴의 예언에서 나옵니다.


(눅 1:67, 개역) 『그 부친 사가랴가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예언하여 가로되』

(눅 1:68, 개역) 『찬송하리로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그 백성을 돌아보사 속량하시며』

(눅 1:69, 개역) 『우리를 위하여 구원의 뿔을 그 종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으니』


구원의 뿔이란 구원시켜주고파서, 개방처럼 문을 활짝 열어주고파서,
이어줌이라는 끊어진 다리 원상복귀 잇기를 하고파서 안달이 난 구원의 뿔이 아니라


오히려 더 구체적으로 구멍을 다 뻥뻥뻥 뜷어버리는,
되도않는 허접한 무너진 장막을 더욱더 못 세우도록 헐라 헐라 헐어버리는 것이 구원의 뿔입니다.
어설프기 짝이 없는 인간 손으로 지은 성전을 허물어 버리는 겁니다.
행함이나 노동이 아닌, 믿음으로 새롭게 지으시는 겁니다.
종말의 집짖기처럼, 그래야 홍수가 나도 천둥번개가 쳐도 불 속에 들어가도
전혀 끄덕도 없는 반석인 성전입니다.
종말에 허물어질 성전이면 , 불속에서 타버릴 성전이면 처음부터 가짜였습니다.


새로운 성전 즉 구지 인간의 손으로 지은 어떤 구체적인 공간이 필요하지 않는,

전혀 필요성이 없는 온 땅이 주의 전이 되도록 하는 방식이 바로 구원의 뿔입니다.

(행 17:22, 개역) 『바울이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 말하되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성이 많도다』

(행 17:23, 개역)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의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행 17:24, 개역)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유를 지으신 신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행 17:25, 개역)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이심이라』(행 7:46, 개역)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은혜를 받아 야곱의 집을 위하여 하나님의 처소를 준비케 하여 달라 하더니』

(행 7:47, 개역) 『솔로몬이 그를 위하여 집을 지었느니라』

(행 7:48, 개역) 『그러나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시나니 선지자의 말한 바』

(행 7:49, 개역) 『주께서 가라사대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짓겠으며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뇨』

(행 7:50, 개역) 『이 모든 것이 다 내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냐 함과 같으니라』

(행 7:51, 개역)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가 항상 성령을 거스려 너희 조상과 같이 너희도 하는도다』

(행 7:52, 개역) 『너희 조상들은 선지자 중에 누구를 핍박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저희가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행 7:53, 개역) 『너희가 천사의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하니라』


그렇기에 세우면 세울수록 오히려 구멍 뚫힐 각오를 하라는 것입니다. 허물어질 각오 하라는 것입니다. 구원의 뿔이 있기에 감사하면서 세울 이유가 전혀 없는 것입니다. 얼마나 신납니까?


인간에게서 이것이 불가능합니다. 종교성 때문입니다.
무신론자도 마찬가지 입니다. 시공간을 필요로 합니다.


즉 자기 몸을 필요로 할 뿐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안 곧 사랑 안에는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항상 우발적이며 역동적이며 발생적입니다.

머무름 없이 바로 떠나버립니다. 여행의 놀이입니다.

이것을 거짓의 역량 또는 유머 웃음 또는 주사위 놀이 (영원회귀) 

이것을 성경에서는 자유 라고 합니다. 즉 사랑입니다.


성전이 필요없는 성전, 성전의 이중성, 성전의 성전입니다.
안식일 범하기, 율법범하기, 이건 뭐 완전 막살기죠 막살기.


곧 너희가 성령의 전이다 라는 것입니다.


(고전 6:19, 개역)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백성을 돌아보심은 곧 구원의 뿔이 등장했다는 뜻입니다.

결국 참백성은 이 구원의 뿔 때문에 고난을 받습니다.


마침 이번주 설교로 인해 어머니랑 고난에 대해서 며칠전에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고난은 고생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고난은 짝꿍땜에 당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알아주는 이가 없는 것은 당연합니다.

어머니에게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어머니!! 마리아가 임신을 했는데, 아니 처녀가 임신해도 할 말이 있다고 하는데

그것이 무슨 말일까요? 즉 짝꿍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짝꿍이 안보이고, 짝꿍은 어디로 갔는데 보이지도 않고

혼자 배만 불러오고 있으니 참으로 기가막히고 코가막히는 겁니다.


며느리 다말 보세요 율법 곧 약자보호법 이웃환대법이라는 사랑은

혼자하는게 아니라, 즉 사귐은 지 혼자 하는게 아니라,


또 저번주에 형수가 와서 종말에 대해서 이야기 했잖아요


열처녀 비유 즉 사귐은 혼자 하는게 아니라 짝꿍이 있다는 겁니다. 

손뼉소리는 지 혼자 낼수가 없어요 짝이 있는 겁니다.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 처녀가 임신해도 할 말이 있다 라는 것은

공명(증폭기=여성성) 즉 짝꿍이 있는 겁니다. 정념(역량)이지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 라는 영화를 2, 3년 전 겨울에 보고 펑펑 울었는데

패션 fassion 이라는 말이 옷 패션만 있는줄 알았는데, 다른 스펠링 이더군요. 

열정 열광 순종이라는 즉 고난인데. 패션 passion 수난

사실상 공명이라는 뜻이라고 철학에서 아주 중요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공명, 정념 즉 짝꿍 땜에, 사귐 땜에, 사랑 때문에 순종 수동적, 수동성으로 되었다는 겁니다.
순종(패션)이 제사 보다 낫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 짝꿍은 안 보이고 혼자 배불러 오고 있으니

다들 끊어낼려고 하는 겁니다. 약혼자 요셉도 마리아를 종용히 끊어버릴려고 하고,

가족들도 끊어내버릴려고 하고. 가문의 수치죠.

율법 사회인 이스라엘 사회 유대인들에게서 끊침바 되는 겁니다.
그런데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족보에 기록되는 이유입니다.


이 [단절 속에서 단절]을 다시 바라보는 것이 바로 마리아의 기도 아닙니까?

뭐가 보이나? 싸움 곧 전쟁이 보입니다.
뭐가 보이나? 희년 전쟁, 샬롬전쟁이 보입니다.


전쟁 선포하고서는 지는 얍샵하게 빠져버리고! 싸움 붙여놓고 말입니다.


며느리 다말은 짝꿍이 있다는 거죠. 이 3가지 물건이 이 뱃속의 아빠입니다.

오히려 더 큰소리 치는 거죠.

드디어 배가 불러와서 시아버지 유다는 그 동안 얌전하게 참고 참았던

그 억울함을 드디어 풀어재끼는 겁니다. 이런 부정한 여자를 당장 화형 시켜라!!


부정의 부정입니다. 부정한자-되기입니다. 정념 곧 짝꿍 땜에!!


어머니!! 제가 어릴적에 골목에서 친구들이랑 놀고 있는데

갑자기 큰 놈들이 나타나 나를 조 패고 가는 겁니다.


알고보니 큰형에게 맞은 놈들이 동생이 누구인지를 알아내고 나를 때린 겁니다.


그런데 또 생판 모르는 놈들이 또 나에게 와서 다들 때리고 가는 겁니다.

알고보니 작은형에게 맞은 놈들이 동생이 누구인지를 알아내고 나를 때린 겁니다.


도대체 골목대장이 뭐길래 각각 골목대장이던 형들 땜에

저는 누구인지도 모르는 놈들에게 참으로 많이 맞았는데요


물론 저도 5학년때 덩치 작은 6학년을 조 팬적이 있었는데

인간은 어릴적부터 악하니 말이죠.


아무튼 이 말은 억울하게 맞을 때 짝꿍이 있었다는 의미로 지금 이야기를 한 겁니다.


요셉은 괜히 시근없이 형들에게 꿈 이야기 하다가 형들에게 미움을 당하는 겁니다.

꿈 이야기를 안 하면 전혀 미움 받을 이유가 없습니다.

그 꿈이 바로 사귐이다는 겁니다. 짝꿍이 있다는 거죠. 꿈꾸고 싶어서 꿨나?


바로


(요 7:7, 개역)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지 못하되 나를 미워하나니 이는 내가 세상의 행사를 악하다 증거함이라』


(요 15:12, 개역)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요 15:13, 개역)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요 15:14, 개역)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요 15:15, 개역)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

(요 15:16, 개역)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

(요 15:17, 개역)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명함은 너희로 서로 사랑하게 하려 함이로라』

(요 15:18, 개역)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요 15:19, 개역)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 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요 15:20, 개역) 『내가 너희더러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핍박하였은즉 너희도 핍박할 터이요 내 말을 지켰은즉 너희 말도 지킬 터이라』

(요 15:21, 개역) 『그러나 사람들이 내 이름을 인하여 이 모든 일을 너희에게 하리니 이는 나 보내신 이를 알지 못함이니라』

(요 15:22, 개역) 『내가 와서 저희에게 말하지 아니하였더면 죄가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그 죄를 핑계할 수 없느니라』

(요 15:23, 개역) 『나를 미워하는 자는 또 내 아버지를 미워하느니라』


바로 우리를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미워하기 때문이다는 겁니다.

고난이 왜 오느냐? 예수님을 미워하기 때문이다는 겁니다.

우리를 핍박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은 이유없이 여전히 예수님을 미워하기 때문입니다.


즉 한 개인의 사적인 일로 볼게 아니라

집단적인 판대기로 보게 되면

고난이라는 것이 예수님을 미워함에 있어서 반드시 나타나는 증상이라는 겁니다.

증상 징후는 곧 종들끼리 파악되는게 아니라

주인들의 상황인 겁니다. 판대기 구조입니다. 큰 판입니다.


그러니 고난 받는 것은 내가 아니라 예수님이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지금 안 보여도 우리를 미워함으로써 예수님을 미워함이 구체화 되는 겁니다.


우리는 고난 받을 자격 조차도 없다는 겁니다.

잠시 예수님을 미워하는 그 증거로써 내 몸에서 나타날 뿐이다는 겁니다.


우리 또한 예수님을 핍박하기는 매 마찬가지이니까 말입니다.


그래서 열매로 안다는 것은, 증상 징후로 안다는 것은 어떤 몸인가?

즉 주인이 누구인가를 드러내는 겁니다.


문제는 때려죽어도 짝꿍은 안 보입니다. 절대로 등장하지 않습니다. 부재입니다.

오로지 증상 징후만 나타날 뿐입니다. 고난만 드러날 뿐입니다.


그렇기에 주인을 드러내는 방법은 핍박 고난 밖에 없는 겁니다.
몸의 상태가 징후이듯이 고난은 예수님의 몸인가? 라는 겁니다.

이것을 역설적이게도 자유함이라고 하는 겁니다.

이 고난을 누리고, 이 핍박을 누리는 겁니다.

왜? 예수님의 몸이기 때문에!! 짝꿍이기에.


졸지에 사랑 때문에, 정념(패션 Passion) 때문에!!

큰 선지자의 내어줌 곧 죽음이 나타나고

백성을 돌보심이 나타나는 겁니다.


예수님의 고난과 핍박 당하심이 그 증거라는 겁니다.

이 고난 받는 분이, 우리 손에 핍박 당하는 분이

사실상 나를 구멍을 뻥뻥뻥 뚫어버리는 구원의 뿔이다 라는 겁니다.


고난(열정)의 고난(열정), 핍박의 핍박은 사실상 내가 아프고 고생하고 힘들어하는게 아니라

도리어 나 같은 원수 때문에 신나게 기쁨으로 십자가의 죽음으로 달려가시는 

그 넉넉한 사랑이


바로 고난의 고난이다는 겁니다. 사귐의 사귐.


아무도 알아 주지 않는 그 길을 가시는 예수님은 신나게 가시는 겁니다.


사단아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뜨릴려고 하는 구나

사람의 일만 생각하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않는구나


예수님은 자신이 넉넉히 누리는 그 자유를 주시고자

늘 가로막는 베드로 같은 우리들을 뿌리치시면서 그 자유를 넉넉히 이루십니다.

바로 순종 곧 뜨겁게 열정적으로 사랑하심으로써 말입니다.

우리는 그것도 모르고 예수님을 오해하고 가로막고 왜 저러시는지 알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 처소가 예비됨으로써 무너진 다윗의 장막이 다시 세워지자

이제야 우리는 선물인 성령으로 인해 알게 됩니다.


그리고 이 십자가의 죽음이 퍼지도록 하시는 겁니다.


이방인을 왜 취하십니까? 주의 이름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왜 죽은 아들을 살려 과부의 품에 안겨줍니까?


요나의 표적 외에는 보여줄 표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기적을 거부하는 기적. 곧 기적을 거부하는 요나표적입니다.


왜 큰 선지자가 일어나야만 하고

왜 백성을 돌아보시는 겁니까?


십자가의 사랑인 예수님의 죽음

곧 짝꿍인 신랑을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왜 이방인을 취하시는 겁니까?


그의 죽음을 구체화 하기 위함입니다.
십자가 사건의 무한반복입니다.

즉 주의 이름 때문입니다. 이름전쟁입니다. 부재의 이름.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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