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 짐도 지우지 말라 (행 15:22-35)



(행 15:22, 개역) 『이에 사도와 장로와 온 교회가 그 중에서 사람을 택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함께 안디옥으로 보내기를 가결하니 곧 형제 중에 인도자인 바사바라 하는 유다와 실라더라』

(행 15:23, 개역) 『그 편에 편지를 부쳐 이르되 사도와 장로된 형제들은 안디옥과 수리아와 길리기아에 있는 이방인 형제들에게 문안하노라』

(행 15:24, 개역) 『들은즉 우리 가운데서 어떤 사람들이 우리의 시킨 것도 없이 나가서 말로 너희를 괴롭게 하고 마음을 혹하게 한다 하기로』

(행 15:25, 개역) 『사람을 택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는 자인 우리의 사랑하는 바나바와 바울과 함께 너희에게 보내기를 일치 가결하였노라』

(행 15:26, 개역) 『[25절과 같음]』

(행 15:27, 개역) 『그리하여 유다와 실라를 보내니 저희도 이 일을 말로 전하리라』

(행 15:28, 개역) 『성령과 우리는 이 요긴한 것들 외에 아무 짐도 너희에게 지우지 아니하는 것이 가한 줄 알았노니』

(행 15:29, 개역)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 할지니라 이에 스스로 삼가면 잘되리라 평안함을 원하노라 하였더라』

(행 15:30, 개역) 『저희가 작별하고 안디옥에 내려가 무리를 모은 후에 편지를 전하니』

(행 15:31, 개역) 『읽고 그 위로한 말을 기뻐하더라』

(행 15:32, 개역) 『유다와 실라도 선지자라 여러 말로 형제를 권면하여 굳게 하고』

(행 15:33, 개역) 『얼마 있다가 평안히 가라는 전송을 형제들에게 받고 자기를 보내던 사람들에게로 돌아가되』

(행 15:34, 개역) 『(없음)』

(행 15:35, 개역) 『바울과 바나바는 안디옥에서 유하여 다수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주의 말씀을 가르치며 전파하니라』


(행 15:7, 개역) 『많은 변론이 있은 후에 베드로가 일어나 말하되 형제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이 이방인들로 내 입에서 복음의 말씀을 들어 믿게 하시려고 오래 전부터 너희 가운데서 나를 택하시고』

(행 15:8, 개역) 『또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와 같이 저희에게도 성령을 주어 증거하시고』

(행 15:9, 개역) 『믿음으로 저희 마음을 깨끗이 하사 저희나 우리나 분간치 아니하셨느니라』

(행 15:10, 개역) 『그런데 지금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


사도들을 파견함이 안디옥 뿐만 아니라 복음이 증거되는 어떤 곳이든 제일 먼저 부딧히고
동시에 최종적인 마지막으로 부딧혀 갈라지는 그 마지막 순간까지도 나타나는 문제가
바로 율법의 행함과 vs 십자가의 믿음의 충돌입니다.


행함이냐 vs 믿음이냐 라는 문제는 지금도 항상 부딧히고 충돌하고 있습니다.
즉 십자가 사건 외에는 다른 사건은 없습니다. 이 충돌 사건만 벌어질 뿐입니다.


그럼 사도들의 파견은 이 충돌을 해결하고자 파견되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오히려 사도들이 파견이 되며는 충돌이 되지 않는 그 상황에서도
일부러라도 이 문제를 들고와서 부딧히도록 하는 겁니다.
더 활성화 시키는 겁니다.

불난 집에 불 끄는 소방대파견이 아니라, 불난 집에 기름 붓는 그야말로 종말때의 도둑과 같습니다. 
그 정도로 꿀릴 것 없다는 거죠. 끝을 봐 버렸기 때문입니다.


(마 10:34, 개역)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마 10:35, 개역)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마 10:36, 개역)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마 10:37, 개역)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마 10:38, 개역)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마 10:39, 개역)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그야말로 살벌한 종말입니다. 살벌하기 짝이 없는 심각한 복음입니다.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누가 꾀더냐 말이죠!


그렇기에 어차피 언젠가는 터져나올 잠재된 문제이기에

사도들이 파견이 되었으면 오히려 더욱더 그 속내가 드러나도록 터트려 주는 센스(sense = 의미, 감각)!
그래서 무조건 감사함(은혜=선물=공짜=매)이 나타나는 겁니다.


결국 성령을 입은 사도들의 파견은 매일 매일 이 사건을 터트리는 겁니다.
교회라고 봐 주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장소에서든 어떤 시간이든 항상 이 문제를 터트리는 겁니다.


즉 이방인을 취함이 문제가 된다는 것은,
이를 근거로 해서 사도들이 파견이 된다는 것은,

결국 율법의 행함이냐? 아니면 믿음으로 이방인까지 받아주시는 용서의 사랑이냐 하는 문제입니다.
율법 행함 vs 십자가 믿음


그런 와중에 사도들은 이 문제로 오히려 더욱더 충돌시키는 이유는


바로 율법을 지키는 그 외설성을 들추어내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오해를 합니다.
아 그러면 율법행함 쪽과 십자가 믿음 쪽의 충돌에서 십자가 믿음 쪽이 율법행함 쪽의 외설성을 들추어내니까 이들 십자가믿음 쪽은 외설적이지 않겠구나 오히려 율법을 더욱더 잘 지키기 때문에, 또 말씀을 잘 행하기 때문에 그렇게 들추어내는구나 라고 말입니다.


그 반대입니다. 율법 보다 더 외설적인 십자가를 자랑하기 위함입니다.
십자가를 오해한 겁니다. 십자가란 십자가 자체도 거부하는 십자가 입니다.
십자가를 치는 십자가! 왜 율법행함 쪽 다 들추어내어 본들 어차피 그들은 십자가 뒤에 또 다 숨어버립니다. 그러니 십자가를 치는 십자가 즉 무한대의 십자가사건의 반복, 무한반복만이 선물인 잉여입니다.
그래서 이 문제를 더욱더 증폭 시키는 겁니다.


얼마나 뻔뻔하고 당당한지


율법(외설적인) 보다 [더 외설적인(십자가)] 것이 있기에 일부러라도 충돌시키고

잠재된 것들을 다 들추어내서라도 부딧히게 하는 겁니다.


마치 마리아의 기도처럼 말입니다.


아니 처녀가 임신했으면 그거 해결해 달라고 해야 할텐데

오히려 기도가 얼마나 뻔뻔스러운지,
끝장을 미리 봐 버렸기 때문입니다. 희년완성 말입니다.


외설적인 율법적 행함에 아예 구멍을 뻥뻥 뚫어버리는 사랑이

이 말도 안되는 상황을 전쟁을 벌려서 판대기를 뒤짚어 업어 달라고 요청하는 겁니다.


브로큰 애로우 폭격요청처럼 말입니다. 완전히 자폭이지요.

그렇게 되면 율법 잘 지켜서 높은자가 된 사람을 확 끄집어 내려 낮은곳에 앉히고

율법도 제대로 못 지켜서 낮은 비천한 자를 확 끄집어 높이시고

주린자를 배불리시고, 배부른자를 공수 빈털터리 빈손으로 만들어 주소서 라고

참으로 뻔뻔하게 싸움붙이는 당찬 기도를 합니다. 기도를 치는 기도 입니다. 

기적을 치는 기적인 요나의 표적처럼 말입니다.


(눅 1:46, 개역) 『마리아가 가로되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눅 1:47, 개역)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눅 1:48, 개역) 『그 계집종의 비천함을 돌아 보셨음이라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

(눅 1:49, 개역) 『능하신 이가 큰 일을 내게 행하셨으니 그 이름이 거룩하시며』

(눅 1:50, 개역) 『긍휼하심이 두려워하는 자에게 대대로 이르는도다』

(눅 1:51, 개역)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눅 1:52, 개역)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눅 1:53, 개역)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를 공수로 보내셨도다』

(눅 1:54, 개역) 『그 종 이스라엘을 도우사 궁휼히 여기시고 기억하시되』

(눅 1:55, 개역) 『우리 조상에게 말씀하신 것과 같이 아브라함과 및 그 자손에게 영원히 하시리로다 하니라』


사적인 복수차원이 아니라, 전체 판대기를 봐 버렸기 때문입니다.

즉 희년을 완성해 달라는 요청입니다. 희년을 봐 버렸기 때문입니다.


아니 자신의 억울한 임신이 언제 이렇게 뒤 바뀌게 된 것일까요?

너무 큰 것을 보게 되면 자신의 사적인 문제는 문제꺼리가 되지 않게 됩니다.
아주 사소하게 되어 버리는 겁니다. 오로지 심각한 것은 이 십자가 복음 뿐입니다.


진짜 문제는 아무에게도 안 보이고 자신에게만 보인다는 겁니다.
공명(증폭기=여성성)이요 정념(짝꿍=사귐)이니 말입니다.
고난 받는 거죠. 신나는 고난 말입니다. 신나는 종말처럼.


오늘 본문 제목도 아무 짐도 지우지 말라 이렇게 적게 되면

이거 보통 문제가 되는게 아닙니다.


교회에서 당장 쫏겨나게 되는 판국이 되는 겁니다. 교회개판된다는 거죠.

사실상 지금까지 현재에도 늘 부딧히는 문제는 이 문제 하나 밖에 없습니다.


한 쪽에서는 지켜라, 다른 한 쪽에서는 짐 지우지 말라입니다.


지켜라 쪽은 그럼 누가 할려고 하겠느냐? 다들 하기 싫어하지 누가 하고 싶어서 하느냐?

그렇게 되면 교회 질서 개판이 된다 라는 겁니다.
진짜로 교회 걱정 하는 것일까요? 아님 돈 걱정 하는 것일까요?


그런데 짐 지우지 말라 는 쪽은 주님께서 하심을 보자고 합니다.

주님께서 어떻게 하시는고 하니

하고싶어서 하는 자들이 나타나고

그들이 우발적으로 우연히 나타나 또 다시 사라지면

또 다시 주께서 우연히 나타난 자를 또 사용하시는 겁니다.


누가 보면 뚝뚝 끊어져 보이기 때문에

답답해서 견딜수가 없게 되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사실상 그것보다 더 명료한 미쁘심은 없는 겁니다.


마치 뚝뚝 끊기듯

불임여성이 그 불임이라는 부정성으로 인해 약속의 가문이 끊어지고

죽은 것처럼 보이겠지만

오히려 더 든든하게 서게 되는 것이


바로 예수님의 족보를 통해서 보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여성성(빈공간)입니다.

여기에 남자들이 하는 역할은 아무것도 없음을 보여줍니다. 다 미끄러집니다.

바로 믿음으로만 된다는 뜻입니다.

죽은자 같으나 산 자 처럼 말입니다.

(고후 6:1, 개역)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고후 6:2, 개역) 『가라사대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고후 6:3, 개역) 『우리가 이 직책이 훼방을 받지 않게 하려고 무엇에든지 아무에게도 거리끼지 않게 하고』

(고후 6:4, 개역) 『오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꾼으로 자천하여 많이 견디는 것과 환난과 궁핍과 곤란과』

(고후 6:5, 개역) 『매맞음과 갇힘과 요란한 것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과』

(고후 6:6, 개역) 『깨끗함과 지식과 오래 참음과 자비함과 성령의 감화와 거짓이 없는 사랑과』

(고후 6:7, 개역)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 안에 있어 의의 병기로 좌우하고』

(고후 6:8, 개역) 『영광과 욕됨으로 말미암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말미암으며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고후 6:9, 개역)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는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고후 6:10, 개역)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히 11:8, 개역)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

(히 11:9, 개역) 『믿음으로 저가 외방에 있는 것 같이 약속하신 땅에 우거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과 야곱으로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히 11:10, 개역) 『이는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니라』

(히 11:11, 개역)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 늙어 단산하였으나 잉태하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앎이라』

(히 11:12, 개역) 『이러므로 죽은 자와 방불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에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이 생육하였느니라』

(히 11:13, 개역)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히 11:14, 개역)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

(히 11:15, 개역) 『저희가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히 11:16, 개역)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지키기를 하는 남자는 도리어 방해만 될 뿐입니다.

빈터의 그 아름다운 여백을 견딜수가 없습니다.

차라리 단절되고 짤리는 것이 낫다 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14대 13대 14대 라는 (마태복음 1장 예수님의 족보)

다윗의 누락성입니다.


바로 그것이 무너진 다윗의 성을 세우시는 주님의 일하심이 있기에

행할게 아니라 지킬게 아니라 그냥 믿으시면 된다는 겁니다.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빈손이였는데

무너진 다윗의 장막이 세워지더라 말이지요.

가문이 서게 되는 겁니다. 다시 일어나는 겁니다. 더 더 더 외설적으로 말입니다.


오히려 다윗은 자신이 원수성(하나님의 원수됨)에 놓여진 것을 고백할 뿐입니다.

이것이 회개입니다. 자기부인입니다. 할례입니다. 단절입니다.

전쟁은 자기부인인 부정성을 죄인됨을 원수됨을 고백할 뿐입니다.

이것이 희년 전쟁입니다.


나 아니요 예수님이 옳았다고 말입니다.


아무 짐도 지우지 않게 되면

그야말로 교회는 사람의 손으로 짖지 않게 되는 겁니다.
교회 조차도 우발적으로 나타났다 우발적으로 사라지는 잠행자같은 지각할 수 없는 존재처럼 말입니다.
수수께끼가 되고, 신비로운 그야말로 주님의 손에서만 움직였다 사라지는
주의 주 되심 만을 드러내는 누락되는 그 관계성으로서 말입니다.


그런데 그 꼬락서니를 때려죽어도 못 보겠다는 쪽이 바로 행함 쪽입니다.


얼마나 싸가지 없게 볼까요?


그게 바로 고난입니다. 짝꿍 땜에, 사귐 때문에 나타날수 밖에 없는 사건으로써 말입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을 위해 분주히 식사대접을 하는데 바쁜데

마리아는 싸가지 없이 예수님 다리를 배개 삼아 말씀을 듣는 그 꼬락서니를 보면

마르다가 얼마나 천불이 날까요?

더군다나 노동을 하고 있다면 그 원한과 복수성은 더 깊어지는 겁니다.


그래서 니체는 도덕보다 더 부도덕한 것이 없다고 합니다.

니체쪽은 그래서 법과 싸우는 투쟁가들이 많습니다. 전복적입니다. 전투적입니다.

푸코  들뢰즈 스피노자 데리다 다 법의 외설성 때문에 나서는 겁니다.
특히 카프카를 보면 법의 부조리성을 드러냅니다.
이들은 차이의 철학입니다.


그러나 반대쪽은 악법도 법이다 라고 소크라테스의 제자

플라톤 쪽인 바디우 즉 대부분의 철학자와, 전통주의쪽 우파들입니다.

동일성의 철학입니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아니 이것도 저것도 다 이용하는 
헤겔의 변증법적 쪽은 전지적 가카 시점인 불가능성을 표방합니다.
이것조차도 동일성의 철학입니다만,

신의 시점에서 파악하겠다고 종교적으로 빠져나가버립니다.

심각한게 뭐 있냐? 다 좋은게 좋은 것이여 라고 문제없어 문제 없어 문제없어 라고 합니다.

부정의 부정 철학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인간의 3가지? 행함노선을 비켜가십니다.

행함에서는 사귐이란 있을수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 쪽에서 일방적으로 선언한 사귐말입니다.

그래서 사귐에 놓여진 마리아를 언니 마르다는 못마땅한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에게 "예수님! 마리아, 재 좀 나무래 주세요" 라고 하니

도리어 예수님이 "왜 너는 나랑 사귐을 가질려고 하지 않니?"

"그냥 한 가지만 해라 많은 일로 분주해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얼마나 사귐적인 친밀성으로 마르다를 걱정해 주십니까?

문제는 행함에서는 그 사귐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겁니다.


너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겁니다.


목소리란 정념 즉 짝꿍을 찾는 겁니다.

편지는 항상 그 목적지에 도착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내 짝꿍! 내 짝꿍!


이리 오너라 업고나 놀자

사랑 사랑 내 사랑아

이리 보아도 내 사랑

사랑이로다 내 사랑아


예수님은 이 사랑놀이를 하시고자 자유를 주실려고 하는데

노동하는 행함론 자는 그것이 원한과 복수로만 보일 뿐입니다.
(그래서 니체는 예수님은 안 그러는데 사도바울은 기독교를 만드는 바람에 모조리 노예로 전락 시킨다고 하면서 원한과 복수를 가득 채운다고 합니다. 그의 초인 사상은 결국 예수님을 표방하고, 본인이 그 초인이 되기를 바랬습니다. 초인-되기. 나만 초인이다.)


사귐이 없으니 짝꿍 때문에 오는 그 고난도 즐겁기는커녕 싫어버린바 되는 겁니다.


오히려 고난은 사랑 때문에 필히 오게 되는 부딧힐 수밖에 없는 전쟁과 같은 겁니다.

전쟁과 같은 사랑이라는 말이 있듯이 말입니다.

전쟁 보다 신나는 사랑은 없습니다.


하늘의 뜻이 가시화 되기 때문에

땅의 속성들이 다 들통나듯이 발가벗겨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시면서 골고다 언덕으로 향하는 걸음을 걸을 때

졸졸졸 따라오면서 울고 있는 여인들에게 휙 돌아서시면서

나를 위해 울지 말고 너희 자녀를 위해 울라 라고 하신 것은

그 심각성을 저들이 모르기 때문입니다.

지금 신나는 종말의 전쟁이 벌어질 판국인데

자식 많은 여자들이, 수태치 못한자 대하듯 청년 예수를 보고 아이고 인생 참 안됐네 라고

할 입장이 못 된다는 겁니다.

그 다음은 너 차례인걸?

거꾸로 될 판국에 놓여지는 신나는 종말 전쟁에서

상황이 뒤바뀌는

수태치 못하는 여자가 복받아 자녀들이 많게 되고

많은 자식을 가진 여자는 그 자녀들이 다 죽게 된다고 하니

지금 거꾸로 보고 있는 상황에서 안타까워 한가지 팁을 알려주시는 겁니다.

(눅 23:27, 개역) 『또 백성과 및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가 따라 오는지라』

(눅 23:28, 개역) 『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눅 23:29, 개역) 『보라 날이 이르면 사람이 말하기를 수태 못하는 이와 해산하지 못한 배와 먹이지 못한 젖이 복이 있다 하리라』

(눅 23:30, 개역) 『그 때에 사람이 산들을 대하여 우리 위에 무너지라 하며 작은 산들을 대하여 우리를 덮으라 하리라』

(눅 23:31, 개역) 『푸른 나무에도 이같이 하거든 마른 나무에는 어떻게 되리요 하시니라』


부한 자는 빈손이 되고 주린자는 배부르게 되는 이 희년의 신나는 복음

은혜의 날, 기쁜날이 덮치는데,

어딜 감히 되도 않는 인간의 원한감정인 노동 곧 행함을

이 믿음의 세계에 발 딛일려고 하느냐 말이죠.

사귐이 없이 독자적인 그 행함의 노선은

지 혼자 독자적으로 놀려고 하는 심뽀인 복수심인 겁니다.

하나님과 같이 된 선악적 사고입니다. 지혼자 놀기입니다. 짝꿍없이 말이죠.


그러나 예수님은 바로 그런 원수마귀가 심은 것을

들통내고자 더더욱 구체화 하시고자

따로 반칙으로 마련해둔 은혜의 해를 이 땅에 십자가 못 박듯이

땅에 박아버렸습니다.

마귀는 이 얼룩을 제거하고자

이 응시점을 제거하고자 마귀가 발악하고 있습니다.


마리아는 신났습니다.

조금전까지만 해도 남정네는 도망가버리듯 빈터가 된 부재상황에서의 임신 때문에

끊침을 당할 판국에서 얼마나 심각했습니까?


그런데 하늘의 전쟁을 이 땅에 가시화 시켜달라고 기도합니다.

뱃속의 아기가 이 전쟁의 아기입니다. 전쟁아기


아이고 안 됐구나 마리아

너는 이제 율법에 돌삐 맞아 죽게 되었구나

약혼자도 너를 끊을려고 하는구나


천만의 말씀!! 그렇게 말하는 너희들이 나의 뱃속의 아기로 인해

끊침을 당할수 있으니 나를 위해 울지 말고 너희 자녀를 위해 울어라

나는 예수님의 족보에 들어가는 신나는 전쟁을 선포하게 되는데

무슨 말이냐?


믿음의 노선은 그야말로 전쟁선포만 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맨날 나발부는 노래-되기입니다. 희년-되기.

신나는 전쟁놀이입니다.


얼마나 그야말로 싸가지 밥맛없는 재수 옴 붙은 소리입니까?

그런데 마리아는 봐 버렸습니다.

자신만 보게된 그 세계를 봐 바렸으니

이제 딴 세계의 사람으로써 외치는 겁니다.
얼마나 신이 났을까요? 일만달란트의 세계 말입니다.


마리아 싸가지 스타일 옵 옵 옵  싸가지 스타일~~~~


짝꿍 때문에 졸지에 겁도없이 싸가지 스타일로 변하는 겁니다.


아무 짐도 지울 필요가 없는 세계가 바로 믿음 노선입니다.

그냥 봐 버렸기 때문에 가만히 있어도 그 본 세계가 가시화 될 뿐임을 통보할 뿐입니다.


그러나 행함의 노선은 보여주는 자가 없습니다.

들려주는 자가 없습니다. 너의 목소리가 안 들리는 겁니다.


너의 목소리가 들려 ~~~~ 너의 목소리가 들려 ~~~ 라고

짝궁이 외치는 소리가 있어야 하는데


짝궁이 없습니다.


그래서 몸뚱아리 자체가 공명이 되지 않습니다. 울림통으로써 증폭이 되지 않습니다.

성령의 전이 아니무이다.


그래서 강요된 선택으로써 이들은 행함의 노선을 가고 싶지 않아도 갈 수밖에 없습니다.

이들의 노선은 결국 원한과 복수심 뿐이게 되는 겁니다.


반대로 믿음의 노선은 이미 항상 죄인이기에

그 사귐이라는 용서가 베푸는 그 긍휼만을 누릴 뿐입니다.


뭘해도 용서 뿐입니다. 그러니 죄용서 받는 기쁨만을 누릴 뿐입니다.

누리는 것이 죄 용서 뿐입니다.


자꾸 딴 것을 누리는 것을 바란다는 것은 결국 행함노선인 겁니다.


죄용서 외에는 보여줄 표적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악한 세상이 기적을 요구합니다. 즉 환전상처럼 기적과 행함과 환전치기를 하는 거죠.

그러니 행함의 노선은, 무슨 짖을 해도 죄용서란 있을수 없는 겁니다.

일만달란트 탕감해 줘도 결국은 자기에게 빚진자를 때려죽어도 용서할 수가 없는

복수심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는 겁니다.

차라리 일만달란트 용서 안받았다면 자기 꼬라지라도 알텐데 말입니다.

너무 너무 어마 어마 하기에 압도당해 자기를 돌아볼수가 없기 때문에 말입니다.


그대 앞에만 서면 나는 왜 작아지는가?


괜히 커져버린 자아 때문에

자아에게 속아 넘어가버리는 겁니다.


일만달란트는 시시해져 버리고, 5천억

백데나리온은 심각해져 버리는 겁니다.  5백만원


이것이 바로 미쁘심의 원리입니다. 사귐의 원리입니다.


예수님의 일은 시시해져 버리고

자기 일은 심각해져 버린 겁니다.


사단아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뜨리는 자이다.

사람의 일이 심각해졌지, 하나님의 일은 시시해져 버렸구나


행함의 노선에 있는 자는 항상 심각한 것이 몇 번 용서하지? 몇 번 회개하지?

내가 몇 년을 충성 봉사 했는데 말야!! 이런 되도 않는 것들로 자기와 주변을 상처냅니다.


그러나 믿음의 노선은 몇 번 용서받지? 490번? 야 신난다.

십일조 얼마 받지? 일만달란트!! 야 땡잡았네!

몇 일을 먹고 마시며 죄인의 친구로써 사귀지? 천만일? 평생


몇 년 사랑하지? 2천7만3백9십7년, 평생

몇 번 죽었다 살아났다 해야 그 사랑의 높이 깊이 길이를 알지?

수명을 1백년을 잡고 2백7십3번을 죽었다 깨어났다를 반복해야

그 사랑의 깊이 높이 길이를 좀 알랑가 몰라 왜 화끈해야 하는지?

그야말로 과잉의 과잉입니다. 오바에 오바입니다. 진리는 이 과잉에서 오는 겁니다.

(엡 3:12, 개역)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하나님께 당당히 나아감을 얻느니라』

(엡 3:13, 개역) 『그러므로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를 위한 나의 여러 환난에 대하여 낙심치 말라 이는 너희의 영광이니라』

(엡 3:14, 개역) 『이러하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엡 3:15, 개역)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엡 3:16, 개역)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 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

(엡 3:17, 개역)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엡 3:18, 개역)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엡 3:19, 개역)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야 신난다. 로또 보다 더 신나는 일입니다.
5천억-7천억 정도이니 로또는 저리가라 입니다. 로또보다 과잉적인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전쟁, 희년전쟁, 십자가전쟁, 죄용서 전쟁, 피 전쟁입니다.
이 보다 더 신나는 일 있으면 나와보라 그래!!

이 보다 더 명료하고 또렷한 것 있으면 나와보라 말이죠!


행함의 노선에서 보면 아주 아주 나쁜놈이 될 수 밖에 없는 겁니다.

그래서 불의한 청지기가 빛의 아들 보다 더 지혜롭다 라고 하는 겁니다.
아니 나쁜놈이 더 지혜롭다고? 싸가지 없는 마리아처럼 더 좋은 것을 택한 겁니다.

실컷 준비해 놓고서는, 정작 종말은 준비할 수가 없는 불가능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불가능성을 불의한 청지기는 종말을 제대로 준비하거든요.

감히 건방지게 아바 아버지 라고 사귐이 종말에서는 벌어지거든요.

그것도 이방인이 말입니다. 이방인 주제에 사귐이라니?

그런데 정작 빛의 아들들은 오히려 실컷 했다고 자부했는데

종말때 만큼은 안되는 겁니다. 불가능성입니다. 못 사귀는 겁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종말의 모습으로 실족케 하시는 모습으로 오시는 겁니다.

이것을 영원회귀와 같은 거짓의 역량이라고 또는 주사위놀이인 잉여 곧 선물이라고

유머요 여성성이라고 하는 겁니다.

무조건 이유 없이 즐겁다는 겁니다.
조건적인 기쁨과 즐거움은 그것은 즐거움도 아닌 누리기가 아닌 노동일 뿐이다는 겁니다.
희년은 이유없이 즐거운 겁니다. 때를 얻든 못얻든, 먹거나 마시거나 이유 없이 범사가 감사 뿐입니다.

(살전 5:15, 개역) 『삼가 누가 누구에게든지 악으로 악을 갚지 말게 하고 오직 피차 대하든지 모든 사람을 대하든지 항상 선을 좇으라』

(살전 5:16, 개역) 『항상 기뻐하라』

(살전 5:17, 개역) 『쉬지 말고 기도하라』

(살전 5:18, 개역)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살전 5:19, 개역) 『성령을 소멸치 말며』

(살전 5:20, 개역) 『예언을 멸시치 말고』

(살전 5:21, 개역)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살전 5:22, 개역)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라』

(살전 5:23, 개역)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살전 5:24, 개역)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

(살전 5:25, 개역) 『형제들아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

(살전 5:26, 개역)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모든 형제에게 문안하라』

(살전 5:27, 개역) 『내가 주를 힘입어 너희를 명하노니 모든 형제에게 이 편지를 읽어 들리라』

(살전 5:28, 개역)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그런데 행함은 안 즐겁습니다. 조건이 맞아야 즐거워 할 것 아니냐 라고 우기는 식입니다.


아니 5천억 대박 맞아도? 조건 맞아야 즐거워 한다 굽쇼? 순 거짓말입니다.

에라이 사기꾼아!!!!


오늘 오후에 당장 사형당하는 죄수도 5천억 대박 맞으면 즐거워 합니다.
곧 죽는대도 말입니다. 이것이 거짓의 역량이라니깐요!! 거짓말같죠? 참말입니다.
바로 사랑 때문입니다. 사랑은 그야말로 말도 안되는 겁니다. 거짓의 역량입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 상의 두 강도 중에 한 사람 아닙니까?

아무 조건 없었습니다. 

(눅 23:39, 개역)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가로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눅 23:40, 개역)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가로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느냐』

(눅 23:41, 개역)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눅 23:42, 개역) 『가로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하니』

(눅 23:43, 개역)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그런데 뭐가 즐겁지 않습니까? 지구멸망이라는 종말에서는 더 과잉의 기쁨뿐입니다.


결국 즐거움이란 나를 대상으로 삼아서 오시는 사귀러 오시는 자 때문입니다.

나를 친구 삼는 자 때문에 벌어지는 현상입니다.


이 때문에 그 차이로 행함의 노선은 그런 사귐같은 것을 바라지 말라꼬

인생은 혼자 가는 것이다 라고 독자적으로 사랑도 없이 사귐도 없이 기계처럼 살 뿐입니다.


사랑은 우리에게 아무 짐도 지우지 않습니다.

사귀고 싶어만 할 뿐입니다.


그러나 행함의 노선에서는 예수님께 별명을 붙인 내용이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며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는 별명 입니다.
왜? 심각한게 아니라, 시시하기 때문입니다. 그 사귐이 전혀 와 닿지가 않는 겁니다.

와 닿기는 커녕 완전 또라이 이로구만 이라는 반응입니다. 그래서 저렇게 별명붙입니다.
대식가, 술꾼, 범죄자의 친구

예수님은 패션! 정념적인 뜨거운 열정의 순종으로 다가오시는 사귐입니다.
대충 대충 사귀는게 아닙니다. 뜨겁게 사랑하고자 모조리 다 불태울려고 오신 겁니다.

그러나 저들에게는 열정이 아니라, 꼭 반드시 무시하는 시시한 꺼리 밖에 안되는 식입니다.
그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십자가의 어리석은 지혜입니다.


(마 11:25, 개역)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마 11:26, 개역)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마 11:27, 개역)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마 11:28, 개역)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 11:29, 개역)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마 11:30, 개역)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마 11:19, 개역)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눅 7:34, 개역)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너희 말이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은 아무 조건도 없습니다. 무조건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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