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족 복음 (눅 7:17-23)


실족지 않는 예수님의 용서의 대상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까? 나로 인하여 실족지 않는 자는 복이 있도다.



(눅 7:17, 개역) 『예수께 대한 이 소문이 온 유대와 사방에 두루 퍼지니라』

(눅 7:18, 개역) 『요한의 제자들이 이 모든 일을 그에게 고하니』

(눅 7:19, 개역) 『요한이 그 제자 중 둘을 불러 주께 보내어 가로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하라 하매』

(눅 7:20, 개역) 『저희가 예수께 나아가 가로되 침례 요한이 우리를 보내어 당신께 말하기를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하더이다 하니』

(눅 7:21, 개역) 『마침 그 시에 예수께서 질병과 고통과 및 악귀 들린 자를 많이 고치시며 또 많은 소경을 보게 하신지라』

(눅 7:22, 개역)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가서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눅 7:23, 개역)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치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선지자의 노선에 세례요한 자신도 놓여짐을 당한바 된 겁니다.

즉 인간 자력으로 할 수 있는 문제란 이 세상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래서 묻고 또 묻는 겁니다.


모조리 수동적인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알려주시고자 하시는 주님의 열정(순종;죽기까지)이 없다면 아무것도 아닌게 됩니다.

이런 아무것도 아닌 우리를 자기의 것이라고, [없음]을 가지고서 주님은 일하십니다.

(빌 2:5, 개역)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빌 2:6, 개역)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빌 2:7, 개역)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빌 2:8, 개역)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즉 철저한 계획에 따른 겁니다.

말씀에 의한 것이다 라는 겁니다.

예정된 대로 말입니다.


이것을 라이프니츠는 경계라는 표현을 쓴 겁니다. 즉 예정이지요. 우발적입니다.


세례요한의 제자들은 묻고 또 묻습니다.

먼저 세례요한의 지시대로 묻습니다.

오실 그이가 당신입니까? 아니면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까? 라고 말입니다.


그 이유는 나인성의 과부의 죽은 아들을 살려낸 일로 인한 것이 아니라

큰 선지자가 일어났다. 하나님이 백성을 다시 돌아보셨다 라는 일로 인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소문이 세례요한의 귀에 까지 들어가게 되니 요한은 제자들을 급히 파견하여서

예수님에게 직접 물어보라고 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때마침 그 시간에 병든자 악귀 들린자 소경인자 등등 많이 있어서 그들을 다 고치십니다.


그리고서는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눅 7:22, 개역)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가서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눅 7:23, 개역)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치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문제는 22절 까지는 우리가 다들 수용할 수 있는 이해력이 있습니다.

그런데 왜 23절이 반드시 언급되어야 하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어머니랑 이런 대화를 했습니다.


실로암 망대 무너진 사건, 빌라도에 의해 죽임당한 유대인의 피가 제물에 묻게 된 사건

그런데 예수님은 정작 그 다음 너 차례이다.

나도 빌라도 손에 죽으러 왔다 라고 하니까

어머니께서 무슨 말도 못하게 만드는 상황이다고 하시는 겁니다.


믄 말도 못하게 한다

아예 입도 띨수 조차 없게 만드심 이라는 겁니다.


완전 실족케 한다는 겁니다. 완전 만족이 아니라, 그 정반대인 도리어 넘어진다는 겁니다.

오히려 예수님에게 피하는 것이 피할바위가 아니요,
피난처가 아닌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는 걸림돌 말입니다.


또 한번은 어머니께서 구약을 읽으시고서는

갑자기 웃으시면서 하나님은 이랬다 저랬다.

이래도 망하게 하고 저래도 망하게 하고

말씀 지켜도 소용없고 안지켜도 소용없고


지금 중일의 관계처럼

과거에 일본이 중국칠려고 한반도 뺨 때리면서 올라가고

중국이 일본 칠려고 내려오면서 한반도 뺨 때리면서 내려가고

이런 것처럼 이스라엘의 역사가 그렇다는 겁니다.


그래서 갑자기 이런 생각이 나서 어머니께 이런말 했습니다.


어머니 광야에서 주님께서 참으로 뻔뻔스럽게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신발 두 컬레 필요했더냐? 옷 두벌이 필요했더냐?

그 정도로 내가 보호하지 않았느냐?


그런데 어머니 이 말은 하나 마나 한 소리입니다.

대부분 이렇게 이해 합니다.

그 정도로 보호 했기에 신발이 딸지 않을 정도로 극진히 보살폈고

옷 두벌이 필요가 없을 정도로 너희를 안전하게

아주 험악하지 않게, 험한길 다 피해서 옷이 떨어지지 않아

옷 두 벌 조차도 필요가 없을 정도로 보살폈고 구원했다 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다르게 생각이 갑자기 드는 겁니다.

그 생각을 말하니까 어무이가 웃으시면서 하긴 아무리 부자라도 한끼 밥을 먹지

두 끼를 먹지 못한다 라고 말입니다.


즉 누가 신발을 두 컬레를 신고 다니는 사람이 어디있겠습니까?

누가 양복을 한 벌만 입지 두벌 동시에 입고서 지내겠습니까?


즉 하나 마나 한 소리를 하신 겁니다.

우리가 괜히 좋은 의미로 덧 붙이니까 그래서 그런거지

사실은 이런 의미가 아닌가 했던 겁니다.


나도 빌라도 손에 죽으러 왔다는 말은

인간들이 말귀를 못 알아먹는 하나 마나 한 소리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믄 말을 못하는 겁니다. 이 자체가 단절성이라는 겁니다.

하나 마나 한 소리는 단절 그 자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 전체가 진짜로 하나 마나 한 소리를 하는

이 단절성으로만 가득차있는 아니 단절 뿐인말인고 하니


오로지 귀 있는 자만 듣도록 눈 있는 자만 보도록 하시겠다는 취지입니다.

이 말도 말이 안되죠

귀 있다면 다 듣는 겁니다. 물론 귀가 병든 사람만 빼고요

또 눈이 있다면 다 보도록 되어 있습니다. 물론 눈이 병든 사람만 빼고요


그럼 하나 마나 한 소리를 왜 할까요?


바로 이것이 중요합니다. 

[물론] ~ [빼고요] 라고 단서를 단 그 예외 조항이라는

이 부분이 중요한 겁니다. 즉 버리는 이 부분을 잉여라고 합니다. 빼기. 빠뜨리기. 미끄러뜨리기.


찌끄래기라는 거죠.

이 예외 조항으로써만 성경 전체가 장식이 되어 있다는 겁니다.


우리는 요한의 제자들이 묻는 
오실 그이가 당신입니까?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까?

라고 묻는 그 질문의 답에


우리도 원하는 답변이 바로


소경이 보고, 벙어리가 말을 하며, 앉은뱅이가 일어나고, 문둥병자가 깨끗하게 되며,

귀머거리가 듣게 되며, 죽은자가 다시 살아나며, 가난한자에게 복음이 증거케 되면


세례요한이 그 답변을 들은 것이 될 것이다 라고 

우리 또한 답변이 들은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단서 곧 예외 조항이 하나 더 붙습니다.

사실 소경, 벙어리, 앉은뱅이, 문둥병자, 귀머거리, 죽은자, 가난한자

이 자체가 이미 예외 조항입니다. 법 외의 존재이다는 겁니다.

법 밖의 존재인 겁니다.


그런데 거기에다가 더 더 더 밖의 예외 조항이 하나 더 첨가가 되는데, 마치 이중성처럼,

바로 나로 인하여 실족치 않는 자는 복이 있도다 라는 단서를 꼭 붙여버리는 겁니다.


앞의 것으로만으로도 충분한 겁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 기준이 오히려 예외 조항인


나로 인하여 실족치 않는자가 복이 있도다 라는 그 단서가

바로 참조항인냥, 정식 조항인냥,


그것을 기준으로, 즉 경계로 해서

저런 분리적인 상황으로 그 혜택을 받는다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누가 질문한 내용에 덧 붙여서 이 경계와 분리 개념을 물어봤던 겁니다.

http://www.crossvillage.org/board/index.php?doc=program/board.php&bo_table=board02&wr_id=2736

       


빈공간, 장소, 사건..
이름 : 김풍호  (IP:203.241.147.32)


2013-08-13 09:51:14 조회 : 227   


안녕하세요.. 목사님..


오랜만에  질문드립니다.


1. 철학에서 다루는 "빈공간" 은 어떠한 공간을 이야기하는 것인가요?


(원자론자들을 공부하다가 이같은 논쟁을 벌였다고 해서, 처음엔 철학자들 정말 할일없는 사람이다 라고 생각을 했었는데요, 곰곰히 생각해보니까 생각해볼 가치가 있어보이더군요.)


2. 장소라는 개념이 "어떤일이 일어나거나 이루어지는 곳" 이라고 하면,이것은 인간이 붙잡아 둘수 있는 곳이 되는  것인가요?


3. 이러한 장소개념이 사건화가 된다는 것을 "십자가 사건"을 예로 설명을 부탁드립니다.(전도서 시작강의에서 언급하셨던데요)


4. 그리스 철학에서 말하는 "아이온"에 끊김이 있다면 끊긴 흔적이 "사건화"된 자리로 볼수 있을지요?



RE] 이근호 (IP:119.♡.93.55) 13-08-13 13:17 


한꺼번에 말씀드리겠습니다. 공간이 먼저 있고 그 안에서 운동이 일어난다는 생각이 뉴턴의 과학적 사고방식입니다. 반면에 운동이 일어나야 비로소 공간도 거기서 나오고 시간도 거기서 나온다는 것이 라이프니츠의 생각입니다. 그런데 둘 다 인간 중심의 사고체계입니다. 즉 공간이든 시간이든 인간이  살려내는데 유용한 지혜이어야 진리가 진리답다는 의식에서 나온 사고체계입니다. 뉴턴의 공간론은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 원리에 의해서 꺄어지고 말았습니다. 즉 공간이란 에너지와 질량과 더불어 조성되며 더구나 그것을 바라보는 관찰자의 속도에 의해서 달리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쌍둥이 중, 하나는 지구에 머물러 있고 다른 하나는 우주 공간으로 빛의 속도로 여행한다면 나중에 같이 만나게 되면 지구에 있는 형제는 파싹 늙은이가 되어버리는 겁니다. 이는 공간만이 다로 3차원으로 현실을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까지 포함시켜 4차원을 생각하는 세상 안에 우리 인간이 살고 있는 겁니다. 라이프니츠의 공간관은 오늘날 양자역학으로 그 취지가 이어집니다. 관찰자가 사물의 운동을 주시하는 그 관찰행위 자체가 대상의 출몰에 영향을 준다는 불확정성 원리와 통하는 이야기입니다. 같은 공간안에서 같이 움직이기에 내가 보는 그 순간의 공간은 그때에만 한정되고 국한되는 공간관입니다. 공간은 텅빈 장소가 아니라 사건이 유발시켰기에 그 결과로 발생된 터가 됩니다. 이 라이프니츠의 공간관을 가지고 예수님의 말씀을 해석하는데 유용할 수가 있습니다만 십자가 사건 앞에서 인간의 이러한 공간관마저 무용지물이 됩니다. 왜냐하면 십자가 사건은 인간으로 하여금 공간과 시간관으로 예수님에게 다가서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자체가 지금 살아있다는 이 사실을 성령님을 통해서 느끼게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카이로스' 곧 계시의 때요 사건입니다.


RE] 김풍호 (IP:203.♡.147.32) 13-08-13 16:25 


답변을 보고 있자니, 현기증이 날 지경입니다. 대충 이해되는데요, "불확정성 원리"에 대해서 보충설명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답변에서 언급된 "카이로스" 와 가끔씩 언급하시는 "영적인식론"과의 차이점이 있다면요?


RE] 김풍호 (IP:203.♡.147.32) 13-08-14 08:57 


과학에 불확정성원리가 있다는 것 자체가 새롭네요.. 

답변 감사합니다.


RE] 이근호 (IP:119.♡.93.55) 13-08-14 09:34 


사람의 눈으로 볼 수 있는 대상이 극히 작을 때는 인간의 관찰하고자 하는 의지가 관찰 대상에 반영이 된다는 말입니다. 작은 것을 다룰 때는 큰 사물을 다룰 때와는 달리 그 변화에 미리 정확하게 예측할 수가 없습니다. 위치와 속도 두 다를 같이 확정지울 수 없습니다. 이로 인하여 이 우주의 역사가 단일 역사가 아니라 확률상 여러 역사 중의 하나일 수밖에 없다는 그 모호성을 수용해야 한다는 원리입니다. 확률을 통해서 미래를 대처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 우주 안에서 인간을 염두에 둔 관찰이론입니다. 

영적 인식론이란 인간쪽에서 표현한 것이고 성경에서 그냥 카이로스(때)라고 일방적으로 선언될 뿐입니다.


RE] 김대식 (IP:58.♡.88.58) 13-08-14 12:35 


1. 그렇다면 빈공간으로서의 [거짓의 역량]은 무슨 의미입니까? 

들뢰즈나 니체가 말하는 거짓의 역량의 의미가 뭔지 

그리고 성경적인 의미에서는 어떻게 보는지 

십자가가 십자가사건 자체로만 정체된 것이 아니라 

십자가 사건을 거부하는 십자가의 사건으로써 계속적인 무한반복인 의미이다면 

빈공간을 거부하는 빈공간, 잉여를 배제하는 잉여에 대해 설명 부탁합니다. 


2. 분리와 경계의 차이점이 뭔지요. 


거룩(분리)를 거부하는 십자가 사랑(경계)인가요? 


왜 이런 차이가 있는지? 


마치 악한세대가 요구하는 기적을 거부하는 요나의 표적처럼 인지?마치 부정을 부정하는 부정처럼?


RE] 이근호 (IP:119.♡.93.55) 13-08-14 13:01 


1,  들뢰즈나 니체의 '거짓의 역량'이란 '있음'을 옹호하고 '있음'에 충실하기 위해 '없음'을 논리적으로 도입시킨 개념입니다. 어쨌든 사물이나 인간이나 각자 자신의 신체가 있는게 분명하니, 그 신체와 가치를 지키는 것이 그들 철학자들의 윤리관입니다. 그렇게 해서 '신'의 존재 도입이 없이도 인간들만으로 살 만한 세상, 의미가 넘치는 세상 철학을 구성하고자 한 것입니다. 인간보다 신을 우선시하는 데에 대한 반발인데 이런 반발은 충분히 이유있는 반발입니다. 왜냐하면 신을 도입하는 신학들이나 철학들이 신의 뜻을 빙자해서 결국 자신의 생존욕망의 정당화를 꾀하고 왔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니체나 들뢰즈는 이런 짓거리가 역겨운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를 보세요. 자기 존재만을 돋보이기 위한 몸부림들을 말입니다. 신의 이름을 빙자해서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폭력이 난무하고 전쟁이 일어나는 것을 볼 때에 그런 윤리는 이제 한계에 이르렀다는 것이 니체나 들뢰즈 계열에 주장하는 겁니다. 그들이 주장하는 빈 공간이 결국 모든 인류가 타인을 지배하는 지배욕에서 벗어나 공동의 겸손의 장으로서 활용하자는 이야기입니다. 십자가 사건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언약은 구체적 인물인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한 선취적 취지에서  천국과 지옥을 미리 이 지상에 비쳐주기 위한 근거로서 십자가입니다. 있음과 없음이 천국과 지옥으로 나뉘어져서 만물이 다루어집니다. 


2. 분리란 결과를 말하고 경계란 그 원인을 고수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경계를 통해 분리가 일어납니다. 십자가 피는 그래서 늘 고정적으로 영원토록 심판의 기준입니다.


RE] 김대식 (IP:58.♡.88.58) 13-08-15 21:39 


답변 감사합니다. 

목사님 답변을 통해서 뭔말인가 했던 막힌 부분이 오히려 잘 이해가 되었습니다. 


경계를 먼저 언급해준 부분이 큰 힌트가 되었습니다. 

분리를 먼저 순서상으로 이야기 하길래 무지 헷갈렸는데 

결국 인간이 일자를 찾아내겠다는 심뽀인 것 같습니다. 

아니 일자가 [진리를 찾는 인간 만들기]로 인간 구원에 안달이 난, 

성전이 있기에 신이 창조된다는 식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성전(인간의 몸=공터)만 있다면 

신은 영원불멸로써 인간에게 창조될테니 말이죠. 


푸코는 이 분리를 비관계로서의 관계로, 

앉은뱅이가 일어나고 벙어리가 말을 하게 된다는 희년완성의 그 원인인 일자(거짓의 역능)을 주장하더군요. 

비존재의 존재화로, 


여기에 들뢰즈는 덧붙여, 경계 곧 존재(일자)는 비존재화(베드로 대신 세 번 울어주는 닭-되기, 앉은뱅이-되기, 벙어리-되기), 

관계로써 비관계인 [-되기]를 한다고 주장하네요. 


[인자-되기]처럼,

(존재라는 말 대신 주체를 넣듯. 비주체 또는 주체.)



=====



결국 인간의 철학은 인간을 너무 너무 사랑하는 인간 구원을 위한 신학이요 철학입니다.

즉 몸 철학입니다. 


여기에 사도바울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몸, 주의 주 되신 몸을 들이댑니다. 몸 신학입니다.


이 두 몸의 충돌, 이 두 몸에서 나오는 두 소욕의 충돌이


바로 예수님께서 예외 단서를 다신 것처럼

그 기준인 경계로 인해 쭉 쭉 쭉 갈라지는 겁니다.


바로 나로 인하여 실족치 않는 자는 복이 있도다 라는 겁니다.

이 경계로 인해 나오는 분리 곧 거룩들이

앉은뱅이가 거룩을 입으니까 일어나게 되고

소경이 거룩을 입으니까 보게 되며

벙어리가 거룩을 입으니까 말하게 되며

죽은자가 거룩을 입으니까 살아나게 되는 등의 일들이 분리작업으로써 벌어지는 겁니다.


결국 희년은 이어주는 잇기 또는 개방이 아니라

바로 성령의 일은 단절 그 자체라는 겁니다.

단절 뿐인가요? 단절의 단절이니

바로 이 예외조항이 졸지에 기준이 되어

그 기준을 경계로 해서 갈라지는 차단의 차단들이 벌어지는 것이

바로 예수 나는 실족케 하는 복음을 들고 왔다는 것이 바로

세례요한의 질문에 대한 최종적인 답변인 겁니다.


나를 실족케 하지 못하는 복음은 가짜이다는 겁니다.

실족케, 단절케 하는 분이

오실 그이 이다는 겁니다.

나를 제대로 지옥 보내고, 나를 제대로 멸망시키며, 나를 제대로 심판하지 못하는 복음은

가짜 복음이다는 겁니다. 이것이 단절입니다. 심판입니다.


즉 바로 예언의 말씀이 증거하는 그 분이다는 겁니다.


아니 성령이 있다메? 있다면 "척 보면 압니다"처럼

척 보고 알면 되지

왜 이렇게 번거롭게 물어보고 답변을 말하고

그냥 답변이 아닌

하나 마나 한 답변인 한번 꼬아서는,

아니 베베 꼬은 답변을 무슨 수로 알아 들을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 자체가 이미 단절성 그 자체인데 말입니다.


결국 성령 또는 희년완성 또는 기쁜소식인 복음은

개방의 잇기가 아니다는 것을 전제로 함을 아주 아주 강조하는

역설적인 표현인 겁니다.


다들 희년을 기다린 자에게 이 보다 더 확실한 개방이 어디있겠습니까?

그런데 왜 툭 하고 걸려 넘어뜨리는 말씀으로

계류 즉 걸러내기를 하시는 겁니까?


요즘 제가 모기 쫏아내는 퇴치제 땜에

스프레이 구멍에 막히지 않도록 계피가루를 걸러내는데

이중 삼중으로 중첩시켜서 걸러내고 있습니다.


무한 겹겹으로 걸러내는 작업이 바로 희년이다는 겁니다. 분리작업

그 기준이 바로 복음이 실족케 하는 식이다는 겁니다. 계류 기술입니다. 검문검색.
창조적 역행(돌물-되기,계보)이요, 거짓의 역능이요, 영원회귀이며, 기관 없는 신체인
곧 해체 단절입니다.


그럼 당연히 이런 말이 저절로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 마나 한 소리처럼


주여 그럼 누가 구원 받겠습니까?


늘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사람들이 많이 몰려 올 때 마다

주님은 오히려 초치듯이 사람들을 다 내어 쫏는 식을 말을 하니


주여 그럼 누가 구원 얻겠습니까?



(마 19:25, 개역) 『제자들이 듣고 심히 놀라 가로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막 10:26, 개역) 『제자들이 심히 놀라 서로 말하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 하니』

(눅 18:26, 개역) 『듣는 자들이 가로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나이까』


아니 문을 열어 개방을 해서 사람들이 취사선택을 하든 말든

일단 문을 열어야 하는데


문을 꽁꽁 닫아버리면 누가 구원 얻냐 말이죠.


이런 와중에 들어온 놈 조차도 다 쫏아내는 말만 하고 있으니

하나 마나 한 소리를 왜 하냐 라는 겁니다.


그런데 제가 이 부분을 어머니께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사람들은 구원을 자꾸 건져내는 것만 보는 겁니다.


물에 빠졌다면 그 물에서 건져 내는 것이 구원이다 라고 보는 식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정반대로 행하시는 겁니다. 믿음입니다. 행함이 아니라 말입니다.

여기에 우리 인간은 영 못 미더워 하는 겁니다.

오히려 가장 미쁘심을 제대로 보여줬는데도 말입니다.

저도 이 부분이 항상 걸려 넘어지는 식입니다.

도통 주님의 마음을 알 길이 없는 수수께끼일 뿐입니다.
주님께서 미리 다 알려줘도, 지식으로 학문으로 알려주셔도

막상 사건이 닥치면 휭 날라가 버립니다. 도루묵이지요.


어떻게 설명을 했는고 하니

구원이 인간이 원하는 구원은 구원도 아니요 오히려 탐심입니다. 우상입니다.

성전이나 신의 조각을 만든 후에 신을 창조하는 겁니다.
그러니 구원도 우리가 원하는 신을 만들 듯이 구원도 그런식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걸림돌 그 자체입니다. 단절입니다.

항상 마귀 곧 눈에 보이지도 않는 마귀를 반드시 끌어들입니다.

이 마귀를 통해서 우리의 저런 사고방식, 

곧 구원받겠다는 그 자체가 우상임을 보여주는 그 상황을 

마귀들의 활동을 보여줌으로써 

그 차이 곧 행함과 믿음의 차이의 극대화를 통해서 

왜 행함이 아닌 믿음으로만, 단절로만 일하시는가를 보여주는 겁니다.


주님은 우리 구원에 관심이 없습니다.

오로지 마귀를 키우는데 관심이 있습니다.

마귀를 키워야 그 마귀의 강퍅함을 통해서 영광받습니다.


나도 빌라도 손에 죽으러 왔다 라는 말은 빌라도를 통해서만 영광받겠다는 겁니다.


그러니 하나 마나 한 소리, 즉 우리에게는 안 보인다는 자체가

우리 인간은 배제요 누락 그 자체이다는 겁니다.
보는 눈, 들을 귀, 냄새 맡는 코, 만지는 손, 뛰는 다리, 다 소용없습니다.

그러니 빠져도 한참을 빠져할, 누락되고 배제당할 판국인 그야말로 단절입니다.


어머니!! 구원은 우리가 물에 빠졌을 때 물에서 우리를 건짐으로써 구원하는게 아니라

반대로 물을 뺌으로써 우리는 그야말로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가만히 있었는데 구원받는 겁니다.

(출 14:13, 개역)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또 다시는 영원히 보지 못하리라』

(출 14:14, 개역)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여기에 반드시 동원이 되는 것이 애굽왕과 애굽군사입니다.

이들이 나서줘야 구원이 단절이다는 것을

복음이 실족케 함이 있음으로써 기쁜소식 희년완성이다는 겁니다.

(출 14:4, 개역) 『내가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한즉 바로가 그들의 뒤를 따르리니 내가 그와 그 온 군대를 인하여 영광을 얻어 애굽 사람으로 나를 여호와인 줄 알게 하리라 하시매 무리가 그대로 행하니라』

(출 14:17, 개역) 『내가 애굽 사람들의 마음을 강퍅케 할 것인즉 그들이 그 뒤를 따라 들어갈 것이라 내가 바로와 그 모든 군대와 그 병거와 마병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리니』

(출 14:18, 개역) 『내가 바로와 그 병거와 마병으로 인하여 영광을 얻을 때에야 애굽 사람들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하시더니』


주님은 마귀를 살살 키웁니다.

미끼를 툭 던져 놓고

마귀가 반드시 따라잡도록 하는 겁니다.


멀리 떨어져 있으면 미끼를 물지 않습니다.

아주 가차이 두어야 먹음직 보암직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게 보여야

응시 되어야 그 미끼를 먹을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주님은 아직 멀었어 좀더 가까이 와

오란 말이야 빨리 빨리 어서 오라카이


바짝 달라 붙어야 물 빼는 효과가 극대화 되는 겁니다.

결국 이스라엘에게 막힌 길을 열어주는 다리(끊김을 이어주는)를 열어주는게 아니라,

그것은 우리가 바라는 기적의 방식이니 인간의 행함인 믿음이기에 가짜입니다.

정작 끊어진 다리(철교) 자체를 없애버림으로써 이을 필요가 전혀 없는,
그래서 문제꺼리 자체가 사라지는 겁니다. 다리가 있으니 이을려고 하지요.

다리 자체가 없어져 보세요 이을것도 없는 겁니다.

단절의 단절 곧 성전을 헐라 내가 3일만에 다시 세우겠다 하십니다.

(요 2:19,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가만히 있어도 물이 빠지듯 물이 저절로 하수구 구멍으로 빠지듯

애굽왕과 애굽군사를 조져버리는 것이 바로 구원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반드시 숨어있는 악마세력이 드러나야 하는 것입니다.

마귀가 없는데 무슨 구원입니까?


결국 율법 조차도 이 상황을 자꾸 재현 반복하는 겁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이 반복하는 것도 바로 이겁니다.

이런 애굽의 사고방식을 자꾸 끊어내고 물을 하수구에 빼듯이

숨어있는 애굽의 본성들과의 차이성을 드러내는 겁니다.

그러니 원망할만한 곳만 골라서 가는 겁니다.

분리 곧 이 유월절 어린양의 피를 기준으로 한 경계로 인해

자꾸 자꾸 분리 차단 단절 누락

자꾸 자꾸 걸러내는 거름망으로 걸러내고 가려내는 겁니다.

가만히 있기만 하면 빠져나오는 겁니다.


마귀가 심어 놓은것들이 자꾸 거름망에 걸려 빠져나오는 겁니다.

이것이 광야라는 교회가 격는 일입니다.

복음은 그래서 실족케 하는 일로만 일관하는 겁니다.

경계의 기준이 되는 유월절 어린양의 피 곧 십자가의 피를 기준으로 해서

심판때에 종말때에 걸러내는 겁니다.

우리는 걸려짐을 당할 뿐인 겁니다.


그래서 남은 찌끄래기
곧 소경 앉은뱅이 벙어리 귀머거리 문둥병자 죽은자 가난한자 고아 과부 나그네 등등

오히려 이들에게만 희년이 완성이 되는 겁니다. 기쁜소식입니다.


즉 상대적으로 안소경, 건강한자, 안벙어리, 안문둥병자. 살아남은자. 부요한자. 등등

이들에게는 복음이야 말로 제대로된 실족케 하는 심판의 소식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그 경계의 기준으로써

세례요한의 질문에 답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이 기쁜 소식을,
이 신나는 종말을,

이 실족케 하는 복음을

이 단절케 하는 희년을

즐겁게 누리도록 배려해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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