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마을 2014 겨울 수련회를 다음과 같이 개최합니다.

 

일 시: 2014년 1월 12일(일) ~ 14일(화)

장 소: 신협 연수원 (대전시 유성구 동서대로 49)

주 제: 창세기 다시 보기

강 사: 이근호 목사

회 비: 8만원(유치, 초등 5만원, 유아는 회비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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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자세한 내용은 추후에 공지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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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련회 참가를 원하시는 분들은 아래 지역 책임자께 1월 3일까지 신청해 주시면 됩니다.

 

서울 경기: 이미아 선생 (010-9998-4171)

부산 경남: 박병규 목사 (010-2323-3571)

대구 경북: 이상규 집사 (010-2685-8211)

광주 전라: 김을수 집사 (010-2627-7800)

대전 충청: 김종인 권사 (010-8808-7111)

울산 지역: 김병만 집사 (010-4379-1471)

그외 지역: 서경수 목사 (010-2962-74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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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시: 2014년 1월 12일(일) ~ 14일(화)

장 소: 신협 연수원 (대전시 유성구 동서대로 49)

주 제: 창세기 다시 보기

강 사: 이근호 목사

회 비: 8만원(유치, 초등 5만원, 유아는 회비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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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지역 책임자는 1월 4일까지 참자가 명단을 알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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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 울  수 련 회  시 간 표

2014. 1.12~14

 

 

12(일)

13(월)

1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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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식사
8:00 ~ 9:00

아침 식사
8:00 ~ 9:00

휴식
9:00 ~ 10:00

9강
9:00 ~ 9:50

3강
10:00 ~ 1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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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강
11:00 ~ 11:50

점심 식사
12:00 ~ 13:00

자유시간
13:00 ~ 16:00

5강
16:00 ~ 16:50

접수 및 안내 
17:00 ~ 18:00

6강
17:00 ~ 17:50

저녁 식사
18:00 ~ 19:00

저녁 식사
18:00 ~ 19:00

휴식
19:00 ~20:00

휴식
19:00 ~ 20:00

1강
20:00 ~ 20:50

7강
20:00 ~ 20:50

2강
21:00 ~ 21:50

8강
21:00 ~ 2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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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유시간
        2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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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유시간
        2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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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마을 겨울 수련회 장소 (신협연수원) 오시는길

 

신협연수원 : 지번주소 :  대전 유성구 덕명동 33-2 번지

                 도로명 주소 : 대전 유성구 덕명동 동서대로 49

                 전화번호 :  042-820-5114

 
 
 
 
   대전고속버스터미널
   동부시외버스터미널
 한밭대학교행 : 102번(연수원 하차)
 
60분소요
   대전역
 한밭대학교행 : 102번(연수원 하차)
 
60분소요
   서대전역 
      => 서대전사거리
           (도보10분)
 612번 ▶ 태평오거리 LG전자앞 ▶ 103번(연수원 하차)
 한밭대학교행 : 103번(연수원 하차)
 
60분소요
   유성고속버스터미널
 한밭대학교행 : 장대사거리(104번 탑승, 연수원 하차)
20분소요
   유성시외버스터미널
 한밭대학교행 : 102, 113번(연수원 하차)
 
20분소요
   서부시외버스터미널
 한밭대학교행 : 113번
60분소요
★ 출발전 버스노선 재확인 요망 (http://www.daejeonbus.or.kr)
 
 
 [지하철]
   대전역
 반석역행 : 현충원역 하차(3번 출구)
  ※ 현충원역에서 한밭대행 버스(11, 102, 103, 104, 113)환승 후 연수원하차
60분소요
 
 
   대전고속버스터미널
   동부시외버스터미널
 40분 소요
   대 전 역
 50분 소요
   서대전역
 40분 소요
   유성고속버스터미널
   유성시외버스터미널
 15분 소요
   유성고속버스터미널
 40분 소요
 
★ 요금계산은 미터제이며 과도한 요금에 주의요망

** 겨울 수련회 교재 **

 창세기 세척하기 (2014 겨울수련회 교재)

“땅과 거기에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가운데에 사는 자들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시 24:1).”

Ⅰ 서론

입자물리학에서 각 입자의 질량은 정지 상태의 질량 더하기 운동의 가속화에 의해 제공되는 여분의 것으로 구성된다. 하지만 정지 상태의 전자의 질량은 0으로, 그것의 질량은 오직 가속화에 의해 발생하는 나머지 것으로만 보태진다(힉스 매커니즘). 이는 곧 자신이 자신의 초과를 만들어냄으로써만 어떤 기만적인 실체를 유발하는 무(無)적인 현상이다.

과학에서 말하는 현실이란 이처럼 입자의 경우처럼 실체를 기본으로 하여 ‘있음’이라는 의미 부여를 기본으로 하여 시작된다. 결국 ‘있음’이란 우리 인간의 눈에 뭔가 들어오는 것에 국한된다. 광활한 우주 탐색은 망원경 렌즈 속으로 뭔가 눈에 띄게 들어오기 때문에 해석과 설명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과학적인 탐색을 해도 창조를 설명할 수 없는데 그 이유는, 창조 이전의 개념을 이미 창조 된 상황에서 통용되는 언어로 표현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창조되었음’은 ‘지금도 계속 창조되고 있음’으로 변형시켜 설명해야 한다. 그래야만 무엇을 핵심으로 하여 계속 창조되고 있는지를 살펴볼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창조의 매개’가 중요하다.

창세기 1장과 2장에서 시간을 매개로 창조가 이루어지는 모습을 보여주지만 그것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형상’으로 그 중심성을 보여준다, 창조란 곧 ‘하나님의 표현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과학이 아무리 발전해도 세상의 모든 ‘있음’에 ‘예수 그리스도’가 관여해서 창조되었다는 증거는 발견되지 않는데, 그 이유는 과학이란 곧 ‘인간의 자기표현, 자기 창조작업’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표현방식은 반대가 되는데 이는 ‘하나님 형상’ 자체가 품고 있는 비밀 때문이다. ‘있음’은 ‘없음’에서 나왔다는 점과 그 경유를 증명하려면 ‘있음’에서 왜 ‘없음’으로 나아가야 하는지 그 이유가 밝혀져야 한다. 하지만 자신의 ‘있음’을 스스로 부정하고 싶지 않은 인간들은 이런 요구에 할 말이 없다. 즉 왜 나는 없어지고 사라져야 마땅한지, 그리고 이 점이 왜 외면될 수 없는 실제상황인지를 모른다. 하나님의 파괴 의지가 창조 속에 이미 담겨 있었다. 이점을 인간들은 끄집어내고 싶지가 않다. 그 어떤 과학자도 스스로 자신을 죽이고 파괴하고자 하는 무기와 기술 개발에 몰입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만큼 하나님과 그 창조비밀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다는 말이다.

“또 주여 태초에 주께서 땅의 기초를 두셨으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 바라 그것들은 멸망할 것이나 오직 주는 영존할 것이요 그것들은 다 옷과 같이 낡아지리니(히 1:10-11)”

‘무(無)로부터의 창조’란 유(有)의 입장을 정당화해주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유가 도로 무가 되어야만 그 창조행위를 정당화해주는데 그 이유는 유를 위한 창조가 아니라 무 자체를 증거하기 위해 유가 있어야 한다는 점을 보여주는 창조이기 때문이다.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마 13:12).” 있음이 없음으로 전환되는 과정을 통해서 숨겨진 ‘있음의 근거’가 새로운 ‘있음’의 등장으로 밝혀진다는 말이다.

이런 식의 하나님의 대자연 다루심에 대해서 인간들은 강하게 부정하게 되는데 이는 인간들이 이미 악마의 앞잡이로서 하나님이 만든 세상을 ‘있음’ 위주로 해석하면서 기만해 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로써 하나님과 악마는 창조 때부터 전쟁상태에 돌입되어 있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지만 이 형상은 곧 누군가와 ‘투쟁하시는 형상’이다.

Ⅱ. 본론

1. 투쟁하시는 ‘하나님의 형상’

투쟁의 이유는 이미 예정된 내용대로며 그 예정된 내용이 창조 행위 속에 담기게 되고 피조물들은 여기에 대한 흔적과 자국들이다. 즉 하나님의 창조행위의 취지는 물질적 토대 없이 보여 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담이 ‘흙’이라는 물질로 환원되는 것도(창 3:19) 그 과정에서 예정된 창조 취지를 드러내기 위함이다.

아담이 일시에 흙으로 변모된 것이 아니라 뭔가를 상대로 처절한 투쟁을 거치면서 결국 패배를 만끽하고 흙이 되어 갔다. 아담은 무엇을 무서워했으며 무엇과 싸웠으며 오늘날 우리는 무엇과 싸우는가? 그것은 바로 시간을 통해서 빼앗겼다고 여긴 그 무엇이다. 곧 빛이요 생명이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요 1:4-5).”

모든 사람은 이 잃어버린 빛과 생명을 시간을 통해서 되찾고자 하는데 바로 그 방식이 신의 계시에 대한 해석과 거기에 맞춘 행위다. 현재의 과거마저 새롭게 창조한다. 자신을 선도자로 간주하는 것이다. 과거를 수정하는 행위는 곧 미래의 설계로 이어진다. 아담은 아들을 낳고 ‘여호와로 말미암아 생명을 얻었다’는 뜻으로 이름을 ‘가인’이라고 지었다.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창 4:1).”

전에는 불가능했던 일이 물리적인 실체(육신)의 등장을 계기로 새롭게 미래를 꾸려나갈 선도자로 자신의 현재 입지가 마련되었다고 여기는 것이다. 드디어 죽음에서 생명을 끄집어 낼 희망이 보인다고 자부하고 싶은 것이다.

이러한 인간들의 투쟁의식은 하나님과의 투쟁으로 전환된다. 가인은 아벨을 죽이고 하나님은 죽은 아벨을 대신하여 가인에게 복수하신다. 바로 이러한 투쟁의 현장에서 하나님은 ‘투쟁하시는 형상’으로 나타나시는 것이다.

2. 예정된 자유

인간이 자연 결정론 안에 ‘갇혀 있다’는 개념은 잘못된 것이다. 우리가 현실의 일부라는 사실을 고려해 볼 때, 마음껏, 원 없이, 심지어 하나님께서 따먹지 말라고 당부한 그 선악과조차 주저 없이 따먹은 이 무한한 자유성은 그로 인하여 자꾸만 새로운 자연 결정론을 유발하는 요인이 되기 때문이다.

마치 자신이 갇힐 교도소를 본인이 만들어놓고 “나는 갇혀있다. 나는 자유를 잃었어!”라고 외치면서 주접을 떨고는 다시 그 교도소를 헐어버리고 자신을 더욱 비참하고 굴욕적인 모습으로 드러낼 교도소를 새로 또 지어보는 그 무한한 자유성에 비유할 수가 있다.

‘신이 일방적으로 정해놓은 예정론에 우리 인간은 꼼짝없이 갇혀있다’고 엄살을 떨고서는 그것마저 과감하게 무시하듯이 행동하는 자유함을 보이고서, 곧장 자신이 가진 자유성에 맞상대가 될 정도의 품격 있는 예정론을 다시 요청하는 식으로 신에게 배틀battle(시비)을 거는 식의 예정론은 있을 수 없다.

예정론의 초점은 ‘사물의 자연스러운 운용’을 방해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과정을 주도한다는 점이다. 우리가 진정으로 그리고 철저하게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는 예정된 자유이어야 한다. 이것은 우리가 진정 자유롭다는 것을 알려면 우리 자신이 그 내용을 채워서는 아니 된다는 말이다. 우리가 자유롭다는 것을 확인해주기 위해 그 내용과 본질을 우리 자신이 채운다면 그야말로 예정된 자유가 아니라 속박을 의식하는 거짓 자유다.

마치 고속도로를 주행 중인 두 대의 자동차가 시비가 붙어 갈 데까지 가보자고 고집을 피웠더니 결국 둘 다 본인들이 가려고 했던 목적지가 아닌 엉뚱한 데로 차를 몰고 간 경우와 같다. 창조물 안에 담겨 있는 ‘예정된 자유’는 투쟁해야 될 자유인데, 이 자유의 주변에서 “너는 신의 예정론에 속박되어 있기에 너에게 어떤 선택이나 자유는 없어. 천국과 지옥도 네가 결정해서 갈 수 있는 데가 아니야.”라는 시비성 발언을 유혹처럼 늘 듣는 가운데 진행된다.

그러나 이 유혹을 물리쳐야 하는데 그 이유는 우리의 자유를 증명할 수 있는 어떠한 내용도 우리가 채워 넣어서는 아니 되기 때문이다. ‘예정된 자유’는 항상 소급해서 이해되는데 그 투입되는 근거는 오직 예수님의 자유로운 행위뿐이다.

따라서 예정론은 창세기 처음부터 개입되어 있지만 그 의미는 피조물의 ‘자기 자유에 대한 왜곡된 이해’와 병행해서 드러나게 되어 있다. 인간은 자신의 결정과 선택 결과를 놓고 갈등과 절망과 고민에 빠져야 한다. 그리고 기존의 ‘자유’에 대한 확정된 이해를 수정해야만 한다. 그 와중에 ‘자유→예정된 자유’로 이해가 바뀌면서 ‘예정된 자유’의 근거를 자기 쪽에서 그 내용을 채울 수 없다는 사실을 반복해서 자각하게 된다. 이로써 ‘인간의 자유문제’가 아니라 ‘인간으로부터의 해방문제’와 결부되고 이는 절대적 생명의 창조적 흐름에 완전히 잠겨 산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인간에게 주어진 ‘예정된 자유’는 그 어떤 세력에도 방해받지 않는 절대적 능력을 발휘하는 자유이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8-39).”

3. 투쟁적 화해

화해란, 행동한 것을 따지겠다는 것이 아니라 최종적 평가로써 모든 비판과 정죄를 종식시키겠다는 것이다. 이는 매개자의 자격으로 취하는 조치다. 하나님은 선악과를 통해서 인간을 타인으로 여기시는 동시에 스스로 매개자로 등장하신다. 그리고 선악과 따먹는 것을 금지하신다. 이로써 인간은 주변에 보이는 현실이 자신을 위한 현실이 아니라 너무 일찍 오신 메시아나 너무 늦게 오신 메시아를 위한 장(場)임을 알리고자 하신다.

심판의 하나님으로 이해되는 인간에게는 메시아께서 너무 일찍 일하시는 셈이 되고 구원을 고대하는 처지에서 볼 때에 메시아는 너무 늦게 일하시는 바가 되게 하신다. 이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매개자이신 하나님의 영역을 침범치 못하게 하기 위함이다. 금지를 딛고 넘어설 그 영역에 대해서 인간은 배제되어 있는 처지임을 인정해야만 했다. 그리고 이 화해성은 영원히 반복된다.

하지만 금지의 등장은 인간으로 하여금 욕망을 자극하는 계기가 된다. ‘건널 수 없다’는 말인지 아니면 ‘건널 수는 있어도 그곳에 들어갈 수는 없다’는 것인지 명확치 않은 상황으로 인하여 새로운 유혹거리가 발생된 것이다.

타인이 건네 줄 명령으로 인해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위치를 분명하게 확정할 수 없게 되어 버린 것이다. 자기 쪽에서 아는 자아와 금지된 저편 영역에서 바라보는 자아 사이에 분열이 생겨버린 것이다. 악마는 거짓말로 인간으로 하여금 금지 명령에 대해 다른 가능성을 열어준다. 악마가 노리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을 위반하는데 있었다.

창세기 초반부터 인간의 역사는 위반으로부터 시작되면서 금지의 영역으로 건너가지도 못할뿐더러 생명나무 과실마저 이제는 접근 금지 항목에 추가된다. 그리고 현실의 판은 하나님에 의해 모든 게 인간에게 극히 낯선 취지에 의해서 재편된다. 그 판은 바로 ‘하나님과 악마’의 투쟁의 판이다.

하나님과 인간의 화해는 종식되고 하나님이 약속으로 제시한 ‘여자의 후손=생명의 후손’ 사이의 화해의 장이 악마와의 투쟁의 모습으로 지상에 깔린다. 여기서 인간은 홀로 존재하지 않고 ‘타인과- 쌍을- 이룬-존재’로 살게 된다. ‘나를 위하여’ ‘나에 대하여’ 나타나는 대상이라고 오인되는 가운데 항상 등장하는 타인으로 인하여 투쟁과 갈등이 일어나고 이는 약속의 파기로 이어지고 하나님마저 죽음 사건에 의해 함몰된다. 바로 이점을 겨냥해서 심판이 주어지는데 이 발생된 심판이 도리어 화해의 근거가 된다.

하나님의 ‘투쟁적 화해’를 위한 ‘투쟁적 형상’이 개입되는 현장이 늘 이러하다. 나의 것으로 마저 환원되지 않는 어떤 것을 타자의 얼굴로 등장시켜서 타자의 시선에 비친 나의 모습을 괴로워하는 타인의 고통과 고난 속에서 발견케 하신다. 내 안에 있는 나는 진정 내가 아니었다. 나로 인해 고통 받는 그 타인 속에 나의 원형이 드러나는데 이로써 성도는 ‘이미 십자가 못박인 자’가 된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갈 2:20)”

이 십자가 안에서만 하나님과 화해가 된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롬 3:25)”

4. 창세기 내용 전개

(1)에덴동산에서부터 노아 시절까지

창세기 3장에 보면, 범죄의 주체는 인간이고 약속을 유지시키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그러니 이 약속은 과거로 되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흔적을 지상에 긁고 새기는 식으로 인간 나라와 대결 구조를 유지한다. 창세기 4장에서 가인의 제사는 하나님이 거부하시는데 그 이유는, 창세기 3장의 범죄 흔적을 지우는 식의 제사를 하나님께서 원치 않으시기 때문이다. 도리어 하나님이 원하시는 제사는, 인간에 실려서 후대로 고스란히 전달되는 범죄성이 재현되는 현장이다.

제사행위가 나름대로 거룩해 보여도 죄악은 언제 어디서도 죄악이다. 이 죄악으로 인해 ‘원수관계가 될 두 주체가 역사에 등장해야만 한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희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창세기 3:15).”

이 약속에 의하면 앞으로의 인류 역사는 두 패로 나눠지고 이 두 패 사이는 원수지간이 되며 동시에 치고 침을 당하는 결과가 빚어진다는 것이다. 한쪽은 여자의 후손, 다른 한쪽은 뱀의 후손이다. 제 3의 지역은 없다. 반드시 서로는 적을 동반하기 마련이다. 이는 자신의 본 모습은 적의 등장과 더불어 확인된다는 것이다. 이 간격은 항상 유지되고 인간의 힘으로 그 틈을 메울 길은 없다. 에덴 시절에서 땅의 시절로 들어오면서 땅은 전쟁터가 된다.

선악을 아는 지식을 가진 이를 계속해서 추방시키고 침입을 저지하는 성질이 가동되는 생명나무의 성질 아래서 땅은 저주를 뿜어내면서 모든 것을 죽인다. 이로써 세상은 뭐든지 ‘죽음 속’에서 움직인다. 그 안에서 여자의 후손은 생명을 생산한다. 즉 제대로 ‘산 자’가 되는 것이다. 여자의 이름이 생명(하와)으로 바뀐 것은 하나님의 약속에 기초한 것이다. 바로 이 산 자와 선악 지식을 고수하는 자 간의 전투가 역사 안에서 개시되었다. 선악 지식으로는 생명이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창세기 6장에서 드디어 ‘죽음을 보지 않은 이’ 에녹이 나타난다. 아담으로부터 줄곧 내려오는 ‘죽음’의 연쇄 고리 안에서 발생된 생명이다. 이 에녹에게 생명을 부여한 동행하신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그 하나님이 노아 홍수 심판으로 노골적 의지를 드러내신다. ‘싹 쓸어버리겠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아 가족은 살아남았는데 이는 에녹의 취지가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고 있다는 증거다. 그것이 하나님의 언약을 드러내기 위한 조치이다. 이 약속에 담겨서 생명은 유일하게 발생된다. 그래서 앞으로의 역사는 두 가지 전쟁의 양상으로 전개된다. 하나님께서 때마다 내려주신 약속 안에 들어오는 자와 그 약속에서 배제된 자의 전쟁이다. 이 비-약속민들은 무엇에 근거해서 살아가느냐는 약속과 대비되면서 알려진다.

노아의 아들이 셋인데 그 중 하나가 저주의 대상이 된다. 함의 후손이 저주를 받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약속을 무시했기 때문이다. 덮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성을 인정치 않고 아버지를 흉봤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두 형제는 하나님의 은혜성을 덮는 행위로 고백했다. 이것이 생명이 지상에 떨어지는 모습이다. 함의 족속들은 자꾸만 인간의 자력과 공로를 염두에 둔다. 그래서 세워진 것이 바벨탑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탑의 정신을 인정하지 않으신다. 참으로 창대케 될 민족은 바벨탑 민족이 아니라 따로 있었다. 그것이 아브라함 민족이다.

(2)아브라함에서 요셉까지

아브라함의 전쟁은 조카 롯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롯을 잡아간 무리를 아브라함이 공격한다(창 14장). 그런데 아브라함이 승리한 배후에는 하나님이 계셨다. 아브라함에게 승리가 오게 된 이유는 하나님의 약속 때문으로 ‘누구든지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 축복하지만 만약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저주가 내려진다’는 그 약속이 현실화 된 것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가나안 땅을 주기로 약속했지만 거기에는 이미 기존의 민족들이 버티고 있었다. 그러나 그 누구도 감히 아브라함을 대적할 수 없었던 것은 아브라함은 복의 근원으로 소문이 났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전쟁에서 큰 방패와 같은 분이다(창 15:1).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통해서 신의 나라를 건설하려고 하신다. 하나님은 그 신의 나라가 이 땅의 악인들을 물리치고 난 연후에 이루어질 거라고 약속하셨다.

그것은 아브라함 자손이 4대만에 지금의 땅에 돌아와서 한 나라를 이룰 때이다. 여기서 아브라함은 원수가 누군지를 알게 된다. 이 땅의 이방민족들이며 함의 자손들이다. 이들이 적이 되는 이유는 전에 노아에게 내린 하나님의 저주를 실현시키기 위해서이다. “이에 가로되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창 9:25).” 그래서 아브라함 후손이 계속해서 적을 물리칠 수 있으려면 하나님의 약속을 담을 수 있는 인물이어야 한다.

즉 사람의 공로에 의한 인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인물이어야 한다. 그 사람이 바로 이삭이다.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창 22:17).” 그리고 이 이삭과 혼인하게 되는 리브가라는 여인도 사실은 원수의 성문을 열고 정복이 가능한 자식을 배태할 사명을 지닌다. “리브가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우리 누이여 너는 천만인의 어미가 될지어다 네 씨로 그 원수의 성문을 얻게 할지어다(창 24:60).”

이처럼 아브라함의 씨들은 전쟁에서 적을 무찌를 수 있는 요소를 구비한 사람이다. 그 요소란, 그들 안의 하나님이 적과 싸워 반드시 이긴다는 약속이 담겨져 있기 때문이다. 이삭 이후에도 전쟁에서 승리할 인물이 나온다. 그 사람은 야곱이다. 야곱은 그의 쌍둥이 형인 에서와의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 처음에 자기 힘을 의지했고 자신의 속임수까지 동원했다. 그러나 그런 인간의 노력과 방법은 하나님의 싸움이 아니었다. 결국 그의 잘못된 싸움으로 말미암아 자기를 찾아온 하나님마저 이기려고 덤벼든 꼴이 되고 말았다.

즉 하나님의 원수가 자신이 되고 만 것이다. 하나님은 야곱을 축복하여 살려주신다. 여기서 야곱이 알게 된 것은, 하나님의 전쟁은 야곱이 사용한 힘에 의존한 방법이 아니라 축복을 통한 방법인 것을 발견하게 된다(창 32장). 축복을 통해서 야곱은 하나님을 이기고 사람마저 이긴 자로 달라진다. 이 축복은 하나님 자신이 사다리를 타고 이 지상에까지 낮아진 그 희생의 겸손으로 인해 주어진 축복이다. 야곱을 축복하기 위해 야곱에게 몸소 오신 그분을 야곱은 몰라 뵙고 싸움의 대상으로 여겼던 것은 평소에 자기 힘을 의존해서 살았던 본래의 성품 때문이다.

그 성품마저 수용하면서 하나님은 얍복 강가에서 야곱을 용서한다. 그리고 이름이 이스라엘로 바꾸신다. 이 이스라엘이 알게 된 정신으로 함의 족속을 정복한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요셉이다. 요셉은 자기가 뭔가 특별한 사명을 입게 될 것임을 꿈을 통해서 알게 된다. 그런데 그 꿈의 성취를 위하여 자기가 아버지와 형제들의 희생물이 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성실했고 유혹까지 물리치면서 바르게 살았지만 날이 갈수록 자기 신세는 초라해지고 주위 사람들은 복을 받게 된다. 하나님이 왜 자기를 그런 쪽으로 사용하는지 이유를 알지 못했다.

나중에 알게 되지만 요셉의 그런 희생적인 운명은 야곱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축복 때문이었다. 형제들의 주가 된다는 것은 그 전에 오히려 형제들을 위해 희생물이 된다는 의미이다. 섬기는 자가 높은 자가 된다는 사실을 야곱은 이미 알고 있었다. “나를 모든 환난에서 건지신 사자께서 이 아이에게 복을 주시오며 이들로 내 이름과 내 조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의 이름으로 칭하게 하시오며 이들로 세상에서 번식되게 하시기를 원하나이다 요셉이 그 아비가 우수를 에브라임의 머리에 얹은 것을 보고 기뻐 아니하여 아비의 손을 들어 에브라임의 머리에서 므낫세의 머리로 옮기고자 하여 그 아비에게 이르되 아버지여 그리 마옵소서 이는 장자니 우수를 그 머리에 얹으소서 아비가 허락지 아니하여 가로되 나도 안다 내 아들아 나도 안다 그도 한 족속이 되며 그도 크게 되려니와 그 아우가 그보다 큰 자가 되고 그 자손이 여러 민족을 이루리라(창 48:16-19).”

손을 어긋나게 손자에게 축복하는 그 야곱의 마음속에는 지금까지 자신에게 바로 계시하시고 축복하신 하나님의 본심이 다 들어 있다. 그리고 그 본심으로 인해 하나님은 이 지상에 신의 나라, 거룩한 나라를 건설하시려는 것이다. 요셉이 총리대신이 된 것은 결국 야곱에게 축복하신 하나님의 깊은 뜻이었다. 부모와 다른 형제들을 살리는 방식이 기존의 야곱적이 아니라 이스라엘적인 것이다. 바로 이 방식에 의해 새로운 국가가 가나안 땅에 등장될 것이다. 그리고 그 나라가 등장되면 전에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가나안 땅의 지배가 4대만에 달성될 것이다.

하나님은 뱀의 후손을 용서하지 않는다. 그 전쟁에서 반드시 이긴다고 약속하신 바 있다. 그 약속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으로 계시하면서 줄 곧 언급하신다. 문제는 승리의 방법이다. 그 방법은 희생이다. 희생 안에 있어야 적이 보인다. 희생은총의 의미를 모르고 오직 자기 공로에 근거해서 살아가는 선악체제의 세력을 물리칠 수 있는 것이다.

Ⅲ. 결론

인간은 애초부터 문제 유발자였다. 자기만의 자리를 장만하겠다는 식으로 나왔다. 에덴동산에 같이 있었던 생명나무는 그것을 용납하지 아니했다. 생명과 결별되면서 인간은 죽음을 잔뜩 짊어지고 지상으로 내어쫓긴다. 이로써 인생이란 ‘죽음의 굳어짐’이 보이는 진행과정에 해당된다. 청춘 때는 말랑말랑한 죽음(피하고자 마음먹으면 얼마든지 피할 수 있을 것 같은 만만한 죽음)이 노년에는 딱딱하게 굳은 모습으로 비쳐 나온다.

약속의 완성, 즉 신약에 들어와서 거론되는 약속 용어에는 ‘하나님의 형상’과 십자가 피언약과 의와 화해와 예정하심과 구원과 천국과 이스라엘 등이 구약을 배경으로 등장하는데 그 기반이 모두 창세기에 들어있었다. 창조란 구원을 통해서 그 내막이 드러나고 완성된다. 이 와중에 전쟁이 있었다. 그 전쟁의 방식은 제물의 쪼개짐이다. 택함 받은 자들은 아브라함이 드린 제물처럼 쪼개져서 그 절개면을 공개하고 그 가운데로 하나님이 지나가셔야 한다. “해가 져서 어두울 때에 연기 나는 화로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더라(창 15:17).”

태초부터 모든 창조에 말씀이 개입하셨다. 그리고 스스로 원리의 변화를 주시면서 찾아오셨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요 1:1-3).” 이 말씀이 성사되는 방향으로 창조 작업을 펼치신 것이다. 창세기는 여기에 대한 이야기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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