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수의 성문을 여는 자여 복되도다


꿈을 꿨다 

장가가는 꿈이다. 처음 꾸는 꿈이다.

그런데 안면인식장애가 있는 것이 꿈 그대로 표출되어서인지
결혼식 행진 직전까지 신부의 얼굴을 모른다.

그러다 깼다.

하도 웃겨서 어머니랑 식사때 대화를 했다.

결혼은 원수의 성문을 여는 성경의 의미를 나누면서
정작 인간의 결혼은 의미가 없음을 나누었다.

나를 원수로 지적해 주는 자식(후손)과 여자

뜬금없이 부활 논쟁에서 사두개인은 부활이 있다면
형수에게 장가가 다 죽은 사람이 천국에서 누구의 아내인가?
(시형제 결혼법)
개판 오분전인 부활은 있을 수 없다.
그런 부활이라면 어떻게 거룩할수 있나? 더럽기 짝이 없을 텐데!
그래서 부활이 없다고 한다.

바리새인은 그래도 부활이 있어야
자신이 믿은 노동과 행함의 결과물로써 영혼불멸이 되며
종교 장사가 되지 않는가?
그래서 부활이 있다고 한다.


여기에 예수님은 사람과 사람의 결혼에는 관심이 없고

누가 원수의 성문을 여는가? 로 부활을 언급하신다.

다윗이 다윗의 자손에게 주인이시여 라고 했다고 한다.
어떻게 할배가 손주에게 주인님이라고 하느냐
어떻게 할배가 손주에게 주여 저를 구원해 주소서 저를 불쌍히 여겨 주소서 라고 할수 있으냐?
라고 물으니

답을 하는 자가 없다.

여자와 자녀는(자손) 나의 원수의 문을 뚜껑여는 자이다.

다말이 그랬다.

그래서 유다는 요셉의 뺑뺑이 시험에 다말에게서 낳은 자녀를 바친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듯이 말이다.

그래서 믿음의 조상이 되었고, 요셉의 시험에서 패쓰 하고 심판을 통과할 수 있었다.

믿음이란 행함의 노선이 나의 원수됨을 두껑 열지 못하기에
피로써 희생제물 됨으로써 나의 원수됨을 위해 자손이 죽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삼 일이라는 간격을 좁히는게 아니라 오히려 더 넓혀버리는 3의 간격을 생산할 줄 아는
죽음으로 단절을 만들어내는 믿음이다.

의인은 믿음으로 살기 때문이다.
반드시 믿음노선은 행함의 노선과 한세트를 이루면서
마귀보란듯이 펼쳐지는 것이 믿음이다.

즉 결혼의 의미는 정작 예수님(믿음)과의 만남이다.
마귀보란듯이 시기심을 창출하는 결혼이다.

피와 만나기 위해 원수로 들통나야 한다는 것이다.
원수로 들통나지 않고서는 피와 결혼할 수가 없다.
전혀 마귀가 시기하지도 않는다.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죄용서 받기 위해

의인이 아닌 죄인된 원수로써 피와 합해야 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

더 건방지게 싸가지 없이 뻔뻔스럽게 말해서
예수님은 원수와 결혼 할려고 오셨다.

창세전에 이것 때문에 천사들의 반란이 일어났지 않았는가?
타락한 천사들이 시기하지 않는 결혼이라면 그 결혼 가짜다.

원수의 성문(예루살렘)의 여는 여자(여자의 후손)여 복 되도다.

(창 24:55, 개역) 『리브가의 오라비와 그 어미가 가로되 소녀로 며칠을 적어도 열흘을 우리와 함께 있게 하라 그 후에 그가 갈 것이니라』

(창 24:56, 개역) 『그 사람이 그들에게 이르되 나를 만류치 마소서 여호와께서 내게 형통한 길을 주셨으니 나를 보내어 내 주인에게로 돌아가게 하소서』

(창 24:57, 개역) 『그들이 가로되 우리가 소녀를 불러 그에게 물으리라 하고』

(창 24:58, 개역) 『리브가를 불러 그에게 이르되 네가 이 사람과 함께 가려느냐 그가 대답하되 가겠나이다』

(창 24:59, 개역) 『그들이 그 누이 리브가와 그의 유모와 아브라함의 종과 종자들을 보내며』

(창 24:60, 개역) 『리브가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우리 누이여 너는 천만인의 어미가 될지어다 네 씨로 그 원수의 성문을 얻게 할지어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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