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으면 죽으리라]와 아름다움을 넘어서는 숭고(거룩)

 

 

여인의 아름다움은 아름다움에 있지 않고

아름다움을 넘어서는 숭고함이 있다.

 

곧 거룩이다.

 

아직 미혼이라면 아름다운 여자 보다 숭고한 여인(진리)을 바래야 한다.

[아무것도 아닌 것을 원해야]하듯이 말이다.

 

도덕이라는 규범 보다

그런 편안함 보다

 

더욱더 불쾌하고 무례하고 거북스러운 것이

아름다움을 넘어서는 숭고인 거룩이다.

 

오히려 아름다움 보다 더더욱 아름다움의 과잉성이 숭고함으로써

남까지 다 살린다.

 

죽은자까지 다시 살릴수 있는 것은 아름다움이 아니다.

 

그러나 불쾌한 숭고함은 죽은자까지 살린다.

 

에스더의 아름다움을 넘어서는 숭고는

죽은자 까지 살리는 거룩이다.

 

그래서 그녀는 죽으면 죽으리라 라는 불쾌함으로 일관한다.

 

왜 저렇게 어리석을까?

 

자신의 아름다움으로 충분히 편안하게 살고도 남지 않는가?

 

 

그런데 왕비가 된 이유가

단순한 아름다움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

 

이 죽은 자들을 살리기 위한 이유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죽으면 죽으리라(기능, 당위) 이다.

하나님 보다 더한게 나타났네 라는 이방인 며느리 룻의 당위다.

 

순간적인 아름다움으로써 외로움의 결핍을 해소하는 꾸미기는

시아버지 유다의 아내 자리를 차지할수 있을진 모르지만

 

며느리 다말은 죽은 유다를 살려야 하는 숭고함에 불(저주) 속에 들어가야만 했다.

 

죽으면 죽으리라

 

왜일까?

 

이유는 불 속에 들어간 다말이 죽는자가 아니라

불 바깥에서 다말을 십자가의 저주 속으로 집어넣는 시아버지가

오히려 죽음의 심판 속에 있기 때문이다.

 

자기를 건질 생각 보다

시아버지를 불 속에서 끄집어 내는 것이 목적이다.

 

아무리 봐도 불 속에 화형당할자는 며느리인데

다말은 유다가 지옥 갈 짖을 하고 있기에 건져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마땅히 죽으면 죽으리라 인 것이다.
반드시 살리겠다는 당위다. 제발 좀 지옥가지 마세요

 

누가 누구를 걱정해야 할 판국인가?

 

제비뽑기를 하면서 왜 너는 너 자신을 건져 구원해야지

남을 건져 구원할려고 하니? 너 자신이나 좀 구원하렴 남 구원해야할 입장이 못 된단다

 

구원자야 너 자신이나 구원하렴!! 구원자 라며??? 메시아 라며???(아 서울 사투리 불편, 대구 표준어 구원자 라메? 메시아 라메?)

 

죽으면 죽으리라 는

 

바로 저들에게 모두 불쾌함으로 작용한다

 

미를 넘어서는 숭고는

 

그 미가 숭고로 이르지 못하기에

 

거룩에 이르지 못하는 자를 그 어리석음에서 벗어나도록 하는 지혜이다.

 

십자가의 지혜는 이렇게 저들의 어리석음을 획득하는 것이다.

편안하고 안정감이 있는 아름다움을 쥐고 있을 뿐이지

그것이 남의 허물까지 덮지 못한다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왜 선민으로 세웠는가?

 

사랑 때문이다.

 

왜 율법을 주었는가?

아름다운 미를 허락한 것일까?

 

사랑 때문이다. 아름다운 미를 넘어서라는 사랑(당위, 원수도 사랑) 때문.

 

사랑은 불편하기 짝이없는 숭고한 거룩이다.
원수도 사랑하기 때문이다.
불편한 이웃까지 사랑해야 사랑이다. 아주 당연한 당위인 기능이다. 십자가다.

 

사랑보다 곧 죽으면 죽으리라 보다 즉 십자가의 피 보다

 

무례하기 짝이 없는

동시에 나 보다 옳은 지혜는 없다.

 

(27:35, 개역) 저희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후에 그 옷을 제비 뽑아 나누고

(27:36, 개역) 거기 앉아 지키더라

(27:37, 개역) 그 머리 위에 이는 유대인의 왕 예수라 쓴 죄패를 붙였더라

(27:38, 개역) 이 때에 예수와 함께 강도 둘이 십자가에 못 박히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27:39, 개역)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27:40, 개역) 가로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며

(27:41, 개역)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함께 희롱하여 가로되

(27:42, 개역)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저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

(27:43, 개역) 저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저를 기뻐하시면 이제 구원하실지라 제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도다 하며

(27:44, 개역)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욕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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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 되고 공감이 되고 가엽게 보이고 하는 것은 전혀 전복이 일어나지 않음 즉 공부가 안된다

(비싼 향유를 깨뜨려 허비한 여인을

예수님의 제자 전체가 분노를 하면서 호통을 친다.

가난한자를 위하지 않는다고??

과연 가엽게 여기는 마음이였을까??

도덕은 존재적일 뿐 당위(거룩)은 없다.

존재 보다 먼저 있었던 당위를 도출 획득 할 줄 모른다)

 

자기부인이 없다.

 

도저히 비공감, 소통이 되지 않는 사건 십자가사건은

불편하기 짝이 없는 거리끼는 걸림돌이다.

 

뭔가 탁 하고 걸려 넘어뜨리는 실족케 하는 사건이다.

 

그 부정함이 몰입이 되고 응시가 되는 것은 기존의 틀을 비틀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불편하고 무례하고 불가능하기에 숭고라고 한다.

 

이 숭고가 벌리는 사건이 바로 거룩이다.

 

거룩이란 전혀 거룩하지 않는 비거룩이 거룩보다 더 거룩적인

(주여 맞습니다. 저 개 멍멍이 자식 맞습니다. 그러나 개도 주인의 밥상에서 떨어진 잉여물을 먹고 살지 않습니까?

우와!! 이만한 믿음을 만나본적이 없구나

왜 유대인은 이런 믿음이 없지??????)

 

거룩의 과잉성을 보여준다.

 

납득 이해가 되고 가능해 보이고 가엾어 보이는 것 보다

더더욱 납득의 과잉성 정당성을 충분히 확보하기 때문이다.

 

결국 할 말 없게 만드는 것이 (머리에 숯불을 얻은 짖만 골라하는 성령)

 

(12:20, 개역)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불가능성의 과잉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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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과 독수리의 차이(니체 비유)

 

독수리에게는 양은 양식일 뿐이고 감사할 뿐이다.

 

양의 입장에서는 독수리(외계인)은 그저 거부대상일 뿐이다.

양은 우리는 저들에게서 메뚜기일 뿐이다고 불평(원망)하나

독수리는 저들은 우리의 밥이다 라고 한다. 밥을 미워하는 독수리는 없다. 양을 사랑한다.

 

(13:32, 개역)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그 탐지한 땅을 악평하여 가로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탐지한 땅은 그 거민을 삼키는 땅이요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13:33, 개역) 거기서 또 네피림 후손 아낙 자손 대장부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의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

(14:1, 개역) 온 회중이 소리를 높여 부르짖으며 밤새도록 백성이 곡하였더라

(14:2, 개역) 이스라엘 자손이 다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며 온 회중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

(14:3, 개역) 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망하게 하려 하는고 우리 처자가 사로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

(14:4, 개역) 이에 서로 말하되 우리가 한 장관을 세우고 애굽으로 돌아가자 하매

(14:5, 개역) 모세와 아론이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 앞에서 엎드린지라

(14:6, 개역) 그 땅을 탐지한 자 중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여분네의 아들 갈렙이 그 옷을 찢고

(14:7, 개역)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 일러 가로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탐지한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

(14:8, 개역)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14:9, 개역) 오직 여호와를 거역하지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 밥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 말라 하나

(14:10, 개역) 온 회중이 그들을 돌로 치려하는 동시에 여호와의 영광이 회막에서 이스라엘 모든 자손에게 나타나시니라

(14:11, 개역)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 백성이 어느 때까지 나를 멸시하겠느냐 내가 그들 중에 모든 이적을 행한 것도 생각하지 아니하고 어느 때까지 나를 믿지 않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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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 완료가 소급해서 본다면

 

가인 보다 악한 놈은 없다. 살인자다.

에서도 사울왕도 가룟유다도 마찬가지이다.

 

그렇다고 베드로 다윗 욥 사도바울이 다른게 단 하나라도 있는가?

없다

 

있다면 그들은 할 말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 조차도 함구 한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미래완료의 시점이 와 주지 않는다면

현재의 내 존재시점에서는 다 도덕적일 뿐이다.

내 존재를 기준으로 한 도덕적 기준은

누가 더 나쁜놈인가를 본다.

 

문제는 미래완료가 소급해서 보여주는 시각이다.

 

그 시선에서는 가인은 아벨을 죽인자가 아니라

예수님을 죽인 것이다.

 

왜냐하면 자신이 제사드린 그 하나님을 죽인 것이지

아벨을 죽인 것이 아니다.

아벨을 죽인 죄책감을 가진다고 해서 그 살인의지는 취소되지 않는다.

그래서 가인은 평생을 제사드린다(행위).

 

차라리 제사드릴것이 아니라

제물(믿음)이 되어야 마땅하다.

 

제사 드리겠다는 것보다 악마적인게 어디있는가?

제물 되면 되겠네? 그건 더 악마적이다.

제물이 누구인가?만을 보면 된다.

 

우리는 아무리 제사 드려도 안 생긴다.

생명도 죄씻음도 안 생겨요 ~~~~~

 

제물이 내 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성령을 입은 예수님을 봐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가 완성한 자신만의 성령을 우리에게 부으신다.

 

빨랑 죽으라고(기능) ~~~~~~~~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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