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를 향한 예수님(천국)의 이유없는 공격(침노) (14: 1-11)

 


(
14:1, 개역) 안식일에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한 두령의 집에 떡 잡수시러 들어가시니 저희가 엿보고 있더라

(14:2, 개역) 주의 앞에 고창병 든 한 사람이 있는지라

(14:3,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율법사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일러 가라사대 안식일에 병 고쳐 주는 것이 합당하냐 아니하냐

(14:4, 개역) 저희가 잠잠하거늘 예수께서 그 사람을 데려다가 고쳐 보내시고

(14:5, 개역) 또 저희에게 이르시되 너희 중에 누가 그 아들이나 소나 우물에 빠졌으면 안식일에라도 곧 끌어내지 않겠느냐 하시니

(14:6, 개역) 저희가 이에 대하여 대답지 못하니라

(14:7, 개역) 청함을 받은 사람들의 상좌 택함을 보시고 저희에게 비유로 말씀하여 가라사대

(14:8, 개역) 네가 누구에게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았을 때에 상좌에 앉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보다 더 높은 사람이 청함을 받은 경우에

(14:9, 개역) 너와 저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이 사람에게 자리를 내어 주라 하리니 그 때에 네가 부끄러워 말석으로 가게 되리라

(14:10, 개역) 청함을 받았을 때에 차라리 가서 말석에 앉으라 그러면 너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벗이여 올라 앉으라 하리니 그 때에야 함께 앉은 모든 사람 앞에 영광이 있으리라

(14:11, 개역)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인간이 말씀을 지키게 되면 골치 아픈 것이

말씀을 지키면 성령의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졸지에 존재가 되어버립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성령 곧 영의 말씀이기 때문에

상대적인 육을 거쳐오라는 겁니다.

 

육을 거쳐오지 못하면 그 상대적인 성령과 육의 차이를 모르게 됩니다.

차이 곧 기능을 모르게 됩니다. 먼저 있었던 섬김을 나의 존재의 행위 때문에 못 봅니다.

 

육은 뭘 해도 자신의 존재가치를 부각시킵니다.

왜 그것이 성령의 공격 대상인지를 육을 거치지 못하면 모르는 겁니다.

 

그러니 바리새인들은 말씀을 아무리 지켜도 왜 자신들이 예수님으로부터 집중공격 대상인줄 모르는 겁니다.

 

그래서 최고의 선함을 발동 시켜서 예수님을 헤롯으로부터 피하라 라고 말하기도 하고

심심하면 화해를 요청하는 차원에서 식사대접을 하는 온건한 바리새인이 한 둘이가 아니였습니다.

 

그가 곧 예수님이 행한 기적은 더더욱 압도적이여서

그 몰입감에 의해 하나님으로부터 오지 않았다면 그런 일을 행할 수가 없다 라는

자신들은 단절된 입장까지도 표할 정도로 겸손하기 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인간 쪽에서 나올수 있는 것 보다

 

정작 문제는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그 어떤 이유로도 그 어떤 타협도 일체 없는 단절의 단절입니다.

 

바리새인만 그럴까요?

 

특히 예수님의 제자들은 더 심할 정도로 바리새인의 외설성 보다

더 심하게 예수님께 접촉을 시도합니다.

 

또 정작 문제는 예수님입니다. 그 어떤 접촉점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누구보다 더 많은 접촉 시도를 한 제자들은 오히려 보란 듯이 된통 당하기만 합니다.

오히려 더 굴욕적으로 말입니다.

 

아니 이제는 알아서 슬슬 기고 있는데

발성하지도 않았는데 뒤짚어 씌워가면서 굴욕을 당하도록 합니다.

 

남들 보다 먼저 지적받으라 라는 식으로 말입니다.

 

행하지도 않았는데 미리 매 맞는 식인 거죠.

 

안식일 이라는 말씀의 내용을 지키니까 졸지에 존재가 되어버리니

그 존재가 안식의 주인의 당위 곧 마땅히 하실바를

일부러 존재 속에서 펼칩니다.

 

안식일날 일부러 말입니다.

 

그래서 유발케 합니다.

안식일 지키는 법이냐?

아니면 안식의 주인의 기능인 사랑이냐?

 

법 지키는 것 때문에 소나 양이 마실 것 먹을 것을 안주느냐?

그렇다면 병 고침이 안식일날에 행해져도 마땅하지 않느냐?

 

존재에게서는 먼저 있었던 기능 곧 사랑이 나올수 없다는 뜻입니다.

존재 보다 먼저 있었던 사랑만이 안식일 조차도 병고치지 않고서는 못배기는 겁니다.

 

개같은 이방인 이라고 해서 구원 못해 줄 이유가 없다는 뜻입니다.

선민 보다 앞서 있었던 사랑이라는 당위이기 때문입니다.

 

뭐 우리는 율법을 쥐었다고?

 

그럼 이방인도 율법 속으로 집어넣으면 됩니다.

그 율법을 거쳐서 이방인도 왜 마땅히 지옥감에도 마땅한데도 불구하고

안식일 지키는 것 보다

안식일 임에도 병을 고치시는 그 사랑을 본 것입니다.

 

이방인은 사랑을 봤는데

왜 선민은 마땅히 사랑을 봐야 함에도 불구하고(당위)

법을 볼까요?

 

법은 죽은자도 살리지 못하는데?

법은 정죄할 뿐이지 죄를 용서하지를 않습니다.

죄를 용서 할려면, 죽은자를 살릴려면

법을 위반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유일하게 법을 위반할 수 있는 것은

사랑 뿐입니다.

 

존재 보다 먼저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안식일날 병고침을 다시 언급하면서

천국의 공격을 보여줍니다.

 

가짜 천국이 자리 잡은 존재들에게

진짜 천국의 기능은 그 가짜천국의 존재성을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14:6, 개역) 저희가 이에 대하여 대답지 못하니라

 

 

여기에 힐문할 자가 없습니다. 답도 못합니다.

 

더 이중적으로 단절에서 다시 더 단절을 펼칩니다.

 

(14:7, 개역) 청함을 받은 사람들의 상좌 택함을 보시고 저희에게 비유로 말씀하여 가라사대

(14:8, 개역) 네가 누구에게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았을 때에 상좌에 앉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보다 더 높은 사람이 청함을 받은 경우에

(14:9, 개역) 너와 저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이 사람에게 자리를 내어 주라 하리니 그 때에 네가 부끄러워 말석으로 가게 되리라

 

 

청함을 받았을때에 상좌를 택하지 말라는 비유입니다.

곧 좋은자리입니다.

 

 

제가 한 번은 희한한 경험을 했습니다.

얼마나 웃기던지

 

아마 그 때 이 본문을 가지고 설교나 대화를 나누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인지 다들 식당에서 식사때 상좌 라는 좋은 자리를 서로 앉지 않을려고 하는 겁니다.

 

꼴에 말씀을 실천하겠다는 뜻이겠지요

 

그런데 제가 작업을 늦게 마치고서는 제일 늦게 와서 서로 안 앉을려는 상좌를 앉았다고

다들 소곤 소곤 숙떡 숙떡 하는 겁니다.

 

와 카지비?

 

뭣 땜에 수근 수근 거리지?

 

식사 끝 무렵 누군가 입을 띠었습니다. 상좌에 앉았네요?

 

이게 상좌입니까? 몰랐네요 라고 웃고 넘어갔습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니

 

아이고 종교꾼들은 별수 없는 갑따

전혀 좋은자리 같지도 않더구만

자신들이 내어놓은 그 빈자리가 좋은자리라고

누가 앉는가 하고 본 겁니다.

 

그게 오히려 이미 자신들은 불편한 자리를 피하고 편안한 자리를 차지한 상좌였던 겁니다.

 

그런 행동들이 흉내낸다고

죽은 자를 살리겠다는 존재 보다 앞선 당위일까요?

 

아니잖아요 오히려 그것이 법이 된 겁니다. 존재를 부각시키는

 

(14:8, 개역) 네가 누구에게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았을 때에 상좌에 앉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보다 더 높은 사람이 청함을 받은 경우에

(14:9, 개역) 너와 저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이 사람에게 자리를 내어 주라 하리니 그 때에 네가 부끄러워 말석으로 가게 되리라

(14:10, 개역) 청함을 받았을 때에 차라리 가서 말석에 앉으라 그러면 너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벗이여 올라 앉으라 하리니 그 때에야 함께 앉은 모든 사람 앞에 영광이 있으리라

 

이 본문을 구약을 통해서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요셉을 생각해 보세요.

 

요셉이 색동옷을 입게 되어 상좌에 까지 앉게 된다는 해석은

요셉은 전혀 색동옷을 좋아라 했는데

해석은 저쪽 형들이 더 깊게 한 겁니다.

 

그래서 죽여버립니다.

3일 동안 굴에 갇혀 버리는 거죠

 

그리고 중요한 것

 

색동옷을 아버지 야곱에게 갈기 갈기 찢어서 사자에게 당했다고

색동옷을 입혀준 아버지에게 주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전형적인 오이디푸스 죠

 

아버지를 죽인거죠.

 

그럼 그 아버지를 다시 살리는 것이 안티오이디푸스인데

색동옷 갈기 갈기 찢는 것은 누구나 다 할줄 아는 것인데

 

다시 살릴 재간은 없는 겁니다.

 

그런데 색동옷 곧 좋은 옷이 찢김 당한 그 자가 곧 요셉이

죽은 아버지 야곱과 심지어 요셉을 파묻어버린 그 당사자 본인들도 죽음에서 가뭄에서 살릴수 없는 그들을

 

그들의 손에 죽은 요셉이 다시 살려내는 겁니다.

 

왜 죽은 요셉이 살아났는가? 아버지와 형들을 살리기 위함이였다는 것이 요셉의 고백입니다.

 

심지어 그 중간에 애굽왕까지 덤으로 낑겨 살림받은 거죠.

 

이것이 존재 보다 앞서있던 색동옷의 기능입니다.

 

그렇다면 상좌는 저렇게 엉터리로 적용할 것이 아니라

그 어떤 자리도 주님이 함께 한다는 의식입니다.

 

왜냐하면 자리 보다 먼저 앞서 있었던 분이 주님입니다.

주님 이라고 말로 끝나는게 아닌 기능입니다.

 

그 주님이 오늘 또 무슨 사건을 벌리시는가 하는 점입니다.

반드시 우리를 원수로 만드는 기능입니다.

그 원수됨이 들통나고 그 원수됨을 이유없이 용서하시는 겁니다.

곧 원수 사랑입니다.

 

나의 죄를 사하지도 못하는 말씀 지킴은 의미 없는 존재만 부각시킬 뿐입니다.

 

차라리 [아무것도 아닌 것]을 원하는게 낫습니다.

 

누구 말 마따나 [나는 아무것도 아닌 것을 원한다]처럼 말입니다.

 

그것이 존재 보다 앞선 숭고(불쾌함) 이다는 겁니다.

 

곧 거룩입니다.

 

이렇게 자리까지 좋은자리 나쁜자리 꼼꼼하게 따지면서

예수님은 인간의 행동 하나 하나를 지적질 하시는 것일까요?

 

그것도 이유없이 무조건 말입니다.

 

그것은 존재를 추구하기 때문에

인간은 이유 없이 당해야 할 판국에 놓여진 겁니다.

 

이런 존재를 거쳐서 당위를 곧 거룩을 보게 되는 겁니다.

그 차이로써 말입니다.

 

그래서 얻게 되는 답이 이겁니다.

 

(14:11, 개역)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이 말은 도덕책에서 흔히 나오는 말이 아닙니다.

 

자기 라는 존재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 라는 존재를 낮추는 자는 높아진다는

 

당연히 낮출려고 할 것이니 그래야 높아지는 낮추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님과 무관하게 누구든지 다 결론 내릴수 있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 말 자체가 존재는 낮출 리가 없다는 뜻입니다.

 

그럼 낮추게 하는 천국의 기능에 그냥 당하라 라는 뜻입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너를 낮추게 할 자 이다는 겁니다.

 

? 존재 보다 앞서있는 기능은 예수님 뿐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예수님과 무관한 낮춤은 오히려 존재가 더더욱 부각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바리새인이 항상 걸려들도록 하는 겁니다.

얼마나 자기를 낮추는데 도사들 아닙니까? 그런 달인이어야만

 

예수님의 행위 발휘가 걸림이 되는 겁니다.

 

바리새인이 엉터리로 자신을 낮추는 것이 들통났다면

인간 쪽에서의 낮추는 것은 다 엉터리인 겁니다.

 

그럼 예수님의 낮추심을 보자 라는 겁니다.

 

예수님의 낮추심은 존재 보다 앞선 기능으로써의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죽으면 죽으리라입니다.

 

왕비가 된 이유 라는 겁니다.

부모가 된 이유 라는 겁니다.

구원자가 된 이유 라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도 모르고 낮추는 존재로써 자리잡아버리니까

예수님의 낮아지심을 하나님으로부터 저주 받았다고 퍼붓는 겁니다.

 

예수님도 함께 하심도 없는 존재들끼리

 

이 말씀을 지킬려고 존재가 될려고 하다보니

 

식당에서 예수님의 함께하심은 관심없고

서로가 자기 멋대로 정해놓은 전혀 좋은 자리 같지도 않는 자리를 마련하고서

서로가 엉터리로 자신을 낮추어서 그 자칭상좌를 피해 앉고서는

 

과연 누가 그 자리를 앉을 것인가 하고 관찰자 입장에서 보겠다는 그 심뽀는

 

예수님을 어떻게 하면 걸고 넘어지겠다는 우리들의 평상시 존재적인 모습이다는 겁니다.

 

그때의 바리새인이 어딜 가질 않습니다. 우리는 늘 존재만 주장하는 함성을 고래 고래 지릅니다.

 

존재이기에 뭘 해도 다 죄 뿐입니다.

 

그런 육을 거쳐서 성령을 입게 되면

마땅히 하지 않을수 없는 것이 없는 겁니다.

 

자신을 낮추기 싫어도 낮추도록 목을 꺽어버립니다.

이유 없이 아무 연고 없이 싫어버림바 되는 미움을 받게 하십니다.

 

죽으면 죽으리라를 그 때 0.3초 우발적으로 경험케 되는 겁니다.

 

감히 근접할수 없음을 알게 되는 거죠

 

그래서 주님이 더 높아 보이는 겁니다.

 

나는 너무 너무 작아 보이는 것이고요

 

주님의 기능이 나보다 먼저 있었고

 

나라는 존재 보다 항상 예수님이 옳았다는 것을 실감케 되는 겁니다.

 

천국의 잔치는 끝까지 가려내는 단절성을 멈추지 않습니다.

 

살벌하기 짝이 없는 잔치입니다.

자리 한번 잘못 앉았다가 영원히 지옥으로 떨어진 판국인

살얼음판 잔치입니다.

 

결국 천국잔치란 이렇게 아무 의미 없는 아무것도 아닌 것에 충성하는 기능의 충만입니다.

 

존재의 잔치가 아니라 존재의 만땅이 아니라

 

존재보다 앞선 기능의 풍요함입니다.

 

그래서 낮추어짐을 당해도 기쁜 겁니다. 존재가 사라졌다면야 이것보다 더 기쁠수 없습니다.

 

그런 미래완료의 시점에서 보면

낮추시는 것이 감사할 뿐이고

 

높아지는 존재가 되는 것은

의문의 제사만 죽을때까지 하는

남도 살리지도 못할뿐더러 자신도 살리지 못하는

헛짖인 겁니다.

 

이 낮추시는 기능이 나 라는 존재보다 먼저 있었다는 사실에 감사하시면 됩니다.

 

곧 원수인 나를 사랑한 십자가의 피입니다.

 

 

 

 

 

 

 

 

 

 

 

 

 

예루살렘 밖에서 죽는 법은 없다 (13:31-35)

2014/06/13 10:28 in 성령행전(피활동,인간극복)

예루살렘 밖에서 죽는 법은 없다 (13:31-35)

 

김대식

610일 오후 8:15 ·


(13:31, 개역) 곧 그 때에 어떤 바리새인들이 나아와서 이르되 나가서 여기를 떠나소서 헤롯이 당신을 죽이고자 하나이다

(13:32, 개역) 가라사대 가서 저 여우에게 이르되 오늘과 내일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낫게 하다가 제삼일에는 완전하여지리라 하라

(13:33, 개역) 그러나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

(13:34, 개역)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13:35, 개역)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바 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를 찬송하리로다 할 때까지는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찬양(시편)이란 남이 아닌 내가 하나님의 원수임을 온 동네 방네 떠드는 겁니다.


동네 사람들 동네 사람들 나의 죄를 아는 선지자가 나타났어요 라고

(누군가 자신의 원수의 성문을 열었다는 겁니다. 그 사람이 선지자이다는 겁니다.

나의 원수됨을 열지 못하는 자는 선지자가 아닙니다.)


우물가의 여인이 온 동네 방네에 이 내용을 퍼트린 것처럼 말입니다.

결국 선지자란 나를 하나님의 원수임을 들추어내는 자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선지자가 두 부류로 나누어집니다.


들추어내었으니까 다시 땡빵 봉합할 수 있는

기술 테크닉 또는 지식을 주겠다는 것이

거짓선지자이고 (개방 개방을 외치고)

약점 잡아서 평생 꼬끼어 밥풀떼기로 삼음

(아니 약점 잡혔다고 자진해서 알아서 납세합니다.

그러니 거짓선지자를 양성하는데 이들도 한 몫을 담당하는 겁니다.)


반대로 참선지자는 땡빵 봉합은커녕 오히려 그 흠집의 간격을 더욱더 벌려 버리는 것이

참선지자입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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