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마을 2014 여름 수련회를 아래와 같이 개최합니다. 

일 시: 8월 3일(일) ~ 5일(화) 

장 소: 가야산호텔(경북 성주군 수륜면 백운리 1282-4) Tel. 054-931-3500 

강 사: 이근호 목사 

주 제: 출애굽기 속의 그리스도 

회 비: 일반(중학생 이상) 8만원 

아동(5세 ~ 초등) 5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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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련회 참가를 원하시는 분은 아래 해당 지역 책임자께 7월 26일까지 참가 신청해 주시기 바랍니다. 

(지역 책임자께서는 27일까지 알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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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경기: 이미아 선생 (010-9998-4171) 

부산, 경남: 박병규 목사 (010-2323-3571) 

대구, 경북: 이상규 집사 (010-2685-8211) 

광주, 전라: 김을수 집사 (010-2627-7800) 

대전, 충청: 김종인 권사 (010-8808-7111) 

그외 지역: 서경수 목사 (010-2962-74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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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여름 수련회 교재


낯 선 경 계 선

-출애굽 속의 그리스도-

Ⅰ 서론

1. 존재의 바다

있는 것들만 다수를 이루어 출렁이는 바다. 세상은 존재의 바다처럼 보인다. 있는 것에서 있는 것으로 변모하고, 있는 것끼리 마찰하면서 튕겨져 나가고, 그러면서도 다른 장소에서 다른 양상을 띠며 존재하게 된다. 마치 물방울 하나하나가 모여서 대해를 이루는 것처럼. 사람, 동물, 식물, 해와 달과 별들이 각자 자기 양상을 지켜내면서 존재의 바다에 모여 있다.

있는 것은 그냥 있는 게 아니라 ‘짝을 이루는 식’으로 있고, ‘공동체를 이루는 식’으로 있다. 이것은 “같은 것이 같은 것을 알아본다.”는 일반적 믿음이 한 몫을 하게 된다. 이것을 확장하게 되면 ‘같은 것끼리’로 계속 분할이 이루어지고 이는 ‘전시적(展示的) 상황’이 된다.

눈앞의 현실은 우리에게 셀 수 있는 항목들의 계열로 드러난다. 눈앞의 현실은 늘 어떤 ‘것’이다. ‘이것들’은 다른 것들로 대체될 수 없다. 존재를 무한 분할한다고 해서 아무 것도 없는 게 아니다. 단지 다수들의 세계일뿐이다. 여기서 ‘존재하지 않았음’이 가미되면서 존재로 봉합이 된다. 이 존재는 계열에서 양(量)에 따라 위치를 보여준다. 양의 차이는 은밀하게 질의 차이를 보여주지만 양의 차이가 질의 차이로 전환될 때 우리는 정확히 어디서 전환되는지 놓치게 된다.

뿐만 아니라 질(質)의 영역만 따져도 질감과 소리, 색을 구분할 공통기준도 여전히 모호하다. 어떤 것들은 차이점을 드러내려 할수록 차이점은 오히려 흐릿해진다. 예를 들어, ‘뜨거움’은 여러 차별적 계열을 보여준다. 뜨거움은 차가움과 다르다고 지적해야 되지만 차가움만이 뜨거움과 차별되는 것이 아니다. 미지근함도 뜨거움과 다르다. 또 다른 예를 들면, 동물은 식물과도 다르지만 광물과도 다르다. 하지만 사람이 아닌 이상, 동물과 식물과 광물은 모두 같은 범주에 담을 수가 있다.

또한 단단한 것과 적당한 것, 그리고 치우침과 생생함, 바위 대 감정, 이런 비교는 거의 연관성이 없어 보이지만 단어 쌍을 계속 대립 구도에 집어넣게 되면 단단함이란 사실 적당함과 대비되어 유연함이라는 뜻을 지니며, 치우침은 뻣뻣함 이란 뜻을, 감정은 유동성이란 뜻을 지닌다고 정리된다.

이처럼 세상의 모든 존재하는 것들은 존재의 바다와 무관할 수 없는 관계다. 그렇다면 ‘특별한 사건’이라는 것은 사실상 무의미해 진다. 세월이 지나가면 그렇고 그런 일들 중의 하나로 전락하는 게 아닐까? 사사기에 이런 말씀이 나온다. “그 세대 사람도 다 그 조상들에게로 돌아갔고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더라(2:10).”

존재의 바다에서는 모두 존재의 (허)무성에 녹아들어간다. 있는 것이나 생겨난 것이나 모두 잠시다. 지나가고 흘러가면 그뿐! 특별난 일이나 특이한 것도 인간의 무심(無心) 앞에서 별게 아닌 일이 될 수 있다. 출애굽 사건이 성경에서는 아무리 요란해도 일반 사회에서 완전히 무시한다면 그 사건은 안 일어난 것과 진배없다. 이것은 출애굽 사건뿐만 아니라 십자가 사건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은 다른 데 관심두기에 자연스레 십자가는 잊힌 일이다.

봄이 되면 어김없이 풍기는 아카시아 꽃향기 속에서 과연 십자가 사건이나 출애굽 사건을 느낄까? 어림도 없는 일이다. 위급한 환자의 목숨을 다투는 상황에서 출애굽 사건은 전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이처럼 현실이란 그 현실에 속한 사람들에게 필요한 사태만 용납되고 종료된다. 일상의 변화무쌍은 조성된 현재를 자랑하면서 출애굽 사건이나 십자가 사건을 밀어낸다.

사사기 시대와 다를 바 없는 이 시대에 사사는 어디서 출몰하며 사람은 어떤 식으로 언약 사건에 접촉이 되나? 예수님이 부자 청년을 만난 적이 있었다. 청년은 영생을 얻고 싶다는 자신의 의사를 예수님께 제시했다. 여기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은 이러하다.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마 19:21).”

부자 청년에게 있어 예수님은 계속해서 없던 존재였다. 자기 눈앞에 펼쳐지는 존재의 바다에서 애초부처 있던 존재는 아니었지만 소문 듣고 새삼 포함 시키려고 예수님을 찾아온 것이다. 하지만 청년은 예수님의 답변을 듣고 도로 자신의 존재의 바다에서 삭제해 버렸다. 또다시 예수님은 그에게 없는 존재다. 바로 약속의 투입에 의해서 벌어지는 사건이란 이처럼 모든 존재는 다른 존재와 뜯겨나갈 수밖에 없는 파편임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바지나 셔츠의 봉합선이 결국 뜯겨져나갈 수밖에 없듯이 사람들이 생각하는 존재라는 것도 하나님의 사건에 의해서 다 찢어지게 된다. 찢어지지 않으려고 버티는 모습을 애굽의 바로왕이 보여주므로 출애굽 사건은 구체화된다.

바로왕은 존재의 바다의 원칙이 위배되는 것을 허용할 수가 없었다. 모세는 결코 바로왕과 협상하려고 등장된 인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 곧 당신의 노동자들을 풀어주라.”는 너무나도 터무니없는 요구를 무모하게 들이댄 자이다. 모세 말대로 하면 바로왕의 존재의 바다는 와해된다. 모세는 바로와 애굽 나라에 대한 심판자로 나타난 것이다. 사전에 이유도 모르는 채 심판받는 것이다. 심판에서 면제될 그 어떤 언질도 주지 않고 감행된 심판이다.

바로왕과 애굽이 버틸 수 있는 유일한 논리는 ‘존재의 바다 유지’이다. 즉 “있음이 내 눈앞에서 졸지에 없음으로 바뀌는 것을 도저히 용납하지 못하겠노라”이다. 이러한 바로왕의 심정을 이해해야만 한다. 벌어진 사건 앞에서 바로왕은 본인도 예전에 미처 알지 못한 마이너스 세계의 대변자 노릇을 하게 된다. “애굽 술객들도 자기들의 술법으로 그와 같이 행하므로 바로의 마음이 완악하여 그들의 말을 듣지 아니하니 여호와의 말씀과 같더라(출 7:22).”

이 양보할 수 없는 낯선 전면전이 존재의 바다를 배경으로 한 출애굽 사건의 개입으로 표면화된다.

Ⅱ. 본론

1. 사건

사건은 자연을 배경으로 일어난다. 따라서 배경이 되는 자연과 구분 짓는 방식도 따로 출몰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작용자의 개입을 눈여겨봐야 한다. 개입의 결과로 말미암아 사건이 터지고 거기에 대해 새롭게 이름이 부과되고 진리정립도 이루어진다. 그런데 사건은 사건 속에서 사건의 부름을 깨닫는 이들에게만 나타난다. 따라서 사건 앞에서 나를 쳐다보는 것은 금지된다.

사건은 스스로 이름을 붙이면서 스스로의 구성요소 속에 자신 자신을 포함시킨다. 사건은 존재의 질서에 자신을 가입하지 않는다. 사건은 존재가 일관된 전체를 형성할 수 없음을 대신하는 존재의 질서 내부에 단절/파열을 도입한다. 그래서 존재의 질서에 가입하는 존재 너머는 없다. 존재하는 것은 존재의 질서뿐이다. 마치 물질이 공간을 구부리는 것이 아니라 공간의 구부러짐의 효과가 물질인 것과 같다(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성 이론). 사건이란 곧 존재의 개방인 것이다.

기독교의 기원에 관한 예를 들어보자. 교회의 발생에는 두 가지 사건과 관련 있다. 첫 번째 사건은 그리스도-사건인데 그리스도-사건이란 ‘신의 죽음’으로 이름 붙일 수 있다. 그리고 교회가 등장한다. 이 사건 후에 등장한 교회는 이 사건을 ‘진리의 역사’의 개시라고 말한다. 하지만 교회가 그 ‘진리의 역사’에 포함되는 것은 아니다. 그 이유는 교회가 바로 이러한 진리 규정의 두 번째 작용자로 관여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사건을 통해서 후에 ‘진리’라고 규정하는 관여자가 등장하기 마련인데 이로 인하여 사건은 원활한 연결성을 두고서 자체적으로 경쟁하고 투쟁하게 되어 있다. 교회는 그리스도-죽음 사건에 대한 충실한 상속자가 되려고 노력하지만 이 노력으로 인하여 도리어 교회 조직체만 단단해져서 사건이 갖는 임의성을 동결시켜 버린다. 사건에서 작용자의 비중이 과도해져 버린 것이다. 다시 말해서 교회는 신의 죽음보다 항상 그 비중이 우선시되고 만다.

이게 바로 ‘교회의 주체화’이다. 이름을 부여하면서 교회는 주체로서 사건을 손질하게 된다. 여기서 규칙이 만들어지고 관련 법조항들이 계속 가지를 친다. 주체화된 교회는 처음 사건을 유발시킨 그 상황을 늘 복사하든지 재현에 나서는데 여기에 연극적 요소가 한 몫을 담당한다. 신부는 구약의 제사장 복장으로 무장하고 미사 때마다 연출해야만 한다. 이미 교회는 존재화 된 것이다. 하지만 사건은 이 어설프게 짜인 주체 존재의 봉합선을 터지게 하면서 난데없이 다시 출몰한다.

이것이 존재의 눈에서 보면 ‘초과’다. 기존의 이름으로 굳어지게 한 상황으로서는 포섭이 불가능한 초과 사건으로 보이는 것이다. 당황스러우며 위기의식을 가져다준다. 동시에 “왜 세상은 곱게 조용히 흘러가지를 않는단 말인가”라고 짜증을 낸다. 바로왕의 짜증이다.

출애굽 사건은 바로왕을 비롯해서 그 당시 모든 인간들에게 억지스런 일이요 부자연스럽다. 인간들이 다져놓은 주체성을 훼손하는 식으로 도전한다. 과연 상황 속으로 밀려든 사건은 기존의 상황과 합류가 가능할까? 이 사실은 사건의 원류를 추적하기 위해서 군사를 일으킨 애굽 군대를 따라가 봐야 한다. 그들은 사건의 원천에 닿도록 하나님으로부터 유인 당하는데 그들이 결국 보게 된 것은 자기들의 막장이다. 망하고 죽는 사건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곳에서 이 막장을 지켜보는 이들이 있다. 이들은 진리의 이름으로 사건에 명칭을 붙인다. ‘하나님의 이름의 전쟁’이라고(출 15:2-18). 신앙이란 진리의 이름으로 다가오는 미래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신앙은 진리를 재출현시키는 역할을 한다. 이것은 사건의 내적-상황의 결과며 그들은 사건을 보편화시킨다. 사건에 대해서 신앙으로 형식화시키는 것이다. 이것이 연속되는 주체화이다.

주체화가 단어들의 병기창과 같다. 단어들은 충실한 표지들을 갖고서 진리의 진열대에 진열되어 있다. 후손들은 그 진리의 창고에서 붙여진 단어들을 끄집어내어 하나님에 대한 충성도를 보이기만 하면 된다. 신앙, 자비, 희생, 구원 이런 말들은 하나님이 벌리시는 전쟁의 무기처럼 활용되는 단어들이다. 자기네들이 속해 있는 상황에서 이런 단어들은 이미 기성품화 되어 있다.

이 명칭들은 이미 과거에 있었던 사건을 회고적으로 다루면서 사건을 존재로 굳히게 한다. 하지만 사건은 항상 비대칭적이다. 과거와의 역사적 통합이 불가능하다. 그런데 사건의 반복이란 항상 미래에 원천을 두기에 그 어떤 상황도 사건을 주체적으로 유발시킬 수가 없다. 도리어 기존의 장소가 공백(구멍)으로 바뀌면서 사건을 위한 장소로 제공된다. 공백이란 같은 장소에서 동일한 사건이 두 번 일어날 수 없도록 근원적으로 차단한다는 말이다.

지금도 홍해바다는 흐른다. 하지만 또다시 갈라질 필요는 없다. 상황을 구성한 모든 요소들이 새롭게 터질 미래적 사건을 위해 재배치되기 때문이다. 그 어느 것도 중립적이지 않다. 새로운 사건을 위해 부정되어야 될 상황에 머물게 된다.

2. 사건의 반복

사건을 품에 안고 진리를 ‘하나(1)’로 규정하면서 진행하게 되면 그 하나의 범주에 해당되지 않는 모든 것들은 ‘다수’로 불린다. 그런데 이 하나 됨은 다수 안에 놓여 있으면서 지속적으로 나머지 모든 다수들은 이 하나 됨에 끌어들이려고 시도하게 되는데 그렇게 해서 ‘동일자’를 이루려고 하고 이 동일자로 진행되는 과정이 ‘시간’이 된다.

완료와 미완료의 반복이요 연속이다. 기존의 동일성으로 하나 됨으로 마감되면서 완료가 되지만 이보다 더 큰 덩어리로 확대되기를 시도하면서 완료는 미완료로 진행한다. 이 미완료의 출발선은 바로 ‘그러나 하나 더’라는 형식을 갖추게 된다. ‘이미’로 곱게 계승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비록 ‘이미’로 출발했더라도 ‘아직 더’ 운동이 자체적으로 일어나게 된다.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이유는, ‘하나 됨’을 도달하면서 거기서 비로소 질적으로 전혀 다른 새로운 ‘타자 상’이 눈에 들어오기 때문이다. 번갈아 진행되는 시작과 끝은 새로운 질적 차원을 유발한다. ‘전혀 다른 새로운 것 하나 더’가 생겨나는 것이다.

출애굽의 경우, 구원의 아이디어는 진정 애굽을 이질적으로 여긴 그 거주자에 한한다. 그 거주자는 애굽에 한 때 산 적이 있기에 출애굽 당시에는 거기에 거주하지 않고 외부에서 하나님을 만난 그 모세다. 모세는 히브리인들에게 새로운 거주지를 제안하는데 이는 단지 생존이나 살기 위함이 아니라 진정한 거주자가 누구인지를 알기기 위한 여행을 제안한다.

즉, 애굽의 진정한 거주자는 새로운 세상과의 차이를 유일하게 인식하고 있는 바로 그 분이다. 그분이 누굴까? 바로 하나님이시다. 하나님만이 애굽의 유일한 거주자가 된다. 반면에 애굽에 살던 히브리인들은 애굽을 그들의 삶의 터전으로 삼았기 때문에 애굽의 실체를 모르는 거주자는 거주자가 아니라 애굽의 백성이 되어 버린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출애굽은 두 차례에 의해서 진행되어야 한다. 첫째는 애굽의 통치자로부터의 탈출이요 다른 하나는 애굽에 같이 살았던 그 백성으로부터의 탈출이다. 이는 히브리인들 그 자신으로부터 탈출이 일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히브리인들 내부에 의해서 탈출이 감행되어야 한다.

새로운 왕의 백성이 되려면 바로왕이 보여준 왕의 성질과 다른 성질의 왕에 의해서 동행되고 인도받는다는 사실에 직면해야 한다. 기존의 백성에게 새로운 왕이 생기면 새로운 백성으로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 오늘 본문 말씀은 지리적인 사항이 많다. 모세는 백성을 떼로 이끌고 가지만 사도 바울의 경우는, 말씀이 그들에게 전달된다.

이는 기존의 그 어떤 특정 장소나 지리적 요인이 새로운 백성을 유발하는 요소가 될 수 없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그 새로움은 어떻게 발생되어야 할까? 그것은 지리적 여건에 상관없음을 보여야 한다. 지리적 여건에 상관없다는 말은 생존 여부와 상관없다는 말이다. 즉, 신약의 복음은 살기 위함이 아니라 죽기 위함이다.

살리기 위한 왕이 아니라 같이 죽이기 위한 조치를 취하시는 그런 이질적인 분이 곧 왕임을 보여주기 위한 소식이 전달된다. 그러니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이 세상 어느 곳에서나 놀라는 내용의 소식이어야 한다. 그 놀라운 대목은 ‘왜 살기 싫어하느냐’는 것이다. 예수님은 말씀한다. 그런 상황은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유도되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온전한 이질성은 지리와 장소와 시간을 초월하여 세상 끝 날까지 지속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교인 몇 명 모여서 교회를 시작하겠다고 해놓고 초반의 이질성이 단순 반복되어버리면 나중에 이질성이 상투적이 되어서 이질성이 아니라 어느새 친밀요소가 되어 버린다.

3. 줄거리

요셉을 알지 못하는 왕이 등장함으로 시작되는 출애굽기는 언약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하나님에게 어떤 평가와 처벌을 받는가를 보여주며, 이스라엘 민족의 건짐이 결코 이스라엘 자신의 의로움의 대가가 아니라 선조에게 하신 언약의 실현과정의 일부임을 나타낸다. 하나님의 건짐 또는 하나님의 구원을 인간들이나 이스라엘 민족들이 그들의 현 관점에서 얼마나 잘못 이해하고 있는지는 출애굽기 전체에서 큰 주제거리로 부각된다.

언약에 대한 몰이해는 애굽사람 뿐 아니라 이스라엘 자체 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레위 지파인 모세와 아론까지도 말이다. 이런 점에서 창세기 49장에서 야곱이 12아들들에게 행한 예언은 의미심장한데 좋은 운명을 예고 받았든 나쁜 운명을 부여받았든 간에 그들은 모두 자기들이 온당치 못한 존재들이며 다만 거기와 대조적으로 언약의 하나님만이 한없이 위대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역할을 담당하는 예언인 것이다.

이제 이점을 실제로 역사 안에서 검증을 하게 된다. 동시에 언약이 과연 무엇인가를 역사 안에 있는 나라들에게 알려 주게 된다. 요셉을 알지 못하는 왕으로 인해 종노릇하게 된 히브리 민족은 종이라는 신분이 언약 안에서 갖는 의미를 생각하게 된다. 언약의 민족이 꼭 종 된 자들의 집합으로 규정될 타당성이 무엇인가?

민족의 정체성을 꼭 그것으로 고정시켜야만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런 삶의 정황에서의 해방과 구원이란 역사 안에서 어떤 위상을 가지게 되는가 하는 점들이 파악되어야 한다. 언약의 민족이란 단순히 그들이 언약을 가지고 있음이 아니라 언약이 그들을 지니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언약이 역사 안에서 표현하고 싶은 바를 그들의 실존을 통해 표현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종이라는 신분은, 또는 종처럼 대우받는다는 것은 이미 앞선 언약의 내용 가운데 그런 비운의 처지에서 비로소 언약이 구현된 사실이 있음을 말해주며 그것이 이제는 개인단위가 아니라 민족단위로 이루어진다는데 차이를 두고 있을 뿐입니다.

요셉을 제대로 알던 바로왕은 종의 위치에 있는 요셉을 지도자의 위치까지 상승시켰지만 요셉의 가치를 모르는 왕이라면 당연히 그 전의 위치로 되돌리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여기서 문제는 풀리는데 노예와 죄인의 위치에서 통치자와 주의 위치로 옮겨질 때 옮길 수 있는 언약적 근거와 정당성이 바로 이스라엘에게 있어 구원의 근거와 정당성을 제공하게 될 것이다.

요셉이 국무총리가 된 것은 하나님 때문이다. 이점은 너무나 당연하기 때문에 이것만큼 중요하면서도 무시당하는 것은 없을 것이다. 요셉 개인의 자질이 아니라 요셉을 내세운 하나님이 그를 주의 자리에 앉혔다면 왜 그를 주가 되게 했는지는 이제 그의 후손인 이스라엘 민족의 체험 속에서 알 수 있을 것이다.

창세기 15:13-21에 나오는 내용에 의하면 애굽에서의 430년간의 체류는 가나안 땅에 죄악이 관영할 때까지의 기간인 동시에 그들을 징벌할 적절한 구실이 있는 민족의 팽창도 아울러 고려한 기간이다. 죄를 징벌할 만큼 의로운 민족이 있을 수 있느냐는 것이 관권이지만 하나님은 죄라는 규정을 하나님 자신에 대한 도전과 공략으로 간주하시기 때문에(창 3:4, 14) 하나님 자신이 선택하고 내세운 언약의 민족에 대한 학대와 무시가 곧 저주를 내릴 수 있는 이유가 되는 것이다(창 12:3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요셉은 야곱의 12지파가 꼭 하나님의 언약의 민족임을 자기 시체의 이동을 걸고 확신했다(창 50:25, 수 24:32).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의 구원에 대하여 오해하고 나선 자가 있으니 바로 레위지파의 모세다. 그의 구원관은 억압받는 자가 억압하는 자에 대한 분노에서 나온 항거의식의 발로에 불과하다.

이러한 해방의식은 창세기 34장에 나오는 사건의 재판으로서 무력에 의한 해방은 언약 자체가 무력을 부정하고 있기 때문에(창세기 32장의 얍복강 사건) 이 입장과 충돌된다. 폭력으로부터의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의 구출이 구원이라는 언약의 성격과 일치되지 않을 때는 설사 무사히 탈출할 수 있었다 해도 야곱의 공동체이지 이스라엘은 아닌 것이다. 동시에 여호와와 상관없는 단체가 되고 복의 근원도 아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이스라엘과 분리시켜 놓는다. 본인도 언약과 상관없는 생활을 40년간 광야에서 보내게 된다(4:25). 이제 버려진 자를 여호와는 찾아온다. 그를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삼음으로서 이스라엘의 구원이 결코 이스라엘 자체에 근거가 있지 않음을 보인다. 물론 이스라엘 민족은 그에게 반발할 것이 분명하다(4:1).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이 가진 의미를 이스라엘 민족에게 회상케 한다. 여호와 하나님은 자신이 약속한 것을 반드시 이루어 내는 속성을 지닌 신이라는 것이다(3:14-15). 즉 이스라엘의 고통을 해소하는 차원에서의 구원이 아니라 당신이 던진 언약에 대한 자기 충실의 차원에서 구원해 내겠다는 것이다. 이점은 이스라엘 내에서 대단히 중요한 구원의 요소가 되는데, 모세를 통해서 보여주시는 하나님의 행동에 언약 차원에서 순종해야 될 필요성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고통을 가졌다는 그 자체만으로가 아니라 언약에 대한 동참이 공동체 의식을 낳는 것이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애굽의 실체를 옛날 에덴동산에서의 뱀과 같음을 보여주며 인간에게 있어 문둥병 같은 저주가 그것과 관련되어 있음을 기적을 통해 이스라엘에게 알려주려고 한다. 실제로는 이 모든 것이 심판을 통해서 진행될 것이다.

심판이란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 그 자체로서 이미 가능하다. 모세 가족이 애굽으로 자기 백성을 구원하러 가는 길에 그들은 여호와를 만나게 되었다. 할례 받지 않은 아들(장자)을 죽이려 하자 사태의 다급함을 안 십보라(모세의 아내)가 황급히 장자에게 할례를 행하므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아들의 심판을 면할 수 있었다.

언약 계통에서는 이미 인간의 장자는 장자로 인정받지 못하며 할례 언약에서만 장자로 간주된다(창 17:13-14). 지금 모세가 애굽에 내려가서 행하려고 하는 일이 바로 이 언약으로 오는 심판을 나타낸다. 즉, 진정한 장자란 애굽의 장자가 아니라 언약 안에서만이 장자라는 것을 말이다(4:23).

애굽 왕 바로와 모세의 대결은 이미 요셉 때 이스라엘로 말미암아 애굽이 은혜를 입은 바가 있는데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애굽이 배반한 것에 대한 고발형식으로 이루어진다. 그 증거로 이번에는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갈 때는 도리어 애굽으로부터 은혜를 입게 된다(3:21/12:35-36).

그 사이에 일어나는 애굽 땅에서의 10가지 재앙은 바로왕이 여호와를 모르는 대가다(5:2). 그들에게 이해되는 여호와는 바로 자기들과 싸우시는 신이 되고 이스라엘은 그 여호와의 군대로 인정된다(7:4). 이처럼 애굽 왕 바로의 강퍅함은 언약의 진정한 원수가 누구인가를 정하는 정형으로 삼고자함인데 10가지 재앙에서 피해 보는 것은 모두 애굽의 우상들이며(12:12), 그 우상의 기반이 되는 우상은 바로 인간 자체임을 마지막 10번째 재앙에서 드러난다. 결국 여호와의 원수는 인간이라는 신이다.

그 누구도 하나님의 진정한 아들이 될 수 없지만 언약 안에서 여호와를 섬기는 자들만이 장자가 될 수 있다(3:12). 애굽의 술객들이 여호와의 능력을 흉내 내지만 술객들도 하지 못하는 일이 일어남을 보고 바로 왕은 이 일이 단순히 여호와라는 신을 숭상하는 또 다른 무당의 능력이 아님을 알게 된다.

그때부터 재앙은 애굽인이 거하는 곳과 히브리인이 거하는 장소에 확연히 구별되게 주어진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오던 밤은 그야말로 죽음과 저주와 통곡의 밤이었다. 그러나 이스라엘 집에는 하나님이 그들을 살리기 위해 친히 준비하신 것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1년 된 어린 양이다. 이 어린 양이 그 집을 덮어주었다.

또 죽음의 사자가 지나갈 동안에 집 안에 있는 식구들은 양고기를 먹고 있어야 했다. 이것은 고통 받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베푸시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의 언약이다. 어린 양의 표상에는 무죄사상이 담겨있습니다(12:5에는 흠 없는 어린 양으로 되어있다).

무죄한 것의 죽음을 유죄한 자의 죽음으로 대신 수납하시고 넘어간 것이 바로 유월절이다. 탈출이란 죄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와 저주와 심판으로부터의 탈출이며 단순히 애굽으로부터의 탈출이 아니라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심판 아래 있던 옛 시절로부터의 벗어남이기에 이때부터 이스라엘은 새 날이 되는 것이다(12:2).

그러나 결코 어린 양의 영향권 밖으로의 벗어남은 아닌 것인데 이는 앞으로도 계속 이 유월절을 기념하여 지켜야 하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에게 있어 새 날이란 유월절 어린 양의 죽음에 동참되어 있는 세대를 말하는 것이지 어린양과 결별을 선언하는 세대가 아니기 때문에 애굽에서 함께 죽은 상태를 계속 지속시켜야 한다.

이제 모든 것은 여호와의 소유가 되었다. 모든 맏배는 대표로 거룩하게 따로 성별 되어야 하고 나머지 모든 것도 그것을 맏배로 여기고 종속되어야 한다(13:1-2). 여호와의 전쟁은 이미 시작된 것이다. 이스라엘은 여호와에게 소속된 군대다(12:17, 41/ 14:13-14). 적들은 이스라엘을 향해 공격하겠지만 사실은 여호와에 대한 도전이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해서 친히 싸우실 것이다(14:25, 시편 121:1-8).

언제까지냐 하면, 전 세상을 여호와께서 친히 싸워 승리하시고 자기 백성을 주의 성결한 성소에 들어가게 하실 때까지다(15:13, 16-18). 홍해를 건너오고 난 뒤부터 이스라엘에게는 한없이 배워야하고 알아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홍해를 가르게 된 그 능력과 그 능력을 야기 시킨 하나님의 동기에 관한 것이다.

홍해가 갈라질 때 이스라엘 백성은 그저 바라보기만 했을 뿐이다(14:13-14). 애굽 군사가 접근했을 때 갑자기 나타난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이스라엘을 보호하셨다(14:24). 이런 일들을 통해 도대체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요구하고 있는 것이 무엇일까? 그들의 무수한 원망을 연속적으로 들으시면서 또 거기에 대한 적절한 징계를 내리시면서도 불기둥과 구름기둥을 철수하지 않고 만나를 중지하지 아니하시는 근본적인 이유가 무엇인가를 이스라엘은 체득해야만 한다.

여기에 대한 해답을 하나로 요약하면, 언약 밖에서는 이스라엘도 애굽과 동일하다는 의식을 가지게 하기 위해서이다. 즉, 이스라엘을 혈통적 선민으로 이해하면 실패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혈통적 이스라엘이 언약적 이스라엘로 전환될 수 있는가? 15:22에서부터 시작하여 1차 가나안 땅 정탐까지(민 14:22) 10번의 원망 속에서 주님께서 그들에게 베푸신 것이 무엇이냐를 보면 알 수 있다.

즉, 애굽인이 하나님의 이적을 10번이나 시험했던 것처럼 이스라엘도 그러하니 또 하나의 애굽이 하나님의 언약 안에 잡혀 있는 것이다. 15:26에서는 이스라엘의 이러한 변신을 “하나님의 치료”의 결과로 보고 있다. 이러한 하나님의 치유가 어떤 정신에 의해 주어지고 있느냐를 알아보는 것이 출애굽기의 주제로 보고 싶다.

이스라엘의 원망을 치유하는 데는 홍해를 가른 여호와 이름의 능력과 같은 능력으로 이루어지는 구출의 차원에서의 능력이다. 그 능력은 바로 심판에서 건짐을 받은 능력이다. 죽음이란 단순한 소멸이나 무존재가 아니라 심판과 저주를 두고 말한다. 따라서 역으로 생명이란 단순한 생존이 아니라 생명 세계를 두고 말한다.

그들은 홍해를 건너오면서 잃었던 생명을 도로 가진 게 아니라 옛 세계와 결별하고 새로운 세계의 영향력을 받는 범주 안에 있음을 알아야 한다. 간단히 말해 그들이 생명을 가진 게 아니라 생명의 손길 안에 잡혀 들어온 것이다. 그 생명은 곧 여호와 자신이다. 이제 자신의 소멸과 죽음과 생존 같은 것들은 생명과 아무런 상관없는 것들이 되고 만다.

생존되지 않더라도 생명은 그들 안에서 역사한다. 그러나 그들은 생존을 요구했고 생존문제로 생명에 대항했다. 예를 들면, ‘물이 쓰다, 먹을 것이 없다, 먹을 물이 없는 이곳으로 우리를 왜 데리고 왔냐?’는 등의 원망들이었다. 그럴 때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쓴 물을 달게 했고, 만나를 내렸고, 또 반석을 깨뜨려 생수를 내셨다.

이 모든 것이 아말렉 전쟁에서 드러났듯이 여호와 전쟁에서 얻어진 부산물로 이스라엘에게 주신 것이다. 여호와께서 용사로 친히 싸우신 전투는 비거룩에 대한 거룩의 승리다 (15:3, 13, 17). 따라서 출애굽기를 통해서 나타난 하나님의 일관된 사상은 여호와께서 거룩하신 것 같이 그들도 거룩되게 하여 하나님께서 그들 속에 계시는 것이다. 모세가 알고 있는 이와 같은 사상이 전 공통체 내에 확산되어야 한다.

모세는 장인 이드로의 영향을 받고 천부장, 백부장, 오십부장, 십부장 같은 이방정치를 모방 도입하는데 그러나 하나님은 제도행정 계열보다 전 백성이 공히 계열에 따라서 다 거룩하고 제사장이 되기를 바라고 계신다(19:4-6, 22, 24). 여기서 말하는 거룩이란 언약 안에 있는 것을 말한다(19:5). 그 언약이라는 것이 십계명과 그것을 실천하는 구체적 강령들을 말한다. 쉽게 말해서 이제 이스라엘은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야 한다. 그들의 삶의 원리는 전과는 달라져야 한다.

십계명의 핵심은 20:2에 나와 있는 바와 같이(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 그 하나님의 마음을 생활을 통해 나타내는데 있다. 즉, 그 누구도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 앞에서 종의 위치에 서 있으면서 종으로서 살아가는 것이다. 하나님에게는 종으로서, 사람들끼리는 다 같이 종 된 형제로서 삶의 양식을 갖추기를 십계명은 요구한다.

우리 모두 똑같은 처지와 신분을 가진 사람들이기에 이 위치에 오기까지 베풀어주신 여호와의 사랑을 구체적으로 표현해 나가는 것이다. 그 예로 약자 보호법이 있다.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에 대한 여호와의 관심은 자비로 나타나는데(22:27) 그 이유는 ‘너희도 전에 같은 처지가 아니었느냐’ 하는 것이다(22:21/23:8-9).

오직 여호와의 구원의 은혜만이 공동체 지탱의 원리로 개입되는 것이다. 이 은혜정신을 상실하여 도적질하거나 탐내거나 이방 풍습을 흉내 내는 자는 가차 없이 언약에서 제거된다. 모세는 소를 제물로 하여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고 난 뒤에 그 피를 양푼에 담아 언약을 적어 놓은 책과 백성들을 향해 양쪽으로 분리하여 뿌리면서 이 모든 말씀으로 인해 언약이 이스라엘과 세워졌다고 한다(24:5-8).

이는 무엇이 거룩한 제사장 나라며 또한 하나님의 소유된 민족인지를 보이는 언약이다. 누구든지 이 언약 안에 들어서는 사람은 혈통과 상관없이 언약의 민족이 된다. 십계명과 약자 보호법은 구원의 은혜를 묘사하는 표현방식이다. 이 언약 안에 있는 자가 드리는 제사에 의해서 하나님의 복과 안식은 유지된다.

언약의 피란 헌신을 통해 하나님과 인간 양쪽을 화목케 한 소의 피를 두고 말한다면, 그 피가 나타내고자 하는 의미를 가르치기 위하여 하나님은 돌판을 만들어 주겠다고 모세를 시내 산으로 부른다(24:12). 거기서 40일 동안 하나님은 모세에게 돌판을 주기 전에 먼저 하나님이 그들 가운데 거할 수 있는 처소를 만드는 방법을 이야기해 주신다(25:8). 이는 산 위에 계시는 하나님께서 친히 백성들 가운데 기거하시겠다는 의지를 표방한 것이다.

하나님은 앞으로 주어지게 될 증거판을 담을 속죄소를 먼저 만들고, 그 다음 장막을 만들게 된다. 장막은 속죄소를 보호하기 위한 조치이다. 거기에다 제사를 담당할 제사장에 대한 복장이나 자격에 대하여 언급하고, 마지막으로 안식일을 강조함으로 이 성막이 안식과 연관 있음을 보이고 모세에게 증거판을 제공한다. 즉, 다른 것은 다 산 밑에서 인간에 의해 제조되지만 증거판 만큼은 산 위에서 하나님이 직접 만들므로 말미암아 산 위의 거룩과 산 밑의 비거룩과의 화합을 시도하기 위한 작업에 들어간다.

그런데 그 증거판이 이스라엘의 우상숭배로 말미암아 깨뜨려진다. 이는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 거룩한 돌판과의 부조화로 말미암아 멸망당하지 않게 하기 위한 최선책이었다. 거룩을 깨뜨려서 비거룩을 보호한 것이다. 하나님은 곧 자신의 언약 속에 존재하시는 것이다. 이제 이스라엘에게는 거룩이 그들 속에 들어갈 기회를 상실하고 말았다.

언약은 하나님과 자기 백성과의 관계에서 성립되기 때문에 그들은 언약 밖의 존재가 될 위기에 놓여 있다. 이 점을 염려한 모세가 백성의 죄를 대신 하겠다고 나선다(32:30). 하나님은 ‘너희들끼리 가고 나 여호와는 동행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신다.

그러자 모세는 단독으로 장막 안에서 여호와와의 은총을 근거로 하여 이들을 주의 백성으로 여기고 동행할 것을 요구한다(33:12-14). 하나님은 모세에 대한 은총과 자비를 확산시켜 모세처럼 은혜 베풀자와 자비를 베풀 자를 위하여 모세로 통해 돌판을 친히 제조토록 해서 산으로 올라오게 한다. 거기서 언약의 말씀, 곧 십계명을 기록해 주셨다(34:28).

모세는 산에서 내려와 언약의 위반이 곧 죽음인 것을 말해주고(35:2) 성막 만드는 작업에 들어간다. 성막이 완성되었을 때에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가득했는데(40:35) 이는 모세에 대한 은총과 자비가 현실화 된 것이다. 즉, 은총과 자비의 하나님이 모세에 대한 자비와 은혜를 근거로 이스라엘 속에 계시는 것이다.

그것은 모세만 본 영광을 다 보게 되었기 때문이다(38:18). 현 상태의 이스라엘은 모세에게 종속되어 있다. 이것이 모세의 실패 후에는 모세의 실패를 딛고 나타나는 새로운 모세 언약에 의해 이스라엘은 규정된다(신 5:1-6). 모세는 하나님이 자신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을 사랑해서 자신을 중간에 내세웠음을 비로소 알게 된다.

Ⅲ. 결 론

낯선 사건은 이 세상에서 외로워 보이기 마련이다. 탈출민으로 구성된 히브리인들은 출애굽 사건 안에서 절규하고 있다. “세상은 하필 우리 히브리 민족 중심이어야 하고, 왜 우리만 고통당해야 하는가? 땅을 달라, 물을 달라, 양식을 달라.” 이들은 장차 이 땅을 찾게 되는 하나님의 고통에 미리 참여하게 된다. 도저히 이해될 수 없는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그들의 바탕 곳곳이 갈라지고 붕괴된다.

이러니 사람들은 하나님을 자신의 생활 경계선 밖으로 밀어내고자 한다. 하지만 경계선이 밀려서 생긴 빈 공간만큼이나 히브리인들은 하나님 속에 더 깊숙이 들어온 셈이 된다. 이는 추가적인 반항과 불평으로 인해 ‘약속의 땅’보다 더 낯선 세계를 맛보게 되는데 그것은 죽음의 세계에 대한 경험이다.

사건은 경험을 유발하고, 죽음의 힘을 뒤집어쓰게 된다. 그 힘 속에서 비로소 낯선 분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개인적 죽음이 보인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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