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큰 자, 누가 크냐? (편히 앉아서 먹는자, 서서 수종드는 자(눅 22:24-34)

 

(22:24, 개역) 또 저희 사이에 그 중 누가 크냐 하는 다툼이 난지라

(22:25, 개역)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방인의 임금들은 저희를 주관하며 그 집권자들은 은인이라 칭함을 받으나

(22:26, 개역) 너희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큰 자는 젊은 자와 같고 두목은 섬기는 자와 같을지니라

(22:27, 개역) 앉아서 먹는 자가 크냐 섬기는 자가 크냐 앉아 먹는 자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

(22:28, 개역) 너희는 나의 모든 시험 중에 항상 나와 함께 한 자들인즉

(22:29, 개역) 내 아버지께서 나라를 내게 맡기신 것 같이 나도 너희에게 맡겨

(22:30, 개역) 너희로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 또는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다스리게 하려 하노라

(22:31, 개역)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22:32, 개역)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22:33, 개역) 저가 말하되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도 가기를 준비하였나이다

(22:34, 개역) 가라사대 베드로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부인하리라 하시니라

 

부자는 부자인데 누가 더 더 더 나은 부자인가?

재산이 많은자?

아닙니다.

 

모든 재산을 다 잃어버려도 사랑이 넘치는 자입니다.

곧 많이 용서 받은자가 많이 사랑하는 자입니다.

 

즉 잃어버렸을때에 부자가 누가인가가 드러납니다.

 

그럼 이번에는 누가 크냐 하는 문제가 수수께끼로 펼쳐졌습니다.

 

편히 앉아서 먹는 자가 큽니까? 아니면 서서 수종드는 섬기는 자가 큽니까?

누가 봐도 편히 앉아서 먹는 자가 신분상으로 크다 라는 것이 상식입니다.

 

그런데 그 상식을 뒤집어 버릴줄 모르는 것은
크다 라는 의미를 모르는 것이다 라고

예수님이 그 상식을 엎어버립니다.

 

누가 크냐 ? 맞다! 앉아서 먹는 자가 크다. 그러나 섬기는 자가 더 더 더 크다 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섬기는 자가 없다면 그들이 편히 앉아서 먹을 수가 없다 라는 겁니다.

 

이렇게 밑바닥에서 편히 앉아서 먹을 수 있도록 끝까지 사랑하고

끝까지 섬기는 자가 있는데 바로 예수님 자신이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 섬기는 모습이 뭔가?

 

베드로는 자신이 예수님을 뒤따라 가는데 있어서 죽는 그 장소에 까지 라도 가겠다 라고 합니다.

참으로 큰 자 다운 모습이요 스승을 따르는 제자 다운 모습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데 있어서

베드로는 한가지 거쳐야 할 것이 있습니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마귀입니다.

마귀를 거쳐야

 

누가 큰 자인지를? 누가 섬기는 자인지를 알수 있다는 겁니다.

 

위에서 언급한 모든 것을 잃어버렸을때에 진정한 부자가 누구인가를 알수 있듯이

 

누가 큰 자인지? 누가 섬기는 자 인지를 눈에 보이지도 않는 마귀를 거치면 알수 있습니다.

 

바로

 

(22:31, 개역)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22:32, 개역)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베드로를 위해서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는 자가

큰 자요 섬기는 자 이다는 겁니다.

 

(25:23, 개역)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

(23:11, 개역)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22:26, 개역) 너희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큰 자는 젊은 자와 같고 두목은 섬기는 자와 같을지니라

(9:12, 개역)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큰 자는 허물이 많은 자 곧 어린 자, 작은 자의 허물을 가리우는데 있어서

일관 된 섬기는 모습이다는 겁니다.

 

그런 큰 자는 젊은 자요 두목이다 라고 했습니다.

 

예수님 자신의 섬기는 모습을 보여주고자

베드로의 섬김을 받는 것이 아니라

베드로의 7번 용서를 인정해 주시는게 아니라

 

도리어 770번 용서하시고자

베드로를 세 번 부인케 만들어서


마귀를 끌여들여

마귀가 베드로 내어놓으라 라는 그 율법
(죄 아래 가두기 위한)의 증서.

의문의 증서(사랑이 아닌 법, 예수님 외에는 사랑이 아닌 다 법을 따지는)

에 따른 청구 결제를 거부하십니다.

 

법을 위반해서라도 예수님은 베드로를 끝까지 허물치 않겠다고 용서하십니다.

 

법을 어기면서 까지 말입니다.

 

하나님의 법을 말입니다.

(즉 대제사장 여호수아에게 새 옷을 미리 준비했습니다. 갈아입혀줄려고 그런데 그 자리에 올수 없습니다.
누가 데리고 와야 하는데 말이죠. 마귀가 잡아 옵니다. 마귀는 율법 어긴자를 드디어 잡아와서 칭찬받을수 있다고 여긴 겁니다.
주님은 새옷 갈아입히고자 누가 데리고 왔으면 좋은데 라고 하는데 말입니다.
마귀의 역할은 좌편 검사 역할만 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역할은 우편 변호화 역할 입니다.
우리는 잡혀와야 주의 발등상 곧 심판대에서 준비된 새 옷을 비로소 입힘을 당하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율법의 목적이 남을 사랑하는 겁니다.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기는 것입니다.

 

율법을 지키는 것이 큰 자가 되는데

막상 큰 자가 되어버리니까 작은자를 고발하는 것이

마귀와 같은 인간의 법 지키기, 선행하기, 말씀지키기, 이레에 두 번 금식하기, 십의 이조를 드리기 가 되어 버린 겁니다.

 

(23:23, 개역)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외형적인 겉 껍데기를 갖추는데 도사들이 되어버렸다는 겁니다.

 

아무도 안 알아주는 섬김은 없어져 버린채
겉모양은 완벽한 율법 지킴에 빈틈이 없어져 버린 겁니다
.

맞습니다, 마땅히 그렇게 노력했으니 마땅히 편히 앉아서 먹는 위치 곧 높은 사람 큰 자가 된것 마땅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님입니다. 더 이상 큰 분이 없는 그 분이 하늘 영광까지 다 버리고 낮아져 버린 겁니다.
그럼 이 땅에서는 큰 자란 있을 수 없게 되어버린 겁니다.

하늘 영광까지 다 버렸으니까 말입니다.


큰 자
 

그것을 엎어버리는 자, 그 껍데기를 확 벗겨버리는 자는

 

예수님 뿐입니다. 그냥 예수님이 아닌 십자가에 죽으시기 까지 끝까지 섬김입니다.

 

왜 십자가 라는 하나님의 저주를 꼭 받아야 합니까?

 

그 정도로 우리의 껍데기는 안 벗겨진다는 반증입니다.

그 정도로 철저하게 갇혀 버렸습니다.

 

그래서 죽기까지 섬기는 자가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베드로를 예로 가장 좋은 예로 들고자

의도적으로 베드로의 세 번 부인을 말하심은

예수님 자신의 용서를 말하기 위함입니다.

끝까지 섬기심에 대해 말하기 위함입니다.

 

그것 때문에 베드로는 동원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의 끝까지 섬기심을 위해서 말입니다.

 

비 큰자 란 큰자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앉아서 편히 먹는 자가 아닌 서서 수종드는 자임에도 불구하고

큰 자 보다 더 더 더 큰 자인 초과잉의 큰자를 비큰자 라고 합니다.

 

앞 시간 중에서 비존재 라는 표현을 쓴 것이 바로 이런 의미입니다.

누가 봐도 존재가치성이 없는 비존재입니다. 존재가 아니다 라는 겁니다.

그런데 존재 보다 더 큰 더 더 더 존재의 가치를 훨씬 넘어서는 초과잉성을 보여주는 것이

비존재 라고 했습니다.

 

또 비필연 곧 우발성 우연성의 의미를 비필연이라고 했습니다.

필연이 아닌 비필연인 우발성인데 필연 보다 더 더 더 필연적인 초과잉적 필연이

비필연인 우연이라고 했습니다.

 

십자가는 우연입니다.

아무에게나 용서가 주어지지 않습니다.

끝까지 섬기시는 큰 자만이

많이 탕감하고 많이 용서하시는 분만이

그 분의 자기부인만이

우리를 회개케 하십니다.

 

끝까지 섬기시는 비필연이

우리에게 필연 보다 더 큰 필연으로써 사랑하심에 우리의 곧을 목을 꺽으시는

회개를 부으시는 겁니다.

 

지난 시간에 유월절은 갇혔기에 그 갇힘에서 패쓰 넘어가는 상황이다는 것이다 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그 갇혀있음에 전제 되어 있고

그 갇혀있음의 쇠사슬을 포로됨을 얽매있음을 끊어내는 작업이

 

마치 할례처럼 끊어내는 어떤 희한한 특이한 일들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유월절 어린양입니다.

분별 구별 단절된 어린양을 잡아서

 

급히 먹습니다.

허리에 띠를 띠고 말입니다.

 

얼마나 불편합니까?

 

잘못 먹다가는 죽는 것은 당연합니다.

 

맞습니다 살기 위해서

구원받기 위해서 유월절 어린양을 먹는 것이 아닙니다.

 

어린양의 죽음에 동참케 함이

문설주에 피 바르고 그 어린양의 살코기를 먹는 겁니다.

 

즉 패쓰 왜 넘어가느냐?

자기부인했기에 넘어간다는 겁니다.

즉 먹어서 살아남았기에 넘어가는게 아니라

어린양의 죽음에 동참 되었기에

죽었기에 넘어간 겁니다.

살아 있다면 다 죽여버리는 것이 유월절입니다.

 

즉 지금 나는 죽어 마땅한 자이구나 라고

유월절 어린양을 보고 알게 되었다는 겁니다.

 

죄책감도 아니요 회개의 달인도 아니요

이레에 두 번 금식함도 아닌

 

유월절 어린양을 보고 원인 없는 결과로

이유 없는 용서로 알게 되는 죽어 마땅한 자임을

어린양의 살코기를 먹으면서 급히 먹으면서

허리에 띠를 띠로 지팡이를 짚고 말입니다.

 

이것이 패쓰 하는 이유입니다.

죽었기 때문입니다.

피 발렸기에 아 죽었구나입니다.

 

아 유월절 어린양을 먹고 살아났구나 라는 인식이 있으면

패쓰가 안됩니다.

 

죽으면 죽으리라 라는 에스더의 의미는

이미 죽었기에 패쓰하는 겁니다.

 

죽었으니 죽일 필요가 없거든요

진노를 어떻게 피하는 줄 아십니까?

 

살아있으면 진노가 끊이지 않습니다.

죽으면 그 진노가 멈추는 겁니다.

 

그래서 피 발림 당하면 죽었다고 천사들이 패쓰 하고 넘어가는 겁니다.

 

십자가라는 하나님의 저주를 어떻게 넘어섭니까?

십자가를 통해서 아 구원 받았구나 라고

 

구원을 소유하게 되면 끊임없이 저주가 멈추질 않습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구원 받을 자격이 없다를 것을 아는

회개하는 영이 부어지는 것이

이미 죽었기에

 

죽일 필요가 없어서 패쓰 하는 겁니다.

 

베드로를 왜 섬긴다는 의미가 뭔가를 보여주기위해서 동원하시는 것일까요?

 

네 맞습니다. 죽여버리기 위해서입니다.

 

안 죽이면

주여 제가 주를 끝까지 따르겠습니다.

남들은 다 버려도 저는 절대로 버리지 않겠습니다 라는

살아있다는 티를 팍팍 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이것은 의문의 증서와 같이 모호합니다.

끝까지 섬김도 없고 큰 자도 아닌 겁니다.

 

그래서 죽여 놓고

그 죽은 자를 끝까지 섬기는 자가 누구인가를 봐야 할 입장이지

 

자신이 나서서 주님을 따르는 것이 섬기는 것이 아니다는 겁니다.

그것은 겨우 7번 용서와 같다는 겁니다.

 

주님의 섬김은 770의 초과잉성 용서요 섬김입니다.

 

그것을 봐야할 입장에 놓여있지

인간이 개입해 봒자

겨우 힘있고 젊었을 때 고때 잠깐 7번 했는 것으로

평생을 우려먹는 자기 육신의 자랑 밖에 안되는 겁니다.

 

그래서 그것을 치워버리도록 하는 초과잉성의 섬김을 보라는 겁니다.

모든 인간의 허물까지 다 덮는 초과잉성의 섬김 말입니다.

 

우리는 7번 용서 할려고 그거 볼려고 예수님 믿는게 아닙니다.

7번 용서 하고 7번 섬기고 힘빠져 탈락하며 날 알아주지 않는다는

인간의 한풀이를 볼려고 예수님을 믿는게 아닙니다.

 

정반대로 예수님으로부터 770번 용서 받는 그 섬김을 보고자 예수님을 믿는 겁니다.

모세는 변화산에서 7번 용서 자기도 해 봤다

구원 택도 없더라

그냥 예수님이 나를 770번 용서하시고 섬겨주십시오 라고 빨리 십자가에 죽어주십시오 라고 변화산에서 외치는 겁니다.

 

이것을 보는 것이 인자에 장대에 높이 달리는 것을 쳐다보는 겁니다.

이거 안 쳐다 보는 자는 예수님과 상관이 없는 겁니다.

 

자기 용서 자기 섬김 자기 회개 자기 금식 자기 말씀지키기

그 의문에 그 모호함에 그 흐릿함에 빠져 살다 지옥에 갈 뿐입니다.

 

나의 모호한 7번 용서를 깨뜨리기 위해서

 

예수님은 비 큰 자로 오신 겁니다.

 

나의 크다 나의 섬김을 그 모호함을 깨뜨리기 위해서

비 큰 자 곧 서서 수종드는 섬기는 자로 오신 겁니다.

 

너가 믿음이 떨어지지 않도록 기도하시는 분으로 오신 겁니다.

 

(22:31, 개역)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22:32, 개역)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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