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에는 원수이었으나 당일에 서로 친구 (23: 1-12)

 

(23:1, 개역) 무리가 다 일어나 예수를 빌라도에게 끌고 가서

(23:2, 개역) 고소하여 가로되 우리가 이 사람을 보매 우리 백성을 미혹하고 가이사에게 세 바치는 것을 금하며 자칭 왕 그리스도라 하더이다 하니

(23:3, 개역) 빌라도가 예수께 물어 가로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대답하여 가라사대 네 말이 옳도다

(23:4, 개역) 빌라도가 대제사장들과 무리에게 이르되 내가 보니 이 사람에게 죄가 없도다 하니

(23:5, 개역) 무리가 더욱 굳세게 말하되 저가 온 유대에서 가르치고 갈릴리에서부터 시작하여 여기까지 와서 백성을 소동케 하나이다

(23:6, 개역) 빌라도가 듣고 묻되 저가 갈릴리 사람이냐 하여

(23:7, 개역) 헤롯의 관할에 속한 줄을 알고 헤롯에게 보내니 때에 헤롯이 예루살렘에 있더라

(23:8, 개역) 헤롯이 예수를 보고 심히 기뻐하니 이는 그의 소문을 들었으므로 보고자 한 지 오래였고 또한 무엇이나 이적 행하심을 볼까 바랐던 연고러라

(23:9, 개역) 여러 말로 물으나 아무 말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23:10, 개역)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서서 힘써 고소하더라

(23:11, 개역) 헤롯이 그 군병들과 함께 예수를 업신여기며 희롱하고 빛난 옷을 입혀 빌라도에게 도로 보내니

(23:12, 개역) 헤롯과 빌라도가 전에는 원수이었으나 당일에 서로 친구가 되니라

 

 

인간과 마귀가 어떨때에 발악을 하는고 하니

 

예수님이 우편에 앉는다 라는 것에 심히 발악을 하는 겁니다.

 

그 말을 듣고 옷을 찢으면서 거룩함을 유지할려고 합니다.

예수의 참람죄로 인해 세균이 확산되지 않게, 거룩이 상실이 되지 않기를 원했던 겁니다.

그 정도로 교리 플러스 실천에 미쳐있는 종교인들이였던 겁니다.

 

이런 우상숭배자들이 지금 예수님을 죽이는 성전종사자이였듯이

오늘날 교회도 동일한 겁니다.

 

자 이제 예수라는 우리 손에 죽는 것은 기정사실화 된 것입니다.

어떻게 해서든 우편에 앉는 것을 막아설테니까 말이죠.

 

심판의 주 이자 동시에 구원의 주가 되시는 자리가 우편입니다.

 

딴사람은 몰라도 예수 너는 안된다 라는 겁니다.

즉 그 말은 예수만이 안된다는 것이 아니라 그 어느 누구도 안된다는 거죠

? 그것을 판단하는 기준이 결국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심사 검열을 통과하라 라는 겁니다.

아니 통과해도 너는 안된다는 거죠.

 

이미 예수님은 마귀의 세가지 시험을 통과했습니다.

 

그렇다면 모든 인간은 예수님 앞에 무릎 꿇어야 할 입장 뿐인데

아주 아주 역설적으로 예수님을 테스트 하겠다는 입장 뿐인게 인간의 모습입니다.

 

그러니 이것은 전적으로 일방적인 편파성에 달린 겁니다.

육은 육대로 편파적이고

영은 영대로 편파적이기에

두 소욕의 싸움이 될 수 밖에 없는 겁니다.

 

우리는 자꾸 영의 편에 설려고 하는데

우리는 육의 옷을 입을 자일 뿐입니다.

그런 입장에서 예수님이 어떻게 우편에 앉는지를 목격해야 합니다.

왜 우편에 앉으셔야만 하는지를 말입니다.

 

구원자로써가 아니라 남이 아닌 나를 제대로 심판하실 심판주로써 우편에 앉는지 말입니다.

나를 제대로 심판 할 줄 모르는 자는 나의 구원자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육을 제대로 차단 단절 시킬줄 모르는 자는 나의 구원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런 입장에서 모든 인간은 예수님이 우편에 앉는 것을 적극적으로 막아서는

마귀가 들린 귀신들린자들이다는 겁니다.

그런 입장에서 빼내시는 주님은

베드로는 세 번 부인케 하심으로써

육의 한계를 빨리 다달으게 하심으로써

보호하시는 겁니다.

예수님의 눈물이 바로 그런 의미였던 겁니다.

닭이 세 번 울어야 함도 그런 의미였던 겁니다.

 

이런 거사 속에서 인간은 뭔가 대단한 일을 하겠다고

예수님을 절대로 원수들에게 내어주지 않겠다고 하는

그런 일에 목숨걸겠다고 하지만

 

정작 누가 누구를 지켜야 한다는 겁니까?

예수님이 도리어 베드로를 그런 되도않는 교리 플러스 실천에서 건지시고자

닭의 울음 세 번을 준비하셨던 겁니다.

마귀에게 넘어가지 않도록

놀라운 탄식으로써 세 번 우셨던 겁니다.

세 번이라는 숫자가 의미있는게 아니라

그 간극을 벌리는 겁니다.

멀찌감치 떨어뜨리는 겁니다.

우울증(자살)방지 기술로써 말입니다.

 

이렇게 인간의 속내를 들추어내심으로써

예수님의 죽음은 의미가 있는 겁니다.

 

나의 속내를 들추어내시기 때문에

예수님은 나의 삶과 무관한 분이 아니다 라는 겁니다.

 

모든 인간은 시공간을 초월애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과 무관한 상태로 놓여있지 않는 겁니다.

왜 이 십자가의 용서의 죽음이 바로 새창조 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입장에서 이 창조의 은혜와 반대편에 놓여진 인간의 발악 곧 마귀의 발악은

우편에 앉는 주님을 어떻게해서든 조롱하는 겁니다.

 

아이구 너가 구원자라면서 왜 너 자신은 못 구원하니?

그래놓고 구원자라고? 그래가 우편에 앉기나 하겠니?

 

 

우편에 앉을려면 내가 어느 손으로 너의 뺨을 때렸는지 맞출줄 알아야 하잖아?

그래 가지고 선지자가 되겠니? 뭐 심판주라고?

이래 나약해 빠졌고

이래 어리석기 짝이 없는 십자가의 저주 속으로 들어가는데

누가 너를 심판주로 구원자로 믿겠니?

 

죽는 주제에 무슨 선지자 노릇이니? 너 자신이나 제발 구원해 보렴

제발 제발

 

그러면 믿어 줄게 믿어준다니깐

 

이런 악마성이 오늘 본문에 나오는 두 인물 곧 두 왕의 사고방식에서도 그대로 나옵니다.

 

이 두 왕의 관계는 예수님의 등장으로 인해

그 전에는 서로 원수 지간이였는데

이제는 서로 친구가 되었다는 겁니다.

예수님 때문에 말입니다.

 

이것이 마귀의 세 번째 예수님을 시험한 내용과 연관이 됩니다.

전에는 원수지간인데 어떻게 예수님 때문에 서로 친구가 된 것일까요?

그것은 정치적인 이익 관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친구란 또는 원수지간이란

유익의 유무와 연관됩니다.

나에게 유익이 되면 친구요

나의 무익한 해로운 존재는 원수지간이 되는 겁니다.

 

어제의 친구가 오늘은 적이 되고

어제의 적은 오늘에 친구가 되는 것이

모두다 이익 관계에 따른 정치성 때문입니다.

 

이 몸이라는 육체는 어쩔수가 없는 겁니다.

 

마귀가 병신 바보가 아닙니다.

피조물 중에서 가장 똑똑합니다.

 

온 천하 만국을 줄테니 나에게 절하라 라고 합니다.

그 정도로 예수님이 누구이다는 것을 알기에

그럴 가치가 있어서

온 천하 만국을 다 주겠다는 정치적인 도박으로 승부한 겁니다.

 

지는 게임일 같으면 아예 하지도 않는 겁니다.

 

얼마나 마귀 자신이 온천하 만국을 주고도 아깝지 않을 정도로

예수님에게는 뭔가 의미가 있다 라는 겁니다.

 

그것을 베팅 거는 겁니다.

 

이윤이 된다는 겁니다.

 

마귀가 이럴 정도면

우리는 오죽 더 하겠습니까?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고 임금삼고자 며칠을 따라잡을려고 하고

예수님은 끝까지 도망치시는 겁니다.

 

유익이 되는 뭔가를 발견했기에

예수님에게 올인하겠다는 인간들이 한 둘이가 아닙니다.

마귀가 그런 입장에서 예수님을 세 번 시험한 겁니다.

 

(4:8, 개역)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4:9, 개역) 가로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4:10, 개역)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단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그러니 오히려 마귀가 예수님을 더 증거하는 셈인 거죠.

(그러니 제발 전도하지 마세요 선교하지 마세요 포교하지 마세요

마귀들이 더 잘 알아서 합니다. 전도하는 자들은 마귀들입니다.

전도로 실천 행함을 펼칠게 아니라

바로 이러하기 때문에

도리어 예수님으로부터 전도 받으세요

이런 상황을 예수님이 펼치셨다는 것을 전도 받으시면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우편에 앉아야 함에 있어서 일체 타협과 양보가 없습니다.

심판을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선과 악을 가려내어서 백성들을 변호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일에 배재 소외 단절이 되어버린 입장이기에

오로지 지혜의 왕의 재판만이 유일한 희망인 겁니다.

 

내가 내 스스로 선과 악을 판단할 수 없을 정도로

마귀로 인한 선악의 과일에 장악당해 버린 겁니다.

그래서 선과 악이

친구와 원수 됨이

나의 유익에 따라 왔다리 갔다리 할 정도이기에

오로지 예수님의 우편에 앉으시는 심판만이 유일한 희망일 수 밖에 없다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 두 지도자가 나옵니다.

바로 빌라도와 헤롯왕입니다.

 

빌라도는 철저하게 이성적인 모습을 보입니다.

그 어떤 인간들의 정치적인 올무에 말려들지 않고자 하는 모습입니다.

그런 모습 조차 올바른 정치인으로써 남겨지고자 하는

명예와 지혜(철학)을 중요시 여김으로써 함부로 판단치 않는

재판을 펼치는 겁니다.

 

유대인들의 함정고소에도 말려들지 않고자

갈릴리 사람 예수를 저들의 관할자에게 넘기고자

마침 예루살렘에 있는 헤롯에게 넘겨버리는 겁니다.

 

 

헤롯은 그야말로 마귀들린 그 모습을 그대로 표출합니다.

오늘날 종교꾼들 처럼

기적을 요구하는 악한세대의 왕입니다.

 

세례요한을 죽임으로써 그가 다시 살아났다는 소문으로 인해

예수가 세례요한이냐? 라는 호기심이 오래전부터 있어서

 

기적에 대해서 호기심을 가지고서

예수가 자신에게 온다는 것을 심히 기뻐했지만

그 어떤 질문에도 대답지 않음으로써 도리어 빌라도에게 돌려 보내버립니다.

 

자신의 호기심을 풀수 있는 그 어떤 유익도 없기에 말입니다.

 

자 여기서도 유대인 대제사장과 서기관이

고소한 것이 무효화 되니까

무효로 끝내버리는 것이 아니다

더욱더 힘써서 끝까지 고소를 합니다.

 

그러든 말든 헤롯은 예수님을 그저 마음껏 조롱하고 끝내버리고

골치아픈 문제를 빌라도에게 더 넘겨버리는 겁니다.

그래서 원수지간이였던 빌라도에게 이제는 친구로 지내자 라는 식으로

자기유익만을 쫏고있지 유대인의 더욱더 힘써서 고소하는 그 내용에는 관심도 없습니다.

 

(23:11, 개역) 헤롯이 그 군병들과 함께 예수를 업신여기며 희롱하고 빛난 옷을 입혀 빌라도에게 도로 보내니

(23:12, 개역) 헤롯과 빌라도가 전에는 원수이었으나 당일에 서로 친구가 되니라

 

정치인이 백성의 말을 듣는 자들이 아닙니다.

자기유익과 일치하면 백성을 섬기는 자라고 부풀려서 과잉포장선전하는

끝가지 자기유익만을 챙기는 것이지

백성을 따르는 자가 아닌 겁니다.

 

이런 면에서 유대인들은 어떤 지도자의 형편이든 간에

상관없이 오로지 예수님이 우편에 앉는 것을 막고자 하는 마귀에게 홀려서

끝까지 고소하는데 몰두해 버리는 겁니다.

 

요즘 재미있게 보는 것이 비밀의 문인데

아침드라마를 보면 아침부터 웅장한 음악이 댓바람 아침부터 꽈과광꽝~~~~~~~~

울려퍼지는 겁니다.

청담동 스캔들인데

인간의 이야기는 뻔합니다.

과거는 왕 자리를 두고 싸움벌이는 정치판이고

현재는 대기업 회장자리를 두고 싸움벌이는 정치판입니다.

 

성경은 구약때 성전(솔로몬) 자리를 놓고 싸움벌이들이

오늘날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가장 낮은 자리

아무도 쳐다보지 않는 자리

 

즉 십자가의 저주인 해골의 언덕을 놓고 서로 싸움을 벌이는 자는 아무도 없고

그 어떤 시대에도 없었고 그런 공간을 놓고 싸우는 자도 없습니다.

 

(27:33, 개역) 골고다 즉 해골의 곳이라는 곳에 이르러

(15:22, 개역) 예수를 끌고 골고다라 하는 곳(번역하면 해골의 곳)에 이르러

(19:17, 개역) 저희가 예수를 맡으매 예수께서 자기의 십자가를 지시고 해골(히브리 말로 골고다)이라 하는 곳에 나오시니

 

이 원수의 성문을 차지할려고 서로 싸우는 자는 그 어디에도 없다는 거죠.

나요 나요 내가 먼저 저주 받을께요

아닙니다. 당신은 나 중에 저주 받으세요 제가 당신보다 먼저 저주 받을께요

 

라고 서로 서로 저주 먼저 받겠다고 서로 그 자리를 먼저 차지할려고 싸우는 자는 아무도 없다 라는 겁니다.

 

[비밀의 문] 이라는 드라마에

한석규 영조는 무능한 왕으로써 하루 하루 힘센 당파에 빌이붙어야만 하는 입장 뿐이고

 

노론과 소론은 마치 선과 악처럼 이 왕을 가지고 놀고 있고

 

이선 이제훈과 백성은 중간에 낑긴 목에 걸린 경계인이 되어

내뱉어지지도 않고 그렇다고 삼켜지지도 않는 중간에 낑긴 간질병환자 죄인으로 잡히는 겁니다.

정치적인 힘에 의해 희생물로 소모품 되듯이 말입니다.

 

마치 솔로몬 재판과 비슷한 구조입니다.

 

 

도둑맞은 편지 맹의와 연관된 라캉의 L 도식처럼 말이죠.

 

무능한 왕 실재계 (아하수에로 왕)

 

권력을 쥐락펴락 하는 장관 상징계 (하만)

 

항상 의심받는 죄인으로 누명을 써야 하는 죽어야만 하는 왕비 상상계 (에스더)

 

이것이 신약에서는 뒤바뀌어

죽으면 죽으리라 라고 유대인이 구원받았지만

이제는 반대로 권력과 한패가 되어서

자리가 바뀌게 되는 겁니다.

 

아무런 답이 없는 무답의 하나님

십자가에 못 밖으라 외치는 권력에 동조하는 백성과 성전종사자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라고 외치는 무능한 얼룩 예수님

 

어떤 곳이나 어디서나 어떤 시대나 그 어떤 시공간이든

이런 구조 속에 놓여져 있다는 겁니다.

위치도 수시로 변하면서 말입니다.

 

이렇게 전에는 원수였던 헤롯과 빌라도가 예수님을 죽이는데 있어서

서로가 필요로 하는 친구가 되었다 라는 것은

그들도 원치 않는 모습인데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그들은 반드시 손 잡아야 한다는 겁니다.

원치 않는데 말이죠.

그들도 어쩔수 없는 겁니다.

 

이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서는 어쩔수 없는 최선의 선택입니다.

이것이 강요된 선택인 거죠.

 

실재계가 그들을 움직이는지도 모르고 말이죠.

 

다음 시간에 살펴 볼 것이지만

미리 한번 살펴 보면

 

빌라도에게 소송 걸었던 유대인들은 죄를 찾지 못하겠다 라는 이유로 헤롯에게 보내졌지만

헤롯은 예수님이 기적을 행하는가에 대한 호기심 뿐

아예 유대인들의 간절한 바람에 전혀 관심이 없고

예수님도 답을 하지 않아서 도로 돌려 보냅니다.

 

이제 빌라도는 이들의 자기유익에 말려들지 않고자 그렇게 힘썻지만

이미 유대인들이 빌라도의 약점을 파악하고

대중의 민란과 소동을 일으키겠다 라는 협박에 그만 무릎을 꿇고 마는 거죠.

 

자 이렇게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뺑뺑이 세 번씩이나 돌면서

자신들이 요셉의 입장에서 반드시 예수님을 회개 시키겠다는 겁니다.

회개만 하면 자신들은 용서해 주겠다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일체 양보가 없습니다.

 

예수야 너의 죄로 인해 내가 이 대제사장인 내가 대신 옷을 찢지 않느냐

너의 죄악을 회개하라 그러면 나는 요셉처럼 너를 위해 얼마든지 울어줄수 있고

욥처럼 욥의 세친구를 위해 속죄제를 얼마든지 드릴수 있다

 

이런 입장에서 이들도 힘써서 고소를 하는 겁니다.

 

얼마든지 예수를 위해 요셉처럼 울어주겠다는 겁니다.

 

제발 회개만 하라 라는 거죠.

 

바로 이것이 7번 용서하겠다는 인간의 악마성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770이라는 묵시가 있는데

왜 쓸데없이 역사속의 7번 용서에 무릎을 꿇어야 하나요?

770이 더 나은 제사인데?????

 

용서 하겠다는 인간의 악마성

사랑하겠다

이웃사랑실천하겠다

말씀지켰다

십의 이조 이레에 두 번 금식하겠다

이 모든 것이 인간의 악마성입니다.

그래서 요셉이 되어서 예수님을 뺑뺑이 돌려서 간극을 벌리겠다는 겁니다.

이것이 마귀가 장악한 유대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용서 도리어 받아라 라는 겁니다. 간극 벌림을 당하여라 라는 겁니다.

사랑할 생각 하지 말고 사랑 받아야 할 입장 뿐이다는 겁니다. 곧 긍휼 용서죠

이웃사랑실천할 생각 하지 말고 너가 이웃으로부터 불쌍히 여김 받아야 할 입장이다는 겁니다.

이웃은 예수님 뿐이거든요.

말씀 지킬 생각 하지 말고 말씀을 다 이루신 예수님의 용서를 받아라 라는 겁니다.

십일조 바치는 자는 지옥갑니다. 십일조 안 바치는 자도 지옥갑니다.

 

이런 말을 하면 또 유대인처럼 가이사에게 세금 안 바친다고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고소하듯이

김대식이가 하나님에게 십일조 안 바친다고 하나의 죄목으로 삼는 것이 오늘날 교인들인 겁니다.

십일조 내지 마세요 지옥 갑니다.

오직 십일조 내든 안내든 다 지옥가는데

천국가는 자는 십일조를 받는 자만이 천국 갑니다.

그러니 내냐 안내냐 하는 행함 문제를 떠난 믿음의 문제 곧 역사의 문제를 떠난 묵시의 문제인

 

십의 일 이라는 구분 분별 차이를 우리는 받는데

바로 맏물 되신 거룩으로 구분된 예수님을 받아 먹는 겁니다.

내 살과 피니라 라는 믿음 말입니다.

 

그러니 역사적인 행함의 문제 내냐 안내냐만 따지는 인간들은 무슨 소리인지 모르는 겁니다.

즉 내냐 안내냐 는 유대인만 의식하잖아요

그것이 바로 마귀가 장악한 유대인입니다.

교회가 장악한 종교꾼들은 십일조 받지 못하는 자는 다 지옥간다고 하니까

이게 무슨 말인지 모르는 겁니다.

 

그러니 그것을 대신 때우는 방법이

십일조 내냐 안내냐 라는 법으로 기준을 삼지

십자가의 용서로 기준을 삼지 못하는 겁니다.

 

교회 다니는 자는 다 지옥 갑니다.

교회 안다니는 자도 다 지옥 갑니다.

 

오직 성령의 전인 사람만 천국 갑니다.

성경말씀 자체가 묵시적 언어인 방언인데

 

이것을 인간들이 다 알아먹는 용어로 바꾸니까

우상숭배가 되는 행함이 되는 겁니다.

믿음 조차도 종교적 용어로써 결국 행하는 문제가 되니

맨날 사기꾼들에게 몸과 마음 다 빼앗기는 겁니다.

 

분명히 말합니다.

교회 다녀도 지옥 안다녀도 지옥

오직 성령의 전이 되는 자만 천국입니다.

 

즉 산상수훈이 율법을 더 강화하는 듯이 보이듯이

오직 성령의 전만 되는 자가 천국된다는 그 간극만이

그 초과잉성만이 천국을 제대로 보여주는 것이지

 

인간의 행함을 요구하는 발언들 자체가 다 악마적인 것입니다.

 

이 싸움이 지금 빌라도 헤롯 유대인들 손에서 뺑뱅이 돌림 당하면서

예수님은 그들의 실체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마지막 세 번째 마귀의 시험이 바로 이런 모습인 겁니다.

 

온천하 만국을 줄테니 나에게 절하라 라는 겁니다.

무릅 꿇어라 라는 겁니다.

빌라도는 아무리 버텨도 결국 유대인들에게 무릎 꿇습니다.

그것이 자신의 유익에 부합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어제의 원수 오늘의 친구인 인간의 악마적인 속모습입니다.

 

그러나 다행히도 예수님은 무릎을 안 꿇었다는 사실입니다.

무릎을 안꿇었기에

인자는 우편에 앉는 겁니다.

 

심지어 얼마나 인간들이 악마적인지

그 다음 장면에서 여자들이 예수님이 십자가 형벌 장으로 옮기는 가운데

무거운 십자가를 지는 모습에 안타까워서 눈물을 흘립니다.

 

안됐네 청년

그러게 작작 좀 정치꾼들에게 덤비지

괜히 덤벼서 개죽음 당하잖아

참 좋은 청년인데 안됐네 안됐네 라고 우는 겁니다.

 

예수님이 휙 돌아서서 째려보면서

야야 누가 누구를 걱정 하노

내 눈에는 종말의 불이 너희 가정에 곧 떨어지는데

정작 나를 울게 아니라 너와 너의 자녀를 위해 울어야 하지 않겠니?

남 걱정할 입장이 아니라 지금 너의 발등에 불 떨어졌어 라고 하는 겁니다.

 

여자들에게 너무 지나친 말씀이 아닌가요?

 

그런데 예수님은 일체양보가 없기에 반드시 하셔야만 하는 말씀인 겁니다.

즉 실재는 내가 고통스럽게 무거운 십자가 지고 넘어져서 안타까워하는 눈물이 아니라

진짜 눈물의 공포는 내가 십자가를 지고 약속을 이루지않으면

너는 심판의 불에서 건짐받을수 없는 입장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기도하라라는 겁니다. 너와 너 자식을 위해서 울어라 라는 겁니다.

심판의 불이 그까짓 초코파이 정으로 우는 눈물을 봐 주지 않는다는 겁니다.

 

불이 아니 착한 놈이라고 비켜가고

나쁜놈이라고 해서 불이 덮치는게 아니다 라는 겁니다.

 

유월절에 지금 벌어지는 사건인데

유월절은 애굽이나 이스라엘이나 다 덮칩니다.

심판은 둘다 다 덮치는데 한 쪽은 이미 죽었기에

죽었구나 심판 벌써 받았구나 라고 피 보고 넘어갈 뿐이지

피 없는 자는 아무리 이스라엘 약속의 민족이라고 해도

심판이 넘어가지는 않는 겁니다.

 

그러니 유월절 어린양 아니면 다 죽는 겁니다.

예수님이 그래서 나를 먹어라 라는 겁니다.

 

내 살과 피를 먹지 않는 자는 나와 상관이 없다 라는 겁니다.

 

이 살과 피와 무관하게 눈물 흘리는 악마성

나는 너를 위해 눈물 흘릴줄 안다는 이 악마성은

심판을 넘어설수가 없습니다.

 

요셉과 같이 형들을 뺑뺑이 돌리면서 눈물흘리듯이 예수님을 뺑뺑이 돌려서라도

예수를 회개케 하는 이들의 열심

잘못했다 라고 회개만 하면 용서해 주겠다는 이 일심으로만 이들이 행동합니다.

 

7번 눈물과 770번 눈물의 싸움입니다.

 

저들도 모든 선한역량을 다 끄집어 내어서 지금 예수를 회개시키고자

눈물 흘릴 준비가 되어 있고

옷을 찢어서 회개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겁니다.

 

마치 엘리야의 갈멜산 싸움과 같은 식입니다.

누가 자신을 엘리야의 심정이라고 우기겠습니까?

 

서로가 서로를 자기자신만이 엘리야의 심정이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대제사장은 이런 심정으로 예수님을 무릎 꿇게 해서

회개시킬려고 하는 겁니다.

세 번째 마귀의 시험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아낙네들도 이런 입장에서 눈물 흘리는 겁니다.

 

예수님의 눈물이 안 보이니까

내 눈물 흘린 것이 의미가 되기 위해서 예수님을 위해 우는 겁니다.

 

예수야 너가 잘못한 참람한 말, 불경스러운 말을 잘못했다고 인정만하면

회개를 하면

언제든지 우리는 너를 위해 회개하면서 눈물 흘릴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단다.

 

온천하 만국의 영광을 줄테니 나에게 절하라

요셉이 주가 되었듯이

형제들이 자기 죄를 인정했드시

회개만 하면 너를 위해 요셉처럼 눈물 흘려 주마

 

그런데 그것이 악마적인 모습이다는 겁니다.

 

지극히 평범한 인간의 정서를 이렇게 예수님이 무시하기요?

 

그런데 어쩝니까 그것이 심판의 불을 못 통과, 패쓰 못한다는 입장에서는

결국 사기요 거짓이요 악마적인 것이 맞다 라는 겁니다.

 

현실을 직시하라는 말이죠

눈에 보이는 존재에서 나오는 행동인 눈물이 진짜 인지

 

진짜 예수님의 눈물인 묵시적인 행동

즉 도저히 납득이 안되는 행동이 진짜 실상인지?

 

역사적인 행함(가능성)과 묵시적인 믿음(불가능성)의 대충돌이요 초간극인 겁니다.

 

믿음만이 실상을 드러내는 겁니다.

 

즉 보이는 역사의 세계다 다 거짓이다는 겁니다.

 

그래서 십자가로 돌진하시는 겁니다.

 

이것을 막아서고자 인간들은 발악을 하고 있고

결국 눈에 보이는 인간들에게 저들 스스로 서로가 무릎을 꿇는 겁니다.

어제는 원수지간 지금은 친구지간

 

눈에 보이는 당장의 유익이 아니면 못사는 역사의 세계이다는 증거이죠

 

그거 불에 태워버리겠다는 실상 곧 믿음이 바로 예수님의 무릎 꿇지 않으심입니다.

 

다만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그를 섬기라 라고 말입니다.

 

(4:8, 개역)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4:9, 개역) 가로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4:10, 개역)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단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이것이 세상을 이기는 복음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이기는 십자가입니다.

 

나를 이기는 피 용서입니다.

 

넉넉히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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