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엠마오 보다 더 뜨거운 예루살렘의 예수님의 죽음

 

막으시는 하나님

성경을 풀어 주실 때 뜨겁지 아니하더냐 (엠마오에서 만난 예수님) (24:13-35)

  

(24:15, 현대어) 그때 예수께서 가까이 가셔서 그들과 함께 걸으셨다.

(24:16, 현대어) 그러나 하나님께서 막으셨기 때문에 그들은 예수를 알아보지 못하였다.

 

(24:13, 개역) 그 날에 저희 중 둘이 예루살렘에서 이십오 리 되는 엠마오라 하는 촌으로 가면서

(24:14, 개역) 이 모든 된 일을 서로 이야기하더라

(24:15, 개역) 저희가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에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저희와 동행하시나

(24:16, 개역) 저희의 눈이 가리워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24:17, 개역)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길 가면서 서로 주고 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하시니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 서더라

(24:18, 개역) 그 한 사람인 글로바라 하는 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당신이 예루살렘에 우거하면서 근일 거기서 된 일을 홀로 알지 못하느뇨

(24:19, 개역) 가라사대 무슨 일이뇨 가로되 나사렛 예수의 일이니 그는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말과 일에 능하신 선지자여늘

(24:20, 개역) 우리 대제사장들과 관원들이 사형 판결에 넘겨 주어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24:21, 개역)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구속할 자라고 바랐노라 이뿐 아니라 이 일이 된 지가 사흘째요

(24:22, 개역) 또한 우리 중에 어떤 여자들이 우리로 놀라게 하였으니 이는 저희가 새벽에 무덤에 갔다가

(24:23, 개역) 그의 시체는 보지 못하고 와서 그가 살으셨다 하는 천사들의 나타남을 보았다 함이라

(24:24, 개역) 또 우리와 함께한 자 중에 두어 사람이 무덤에 가 과연 여자들의 말한 바와 같음을 보았으나 예수는 보지 못하였느니라 하거늘

(24:25, 개역) 가라사대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24:26, 개역)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24:27, 개역) 이에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24:28, 개역) 저희의 가는 촌에 가까이 가매 예수는 더 가려 하는 것 같이 하시니

(24:29, 개역) 저희가 강권하여 가로되 우리와 함께 유하사이다 때가 저물어 가고 날이 이미 기울었나이다 하니 이에 저희와 함께 유하러 들어가시니라

(24:30, 개역) 저희와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매

(24:31, 개역) 저희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보더니 예수는 저희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24:32, 개역) 저희가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24:33, 개역) 곧 그 시로 일어나 예루살렘에 돌아가 보니 열한 사도와 및 그와 함께 한 자들이 모여 있어

(24:34, 개역) 말하기를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나타나셨다 하는지라

(24:35, 개역) 두 사람도 길에서 된 일과 예수께서 떡을 떼심으로 자기들에게 알려지신 것을 말하더라

 

 

엠마오(뜨거운 온천 이라는 뜻)로 가는 길에 예수님을 만난 내용입니다.

참고로 다음 본문의 제목을 미리 정해보면

예수님이 죽은 장소 예루살렘으로 다시 돌아가다 라는 의미로 정해 보면

오늘 본문은 예루살렘을 떠나는 장면이다는 것이다는 거죠.

 

다른 복음서 마가복음에서는 시골이라고 했습니다.

도시에서 시골로 내려간 것이지요

 

즉 구원과 연관된 장소가 예루살렘 도시였는데

이제 구원은 물 건너간 일이 되어버렸기에

모든 것을 접고 시골로 즉 자신들의 처음출처인 곳으로 되돌아 가는 것입니다.

 

결국 예루살렘은 흐름이 있다 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흐름이 졸지에 단절이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구원의 문이던 예루살렘의 원수의 성문으로써 단절이 되어버린 겁니다.

그래서 모든 것이 차단 당해 버린 겁니다.

이제 구원은 없고 각자 자기의 고향인 시골로 돌아가는 겁니다.

 

이들의 출처였던 곳으로 말이죠. 곧 육 입니다. 육으로 태어나서 육으로 돌아갈 뿐입니다.

 

모든 필연들이 다 무너져 우연이 되어버린 겁니다.

 

그럼에도 이상하게 지난 시간에 말했듯이

제자 라는 표현을 안 쓰고 사도라는 표현을 썼으면서도

허탄한 말로 여겼더라 즉 믿지 않더라 라고 했습니다.

본인들은 제자일 뿐이지

사도라고 자신들은 직시하지 않습니다.

일방적인 편파적 직분을 미리 부여받은 겁니다.

사도란 오로지 주의 주 되심을 증거하기 위한 목적으로써의 사도인 겁니다.

왜 사도가 되었으냐?

이렇게 믿지도 않는데

왜 사도 라는 표현이 일방적으로 붙여지는 것일까요?

그것을 단절이라고 또는 우연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원인 없는 결과다 라는 거죠.

 

결과란 원인의 부재입니다.

 

끝이 좋으면 다 좋다 라는 겁니다.

 

그런데 원인이 있으면 결과가 부재 가 되는 겁니다.

 

늘 미완료 속에서 의문들이 계속 찝찝하게 남게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단번의 제사 라고 했습니다.

 

단 한 번의 제사로 다 이루어 버린 겁니다.

그러나 인간의 믿음 곧 인간의 제사는 늘 아쉬움만 남고 계속 해서 의문의 미로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겁니다.

 

제사를 안 드려서가 아니라

더 나은 제사가 아니기에 단절이 아니다 라는 겁니다.
계속해서 필연화 시켜서 잇고 잇는 개방성을 외치지만

필연은 커녕, 개방은 커녕, 오히려 모호한 의문만 계속적으로 맴돌게 될 뿐입니다.
뭐 시원하게 끊어지는 단절이 없이 모호한 짖만 계속할 뿐입니다.
 

더 나은 제사는 원인 없는 결과로써 원인 자체가 부재입니다.

이것이 바로 처음사랑입니다.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말이죠.

 

그런데 인간의 제사는 인간 자체가 원인이 되어버리기에

늘 모호함만 더해질 뿐이라서

단번에 완료할 수 없는 제사인 겁니다.

그래서 원인만 남고 결과는 부재가 되는 식입니다.

 

사도란 원인 없는 결과로써의 직분입니다.

주의 주 되심 때문에 말이죠.

 

그런 직분의 기능을 부여받고도
(물론 본인들은 모릅니다, 주님의 살아게심이 일방적으로 붙여여 버린 편파적인 결과일 뿐입니다.)

 

여인들의 예수님 부활 소식을 허탄한 말로 취급해 버렸습니다.

 

즉 이들 조차도 단절이다는 겁니다.

사도임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약속하신 성령을 받기 전이라

이 단절성을 제대로 보여주는 단절의 단절인 것이지요.

 

은사란 결국 우연이다는 겁니다. 결과일 뿐이요 원인은 부재이다는 겁니다.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약속하신 성령을 받고서 사도로써 본격적인 활동을 한다면

과연 사도들은 단절을 외칠까요? 아니면 개방을 외칠까요?

 

제가 어머니께 사도들이 믿지 않았다고 분명히 본문을 제시하고

이렇게 물으니까

이 간극이 아닌 다시 합쳐짐을 외친다고 하셨습니다.

제가 아니다 라고 했습니다.

사도행전의 사도들의 외침은 한결같습니다.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셨다 라고 증거합니다.

 

(5:30, 개역)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

 

그냥 주님이 부활 하셨다가 아니라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라고 합니다.

 

왜 이 부정성을 담아야 하는 것일까요? 왜 이 단절성을 반드시 먼저 내세우는 것일

까요?

 

단절의 단절은 결국 부정의 부정은 초긍정의 의미입니다.

우연이란 비필연 즉 필연이 아닌게 아니라

필연 보다 더 필연적인 초과잉의 필연이다는 겁니다.

 

한마디로 너희가 아무리 미워해도

아무리 죽여도

아무리 십자가에 못 박아도

 

그것이 무의미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게 해 버린다는 겁니다.

고로 인간의 행함은 원인 있는 결과로써 사실상 결과의 부재인 겁니다.

인간이 추구하는 필연 곧 행함은 결과 자체가 없는 셈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반대로 이런 아무것도 아닌 십자가에 충성하십니다.

인간들이 우연이라고 취급해 버리는 어리석고 미련한 십자가요

거리끼는 불쾌한 걸림돌인 하나님의 저주로써의 십자가에

그 불의한 십자가에 충성하신 겁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인데

이 우연에 충성하신 겁니다.

 

이것이 믿음이다는 겁니다. 이미 결과를 봐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원인 자체가 부재합니다. 없습니다.

 

없는데 있음 보다 더 있음이 되고

있음은 그 있는 것도 빼앗기는 결과가 부재가 되어버린 것이

인간의 믿음 곧 행함인 겁니다.

 

십자가 상에서 인간의 믿음(유대인)과 인간의 지혜(이방인-헬라인)은 결국 다 거짓으로 판명이 난 겁니다. 그것들이 원인이 되어 결과를 도출할 줄 알았는데

결과는 영원한 부재가 되어버린 겁니다.

 

사도라는 직분과 은사 등등은 결국 원인 없는 결과로써 주어지는

선물 개념이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믿음도 선물입니다.

원인을 아무리 찾을래야 찾을 수가 없다 라는 겁니다.

 

우리가 이런 표현을 자주 봅니다. 노랫말이나 시인들의 시에서도 말이죠.

즉 사랑하는데는 이유가 없다 라는 표현 말입니다.

사랑하는데 무슨 이유가 있느냐 라는 거죠.

원인이 없다 라는 겁니다. 그냥 결과만 누릴 뿐이다는 겁니다.

원인 자체가 부재이다는 겁니다.

 

주님의 사랑은 이유가 없습니다.

사랑하시겠다는 결과만 있을 뿐입니다.

십자가는 그런 의미입니다.

 

바요나 시몬아 니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묻습니다.

베드로는 인간 중에서 최고의 죄책감에 말려들었습니다.

무슨 수로 빠져나올수 있을까요?

없습니다.

 

없는데 빠져나온 것은 예수님 쪽에서 기도하셨다는 겁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이제 원인을 찾지 않는 사랑을 누리는 겁니다.

 

네 맞습니다,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줄 주님께서 더 잘 아십니다.

 

참으로 뻔뻔하죠?

원인의 부재인 결과만으로써의 사랑 곧 십자가 사랑 안에 거하기 때문에

개인적인 표현이 아니라

 

예수 안에 있는 베드로에게서 나오는 표현인 겁니다.

개인 베드로는 없습니다. 오직 예수 안에 있는 베드로만 있을 뿐입니다.

 

곧 이유 없는 사랑의 관계이다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는 비록 약속하신 성령의 받기 전임에도 불구하고

미리 사도라는 직분을 받았지만

여전히 믿음 없음을 그대로 보여주면서도

 

이들이 성령을 받고난 뒤의 복음의 내용은

단절을 외치느냐 아니면 개방을 외치느냐 라고 했을때에

여전히 단절을 외치는 것이다는 겁니다.

? 그래야 원인이 없는 겁니다.

원인 부재로써의 결과만 있을 뿐입니다.

 

만약 개방을 외쳐 버리면

결과 부재의 원인이 졸지에 사도가 되어버리는 거죠.

성령이 아니라 사도가 되어버리는 셈입니다.

 

그렇게 되면 사도는 거룩해져야만 하는 또 다시 모호한 의문에 빠지는 겁니다.

 

사도바울이 이 점에 대해서 분명히 선을 시원하게 그어버렸습니다.

거룩해질 필요가 없이 이미 거룩을 누리는 식이다는 겁니다.

 

거룩을 어차피 행하지도 못하면서 남에게 거룩하라 라고 하는 것은

자기도 매지 않는 멍에를 남에게 지우는 식이다 라고 말이죠.

 

(13:8, 개역)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13:9, 개역)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13:10, 개역)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사랑은 미흡하고 모호하고 의문의 것을 짐지우는게 아니라

오로지 완성을 단번에 보여주는 겁니다.

 

인간이 남을 사랑하는 것은 짐지우는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십자가에 지신 그 사랑은

모든 의문의 증서를 찢어버린 믿음인 겁니다.

원인이 사라진 채로 결과만 완성이 된 채로 말이죠.

 

한번은 양탈무리가 현장에서 간음한 여자를 용서한 예수님의 사랑을

오히려 자신들도 못지키는 다시는 범죄치 말라 라는 그 표현으로써 다시 명료한 사랑을

모호하고 의문의 행함인 율법 지키기로 사기를 치는 것을 보고

 

어떻게 해서든 원인을 만들려고 하는 자세를 보고

아 저런 것이 바로 악마의 영이 들어간 자들의 주장임을 보게 되었습니다.

 

즉 어떻게 해서든 원인을 만들어야 한다는 거죠.

그런데 원인의 부재인 결과를 그들은 도저히 인정할 수가 없는 겁니다.

 

이런 의미에서 이 간극이 벌어지는 겁니다.

차이란 오히려 더욱더 원인이 없는 결과만이 차이가 나지

 

원인이 있는 것은 차이는커녕 모호한 미로 속으로 더욱더 빨려들어가는 겁니다.

 

단번에 보여줘도 그들은 불만인 겁니다.

 

사도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사도들은 자신들의 믿지 않음을 그대로 노출시키는 성경말씀 그대로

자신들도 단절뿐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주 되심을 증거함은

사도가 사도되기를 추구해서가 아니라

즉 원인 있음을 추구함이 아니라

 

사도 됨을 아무리 자기 쪽에서 아무리 살펴봐도 없기에

그냥 없는 그 자체로 그 단절 속에서도

주의 주 되심을 외침으로써

주의 주 되심이라는 결과만 있을 뿐이지

사도 됨과 주의 주 되심을 둘 다 추구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주의 주 되심이 아니면

자신들이 사도라는 직분을 가질 이유가 없다 라는 거죠.

오로지 결과 뿐이지

그 원인은 아예 없다는 겁니다.

 

이 부분을 마귀들이 견디지 못하는 겁니다.

 

결과가 그렇게 나왔으면 결과 다운 원인이 되어야 하기에

믿어야 하고

제대로 거룩해야 하는데

 

오히려 사도바울도 모순된 행동이 나오고

말과 행동이 다르더라 말이죠.

다른 사도도 마찬가지이고요

그러면 성경이 그것을 카바해서 기록 안해 주면 참 좋겠는데

성경말씀이 오히려 더 노골적으로 기록해 버림으로써

사도들이 얼마나 곤란해 지겠느냐 말이죠.

 

그런데 하나도 곤란하지 않더라 말입니다.

?

그들은 결과를 누리는 자들이지

원인이 있어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는 겁니다.

 

이것을 사도바울이 다윗의 고백을 통해서 결과를 통보받고

다시 다윗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통해서 통보받아버리는 결과를 누렸다고 증거합니다.

 

(4:1, 개역)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된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4:2, 개역)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4:3, 개역)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 바 되었느니라

(4:4, 개역)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4:5, 개역)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4:6, 개역)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 바

(4:7, 개역)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4:8, 개역)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4:9, 개역) 그런즉 이 행복이 할례자에게뇨 혹 무할례자에게도뇨 대저 우리가 말하기를 아브라함에게는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 하노라

(4:10, 개역) 그런즉 이를 어떻게 여기셨느뇨 할례시냐 무할례시냐 할례시가 아니라 무할례시니라

 

그러나 그 간극

 

더더군다나 철저하게 모순되고 부조리한 그 간극을 매우고

꽉꽉 채워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는 겁니다.

 

(무할례시니라 라는 의미는 율법을 지키거나 말씀을 지킨적이 없이 그냥 넌 거룩해져버렸다 라고 일방적인 편파해석으로 무시험 합격했다 라는 겁니다. 이 얼마나 철저한 반칙이요 부조리 함이 아닌 가요? 부조리의 부조리가 최고의 합격 자랑 곧 너가 나를 사랑하느냐 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오히려 그 간극을 더욱더 더 보란 듯이 누리고 있는 겁니다.

 

그 단절을 실컷 누리는 거죠.

 

정작 마귀는 그 간극을 매울려고 율법 지키고자 별짖을 다하고 말이죠.

 

율법폐기론자냐? 천만의 말씀! 율법강화죠 오히려

율법의 율법이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누가 꾀더냐 라는 거죠.

한 점 일획도 떨어짐이 없죠.

 

오히려 마귀들이 율법의 율법을 싫어하죠

? 그냥 한 번의 율법을 무지 사랑하는데

 

두 번의 율법 강화인 율법의 율법

율법의 이중성을 무지 무지 싫어하는 겁니다.

곧 거룩의 거룩인, 거룩의 이중성인 십자가의 사랑 말입니다.

 

저 더러운 이방인까지도 다 용서하는 사랑이니

율법적인 유대인들이 이 십자가의 사랑에 이빨을 갈수 밖에요 짐승인 거죠.

 

자 그럼 본문으로 들어가서

사도들의 믿음 없음과 곧 단절과

베드로의 예수님을 아무리 자기 쪽에서 찾으려해도 찾을수 없음과 곧 단절이죠

 

그래서 모든 것을 접고 시골로 돌아가는 단절 속에서

 

이 단절을 구체화 함을 통해서

 

즉 원인을 아무리 찾을려고 해도 찾을 수가 없는 속에서

 

딸랑 두 여자의 원인 없는 결과만 그들만 누릴 뿐이지

아무리 내 쪽으로 끌어올려고 해도 소용없는

아무리 원인을 만들어 볼려고 애를 써도 소용이 없는 그 단절 속에서

 

예수님이 직접 나타나서 함께 동행해서 만나주고 말을 걸어주시고

이야기 해주시고

심지어 함께 먹고 마시면서

 

얼굴과 얼굴을 보듯이 직접적인 만남이 없는 이상

예수님이 직접 다가와주시지 않는 이상

 

아무리 내 쪽에서 다가가 본들 소용이 없는 이 단절 속에서

 

예수님의 일방적인 다가와주심인 원인 없는 결과로써

 

두 사람이 엠마오로 가는 길에 예수님을 만나는게 아니라

예수님이 찾아와 주시는 겁니다.

 

즉 이 말의 차이는 단절을 구체화 함 속에서

예수님이 그 단절의 간극을 분명히 하시고

즉 원인 없음을 분명히 하시고

찾아와 주셨다 라는 겁니다.

 

자 그럼 찾아와 주셔도

그들은 여전히 에수님과 말도 하고 함께 먹고 해도

누구인줄 알 수가 없다 라는 점이 아주 아주 특이한 점입니다.

 

(24:16, 개역) 저희의 눈이 가리워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24:30, 개역) 저희와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매

(24:31, 개역) 저희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보더니 예수는 저희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나중에 알게 되지요

그럼 왜 미리 결과로써

어차피 알게 될 것 알아보는 장면만을 기록하면 될 것인데

왜 구지 못 알아먹는 이 단절을 기록할까요?

이 상황 자체가

시골로 돌아간다는 자체가

인간 쪽에서는 그 단절의 간극을 매울 길이 없다 라는 겁니다.

 

여기서 중요한 표현 왜 이런 상황인가?

눈이 가리워져서 라는 겁니다.

 

이것은 예수님 쪽에서 막았다는 겁니다. 우리 잘잘못을 따지는게 아니라

원인 없는 결과이기 때문에

그 간극을 의도적으로 만드시는 겁니다.

 

(24:15, 현대어) 그때 예수께서 가까이 가셔서 그들과 함께 걸으셨다.

(24:16, 현대어) 그러나 하나님께서 막으셨기 때문에 그들은 예수를 알아보지 못하였다.

(24:17, 현대어) 예수께서 그들에게 물으셨다. `대체 무슨 일이 있길래 그다지도 심각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느냐?' 그러자 그들은 침통한 표정으로 잠시 걸음을 멈추더니

 

현대어 번역에만 하나님께서 막았다 라는 아주 재미있는 표현을 썻습니다.

 

막았다는 겁니다. 단절

 

왜 막았을까요?

 

자신들의 보고 못보고의 문제가 아니라

주님께서 보여주시느냐 안보여주시느냐 에 따른 결과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복음은 원인 없는 결과 뿐입니다.

 

원인 자체가 없습니다.

 

원인이 없다 라는 말을 저는 자아란 없다 라는 말로 표현하고 싶습니다.

 

원인이 있으면 결과가 부재합니다. 곧 자아만 있고 예수님은 없는 겁니다.

 

결과 곧 예수님만 있으면 자아는 없는 겁니다. 있어도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지요.

 

지금 다들 예수님은 죽었기에 다들 없다 라는 겁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자신을 알리심에 있어서

원인 있는 결과가 아니라

원인 없는 결과로써 알려주심에 있어서

 

대혼돈이 벌어지는 겁니다.

왜 소동이 벌어지는 것입니까?

그 혼란 혼돈 무질서는

결국 자아있음 원인 있음 때문입니다.

자아란 무조건 이유없이 자기가 원인이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이것이 선악과를 먹고 눈뜬 인간입니다.

눈을 뜨니 자아 밖에 안 보이지

하나님은 이제 타인이 되어버린 겁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나의 죽음이 아닌 타인의 죽음이 되어버린 겁니다.

 

그런데 그 원인을 없애 버리니까

 

이들이 졸지에 등돌리고 돌아선 그 예루살렘을

예수님의 죽음이 있었던 그 사건의 현장으로 다시 돌아가는 겁니다.

거기서 다시 출발하는 겁니다.

? 결과가 그렇기 때문이다는 겁니다.

예수님의 다시 사심을 등에 짊어지고가 아니라

예수님의 죽음을 등에 짊어지고서 말이죠.

그래서 십자가가 밝히 보이지 않느냐 라고 하시는 겁니다.

이것보다 더 또렷하고 명료한 것이 없다.

 

우리는 타인으로 취급해 버렸는데

왜 나 라는 자아만 있을 뿐이기에

모든 원인은 나 라는 자아 뿐이요

원인이 될 수 없는 것은 다 타인으로 취급했는데

그래서 어디까지나 말씀을 지켜고 나요

율법을 지켜도 나요

거룩을 행해도 나요

내 숙제요 나 라는 자아가 원인인데

 

졸지에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룬자다 라는 결과를 받아버리는 바람에

자아가 원인이 아닌 타인인 예수님이 모든 결과를 다 일괄처리해 버렸다 라는 겁니다.

이것보다 더 명료한게 어디있냐 말이죠.

? 단번에 죄 사할려고 자기 목숨을 원수인 우리에게 넘겨버렸으니 말입니다.

 

결과(예수님)은 원인(자아:)인 우리의 목을 다 쳐내버림으로써 할례를 다 이룬 겁니다.

이제 머리가 교체된 겁니다. 짤려버린 머리를 찾을수가 없습니다. 그 원인은 이제 없고

결과로써 주 예수 그리스도가 머리가 되신것만 누릴 뿐인 겁니다.

 

두 사람이 엠마오로 돌아가는데 있어서 온통 원인들만 가득할 뿐입니다.

그 원인들은 모호해져버렸고 또렷함도 명쾌한 완료도 없이

그저 찝찝한 그 자체일 뿐으로 그 미완료가 온몸을 감싸안아서

돌아가도록 만들어 버립니다.

 

여인의 말을 허탄한 말로 여겼듯이

두 사람도 허탄한 짖을 한 것에 후회와 낙심에 쓸쓸히 등 돌리고 가는 겁니다.

 

(24:17, 현대어) 예수께서 그들에게 물으셨다. `대체 무슨 일이 있길래 그다지도 심각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느냐?' 그러자 그들은 침통한 표정으로 잠시 걸음을 멈추더니

(24:18, 현대어) 그들 중에 글로바라는 사람이 대답하였다. `당신은 예루살렘에 살면서도 지난 주간에 일어났던 그 끔찍한 일들을 전혀 모르고 있단 말이오?'

(24:19, 현대어) 예수께서 물으셨다. `무슨 일이 있었느냐?' 그들이 대답하였다. `나사렛 사람 예수께 있었던 일이오. 그분은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 놀라운 일들을 베풀어 보인 예언자요, 권능 있는 선생으로 높이 존경을 받는 분이었소.

(24:20, 현대어) 그런데 대제사장들과 지도자들이 그분을 붙들어 로마 정부에 넘겨 사형선고를 받아 십자가에 못박히게 하였소.

(24:21, 현대어) 우리는 그분이 이스라엘을 이 난국에서 구원하실 분이라고 생각해 왔소. 이런 일이 있은 것은 사흘 전이었지요. 그런데 그것만이 아니오.

(24:22, 현대어) 그분을 따르던 우리 동료들 가운데 여자들 몇이 오늘 새벽에 그분의 무덤에 갔다가 그분의 시신은 보이지 않고 예수께서 살아나셨다고 말하는 천사들만 보았다는 놀라운 소식을 가지고 돌아왔소.

(24:23, 현대어) (22절과 같음)

(24:24, 현대어) 그래 우리 동료 몇 사람이 무덤에 달려가 보니 말한 대로였고 예수님을 보지 못했다는거요.'

 

즉 실패로 돌아가버린 겁니다.

이제 원인으로 삼아버린 예수님이 없어져 버렸기에

그 뒤에 자신들도 숨겨서 자신들도 그 원인으로 삼았던 그 일이

다 수포로 안개처럼 사라져 버렸으니

 

아무도 다시 시작할래야 시작할 수가 없게 되어버린 겁니다.

실패 땡 탈락

 

그런데 예수님을 보십시오

얼마나 신나 계신 것처럼 보이지 않습니까?

 

까르르 까르르

까르르 까르르

 

이 간극을 아예 작정을 하고서 벌리시는 장난꾸러기처럼

바로 알려주지 않고

그 간극을 마음껏 누리시는 겁니다.

 

결국 그 빈공백의 주인은 예수님 자신의 죽음으로만 가득채워져 있는 겁니다.

그 어떤 누구도 앉을 수 없습니다.

 

마귀는 그 빈자리를 견딜수가 없어서 넙쭉 앉게 됩니다.

그래서 반드시 마귀가 그 빈자리를 앉음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애굽왕 바로와 그의 군사 애굽의 군사로 인해서 하나님은 영광을 받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것을 목격하기 위한 증인으로써

가만히 서서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보아야만 하기에

엠마오로 도망치는게 아니라

그 예수님의 죽음의 자리인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야하는 겁니다.

아무도 돌아갈수 없는 단절된 길입니다.

그렇다고 엠마오로도 갈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가로막아버렸습니다.

 

이 사이의 간극을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채우시는 겁니다.

그래서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서


엠마오가 아닌 반드시 예루살렘 곧 원수의 성문을 뚜껑열어서

마귀를 끌어들이는 그 장소에서 복음을 또 다시 시작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의 다시 사심은 바로 원수를 끌어들임으로써 시작이 되는 겁니다.

이렇게 사도행전으로 넘어가면

도리어 사도들이 유대인들의 공포 대상이 되는 겁니다.

유대인들은 어떻게 해서든 사도들을 공포로써 공포제거를 하고 싶어

환장해 달려듭니다만

아무리 해도 그 얼룩이라는 공포를 제거할 방법이 없는 겁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곧 예수님의 죽음으로 시작하는 것이 복음인 겁니다.

 

인간 자체적으로 나올수 없는 믿음인

바로 예수님의 믿음 예수님이 다시 사신 그 믿음으로 출발하는 겁니다.

울어도 못하네 힘써도 못하네
참아도 못하네 눈물 많이 흘려도 못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막으셨습니다.
오직 믿음으로만 되는 겁니다.
우리의 믿음 안 받습니다.
예수님의 믿음이 다시 시작하는 겁니다.
우리가 믿고 싶지 않는 일로만
시작하는 십자가의 믿음으로만 시작하는 겁니다.
우리는 그 믿음의 대상물일 뿐입니다.

뜨거운 온천이 있는 엠마오 보다 더 뜨거운 십자가의 사랑이 있는데
그 십자가의 뜨거운 사랑이 더 밝히 보이는데 누가 더 뜨겁다고 꾀더냐 말이죠.

 

우리는 매일 매일 새롭게 출발하는 십자가의 죽음으로 시작하는 복음아래에 놓여진 자들입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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