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26. 우상(인간)을 깨뜨리는 여인

미래의 영광이 덮친 향유를 깨뜨린 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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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재 p68-69 향유를 부은 여자 (누가복음 7장 36-50절)


어린이 매일성경 2008년 1-2월 (고학년 4-6학년)
성서유니온 www.su.or.kr
1월 24일 날짜 QT

미래의 영광이 덮친 향유 깨뜨린 여인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주여 주여 하는 자가 아니라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마 7:21)


지난 시간에 예수님의 3가지 별명 곧 먹기를 탐하는 먹보요, 포도주를 즐기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의 친구인 부정한 인간 말종 가장 저급류의 친구이다 라고 소위 인간 중의 가장 거룩한 인간이요 가장 인간을 신 앞에서 신의 대리자로써 가장 잘 파악하는 점쟁이 저리가라 할정도 정확하게 꿰뚫고 있는 유대인 곧 바리새인 오늘날로 치면 교회 사람들 그 중에 교회 우두머리를 자청하는 영적 아버지인 목사들과 그 하수들이 이런 별명을 예수님에게 붙인 겁니다.

왜 그런 별명을 붙였을까요?

우리는 흔히 유대인 곧 바리새인이 잘못 되었기 때문에 잘못 판단한 것이다 라고 생각 합니다.

아닙니다. 분명히 다시 말하지만 아닙니다.

그들의 판단은 정확했습니다.

항상 인간 쪽에서 문제 있다 라고 보는 시각은
반드시 자기자신만큼은 하나님 편에서 그런 인간의 잘못된 시각을 볼줄안다 라고
은근히 자기 자신을 빼버리고픈 트릭과 정치성을 늘 있기 마련입니다.

저는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문제는 예수님 쪽에 있습니다.

인간이 아무리 뛰어난 판단으로 상대방의 모든 행동과 생각을 꿰뚫을 정도로 정확하게 판단을 하여도

예수님 쪽에서 자신을 은폐시키고 숨겨 버리시는 모습으로 나타난 이상
아무리 하늘을 기고 난다 하는 인간도 별수 없는 겁니다.

우리가 특히 최근에 살펴본 성령에 관한 의미들과
또 천국 비유에서의 비유의 의미들은

예수님 쪽에서 자꾸 막아버리고
들을귀 없도록 하신다는 것을 아주 강조를 했습니다.

왜 강조를 했느냐 하며는
흔히 성화론자들과 대화를 해보면 들을 귀 없다 라는 것을 마치 인간 쪽의 잘못인냥 취급해 버리고
들을 귀 있는 것도 그렇게 말하는 본인들이 뭔가 올바른냥 아주 대단한 착각을 하고 있다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편애도 당연하게 해석하고
미움도 당연하게 해석 가능하다 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니 당연하게 성화를 강조할 수 밖에 없는 겁니다.
그래서 저는 그게 바로 거짓의 영이 임한 자들이다 라고 주장하는 겁니다.

들을 귀 없다 라는 것을 남의 입장에서 또는 인간 잘못에서 해석하지 말고
자기가 당한 입장과 왜 예수님이 그렇게 하시는가 라를 입장에서 생각을 해보며는
이유를 알 길이 없다는 겁니다.

자 제가 여기서 이유를 알 길이 없다 라고 하니까
성화론자들이 비웃습니다. 자기들은 이유를 알고 있대요 그런데 막상 들어보면 자기자신을 절대로 빼지 못하는 입장에서의 이유이기에 다 헛소리 이구요
문제는 예수님 자신도 버림을 받았다는 겁니다.

인간들이 예수님을 버린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버리신 겁니다.
우리는 그것을 교리적으로 또 소유해 버리는 해석을 하는데
그것은 우리를 향한 화목제물 삼기 위함이다 라고 사기를 치고 있습니다.
화목제물이 왜 예수님 외에는 안되는 이유와
그 정도로 하나님은 예수님 독생자를 버릴 정도로 우리 인간을 자기 독생자 보다 더 사랑한다 라는 인간 없이는 못사는
인간에게 목매여 버린 신이다는 겁니까?

저는 그 따위 하나님의 모습 곧 인간에게 목 맨 인간 없이는 못사는 신이란
인간들이 늘 조작해 내는 모든 종교에서의 공동적인 신의 속성 이라고 봅니다.

결국 인간의 창작품 이다는 겁니다.

예수님을 화목제물로 삼으신 이유는
예수님이 화목제물 되시는 그 마음을 동일하게 품지 않으면
피조물 취급하지 않겠다 라는 겁니다.

피조물 취급하지 않겠다 라는 표현이 얼마나 무서운 표현임에도 불구하고
단 한명의 인간도 이 말이 무섭기는커녕 웃끼기 까지 하여서 비웃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피조물이 된 적 조차 없기에
모든 인간은 선악을 아는 하나님 이기에
하나님을 늘 조작해 내는 겁니다.

오늘은 어떤 하나님을 조작해 내어 볼까? 올치 화목제물 된 하나님의 사랑을 만들어 보자
그래 그것이 좋겠다 라는 식으로 말이죠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 그 하나님을 먹음직 보암직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운 하나님을 만들어 내는데 있어서 화목제물이라는 멋들어진 문자용어도 언제든지 차용(모방)할 수가 있는 겁니다.

그것이 곧 자기와 일치성이 되는 하나님이기에 더더욱 그런 애뜻한 사랑을 품으면 품을수록 그런 하나님과 자기와의 하나됨의 일치성을 더욱 더 빛나는 겁니다.

이게 바로 자아상을 투사하여 만들어내는 하나님이요 신입니다.

그러니 다 이유가 있는 들을 귀요
누구든지 다 이해가 되고 납득이 되고 설명이 되고
누구든지 마음 속에 다 품은 적이 있고 앞으로도 늘 추구하는 그런 신의 모습이니
다 들을 귀 있는 겁니다.

다행히도 지금 정작 죽음과 질병과 죄의 현실을 지독스럽게 격고 있는 자들은
다 꿈같은 소리이기에 물론 그런 생각은 여유 있을때에 품은적이 있지만
정작 배가 고픈 현실을 격게 되면
나발이고 뭐고 있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자동적으로 들을 귀 없는 자 취급을 받을 수 밖에 없는 거죠

마침 아달이(딱떨이지게끔)가 되어서 예수님 마저도 이런 인간 하급층 소위 매국노와 죄인의 친구이다 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이면 가장 부정한 인간 말쫑들의 친구이기에 들을 귀 없는 자들의 배후 노릇을 하는 셈이 아니냐 라는 불평을 듣는 식이 되겠지요.

또 한편으로는 촛불집회의 배후세력이 누구냐 라는 것을 사람들이 저마다 꿰뚫을 줄 아는 시각을 지녔다는 듯이 저마다 한 소리를 하는 이유도
그들의 친구요 보호자 노릇을 하는 자가 있기에 저런자들이 사라지지 않는다 라고 현실에 대한 불만을 토하는 겁니다.
 
결국 들을 귀 있다 라는 복스러움은 하늘의 뜻과 일치 시켜서 신과 결부시킬려고 하고
반면에 들을 귀 없다 라는 저주스러움은 항상 그 인간 자체가 문제가 되고 그 세력에 옹호하는 배후세력까지 합세하고 있다 라고 보는 겁니다.

늘 자아를 기준으로 잘되면 자기 탓, 못되면 남 탓
자기가 하면 로멘스, 남이 하면 불륜인 겁니다.
자기가 하는 것은 개혁이고 남이 하는 것은 종교타락인 겁니다.

바로 이 타락한 죄인의 친구로써 예수님이 오시는 겁니다.

여기에 예수님 본인 스스로가 걸림돌을 제시하고 다리 걸어 태클을 걸어 넘어뜨리고 실족케 하는 거리끼게 하는 부딧히는 돌로써
모든 인간 하나 하나에 달라 붙어서 가는 길과 걸음과 앞길을 방해하고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도록 하시는 겁니다.

그러니 바리새인의 판단이 옳았습니다. 맞습니다 맞고요 먹보요 술꾼이며 타락한 자들의 친구 맞습니다.

왜냐 그들이 그렇게 판단하고파서가 아니라 주님이 그렇게 심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부분을 보고 마치 구약의 사울왕과 다윗왕의 차이를 보게 됩니다.

일종의 사울왕의 모습은 이유 없이 악귀들린 모습으로써 유대인 곧 바리새인의 모습을 보여주고, 상대적인 차이로써 다윗 왕의 모습은 예수님이 보여주고 있는 겁니다.

결국 사울 왕이 미쳐버리고 싶어서 미친 것이 아니라 편애(다윗)가 외부에 있으니까
그 편애를 자기 소유물로 자기 편으로 자기 내부로 끌어 들을수 없다는 것에 사람이 돌아버리고 미쳐버리는 겁니다.

차라리 성화론자들처럼 화목제물을 자기편으로 삼아 소유화 시켜버리면
누가 건드리지 않는 이상은 그것이 그들의 이마표가 되는 겁니다.

문제는 예수님이 등장하실때까지 그 속내가 드러나지 않듯이 말이죠.
비로소 등장하게 되니 예수님을 상당히 의식해서 미리 공격받을 것을
지발에 자기가 질리니까 자기 죄악들을 들추임을 받을까봐 예수님에게 모조리 다 뒤짚어 씌우는 겁니다. 마치 다말에게 유다가 다 뒤짚에 씌우듯이 말이죠,

그런데 그 부정함의 타락의 친구가 도리어 우리를 구원하는 십자가의 사랑을 완성했듯이
불륜(유다의 최악의 치욕이 도리어 유다를 구원케 함)의 더러움을 뒤짚어 쓴 다말이 유다를 살리는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화목제물이란 바로 십자가 라는 저주의 더러움입니다.

내가 뒤짚어 씌움을 당하여할 치욕과 오물과 더러움 부끄러움의 버림받음을
대신 예수님께서 당하신 겁니다.
당했다 라는 표현이 우리에게 찔림이 되어 마땅합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예수님에게 모든 탓을 돌리고 오물을 뒤짚어 씌웁니다. 먹보요 술꾼이고 타락한 매국노의 배후인물이라고 ... 그래놓고 우리는 화목제물을 믿는다고 우기는 겁니다. 이게 모순 자체덩어리인 선악을 아는 인간입니다.


자 그럼 오늘 공부할 이 치욕을 누가 대신 당하는가 라는 것을 살펴 보겠습니다.

사람은 자아라는 것이 있다고 주장을 합니다. 그러나 자아란 과거가 만들어낸 산물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선악과가 만들어낸 허상입니다. 그래서 늘 과거에 집착하고 과거가 눈치챈 욕망들과 죄가 눈덩어리처럼 부풀려진 것이 자아라는 사망이 잉태한 겁니다.

그렇기에 자아가 가장 의식하는 것은 바로 사망입니다.
사망이 없다면 자아도 없습니다. 자아도 의식하지 않습니다.
사망이 낳았기에 자아라는 것을 늘 의식하는 겁니다.
그래서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은 겁니다.

성경은 그래서 인간을 자아라고 표현하지 않고 죄인이라고 표현합니다.

욕심 곧 선악과를 따먹는 날에는 하나님과 같이 된다는 말에
그 욕심이 하나님과 같이 된 허깨비 자아를 낳아버린 겁니다.

욕심이 잉태하여 죄인 곧 자아를 낳았고
죄인 곧 자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는 겁니다.

결국 어차피 허깨비요 허상인 없는 유령입니다. (영화 식스센스 였던가요? 다들 오싹했다는 거죠 다들 인간 자아로 봤는데 나중에 보니 허상이였던 겁니다.)

자 그럼 모든 매사와 모든 사상과 모든 행동과 모든 일들을 이 죽음이라는 돋보기로 살펴보십시오 모든 실체가 다 드러납니다.

즉 허깨비 뿐입니다.

사실은 실상이 없기에 모든 것이 허상이라서 그냥 허상을 실상으로 여기고 살아갈 뿐입니다. 실상 자체를 본적도 만난적도 들은적도 없기에 기준으로 삼은적 조차도 없기에

다 자기(자아=허상)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할 뿐입니다. 이유는 기준인 왕(실상)이 없기 때문입니다. (삿 17:6, 21:25 / 롬 1:28)

(히 11:1, 새번역)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확신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입니다. / ㉠'실상, 실체, 보증'으로 번역할 수도 있음』

그래서 왕 곧 실상인 믿음이 나타나야 비로소 그 기준으로 모든 실체들을 규정할 수 있는 겁니다.

여기 한 여인이 예수님에게 나타났습니다.

(눅 7:31, 새번역) 『"그러니, 이 세대 사람을 무엇에 비길까? 그들은 무엇과 같은가?』
(눅 7:32, 새번역) 『그들은 마치 어린이들이 장터에 앉아서, 서로 부르며 말하기를 '우리가 너희에게 피리를 불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았고, 우리가 애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 하는 것과 같다.』
(눅 7:33, 새번역) 『㉨세례자 요한이 와서, 빵도 먹지 않고 포도주도 마시지 않으니, 너희가 말하기를 '그는 귀신이 들렸다' 하고, / ㉨또는 '침례자'』

(눅 7:34, 새번역) 『인자는 와서, 먹기도 하고 마시기도 하니, 너희가 말하기를 '보아라, 저 사람은 마구 먹어대는 자요, 포도주를 마시는 자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다' 한다.』
(눅 7:35, 새번역) 『그러나 지혜의 자녀들이 결국 ㉩지혜가 옳다는 것을 드러냈다." / ㉩또는 '하나님의 지혜' 또는 '하나님'』

(눅 7:36, 새번역) 『바리새파 사람 가운데에서 어떤 사람이 예수께 청하여, 자기와 함께 음식을 먹자고 하였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 바리새파 사람의 집에 들어가셔서, 상에 앉으셨다.』
(눅 7:37, 새번역) 『그런데 그 동네에 죄인인 한 여자가 있었는데, 예수께서 바리새파 사람의 집에서 음식을 잡숫고 계신 것을 알고서, 향유가 담긴 옥합을 가지고 와서,』
(눅 7:38, 새번역) 『예수의 등 뒤에 발 곁에 서더니, 울면서,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닦고, 그 발에 입을 맞추고, 향유를 발랐다.』

(눅 7:39, 새번역) 『예수를 초대한 바리새파 사람이 이것을 보고, 혼자 중얼거렸다. "이 사람이 예언자라면, 자기를 만지는 저 여자가 누구이며, 어떠한 여자인지 알았을 터인데! 그 여자는 죄인인데!"』

(눅 7:40, 새번역)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시몬아, 네게 할 말이 있다." 시몬이 말했다. "선생님, 말씀하십시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눅 7:41, 새번역) 『"어떤 돈놀이꾼에게 빚진 사람 둘이 있었는데, 한 사람은 오백 ㉪데나리온을 빚지고, 또 한 사람은 오십 데나리온을 빚졌다. / ㉪한 데나리온은 노동자의 하루 품삯』
(눅 7:42, 새번역) 『둘이 다 갚을 길이 없으므로, 돈놀이꾼은 둘에게 빚을 없애주었다. 그러면 그 두 사람 가운데서 누가 그를 더 사랑하겠느냐?"』
(눅 7:43, 새번역) 『시몬이 대답하였다. "더 많이 빚을 없애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 판단이 옳다."』
(눅 7:44, 새번역) 『그런 다음에, 그 여자에게로 돌아서서, 시몬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이 여자를 보고 있는 거지? 내가 네 집에 들어왔을 때에,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않았다. 그러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닦았다.』
(눅 7:45, 새번역) 『너는 내게 입을 맞추지 않았으나, 이 여자는 들어와서부터 줄곧 내 발에 입을 맞추었다.』
(눅 7:46, 새번역) 『너는 내 머리에 기름을 발라 주지 않았으나, 이 여자는 내 발에 향유를 발랐다.』
(눅 7:47, 새번역) 『그러므로 내가 네게 말한다. 이 여자는 그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그것은 그가 많이 사랑하였기 때문이다. 용서받는 것이 적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
(눅 7:48, 새번역) 『그리고 예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네 죄가 용서받았다."』

(눅 7:49, 새번역) 『그러자 상에 함께 앉아 있는 사람들이 속으로 수군거리기를 "이 사람이 누구이기에 죄까지도 용서하여 준다는 말인가?" 하였다.』
(눅 7:50, 새번역)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그 여인은 바리새인의 집에 초청되어 식사대접 받고 계신 예수님을 찾아서 온 것은
마치 자기 스스로 구경꺼리 될 것을 뻔히 알고 오는 셈입니다.

평상시 그 바리새인들이 자기에 대해서 더 잘 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눅 7:39, 새번역) 『예수를 초대한 바리새파 사람이 이것을 보고, 혼자 중얼거렸다. "이 사람이 예언자라면, 자기를 만지는 저 여자가 누구이며, 어떠한 여자인지 알았을 터인데! 그 여자는 죄인인데!"』

바리새인의 판단대로 예수님을 그런식의 예언자로 봤다면 더더욱 스스로 불구덩이 속에 들어가는 셈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예언자 곧 선지자란 심판의 영을 받은 자입니다.

도리어 이 여인은 선지자에 대한 시각이 바리새인(성경 전문 박사)보다 더 정확했습니다.
그것이 그녀에게서 나타난 모습입니다.

그녀는 향유를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예수님의 등 뒤에 발 곁에 서더니, 울면서,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닦고, 그 발에 입을 맞추고, 향유를 발랐습니다.

참 이상하지 않나요? 신비롭지 않나요?

우리는 생각 합니다. 나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라고 말이죠. 그러나 계시는 역사에서 모방이 불가능 합니다. 도리어 올무가 되어 걸림이 됩니다.

그렇다면 이 여인의 이해하기 힘든 행동은 왜 나온 것일까요?

그것을 예수님이 대신 해명해 주십니다.
40절에서 -48절 사이의 내용입니다.

이해가 안되신다구요? 걱정 마세요
그 반대로 이해한 자들의 차이점으로 우리는 또 이유를 알게 됩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동원됩니다. 베드로는 너는 못했으나 이 여자는 했다 라는 겁니다.
뭐뭐뭐 아니요 뭐뭐뭐 이다. 라는 식으로 말이죠
(눅 18:27, 개역) 『가라사대 무릇 사람의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느니라』

사실 이 여인의 이야기는 4복음서에 다 언급된 이야기입니다.

마 26장에서는 제자들과의 상대적인 차이성으로써 드러내고 대대로 기념한다는 의미이고

(마 26:13, 개역)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하시니라』
(마 26:14, 개역) 『그 때에 열둘 중에 하나인 가룟 유다라 하는 자가 대제사장들에게 가서 말하되』
(마 26:15, 개역) 『내가 예수를 너희에게 넘겨 주리니 얼마나 주려느냐 하니 그들이 은 삼십을 달아 주거늘』

막 14장에서는 값어치의 량을 나열하심으로써 예수님의 죽으심과 연결 시켰고요

(막 14:5, 개역)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며 그 여자를 책망하는지라』
(막 14:6, 개역) 『예수께서 가라사대 가만 두어라 너희가 어찌하여 저를 괴롭게 하느냐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막 14:7, 개역)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니 아무 때라도 원하는 대로 도울 수 있거니와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막 14:8, 개역) 『저가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사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요 12장에서는 예수님을 유월절 어린양의 희생제물로써 이 여인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요 12:1, 개역)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이르시니 이곳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의 있는 곳이라』
(요 12:2, 개역)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새 마르다는 일을 보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더라』
(요 12:3, 개역)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씻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요 12:4, 개역) 『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룟 유다가 말하되』
(요 12:5, 개역)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요 12:6, 개역)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저는 도적이라 돈 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감이러라』
(요 12:7, 개역) 『예수께서 가라사대 저를 가만두어 나의 장사할 날을 위하여 이를 두게 하라』
(요 12:8, 개역)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그런데 누가복음 7장에서의 향유부은 여인은 죄사함 받음이라는 의미로써 저들 바리새인의 심사를 뒤틀리게 만드는 겁니다.

마치 아벨의 제사를 받음은 곧 가인의 제사를 안 받음과 동시에 영원히 한 발 아래인 제사로 인식이 되도록 만들어 버리는 더 나은 제사를 드렸다 라는 식입니다. 쉽게 말해 이 편애 때문에 졸지에 지독한 미움이다는 거죠 무슨 짓을 해도 무조건 미움이 되는 것이고 편애의 자리는 이미 넘어 가버린 겁니다.

그래서 죄와 용서와 탕감과 빚진자와  죄인 이라는 용어들이 나열이 되는 겁니다.

즉 누가복음에서의 향유부은 여인은 고아 과부 나그네인 예수님이 그렇게 찾던 잃어버린 자 였다 라는 겁니다.

그래서 이 죄인 이라는 의미가 선지자와 결합이 되는 겁니다.
정작 그 밖의 사람들은 심판 받을 것이 없는 잘 난 인간들이기에 선지자가 필요가 없습니다.

그들은 도리어 산자 같으나 죽은자입니다.
선악과 라는 욕심 죄 사망이 낳아 잉태한 자아들 곧 허상이요 안개요 허무이지만

이 여인은 생명나무가 낳은 죽은자 같으나 도리어 산 자입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이 이 죄인인 여인에게 뛰어들었기 때문입니다.

놀랍게도 생명나무가 낳은 자는 불의한 자의 친구가 있기 때문에 그 친구이신 예수님이 그들의 보호자로써 탕감하고 복수갚아주고 불의한 심판 속에 뛰어드심 때문에 약속이라는 믿음이 태어나는 겁니다. 그래서 이 여인은 죄사함 곧 원수에게서 사랑이 결합되어 죄 사함이라는 믿음이 생명나무 때문에 태어나는 실상이 된 겁니다.

만약 예수님 께서 자기부인이라는 십자가의 길을 가지 않았다면 이 여인은 죄 사함 받을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 여인은 에수님이 십자가에 길을 가신다는 것을 아시고 바리새파 사람들이 자기를 비아냥 거리고 구경꺼리로 삼을 지라도 상관없이 정작 가장 중요한 예수님의 죽으심을 미리 앞당겨서 기념하는 겁니다.

예수님의 시체를 미리 앞당겨서 자기 어깨에 매는 어리석은 행위를 하는 것과 같습니다. (정작 구약 광야에서 또 가나안 땅에서 이스라엘은 이 피를 어깨에 매는 것을 모조리 다 거부하고 과거의 자아를 찾아나서버린다.)

이 어리석음 만이
소위 말씀과 하나님과 아버지의 뜻대로 행함과 주여 주여 라고 부르짖는 기도와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과 힘과 선민과 선택과 구원 등등의 (특히 선지자 마저도 소유개념으로)

그 어떤 의미들 조차도 모조리 다 소유개념으로 자기 쪽으로 땡기고 챙길려고 한다는 것에 팍팍 무릎팍 깨지도록 걸려 넘어뜨리는 실족케 하는 겁니다.

아무리 해도 이 보다 더 나은 제사가 없기 때문입니다. 나머지는 못한 제사입니다. 백날 해봐도 헛짓입니다.

바로 완료된 미래의 영광이 덮쳤기에 이 여인은 이 완성품을 어깨에 매고자
예수님의 죽으심에 모든 전 재산을 때려부어 버린 겁니다.

이 행동에 다른 복음서에서는 제자들의 반발이 대립 되었지만

여기 누가복음에서는 바리새인들이 그 여인의 그런 행동 곧 제사죠 그 제사에
더 나은 제사 없다는 식으로 죄사함이라고 표현 했을때에 (사실 제사란 죄 사함이라는 목적으로 드러나는 곧 죄와 사랑의 결합입니다. 그래서 제사를 원치 않고 상한심령을 원하시는 거죠)
저 쪽 바리새인은 주님의 죄사함이라는 표현에 안색이 변하여 살인의지를 불태우는 가인의 모습과 동일하게 드러나는 겁니다.

결국 일방적으로 주님 쪽에서 그렇게 한쪽은 긍휼의 그릇으로 심고 한 쪽은 진노의 그릇으로 심어버린 겁니다.
인간 문제가 아니라 예수님의 숙제로써 드러난 것을
이 여인은 희년의 완성자를 드러내기 위한
정작 자신이 포로되었고 갇혔고 눌린 자로써 동원되는
고아 과부 나그네 였다는 겁니다.

다른 사람들은 고아 과부 나그네 인적이 없기에 예수님의 죄사함도 필요가 없고
죄사하니까 교리적인 문제점이 있나의 진위를 따지는 선악의 위치에 서버린 법이 된 겁니다.

이 여인의 모습이 바로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라는
자기부인이라는 자기부정이라는 모습에

예수님이 친구가 되어 주시고
이것만을 자랑하고 기념하겠다고 하시는 겁니다.

(마 7:21, 개역)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우리는 흔히 뜻대로 행하는 자가 되어야지 주여 주여 부른다고 되는게 아니다고 말을 하곤 합니다.

그러나 그 아버지의 뜻은 정작 모르면서 행하겠다고 합니다.

아버지의 뜻은 자기 부인입니다. 즉 십자가입니다.
이것이 걸림돌이 되는 겁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뜻대로 행하는 것도 자기긍정으로 삼아버리면서 나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백날 해도 헛짓입니다. 그것 자체가 힘이 되고 자기를 챙기는 수단이 되니
아무리 자기부인이라는 것 마저도 자기 쪽으로 땡겨서 행할려고 해도 안되는 겁니다.

허깨비 자아만 더더욱 키워 나갈 뿐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 라고 하시면서 정작 아버지로부터 버림 받아 버리십니다.
버림 받아도 상관 없는 아버지의 뜻만 있으면 된다 라는 겁니다.

그러나 우리는 법적인 선악의 사고방식이라서
뜻대로 행했기에 나를 버리지 말라고 애걸하는 겁니다.

이러니 그 말씀 자체가 서로 맞물려 있는 올무인 의문의 문자가 되는 겁니다.
뜻대로 행했는데 그게 바로 주여 주여 한 자다 라는 겁니다.
정작 아버지의 뜻을 모르고 자기가 임의로 이것이 아버지의 뜻이지 않겠느냐 라고 판단했는데 그 판단의 기준을 성경말씀문자이다 라는 거죠
그러니 올무에 걸려든 겁니다. 그 대표가 바로 바리새인이였고요
바리새인이 걸려들었다면 우리도 별수 없습니다.

이 여인은 마태 마가복음에서는 제자들과 대조 시켰고 누가복음에서는 바리새인과 대조 시켰고 요한복음에서는 특히 가룟유다와 대조 시켰습니다.

이유가 뭘까요? 우리를 고발하기 위함입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고발 심판

선지자는 심판을 자기의 신체에 담고서 우리를 고발합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의 죽으심은 자기 신체에 담고서 우리를 고발합니다.

미래의 영광이 덮쳐져서 완료된 이 피 앞에
모든 것을 미완료로써 고발하는 겁니다.

한 순간에 허비 되는 3천만원의 3년치 노동임금은
다시 벌면 그만이지만 (벌어도 어차피 미완료. 살 동안만 필요할 뿐)
(모든 사람은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힘이라고 영원불멸성을 가미 시키기에 이 힘을 허비한 자를 용서치 못한다)

그러나 이 여인은 다시는 오지 않을 예수님의 완성인 그 십자가의 죽음에 그 심판과 저주에
자기도 어깨에 이 언약궤를 매고서 제자들과 남자들과 바리새인들이라는 자아라는 허상의 바벨탑을 뺑뺑이 돌고 있는 겁니다. 허물어 질는 것을 더 허물어 버립니다.

그야말로 어리석지 않나요?
어차피 허물어질 것을 냅뚸도 허물어 질것인 허상인데 말이죠

그러나 아닙니다. 실상을 드러내기 위해서 그 차이로써 허상을 고발하는 겁니다.

선지자가 마치 심판의 영을 미리 앞당겨 미래의 영광이 덮쳐져서 우리에게 증거하는
그 부딧히는 껄끄러운 걸림돌 증거가 유일한 사랑이듯이

사랑은 아주 적극적으로 허상을 향해 돌진하고 공격하면서
믿음이라는 실상 앞에 모든 것을 그림자로 들추어 내시는 겁니다.

이 믿음만이 우리를 수시고 다니는 겁니다.

믿음이 잉태하여 낳은 자만이 그림자와 실체를 두 패로 나누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이 여인이 미끼(구경꺼리)로써 우리 속내를 들추어 낸
그야말로 허상을 깨뜨리는 십자가만의 유일한 증거입니다.

예수님 ! 우리도 이 여인처럼 향유를 부어 주님의 죽으심을 증거하여 모든 실상의 실체를 드러내는 걸림돌을 증거하게 해 주세요.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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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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