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심판하(죽이)시는 나의 구원자 예수를 이유없이 무조건 더욱 사랑 (시편 7)

 

(7:1, 개역) [다윗의 식가욘, 베냐민인 구시의 말에 대하여 여호와께 한 노래]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주께 피하오니 나를 쫓는 모든 자에게서 나를 구하여 건지소서

(7:2, 개역) 건져낼 자 없으면 저희가 사자 같이 나를 찢고 뜯을까 하나이다

(7:3, 개역)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내가 이것을 행하였거나 내 손에 죄악이 있거나

(7:4, 개역) 화친한 자를 악으로 갚았거나 내 대적에게 무고히 빼앗았거든

(7:5, 개역) 원수로 나의 영혼을 쫓아 잡아 내 생명을 땅에 짓밟고 내 영광을 진토에 떨어뜨리게 하소서(셀라)

(7:6, 개역) 여호와여 진노로 일어나사 내 대적들의 노를 막으시며 나를 위하여 깨소서 주께서 심판을 명하셨나이다

(7:7, 개역) 민족들의 집회로 주를 두르게 하시고 그 위 높은 자리에 돌아오소서

(7:8, 개역) 여호와께서 만민에게 심판을 행하시오니 여호와여 나의 의와 내게 있는 성실함을 따라 나를 판단하소서

(7:9, 개역) 악인의 악을 끊고 의인을 세우소서 의로우신 하나님이 사람의 심장을 감찰하시나이다

(7:10, 개역) 나의 방패는 마음이 정직한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께 있도다

(7:11, 개역) 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심이여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시로다

(7:12, 개역) 사람이 회개치 아니하면 저가 그 칼을 갈으심이여 그 활을 이미 당기어 예비하셨도다

(7:13, 개역) 죽일 기계를 또한 예비하심이여 그 만든 살은 화전이로다

(7:14, 개역) 악인이 죄악을 해산함이여 잔해를 잉태하며 궤휼을 낳았도다

(7:15, 개역) 저가 웅덩이를 파 만듦이여 제가 만든 함정에 빠졌도다

(7:16, 개역) 그 잔해는 자기 머리로 돌아오고 그 포학은 자기 정수리에 내리리로다

(7:17, 개역) 내가 여호와의 의를 따라 감사함이여 지극히 높으신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리로다

 

(7:1, 쉬운) <사람이 한 일에 따라 심판하실 것에 대한 기도-베냐민 사람 구시가 한 말을 듣고 여호와께 부른 다윗의 식가욘>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시여, 내가 주께 피하니 나를 뒤쫓는 사람들에게서 나를 보호하시고 구해 주소서.

 

(7:1, 현대인) (베냐민 사람 구시에 관하여 여호와께 불러 드린 다윗의 노래)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시여, 내가 주를 의지합니다. 나를 쫓는 모든 자에게서 나를 구해 주소서.

 

(7:1, 현대어) [나를 옳다 하시는 주님;다윗의 애가. 베냐민 사람 구시가 다윗에게 죄를 덮어씌웠을 때 다윗이 어찌하면 좋으냐고 여호와께 여쭈었던 노래] 여호와 나의 하나님, 이 몸 주께 피하오니 뒤쫓아오는 저 많은 자들에게서 나를 구해 주소서. 건져 주소서.

 

(7:1, 킹흠정) (다윗의 식가욘, 그가 베냐민 사람 구시의 말에 관하여 주께 드린 노래) 오 주 내 하나님이여, 내가 주를 신뢰하오니 나를 핍박하는 모든 자들에게서 나를 구원하시고 나를 건져 내소서.

 

(7:1, 한글킹) 베냐민인 쿠스의 말에 관하여 주께 노래한 다윗의 식가욘. 오 주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의지하오니 나를 박해하는 모든 사람들로부터 나를 구원하시고 나를 구해 주소서.

 

 

식가욘 [Shiggaion] 이라는 말이 무슨 의미인줄 몰라서 1절에 대한 여러 번역본을 봤습니다.

 

음악용어로써 광시곡 또는 랩소디 라고 하는데요

퀸의 보헤미안 랩소디 밖에 생각이 안나는데

http://www.youtube.com/watch?v=eA8CVQ-kfJA

 

바로 식가욘이 급격한 감정을 담아서 시 노래로 표현한 것이다 라고 보면 됩니다.

 

얼마나 다급했으면 이렇게 적었을까요?

 

다윗이 아침부터 그것도 안식일날 평화가 있어야 할 아침, 안식일날 아침

쉼이 있고 평안이 있는 아침에

 

얼마나 다급했으면 인자하심을 베풀어 달라고 기도하고 있다고 시편 6편을 통해서 살펴 봤습니다.

 

7편은 더 심합니다. 더 심각합니다.

 

다급해진 이유가 뭘까요?

 

베냐민 지파 사람 [구시] 라는 사람이 어떤 말을 했는데

그 말을 듣고 지금 다윗이 바짝 엎드려서 예수님 예수님 제발 살려주세요 라고 기도 합니다.

 

도대체 어떤 말을 했길래 다윗이 이럴까요?

 

마치 선한 사마리아 사람 비유처럼

강도 만난 자가 생각 납니다.

 

(10:36, 개정)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정작 가장 핵심적인 부분은 강도는 이미 사라지고 없다 라는 겁니다.

강도 당한 사람만 있을 뿐입니다.


거의 죽임을 당한 자만 있을 뿐이다는 겁니다.
 

이 강도 만난 자를 대하는 태도를 통해서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속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결론은 뭐냐? 선한 자가 없다 라는 겁니다.

 

그래서 선함을 베푸시는 예수님 곧 선한 사마리아인은 예수님이지요

이 예수님을 지금 사라지고 없는 강도와 같이 예수님을 죽이고 있다 라는 겁니다.

 

다윗은 지금 자신을 강도만난 자처럼 다 죽게 되었다 라는 겁니다.

이런 상황에 누가 나에게 인애와 자비 곧 긍휼을 베풀어 줄 자가 누구냐 라는 겁니다.

 

구시 라는 베냐민 사람은 정작 이 시편 7편에서 의미가 없어져 버린 겁니다.
다들 누군지도 모릅니다.

신학자들도 모르더군요.

그런데 말 한 마디 던지고 사라져 버린 이 구시라는 사람의 말 때문에
왕이라는 다윗이 원천 뿌리가 다 흔들릴 정도로 요동케 되어 벼랑 끝으로 몰려버린 사람처럼 행동하더라는 겁니다.

말이 구시 사람이지 결국 이 다윗을 이런 상황으로 몰고간 자는 원수요 그 원수 뒤에는
마치 욥기서에서 나오는 욥을 놓고 마귀와 내기를 한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라는 겁니다.

 

지난 시간에 말했지요

 

골리앗에도 당당했고

사울왕이 심심하면 창을 던졌는데

그런 것에도 아랑곳 하지 않았고, 전혀 요동함이 없었던 다윗이라고

 

마귀의 3가지 시험을 통해서 예수님은 전혀 요동함이 없었다고

 

그런데 이름도 없고, 큰 권력도 가진 자도 아닌

아주 아주 무능인일 뿐이고. 이름 없는 자와 마찬가지인 이 베냐민 지파 사람 사울왕 집안 사람인 구시 가 했는 말에 의해

 

다윗은 그 만 퍽 하고 왕창 와르르 무너져, 힘없이 맥 없이 쓰러져 버리는 겁니다.

 

다 죽게 되어서 나를 건져 주는 선한 사마리아인이 누구인가 라고 제발 살려달라고 외치고 있는 겁니다.

 

다윗을 고쳐줄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왕인데 누가 고쳐 줍니까?

 

더 높은 자가 아니면 안되는데

 

제사장도 지나가 버리고

레위인도 지나가 버리는 겁니다.

 

생판 아무 연고도 없는 이방인 그것도 개같은 이방인 사마리아인이 고쳐주는 겁니다.

 

그래서 구원을 거스리는 구원이라고 했습니다.

 

기존의 구원관이 예수님의 선한사마리아 비유를 통해서 다 깨어지는 새로운 구원관이 등장한 겁니다.

 

그렇게 되면 짐승처럼 이빨을 가는 자가 과연 누구겠습니까?

 

강도 아니겠습니까?
기존의 구원관을 깨뜨리니까 말입니다.
그리고 강도 곧 원수는 이 내기에 이겨도 그만 져도 그만
이래나 저래나 그들은 잠시 풀려나서 심판이라는 결론으로만 가야하기에
적극성 조차도 없습니다. 그러니 주님이 부여한 기능인 겁니다.

그래서 뒤로 빠져버리는 겁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런 숨어있는 강도는 그렇게 들추어지는 겁니다
.

 

오히려 사마리아인은 원수입니다.

네 원수 예수님을 사랑하라

 

과연 가능한 말이냐 말이죠.

 

성경 말씀은 그야말로 불가능한 말만 적었고

도저히 실천 할 수 없는 말만 적혀 있습니다.

 

그러니 실천했다. 행했다 라고 하는 자가 나타났다면 백프로 거짓이다 라고 보시면 됩니다.

아무도 못 지키도록 한 것이 율법이요

오히려 어길 수밖에 없도록 만든 것이 율법입니다.

 

그래서 외부에서 찾아야 합니다.

인간 외부

 

인간 바깥에서 말입니다.

 

왜 이런 시를 광적으로 다급하게 미친 듯이 써 내려가는
아침부터 살려달라고 급박하게 적을 수밖에 없을까요
?

 

인간 내부에서 없다는 증거입니다.
아무리 찾아도 쌑쌑이 살펴보고 뒤져봐도 티클만치도 없다는 겁니다.

10명 있으면 멸망 안 시킬 겁니까? 5명 3명 자기가 알아서 수를 감하고 있습니다.
결국 아브라함 자신도 의인이 아니였던 겁니다.

오히려 인간 속에는 구시와 같은 자들이 수시로 죽일려고 달려드는 상황 뿐이다는 겁니다.


모든 인간은 구시와 같다는 겁니다. 다윗 본인도 구시와 다를 바 없다 라는 겁니다.
오히려 아무 연고 없이 반대편에 놓여지게 되다 보니
아 내가 이렇게 구시 처럼 예수님을 이유 없이 미워하는 세계에 놓여진 존재였구나 를
구시로 부터 공격 당하고 난 부터 알게 되는 겁니다.
비로소 진정한 가해자는 자신이였고 유일한 피해자는 예수님 뿐이였다는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건져달라고 하는 이유는 다윗은 지금 예수님의 모습을 미리 앞당겨 보여주고 있는 겁니다.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 아버지여 아버지여 하실 수만 있다면 이 잔을 내게서 옮겨 주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

곧 버림 받음 입니다.
 

큰 권세를 지니지도 않았고 유명인도 아닌 아주 평범하기 짝이 없는

보잘 것 없는 자들이

 

미약한 자들이

 

수시로 던지는 돌에 지금 다윗이라는 왕이 개취급당할 정도로 매 맞고 있다는 겁니다.

 

골리앗을 이기고 사자를 물리치고 하던 것들이 이 상황에서 아무 쓸모 짝도 없게 되는 겁니다.

 

강도인데 강도 ~~~

저승사자 인데 저승사자 ~~~

철저하게 버림 받는 겁니다.

쉽게 말해 애들이
(베냐민 사람 구시) 자기에게 돌 던졌다고 해서

아침부터 죽게 되었다고 불쌍히 여겨 달라고 하지 안잖아요?

 

그런데 죽게 되었다 라는 겁니다.

 

도대체 어떻게 해서 다윗은 이런 시선을 가지게 된 것일까요?

 

베드로에게 나타난, 대신 우는 닭을 생각하시면 됩니다.

베드로는 자신이 울어야 할 것을 닭이 대신 울음으로써 기록되었지만

 

다윗은 다급함을 직시했기에 다윗이 우는 겁니다.

다윗이 설사 안 울었더라도 닭이든 해든 달이든 밤이든 낮이든 별이든

무엇을 동원해서든 닭처럼 꼬끼오 꼬끼오 꼬끼오 라고 울게 하실 겁니다.

 

사실은 이미 다윗은 그 혜택을 누렸기 때문에

여디디야 여디디야 여디디야 라는

선물의 의미를 알기 때문에

다윗은 이제 직접 우는 겁니다.

 

사실은 다윗이 아니죠 다윗 속의 그리스도가 우시는 겁니다.

 

골리앗에도 당당했던 다윗이

사울왕이 수시로 던지는 창에도 전혀 요동함이 없던 다윗이 우는 겁니다.

 

나는 절대로 예수님을 배반하지 않겠습니다.

제 손에 장 지지겠습니다 라고 했던 베드로를 사탄아 썩 물러가라 너는 사람의 일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이제 베드로는 닭이 대신 울어주지 않으면 안될 정도로

신념이고 오기고 자존심이고 뭐고 다 날라간 상태에서 예수님이 마련한 닭의 도움을 받아야 할 판국에 놓여진 겁니다.

 

꿈에도 몰랐지요 닭이 자신을 살려줄줄

 

사실상 평상시에도 우리가 무시했던 수 많은 것들이 나를 살려주고 있는 겁니다.

공기의 귀중함 때문에 전부를 거는 자가 없듯이 말입니다.

 

아무런 힘도 없고 나약하며 무가치하던 것들이

이제 나를 쪼여옵니다.

 

다윗은 저승사자를 만난냥

강도 만난 자 인냥

 

제발 살려 달라고 합니다.

 

나의 구원자여 뭐하고 계십니까? 제자 지금 죽게 된 것을 모르십니까?

빨리 구해주소서 다급하게 기도하고 다급하게 편지 메시지를 날리는 겁니다.

 

누가 저에게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내 안에 악마가 있냐고 물었습니다.

 

제가 답하길

개인 적인 문제로 보면 안되고 집단의 의미로 보자라는 의미로

내 안이 아니라 내 바깥이 모조리 다 악마의 소굴이다

우리는 이미 악마의 소굴에 갇혔고 포로된 자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악마의 소굴, 권세, 판대기 라는 겁니다.

 

자꾸 개인 문제로 봐 버리면

퇴마사가 내 속의 악마를 쫏아내어 본들

역시나 그 퇴마사도 마귀새끼 이다는 겁니다.

 

항아리 속에서 그 짖을 백날 해 본들 달라지는 것은 없다는 거지요.

 

그러자 그럼 그 항아리가 나의 몸뚱아리 이냐 라고 물었는데

 

그것도 개인적인 문제로 봐서 그런 겁니다.

 

구조 즉 항아리 자체가 내 속의 , 안의 문제가 아니라

 

내 바깥의 문제가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 어떤 인간도 나를 고칠 수 없습니다.

근원적인 문제를 해결할 자는 인간에게서는 없다 라는 겁니다.

구조 곧 항아리 자체를 교체하는 항아리 바깥의 인물이 등장해야 한다는 거죠.

 

바로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는자 말입니다.

 

지금 다윗은 자신의 개인 문제인 듯 개인 문제 아닌 개인 문제 같은 문제로

이스라엘이라는 안전빵인 항아리가

정작 자신을 구원해 주지 않는다 라는 것을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아니 이스라엘 속에 있으면서

즉 구원의 집단 속에 있으면서

구원의 집단이 전혀 구원과 무관한

정작 그 구원 집단 속에서 다윗은 죽게 되었다 라는 겁니다.

 

제사장도 휙 지나가 버리고

레위인도 휙 지나가 버리고

 

교회? 교회는 구원과 무관한 단체입니다.

 

나의 죄악을 도말해 주기는커녕

전혀 구원과 무관한 장사하는 강도의 소굴일 뿐이다는 겁니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선한 사마리아인 예수님이다는 겁니다.

 

즉 이스라엘 속에서

안전빵 속에서

교회 속에서

 

이스라엘이라는 강도를 만난 다윗에게

안전빵이라는 구원단제인 강도를 만난 다윗에게

교회라는 강도를 만난 다윗에게

그들은 전혀 구원과 무관한 강도로써 일관하고 있다 라는 겁니다.

 

그럼 이스라엘도 아니요

안전빵도 아니요

교회 속이라는 구원단체 선민도 아닌

 

사마리아인 곧 부정한 선한자 예수님

마치 불의한 청지기처럼

부정한 걸림돌 실족케 하는 지혜로운 예수님만이

다윗을 유일하게 건질자로써 다윗은 소개하고 있는 겁니다.

 

그것도 물 위를 걷고 있는 와중이 아니라

물 속에 퐁당 빠뜨림을 당해서 강도를 만난 거의 죽게 되어버린 상황에서

외치는 겁니다.

 

그러니 다급한 광시곡 랩소디 식가욘이다는 겁니다.

 

닭이 문제이겠습니까? 뭐든지 지푸라기도 잡아야 하는 상황처럼 다급하기 짝이 없습니다.

 

지지난 시간이였던가요?

 

사무엘하에서 사울왕의 집안 사람이 다윗을 저주하는 모습
시므이의 저주 (사무엘하 16장)

살인자 다윗이여 꼴 좋구나
야 이 살인자야! 이스라엘의 왕 
사울왕을 죽이더니만

이제는 니가 니 자식 압살롬에게 쫏겨나는 신세가 되었구나

이것이 다 하나님의 뜻이다 너는 그 벌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

너는 반드시 죽어 마땅한 저주를 받아야 한다.

 

다윗은 그 사람을 그냥 내버려 둡니다.

즉 이미 이스라엘 전체에 일반화 된 사고방식을 그가 대변하고 있는 겁니다.

 

그 한 사람 죽인다고 입다물고 있을까요?

또 다른 사람이 나타나서 또 말할 것 뻔하니까 말입니다.

 

이스라엘의 속성입니다.

교회의 속성입니다.

강도의 소굴의 속성입니다.

 

다윗은 그런 사고방식에서 예외가 될까요?

다윗도 당연히 그런 사고방식 속에 살았기 때문에

지금 다윗을 그 속에서 빼내시는 방식이 이 방식인 겁니다.

항아리에 갇혀 있는 다윗을 빼내시는 겁니다.

 

얼마나 고통 스럽겠습니까?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라고 했듯이

자기 백성이 자기를 죽일려고 달려드는 모습을 보는 것이

단 한 명도 예외가 없이 모든 백성이 다 달려드는 겁니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 못박으라

 

다윗은 그 속에서 건져달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아니 성전이 제사 드리는 곳이지

그거 하는 곳입니까?

 

그런데 성전의 유일한 기능은 오히려 제사가 아닌

그 기능 뿐이다는 겁니다.

 

성전은 결국 두 부류의 사람을 싸움 붙이고

두 패로 나누어서

제사냐 아니면 인애와 자비냐로 구별짖는

 

거룩이 임하는 곳

이제 장소를 뛰어넘어서 영역을 넘어서는 판대기 구조가 되는 것이

 

바로 성전의 의미였듯이

(성전 자체가 주체가 되어서 그렇게 싸움붙이는 겁니다. 그것도 모르고 인간들은 자기가 성전에 가는 줄 아는 겁니다.) 


다윗은 약속의 땅에서 그 거룩 곧 가르는 일을 보게 되는, 직접 당하게 되는 겁니다
.
거룩 자체가 거룩을 다윗에게 입히시는 겁니다.

 

그래서 세리처럼 바짝 엎드려서 살려달라고 합니다.

(눅 18:13, 개역)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눅 18:13, 바른) 『그러나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하늘을 향해 눈을 들지도 못하고 다만 자기 가슴을 치며 말하기를 '하나님, 죄인인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라고 하였다.』

(눅 18:13, 쉬운) 『한편,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말했다. ‘하나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눅 18:13, 가톨릭) 『그러나 세리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 가슴을 치며 말하였다. ‘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선한 사마리아 비유에서

그 당시 강도 만나는 것은 흔한 일이였는데

 

그 일이 흔하듯이 제사장 레위인이 부정한 시체를 만지지 않고 피해서 삥 둘러 가는 것은

그야말로 아무도 뭐라 뭐라 따지지도 묻지도 나무래지도 않는 그야말로 흔해빠진 일인데

 

예수님은 그 일에 그 흔해 빠진 일에 시비를 거시는 겁니다.

 

정작 강도는 없는 상황에서 말입니다.

정작 베냐민 사람 구시는 없는 상황에서 말입니다.

누구에게 다 뒤짚어 씌우듯이 말입니다.

 

의사와 환자가 한 패를 이루고

강도와 제사장 레위인이 한 패를 이루는

 

거룩이 주체가 되어서 거룩을 펼치시는 사건, 거룩의 자작극 인 겁니다.

 

강도 만난 자(강도 만나 부정한데 간따나 부정한 강도당한 자에게 개같은 이방인 사마리아인 이웃을 또 졸지에 만난자)와 선한 사마리아인 (부정한데 선한 이방인 부정한 자)

 

건강한 자에게는 필요없는 의사(이웃)였던 겁니다.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온 구원자 이셨던 겁니다.

 

오히려 강도와 제사장, 레위인(부정함을 피해 가야만 하는 제사 지키는 자)

이웃이라는 기능과 오히려 가장 무관한 자들이였던 겁니다.

무관 정도가 아니라 강도와 같은 사고방식인 한 패거리였다는 거죠.

성전종사자들이 말입니다.

 

그러니 성전은 성전종사자를 필요치 않으면서 자기 할 일을 다 하고 있습니다.

두 패로 가르는 일을 말입니다.


성전 자체가 주체가 되어서 이런 두 패로 가르는 일을 벌렸던 겁니다.
 

그러나 성전 안에서 성전종사자는 늘 모호한 의문의 짖만 반복하고 있습니다.
그들에게서의 성전은 하나의 악한세대가 요구하는 기적과 같은 하나의 수단물이였던 겁니다.
성전 뒤에 숨는 식입니다. 법궤 뒤에 숨었던
그런데 성전이, 법궤가 오히려 고함을 칩니다.
바벨론 군사들아 ~ 군사들아~ 요놈 이 뒤에 숨어 있다고 고자질을 합니다.
법궤가? 하나님의 언약궤가 홉니와 비느하스를 고자질 합니다.
바벨론 군사들에게 일러바칩니다.
성전이 고자질을 하는 겁니다.

구원 되지도 않는 일을 마냥 마냥 꼬리에 꼬리는 무는 식으로 계속적으로 마침도 없이 말입니다. 결과는 부재한 채로 말이죠.

 

그래서 율법사가 이웃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질문을 하도록 하신 겁니다.

그 율법사는 들어도 무슨소리인줄 모르는 의문에 더 빠져버린 겁니다.

이웃은 율법을 실천하는 자신이어야 하는데

 

졸지에 의문에 빠지도록

 

과연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라는 질문에

답을 못하는 겁니다.

이웃사랑 실천한 것을, 율법 지킨 것을
이웃이 자기를 알아 줄 줄 알았는데, 율법이 알아 줄 줄 알았는데
오히려 이웃이, 오히려 율법이 율법사인 자신을 고자질해 버리는 겁니다.
 

자기가 안되는, 자기를 알아 주지 않는 답은 답이 아닌 셈이 되어버린 겁니다. 오히려 고자질 해 버린다니깐요!

 

이것이 바로 지금 시편 7편에 나타나는 베냐민 지파 사람 구시와 같은 이스라엘의 모습입니다.

이 원수의 모습에 다윗 또한 그 속에 속해져 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울어야 합니다.
이것이 빼내시는 방식인 성령의 놀라운 탄식입니다.

 

구원이 자기가 구원되지 않는 답은 답이 아닌 셈이 되어버린 구원이 되어버린 겁니다.

 

오히려 자기가 아니라 예수님입니다 라고 대답할 수 있는 자는
이스라엘 속에서 유일하게 외칠수 있는 자는 강도 만난 자 다윗 만이

 

나의 이웃은 누구입니다 라고 답을 할 수 있는 겁니다.

모호하지도 않고 또렷한 명료한 답입니다.


물위를 걸었던 베드로는 모호한 것들을 쫏다가
졸지에 풍랑을 일으키신 예수님으로 부터 풍덩 빠져 죽게 되었을때에
예수님이 도대체 누구지 라는 전혀 다른 시선으로 보게 됩니다. 물론 3초

도대체 나를 풍랑에 빠뜨려 죽이는 당신은 누구세요? 내가 알던 예수님이 아닌데 당신 누구요?
왜 나를 죽이러 왔는가요? 왜 나같은 보잘것 없는 자와 싸우실려고 하시는 건가요?
이것보다 또렷한 것이 없거든요!

나를 찌르는 그 칼이 나를 살리는 메스(수술용칼) 라는 ...
상처는 그 찌른 칼에 의해서만 치료된다는 겁니다.
 

실로암 소경만이 내가 보기를 원합니다 라는 부르짖음에 응답해 주는

이웃 곧 불쌍히 여겨주시는 자가 누구인지가 또렷하고 분명합니다.

도대체 당신 누구시죠?

그 누구세요 라는 물음만이 또렷함을 제대로 만났다는 겁니다.
꽝 하고 대 충돌을 제대로 부딧혔다 라는 겁니다.

다른 인물들은 나를 제대로 심판도 할 줄도 모르고
제대로 내 죄를 대신해서 죽지도 않습니다.
나를 살리지도 못하는 인물들이다는 겁니다.

그런데 당신 도대체 누구십니까 라는 퍽 하고 죽게 되었을때 나오는 질문이야 말로 또렷한 현실이다는 겁니다.
왜 나를 죽이실려고 하십니까?
도대체 당신이 원하는 것이 뭐요? 케보이!! 이 인물과의 부딧힘 만이 제대로 된 또렷하고 명료함이다는 겁니다.

율법 실천 말씀실천 성전봉사 이웃사랑실천 십의 이조 이레에 두번 금식 이런 것들은 다 모호하고 의문의 흐릿한 것들이다는 겁니다.
제사와 번제는 흐릿한 의문들이다는 겁니다.

진짜 제대로 또렷하고 명료한 것은 인애와 자비이다는 겁니다.
다윗이 지금 구하고 있는 것이 또렷하다는 겁니다.
그것도 이스라엘이라는 모호한 의문들 속에서 이 또렷한 인애와 자비를 구하는 것만이 명료한 것이지

다른 것들은 다 허구요 마약이요 의문의 짖들이다는 겁니다.

이 싸움에 다윗은 놓여진 겁니다.

 

오히려 눈 뜬 소경들은 실로암 소경을 여전히 소경 취급하면서

자신들은 모호하기 짝이 없는 모세를 앞장 세우면서 그 모세 뒤에 숨어서 모세의 제자이다 라고 우기는 겁니다.


그런데 정작 모세가 나의 편이 되어 주기는 커녕 모세가 고자질 합니다. 법궤가 고자질 하듯이 말입니다.
우리도 이렇게 당해야 합니다. 교회가 고자질 하는 것을 당해야 하는 겁니다. 교회로 부터 당해야 합니다.
 

모세는 하늘 영광 다 버리고 나의 죄악을 위해서 내 대신 십자가에 저주 받아 죽은자가 아닙니다.

 

오히려 변화산에서 모세는 도리어 살려달라고 외치고 있는 판국입니다. 지금 시편 편의 다윗과 다를바 없습니다.
제발 살려주세요 예수님!! 
이것이 또렷한 현실입니다.

 

얼마나 종교라는 마약에 빠졌으면

강도 소굴을 못 끊었으면

 

그 모호하기 짝이 없는 마약 곧 제사와 번제를 밑도 끝도 없이 하겠습니까?

 

제가 철학책을 얼마전에 보다가 깜짝 놀랬습니다.

그래서 어머니랑 같이 나누었는데요

 

믿음이란 [이해]가 아니라 [산다, 사는 것이다] 라고 하더라 말이죠.

 

산다 즉 전부를 배팅 걸어서 값을 치르고 사는 것

 

밭 비유 아시죠.

농부가 밭을 갈다가 보물을 발견하자마자

그 밭 주인으로부터 세를 얻어서 밭 갈았는데 보물을 발견하니 아예 전재산을 걸어서

그 밭을 주인으로부터 값을 주고 사는 겁니다.

(마 13:44, 공동) 『"하늘 나라는 밭에 묻혀 있는 보물에 비길 수 있다. 그 보물을 찾아낸 사람은 그것을 다시 묻어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있는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

(마 13:44, 쉬운) 『“하늘 나라는 밭에 숨겨진 보물과 같다. 어떤 사람이 그 보물을 발견하고 다시 밭에 숨겼다. 그는 매우 기뻐하며 돌아가서 가진 것을 모두 팔아 그 밭을 샀다.』

(마 13:44, 킹흠정) 『또 하늘의 왕국은 마치 밭에 숨겨진 보물과 같으니라. 사람이 그것을 발견하면 숨겨 두고 그 기쁨으로 인해 가서 자기의 모든 소유를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

(마 13:44, 현대인) 『`하늘 나라는 밭에 숨겨진 보물과 같다. 사람이 그것을 발견하면 다시 감추어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그 밭을 산다.』

(마 13:44, 현대어) 『[보물, 진주, 그물 비유] 하늘나라는 밭에 묻혀 있는 보물과 같다. 보물을 발견한 사람은 흥분하여 그 밭을 사기 위해 있는 것을 모두 팔아 돈을 마련한다. 그래서 밭을 살뿐만 아니라 보물까지도 얻는다!』

 

이것이 믿음인데

인간에게는 없는 겁니다.

천국 비유인데 천국이 이렇게 베팅을 걸었다는 겁니다.
모든 것을 말입니다.
누구에게? 우리에게!! 아니 우리가 뭐하고?
아무것도 아닌 자들인데 말입니다.

 

예수님이 이유도 없이 나의 죄악을 도말하시고자

하늘 영광 다 버리고 원수들에게 자기 목숨을 아끼지 않고 값을 치르고 샀다 라는 겁니다.

 

전부를 다 걸어서 말입니다. 이유 없이 말입니다.

이것이 사랑 이다 라는 겁니다.


즉 믿음이란 사는 겁니다.
전부를 걸어서 사는 겁니다.

우리는 절대로 전부를 걸지 않습니다. 또 전부를 걸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이윤을 따져가면서 거는 가짜일 뿐입니다.

아무 조건 없이 전부를 거는 쪽은 예수님 뿐이다는 겁니다. 믿음 자체가 예수님이다는 겁니다. 


얼마나 불편하기 짝이 없습니까
? 얼마나 부담스럽냐 말이죠.


그럴 만한 가치가 없잖아요?

 

아니 내가 뭐라고 나를 값주고 사느냐 말이죠.

피 값을 치르느냐 말이죠.

전부를 다 거냐 말이죠.

 

그래서 예수님이 믿음이다 라고 하는 겁니다.

여기에 인간 믿음 거부입니다. 인간 믿음이 개입하고파 하는 것은 사람의 일이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일은 인간 믿음 소외 시키는 겁니다.

 

소외 되면 저런 시편 7편 꼴을 당하기 때문에

인간들은 예수님을 알기 싫어서 예수 믿기를 한다고 했습니다.

전부를 걸수 없기 때문에 떼우기 방식이 바로 믿는 척을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믿음이 내가 아닌 예수님이어야 하기 때문에

시편 7편을 다윗은 아니 말 할 수 없는 겁니다.

 

이스라엘에서 소외 되고

교회에서 배제 되고

성전에서 누락 되는 겁니다.

 

실제로 이스라엘도 교회도 성전도 다 누락의 의미인 그림자입니다. 실체가 나타나면 누락되어야 할 것들입니다.

 

과거에 제가 다녔던 교회에서 교회론을 말함에 있어서

교회란 그리스도의 몸을 향한 것이다 라는 말에 의미가 있는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니 그것처럼 모호하기 짝이 없는 소리가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런 교회와 그리스도의 몸은 전혀 다릅니다. 그 다름의 차이가 바로 단절입니다.

즉 같으면 같거나 아니면 아니다 라는 다르다를 말해야 하는데

같은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닌 이미와 아직처럼 늘 모호한 소리를 하는 겁니다.

 

즉 교회와 그리스도의 몸은 같은 의미입니다.

성령의 전인 너희 라는 집단이고

그리스도의 몸이다 라는 겁니다.

 

그런데 왜 꼭 그리스도의 몸을 향한 이라는 모호한 표현을 쓸까요?

물론 교회 라고 해서 다 성령의 전이 아니다 라는 인간의 염려를 왜 꼭 집어 넣는 것일까요?

저는 거기서 인간이 교회에 개입하고 싶어한다는 것을 이제야 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구지 안해도 이미 교회는 누락성을 담고 있기 때문에 별 걱정 하덜덜 말아야 합니다.

 

그것은 오히려 늘 잘 해야 될텐데 라는 강박증을 가진 사울왕에게서 늘 나타납니다.

그러다 보니 자기에게 반항하는 자들은 가차없이 다 제거의 대상이 됩니다.

그들만 제거 될까요? 자기 보다 잘해도 제거가 되어야 하는 겁니다.

그러니 인간의 손으로 지어지는 교회(이스라엘)가 되는 셈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교회 생활 해 본 사람이라면 다 알게 되는 사실입니다.
인간의 손으로 지은 교회들의 가장 보편적인 일상의 모습입니다.
반항자 제거, 역시나 자기 보다 잘해도 제거.

 

반면에 다윗은 정반대입니다.
오히려 비로소 엉터리 성향을 드러내는 이스라엘(사울의 사고방식)로부터 공격을 받는, 전혀 다른 성령의 전의 모습입니다.

 

교회 속의 또 다른 교회인 겁니다.

이스라엘 속에 이스라엘입니다.

 

그래서 지나개나 어린아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이스라엘 사람들은 구시처럼 다윗에게 다 돌삐를 던지는 겁니다.

그것이 베냐민 지파사람 구시 인 겁니다.
우리는 늘 구시처럼 예수님을 향하여 돌삐를 던지고 있습니다.
단 한 번도 멈춘적도 없이 말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으라 못 박으라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것을 모릅니다.

이스라엘은 예수님이 다윗을 자신의 피 값을 치르고 이유 없이 무조건 사랑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밧세바 사건을 꼬투리 잡아서 공격했는데
오히려 이것이 더욱더 더더욱 다윗에게 은혜로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지금 다윗이 구하고 있는 부르짖는 기도는 바로 뻔뻔스럽기 짝이 없게도

무조건 용서해 주신 그 긍휼을 또 한번 간구하는 것 길 밖에 없다는 겁니다.

(눅 18:1, 개역)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될 것을 저희에게 비유로 하여』

(눅 18:2, 개역) 『가라사대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관이 있는데』

(눅 18:3, 개역)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하되』

(눅 18:4, 개역) 『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나』

(눅 18:5, 개역)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

(눅 18:6, 개역) 『주께서 또 가라사대 불의한 재판관의 말한 것을 들으라』

(눅 18:7, 개역)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눅 18:8, 개역)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바로 이것에 이스라엘은 곧 사울왕 베냐민 지파 사람 구시는 도전을 하는 겁니다.


지지난 시간에 언급한 대로 압살롬 처럼 끝까지 법대로 법 법 법 이다는 겁니다.
그러나 다윗은 비참함 속에 놓여지면서 오로지 바랄 것은 긍휼 밖에 없다 라는 겁니다.

이 둘의 차이가 지옥과 천국이라는 간극을 만들어 내는 겁니다.
지옥 천국 이라는 꼭지점이 중요한게 아니라

그 두 사이의 간극을, 곡지점 사이의 변, 면을 만드시는 것이 바로 십자가가 일으키는 사건
십자가의 자작극이다는 겁니다.
 

율법사는 예수님의 입을 통해서 자기를 옳게 보일려고 함으로써

인애와 자비에 대해 도전을 하고 있는 겁니다.


율법사는 인애와 자비는 무시한채 이웃사랑 실천한 제사와 번제를 주장하고 있는 겁니다.
법 법 법 법대로 하자 라는 겁니다. 왜? 법을 지켰기에 우의를 선점했다고 우기는 겁니다.

저 세리와 같지 않게 토색치 않고 타락하지 않게 해 주심을 감사합니다.
십의 이조도 드리고 이레에 두번 금식하고
이제 법 대로 하십시다요 라고 우의를 선점했다고 여겼기에 법을 주장하는 겁니다. 제사와 번제를 주장하듯이 말입니다.

(10:29, 개역) 이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

(10:29, 새번역) 그런데 그 율법교사는 자기를 옳게 보이고 싶어서 예수께 말하였다.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10:29, 공동) 그러나 율법교사는 짐짓 제가 옳다는 것을 드러내려고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하고 물었다.

(10:29, 쉬운) 이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고 싶어서, 예수님께 말했습니다. “그러면 누가 제 이웃입니까?”

(10:29, 우리말) 그런데 이 율법학자는 자신이 옳다는 것을 보이려고 예수께 물었습니다. “그러면 누가 제 이웃입니까?”

(10:29, 킹흠정) 그러나 그가 자기를 의롭게 만들려고 예수님께 이르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하니

(10:29, 한글킹) 그러나 그는 자신을 의롭다고 주장하고 싶어서 예수께 말씀드리기를 "그런데 누가 나의 이웃이니이까?"라고 하니

(10:29, 현대인) 그 율법학자는 자기가 옳다는 것을 보이려고 `그러면 누가 내 이웃입니까?' 하고 예수님께 물었다.

(10:29, 현대어) 그러자 율법학자는 짐짓 자기가 옳다는 것을 드러내려고 `누가 내 이웃입니까' 하고 다시 물었다.

(10:29, 가톨릭) 그 율법 교사는 자기가 정당함을 드러내고 싶어서 예수님께, “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하고 물었다.


그러나 정작 율법은 그런 우리들을 고발 고자질 합니다.
뭐? 법 지켰다고? 누가? 니가? 그 꼬락서니로?

율법의 완성은 남을 사랑하는 것인데
오히려 율법을 지킨 것이 남을 이겼다는 성취감에서 법을 주장하더라 말이죠. 


우리는 뭘 해도 다 죄 뿐인줄 모르는 겁니다
.
법 지켰다는 자체가 법을 어긴줄 모르는 겁니다.
아무리 따져 봐도 모르는 겁니다.
나의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해서 이웃사랑 실천을 했거든요
그런데 알고 보니 그것이 이웃을 죽인 행동이다는 겁니다.

괜히 이웃사랑을 실천했던 겁니다.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을 보면 미워 죽거든요.

그래서 아침에 인자하심을 나타내시며 밤마다 주의 성실하심을 베풀어 달라고 해야할 판국입니다.

 

아침에 살려달라고 해야할 정도로 긴박하고

밤마다 내가 잘했던 못했던 나의 모든 흔적들을 다 지워달라고
제발 다 삭제시켜주세요 제발 도말해 달라고 싹싹 빌어야 할 판국이다는 겁니다
.

 

나의 흔적은 없어져야 하고 오로지 예수님의 흔적만 남겨달라는 겁니다.

그 예수님의 흔적이 뭔고 하니? 주의 성실함은 곧

나를 삭제시키는 지우개의 부지런함을 베풀어 달라는 겁니다.
나 자체를 삭제 시켜 달라는 겁니다. 나를 죽여달라는 겁니다.

 

제가 며칠전에 꿈에서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꿈에서 제가 자고 있는데 너무 눈이 부실정도로 밝아서 잠을 못자고 일어났습니다.

 

일어나서 바깥으로 나가 보니 보통 밝은 것이 아니라서 해가 우찌 잘못되었나? 낮인가? 밤이지 싶었는데?

 

그래서 하늘을 쳐다보니까 광채나는 흰 옷을 입은 거대한 예수님이 큰 칼을 양 손에 들고서

입에는 부지런히 칼들이 발사 되면서 원수들과 전쟁을 벌리시고 있는 겁니다.

 

대 충돌의 하늘 전쟁이 벌어진 겁니다.

 

그 파편들이 땅에 떨어져서 불이 났는데 몇몇 사람들이 있길래

저는 예수님이 나타났다고 신나게 외쳤습니다.

그 중에 나를 아는 지인들도 있었는데

예수님이 나타났다고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기뻐서 외치니까

평상시 같으면 내 입을 막고 또 괴롭힐 줄 알았는데

오히려 얼마나 근심을 하던지 걱정의 얼굴을 하더라 말이죠.

 

그러든 말든 예수님이 나타났다고 막 떠들고 다녔습니다.

나의 죄악을 도말하시는 예수님이 나타났다고

 

그러다 꿈에서 깼습니다. 새벽 4시 쯤

부랴 부랴 밖으로 나가 보니 어두 컴컴한 칠흑같은 밤이였습니다.

 

혹시 전쟁이 일어난 소식이 없나 싶어서 부랴 부랴 뉴스를 보고 인터넷 검색도 했습니다.

 

너무나도 생생해서 말이지요.

 

지금도 깜짝 깜짝 눈부신 밝은 빛을 보면 밖으로 후다닥 나가 봅니다.

 

얼마나 원수들이 최후의 발악을 하면서 달려드는지

예수님의 부지런한 싸우심이 그들이 맥을 못 추는 추풍낙엽의 모습이였습니다.

 

마지막 때에 오시는 예수님의 모습이였습니다.

 

이 꿈의 요지는 이겁니다.

값주고 산 전부를 걸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싸우시는 겁니다.

모든 것을 건 자 만이 싸우는 자인 겁니다.

 

제사를 원치 않고 번제를 원치 않는 싸움입니다.

오로지 인애와 자비를 원하는 싸움입니다.

 

모든 것을 다 버리시고 이유도 없이 무조건적으로 용서하시겠다고

하늘 영광까지 다 버리시고 이 땅에 내려와서

포로된 자

갇힌자

억눌린자를 자유케 하시겠다고

 

십자가에 죽기 까지 복종하신 예수님

자기 목숨을 걸어버리신 싸움입니다.
값주고 산 믿음입니다.

 

예수님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버리시고서 말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외칩니다.

이 사랑만 뻔뻔스럽게 외칩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께서 잘 아십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제가 주님을 너무 너무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요일 4:10, 개역)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요일 4:10, 새번역) 사랑은 이 사실에 있으니, 곧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자기 아들을 보내어 우리의 죄를 위하여 화목제물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요일 4:10, 공동) 내가 말하는 사랑은 하느님에게 대한 우리의 사랑이 아니라 우리에게 대한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보내셔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려고 제물로 삼으시기까지 하셨습니다.

 

(요일 4:10, 쉬운) 진실한 사랑이란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이 아니라,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을 보내셔서 우리의 죄를 위해 화목 제물이 되게 하셨습니다.

 

(요일 4:10, 킹흠정)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아니하였으나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자신의 아들을 보내사 우리의 죄들로 인한 화해 헌물로 삼으셨나니 여기에 사랑이 있느니라.

 

(요일 4:10, 현대어) 이러한 하나님에게서 우리는 참사랑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참사랑은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이 아니라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우리 죄 때문에 진노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벌하시는 대신 사랑하는 외아들을 희생제물로 내주신데서 나타났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사랑의 극치입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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