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꾀에 넘어지는 악인 (시편 9)

 

십자가와 인간의 꾀

 

(9:1, 개역) [다윗의 시, 영장으로 뭇랍벤에 맞춘 노래] 내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감사하오며 주의 모든 기사를 전하리이다

(9:2, 개역) 내가 주를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지극히 높으신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니

(9:3, 개역) 내 원수들이 물러갈 때에 주의 앞에서 넘어져 망함이니이다

(9:4, 개역) 주께서 나의 의와 송사를 변호하셨으며 보좌에 앉으사 의롭게 심판하셨나이다

(9:5, 개역) 열방을 책하시고 악인을 멸하시며 저희 이름을 영영히 도말하셨나이다

(9:6, 개역) 원수가 끊어져 영영히 멸망하셨사오니 주께서 무너뜨린 성읍들을 기억할 수 없나이다

(9:7, 개역) 여호와께서 영영히 앉으심이여 심판을 위하여 보좌를 예비하셨도다

(9:8, 개역) 공의로 세계를 심판하심이여 정직으로 만민에게 판단을 행하시리로다

(9:9, 개역) 여호와는 또 압제를 당하는 자의 산성이시요 환난 때의 산성이시로다

(9:10, 개역) 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아는 자는 주를 의지하오리니 이는 주를 찾는 자들을 버리지 아니하심이니이다

(9:11, 개역) 너희는 시온에 거하신 여호와를 찬송하며 그 행사를 백성 중에 선포할지어다

(9:12, 개역) 피 흘림을 심문하시는 이가 저희를 기억하심이여 가난한 자의 부르짖음을 잊지 아니하시도다

(9:13, 개역) 여호와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나를 사망의 문에서 일으키시는 주여 미워하는 자에게 받는 나의 곤고를 보소서

(9:14, 개역) 그리하시면 내가 주의 찬송을 다 전할 것이요 딸 같은 시온의 문에서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9:15, 개역) 열방은 자기가 판 웅덩이에 빠짐이여 그 숨긴 그물에 자기 발이 걸렸도다

(9:16, 개역) 여호와께서 자기를 알게 하사 심판을 행하셨음이여 악인은 그 손으로 행한 일에 스스로 얽혔도다(힉가욘, 셀라)

(9:17, 개역) 악인이 음부로 돌아감이여 하나님을 잊어버린 모든 열방이 그리 하리로다

(9:18, 개역) 궁핍한 자가 항상 잊어 버림을 보지 아니함이여 가난한 자가 영영히 실망치 아니하리로다

(9:19, 개역) 여호와여 일어나사 인생으로 승리를 얻지 못하게 하시며 열방으로 주의 목전에 심판을 받게 하소서

(9:20, 개역) 여호와여 저희로 두렵게 하시며 열방으로 자기는 인생뿐인줄 알게 하소서(셀라)

 

 

지난 시간에 십자가는 실패로 어리석음으로 미련함으로 일관한다고 마지막 부분에 결론으로 말했습니다.

 

즉 상대적이다는 겁니다.

 

여기에 반발하는 사람들이 제가 만난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인데

기독교라는 종교를 믿는 자들이지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아닌자들인데

 

바로 이 상대적인 것을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십자가라는 거리끼는 불쾌한 걸림돌을 거부하는 자들이다는 겁니다.

왜 반발하는고 하는 너무 흑백논리로 몰아간다 그러다 보니 괘변이다 라는 겁니다.

 

결국 자신들의 논리는 흑백논리가 아니다 라는 것이지요

평화주의자 라는 식입니다.

 

즉 너는 주관적인 논리이지 객관적이지 않다 라는 겁니다.

나 봐라 객관적이라서 사람들 곧 대중들이, 다수들이 동의를 하지 않느냐 라는 겁니다.

대중이라는 다수와 동일시 한 겁니다.

 

그러나 객관성이란 존재하지 않고요 주관이 모여서 다수화로 동일시 시킨겁니다.

 

그래서 마지막에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였던 바울을 언급했던 겁니다.

바울 자신이 객관성을 주장하고

이단 예수를 핍박했고

스데반 집사까지 죽였습니다.

 

그런 다수주의자, 객관성의 달인이였던 그 사도바울이

왜 철저한 흑백논리의 십자가를 옹고집으로 주장할까요?

이 독선적인 십자가만을 알기로 했다 할까요?

왜 십자가 외에는, 십자가 밖에는, 십자가 뿐임에 일체양보 없다 라고 할까요?

 

사도바울 본인이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하나님에 대한 열심이 특심이였고

얼마나 많은 것들의 다양성 다수성 객관성

곧 율법과 성전과 하나님과 그 수많은 것들에 완벽을 다 갖추고자 열심히였던 당사자 아닙니까?

 

그런데 왜 그것 모두를 다 배설물로 여겨버리고 왜 십자가만 알기로 했다고 할까요?

즉 상대적으로 저런 다수의 객관성을 다 버리겠다고 선언한 상대적인 표현이다는 겁니다.

 

지난 시간의 시편 8편을 어머니와 함께 나누면서

이런 예화를 들었습니다.

 

꼴에 머슴아들이 율법을 어겼다고 돌삐를 들고 마리아를 돌로 쳐 죽일려고 합니다.

 

마리아는 자기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데

남자와의 성적인 관계도 없이 배가 불러오니

이것은 저절로 율법을 어긴 셈이 되니

졸지에 돌삐 맞아 죽어도 할 말이 없게 된 겁니다.

 

그래서 억울함, 비참함, 곤고함, 심판 속, 진노 속에

놓여질 수밖에 없으니

 

아니 부르짖고는 못 배기는 상황이 저절로 된 겁니다.

저절로

 

저절로 부르짖게 되니까 거룩이 덮치게 되니

이제는 거꾸로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다급하게 부르짖는 랩소디 곧 광시곡, 식가욘이

이제는 딩가 딩가 신나게 노래부르는 깃딧의 장단에 춤추는 노래가 되었는데

 

그것이 너무 너무 광대한 위엄과 장엄과 말로 표현못할 영광을 만나버리니까

마치 헤까닥 가버린 것처럼 보이는

그래서 왕이시여 혹시 미친 것은 아니신거지요

좀 전 까지만 해도 금식과 눈물과 회개 그리고 기도까지 하셔놓고서는

왜 이제는 먹고 마시며 춤추시는 것입니까?

 

혹 내 기도 눈물 회개 금식이 꺽으신 뼈를 펼줄 알았는데

꺽으신 뼈를 꺽는 것이 기쁨이다는 것을 알았다.

내 죄를 도말하셨는데 너는 안 기쁘고 배기리?

동네 사람들 동네사람들 내 죄를 도말하시는 선지자가 나타났데요 라고

우물바가지를 내동댕이치면서 자랑하러 돌아다니듯이

 

지금 마리아가 저절로 부르짖게 되니
(즉 상대적으로 강퍅한 율법의 돌삐를 쥔자들에게 죽임을 당하게 되는 입장 때문에)

 

막상 거룩이 덮치게 되니

마리아 자신의 입에서 하늘에서 벌어진 전쟁을 이 땅에 가시화 시켜 달라는

이것은 율법 돌삐 7개를 던지는 쪼잔한 머슴아들 보다

 

하늘의 유성을 770개를 이 땅에 쏟아붓는 그야말로 대찬 마리아의 기도를 하게 되더라 말이죠.

 

에게 에게 그것도 돌삐냐? 우리 연변에서는 그깟 돌삐 7개는 돌삐로 쳐 주지도 않는다.

적어도 사천년 묵은 아메리카 대륙만한 돌삐 770개를 던져야 돌삐 축에 끼이지

그것도 돌삐냐 라는 것입니다.

 

분명 피해자로써 기도했는데

즉 가해자가 있었다는 거지요

 

그런 가해자로부터 피해당하는 상황이였는데

이제는 거꾸로 그것도 가해자냐 라는 식입니다.

오히려 마리아 자신이 더 더 더 큰 770배의 가해자로써

이 땅을 초토화 시켜 달라고 브로큰애로우 폭격 요청을 하는 겁니다.

 

자 이래도 흑백논리입니까? 괘변입니까?

오히려 평화주의자 라고, 객관적이다. 다수적이고 민주적이다 라는 것이 더 괘변적이며 흑백논리이다는 겁니다.

 

율법의 잔똘맹이를 던지겠다는 것은 죄를 겨냥한 돌삐입니다.

요즘으로 치면 이슬람에서 공개적인 태형

얼마전에 이슬람 과격단체가 길거리에서 노래하는 악사를 공개적인 태형으로

수십대를 때렸다고 하던데

 

죄를 겨냥해서 때렸다면

마리아에게 돌삐를 던졌다면

그 죄를 없앨려고

죄에 대한 적개심으로 돌삐를 던졌을 것 아닙니까?

그런데 아니다 라는 겁니다.

 

자신들의 우위성, 그리고 상대방에서 열등의식을 심어넣기 위한, 죄의식을 심어 넣기 위한

결국 죄를 없애기 위함이 아닌

죄를 더 하게 하기 위한 악마의 짖을 정작 본인들이 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약한 놈일수록 더 좋은 겁니다.

의지가 약하고, 몸도 허약하고,

가난하고, 실천의지력이 부족하고,

특히 열등의식이 심한 자들,

이런 자들이 있으면 더 좋은 겁니다.

 

촘스키가 이런 말을 했다지요?

부자가 일반노동계급들이 자신들의 영역인 부자의 세계에 못 들어오도록

대중문화를 값싸게 공급한다고 특히 TV에 빠져 살도록 중독에 못 빠져나오도록

마약도 싸게 공급하는 식으로 한다 라는 겁니다.

 

그런 굴레 자체에서 못 벗어나도록 말이죠.

 

그런데 이것이 말이 안되는게

부자들이 그렇게 말해놓고 자신들도 빠지고

촘스키 본인들도 안 빠졌느냥 마치 난제를 해결한냥 뭐 대단한 비밀을 알려주는냥 말하지만

자신 또한 이 중독의 세상에 빠져 살고 있고

 

다들 고만 고만한것들끼리 도토리 키 재기 하면서 아등바등 살고 있는 겁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올무를 치면서 자신이 쳐 놓은 그물에 자신이 빠져 사는 것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진짜로 죄를 겨냥한 돌삐던짐이 아니다는 겁니다.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힌 여인에게 돌삐를 든 자들이 다들 한결 같이 다 도망치는 이유와 같다는 겁니다.

근본적인 죄를 해결할 재간이 없다 라는 것에서

모든 인간들은 현장에서 간음하다가 잡힌 여자와 같은 신세라는 겁니다.

 

그런데 무식하게 얼마나 공부를 안했으면

예수님께서 다시는 죄 짖지 말라고 했으니까

죄 안짖도록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히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하는

어떤 목사와 그의 아내를 보니까

그들이 한국 기독교를 제대로 건전하게 이끌어가는 자들이다 라고 자평하는 모습을 보니까

이런 사기꾼들이 제발 제발 깔려줘야

십자가가 스스로 밝히 빛을 내는 방식임을 보게 됨을 느끼는 겁니다.

 

근본적인 죄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죄 아래로 가두어서 앵벌이시켜서 자신들은 등쳐먹겠다는 심뽀를 그대로 드러내는데

그것이 오히려 더 잘 속이는 기술이 되고 말았다는 겁니다.

 

그들은 언제든지 돌삐를 들려고 하는 자세이다는 거죠.

되도 않는 짱똘 몇 개 7개 쥐고 말입니다.

 

그것도 돌삐라꼬?

그것 7개 던지면 맞아 죽겠남?

그래가 죽기나 할까요?

제대로 죄를 못 죽일꺼면

돌삐를 들지나 말 것이지

죄도 못 죽이는 주제에 돌삐를 왜 드냐 말이죠.

 

원천적인 죄 문제를 해결도 못하는 주제에

오히려 중독에 취약한 자와 대조를 해서 상대적으로 나는 괜찮은 인간이다 라는 것을 과시할려다가

자기 꾀에 자기가 파 놓은 함정에 자기가 쳐 놓은 그물에 자기가 걸려드는 것이

 

바로 십자가 라는 어리석은 지혜이다 라는 겁니다.

정작 상대적인 것은 십자가만이 펼치시는 권리인 겁니다.

십자가만이 상대적인 인간의 그런 행동을 유발케 해서 작용한다는 겁니다.

십자가만이 그럴 권한이 있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들이 자신이 옳타 라는 것을 내세우고자 돌삐를 심심하면 들고 있는데

그 돌삐도 돌삐냐 라고 부끄럽게 만들어 버리는

거리끼는 걸림돌, 껄끄러운 지혜. 불쾌한 복음이 바로 십자가 라는 겁니다.

 

오히려 그런 십자가에 걸려들어서 자신의 죄악이 들통나는 것을 감사해야할 판국이고

저런 되도 않는 인간들의 설교에는 말려들 필요가 없는 겁니다.

 

이렇게 십자가는 인간의 꾀와 맞물려 있는 겁니다.

 

인간의 꾀는 십자가 만큼은 안 역이고자 그렇게 애를 쓰는데

도리어 반드시 십자가와 맞물리도록 되어 있다는 것에서

인간의 꾀는 안 통하는 겁니다.

 

인간의 꾀는 결국 다른 사람들은 다 몰라도 나 만큼은 절대로 구원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상대적인 십자가는 [버림]입니다.

 

심지어 독생자 예수 마저도 버렸다 라는 것이 십자가의 일관된 모습입니다.

얼마나 어리석습니까? 헬라 이방인들은 그래서 그 어떤 지혜로도 풀어도 안 풀리기에 어리석고 미련함으로 몰아세워 거부하는 겁니다.

유대인들에게서는 자신들의 선민사상이 다 날라가 버리는 겁니다.

목적이 구원 뿐인데

그 구원이 정작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까지도 버림받는 판국에

그 앞에서 날 구원해 달라는 소리가 무색해져 버리는

 

거리끼는 껄끄러운 모습이 되는 겁니다.

 

그래놓고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힌 여자를 만나면 돌삐를 들려고 다들 덤벼드는 상황에

마침맞게 예수라는 하나님이 버린 자가 옆에 지나가 보니 과연 이 예수는 어떤 반응을 나타낼까 라는 테스트 재미에 희희낙락 거리는 겁니다.

 

맞습니다. 인간들이 신을 믿고 예배당에가서 하는 신앙들은 결국은 다 장난인 겁니다.

그런 와중에 자신들 보다 더 과잉적인 존재가 나타나면 그때서야 본심이 드러나는

복수심이 인간 신앙이지

애초부터 믿음이라는 것은 인간에게 없었던 겁니다.

복수심을 신앙으로 포장한 것들이 자기네들끼리 유통시킨 겁니다.

그 흐름을 깨는 것이 복음입니다.

 

그들의 장난에 더 더 더 초과잉적 장난 아닌 장난인 십자가 라는 버림이

그들 구원을 모조리 다 날려 버리는 겁니다.

 

과연 다 날라가도 구원이 있느냐 라는 거죠.

예수님은 정작 되 찾은바 되었는데

 

유대인은? 오늘날 기독교인은?

 

그래서 예수님은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보냄을 받지 않았다고 하시는 겁니다.

 

(15:24,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신대

 

결국 예수님 뿐인 겁니다.

잃어버렸다가 되찾은

죽었다가 다시 사시는 부활의 첫열매 되시는 예수님으로 다시 시작하는 자 뿐이다는 겁니다.

 

유대인은 다 날라가는 판국인 겁니다.

그렇다고 구약이 다 무효가 되느냐?

천만의 말씀

 

오히려 유대인의 구약보다

예수님으로 출발한 새이스라엘의 구약이 더 구약적이다는 겁니다.

 

그 어떤 연결 고리가 없는데 말입니다. 원인 없는 결과로써 초과잉성을 누리는 겁니다.

 

마치 예수님과 직접 대면했던 제자들 보다

더 더 더 사도적인 사도바울이

예수님을 만난 제자들 보다 더 예수님을 더 생생하게 증거한 것처럼 말입니다.

이것이 성령으로 돌아가자 라는 구호로써 사도바울처럼 살아야 한다는 주장들인 겁니다.

나만 사도다 라는 뻔뻔스러움같이 말입니다.

 

그 어떤 연결 고리가 없이 말입니다.

 

시편 7편까지 그리고 시편 8편에서는 완전 정반대의 상황이다고 했습니다.

로마서 7장에서 8장 사이에 그 어떤 연결 고리가 없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마리아가 돌삐 맞아 죽게 된 형편에서 이제는 거꾸로 770개의 하늘의 유성들을 던져 전 지주를 초토화 시켜 달라고 요청하는 기도는

 

결국 그 어떤 연결 고리가 없이 나타난 원인 없는 결과이다는 겁니다.

 

바로 성령은 이렇게 그 어떤 연결 고리가 없이 일하신다 라는 겁니다.

곧 상대적인 원인 있는 결과인 행함을 거부하신다 라는 겁니다.

 

원인이 있다는 것은 오히려 결과가 부재하다는 것이고

결과가 있다는 것은 오히려 원인이 부재인 겁니다.

 

신약은 그 어떤 연결고리가 없는 원인 없는 결과인 겁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곧 구약백성들은 예수님으로 인해 실족해 넘어지는 겁니다.

왜냐하면 저런 사고방식에 의해 예수님을 늘 시험했기 때문인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시편 9편은 그야말로 원인 없는 결과를 누리는 겁니다.

마치 희년을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그 은혜의 해를 은혜의 배려로 누리는 겁니다.

 

오히려 원수 곧 인간의 꾀는 바로 이런 원인 없는 결과인 은혜의 해를 거부하는 방식으로써

상대적으로 대조를 이루면서 서술되고 있습니다.

 

결국 그들은 늘 함정을 파고, 올무를 치며, 그물을 놓는 방식인 원인 있는 결과인데

그 원인에 정작 자신들이 넘어지는 방식이다는 겁니다.

 

야고보서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1:13, 개역)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1:14, 개역)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즉 시험이라는 것은 자신이 이런 원인을 추구하면 그에 따른 원인의 결과는 당연히 원인에 의해 와야 한다는 겁니다. 이것이 자기 꾀에 자기가 말려들고

심지어 늘 인간의 행동 행위는 하나님과 결부시키는 방식이라서 하나님께 시험받는다 라는 식이다 라는 겁니다. 그래서 참으면 또 참는 원인에 의해 결과가 참아서 오는 결과가 온다고 자기 꾀를 자꾸 집어넣는다는 겁니다. 그것이 도리어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지요.

즉 십계명을 지켜보겠다는 심뽀 자체가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는 망령되게 일컸는 것이다는 겁니다.

 

십계명 전문 자체가 원인 없는 결과로써 주어진 것이지

지켜서 나타난 결과는 단 하나도 없는 겁니다.

그냥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겁니다.

자기가 잘나서. 잘 지켜서 나온 것이 없다는 겁니다.

앞으로도 말입니다.

 

자 그런 의미에서 야고보서 처음 부분에 또 역설적으로 이렇게 나옵니다.

 

(1:1, 개역)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는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에게 문안하노라

(1:2, 개역)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1:3, 개역)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1:4, 개역)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1:5, 개역)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1:6, 개역)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1:7, 개역)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1:8, 개역)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

 

시험을 만나게 되거든 온전히 기뻐하라고 합니다.

 

곧 이것은 시험 자체가 온다는 것은 결과가 이미 주어졌기에 왔다 라는 겁니다.

? 상대적인 인간의 꾀가 십자가와 맞물려서 드러나는 양상이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것을 누리면 됩니다.

아 내 속에 이런 꾀도 자리잡아서 십자가에게 들통나는 구나 라고 말이죠.

 

그래서 야고보서 저자는

 

(1:3, 개역)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1:4, 개역)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1:5, 개역)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1:6, 개역)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원인 없는 결과로 믿음과 결부시키지

원인 있는 결과로 행함과 결부시키지 않고 있습니다.

얼마나 상대적으로 대조성을 의도적으로 띠고 있습니까?

 

그리고 계속적으로 행함과의 결부가 아닌(원인 있는 결과)

믿음과의 결부(원인 없는 결과)로써 계속적으로 야고보서 2장에서

[행함이 있는 믿음]으로 계속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라는 사실입니다.

 

그 유명한 구절

 

(2:14, 개역)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말입니다.

 

왜 유명한고 하니 인간의 꾀와 가장 맞부딧히는 맹렬한 충동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쪽에서는 전혀 안 그런데

인간의 꾀가 이 구절을 가지고 여전히 자기 세계의 중독세계를 굽히지 않고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성화론자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고 개혁주의자 라고 해서 예외가 아닌

이 구절을 가지고서 자기들을 방어하는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자신들의 꾀가 옹호되기는커녕 오히려 자신들이 말해놓고도

자신들의 모순적인 모습에 의해서

차라리 이 구절을 주장하지 않았더면 될 것을

더욱더 주장하는 바람에

자기 꾀에 더 넘어가는 식이 되는 것이 이 구절의 사용인 겁니다.

 

바로 십자가가 그런 식이다 라는 겁니다.

 

그러니 십자가는 인간의 꾀를 구석 구석 찾아다녀서 반드시 십자가 자신과 맞물리도록 한다는 사실입니다.

왜 유대인에게 거리끼는 불쾌한 십자가가 된 것일까요?

오늘날 기독교인들에게도 똑같습니다. 왜 거리끼는 구절이 된 것일까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 라고 해 놓고서는

그렇게 많이 행했음에도 불구하고 믿음이 없어서 다 자기 꾀에 넘어서 멸망하는 것일까요?

 

문제는 행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믿음이 없어서 라는 겁니다.

이 구절이 유명해진 이유는

행하지 않을까봐 싶어서 사용을 했는데

정작 내막을 살펴보니

믿음이 없이 이 구절을 막써먹었던 겁니다.

행하지를 않아서가 아니라 말이죠.

 

그러니 이것을 몰랐던 겁니다.

행하면 믿음이 있다고 취급받겠구나 라고 여겼는데

오히려 행하니까 믿음이 사라질줄 몰랐던 겁니다.

사실은 믿음이 애초부터 없었다는 것인줄도 모르고

자신의 꾀에 자기가 말려든 겁니다.

 

그럼 행함이 있는 믿음이 뭐냐?

 

믿음이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주어졌기에

행함에 의미를 두지 않고 행한다 라는 겁니다. 이것이 믿음이다 라는 겁니다.

 

그런데 믿음이 처음부터 주어지지 않은 자에게는

행함에 의미를 두고서 행하니까 이것이 믿음이 아니다 라는 겁니다.

지난 시간에 말했듯이 믿음 자체가 둘로 가르는 것인데

끊임없는 분절인데

이 가르는 것이 없는 자에게는 믿음이 가른다는 것을 모르기에

갈라진적이 없기에

행함과 믿음을 따로 따로 보는 겁니다.

 

행해야 하고 그러면 믿음이 되고

 

그런데 믿음은 그게 아니라

행함을 거부하면서 믿음이 오기 때문에

내가 안 행해서가 아닌 행한 것들이 의미가 없기에

믿음이 결과적으로 더 나은 것으로써 옳다 라는 겁니다.

 

 

그래서 연결 고리가 없는 겁니다.

 

그 예로

 

아브라함이 아들을 바친 것이 믿음이다 라고 했고

기생 라합이 거짓말을 한 것이 믿음이다 라고 했습니다.

그것도 그냥 믿음이다 라고 하지 않고

행함이 있는 믿음이다 라고 말입니다.

 

행함이 있는 믿음의 예로써 든 것이다 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똑같이 행하면 행함이 있는 믿음이 되어야 하는데

도리어 시험들어 버리는 겁니다.

오늘날 아들 바쳐 보세요

남들이 문제가 아닌 본인이 정작 시험에 들어서 감당을 못합니다.

그래서 훨씬 약한 것 레벨이 낮은 초보수준인 기생 라합의 거짓말을 똑같이 행해보자 말이죠.

과연 감당할 수 있을까요?

 

그러니 믿음 맞잖아요 행함이 있는 믿음이 맞잖아요

아무도 감당을 못하기 때문입니다.

한번 따라 해 보시라니깐?

 

과연 감당이 되는지?

아무도 감당 못하는 겁니다.

 

이것은 편파적인 예수님의 주장인 겁니다.

분명 구약에서는 모세는 분명 자신이 애굽인을 쳐 죽인 것을 이스라엘 사람이 고발함으로써 애굽왕이 살인자 모세를 찾는 것을 두려워서 광야로 도망쳤다고

남이 아닌 구약성경 말씀 본인이 그렇게 기록하고서는

신약에 와서는 모세는 애굽왕을 두려워 하지 않았다고 기록함으로써

반칙을 벌리고 있는데

이 반칙이 바로 믿음

곧 원인 없는 결과요 행함이 있는 믿음이다 라는 겁니다.

결국 믿음도 예수님이요 행함도 예수님 자체로써 편파적인 사건인데

그것을 인간의 꾀는 자기 쪽으로 끌어당겨서 자꾸 사기치는데 사용하고 있다는 겁니다.

왜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느냐?

알수 없는 복수심 때문에 돌삐를 드는 것이다 라는 겁니다.

되도 않는 남을 7번 용서 한 것으로 남을 정죄하는데 사용되는 것이다 라는 겁니다.

 

이것이 자기가 쳐 놓은 함정에 자기가 빠지는 꾀로써

 

제발 그런 자신의 꾀를 속시원하게 들추임을 당해 보자 라는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믿음은 곧 행함 되신 예수님은 십자가라는 다 이루심으로

우리의 죄악을 담당했다 라는 겁니다.

 

그러니 안 기쁘게 배기냐 말이죠.

 

~~~ 자신의 꾀를 뭐 고쳐보겠다고???

 

에라이 환자에게 수술도구를 맞기는 셈인 거죠.

 

우리는 이 짖 밖에 못하는 겁니다. 내 꾀에 내가 넘어가는 짖 밖에 못하는 겁니다.

 

그런 짖에 일반적인 다른나라 왕들과 별반 다를게 없고

사울왕과 일반 다를게 없는 다윗임에도 불구하고

 

다윗만큼은 그 짖을 들통당했다 라는 겁니다. 자기 꾀가 어떤 꾀인줄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죄를 용서 받았다 라는 겁니다.

 

아무도 들통당하지 않는 자기 꾀를 들통당한 것도 너무 너무 감사한 온전한 기쁨인데

거기에다 덮친격으로 그 죄악을 도말까지 당하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없이 취급당하는 그 행함이 있는 믿음이 과연

원인이 자신이라서가 아니라

바로 이 꺽으신 뼈 에 있었다 라는 겁니다. 그 꺽으신 뼈가 결과로써 그냥 왔다 라는 겁니다.

 

아무도 들통당하지 않는 것을 들통당했고

아무도 고침받지 않는 것을 고침받았다 라는 겁니다.

들통 당했다고 해서 고침받게 된다는 보장은 없는데 말입니다.

 

이런 이중 은혜, 갑절의 은혜가 덮쳤으니

 

자신의 꾀도 들통당하고

그렇게 악인으로 들통났음에도 불구하고 악인 됨을 고침받기 까지 했으니

 

인간의 꾀를 들통내는 자들은 많습니다.

인간들 끼리의 꾀가 한바퀴 돌고 돌다 보면 소 뒷걸음치다가 우연히 걸려들어서 그 꾀를 들통당하기도 하고 그 꾀를 지적질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렇게 들통남으로써 그 악인 됨을 고쳐 줄자는 과연 누가 있느냐 말이죠?

 

그러니 기적 중의 기적이 아닙니까?

 

악한 세대가 요구하는 기적이 남들과 차별화 되었다는 것인데

예수님의 보여줄 표적은 요나의 표적은

그런 차별성 조차도 죄 뿐이다 근본적인 죄로써 누가 나를 고쳐주랴 그 죄를 해결해 주랴 라는 겁니다. 그런데 십자가는 감사하게도 내가 고치마 라고 나타났다 라는 겁니다.

그러니 얼마나 거리끼고 불쾌한 십자가 입니까?

지적질은 할 줄 알아도 아무도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도 못해주면서 들통내냐 말이죠.

 

그래서 지난 시간에 말했던 것처럼 강도만난자는 많아도

또 강도는 많아도

정작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은 없다 라는 겁니다.

 

이 부재성이 바로 행함이 있는 믿음이다 라는 겁니다.

 

없는데 아무리 봐도 없는데

또 없음이 당연한데

철저한 단절성인데

 

원인 없는 결과로

 

그 어떤 연결 고리가 없이 결과가 나타났다 라는 겁니다.

 

동네 사람들 동네 사람들 나에게 이웃이 나타났어요 라고 말입니다.

 

이웃은 결국 원인 없는 결과입니다.

 

내가 그 어떤 짖을 해도 이웃을 만들어 낼수 없습니다.

그런 인간의 꾀는 안 통합니다.

 

오히려 그런 짖은 강도만을 만들어 낼 뿐입니다.

 

자기가 자기에게 강도짖을 하는 식일 뿐입니다.

 

한마디로 실상은 이 세상은 강도의 소굴입니다.

철저하게 갇혀버린 단절된 세상에서

 

예수님은 모든 것을 버리고 이 땅에 내려왔다는 이 자체만이

유일한 믿음입니다.

 

왜 그런 무모한 짖을 하셨을까?

바로 아무것도 아닌 것에 목숨을 거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이것만이 미쁘심이다는 겁니다. 시험의 정반대말은 미쁘심입니다.

나를 쳐다보면 시험 뿐인데

그저 인간의 꾀만 바글 바글 끓어넘치는 공장이 나일 뿐인데

 

그 어떤 연고 없이

예수님만을 쳐다보면 무조건 이유없이 미쁘심이다 라는 겁니다.

 

이 인간의 꾀의 공장인 나와 미쁘신 예수님과의 충돌이

행함이 있는 믿음이다 라는 겁니다.

인간 따라하라 라는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을 예로 들었고 기생라합을 예로 들었던 것은 따라하라가 아니라 오히려 정반대로 너희들은 때려죽어도 못따라한다는 단절을 보여주는 겁니다.

 

바로 이 부분에서 다들 사기를 치는 겁니다.

아쉬운 놈들이 사기를 치는 거죠. 교회 장사하는 놈들 말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런 사기를 칠 이유가 없잖아요.

야고보서 말씀 [행함이 있는 믿음]을 따라하고자 하는 놈들이 아쉬우니까

동일시 할려고 하니까 말입니다.

 

실제로 한국에서 일어난 사건인데

어떤 전도사가 자기 아들을 제물로 바쳤다고 하더군요

아브라함의 행함이 있는 믿음을 따라하기 할려다 보니 말입니다.

 

사실은 한국 교회 전체가 이렇습니다.

극단적으로 치닫는 그 사람보다 유순화 시켜서 상호인정 속에서

고만 고만하게 하자라는 식입니다.

 

그 전도사도 자기 꾀에 넘어간 것이고

한국교회 전체도 인간의 꾀만 넘쳐나고 있습니다.

요즘 나온 영화 쿼바x스 한국교회여 어디로 가느냐

그것은 교회가 아니다 라고 포스터에 나오더라 말이죠.

그런데 그렇게 말하는 자들도 자기 꾀에 여전히 넘어가고 있습니다.

애초부터 교회 였던 적이 없었습니다.

왜 그런데 그들을 시기해서 교회의 참된 모습을 보이라고 하는지 이해가 안됩니다.

교회 였던 적이 없는데 어떻게 교회의 모습을 보이라고 하는지

오히려 그런 꾀를 부리는 그 영화를 만든 사람들이 꾀를 부리는 겁니다.

부러웠던 걸까요? 나 같으면 그렇게 교회 운영하지 않겠다 라는 것일까요?

새삼스럽게 참 선지자 모습을 보이겠다는 것일까요?

왜 그런자들에게 말할까요?

 

저들이 문제가 아니라 그 영화를 만든자들이

이 단절성을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매 같은 부류인 겁니다.

 

저들이 활동해 줘야만 지옥이 꽉꽉 찰 것 아니겠습니까?

주님이 얼마나 충실하게 일하시고 있다는 증거인데

왜 그 일을 싫어할까요?

 

바로 이 단절성이 행함이 있는 믿음이다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관계성입니다. 얼마나 미쁘냐 말이죠.

그러니까 미래완료입니다. 미흡함이 없이 또렷하고 명료한 완성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꾀는 반대로 어떻게 해서든 연결 시켜 줄려고 동일시 시킬려고 환장한 겁니다.

이것이 종교죠.

제발 따라 하라고 그래서 따라잡기를 하라고

이것이 반작용인 원한이요 복수심인 겁니다.

 

독자적으로 자기자신을 따듬어라고 합니다.

어떻게 해서든 자신에게 손을 대서라도 자기를 개선시키라고 합니다.

이것이 사생아입니다. 시험드는 겁니다.

늘 모호하고 미흡하고 찝찝하게 여운만 남는 뭐하나 또렷하고 명료한 완료가 없는 겁니다.

그러니 돌삐를 남이 아닌 내가 쥐어야만 하는 겁니다.

 

예수님이 쥐면 안되고 내가 쥐어야만 하는 겁니다.

사실상 예수님도 쥔 적이 없는데 말입니다.

예수님은 돌삐를 쥐지도 않았습니다. 처음부터 말입니다.

나도 너를 정죄치 않는다 라고 하십니다.

인간만이 자신이 꾀에 넘어져서 자기자신에게 정죄하고 남에게 까지 정죄하는 겁니다.

돌삐를 막 던지는 겁니다. 지도 맞도 남도 맞고

자기도 천국 들어갈려고 하지 않고

남도 못들어가게 천국 가는 길 막고서는 삥을 뜯더라 말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하는 짖이다 라는 겁니다.

 

차라리 잃어버린 양을 바깥에서 찾자 라는 겁니다.

가만히 앉아서 또 앵벌이 될 밥풀떼기가 오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모든 영광을 다 버리고

아무것도 아닌 것에 목숨 걸었던 예수님이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렇기에 끊임없이 해체를 시켜야 하는 겁니다.

성령께서는 그렇게 일하시는 겁니다.

늘 어떤 연고가 없도록

원인 없는 결과로써 말입니다.

 

어떤 연결점이 없는데도 완료라는 결과가 선물(믿음)으로 주어졌다 라는 겁니다.

바로 이런 연고가 없음을 우연이라고 합니다.

 

필연보다 더 필연적인 우연인 겁니다.

그래서 창세전에 라고 합니다.

지금 현재 너로 출발한, 너가 개입한 사건인 주의 이름으로 물리치니 마귀가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기뻐하는 것이 아닌

 

우연인

어떤 연고도 없는

즉 너가 정작 빠져버린

창세전에 네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 하라 라고 하는 겁니다.

 

이 우연을(동일성의 개방이 아닌, 그 어떤 연결점이 없는 단절성)

 

사도로 돌아가자

성령으로 돌아가자 라는 외침과 같은 의미인 겁니다.

 

오늘 시편 9편은 바로 그런 내용을 말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꾀와 십자가의 대립

인간의 꾀는 인간의 꾀로써 십자가가 상대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모습인 겁니다.

그러나 인간의 꾀는 자신이 지금 십자가로부터 대조당하면서 나타나는 것인줄 모르고

마치 독자적인 모습으로써

여전히 말씀에 충실하고 구원에 충실한 모습을 보여주면 그 원인에 따른 원인 있는 결과로써 보상을 받을 것이다 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바로 꾀입니다.

 

그러니 단절성을 모르는 겁니다. 거룩 말입니다.

거룩이라는 끊임없는 분절, 갈라섬을 모르는 겁니다.

 

어제의 예수를 버리고 오늘 새롭게 예수님을 믿어야 할 판국인줄 모르는 겁니다.

 

어제 알았던 예수님에 대한 지식이 오늘도 연결 될 수 있다고 잇고 잇고자 하는 사고방식에 사로잡혀 있는 겁니다.

 

그런것에 대한 지적을 예수님의 12제자들은 맨날 맨날 지적 받습니다. 믿음이 없는 연고라고

 

늘 끊임없는 단절 속을 걷고 있는데

늘 원인 없는 결과인 뚝 뚝 끊어짐을 걷고 있는데

 

자꾸 내 행함 내 믿음 내 기도 내 열심 내 찬양 내 금식 내 봉사를 가미 시켜서 나 자신의 꾀를 펼칠려고 하니

 

도리어 성령의 단절성 앞에서 무익으로 취급받는다는 것입니다.

 

7번 남을 용서하는 것이 무시꺼리고 취급받아야만 했을까요?

내 기도 내 금식 내 회개 내 눈물이 근본적으로 나의 죄악을 도말할 수 없더라 라는 겁니다.

꺽으신 뼈를 살려 줄 줄 알았는데 택도 없더라

혹시 혹시라도 살려주실줄 알았는데 안 되더라

이 단절성 앞에서

 

오히려 770번이라는 주님 쪽에서 준비하신 사랑

화목제물이 있기에

그거 7번 용서 폐기처분하라 라는 겁니다. 더 나은 것이 있으니까 말입니다.

미흡하고 모호한 것 배설물로 여기고

또렷하고 명료한 770번의 용서가 있으니

이것만이 죄를 명확하게 도말하더라 말이죠.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않고 내어주신 사랑보다 더 명료한 것 있으면 나와보라그래?

 

그런데 왜 자꾸 7번 용서로 돌아가냐? 말이죠.

 

제사와 번제를 원치 않는다니깐요.

인애와 자비를 원하시는 겁니다.

 

7번 돌삐 던지는 것

7개의 돌맹이 던지는 것

그래가 아프겠냐 말이죠?

 

이왕 던지는 돌 770개의 이따만한 바윗돌을 던져야

제대로 죽을 것 아니냐 말이죠.

죽이는 것도 아니요 살리는 것도 아닌

이도 저도 아닌 것으로 그저 자기자신의 꾀인 나는 돌삐를 들었으니까 옳지 않냐 라는 것을

 

부끄럽게 만들어 버리는 땅에 쓱쓱쓱 쓰심이 돌삐를 다 내려놓게 하시더라 말이죠.

나도 돌삐 안 들을께 ~~~~

 

안 튀길께 ~~~~~ 여인아 너는 정죄하던 자가 어디있냐 봐라?

 

아무도 없더라 말이죠. 얼마나 명료합니까?

 

여기에 상대적으로 동참하지 않고 오히려 악착같이 거부하는 자들이 바로

인간의 꾀를 끝까지 부리는, 끝까지 사수하고 주장하는 원수를

 

대조적으로 배치시킴으로써 십자가의 용서가 오히려 더 갑절로 빛나게 하는 겁니다.

어두움이 더 더 더 어두울수록 빛은 더더더 빛나는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도 다 이런 꾀에 갇혀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늘 새롭게 인애와 자비를 쏟아지는 겁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모든 것을 걸고서 말입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주의 기도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라고

그 정도로 이런 상황이 끊임없이 닥치는 상황이다는 겁니다.

아니 이렇게 기도 하지 않고서는 못배기는

그런 환경속에 너는 갇혀있다 라는 겁니다.

 

왜 그런 환경 속에 집어넣으실까요?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가 그렇기 때문에 미쁘다 라는 겁니다.

 

안 그러면 나만 쳐다보고 나만의 꾀로 이 상황을 해쳐나아가야 하니까 얼마나 곤고하겠느냐 말입니다.

 

밑도 끝도 없는 모호함과 미흡함 미완료가 무한반복이 되는 겁니다.

 

그러나 십자가 사랑이 바로 그 마침이 되는 겁니다.

 

제사와 번제가 아닌

인애와 자비가 바로 그런 모호함의 마침이 되는 겁니다.

 

7번 용서하기(인간의 꾀, 필연)가 아닌 VS 770번 도리어 용서받아야 함(십자가, 하나 마나 한 의미 없는 어리석음)이 말입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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