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횡포 (시편 11편)

 

(12:20, 개역)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12:17, 개역)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12:18, 개역)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

(12:19, 개역)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12:20, 개역)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12:21, 개역)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11:1, 개역) [다윗의 시, 영장으로 한 노래] 내가 여호와께 피하였거늘 너희가 내 영혼더러 새 같이 네 산으로 도망하라 함은 어찜인고

(11:2, 개역) 악인이 활을 당기고 살을 시위에 먹임이여 마음이 바른 자를 어두운 데서 쏘려 하는도다

(11:3, 개역) 터가 무너지면 의인이 무엇을 할꼬

(11:4, 개역) 여호와께서 그 성전에 계시니 여호와의 보좌는 하늘에 있음이여 그 눈이 인생을 통촉하시고 그 안목이 저희를 감찰하시도다

(11:5, 개역) 여호와는 의인을 감찰하시고 악인과 강포함을 좋아하는 자를 마음에 미워하시도다

(11:6, 개역) 악인에게 그물을 내려 치시리니 불과 유황과 태우는 바람이 저희 잔의 소득이 되리로다

(11:7, 개역) 여호와는 의로우사 의로운 일을 좋아하시나니 정직한 자는 그 얼굴을 뵈오리로다

 

 

(11:1, 쉬운) <여호와를 신뢰함-다윗의 시. 지휘자를 따라 부른 노래> 내가 여호와께 피신합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너희들은 나에게 이런 소리를 하는가? “새처럼 산으로 도망쳐라.

(11:2, 쉬운) 보라, 악한 자들이 사냥꾼처럼 활을 당기고, 화살을 쏘려고 한다. 어두운 곳에서 정직한 사람들을 향해 활을 쏘고 있다.

(11:3, 쉬운) 터가 무너져 내리는데 의로운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겠는가?”

(11:4, 쉬운) 여호와께서 성전에 계시며, 여호와의 보좌는 하늘 높이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을 눈여겨 보십니다. 눈길을 떼시지 않고 사람들을 자세히 살피십니다.

(11:5, 쉬운) 여호와는 의로운 사람들은 사랑하시지만 악한 자들과 다른 사람을 해치려는 사람들은 미워하십니다.

(11:6, 쉬운) 여호와는 악한 자들 위에 숯불과 유황불을 비오듯 쏟아 부을 것입니다. 태워 버리는 불바람이 그들의 운명이 될 것입니다.

(11:7, 쉬운) 여호와는 의로우시며, 정의를 사랑하십니다. 정직한 사람들이 그분의 얼굴을 보게 될 것입니다.

 

(8:6, 개역) 너는 나를 인 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 같이 팔에 두라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고 투기는 음부 같이 잔혹하며 불 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

(8:6, 공동) 가슴에 달고 있는 인장처럼 팔에 매고 다니는 인장처럼 이 몸 달고 다녀다오. 사랑은 죽음처럼 강한 것, 시샘은 저승처럼 극성스러운 것, 어떤 불길이 그보다 거세리오?

(8:6, 쉬운) 나를 옥새같이 그대 마음에 두세요. 나를 도장같이 그대 팔에 새기세요. 사랑은 죽음같이 강하고, 그 질투는 무덤같이 끈질기니, 그 사랑은 불꽃처럼, 강력한 불길처럼 타오르네.

(8:6, 킹흠정) 나를 도장같이 네 마음에 새기고 도장같이 네 팔에 새기라. 사랑은 죽음같이 강하고 질투는 무덤같이 잔인하니 그것의 숯은 극히 맹렬한 불꽃을 지닌 불붙은 숯이니라.

(8:6, 한글킹) 네 마음에 인장처럼, 네 팔 위에 인장처럼 나를 새기라. 사랑은 죽음처럼 강하고 질투는 음부처럼 잔인하니, 그 곳의 숯은 불타는 숯, 곧 심히 맹렬한 불길을 가진 것이라.

(8:6, 현대인) 여자: 당신은 나를 인장 반지처럼 당신의 마음에 간직하고 도장처럼 당신의 팔에 새기세요. 사랑은 죽음처럼 강하며 질투는 무덤처럼 잔인하여 맹렬한 불처럼 타오릅니다.

(8:6, 현대어) 그대 가슴 끈에 인장반지를 달고 다니듯 그대 마음에 나를 꼭 품어 주세요. 그대 팔에 띠를 꼭 매고 다니듯 그대여, 내 사랑 나를 꼭 그렇게 안아 주세요. 그 누가 죽음을 이겨 낼 수 있을까? 아무도 죽음을 건너뛸 수 없지요. 죽음은 그 누구도 놓아 주지 않아. , 사랑도 사랑도 그러하지요. 그 누구가 이 사랑을 어찌할까요? 불같이, 맹렬한 불꽃같이 타오르는 시새움.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사랑은 죽음 보다 강하다

 

즉 죽음이라는 방식이 아니고서는 이 사랑을 어찌 표현할 방법이 없다는 겁니다.

결국 십자가란 죽음과 죽음의 만남입니다.

아니 죽으면 없어져 버리는데 어찌 없음과 없음의 만남이 어떻게 사랑이 되겠느냐 말이죠.

 

그런데 우리는 그 반대인 있음과 있음의 만남이 되어야 믿음직 스러운 사랑이지 않겠느냐 라는 것이 우리들의 생각인데 말입니다.

오히려 그것은 속임수이다는 겁니다.

악한 세대가 요구하는 기적이다는 겁니다. 남을 7번 용서하는 마음이다는 겁니다.

있음이라는 존재와 존재의 만남이 그야말로 우상 곧 허구이다는 겁니다.

 

그러나 상대적인 죽음과 죽음의 만남이 십자가이다는 겁니다.

 

존재를 배제시켜버린 죽음과 죽음의 만남이 십자가 곧 사랑이라면

사랑은 이 죽음을 가지고서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겁니다.

 

오늘 본문도 그런 역설성을 보여주는 겁니다.

사실상 성경 전체가 다 그러합니다.

 

어떤 역설성인고 하니

 

하나님이 누구신가 라는 것을 알려면

역설적으로 원수가 누구인가를 거쳐서만이 안다는 겁니다.

 

다른 말로 하면 오늘 본문의 저자 다윗이 누구인가를 알려면

다윗을 괴롭히는 자인 그 원수가 누구인가를 알아야 다윗을 알게 된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다윗이라는 개인에 머물지 않고

다윗이 지금 누구를 증거하는가? 곧 예수님을 증거한다는 겁니다.

그 예수님은 바로 오늘 본문 시편을 달달달 외우는 자들을 거쳐서 알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즉 마귀를 거쳐서 예수님을 알도록 되어 있지

마귀가 어떤 일을 하는지 모른다면 예수님도 모르는 겁니다.

 

그래서 시편은 그야말로 관건이 원수에 대한 시선인 겁니다.

 

제가 어머니께 이런 말을 건방지게 했습니다.

어머니 제발 예수 믿지 마세요

인간의 믿음은 어차피 다 엉터리입니다 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덧붙여서 성경말씀 읽지 마세요

성경은 우리 보라고 준게 아니라

마귀 보라고 준겁니다.

마귀들만이 이 성경말씀을 지킬려고 환장해 있습니다 라고 말입니다.

 

처음에는 당황하시더니

하도 제가 자주 강조 하다보니

또 다시 설명을 들으시고자 하시더라 말이죠.

 

제발 예수 믿지 마세요 라는 말에 상대적인 말이 또 있다는 겁니다.

인간의 믿음은 가짜이니까 예수님의 믿음만이 옳다라는 겁니다.

그 예수님의 믿음이 오면 믿기 싫어도 저절로 믿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주의 이름이 뭔지도 모르고 부른적도 없고 알지도 못해도 말입니다.

즉 그 어떤 연결 고리 하나 없이도 말이죠.

 

바로 이것을 말하고자 함인 겁니다. 그 어떤 연결점이 없는 오히려 철저한 단절성으로써 믿음이 선물로 주어지게 되면

예수 믿기를 행할 필요가 없이

이미 예수님의 믿음이 주님 쪽에서 작살을 꼿아서 자신의 믿음을 펼치신다는 겁니다.

 

이것을 저는 갑의 횡포 라고 했습니다.

 

마침 어머니께 지난 주의 시편 10편의 말씀을 나누면서

유대인이 뭔가에 대해서 설명하다가

 

아주 아주 기가막힌 소재를 하나 찾았는데

바로 무한도전 12편이 지난 주에 끝까지 간다 라는 주제로 나왔습니다.

어머니께 그거 보셨냐고 물었더니 봤다고 하시더군요

하도 하도 웃겨서 배 아프게 웃었다고 말입니다.

 

저는 그 다음날 다운 받아서 봤는데

 

우와 이게 바로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단적으로 말해주는 가장 쉬운 방법이였습니다.

맑스는 자본론을 말하면서 유대인에 대해서 잠깐 언급하다가 말았는데

정작 자본이라는 이 잉여의 수수쎄끼를 알려면 유대인을 알아야 한다는 거죠.

유대인은 유대인 본인들도 모르는 겁니다.

민족 개념도 아니니까 말입니다.

심지어 반유대주의자가 지금의 유대인, 현 이스라엘인이다는 겁니다.

특히 시오니즘은 그야말로 반유대주의이다는 거지요.

 

무한도전의 끝까지 간다 편에서 지금 한국 사회의 갑의 횡포를 말하는데 있어서

불공정한계약

그럼에도 불구하고 욕망에 의해서 어쩔수 없이 유혹 곧 시험에 넘어갈 수밖에 없는 현실

그리고서는 빈털터리가 되는

스토리가 맑스의 자본론이다는 거죠.

 

그리고 어머니께서는 요셉의 고리대업과 똑같다고 하시더라 말입니다.

 

그것을 보고 아 이것이 갑의 횡포 곧 하나님의 횡포, 사랑의 횡포이다는 겁니다.

 

그 횡포를 제가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나아만 장군에게 똥물에 몸을 7번 담구어라 라고 했습니다.

아니 문둥병이라는 피부병을 낫게 할려면 깨끗한 물에 씻어서 몸을 담구어도 될까 말까인데

아니 똥물에 담구어라니? 지금 그 말이 맞냐 말이죠.

그래서 제가 연기를 하면서 어머니에게 이런 제스쳐를 보여드렸습니다.

입에 툭 튀어나와 말이 안되는 불가능성이요 단절이다고 투덜 투덜 궁시렁 궁시렁 거리면서

몸 안 담그면 되는데 또 담그긴 담궈요

그런 투덜이와 그 투덜됨과 다르게 모순적인 똥물에 몸을 담그더라 말이죠.

어머니께서 웃으시던데

바로 그겁니다 얼마나 웃끼는 장면이냐 말이죠.

바로 이런 웃음이 바로 전복을 보여주는 겁니다.

먹는 전복 말고 판을 뒤짚어 엎듯이 사고의 전환이 일어난다는 겁니다.

 

똥물에 몸을 담그니까 어떻습니까?

손가락으로 코를 막고 절대로 셀틈이 없이 틀어막아서 외칩니다.

악취가 납니다.

 

뭐라꼬요? 안듣낍니다!!!

썩은내가 진동을 합니다. 고함을 칩니다.

 

자 다시 몸을 담급니다. 두 번째입니다.

 

에이쉬 내가 미쳤지 이런 다고 낫기는커녕 도리어 죽음을 재촉할게 뻔할 거야

 

자 몸을 담그니까 어떻습니까?

 

죽겠습니다.

 

어허 목소리 봐라

 

죽겠습니다. ~~~~~~

 

네 맞습니다. 죽으라고 몸을 담그라 한 겁니다.

 

자 다시 몸을 담급니다.

 

우엑 우엑 구토가 일어나면서, 정신이 혼미해 집니다.

 

자 여러분 가스실에 들어온 기분이 어떻습니까?

 

속이 매스껍습니다.

눈물 콧물 기침 가래 완전 뒤범벅이 되었습니다.

 

꼭 진짜 사나이(진짜 죄인) 여군특집 보는 느낌입니다.

 

자 이렇게 6번까지 담구어도 문둥병은 나을 기미가 일체 보이지 않습니다.

그 어떤 연결점이 없다고 분명히 말했습니다.

6번까지 참아본들 소용이 없다는 겁니다.

 

마지막 7번 담구어서 몸을 일으켰는데

갑자기 물밀 듯이 몰려오는 뜨거운 것이 가슴을 짓누르고 있는 겁니다.

 

과연 내가 도대체 무슨 짖을 한 것일까?

겨우 이 따위 문둥병 하나 낫고자

이렇게 구차하게 목숨을 구걸했어야만 했단 말인가?

 

제가 지금 목숨을 구하는 것이 구차한 짓이다 라는 말을 하기 위함이 아니라

그 뒤에 오는 그런 연유로 인해

오히려 전혀 무관한 자의 고귀한 죽음을 접해 버렸기에 하는 소리이다는 겁니다.

 

즉 왜 6번은 안되고 7번을 똥물에 담구어야 하는가?

나의 죽음을 통해서 내 뒤에 오시는 전혀 다른 죽음과의 만남 때문이다는 겁니다.

 

7번 담그기 전 까지는 아무리 문둥병이 심해도 아직 죽은 것도 아닌 겁니다.

죽음 근처도 못 간 겁니다.

진짜 죽음까지 가는 것은

나는 나을 자격 조차도 없다는 생각이 들때까지

죽었다 복창 하는 겁니다.

 

우리 인간은 아담의 속성 그대로

문둥병이 걸려서도 아닌 아주 건강하다 손 치더라도

백만번 죽어 마땅한 저주 받은자이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원수이다는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둥병으로 인해 똥물에 까지 담그면서

죽음을 새삼스럽게 만나야 하는 겁니다.

자기의 죽음을 통해서

그 동안에 주어진 삶이 선악의 법칙이 아닌

은혜요 긍휼이요 용서였는데

그것을 모조리 다 잊어버리고

선악이라는 존재의 당위성만을 따졌다는 것에서

똥물에 담그어 죽어마땅한 자임을 알아라 라는 겁니다.

 

그것도 이유없이 마땅히 죽어야 마땅한 자 라는 것을 말이죠.

즉 단절입니다.

 

단절인데 문둥병인데 그 단절에 더 단절 곧 똥물 7번 속으로, 단절의 단절로 들어가라 라는 겁니다.

 

그 동안 멀찍이 밀쳐 놓았던 나의 죽음도 만나야 하고

거기에 죽음의 죽음인 예수님의 죽음까지도 만나야 하니

첩첩산중인 겁니다.

 

그런 죽음으로써 죽음을 만나는 겁니다.

물론 나의 죽음은 죽음도 아닌 죽음 근처도 못가는 죽음이니 가짜인 겁니다.

그런 가짜 죽음인 나의 죽음을 거쳐서

진짜 죽음인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으로 나아가는 단절의 단절, 죽음의 죽음으로 가는 겁니다.

 

말이 안되죠

죽었는데 또 죽어야 하나? 이중죽음!!

 

지난 시간에 말한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한다는 것이 바로 이런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어떻게 하냐고 누가 저에게 물었는데

그래서 잘 됐다 싶어서 어머니랑 이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다 라고 했습니다.

그래놓고 만나논쟁을 하십니다.

만나를 먹고도 죽었다 라고 하십니다.

즉 키 포인트가 만나가 아니라 죽었다 라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뒤 이은 말씀은 안죽는다 라는 겁니다.

 

아 그럼 안죽으니까 잘됐네 그래 영생케 하는 양식이 뭔데요?

 

나를 뜯어 먹어라 라는 겁니다.

 

?

 

안 죽는다메?

우리 조상은 다 죽었다메?

그럼 안 죽는 것을 줘야지?

죽음을 오히려 가장 독대하고 직시하는 당신의 죽음을 맛보라고?

당신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라고?

우리가 식인종이냐?

 

만나라는 기적을 보듯이

예수님의 기적을 보고 따라왔던 그 수많은 자들이

이 말 한마디에 완전 초토화 되어버리는 겁니다.

 

어디 그 뿐이겠습니까? 예수님은 더 당당하고 뻔뻔스럽게

예수님 자신의 제자까지 건드리시는 겁니다.

 

어 너희들 아직 안가고 뭐하니

너희들고 가지왜?

왜 남았니?

 

얼마나 당당합니까?

 

그애말로 실족케 하는 말씀이다는 겁니다.

말씀의 횡포이다는 겁니다.

 

등떠멀이서 어떻게 해서든 떨어뜨릴려고 하는 말씀 뿐이지

날 구원해 줄려는 말씀은 어디에도 없다 라는 겁니다.

 

그래서 지난 시간에 시험을 만나면은 온전히 기쁘게 여겨라

제발 시험 들면 시험 들자 말이죠.

떨어지자 말이죠.

안떨어질려고 하면 할수록 더더욱 불안하다 말이죠.

 

나아만 떨여졌습니다.

 

복음은 이렇게 수많은 이방인 문둥병자 중에 단 한 사람 문둥병자 나아만에게만 가는 겁니다.

수 많은 이방인 과부 중에 단 한 사람 과부에게만 가는 것이 복음입니다.

 

복음이 하는 일을 봐야지

복음을 믿는 인간이 하는 일을 볼 필요가 전혀 없는 겁니다.

그런 것은 남을 7번 용서하고자 하는 마귀 짖만 골라서 하는 성화론자나 불교인이나

정의사회구현 사제단에 가면 거기 달인들 세따까리입니다. 흔하고 흔하다 라는 겁니다.

 

복음을 믿는 인간은 저런 단 한 명의 문둥병자. 단 한명의 과부를 찾지 않습니다.

오히려 99마리 양을 찾지요.

흔하디 흔한 문둥병자 흔하디 흔한 과부를 찾지 않습니다.

그런 자들을 다 내버려두고 단 한 명의 문둥병자 이다는 겁니다.

 

즉 진짜 제대로 불치병자 도저히 가망 없는 죽은자를 찾는다는 겁니다.

조금이라도 나을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는 자를 찾아 나서는 99마리 문둥병자가 아닌

도저히 가망 없는 단 한 마리 문둥병자 라는 겁니다. 마리로 표현해서 기분나쁜가요?

마리로 표현해서 기분 나쁘면 죽은 자가 아니다는 거죠.

 

복음이 뭣땜시 자기 손해 보는 장사를 하겠습니까?

복된 소식이 될려면 자신의 기능

즉 복에 딱 맞는 기능에 이 기능을 과시할수 있는 대상 소문자 a를 찾아야 한다는 겁니다.

 

우리는 절대로 그렇지 않지요 부자를 찾으면 또 모를까? ㅋㅋㅋㅋ

그러니 그냥 부자 찾으세요

그냥 시험에 들어버리세요

인간의 믿음은 어차피 연기요 척 척 척 믿는 척만 하는 속임수 사기 일 뿐이다는 겁니다.

 

그래서 베드로를 물 위에서 만나는게 아니라

물에 빠뜨려 죽여서 만나는 겁니다.

죽음 속에서 보니 또 다른 죽음이 보이는 겁니다.

주여 도대체 누구십니까?

 

날 지금 물에 빠뜨려 죽이시는 예수 당신 누구요?

얼마나 낫설겠습니까?

베드로가 그렇게 자신의 친화술로 만나왔던 예수님이 아니였던 겁니다.

전혀 낯설기 짝이 없는 전혀 다른 예수님이다는 겁니다.

 

얼마나 낯설었으면 말이 헛 나왔겠습니까?

당신 누구요?

헛 나왔죠.

 

그런데 헛나온게 아니라

비로소 진짜 제대로 나왔다는 겁니다.

어 베드로양반 당신 예수님을 제대로 만났군요 라고 말입니다.

 

자신의 친교술 친화력으로 맺은 예수는 가짜였고

오히려 그런 것들이 전혀 먹혀들지 않는 예수님이다는 겁니다.

안먹혀드는 것이 진짜 예수님입니다.

 

그렇다면 진짜 예수님은 나를 늑대와 이리 무리 속에 집어넣는 겁니다.

넣었다가 빼내줄려고?

천만의 말씀

 

죽으라고

 

아니 더 정확하게 니가 늑대요 이리 이다는 겁니다.

 

이 방식이 바로 십자가 곧 머리에 숯불을 얻은 것 같이 부끄 부끄 부끄럽게 만드신다는 겁니다.

 

내가 눅대요 내가 이리인데 그 무리 속에서

무리의 본분, 늑대의 본분, 이리의 본분을 잃어버리고서

예수님을 안 믿고는 못배기는 믿음이 덮쳤을때에

과연 어떤 운명이냐 라는 겁니다.

 

이것을 제가 지난 시간에 행함이 있는 믿음의 두 번째 예가 바로 기생 라합의 거짓말이다는 겁니다.

 

거짓말 까짓꺼 그거 못하냐? 라고 첫 번째 예인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을 바치는 것에 비하면 쉽다 라고 여기기 쉽다 라고 했잖아요

이삭 바치는 것만 설명했는데

 

이 거짓말은 더더더 불가능 합니다.

둘다 역시나 불가능 합니다.

행함이 있는 믿음이란 오직 에수님만이 하시는 믿음입니다.

인간은 흉내 조차도 내지 마시라 라고 제가 말했습니다.

 

그 거짓말은 그냥 거짓말이 아닌

40년 동안 간담이 녹아서

이스라엘 조차도 안 믿는 여호와를

40년 동안 기다리고 기다리면서

1초만의 한마디 말 거짓말로

민족과 민족의 신과 가족과 친지와 모든 자신의 연결고리인 육체의 네트워크를 배반하는 거짓말이다 라는 겁니다.

매국노죠

 

그러니 거짓말은 자신의 나라와 민족을 적군에게 거짓말로 팔아넘기는 거짓말이다는 겁니다.

 

이 거짓말로 한 방에 훅 가버린 나라와 민족이 되는 겁니다.

 

우리는 백날 거짓말 해보세요 민족과 국가가 한 방에 훅 날라가는 거짓말이 되는가?

 

그래서 행함이 있는 믿음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것은 자신의 죽음을 기본적으로 깔고

심지어 타인인 예수님의 죽음까지도 끌어들이지 못한다면 가짜인 겁니다.

 

자신의 죽음을 까는 자는 몇몇 똘아들이 생겨날 수 있습니다. 즉 가능성입니다.

자살시도자나, 테러 집단, 자살 순교 등등등

 

그러나 그런 자신의 죽음에 예수님의 죽음까지 끝어들이지 못한다면 그거 도리어 예수님을 속이는 짖이지요.

 

다른 사람들은 다 몰라도 절대로 나는 주님 안 버리겠습니다.

죽어도 예수님과 같이 죽겠습니다.

주님의 죽으심에 같이 따라 죽겠습니다.

 

닭이 세 번 우는 겁니다.

 

어딜 구라를 칠려고

 

주님 안 속는다는 겁니다.

 

그런 되도 않는 가짜 죽음에 날 끌어당기지 말라 라는 겁니다.

 

자신의 희생에 예수님의 죽음까지 끌어들이는 대사기술이 오늘날 개혁주의요 성화론아니겠습니까?

 

우리는 베드로를 통해서 같은 사기꾼이다는 것을 봤으니 다시는 그런 짖 말아야지

계속 하자 라고 구라를 치는 자들에게서 벗어나자 말이죠.

 

그런 것 예수님에게 안 통합니다.

그런 죽음과 거짓말은 한 방에 한 민족과 한 국가를 몰살 시킬수가 없다 라는 겁니다.

즉 원수를 멸할 수가 없다 라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 그럼 어떻게 원수를 멸합니까?

 

기생 라합을 통해서 이미 말했습니다.

어떻게 원수를 멸하는지?

 

그냥 님 자신이 예수님의 원수임을 시인하고 용서받으시면 되는 겁니다.

이것이 행함이 있는 믿음입니다.

 

어 그러고 보니 행함이 없는 [행함이 있는 믿음]이 되는 거죠.

바로 그겁니다.

 

그럼 이 원수를 거쳐서 하나님의 얼굴을 대하는데

(원수 문제를 다 해결함으로써 하나님의 얼굴을 대하듯이)

 

(고전 13:12, 개역)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고전 13:12, 공동) 우리가 지금은 거울에 비추어보듯이 희미하게 보지만 그 때에 가서는 얼굴을 맞대고 볼 것입니다. 지금은 내가 불완전하게 알 뿐이지만 그 때에 가서는 하느님께서 나를 아시듯이 나도 완전하게 알게 될 것입니다.

(고전 13:12, 쉬운) 지금은 우리가 거울을 통해 보는 것같이 희미하게 보지만,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보듯이 보게 될 것입니다. 지금은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지만 그 때에는 하나님께서 나를 아신 것처럼 완전하게 알게 될 것입니다.

(고전 13:12, 킹흠정) 우리가 지금은 거울을 통하여 희미하게 보나 그때에는 얼굴을 마주 대하여 보며 내가 지금은 부분적으로 아나 그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시는 것 같이 나도 알리라.

(고전 13:12, 한글킹) 지금은 우리가 유리를 통해 희미하게 보나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때에는 내가 알려진 것처럼 알게 되리라.

(고전 13:12, 현대인) 우리가 지금은 거울을 보는 것같이 희미하게 보지만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볼 것이며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알지만 그 때에는 하나님이 나를 아신 것처럼 내가 완전하게 알게 될 것입니다.

(고전 13:12, 현대어) 우리 비록 지금은 희미한 거울속 들여다보듯 희미한 모습만을 비춰 보지만 그날이 오면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분명히 볼 것입니다. 나 비록 지금은 알고 있는 것 모두 다 몽롱하고 흐리나 그날이 오면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을 꿰뚫어 보시듯 모든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고전 13:12, 가톨릭) 우리가 지금은 거울에 비친 모습처럼 어렴풋이 보지만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볼 것입니다. 내가 지금은 부분적으로 알지만 그때에는 하느님께서 나를 온전히 아시듯 나도 온전히 알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대함이 원수의 멸함을 통해서인데

어떻게 원수를 멸하실까요?

 

다른 말로 하면 어떻게 복음이 이 땅에서 어떻게 넉넉히 다 이루어지는지를 보고 누리고 하냐 말이죠.

 

그것이 오늘 본문에 나와 있는 겁니다.

 

그런데 말은 이렇게 해 놓고서는 정작 그것은 코빼기도 안보이고

오히려 정반대인 원수의 우세승만 보이고

원수를 이기기는커녕 원수들이 기세등등한 모습만이 나열되어 있는 겁니다.

 

(11:1, 현대어) [주님 곁에서 근심 없이; 다윗의 노래. 지휘자의 지휘에 맞추어 부르는 노래] 여호와 피난처 삼아 주께 이 몸 피하였더니 너희가 어찌 내게 `새처럼 산으로나 도망쳐라' 하느냐? 너희가 이르기를

(11:2, 현대어) `봐라, 흉악한 것들이 화살을 시위에 먹여 바르게 살려는 이들에게 어두운 데서 마구 쏘아 대려 하지 않느냐?

(11:3, 현대어) 땅바닥이 무너져 내리는 판국에 바르게 산다는 것이 다 무슨 소용이더냐?' 하는구나.

 

(11:1, 현대인) (다윗의 시. 성가대 지휘자를 따라 부른 노래) 너희는 여호와를 의지하는 나에게 어떻게 이런 말을 할 수 있느냐? `너는 새처럼 산으로 도망하라.

(11:2, 현대인) 악인들이 활을 당겨 으슥한 곳에서 선한 사람들을 쏘려고 한다.

(11:3, 현대인) 법과 질서가 무너지면 선한 사람인들 별 수 있나?'

 

 

원수들이 다윗에게 이렇게 비꼽니다.

 

`너는 새처럼 산으로 도망하라. 악인들이 활을 당겨 으슥한 곳에서 선한 사람들을 쏘려고 한다. 법과 질서가 무너지면 선한 사람인들 별 수 있나?'

 

`새처럼 산으로나 도망쳐라' `봐라, 흉악한 것들이 화살을 시위에 먹여 바르게 살려는 이들에게 어두운 데서 마구 쏘아 대려 하지 않느냐? 땅바닥이 무너져 내리는 판국에 바르게 산다는 것이 다 무슨 소용이더냐?‘

 

 

지난 시간에 제목을 주님께서는 보셨습니다 라고 했습니다.

즉 악인들이 하는 말에 상대적인 반대를 위한 반대의 표현인 겁니다.

 

악인들이 비꼬아대는 겁니다.

 

주님께서는 너를 더 이상 돌아봐 주지 않을 거야

너는 버림 받은자야

고아와 같아.

그런 고아를 누가 돌봐주겠니?

아무도 돌봐주지 않는 아비 없는 고아를 누가 돌봐주겠어?

여호와는 너를 절대로 거두어 주시지 않아

절대로 보호해 주지 않을 거야? 거봐 거봐 너를 우리가 이렇게 괴롭히고 있어도

하나님은 묵묵부답이잖아?

 

그런데 이 악인들이 사실상 이스라엘 전체입니다.

이 다윗 하나를 이렇게 괴롭히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놀라운 점은 다윗은 그럼 예외가 될까요? 하는 문제입니다.

다윗은 지금 피해자 위치에 있기는 하지만

정작 다윗은 피해자가 아니라 가해자인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저들이 다윗이 했던 짓을 비꼬면서 자신들은 이런 짖이 정당하다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 다윗은 더더욱 마음이 아플 수밖에 없는데

그렇다고 피할수도 없는 겁니다.

 

그럼 다윗은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냐 말이죠.

해결 못했죠

해결 하면 안되니까 말입니다.

해결도 못했는데

해결이 되어버린 채로 온전한 기쁨 곧 죄사함이라는 용서가 일방적으로 쳐들어와서 해방이 되어버리는 겁니다.

 

지금 이스라엘이 다들 다윗이 했던 짓을 핑계로 삼아서 다들 공격하는데

무슨 수로 이 갇혀버린 이 상황에서 벗어나겠습니까

 

바로 이것이 해결이 되어버린 겁니다.

 

아니 해결이 안된다고 해 놓고서는 또 말을 바로 이것이 해결이 되어버린 것이다 라고 말해버리면

해결 됐다는 말인지 안됐다는 말인지?

막살아라는 말인지? 막살지 말라는 말인지?

예수 믿으라는 말인지? 예수 믿지 말라는 말인지? ㅋㅋㅋㅋ

 

복음 스스로가 복을 증거하는데 있어서

수 많은 이방인 문둥병자들 중에 딱 한 사람 나아만 장군을 찾아냈고

수 많은 이방인 과부들 중에 딱 한 사람 사렙다 과부, 한 사람에게만 나타났다 라는 겁니다.

복음은 그들에게만 나타난 겁니다.

 

(4:17, 개역)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한 데를 찾으시니 곧

(4:18, 개역)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4:19, 개역)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4:20, 개역) 책을 덮어 그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시니 회당에 있는 자들이 다 주목하여 보더라

(4:21, 개역) 이에 예수께서 저희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하시니

(4:22, 개역) 저희가 다 그를 증거하고 그 입으로 나오는 바 은혜로운 말을 기이히 여겨 가로되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4:23, 개역)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반드시 의원아 너를 고치라 하는 속담을 인증하여 내게 말하기를 우리의 들은 바 가버나움에서 행한 일을 네 고향 여기서도 행하라 하리라

(4:24, 개역) 또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가 고향에서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

(4:25, 개역)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세 해 여섯 달을 닫히어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되

(4:26, 개역) 엘리야가 그 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

(4:27, 개역) 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문둥이가 있었으되 그 중에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뿐이니라

(4:28, 개역) 회당에 있는 자들이 이것을 듣고 다 분이 가득하여

(4:29, 개역) 일어나 동네 밖으로 쫓아내어 그 동네가 건설된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쳐 내리치고자 하되

(4:30, 개역) 예수께서 저희 가운데로 지나서 가시니라

 

 

어렵게 생각 하지 말자구요 그냥 쉽게 생각하면

복음 곧 은혜의 해, 기쁜 소식은

오직 죽은자에게만 나타났다 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복음은 죽은자만을 살리는 영생의 말씀을 증거하기 때문이거든요

 

즉 이 말은 딴 사람들은 안잃어버렸기에 99마리 양에게는 목자가 필요가 없는 겁니다.

죄인 곧 죽은 자에게만 구원자 곧 의사가 필요하고요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필요가 없는 겁니다.

의인에게는 선지자가 필요가 없는 겁니다.

 

그래서 환영을 못 받는 겁니다. 고향에서 말입니다.

자기백성에게서 말입니다.

 

다윗은 남들이 아닌 자기 백성으로부터 죽은자 취급을 당해야만 하는 겁니다.

 

남들이 아닌 이스라엘로부터 말입니다.

 

 

자 이렇게 함으로써 인간 쪽에서의 외로움으로 구원이 되는 방식은 다 차단당하는 뫼비우스 띠를 형성케 되는 겁니다.

 

다윗 본인이 자신의 눈물 기도 회개 금식으로 아이를 살려낼수가 없듯이 말입니다.

그런 희생으로는 하나님을 더 이상 속일수가 없는 겁니다.

 

그럼 해결책은 뭐냐? 해결책이 없는 것이 해결책입니다.

바로 주님 쪽에서 다가오는 단절성인 예수님 자신의 죽음입니다.

 

이 죽음을 보기 위해서 우리는 원수들의 사고방식을 거쳐야 합니다.

다윗도 그런 원수성에서 예외가 될 수 없듯이

그 원수성을 거쳐서 예수님의 죽음과 만나는 겁니다.

 

그럼 다윗 또한 의인이 아닌 죄인이요

건강한 자가 아닌 환자요

산 자가 아닌 죽은자와 방불한 자 이다는 겁니다.

그러나 죽은 자 같으나 산 자이다는 겁니다. 살려주시는 영 때문에 말입니다.

 

(고후 6:9, 개역)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는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고후 6:10, 개역)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고후 3:6, 개역) 저가 또 우리로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케 하셨으니 의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임이니라

 

(고후 6:9, 공동) 이름 없는 자 같으나 유명하고 죽은 것 같으나 이렇게 살아 있습니다. 또 아무리 심한 벌을 받아도 죽지 않으며

(고후 6:9, 쉬운) 무명인 취급을 받았으나 사실은 유명한 사람들이며, 죽은 자로 여겨지기도 했으나 보시는 바와 같이 우리는 살아 있으며, 매를 많이 맞았지만 죽지 않았습니다.

(고후 6:9, 킹흠정)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하며 죽는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며

(고후 6:9, 한글킹) 이름 없는 자 같으나 유명하고,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으며, 매를 맞았으나 죽지 아니하였고,

(고후 6:9, 현대인) 알려지지 않은 것 같지만 모든 사람에게 알려졌습니다. 우리가 다 죽어가는 사람 같지만 이렇게 살아 있으며 매를 많이 맞았으나 죽지 않았습니다.

(고후 6:9, 현대어) 이 세상은 우리를 무시하더라도 하나님께는 인정을 받고 있습니다. 죽을 고비를 수없이 넘겼으나 우리는 이렇게 살아있습니다. 부상은 당했지만 죽음은 면하였습니다.

 

(11:1, 개역)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11:2, 개역)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11:3, 개역)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11:4, 개역)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

(11:5, 개역)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웠으니 하나님이 저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니라 저는 옮기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11:6, 개역)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11:7, 개역)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예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좇는 의의 후사가 되었느니라

(11:8, 개역)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

(11:9, 개역) 믿음으로 저가 외방에 있는 것 같이 약속하신 땅에 우거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과 야곱으로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11:10, 개역) 이는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니라

(11:11, 개역)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 늙어 단산하였으나 잉태하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앎이라

(11:12, 개역) 이러므로 죽은 자와 방불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에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이 생육하였느니라

(11:13, 개역)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11:14, 개역)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

(11:15, 개역) 저희가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11:16, 개역)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11:17, 개역)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저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독생자를 드렸느니라

(11:18, 개역) 저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11:19, 개역)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11:20, 개역) 믿음으로 이삭은 장차 오는 일에 대하여 야곱과 에서에게 축복하였으며

(11:21, 개역) 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고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으며

(11:22, 개역) 믿음으로 요셉은 임종시에 이스라엘 자손들의 떠날 것을 말하고 또 자기 해골을 위하여 명하였으며

(11:23, 개역) 믿음으로 모세가 났을 때에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석 달 동안 숨겨 임금의 명령을 무서워 아니하였으며

(11:24, 개역)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11:25, 개역)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11:26, 개역)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11:27, 개역) 믿음으로 애굽을 떠나 임금의 노함을 무서워 아니하고 곧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 같이 하여 참았으며

(11:28, 개역) 믿음으로 유월절과 피 뿌리는 예를 정하였으니 이는 장자를 멸하는 자로 저희를 건드리지 않게 하려 한 것이며

(11:29, 개역) 믿음으로 저희가 홍해를 육지 같이 건넜으나 애굽 사람들은 이것을 시험하다가 빠져 죽었으며

(11:30, 개역) 믿음으로 칠 일 동안 여리고를 두루 다니매 성이 무너졌으며

(11:31, 개역)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치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치 아니하였도다

(11:32, 개역) 내가 무슨 말을 더 하리요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와 다윗과 사무엘과 및 선지자들의 일을 말하려면 내게 시간이 부족하리로다

(11:33, 개역) 저희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11:34, 개역)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며 전쟁에 용맹되어 이방 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하며

(11:35, 개역)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를 부활로 받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하였으며

(11:36, 개역) 또 어떤 이들은 희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11:37, 개역)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11:38, 개역)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 저희가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11:39, 개역) 이 사람들이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니

(11:40, 개역)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위의 말씀에서 믿음과 죽음이라는 단어를 주목에서 살펴보십시오

야고보서의 행함이 있는 믿음의 예인 아브라함의 이삭 제물 바침과 기생라합의 거짓말을 확대해서 연속선상에서 보면 이들이 다 이런 믿음의 실상에서 벌어진 사건임을 보게 되는 겁니다.)

 

 

그럼 살아날 길은 오직 믿음이라는 인물의 오심 뿐이다는 겁니다.

원인 없는 결과 뿐이다는 겁니다.

원인은 그냥 죽어 있을 뿐입니다.

원인이 있어 버리면 즉 살아 있으면 살리시는 자의 기능이 무의미해져 버리는 겁니다.

 

그러니 다윗에게는 그 어떤 원인이 있지 않고 도리어 없습니다. 부재입니다.

부재인 단절임에도 불구하고 원인 없는 결과로써 합격이라는 모든 문제의 해결

곧 원수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얼굴과 얼굴을 대한다는 겁니다.

 

이 원수 문제를 해결함에 있어서 주님은 사랑이라는 횡포를 발휘하시는 겁니다.

즉 사랑이 없는 자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인간은 죄를 시기하거나 질투 할수 조차 없는 이미 죄 아래 잠식된 갇혀버린 상태인 겁니다.

죄를 시기하고

원수를 질투하는 것은 오직 사랑 뿐입니다.

 

이 사랑이 펼치는 횡포가 바로 죄인 만들기입니다.

원수 만들기입니다.

 

아니 원수를 멸하는 방법이

원수 만들기 이다니요?

 

이것이 위에 로마서를 언급한 이유입니다.

 

원수를 악으로 갚는게 아니라 선으로 갚는 겁니다.

원수 갚는 것을 주님은 우리에게 허락한 적이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올무에 도리어 말려드는 겁니다.

올무에 말려들어도 올무에 말려든 것 자체를 모를 정도인 겁니다.

 

율법을 주니까 넌 올무에 말려들었어 라는 소리를 듣는게 아니라

율법 지키는데 환장해 버리는 겁니다.

저는 저 세리와 같지 않음을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라는 식이지요.

 

또 선으로 갚는다고 하니 기껏 생각해 낸 선이 율법 지킨 행동들을 선으로 여기는 겁니다.

이방인은 도덕으로 생각하고 말입니다.

남을 7번 용서하는 것은 선이 아니라 악입니다.

 

선은 인간에게 애초부터 없었습니다.

선은 오로지 원수 같은 우리를 용서하신 770번 용서하심만이 선입니다.

 

이 선하심이 인간이 생각하는 육의 선함과 어떻게 대립이 되는지를 복음서의 비유들은 한결같이 충돌시킵니다.

 

포도원 품군 비유에서 시간 간격으로 놀고 있는 자를 선한 밭주인은 긍휼을 베푸는데 있어서

반드시 악한자의 선을 가장한 모습은 충돌하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이 이유는 죽음을 깔지 않고 베푸는 선은 선이 아니다는 겁니다.

이 충돌은 결국 십자가의 죽음에서 그 결실을 내는 겁니다.

 

탕자 비유도 동일합니다.

아버지의 선하심에 맏아들의 선은 아버지의 긍휼을 거부합니다.

 

성전 안의 두 사람 곧 바리새인과 세리도 그러합니다.

 

성경 전체가 그러합니다.

십자가 라는 죽음 앞에서 과연 인간의 선함과 이 어리석은 걸림돌 십자가와 충돌 시켜 보자 라는 겁니다.

 

과연 죄를, 원수성을 죽음보다 더 강하게 시기하고 질투 하냐 말이죠?

오히려 인간들의 선함은 그것을 배양시키고 있습니다.

본인들은 숙주인줄 모르니까 말이죠.

 

그래서 죽기를 무서워 종노릇 한다고 표현하신 겁니다.

호스트 주최하다 즉 선을 행한다는 것이 도리어 악을 주최하는 종주국 주최국 이다는 겁니다.

 

선을 행함은 마음에 있으나 정작 몸은 악을 행하는 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구나

누가 나를 이 사망의 몸에서 건져내랴

 

율법의 달인, 행함의 달인인 당사자가 이렇게 이야기 하고 있는 겁니다.

 

(7:14, 공동) 우리가 아는 대로 율법 자체는 영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나는 육정을 따라 사는 사람으로서 죄의 종으로 팔린 몸입니다.

(7:15, 공동) 나는 내가 하는 일을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내가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일은 하지 않고 도리어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7:16, 공동) 그런데 그런 일을 하면서도 그것을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곧 율법이 좋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7:17, 공동) 그렇다면 그런 일을 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내 속에 도사리고 있는 죄입니다.

(7:18, 공동) 내 속에 곧 내 육체 속에는 선한 것이 하나도 들어 있지 않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습니다. 마음으로는 선을 행하려고 하면서도 나에게는 그것을 실천할 힘이 없습니다.

(7:19, 공동) 나는 내가 해야 하겠다고 생각하는 선은 행하지 않고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는 악을 행하고 있습니다.

(7:20, 공동) 그런 일을 하면서도 그것을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고 있으니 결국 그런 일을 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내 속에 들어 있는 죄입니다.

(7:21, 공동) 여기에서 나는 한 법칙을 발견했습니다. 곧 내가 선을 행하려 할 때에는 언제나 바로 곁에 악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7:22, 공동) 나는 내 마음속으로는 하느님의 율법을 반기지만

(7:23, 공동) 내 몸 속에는 내 이성의 법과 대결하여 싸우고 있는 다른 법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 법은 나를 사로잡아 내 몸 속에 있는 죄의 법의 종이 되게 합니다.

(7:24, 공동)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육체에서 나를 구해 줄 것입니까?

(7:25, 공동) 고맙게도 하느님께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구해 주십니다. 나는 과연 이성으로는 하느님의 법을 따르지만 육체로는 죄의 법을 따르는 인간입니다.

 

 

그러니 선을 행하는 것을 보다 주의 선하심을 바라보자 라는 겁니다.

죽은 자는 선을 행하는 자가 아니라 오직 바라볼 것은 주의 선하심만 오시길 바랄 뿐이다는 겁니다.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보냄을 받지 않았다.

 

(15:24,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신대

 

네 맞습니다. 저는 개 맞습니다. 신분 자체가 이방인이기에 절대로 이스라엘 아닙니다.

그러나 그 개도 주인의 밥상에서 떨어진 콩 꼬물 부스러기를 먹지 않습니까?

 

정작 이스라엘에게는 이런 자가 없다는 겁니다.

선을 행하는 자에게서는 이런 말을 하는 자가 없습니다.

당연하지요 이방인이 아니니까 말입니다.

 

성경은 하나 마나 한 소리를 하고 있는 겁니다.

 

저 이방인은 이방인 이니까 저런 말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저 사람이 만약에 이스라엘사람 이라면 저런 말을 할 리가 없잖습니까?

 

그런데 주님은 이런 내용을 언급하심으로써 인간의 근원적인 선에 대한 시선을 다 허물어 버리는 겁니다.

허물어 보니 추풍낙엽처럼 허물어졌다는 것은 반석이 아니였다는 증거요

선함이 아니였다는 증거인 겁니다.

 

그러니 인간 쪽에서 나오는 선함이란 다 속임수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냥 솔직하게 내 쪽에서는 없으니 뻔뻔스럽게 빌이붙어서 주여 저 개맞습니다.

주여 제가 똥물입니다.

썩은내가 나는 내 자체가 똥물입니다.

제가 원수입니다 라고 외쳐야 할 것입니다.

 

오늘 시편 11편은 다윗이 제가 원수입니다.

그러니 저에게서 선함이 나올수 없기에

전적으로 주님의 선하심만 바라볼 뿐입니다 라고 죽은자 취급 받는 겁니다.

 

바로 그것을 비아냥 거리는

저 세리 다윗과 같지 않음을 감사합니다.

십의 이조를 드리고

이레에 두 번 금식하고

저 세리 다윗처럼 밧세바를 취하는 토색치 않음을 감사합니다.

 

저 탕자 다윗처럼 방탕하게 살지 않고 오로지 아버지 말씀을 단 한번도 어긴적이 없이 살게 해 주심을 감사합니다 라고 말하는 원수를 들추어내는 겁니다.

 

주님의 얼굴은 바로 이 문제를

이 원수성을 드러내시고 해결함으로써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 탕자 다윗에게 사랑의 일방적인 편파합격이라는 횡포를 펼치시는 겁니다.

 

다윗은 그저 뭘 해도 죄 밖에 나오지 않은 죄인으로써 죽은자와 방불한 자로만 취급받을 뿐입니다.

 

그래서 오로지 긍휼만을 바라볼 뿐인 주여 저 개 맞습니다, 그 개도 주의 긍휼을 먹고 살지 않습니까 라고 할 뿐이고

 

원수는 그런 다윗을 비아냥 거리면서

어 안도망쳤네? 너의 하나님이 어디있니?

하나님은 너를 감찰하시지 않을거야

너는 하나님의 저주인 나무 십자가에 죽임을 당할꺼니까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자이기에

하나님은 너를 보호하지 않을 거야

 

바로 이런 원수의 표현이 바로 다윗이 구원받은 증거가 되는 겁니다.

 

원수의 말 마따나 하나님으로부터 저주 받은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구원 받은 것이

십자가 라는 스캔달 역설 부조리 역전이다는 겁니다.

 

원인 없는 결과 즉 결과가 미리 준비하고 기다렸다 라는 겁니다.

결과가 미래에서 현재로 소급해서 덮쳐진 결과이기에

무시험 합격이다는 겁니다.

무시험 자체가 불합격인데

시험 치지도 않았는데 합격이다는 겁니다.

이런 반칙인 뫼비우스 띠가 어디있습니까?

반칙입니다 반칙

 

이것이 마지막때에 원수들이 외치는 겁니다.

 

선으로 악을 갚는 십자가의 용서란

우리 머리 위에 숯불을 얻은 것처럼

 

아이고 아이고 우리는 그것도 모르고 예수님을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자라고 십자가에 못 박으라 라고 했구나


(사 53:1, 개역)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

(사 53:2, 개역)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사 53:3, 개역)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사 53:4, 개역)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사 53:5, 개역)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사 53:6, 개역)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내가 원수였고 내가 가해자 였구나 라고

 

나를 죽은자로 만드심을 통해서 우리는 비로소 눈을 들어서 구원을 보게 되는 겁니다.

내 때문에 대신 십자가를 지신 구원자를 눈을 들어 보는 겁니다.

 

부끄 부끄 부끄


즉 부끄럽지 않고 감사하게끔 하도록 하신 주님의 섬기심의 결과가 우리에게 덮쳐서,

 

무조건 용서하시겠다는, 다시는 죄를 보시지 않겠다는 사랑의 횡포, 십자가의 횡포, 스캔달의 횡포로써 말입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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