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건한 자를 끊어버리는 혀 (시편 12)

 

벙어리 만이 외치는 십자가

귀머거리 만이 듣는 십자가

앉은뱅이 만이 춤추는 십자가

소경 만이 보는 십자가

 


(
3:1, 개역)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 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을 알고 선생이 되지 말라

(3:2, 개역)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에 굴레 씌우리라

(3:3, 개역) 우리가 말을 순종케 하려고 그 입에 재갈 먹여 온 몸을 어거하며

(3:4, 개역) 또 배를 보라 그렇게 크고 광풍에 밀려가는 것들을 지극히 작은 키로 사공의 뜻대로 운전하나니

(3:5, 개역) 이와 같이 혀도 작은 지체로되 큰 것을 자랑하도다 보라 어떻게 작은 불이 어떻게 많은 나무를 태우는가

(3:6, 개역)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생의 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

(3:7, 개역) 여러 종류의 짐승과 새며 벌레와 해물은 다 길들므로 사람에게 길들었거니와

(3:8, 개역)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

(3:9, 개역) 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

(3:10, 개역) 한 입으로 찬송과 저주가 나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3:11, 개역) 샘이 한 구멍으로 어찌 단 물과 쓴 물을 내겠느뇨

(3:12, 개역) 내 형제들아 어찌 무화과나무가 감람 열매를, 포도나무가 무화과를 맺겠느뇨 이와 같이 짠 물이 단 물을 내지 못하느니라

(3:13, 개역) 너희 중에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가 누구뇨 그는 선행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보일지니라

(3:14, 개역) 그러나 너희 마음 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라 진리를 거스려 거짓하지 말라

(3:15, 개역)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세상적이요 정욕적이요 마귀적이니

(3:16, 개역)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요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니라

(3:17, 개역)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벽과 거짓이 없나니

(3:18, 개역) 화평케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

 

(12:1, 개역) [다윗의 시, 영장으로 스미닛에 맞춘 노래] 여호와여 도우소서 경건한 자가 끊어지며 충실한 자가 인생 중에 없어지도소이다

(12:2, 개역) 저희가 이웃에게 각기 거짓말을 말함이여 아첨하는 입술과 두 마음으로 말하는도다

(12:3, 개역) 여호와께서 모든 아첨하는 입술과 자랑하는 혀를 끊으시리니

(12:4, 개역) 저희가 말하기를 우리의 혀로 이길지라 우리 입술은 우리 것이니 우리를 주관할 자 누구리요 함이로다

(12:5, 개역) 여호와의 말씀에 가련한 자의 눌림과 궁핍한 자의 탄식을 인하여 내가 이제 일어나 저를 그 원하는 안전 지대에 두리라 하시도다

(12:6, 개역) 여호와의 말씀은 순결함이여 흙 도가니에 일곱 번 단련한 은 같도다

(12:7, 개역) 여호와여 저희를 지키사 이 세대로부터 영영토록 보존하시리이다

(12:8, 개역) 비루함이 인생 중에 높아지는 때에 악인이 처처에 횡행하는도다

 

 

지난 시간에 로마서를 언급하면서 악을 선으로 갚는 숯불을 머리에 얹는 십자가의 횡포에 대해서 언급했듯이

 

오늘은 야고보서를 언급하면서 혀가 어떻게 경건한 자를 끊어버리는지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시편은 처음 부분에는 부정합니다. 그러나 나중 마지막 부분은 긍정합니다.

처음에는 비극이요 그 다음은 희극입니다.

처음은 오독이요 나중은 정독인데

 

왜 그런고 하니 원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입장에서

이 원수가 하는 짖을 드러내는 겁니다.

 

여호와께서는 애굽의 왕 바로왕을 강퍅케 했습니다.

그 강퍅케 하심으로써 여호와께서는 애굽군사와 애굽왕을 통해서 영광을 받으시는데

 

그들이 왜 이런 악의 역할을 할 수 밖에 없는가?

그 악의 충실함을 거쳐서만이 여호와의 구원을 나타내시는 겁니다.

이 악이 동원이 되지 않으면 여호와의 구원을 설명할 방법이 없습니다. 즉 차이입니다.

즉 지식으로 백날 구원을 공부해본들 소용이 없다 라는 겁니다.

지식이 전혀 없어도 구원의 조건이 전혀 없어도 구원이 되는 것은

바로 이 차이 곧 간극 때문이다는 겁니다.

 

왜 바리새인 보다 낫지 아니하면 천국에 못 들어간다고 했을까요?

예수님 자신이 마귀와 그리고 마귀에게 사로잡힌 인간의 신학과 철학과의 차이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차이, 이 간극의 실감보다. 즉 현실이지요

이 현실을 무시하고 진짜로 바리새인 보다 나은 의를 갖출려고 하다 보니

왜 예수님께서 저런 불가능한 말씀을 하신 그 취지를 모르는 겁니다.

 

오늘 또 역시나 불가능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불가능이란 못 지킨다는 겁니다. 지키면 지킬수록 어길 수밖에 없는 단절성을 말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갇혀 버렸다 라는 겁니다.

개방을 주장하는 자들은 이 갇혀버렸다를 처세술로 이용합니다.


그러니 성경말씀도 고릅니다
. 개방이 되는 부분도 있고 안되는 부분도 있고

쉬운 부분은 제발 인간들아 움직이자 라고 개방으로 외치고

도저히 못지키는 불가능한 기적부분들 초자연적인 것들은 주님이 하시길 기다리자 라는 식으로

성경을 철저하게 처세술로 보고자 한다는 점입니다. 성화론이 그런 겁니다. 개혁주의도 그렇고요.

 

다시 강조 합니다. 아무리 쉽게 행동으로 옮길수 있어 보이는 말씀일지라도

불가능한 단절성입니다.


즉 또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과 비교 하라는 뜻입니다
.
결국 개방을 외친다는 것은 인간과 인간끼리의 도토리 키재기의 비교인 셈입니다.

인간이 자기에게 가능성을 기대하고 본다는 것은 인간과 인간의 비교에 빠져 버린 시험드는 겁니다.
자기와 더 잘난 상상한 자아와의 비교도 마찬가지 입니다.

그거 깨뜨리는, 들추어내시는, 십자가가 그 정과 욕심을 못박는 그 단절성을 누리자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이 혀가 어떤 일을 하느냐에 대한 내용인 겁니다.

 

성경이 얼마나 소극적이냐 하면

즉 비적극적이냐 하면

다른 말로 적극적인 것보다 더 더 더 더 나은 초과잉적극적이냐 하면

 

제발 제발 선생이 될려고 하지 마세요 라고 합니다.

 

남을 가르치는 선생이 가르침을 받는 학생보다 더 큰 심판을 받는다는 전제가 깔려 있기 때문에 선생이 되지 말라고 합니다.


즉 심판성이요 단절성이다는 겁니다.
 

좀 이상하지 않나요?

 

주님의 주 되심과 십자가의 사랑을 나누고 알려주고 가르치는데 있어서

누구 보다 적극적으로 가르치라 나를 부끄러워 하면 나도 너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 라고 할 때는 언제고

 

이제는 그런 말을 함부로 하지 말아라 라고 합니다.

 

아니 왜?

 

실수가 많은 것이 우리의 모습이다는 겁니다.

물론 맞는 말이지요.

 

그런데 앞에서는 왜 그럼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라 라고 말씀하시냐 말이죠.

 

앞에는 이렇게 말해놓고 뒤에는 또 저래 말하면

성경 자체가 모순이 되잖아요

 

아니 성경은 모순 그 자체이다 라고 아예 선언을 하는 셈이다 라는 겁니다.

 

그러니 야고보서 3장은 전도하지 말라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의 논리성도 사실상 문제가 있는 겁니다.

전도하지 말라가 그런 말 뜻으로 이해가 되어야 하는데

정작 그렇게 말씀자체가 역시나 나에게 전하고 있다 라는 겁니다.

전하지 말라고 전하고 있다는 겁니다.

 

왜 이런 모순성이 생길까요?

 

문제는 이겁니다.

 

제가 요즘 어머니에게 제발 예수님 믿지 마세요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마침 설날 명절로 멀리 떨어진 식구들이 모인 자리에서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이 뭐냐고 형님이 물으셔서

제가 이런 표현을 섰습니다.

 

어떤 목사 가정에 첫째와 둘째 두 아들이 있는데

둘째 막내가 장애인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수 많은 사람들로부터 이 목사부부는

 

아이고 목사님 자식이라는 무거운 십자가를 지시고 있군요.

저도 못난자식 속썩이는 자식을 나의 십자가로 지고 살고 있습니다 라는 표현으로써

 

자기 십자가를 진다 라는 말씀을 이해하고 있다 라는 말을 하더라 말입니다.

 

물론 자기 십자가를 진다 라는 것은 그런 의미가 아니다 라고 그 목사는 말하더라 말입니다.

 

그런데 더 웃기는 것은 그렇게 말하고서는 오히려 역으로 성화론으로

자기도 지지 않는 무거운 짐을

자기도 못 지키는 법을 남에게 연자맷돌을 달 듯이 매달더라 말이죠.

 

저는 도통 이해가 안되더라 말이죠.

그 논리를 가장 쉽게 자신의 둘째 아들에게 한번 적용시켜 보라는 겁니다.

당연히 안하잖아요

그런데 왜 남들에게 하느냐 말이죠.

 

건강한자와 그렇지 않은자의 차이 때문에?? 달라서?

 

오늘 언급한 구절인 야고보서 3장으로 치면

선생이 될려고 하면 안되잖아요

목사가 되면 안되잖아요

 

구더기 무서워서 장 못 담그냐? 라는 의미를 야고보서에 들이댈수가 없는 입장이다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형님에게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부모가 자식을 키우는게 아니라

자식이 부모를 부모 답게 만든다고 말입니다.

 

결국 자식이 부모를 지고 간다는 겁니다.

 

자식이 아니였다면 어른은 어른이 될 수가 없는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른은 자식에게 바르게 가르쳐야 합니다.

독을 줄수가 없습니다. 누가 독을 달라고 자식이 외친다고 독을 주는 부모가 있겠냐 말이죠.

 

부모는 자식에게 부모 자신이 가르친 행동에 모순점을 들통 당해도

자식에게 알려줘야 합니다.

 

자식이 아무리 엄마는 거짓말을 잘 하면서 왜 나에게는 거짓말 하지 말라고 해 라고 따져도

몽둥이를 들어서라고 바르게 가르쳐야 할 것은 바르게 가르쳐야 한다는 겁니다.

 

이것은 부모가 자식이라는 십자가를 지는 것이 아니라

자식이 부모라는 십자가를 져야하기 때문인 겁니다.

 

사실 자식이 부모라는 십자가를 지지 않습니다.

인식 자체를 자식은 안하기 때문입니다.

부모가 늘 그런식으로 해석을 하기 때문에

그런 해석에 무조건적으로 반대하기 위해서 언급하는 겁니다.

 

그럼 형님의 질문에 어떻게 답했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쫏지 않는자는 나와 상관이 없다.

 

(10:38, 개역)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16:24, 개역)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8:34, 개역)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14:27, 개역)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예수님께서 나를 끝까지 책임 지겠다는 뜻이다 라고 했습니다.

그럼 이 반대의 해석은 뭐냐?

기여이 자기 십자가를 만들어서 기여이 십자가 지는 것을 지키고 행하고 실천하는 것을 갖추겠다는 것이

이 말씀에 반대되는 취지이다는 겁니다.

 

그 예로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는데 있어서

이 이삭을 바치는 것은 

아브라함의 사고방식이나,

아브라함의 믿음에서 나온 적이 없는 겁니다.

 

오로지 여호와께서 시켰는데

놀라운 점은 아브라함이 기뻐하거나 즐거워 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그렇다고 거부했느냐? 거부해도 소용이 없다 라는 것을 안 겁니다.

끝까지 따라와서 하지 않고서는 못배기도록 하실테니까 말입니다.

 

그럼 왜 이런 하나 마나 한 짓을 왜 하느냐?

제가 놀라운 점이라고 놀랍다 라고 표현했는데

아브라함이 안 기뻤어요

안 즐거웠다는 겁니다.

 

그런데 왜 놀랍게 제가 표현했느냐

그건 당연한데

당연히 안 기쁘고 안 즐겁지 누가 즐거워 하느냐 말이죠?

누가 제게 그렇게 말한다 라면

저는 이렇게 말하고파서 그런 겁니다.

 

그런데 왜 당신네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안기쁘지 당연히

당연히 안즐겁지 라고 말해 놓고도

 

반드시 기뻐해야 하며

반드시 즐거워 해야 한다고 가르친다는 겁니다.


가르치는 본인들도 안 기뻐하는 모습을 팍팍내면서 말이죠.
그러면 다행이게 막 짜증을 내요 짜증을 궁시렁 궁시렁 거리면서 말이죠.
 

사기꾼들이지요

 

자기가 직접 안 당하니까

먼 산 불구경하듯이 보니까

그 혀가 지옥과 같은 음부처럼 말하는 겁니다.

 

실로암 망대가 무너졌다. 7명 깔려 죽었다.

저 사람은 하나님께 저주 받아서 그렇지요? 예수님!!!

예수님 왈 그 다음은 너 차례인데 우짜지?

 

이렇게 되는 겁니다.

 

결국 성경말씀이 철저히 모순성을 일부러 들추어내면서 다가옴은

나 자신 역시 철저한 모순성을 들추임 당하면서 이 말씀이 말씀 스스로 이룬다는 겁니다.
즉 말씀이 운동력이 있어 스스로 말씀을 말씀 스스로가 지킴에 있어서
상대적으로 나는 오히려 모순점을 발각당하는 식이다는 겁니다.
정작 말씀이 모순성인데 말이죠.
내가 그 모순성에 빨려들어서 나 자신 또한 모순성이 들통나면서 말씀이 이루어진다는 겁니다.

아브라함이 말씀을 너무도 기쁜 마음으로 믿어서 이삭을 바친게 아니라 말이죠.

 

그런데 말씀은 아브라함이 믿었다 라고 뒤짚어 씌워서

그것도 모잘라서
초과잉적으로 믿음의 조상이라고 해 버린 겁니다
.

 

정작 따지고 보면 이삭이 아브라함을 짊어진 것인데 말이죠.


또 이것을 이용해서 이삭은 아무 불평없이 무조건적으로 순종했다고 자기자식들에게 이삭이 되라고 강조하는 식이다는 말이죠.
성경은 다시 말하지만 단 하나도 인간이 지킬수 있는 내용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냥 다 지켜버린 채로 무시험 합격 시킨 겁니다. 알고보니 예수님 혼자 다 이루신 바이다 라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순성을 감추는게 아니라 오히려 더 까발리는 겁니다.

? 그 정도로 당당하다는 겁니다. 뭐가 부끄럽냐 말이죠.

바로 이것이 바로 관계입니다. 관계성

 

그런데 인간들이 믿음이 뭔지에 대해서 말하는 의미를 보면

관계 개념을 빼버린 로봇 개념으로써 믿음인 겁니다.

 

또 옆길로 세는 거지만

왜 사람들이 로봇에 대한 공포심을 가지고 있냐 하면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창조자인 인간이, 피조물인 로봇을 자기가 만들어 놓고서는

언젠가는 쿠테타를 일으킬 것이다 라는 생각 때문에 공포를 느낀다는 겁니다.

 

즉 로봇은 거짓말을 하지 않거든요

명령어를 입력한 대로만 움직이거든요.

 

인류멸망보고서 doomsday book 2012 라는 영화를 보면 로봇이 인간보다 더 해탈해 버렸어요

그래서 로봇이 인간이여 뭐가 두렵습니까? 라고 말을 해 버리니

졸지에 그 로봇을 시기하더라 말이죠.

웃기잖아요?

여러분 주변에 있는 사물, 즉 예를들어서 제가 지금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는데

그 속의 전지를 예로 들을려고 하다가 키보드가 오히려 더 낫다 싶어서


키보드를 사용하는데 있어서 이 키보드가 그만 득도
, 곧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러서 그만 득도를 해 버렸네?
그렇게 되니 이 키보드를 그만 시기하고 질투하고 미워서 잠을 못 자

얼마나 경계를 하고 경계를 하는지?

얼마나 웃기냐 말이죠?


로봇을 시기해 버려

키보드를 미워해

물컵을 증오해

빨래집게를 극도로 경계해
 

ㅋㅋㅋㅋㅋ

 

생각만 해도 웃기잖아요

 

그런데 이런 실재계를 주님이 진짜로 해버린다면 어떻게 하실거냐 말이죠?

 

닭을 시기하고 미워하고 경계할 정도로 말입니다.

꼬끼오 ~~~ 꼬끼오 ~~~~ 꼬끼오 ~~~~~

 


오늘 언급한 야고보서의 구절

아무리 파도가 쳐도
실 수 없는 뱃사공은 아주 작은 노를 저어서 그 길을 갈수 있다고 하잖아요
.

 

(3:4, 개역) 또 배를 보라 그렇게 크고 광풍에 밀려가는 것들을 지극히 작은 키로 사공의 뜻대로 운전하나니

(3:5, 개역) 이와 같이 혀도 작은 지체로되 큰 것을 자랑하도다 보라 어떻게 작은 불이 어떻게 많은 나무를 태우는가

 

거짓말 하지 않지! 명령어를 입력 시킨 대로만 행동하지!

그런데 뭐가 무섭냐 말이죠?

 

그런데 바로 그것이 더 무섭다는 겁니다.

거짓말을 안하는데

입력하는대로만 움직이는데

 

뱃사공의 작은 키가 올바르게 길을 갈수 있도록 하듯이

역설적으로 혀도 아주 작은 불로 억수로 많은 나무를 한꺼번에 홀라당 다 태울수 있다고 합니다.

 

바로 기능을 말하는 겁니다. 아주 작지만 무시하면 안된다. 큰일 난다 라고 말이죠.

 

나비효과도 그렇잖아요

지구 반대편에서 나비가 팔랑 팔랑 거리는 날개짓으로 인해

정작 그 지구 반대편에서는 태풍이 분다고

바다도 예외가 없지요

바다속의 화산 폭발로 인한 작은 돌맹이가 떨어지면서 움지기는 파장들이

다른 곳에서는 쓰나미로 작용한다고

 

아주 작은데

이 누구든지 무시할한만 작은 것이 엄청난 기능을 가지고 있다 라는 겁니다.


닭이 대신 베드로를 향해 울듯이 말입니다.

역을 말하고 다시 그 역의 역을 말하고 또 다시 역의 역의 역을 말하는 셈입니다
.

 

어머니께는 더 쉽게 증거했습니다.

자기 십자가를 진다 라고 하니까

아 부모인 내가 자식이라는 십자가를 지는구나 라는 생각을

형님 질문 덕분에 잘못 생각했는데

그런데 또 그렇게 말하니까

자식이 자기를 지고 간다고 생각하니까

자식을 보는 눈빛을 달리 보더라 말이죠.

너무 사랑스럽게 말이죠.


제가 제 조카를 형님의 질문에 답하는데 이용하니까

그것을 다시 어머니는 본인의 자식으로 바꾸어서 그 말씀을 이해하는데

그게 아닙니다 어머니

다른 말로 할께요

 

나는 절대로 예수님을 안 버리겠습니다.

십자가요저도 까짓꺼 함께 지겠습니다.

주님 지시는 십자가 저도 같이 따라서 지고

저도 십자가 져서 같이 죽겠습니다. 라고 외쳤는데

어라

꼬끼오 꼬끼오 꼬끼오

 

베드로의 라는 십자가를

하나님의 저주 덩어리를

 

그 어떤 연결고리가 없이

아무런 가치도 못 느꼈던 닭이 세 번 베드로를 향해 외쳐 우는 겁니다.

 

닭이 베드로를 지고 가는 겁니다.

 

그럼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것이 뭘까요?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죄 용서 받은 것을

다윗은 아브라함을 통해서

다시 사도바울은 그렇게 고백하는 다윗을 통해서 아는 겁니다.

 

즉 지시지 마세요 라는 뜻입니다.

 

제가 지금 성경말씀을 정면으로 대적하는 발언을 문자적으로 했지요?

제발 십자가 지지 마세요


제가 분명히 말했습니다. 제발 자기 십자가 지지 마세요 라고

이단도 이런 이단이 없지요.
 

문제는 십자가도 아닌 것들을 십자가인냥 설정해 놓고서 그것을 지겠다고 하는 겁니다.

 

작년이였던가? 그것이 알고 싶다인지? 세상에 이런 일이였는지 잘 모르겠는데

자기 십자가를 지겠다고 큰 나무로 십자가를 제작해서 전국을 돌아다니는 사람이 있던데

그게 무슨 자기 십자가 입니까?

불교죠

불교가 삼보 일배인가?

그거랑 십자가 지겠다는 거랑 뭐가 다릅니까?

이게 더 심한게 천주교에서 고난의 계단인가? 뭐 그런거 있잖아요?
신부들이 사제시험인지 뭔지 과거에 그런거 많았잖아요

다 장난 치고들 있잖아요

그럼 우리는 장난 안 칩니까?
뭘 해도 다 장난이요 죄 입니다.

아주 구라를 쳐도 참나

그것이 바로 예수님을 위한다며 희생한다는 짓들이, 예수님을 속이겠다는 것과 같다는 겁니다.

 

아예 하지 마세요

정신병자들입니다.

 

뭐 교회봉사가 십자가 지는 것이다고요?

그것은 목사가 구라치고 그 세뇌된 자들만이 하는 말 아닙니까?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말은 나는 절대로 십자가 질 수 없는 그런 죄인 입니다 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참 쉽죠잉

그러니 아예 십자가를 질 생각 조차도 하 덜덜 마세요.

그것이 십자가 지는 겁니다.

 

제가 이렇게 말하니까 농담인줄 압니다.

참 쉽죠잉 그거 까짓거 바보도 다 하겠다 라고 하시겠죠

그런데 이게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한번 해 보세요

참 쉬운지?

이렇게 무가치하게 보이는 식으로만 증거되는 것이 십자가 입니다.
과연 7번 똥물에 담글수 있는지?
최고의 가장 심각한 피부병 문둥병자로써 과연 가능한지?

교회에 가면 왜 그리도 십자가를 지겠다는 자들이 왜 그렇게 많은지?

다 마귀들인데?

 

구원은 딴게 아니라

바로 그런 마귀들의 손에서 건짐받는 겁니다.

즉 불가능합니다.
구원은 불가능 그 자체 입니다.

 

그런 교회로부터 탈출 한다는 것이 가능할 것 같죠?

불가능합니다.

 

바로 그런 불가능성이 덮치면

그 사람은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자인 겁니다.

 

즉 자기십자가를 지겠다고 하는 자들로부터 탈출을 당하는 것이 바로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라는 겁니다.

 

성경말씀은 일방적으로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데 뒤짚어 씌우는 겁니다.

아브라함은 믿은적 조차도 없는데 뒤짚어 씌워서 믿음의 조상이라고 편파판정을 한 겁니다.

모세는 분명 파라오왕이 무서워 도망쳤는데 성경말씀은 그렇게 기록해 놓고서는

다시 뒤짚어 엎어서 애굽왕을 무서워 하지 않았다고 믿음으로 행동했다고 합니다.

 

그러니 정작 그들은 아무것도 한 게 없다는 겁니다.

무능하다는 겁니다.

그들 본인들이 그저 키보드였고

로봇이였고

또 제가 무엇을 언급했지요?

아 닭으로

주님이 일방적으로 그렇게 취급해 버린 겁니다.

 

제가 이런 말을 종종합니다.

어머니 이 말씀은요 우리 보라고 주는게 아니라

마귀 보라고 준 말씀입니다.

 

마귀는 이 말씀을 기가 막히게 잘 지키거든요

지킬줄도 모르는 우리에게 이 말씀을 준 적이 없어요

 

그래서 인간이 읽는 말씀은 다 마귀가 지키는 말씀과 같은 식입니다.

 

그런데 약속의 말씀이 나를 읽는 방식이 바로

닭이 베드로를 위해 우는 겁니다.

 

내가 남을 7번 용서하는 마귀의 방식이 아닌

770번의 용서가 나를 가지고 노는 방식이 말씀이 나에게 쳐들어 오는 방식이다는 겁니다.

내가 말씀을 지키는 방식이 아니라

 

그 어떤 연결 고리 자체가 없어요

그냥 그 상태

연결 고리가 없는

잇고 잇는 끊어진 다리를 연결하듯이 섬과 섬을 연결하는 다리가 아예 없는


그냥 그 간극 자체

그 빈터 자체가

문자의 말씀이 아닌

살아 움직이는 역동적인 말씀이다는 겁니다. 고로 상대적인 대상물인 인간은 죽은 상태인 겁니다.

 

살아서 자신이 말씀을 보겠다 라는 말씀은 사실상 없는 겁니다.

나의 눈으로 보고 읽는 대상물로써의 말씀은 없는 겁니다.

거꾸로 말씀이 나를 읽는 겁니다.
그것도 그냥 나가 아니라 나를 죽여서
죽은 나를 말입니다.

 

내가 현미경으로 벌레는 들따 보는게 아니라

정반대로 벌레가 나를 현미경으로 보는 겁니다.


내가 닭을 타넘어서 십자가를 지는게 아니라
닭이 나를 엎고서 십자가를 타넘어 나에게로 오는 겁니다.
 

지지난 시간부터 나오는
주께서는 보셨나이다 라는 표현은

즉 감찰이라는 의미는 바로 그런 의미이다는 겁니다.

 

주님께서는 보셨나이다 라는 시선은

곧 나의 시선은 이제 강탈당했다 라는 겁니다.

나는 그 어떤 것도 해석할 재간을 모두 잃어버렸다는 겁니다.
그러니 닭이 새로운 해석에 의해서 거꾸로 나를 해석할려고 나에게로 오는 겁니다.
 

그래서 저들이
넌 소경이야

너를 봐주는 자는 없어
너는 고아일 뿐이야
라고 저들의 시선에 반대되는 시선으로써 표현한 겁니다
.

 

오늘은 눈이 아니라 혀입니다.

 

혀! 말하는 기관입니다.

 

그런데 이 혀가 독자적으로 논다는 겁니다.

그 어떤 것으로도 이 혀를 다스릴자가 없다고 합니다.

독립적인 존재로써 활동하는 것이 혀라고 합니다.

 

이 혀가 얼마나 무서우면 뱃사공의 노가 파도를 가르고 바르게 인도하듯이

그런 순기능에 반대되는 역기능을 역시나 한다는 겁니다.

작은 불로 모든 나무를 태우듯

혀가 모조리 한 순간에 다 죽이는 독의 기능을 한다는 겁니다.


과장이 무지 심하지 않습니까?
여러분 아무리 혀를 놀려 보세요 사람이 죽나?
아무리 낼름 낼름 거려도 사람이 안 죽습니다.

그런데 이 혀가 기호, 문자, 언어를 날리니까
사람이 픽픽 쓰러져 죽어나가는 겁니다.
상대적으로 말로 천냥 빚도 갚는다는 말이 있듯이
이 혀가 두 가지 역할을 다 한다는 겁니다.

죽이기도 살리기도 말이죠.

이 아무것도 아닌 혓다박이라는 살쩜이 어떤 기능이 있길래 사람을 죽였다 살렸다 할까요?

꼭 닭 같아
 

심지어 몸이 이 혀를 다스릴려고 해도

혀는 이 온 몸을 어겨가면서 능히 독자적으로 노는 불과 같고 지옥과 같다 라고 합니다.

도리어 온 몸이 이 혀에 의해서 더렵혀짐을 당한다 라고 합니다.

재갈을 물려 입을 틀어막아도 안된다는 겁니다.

 

길들일수 있는 재간이 인간에게는 없다 라는 겁니다.
아무리 인간의 몸에 달라 붙어 있어도 말이죠.

아무도 다스릴수 없지요

 

지난 시간에 가난에 대해서 언급했는데

나랏님도 가난을 해결 못하는데

손때버리는데

참된 임금은 고아에게 뛰어든다고 했습니다.


우리 보고 뛰어들라는 말이 아닙니다
.

임금이 그렇다는 겁니다. 가난 해결해 줄려고?

아니지요

마음이 더욱 가난해 지겠끔 할려고


가난 자체가 천국에는 없으니까 말입니다
.


왜 고치시느냐
? 천국에는 이런 것이 없다는 천국 샘플 맛보기입니다.

그런데 천국 보다 병고침을 목적으로 예수님이 오신 것이 아니다는 거죠.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혀를 다스릴려고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완벽한 사람이 될려고 혀를 억지로 다스릴려고 하지 마세요.

 

얼마나 소극적으로 보입니까?

선생 하지 말라고 하니 말입니다.

 

지금의 선생님들은 우찌할려고?

아예 목사 제도 자체를 어떻게 할려고?

 

그런 것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주님이 보이지 않는 원수를 겨냥한 말씀이다는 겁니다.

 

시편에서 그 혀가 경건한자와 충실한자를 끊어버리고 소멸시킨다고 합니다.

원수들이 하는 일을 말하고 있는 겁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우리의 혀로 십자가에 못 박아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를 처형하자 라고 외쳤습니다.

이 외침을 공명이 되어서 모든 사람들은 함께 이 일 만큼은 성사 시키도록 하는데 성공했습니다.
즉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기 성공

 

아들의 혼인잔치에 참여하라고 아무리 통보하고 신하들을 보내고 해도

꿈쩍도 안하는 인간들이

 

혀가 시키는 일 때문에 일심으로 다 자발적으로 독자적으로 하나 하나 다 나서서

개별자로써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자 라고 외치는 네트워크를 혀는 성취한 겁니다.

 

그러니 이 혀가 보통 무서운게 아니지요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유비쿼터 입니다.
 

그런데 우짭니까 저나 여러분이나 이 혀가 개인 하나 하나에 다 일일이 달려 있는데?

 

우짜죠?

 

그런데 감사하고 감사한 너무 너무 감사한 것은

 

너희들은 잠잠하라 라고 하시는 말씀이 있다는 겁니다.

 

모든 입을 막아버리고 함구케 하는 일이 나타났다는 겁니다.

혀를 다스릴 필요가 없이 혀 자체를 죽여버리는

온 몸도 이 혀를 다스리지 못하는데

혀 자체를 죽이고 따라서 온 몸 자체도 죽여버리는 사건이 다 이루어졌는데


바로 십자가 사건이 다 이루었다는 겁니다.

이 십자가의 사랑이

 

아무리 불과 같은 혀 라 할찌라도

아루미 지옥과 같은 혀 일찌라도

 

그 혀 보다

 

더 질투하고 더 시기하고 더 죽음 보다 더 강한 사랑으로 인해

 

십자가에 못 박았다 라는 겁니다. 그 정과 욕심을 말이죠.

 

그러니 혀를 다스릴게 아니라

온 몸이 다스릴려고 해도 안되는 혀

도리어 온 몸을 어겨버리는 아주 작은 혀를

 

이 독자적인 혀가 때려죽어도 말하기 싫어하는 이 십자가의 용서를 말하는데 마음껏 사용하면 된다는 겁니다.


십자가를 제대로 증거할줄 모른다고 못하고

십자가를 증거하는데 지식이 없다고 못하겠다고

십자가를 실수로 말하면 어떻하냐고

그런거 신경쓸게 아니라

 

도리어 그런 실수를 십자가는 이용해서 마음껏 사용하시니까

그냥 마음껏 내 질러 버리시면 되는 겁니다.

 

뒤처리는 주님이 알아서 다 하십니다.

 

안지르고는 못배기도록 만드시는 겁니다.

기쁨이 넘치는데 폭발 안하겠습니까?

 

주님은 오히려 실수, 오해, 오독를 통해서 일하시니까 말입니다.

 

얼마나 미쁘시면 저런 혀를 역으로 도리어 혀가 싫어하는 말을 하도록 하겠습니까?

 

그 정도로 넉넉한 사랑으로 다 이루신바이다는 겁니다.

 

넉넉하게 말입니다.

끊을자 없을 정도로 또렷합니다. 미흡하고 모호한 것이 없습니다.

 

시편 12편과 야고보서 3장을 통해서

맞습니다. 원수는 인간의 육체를 장악한 것 맞습니다.

아무리 봐도 이 몸을 장악한 그 원수에게서 벗어날 길이 없는 잠식상태 갇힌상태 맞습니다.


혀를 이길자 없습니다.
 

그러나 믿음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가능성 속에서 더 더 더 더 나은 불가능성을 외칩니다.

이 혀가 때려죽어도 못하는 말을 하도록 말입니다.

 

벙어리만이 외치는 십자가를

귀머거리 만이 들을수 있는 십자가를

소경만이 볼수 있는 십자가를 말입니다.

 

이 신체성을 타면서 원수는 자신들이 장악했다고 여긴 그 속에서 역전의 용사 십자가는 어떻게 이 원수를 거쳐서 다 이루는지를 또렷하게 증거하는 겁니다.

 

다음 시간은 응답하라 예수님입니다.

즉 신체성을 타면서 뻬앗긴 고지를

도리어 예수님이 어떻게 차지하시느냐? 탈환 하시느냐 라는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Posted by 김 대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