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답하라!! 예수님!! (시편 13)

 

그러나 응답은 없다. 그것이 구원이다.

 

(13:1, 개역) [다윗의 시, 영장으로 한 노래]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영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언제까지 숨기시겠나이까

(13:2, 개역) 내가 나의 영혼에 경영하고 종일토록 마음에 근심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오며 내 원수가 나를 쳐서 자긍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리이까

(13:3, 개역)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나를 생각하사 응답하시고 나의 눈을 밝히소서 두렵건대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 하오며

(13:4, 개역) 두렵건대 나의 원수가 이르기를 내가 저를 이기었다 할까 하오며 내가 요동될 때에 나의 대적들이 기뻐할까 하나이다

(13:5, 개역) 나는 오직 주의 인자하심을 의뢰하였사오니 내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13:6, 개역)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이는 나를 후대하심이로다

 

(13:1, 공동) 야훼여! 언제까지 나를 잊으시렵니까? 영영 잊으시렵니까? 언제까지 나를 외면하시렵니까?

(13:2, 공동) 밤낮없이 쓰라린 이 마음, 이 아픔을, 언제까지 견뎌야 합니까? 언제까지 원수들이 우쭐대는 꼴을 봐야 합니까?

(13:3, 공동) 야훼, 나의 하느님, 굽어살피시고 대답해 주소서. 죽음의 잠 자지 않도록 이 눈에 빛을 주소서.

(13:4, 공동) 원수들이 "이겼노라." 뽐낼 것입니다. 적들은 기뻐하며 날뛸 것입니다.

(13:5, 공동) 이 몸은 주의 사랑만을 믿사옵니다. 이 몸 건져주실 줄 믿고 기뻐합니다.

(13:6, 공동) 온갖 은혜 베푸셨으니 야훼께 찬미드리리이다.

 

 

지난 시간에 혀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혀는 마치 신체에서 독자적으로 행동하는

여러기관의 신체가 혀 만큼은 다룰수 없는

도리어 혀는 다른 기관 신체를 어겨가면서 독자적으로 행동한다고 했습니다.

 

이것을 역으로 혀 보다 더 다스릴수 없는

혀 조차도 감당이 안되는 것이 있는데 바로

혀가 외치기 싫어하는데도 혀 당사자가 외치게 되는

주님의 십자가의 용서입니다.

 

이것이 바로 머리에 숯불을 얹은 것처럼

악을 악으로 갚는 것이 아니라

혀를 혀로 갚는 것이 아니라 (욕배틀로 헬머니, 이기는 것이 아니라)

악을 선으로

혀가 혀 스스로 십자가의 용서를 외치게 만드는 식이

바로 십자가의 지혜인 겁니다.

 

그러니 벙어리의 외침이 하늘에 울림이 된다고 합니다.

골방에서 기도하는 것이 하늘에 닿는다고 합니다.

 

즉 앞뒤가 안맞다는 거죠.

 

오늘 본문도 동일합니다.

응답해 주세요 라는 겁니다.

부르짖는 소리에 제발 응답해 달라는 겁니다.

 

벙어리의 외침이 어떻게 하늘에 닿고

그렇지 않은 목소리 건강한 자는 하늘에 닿지 않는가?

 

골방에서 기도하는 것이 하늘에 상납되고

어떻게 대로 큰 길에서 기도하는 큰 외침은 하늘에 들리지도 않는가?

 

이 원리가 바로 십자가의 지혜인데

어떻게 어리석고 미련한 지혜가 하나님의 지혜와 똑같고

똑똑하고 학벌 문벌이 큰 지혜는 하나님의 미련함과 어울리지 못하는가 하는 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응답하지 않는 것이 곧 응답이다 라는 겁니다.

지난 시간의 경건한자가 끊어지는 것이 곧 구원이다 라는 겁니다.

사실상 경건한 자는 없습니다.
응답받을수 있는 제대로 기도하는 자도 없습니다.
오죽하면 성령의 탄식을 따로 주님께서 마련하셔야 한단 말입니까?
다윗도 안되는 겁니다.

다윗 자신도 자신에게는 정직한 영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다윗은 누구를 겨냥해서 원수를 언급하는 겁니까?

남들이 못 보는 시선이 원인 없는 결과로 덮쳐진 겁니다.

그것도 이스라엘 속에서 말이지요.


이스라엘 백성 전체가 이 다윗을 겨냥해서 공격하고 있습니다
.

그런데 다윗은 정작 이 모든 원수가 누구를 겨냥하고 있다고

역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자신도 그 원수에 포함되면서 말입니다.

 

네 맞습니다. 예수님입니다.
아직 나타나지도 않은 예수님

있지도 않는 없는 예수님

천년 뒤? 몇백년 뒤에나 오실 예수님

아직 있지도 않는 없는 예수님을 겨냥해서 이런 외침을 부르짖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결국 다윗이 아니라 예수님을 공격하고 있는 겁니다.

 

오늘날 교회도 마찬가지

예수님을 향하여 아벨에서 사가랴의 피흘림처럼

오늘날 성도의 피흘림이 교회에서 벌어지는 겁니다.
종교인들은 결국 예수님을 공격할 수 밖에 없는 겁니다.
아무리 교회를 수십년 다녀도 말입니다.

 

그러니 교회 속의 교회가 따로 꿍쳐(숨겨져) 있는 겁니다.

 

이스라엘 속에 이스라엘이 꿍쳐져 있고

 

다윗 속에 예수님이 숨겨져 있는 겁니다.

 

그들은 다윗은 공격하지만

이스라엘은 결국 예수님을 공격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기도드리는 겁니다.

무능하기 때문에 말입니다.
다윗이 아니라 다윗 속에 있는 그리스도가 기도를 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 무능이 역시나 무능 속에 무능으로써

예수님의 십자가의 지혜와 연관이 됨으로써

기도를 함에 있어서 응답받지 못하고 있는 겁니다.

응답 못 받는 것이 곧 응답받은 겁니다.


제가 제목을 저렇게 하고서 그러나 응답이 없다. 그것이 구원이다 라고 하니까
인간은 뭐든지 자기구원에 귀속시켜 버리는데
응답이 없는 조건이 아! 구원의 조건이구나 라고 착각하는 겁니다.
이미 구원 받았다는 것은 아 구원의 조건이구나 라고 따로 구원을 또 챙길려고 하는 겁니다.
이미 받았는데 왜 새삼스럽게 조건을 만들려고 하냐 말이죠.
그러니 이미 구원은 결국 예수님만 말하고 있는 것이지
인간은 아예 해당되지 않는 겁니다. 단절입니다. 단절이 너무 너무나 또렷하고 명료합니다.
오로지 예수님 마음대로 입니다.

 

즉 이미 응답받았기에 그런 기도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니 새삼스럽게 응답을 새롭게 받을 필요가 없는 겁니다.

이미 응답 되었기 때문에 나오는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구원의 조건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 응답은 예수님 때에 응해집니다.

그것도 어떻게 응해지느냐?

응답을 못 받고 버림받음으로써 구원되는 겁니다.

 

버림 받음이 곧 구원 됨입니다.
잃어버림이 곧 되찾음이 되는 겁니다.
결국 누구를 향하는 말입니까?

누구? 다윗? 아닙니다. 예수님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구원 받았다면 다 된 겁니다.

얼마나 명료하고 또렷합니까?
인간의 구원은 모호합니다. 찝찝해요! 흐릿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됨으로써 원수는 이긴 것이 아니라

단 한번도 원수는 이긴 적이 없었던 겁니다.

오히려 원수는 단 한번도 이긴 적이 없기 때문에
또 앞으로도 이길수가 없기 때문에
이기는 것에 집착 합니다.
그 정도로 이겨 본적이 없는 모호하고 흐릿하고 의문스럽기 짝이 없는 겁니다.

 

십자가 라는 실패가 넉넉히 이겼기 때문에

그 증상으로써 역사의 시간에 역으로 그들은 자신들이 이겼다고 착각하게끔 함정에 말려들게 한 겁니다.

 

그러니 우리는 늘 실패하는 것이 곧 승리를 이미 누리고 있는 증거인 겁니다.
이미 넉넉한 승리이기에 그 증상으로써 목베임을 당하는 겁니다.

왜? 넉넉한 주의 사랑에서 끊을자 없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고 했습니다.

 

지난 시간에 언급했듯이 어머니께 이런 말씀을 했습니다.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곧 예수님이 나를 진다는 겁니다.

그것도 끝까지 책임지고 말입니다.

그것이 십자가의 죽임입니다.

그러니 새삼스럽게 자기 십자가를 지겠다고 십자가를 억지로 만들어내지 말라는 겁니다.
인간이 말하는 십자가는 다 엉터리요
오직 십자가의 영이 말하는 십자가가 따로 있다는 겁니다. 그것도 비밀로 은폐되고 숨겨진 방식으로 말입니다.

 

그 십자가의 완성의 증상으로써 그림자(증상)가 쭉 늘어지는데
시간적으로 거꾸로 미래에서 과거로 그림자가 늘어져있는데

그 그림자라는 증상이 우리에게는 횡포, 폭력 곧 하나님의 갑의 횡포식으로

요셉이 우리 형제들을 뺑뺑이 돌려서 빚진자 만들어서
이쪽 가뭄의 세계에서 저쪽 긍휼의 세계로 옮기우는
요셉이 형제들을 십자가 지듯이 지는 것이다
. 예수님이 우리를 지는 것이다

그 완성의 그림자로써 우리에게 잉여 자본론의 빚쟁이로 돈을 벌면 벌수록 빚쟁이로 만든다

사랑의 빚으로 만든다 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인간은 단 한번도 십자가를 진적도 없고

버림받은 적도 없고

잃어버림도 없고

고난 받은 적도 없고

그 어떤 것도 없습니다.

 

이 모든 것은 예수님 자신을 말하기 위함으로써

우리는 예수님과의 비교에 놓여졌다는 것에 감사할 뿐이다는 겁니다.


이것이 참예, 세례 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회개도 예수님과의 비교로써 자기부인이지

 

성화론자나 바리새인이나 불교나 다들 자기부인의 달인들 아닙니까?

그런데 그것은 어디까지나 예수님과의 비교가 아니기 때문에

아무리 회개 달인들이라고 해도 소용이 없는 겁니다.


회개 기도 금식 이런 것들이 그들에게는 성화의 마일리지 쌓기 뿐이지
정작 인애와 자비가 없는 겁니다.
즉 죽은자를 살리지 못하는 겁니다.
죄인을 살려낼수가 없는 겁니다.

그래서 다윗은 혹여나 살려낼줄 알았는데
나의 기도 금식 눈물 회개 등등이 택도 없이 안먹혀들더라

그런것과 전혀 무관하게 원인 없는 결과로 주님의 용서가 덮쳤다고 여디디야 여디디야 여디디야 라고 외치는 겁니다.

그래서 먹고 마시고 춤추고 노래부르는 겁니다.

왕이시여 초상날에 왜 잔치날처럼 그러십니까?
잔치날에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그렇다고 초상날에 애곡하여도 울지 않는 것이 인간이다 라는 겁니다.

(마 11:17, 개역) 『가로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애곡하여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눅 7:32, 개역) 『비유컨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서로 불러 가로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애곡을 하여도 너희가 울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바로 이렇게 증거되는 것이 희년 곧 약속이 펼치는 모습이다는 겁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는데 달인들도 결국 그 자체가 예수님과의 경쟁이 되는

예수님을 속이는 짖에 불과한 겁니다.
사랑이 없이 말입니다.
남을 사랑하는 것이 율법의 완성인데
남을 위해 죽을수 있냐 말이죠.
그것도 딸랑 한 사람의 죄가 아니라 여럿도 아닌
모든 인간의 죄를 위해 말입니다.

 

그냥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음을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우리는 무시험 합격에 그냥

아무 연고 없이

결과를 누리는 것 뿐인 겁니다.

누가 하나님이 시킨 일이 뭐냐고 질문했는데
하나님이 보내신 자 곧 예수님을 믿는 것이 하나님이 시킨 일이다 라고 했습니다.

참 쉽지요 그러나 불가능 합니다.
그것 조차도 예수님이 하셔야 예수님을 믿을 수 있는 겁니다.
그 어떤 것도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예 없는 그 단절성만을 뼈저리게 느낄 뿐이기에
불쌍히 여겨 달라고만 할 수 밖에 없는 겁니다.

어딜 감히 십의 이조 드렸다는 둥
저 패역한 자 세리와 같지 않음을 하나님께 감사한다는 둥
이레 곧 일 주일에 두 번 금식했다는 둥
토색하지 않았다는 둥 그 따위 모호한 의문의 것을
감히 거룩한 성전에서 들이대냐 말이죠

거룩을 무시한 겁니다. 성화론자들이 거룩이 뭔지도 모르는 겁니다.
거룩은 덮쳐짐으로써 그저 제가와 번제가 아닌 인애와 자비를 바랄 뿐이다는 겁니다.
왜? 인애와 자비가 내 속에 없다는 것이 심판 받아 마땅하다는 겁니다.
사랑이 없다는 거죠.

그런데 성화론자들은 거룩한 행동을 사랑이 없이 가득채워 왔다고 감히 거룩 앞에서 과시하는 겁니다.
얼마나 사랑이 없었으면 그 딴거 모호한 의문의 것을 자랑하냐 말이죠. 그리고 인간 끼리의 비교에 들어가는 겁니다.
카스트 제도처럼 인간 끼리의 비교에 들어가지 않으면 성화할 필요가 없거든요.
그러니 의문이요 애초부터 사랑이 없는 겁니다.
이렇게 저들에게 말하면 이웃사랑 실천했다고 또 내세우는 겁니다. 그것이 사랑이 없다는 증거죠.
이웃사랑 실천하지 말고 이웃을 위해 죽어라 말이죠. 과연 죽을 수 있냐 말이죠.
그것도 남의 허물을 위해 자신의 허물이 없는 채로 말입니다.
지도 허물 덩어리인데 어딜 모호하고 의문의 짖을 한단 말입니까?

그러나 다윗은 알았던 겁니다.
회개 금식 눈물 기도 이 따윗것 앞으로 하지 않겠다고 말입니다.
먹고 마시고 춤추고 노래부르는 겁니다.
그런 원인이 없니 결과가 덮치니 잔칫날이 따로 없는 거지요
기쁨이 만개 하는 겁니다.

그 정도로 명료하고 또렷한 주님의 용서인 십자가 사랑인 겁니다.
사랑은 사랑인데 십자가 사랑
즉 인간의 사랑은 다 거짓이다는 상대적인 증거라는 겁니다.

 

응답해 주세요 라고 해서 진짜로 응답을 바로 해주고

응답을 바로 받아버리면

인간의 육은 바로 자기를 자랑하고 인간과의 비교에 들어가 버리는 겁니다.

그것이 바리새인이요 성화론이요 오늘날 개혁주의자들 아닙니까?
 

그런 의미에서 응답 안해 주심에 감사하시면 됩니다.

결국 이 모든 것은 예수님께만 향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우리에게 향하는 것은 그 어떤 것도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보내신 자 예수님께로 귀결될 뿐입니다.
 

이것이 이미 다 받았기에 누리는 겁니다.

 

그러니 벙어리가

즉 소리를 상실한 자가 소리라는 복된 음성을 만끽하는 겁니다.

 

아니 소리 자체가 상실되었고 잃어버렸고

없음인데 말입니다.

 

무자식으로써 죽은 태가 산태 보다 더 나은 산 태 복된 태 이다 라고

복음은 역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여자라는 것이 이 땅에 살 동안만 여자이고 자궁이 있지

천국에서는 여자라는 것이 없잖아요

그런데 잠시 이 땅에 있으면서 자궁이라는 태를 통해서

자식을 낳는 생명 개념을 남자는 없지만 여자는 있는데

이 여성이 천국에도 없는 여성성을 왜 이 땅에서 누리느냐?

 

순풍 순풍 자식들 잘 놓는 육체를 자랑하기 위함이냐? 아니지요.

생명은 주께 있기에

결국 예수님은 이렇게 생명의 주 이다 라는 예수님을 말하기 위함이지

 

그것도 역으로 죽은 태로써 예수님을 말하기 위함이지

자신의 태가 죽었든 순풍이든 그것은 인간들끼리의 비교에서는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겁니다.

 

이것이 실상인 믿음인 겁니다.

결국 믿음이 예수님인 거죠

 

인간 본인이 믿음 좀 있다고 얼마나 까불 까불 과시를 하는지?

그거 오늘밤 거뒤어 가면 어찌할려고 말이죠?

 

부자청년에게 너가 과연 말씀인 율법을 어릴적부터 다 지켰다면

전 재산을 가난한자에게 다 나누어 줘 보라 말이지요.

근심하고 돌아서 잖아요

 

그것은 이 부요함 자체가 자신의 육을 위함이 처음부터 없었다는 것을 모르기 떄문입니다.

 

건강도 심지어 병도 모조리 다 주님의 영광을 위함인 겁니다.

 

그런 해석은 오로지 예수님의 십자가 지심으로 넉넉히 다 이긴 상황에서 나오는 해석이기에

 

소경이 어릴적부터 소경 됨은 자기 죄나 부모 죄나 이런 인간끼리의 비교로써의 한계적인 해석이 아닌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곧 하나님이 보내신 자 예수님이 믿음의 실상이라는 해석에서 나오는 겁니다.

 

그러니 이웃 사랑 실천이라는 둥

기타 등등의 모든 것들은 내가 지킬게 아예 단 하나도 없는 겁니다.

모조리 다 예수님을 위한 겁니다.

할례도 마찬가지입니다.

지켰다고 자부했는데

마음판의 할례 라는 불가능성의 영역이 또 감추어져 있는줄 미쳐 몰랐던 겁니다.

결국 완성은 사랑 뿐입니다.

율법의 완성은 사랑 뿐입니다.

 

나에게로 귀결 되는 것은 없고

 

모조리 다 십자가의 용서 라는 사랑에게만 귀결되기 위함인데

 

이것은 의문의 육체에다가 부여하다 보니

부자청년은 근심하고 돌아설 수밖에 없는 겁니다.

 

오히려 그것이 기쁠텐데 말입니다.

그 말씀 곧 가난한 자에게 전 재산을 나누어 주어라

곧 사랑을 보여라 라고 했을때에

저는 못 합니다. 주님이 사랑이십니다 이렇게 되면

전혀 근심할 꺼리 자체가 없는데

지킨 것을 지킨 것을 맞받아 할려고 하니 근심하고 돌아선 겁니다.

 

사랑이 애초부터 없었던 겁니다.

 

율법을 지키면 사랑이 나와야 하는데

완악함이 나오는 것이 우리 육체의 한계이고

율법은 바로 그 속내를 들추어내도록

죄 아래 가두었던 겁니다.

 

율법을 지키면 지킬수록 죄만 더욱더 가득차게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늘 수시로 어머니께

예수 믿지 마세요

또는 이 성경 말씀은 우리 보라고 준게 아니라

마귀들 보라고 준 것이다 라고 말하는 겁니다.

 

즉 인간의 대상물이 될 수 없다는 겁니다.

 

거꾸로 우리를 대상물로 삼고자 다가오는 겁니다.

 

응답하라 라고 했을 때 예수님께 여호와께 응답해 주세요 라고 대상물로 삼는게 아니라

 

도리어 이미 응답이 이루어 졌기 때문에

주님 쪽에서 나를 대상물로 삼아서 응답이 이미 이루어졌음의 증상으로써

실상의 증상으로써 이 외침이 나온다는 겁니다.

 

그랬을때에 이 대상물은 미끄러짐 덩어리인 겁니다.

 

다윗을 잡을려고 원수들이 다윗을 괴롭히는데 정작 다윗을 잡자마자 미끄러지는

대상 소문자 a 가 되는 겁니다.

 

다윗 본인도 모르는 겁니다. 그래서 유예 시켜 버리는 겁니다.

이 비밀의 수수께끼의 답은 자신이 아니라 저 분입니다 라고

뻔뻔스럽게 짐을 떠 넘겨버리는 식인 겁니다.

이것이 믿음의 실상이 역으로 소급해서 벌어지는 증상인 겁니다.

 

그러니 믿음이라는 실상의 그림자가 지금 응답해 주세요 라고 외침으로써

이미 그 응답이 믿음안에서 다 이루어짐으로써

다윗에게는 전혀 응답이 없이 이미 응답완료로 벌어지는 사건인 겁니다.

 

그래서 벙어리가 복음을 외치고

귀머거리가 십자가로 기뻐 춤추며

앉은뱅이가 아름다운 소식을 들고 산을 넘고

소경이 아무도 못 보는 십자가의 사랑의 빛을 보고

예수님을 찬양하는 겁니다.

 

이 얼마나 역설적입니까?

완료란 오히려 완료를 상실당한자가 그 완료만을 외치고

건강한 자는 완료를 외칠 수가 없도록 하심이

 

하나님의 어리석고 미련한 지혜이다는 겁니다.

 

그런 자들로만 가득찬 곳이 천국이다는 겁니다.

 

즉 건강한 자는 때려죽어도 그런 곳은 가기 싫다면서 아예 스스로 등을 돌리는 식의 천국이다는 겁니다.

 

부자청년을 등돌리게 하듯이 말입니다.

 

응답 따위는 단 하나도 없는 곳이 천국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응답을 바라는 자는 천국에 아예 들어갈수 없도록 스스로 등돌리게 만든다는 겁니다.

 

단 하나의 응답도 못 받은 자만이 가는 곳이 천국이다는 겁니다.

왜냐? 천국이 그런 자만을 끌어 당겼기 때문이지

응답 못받는 조건을 갖춘자가 아닌 것이다는 겁니다.

 

이것은 저들 원수 곧 지옥에 속한 자들과의 대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 원수들이 외치기는 자신들이 이겼다 라고 외칩니다.

바로 그겁니다.

지옥에 가는 자는 자신들이 이겼다를 외치는 자들만 지옥 갑니다.

아무나 지옥에 가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들이 이겼다 라는 자들만 갑니다.

지옥이 그들을 땡기기 때문입니다.

 

결국 구원이란

인간이 보기에 저 사람은 그 어떤 이유로도 구원받을 만한 조건은 단 하나도 없어

맞아 저 사람은 절대 구원 될 수 없을거야 라는 자들만 구원된다는 겁니다.

 

왜냐 천국이 그들을 땡기기 때문입니다.

 

분명 제가 조건처럼 말했지만

정작 인간들이 늘 세우는 조건에 대한 집착을 없애는 더 나은 조건으로써

천국 자기 마음대로 땡긴다고 했습니다.

 

결국 인간은 그 어떤 조건을 갖추어도 천국 못 간다는 겁니다.

아무리 예수님을 믿어도

예수님을 사랑해도 소용없습니다.

 

또 이렇게 말하니까 맹목적으로 이 말을 조건 삼아서

어떤 순진한 대학생 1학년처럼 초중대 학생들이 자살까지 하던데

그것까지 조건을 끝까지 포기 못하겠다는 취지인 거지요.

 

그 정도로 인간은 어떤 조건화된 언어를 자신의 육체에 붙이고자 접붙이고 하는 식이다는 겁니다.

 

특히 불교가 심한데 최고의 종교로써 그 어떤 종교도 불교 못 따라 갑니다.

다른 종교들이 다들 불교 닯고 심어서 안달인 거지요.

결국 유아독존인 겁니다. 니체사상인 거죠.

 

자 이렇게 모든 인간은 유아독존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을 보세요

결국 유아독존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응답하지 않는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합니까?

이루어져도 결국 수백년 뒤의 예수님에게로만 소급된다는 겁니다.

그 예수님이 처음과 나중으로써 이미 넉넉한 응답과 승리의 이김을 누리면서 소급 작동된 사건이기에

 

이 본문은 결국 예수님께서 십자가 상에서 외치신 부르짖을 통해서 봐야 한다는 겁니다.

 

예수님의 울부짖음에 하나님은 아무런 응답이 없습니다.

그것이 응답됨입니다.

 

예수님도 응답 안 된 판국에 우리일까 보냐 말이죠.

그래서 성령의 일하심을 눈 여겨 보게 되는 겁니다.

나의 울부짖음의 응답이 아닌

성령의 탄식을 보는 겁니다.

 

자 이렇게 되면 눈으로 보이는 식에서는 저들 원수가 더욱더 기고만장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응답인 겁니다.

 

마귀가 더욱더 승리의 만취하게끔 하는 것이

십자가의 어리석은 지혜인 겁니다.

 

결국 십자가는 이 원수를 겨냥한 것이지

나를 구원시키고자 안달해서 십자가에 달린 것이 아닙니다.

 

누구보다 죄를 싫어하는 분은 주님 본인인 겁니다.

 

우리가 아쉬운게 아니라

주님이 더 아쉬운 겁니다.

 

이 죄를 싫어하는 모습은

노아의 방주 사건을 통해서

온 지구를 다 싹쓸이 할 정도입니다.

 

나 보다 더 심하다는 겁니다.

누가 더 아쉽냐 말이지요.

 

우리는 죄악에 잠식이 되어서 전혀 죄를 시기할 줄 모르는데

아주 잠깐 나 보다 더 나쁜 놈이 잠깐 보일 때 3초 인식할 뿐이지

우리 또한 그런 나쁜놈과 다를바가 없는데

 

예수님은 오죽 답답았으면

직접 하늘 영광 다 버리고 직접 이 죄 문제를 해결하고자 뛰어내려왔냐 말이지요.

 

누가 더 답답았으면

 

주변의 고아나 가난한자 굶어죽는 자를 보고 잠시 우리는 3초 인식하고 도루묵이지만

 

이 지구상에 울부짖는 자가 얼마나 많냐 말이죠.

그들의 소리를 듣는 주님은 오죽 답답하시겠느냐 말입니다.

 

그래서 직접 내려오신 겁니다.

 

죄 문제를 십자가로 한방에 다 해결하신 겁니다.

결국 십자가는 날 구원코자 함이 아니라

 

주님의 썩어 뭉드러진 그 상하신 마음을

통회한 마음을

 

십자가로써 넉넉히 승리한

원수를 겨냥한 것이다는 겁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울어야 합니다.

실패해야 합니다.

응답이 없어도 응답이 된 줄로 알고 응답해 달라고 외쳐야 합니다.

 

아니 방금 당신은 응답 안될꺼다 라고 했잖아

 

바로 그겁니다.

나를 위한 응답은 아예 없습니다. 응답받았다고 착각해도 모호하고 흐릇한 미흡하고 찝찝한 것들입니다.

 

나를 위함이 아닌

예수님을 위한 응답이 이미 이루어진줄로 알고 응답해 달라고 외치시고

울부짖고 울어야 하는 겁니다.

 

네 맞습니다. 원수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뻔뻔스럽게 이 원수를 늘 예수님께 떠맡기듯이

늘 원수와 예수님을 충돌 시키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원수와 싸우시는 예수님

 

? 넉넉히 이겼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 말은 우리 자신들은 이 싸움에 동원이 되어 참예된 겁니다.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말입니다. 그냥 찬양할 뿐입니다. 즉 결과만을 미리 넉넉히 누릴 뿐입니다.

늘 이 싸움을 요청함으로써 또렷하고 명료한 넉넉한 승리를 맛보아 누리는 것입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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