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어버려 두사], [다 치우쳤으며] vs [시온] (육과 영의 대조) (시편 14)

 

(1:16, 개역)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1:17, 개역)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1:18, 개역)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

(1:19, 개역)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

(1:20, 개역)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

(1:21, 개역)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1:22, 개역)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

(1:23, 개역)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1:24, 개역)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 버려두사 저희 몸을 서로 욕되게 하셨으니

(1:25, 개역) 이는 저희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

(1:26, 개역) 이를 인하여 하나님께서 저희를 부끄러운 욕심에 내어 버려 두셨으니 곧 저희 여인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1:27, 개역) 이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인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로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저희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 자신에 받았느니라

(1:28, 개역)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 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1:29, 개역)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 하는 자요

(1:30, 개역)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1:31, 개역)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1:32, 개역) 저희가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하다고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 하느니라

 

 

(14:1, 개역) [다윗의 시, 영장으로 한 노래]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저희는 부패하고 소행이 가증하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14:2, 개역)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 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14:3, 개역) 다 치우쳤으며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

(14:4, 개역) 죄악을 행하는 자는 다 무지하뇨 저희가 떡 먹듯이 내 백성을 먹으면서 여호와를 부르지 아니하는도다

(14:5, 개역) 저희가 거기서 두려워하고 두려워하였으니 하나님이 의인의 세대에 계심이로다

(14:6, 개역) 너희가 가난한 자의 경영을 부끄럽게 하나 오직 여호와는 그 피난처가 되시도다

(14:7, 개역) 이스라엘의 구원이 시온에서 나오기를 원하도다 여호와께서 그 백성의 포로된 것을 돌이키실 때에 야곱이 즐거워하고 이스라엘이 기뻐하리로다

 

 

 

어디서 많이 보던 내용이던데 살펴보니 로마서에서 이 시편 14편을 인용했던 겁니다.

 

로마서 310절입니다.

 

(3:10, 개역) 기록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3:11, 개역)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3:12, 개역)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3:13, 개역)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3:14, 개역)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3:15, 개역) 그 발은 피 흘리는데 빠른지라

(3:16, 개역)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3:17, 개역)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3:18, 개역) 저희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3:19, 개역)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3:20, 개역)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3:21, 개역)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3:22, 개역)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3:23, 개역)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3:24, 개역)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3:25, 개역)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3:26, 개역)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

(3:27, 개역)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뇨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3:28, 개역)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3:29, 개역) 하나님은 홀로 유대인의 하나님뿐이시뇨 또 이방인의 하나님은 아니시뇨 진실로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느니라

(3:30, 개역) 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또는 무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

(3:31, 개역)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사도바울이 복음을 새롭게 정립하는데 있어서

믿음을 앞장 세웁니다.

 

즉 상대적인 행함의 대립으로써 말이죠

 

복음을 새롭게 정립한다는 말은 기존의 자신의 신앙에 대한 대조이기도 하고
곧 그것은 육이였고 행함이였다 라는 겁니다.


그러나 누가 바울이 사울적의 모습을 믿음이 아니라 행함이라고 여겨겠습니까?
절대로 그런 인식을 있을 수 없었다는 겁니다. 이것은 오로지 성령의 결과이지
인간에게서는 믿음이라고 여겼지 육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있을 수가 없었다는 거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팔을 어긋맞게 된 것은
인간의 믿음이 떳다가 아니라
바로 그 바깥에서 예수님의 믿음이 떳다 라는 겁니다.
 

그래서 믿음은 한 의가 율법 바깥에서 왔다 라는 겁니다.

 

그 믿음에서 새 출발하는 것이 복음이다는 겁니다,


인간의 믿음이 아닌 예수님의 믿음에서의 출발 말입니다.
 

그럼 구약은 무관하냐?

 

아니죠 시편 14편을 언급하면서 바로 다윗이 이 복음을 증거했다는 겁니다.

 

율법 외에 한 의를 말입니다.


시편 자체가 율법 입니다. 그럼에도 그 율법 속에서 율법 외에 한 의를 외친겁니다.
오히려 율법을 소유했다고 여긴 자들은 그 숨겨진 예수님을 몰랐던 겁니다.

다윗은 알았습니다.
모든 해석을 심지어 믿음을 예수님에게 뻔뻔스럽게 유예시킨 겁니다.

자기의 회개도 눈물도 금식도 기도도 다 엉터리였다는 겁니다.
심지어 정직한 영이 없다는 겁니다.

그 텅빔을 예수님에게 유예시킴으로써 그분이 하실 일만을 기다리는 입장 뿐이였다는 겁니다.
율법 외에 한 의가 오기를 말입니다.
 

지난 시간에 응답하라 예수님 이라고 다윗은 예수님을 언급합니다만

문자로 예수 라는 용어를 쓰지 않음으로써

정작 시편을 달달 외우는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알아볼 수가 없었고

급히 아들에게 입을 맞출수가 없었습니다.
진노는 커녕
진노가 급하기는 커녕

어떻게 해서든 구원받는가에 대한 것만 의식한 겁니다.

심지어 예수님을 죽이는데 가장 적극적인 실질적인 살인자의 모습을 갖추었는데

다윗이 그 예수님의 모습을 미리 앞당겨서 그 증상 그 징후로써 미리 소급해서 보여주는 겁니다.

 

아니 왕인데 전혀 왕 같지도 않고

백성들 모두 지나 개나 다 이 다윗이라는 왕을 완전히 개 만도 못한 자로 취급한다는 겁니다.

 

오죽하면 그런 입장에서 다윗은 그 처지에서 부르짖는 겁니다. 응답해 달라고

 

왜 이스라엘의 모습이 이러냐고?

사실은 자신이 우리야 장군을 죽였던 모습이였습니다.
그래서 율법 뒤에 숨었습니다.

똑같이 우리야 장군을 죽인 빌미로 백성들은 다윗이 강할때는 아부했지만
다윗이 약할때에는 본색을 드러냅니다. 우리야 장군을 죽였듯이
우리도 너에게 그런 짖해도 무방하지 않느냐 라는 식으로 말입니다.


그리고선 율법 뒤에 다들 숨어버립니다.

그 모습을 다윗은 철저하게 격는 겁니다.
아 그래서 인간 밖에서 와야할 의이어야 한다는 겁니다.

인간이 만들어내는 의가 아닌 .....
 

자 그런데 똑같이
그 이스라엘의 모습을 한 당사자 바울이

이제는 성령을 받아서 그 차이로써 자신이 육의 이스라엘로써 했던 모습과

이제는 반대로 나의 손에 죽은 예수님이 주 이시다 라고

 

행함의 반대인 믿음이신 예수님을 증거하는 겁니다.

 

자 그렇다면 우리는 이 양면의 모습을 다 갖춘 겁니다.

갖추었다고 하니까 조건으로 볼게 아니라

조건 이전에 이미 그 속에 갇혀 버린 겁니다.

 

그러니 변명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어두운 눈이 예수님을 싫어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그 십자가에 달린 분이 주님이셨구나 라고 도리어 우리 입으로 다시 예수님이 옳았다고 외치는 겁니다.

 

이번 주간에 계속해서 한 입에서 찬 송과 저주가 나오는 도다 라는

야고보서의 말씀이 맴돌았습니다.

 

지난 시간에 다룬 혀에 대해서 나누어서 그런지 계속 맴 돌았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의 제목을 옳지 않은 하나님 이라고 제목을 쓰고 싶을 정도 였습니다.

 

왜 옳지 않는 하나님이라고 쓰고 싶었느냐?

 

사실상 야고보서의 그 본문은

자녀들아 이것이 옳지 않도다 한 입에서 찬송이 나오고 저주가 나오도다 라고 하시잖아요?

 

본문을 직접 올려 보면

 

(3:10, 개역) 한 입으로 찬송과 저주가 나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3:10, 공동) 같은 입에서 찬양도 나오고 저주도 나옵니다. 내 형제 여러분, 이래서는 안 되겠습니다.

(3:10, 쉬운) 찬송과 저주가 한 입에서 나오고 있습니다. 형제 여러분, 이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3:10, 킹흠정) 같은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나오거니와, 내 형제들아, 이런 것들이 결코 그래서는 아니 되느니라.

(3:10, 한글킹) 같은 입에서 축복과 저주가 나오는도다. 나의 형제들아, 이렇게 되어서는 아니되느니라.

(3:10, 현대인) 한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나오고 있습니다. 형제 여러분, 이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3:10, 현대어) 그래서 축복과 저주가 같은 입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이것은 참으로 옳지 않습니다.

(3:10, 가톨릭) 같은 입에서 찬미와 저주가 나오는 것입니다. 나의 형제 여러분, 이래서는 안 됩니다.

 

 

에잇!! 급한 성질에 못 이겨서 제목을 옳지 않은 하나님 이라고 수정해야 겠네요

 

[내어버려 두사], [다 치우쳤으며] vs [시온] (육과 영의 대조) (시편 14)

을 옳지 않은 하나님, 마땅하지 않은 하나님이라고 말입니다.

 

자 이렇게 해놓고 계속해 보면

 

제가 왜 이렇게 일주간 동안 계속 생각함을 당했는고 하니

 

이것을 이 야고보서를 하나의 성적인 관계성 곧 에로스 개념에서 보면

한 감람나무에서 두 개의 각각 다른 나무의 열매가 날수 없다고 야고보서에서도 언급하잖아요!

 

(3:11, 개역) 샘이 한 구멍으로 어찌 단 물과 쓴 물을 내겠느뇨

(3:12, 개역) 내 형제들아 어찌 무화과나무가 감람 열매를, 포도나무가 무화과를 맺겠느뇨 이와 같이 짠 물이 단 물을 내지 못하느니라

(3:13, 개역) 너희 중에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가 누구뇨 그는 선행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보일지니라

(3:14, 개역) 그러나 너희 마음 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라 진리를 거스려 거짓하지 말라

(3:15, 개역)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세상적이요 정욕적이요 마귀적이니

(3:16, 개역)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요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니라

(3:17, 개역)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벽과 거짓이 없나니

(3:18, 개역) 화평케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

 

그런데 놀라운 점은 바로 하나님 본인이

에서와 야곱을 한 몸에서 나오게 한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이 말이 맞아요

둘이 갈라져서 나올려면 갈라지는 분기점으로써 한 입을 언급해야만 한다는 겁니다.

 

다윗이라고 해서 예외냐 말이죠?

 

다윗 본인도 벗어날 수 없었고

심지어 오늘 로마서를 언급했는데 사도바울 당사자가

지금 한 입에서 이랬다 저랬다 하는 식으로

이제는 예수님을 이단으로 몰때는 언제고

이제는 주님이시다 라고

아예 전체 사상을 다 십자가 중심으로 뒤엎어버리고 있는 전복을 보여준다는 겁니다.

 

그러니 갈라진다는 것이 의미가 되며

 

하나님을 전복시켜버려서 예수님으로 이행시키는데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라고 합니다.

 

오늘 누가 백부장의 믿음을 언급했길래

제가 댓글을 이렇게 달았습니다.

 

 

말씀만 하옵소서 종이 듣겠나이다. (백부장의 믿음)

초과잉여성(불가능성)으로써의 희년

유대인이 말씀 앞에서 자신을 낮추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만

개같은 이방인으로써 말씀이 자신 보다 높다 라는 것은 이방인에게서는 있을 수 없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누가복음은 이 백부장을 앞장세움으로써

유대의 하나님을 해체하고

모든 이방인의 하나님으로써 예수님의 사랑을 완성한다.

유대인에게는 불가능한 초과잉여성이지만

예수님의 십자가는 그 정도로 넉넉한 초과 잉여성으로써의 용서이다.

이방인 마저도 다 덮고도 남는 용서의 사랑인 십자가만 옳게 하고자 말이다.

유대인에게 달라붙은 마귀에게는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을 다 이루신것이다.

오히려 유대인에게는 모호한 어리석은 걸림돌이 되었고

이방인에게는 왜 그런 모순된 미련하고 무모한 사랑을 펼치냐 라고

얼마나 초과 잉여적이면 감당이 불감당일 정도로 ~~~~

 

 

선민을 깨뜨리는 선택사상이 십자가이니 걸림돌인 거죠

오늘날에도 십자가를 적용하면 같은 사건이 벌어지는 거죠.

선택은 결국 텅빈 공터 (실재계) 공포 이자 웃음(기쁨)이 되는 십자가인 거죠

 

 

라고 말입니다.

 

이 사건에 가장 제대로 말려든 자가 바로 사도바울 본인이 아닙니까?

 

그리고 이제 사도바울은 유대인에게가 아닌 이방인에게까지 복음을 증거하는 겁니다.

사울 때에는 있을 수 없는 일인 겁니다.

 

그렇게 갈라지는 전복된 그 분기점이 바로 십자가 라는 믿음 때문에 졸지에

그 동안 믿음이라고 우겼던 것이 행함이였고

영이라고 우겼던 것이 바로 육의 대표로써의 유대인이였다는 겁니다.

 

가장 누가 봐도 제대로 된 영적인 존재가 사실상 육의 가장 대표로써

예수님 때문에 졸지에 전복이 되는 겁니다.

 

그 이전에는 상상 조차 할 수 없었던 일이다는 겁니다.

 

선민을 깨뜨리는데 과연 어떤 유대인이 가만히 있겠냐 말이죠.

 

그래서 사도바울이 앞장 섰던 겁니다.

 

그런 사도바울이 도리어 전복당해 꺼꾸러뜨림을 당했으니

 

그래서 나온 처음 서신이 로마서 아닙니까?

 

마치 누가복음과 마태복음을 합친듯한 유대인에 대한 전복이요 이방인에게 넘어가는 구원으로 말이지요.

 

그것이 백부장의 믿음으로 예수님은 유대인에게 들이대시는 것이다고 댓글을 달았던 겁니다.

 

 

(8:5, 개역) 예수께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한 백부장이 나아와 간구하여

(8:6, 개역) 가로되 주여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하나이다

(8:7, 개역) 가라사대 내가 가서 고쳐주리라

(8:8, 개역) 백부장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

(8:9, 개역)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8:10, 개역) 예수께서 들으시고 기이히 여겨 좇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7:1, 개역) 예수께서 모든 말씀을 백성에게 들려 주시기를 마치신 후에 가버나움으로 들어가시니라

(7:2, 개역) 어떤 백부장의 사랑하는 종이 병들어 죽게 되었더니

(7:3, 개역) 예수의 소문을 듣고 유대인의 장로 몇을 보내어 오셔서 그 종을 구원하시기를 청한지라

(7:4, 개역) 이에 저희가 예수께 나아와 간절히 구하여 가로되 이 일을 하시는 것이 이 사람에게는 합당하니이다

(7:5, 개역) 저가 우리 민족을 사랑하고 또한 우리를 위하여 회당을 지었나이다 하니

(7:6, 개역) 예수께서 함께 가실새 이에 그 집이 멀지 아니하여 이 벗들을 보내어 가로되 주여 수고하시지 마옵소서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7:7, 개역) 그러므로 내가 주께 나아가기도 감당치 못할 줄을 알았나이다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

(7:8, 개역) 저도 남의 수하에 든 사람이요 제 아래에도 군병이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제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7:9, 개역) 예수께서 들으시고 저를 기이히 여겨 돌이키사 좇는 무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은 만나지 못하였노라 하시더라

(7:10, 개역) 보내었던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가 보매 종이 이미 강건하여졌더라


이게 옳지 않다 라는 불의성 또는 부정성 또는 스캔들로써 제가 표현한 겁니다.

 

기존의 것을 뒤엎어버리는 전복으로써 말입니다.

 

옳지 않은 이방인으로써의 백부장이 옳다고 우기는 유대인 에게는 찾아 볼수가 없다는 식으로

십자가는 계속해서 옳지 않게 수셔대며 사건을 터트리는 겁니다.

 

그러니 제목은 옳지 않다고 해 놓고서는 오히려 더 옳음을 초과잉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라는 겁니다.

 

이방인의 편에 편파적으로 서서 유대인을 고발하고 있으니

옳지 않다 라는 인식을 자극적으로 받을 수 밖에 없다는 겁니다.

 

십자가가 바로 그렇게 걸림돌로 옳지 않음으로 다가옴으로써 사건이 발생하게 되니

과연 누가 옳으냐

 

분명 며느리 다말이 옳지 않았는데

그 옳지 않은 그가

반드시 옳게 된다 라는 것

 

다윗도 이 사건에 말려들어야 하고

사도바울도 이 사건에 말려들어야 하고

 

이 불의한 우연의 십자가가

 

 

반드시

 

기필코

 

필연적으로

 

예정된 대로

 

이 옳지 않음으로써만 다가옴에 있어서

전복이 일어난다는 겁니다.

 

 

지금 다윗은 이스라엘이 다 치우쳤다고 합니다.

이방인을 가리켜 하는 소리가 아닙니다.

 

사도바울도 마찬가지 하나님을 알되 영화롭게 못한다고 합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합니다.

 

의인이라는 개념은 이스라엘만 알아먹는 의미입니다.

이방인에게 의인이라고 하면 무슨 소리인지 조차도 모르는 겁니다.

결국 이스라엘 속에 의인이 없다 라는 겁니다.

 

우상도 이방인 보고 하는 소리가 아니라

이스라엘 속에 만연하다는 겁니다.

 

시선이 완전히 바뀐 거죠

 

자신이 몸 담았던 그 속이 바로 우상이였다는 겁니다.

 

다윗도 마찬가지

 

그 동안 가장 거룩하다고 여겼는데

알고보니 가장 우상숭배적인 더러움이라고 합니다.

 

왜 이런 시선의 전복이 일어난 것일까요?

 

이렇게 다 치우쳤고

내어버려둬 버렸음에도 불구하고

 

그 어떤 연결 고리도 없이

 

결과는 시온으로 집약이 되어 버리는 겁니다.

 

인간이 믿음적도 없고

이스라엘이 행한 적도 없고

다윗왕이 왕으로써 이 시온은 마련한 적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 시온이라는 공간이 주님쪽에서 마련함으로써

 

이유 없이 기쁨과 즐거움이 저절로 와 버렸다는 겁니다.

 

이상하지 않나요?

 

사도바울에게도 이런 경험이 얼마나 신비했을까요?

분명 자신은 예수 이단을 잡는 가장 선봉자였는데

이제는 예수님을 그 어떤 사도들 보다 더욱더 명료하게 증거하는데

그 원인이 되는 그 어떤 연결 고리가 있었냐 말이죠.

 

바울에게는 없다 라는 겁니다.

 

그 어떤 조건, 원인이 말입니다.

 

그냥 덮쳐버린 겁니다.

 

이것이 시온이라는 겁니다.

특정장소 시온이 이스라엘 땅 속에서, 가운데서 말입니다.

특정인물인 다윗이 이스라엘 속에서 말입니다.

 

결국 예수님 이지요

장소도 인물도 결국 예수님이고

이것이 오늘날로 치면 그리스도의 몸이, 예수 안이 바로 그 시온이 되는 겁니다.

 

시오니즘 식으로 특정장소를 또 찾아다닐게 아니라 말입니다.

 

우리가 분명 그는 옳지 않다고 말했는데

그렇게 말한 당사자가 반드시 그가 옳았구나 라고 표현하는 그 인물이 바로 시온이라는 겁니다.

 

이렇게 십자가는 눈에 보이는 이스라엘에게서 눈에 보이지 않는 그리스도의 몸으로

끊임없이 분절 시키기 위해서

 

사건을 발생시킨다는 겁니다.

 

? 시온이 준비 되어 있기에

 

그가 나보다 옳도다 가 준비 되어 있기에

말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오늘 본문

 

육은 육으로써의 모습과

영은 영으로써의 모습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겉으로는 가장 이스라엘을 갖추어도 내어버려 둠과 다 치우쳐짐에 해당시키고

 

아무리 겉으로 이스라엘로부터 공격 받으면서 너에게 응답하지 않을 것이다 라고 비아냥 거려도 시온이 준비 되어 있다는 겁니다.

 

위는 시아버지 유다의 모습이고

우리의 수시로 나타나는 모습이고

 

아래는 개같은 이방인 여자 며느리 다말의 모습이고(너에게는 절대로 내 아들을 주지 않을 것이다.)
이유 없이 무조건 미운 다말이

옳지 않은 다말이

바로 나의 구원자 라는 겁니다.

그가 나보다 옳도다 라는 겁니다.

 

미운 오리 새끼가 말이죠.

 

옳지 않은 예수님이 말이죠.

 

십자가는 이렇게 맛물리도록 사건을 충돌시키는 겁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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