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오른편에서 누리는 즐겁고 행복한 막사는 인생(피로 덮으시는 용서를 누리는 기쁨) (시편 16)

 

 

(16:1, 개역) [다윗의 믹담] 하나님이여 나를 보호하소서 내가 주께 피하나이다

(16:2, 개역) 내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는 나의 주시오니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

(16:3, 개역) 땅에 있는 성도는 존귀한 자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저희에게 있도다

(16:4, 개역) 다른 신에게 예물을 드리는 자는 괴로움이 더할 것이라 나는 저희가 드리는 피의 전제를 드리지 아니하며 내 입술로 그 이름도 부르지 아니하리로다

(16:5, 개역) 여호와는 나의 산업과 나의 잔의 소득이시니 나의 분깃을 지키시나이다

(16:6, 개역) 내게 줄로 재어 준 구역은 아름다운 곳에 있음이여 나의 기업이 실로 아름답도다

(16:7, 개역) 나를 훈계하신 여호와를 송축할지라 밤마다 내 심장이 나를 교훈하도다

(16:8, 개역)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므로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로다

(16:9, 개역) 이러므로 내 마음이 기쁘고 내 영광도 즐거워하며 내 육체도 안전히 거하리니

(16:10, 개역)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지 않게 하실 것임이니이다

(16:11, 개역) 주께서 생명의 길로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우편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6:1, 개역) 내 아들아 네가 만일 이웃을 위하여 담보하며 타인을 위하여 보증하였으면

(6:2, 개역) 네 입의 말로 네가 얽혔으며 네 입의 말로 인하여 잡히게 되었느니라

(6:3, 개역) 내 아들아 네가 네 이웃의 손에 빠졌은즉 이같이 하라 너는 곧 가서 겸손히 네 이웃에게 간구하여 스스로 구원하되

(6:4, 개역) 네 눈으로 잠들게 하지 말며 눈꺼풀로 감기게 하지 말고

(6:5, 개역) 노루가 사냥꾼의 손에서 벗어나는 것 같이 새가 그물 치는 자의 손에서 벗어나는 것 같이 스스로 구원하라

(6:6, 개역) 게으른 자여 개미에게로 가서 그 하는 것을 보고 지혜를 얻으라

(6:7, 개역) 개미는 두령도 없고 간역자도 없고 주권자도 없으되

(6:8, 개역) 먹을 것을 여름 동안에 예비하며 추수 때에 양식을 모으느니라

(6:9, 개역) 게으른 자여 네가 어느 때까지 눕겠느냐 네가 어느 때에 잠이 깨어 일어나겠느나

(6:10, 개역) 좀더 자자, 좀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더 눕자 하면

(6:11, 개역) 네 빈궁이 강도 같이 오며 네 곤핍이 군사 같이 이르리라

(6:12, 개역) 불량하고 악한 자는 그 행동에 궤휼한 입을 벌리며

(6:13, 개역) 눈짓을 하며 발로 뜻을 보이며 손가락질로 알게 하며

(6:14, 개역) 그 마음에 패역을 품으며 항상 악을 꾀하여 다툼을 일으키는 자라

(6:15, 개역) 그러므로 그 재앙이 갑자기 임한즉 도움을 얻지 못하고 당장에 패망하리라

(6:16, 개역) 여호와의 미워하시는 것 곧 그 마음에 싫어하시는 것이 육 칠 가지니

(6:17, 개역) 곧 교만한 눈과 거짓된 혀와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는 손과

(6:18, 개역) 악한 계교를 꾀하는 마음과 빨리 악으로 달려가는 발과

(6:19, 개역) 거짓을 말하는 망령된 증인과 및 형제 사이를 이간하는 자니라

(6:20, 개역) 내 아들아 네 아비의 명령을 지키며 네 어미의 법을 떠나지 말고

(6:21, 개역) 그것을 항상 네 마음에 새기며 네 목에 매라

(6:22, 개역) 그것이 너의 다닐 때에 너를 인도하며 너의 잘 때에 너를 보호하며 너의 깰 때에 너로 더불어 말하리니

(6:23, 개역) 대저 명령은 등불이요 법은 빛이요 훈계의 책망은 곧 생명의 길이라

(6:24, 개역) 이것이 너를 지켜서 악한 계집에게, 이방 계집의 혀로 호리는 말에 빠지지 않게 하리라

(6:25, 개역) 네 마음에 그 아름다운 색을 탐하지 말며 그 눈꺼풀에 홀리지 말라

(6:26, 개역) 음녀로 인하여 사람이 한조각 떡만 남게 됨이며 음란한 계집은 귀한 생명을 사냥함이니라

(6:27, 개역) 사람이 불을 품에 품고야 어찌 그 옷이 타지 아니하겠으며

(6:28, 개역) 사람이 숯불을 밟고야 어찌 그 발이 데지 아니하겠느냐

(6:29, 개역) 남의 아내와 통간하는 자도 이와 같을 것이라 무릇 그를 만지기만 하는 자도 죄 없게 되지 아니하리라

(6:30, 개역) 도적이 만일 주릴 때에 배를 채우려고 도적질하면 사람이 그를 멸시치는 아니하려니와

(6:31, 개역) 들키면 칠 배를 갚아야 하리니 심지어 자기 집에 있는 것을 다 내어 주게 되리라

(6:32, 개역) 부녀와 간음하는 자는 무지한 자라 이것을 행하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망하게 하며

(6:33, 개역) 상함과 능욕을 받고 부끄러움을 씻을 수 없게 되나니

(6:34, 개역) 그 남편이 투기함으로 분노하여 원수를 갚는 날에 용서하지 아니하고

(6:35, 개역) 아무 벌금도 돌아 보지 아니하며 많은 선물을 줄지라도 듣지 아니하리라

 

 

(30:1, 개역) 이 말씀은 야게의 아들 아굴의 잠언이니 그가 이디엘과 우갈에게 이른 것이니라

(30:2, 개역) 나는 다른 사람에게 비하면 짐승이라 내게는 사람의 총명이 있지 아니하니라

(30:3, 개역) 나는 지혜를 배우지 못하였고 또 거룩하신 자를 아는 지식이 없거니와

(30:4, 개역) 하늘에 올라갔다가 내려온 자가 누구인지, 바람을 그 장중에 모은 자가 누구인지, 물을 옷에 싼 자가 누구인지, 땅의 모든 끝을 정한 자가 누구인지, 그 이름이 무엇인지, 그 아들의 이름이 무엇인지 너는 아느냐

(30:5, 개역) 하나님의 말씀은 다 순전하며 하나님은 그를 의지하는 자의 방패시니라

(30:6, 개역) 너는 그 말씀에 더하지 말라 그가 너를 책망하시겠고 너는 거짓말 하는 자가 될까 두려우니라

(30:7, 개역) 내가 두 가지 일을 주께 구하였사오니 나의 죽기 전에 주시옵소서

(30:8, 개역) 곧 허탄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시옵소서

(30:9, 개역)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적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

(30:10, 개역) 너는 종을 그 상전에게 훼방하지 말라 그가 너를 저주하겠고 너는 죄책을 당할까 두려우니라

(30:11, 개역) 아비를 저주하며 어미를 축복하지 아니하는 무리가 있느니라

(30:12, 개역) 스스로 깨끗한 자로 여기면서 오히려 그 더러운 것을 씻지 아니하는 무리가 있느니라

(30:13, 개역) 눈이 심히 높으며 그 눈꺼풀이 높이 들린 무리가 있느니라

(30:14, 개역) 앞니는 장검 같고 어금니는 군도 같아서 가난한 자를 땅에서 삼키며 궁핍한 자를 사람 중에서 삼키는 무리가 있느니라

(30:15, 개역) 거머리에게는 두 딸이 있어 다고 다고 하느니라 족한 줄을 알지 못하여 족하다 하지 아니하는 것 서넛이 있나니

(30:16, 개역) 곧 음부와 아이 배지 못하는 태와 물로 채울 수 없는 땅과 족하다 하지 아니하는 불이니라

(30:17, 개역) 아비를 조롱하며 어미 순종하기를 싫어하는 자의 눈은 골짜기의 까마귀에게 쪼이고 독수리 새끼에게 먹히리라

(30:18, 개역) 내가 심히 기이히 여기고도 깨닫지 못하는 것 서넛이 있나니

(30:19, 개역) 곧 공중에 날아 다니는 독수리의 자취와 반석 위로 기어 다니는 뱀의 자취와 바다로 지나다니는 배의 자취와 남자가 여자와 함께 한 자취며

(30:20, 개역) 음녀의 자취도 그러하니라 그가 먹고 그 입을 씻음 같이 말하기를 내가 악을 행치 아니하였다 하느니라

(30:21, 개역) 세상을 진동시키며 세상으로 견딜 수 없게 하는 것 서넛이 있나니

(30:22, 개역) 곧 종이 임금된 것과 미련한 자가 배부른 것과

(30:23, 개역) 꺼림을 받는 계집이 시집간 것과 계집 종이 주모를 이은 것이니라

(30:24, 개역) 땅에 작고도 가장 지혜로운 것 넷이 있나니

(30:25, 개역) 곧 힘이 없는 종류로되 먹을 것을 여름에 예비하는 개미와

(30:26, 개역) 약한 종류로되 집을 바위 사이에 짓는 사반과

(30:27, 개역) 임군이 없으되 다 떼를 지어 나아가는 메뚜기와

(30:28, 개역) 손에 잡힐만하여도 왕궁에 있는 도마뱀이니라

(30:29, 개역) 잘 걸으며 위풍 있게 다니는 것 서넛이 있나니

(30:30, 개역) 곧 짐승 중에 가장 강하여 아무 짐승 앞에서도 물러가지 아니하는 사자와

(30:31, 개역) 사냥개와 수염소와 및 당할 수 없는 왕이니라

(30:32, 개역) 만일 네가 미련하여 스스로 높은 체 하였거나 혹 악한 일을 도모하였거든 네 손으로 입을 막으라

(30:33, 개역) 대저 젖을 저으면 뻐터가 되고 코를 비틀면 피가 나는 것 같이 노를 격동하면 다툼이 남이니라

 

 

 

믹담이라는 뜻이 무슨뜻인줄 명확하게 아는 사람이 없더군요.

학자들도 모르는데 제가 무슨 수로 알겠습니까? 만은

다들 추측하는 내용들 가운데서 마음에 드는 내용이 있어서

그 내용을 살펴보면

 

일종의 잠언이라는 뜻입니다. 격언 금언

그런데 단순히 잠언이라고 할게 아니라 좀더 깊숙이 들어가면

믹담은 음악용어인데 시(시편) 자체가 그 속에서 그 시안에서 하나의 사건이 되어서

격게 되는 경험적인

직접 격어서 나오게 되는 금언 맥심 경험담 곧 지혜

수수께끼를 풀게된 원리

지침서 라는 의미 라는 겁니다.

침 곧 병이 걸렸을때에 침을 놓는다 라고 해서

막힌 담을 뚫는다

인생에서 해결할수 없는 문제에 부딧혔을 때 답을 얻는다 라는 그런 의미에서

믹담 히브리 발음을 그대로 따왔다고 하는데

어떤 학자들은 덮다라는 의미를 가진 "아키드어카타무"에서

기원되어 속죄의 시편 이라고 하네요

 

히브리어를 잘 모르지만 카파르 라는 말이 생각났는데 죄를 덮다, 가리우다, 카페트를 깔다라는 언어로 연상하면 될 것 같네요

 

즉 경험담으로써의 사건인데 어떤 사건으로 인해 하나의 인생 난제를 수수께끼를 해결했는데 그것이 바로 죄를 덮어주심이라는 사건이다는 겁니다.

 

누가? 다윗이 격었던 사건이 말입니다.

 

자 그러면 제목을 왜 저렇게 했는지를 알게 될 겁니다.

 

여러 번역본을 보는 가운데 재미있는 부분을 찾았는데

전혀 다른 느낌의 내용이였습니다. 2

물론 전체적인 흐름에는 전혀 영향이 없습니다.

오히려 3절을 가지고 난제라고들 하던데 전체 흐름에는 전혀 영향 없습니다.

 

(16:1, 공동) 하느님, 나를 지켜주소서. 이 몸은 당신께로 피합니다.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다.

(16:2, 공동) 야훼께 아뢰옵니다. "당신은 나의 주님, 당신만이 나의 행복이십니다."

 

(16:2, 킹흠정) 오 내 혼아, 네가 주께 아뢰기를, 주는 나의 주시니이다. 나의 선함이 주께는 미치지 못하오나

 

(16:2, 한글킹) 오 내 혼아, 네가 주께 말씀드리기를 "주는 나의 주시라, 내 선함이 주께는 미치지 못하나

 

(16:2, 현대인) 여호와는 나의 주시므로 주를 떠나서는 내가 아무것도 좋은 것을 가질 수 없다고 주께 말하였습니다.

 

(16:2, 현대어) 여호와께 아룁니다. `주님은 나의 주님, 주님 없이 나의 행복 어디서 찾으오리까?'

 

(16:2, 가톨릭) 주님께 아룁니다. " 당신은 저의 주님. 저의 행복 당신밖에 없습니다."

 

아마 공동번역은 제 프로그램이 잘못 되었지 싶고 공동번역을 따라한 현대인의 성경 현대어성경은 물론 카톨릭 포함에서 주님을 떠나서는 기쁨이 없다 라는 뜻이고

 

말씀보존학회에서 우려먹는 킹제임스 성경만이 진짜 성경이다 라고 우기는,

킹제임스에는 나의 선함으로는 미치지 못한다 라고

 

요 부분이 아주 아주 마음에 들어서 그냥 한번 언급해 봅니다.

 

이 보다 우리가 전혀 접해본적도 없는 번역본이 얼마나 엄청나게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니 우리 쪽 번역이 옳다 라고 할 문제가 아닌 거죠.

 

즉 나의 선함은 피난처가 될 수가 없다는 거죠.

내가 옳은데 말라꼬 외부의 피난처를 따로 찾겠습니까?
내가 옳지 않기 때문에 외부의 피난처를 원하는 겁니다.

성전에 두 사람 중 한 사람인 바리새인은 자신이 옳기 때문에
저 세리와 같지 않음을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라고 합니다.
자신이 옳은 하나님의 백성이다 라는 거지요
하나님이 여기에 동원이 되는 겁니다.
자신의 옳음에 말입니다.

그런데 그건 가짜 하나님입니다. 가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결국 내가 옳지 않다는 것에 그런 사건에만 동원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다른 한 쪽의 성전에 있는 사람은

주여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나를 불쌍히 여겨주소서 라고
자신의 선함이 피난처가 안 되기에
율법 외에 한 의의 선하심에 기대는 겁니다.
참으로 뻔뻔스럽지요?
그런데 이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이란 예수님에게 뻔뻔스럽게 기대는 겁니다.

믿음으로 하지 않는 것은 모두 죄 라고 했습니다.
믿음은 예수님으로 하지 않는 것을 죄라고 합니다.
그러니 자신의 행함을 의지 할 수가 없는 겁니다.
자신의 행함은 결국 자신의 옳다 라는 자신의 선함을 가미시킨 트릭이기 때문입니다.

 

즉 연단 곧 용광로 속에서 순금을 뽑아낼 때 불순물이 다 제거되어 나오는데

나의 선함은 그 불순물에 속하다 보니

용광로 속에 들어갔다 나와보니 다 삭제되고 사라지는 것들이다는 겁니다.
오로지 순금과 같이 나오는 것은 예수님의 피 흘리심 뿐이다는 겁니다.

(욥 23:10, 개역)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
 

인생의 난제 수수께끼를 푸는데는 나의 선함 곧 행함은 아무런 쓸모짝에도 없다 라는 겁니다.

 

결국 제가 위에 잠언서 6장과 30장을 올려 놓았듯이

인생을 수수께끼를 푸는데 지침서로 작용이 되는 잠언 조차도

십자가와 연관이 되지 않으면

한낱 유대인의 탈무드(처세술: 그것도 유대인만의 직접적인 경험담)와 다를바가 없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오늘 시편은 다윗의 경험담 인데

다윗이 이스라엘로부터 공격을 받으면서 누구에게로 피했느냐 라는 문제이다는 겁니다.

단순히 시편을 달달 외운 유대인이 예수님을 죽였듯이
어리석은 십자가의 지혜와 연관이 되지 않으면
우리 또한 역시나 반복할 수 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 반복의 굴레에서 빠져나오게 빼돌리는 것이 미련하게 거리끼는 불편한 십자가라는 걸림돌입니다.
즉 십자가란 유대인이 절대로 경험한 적이 없는 예수님만의 경험입니다. 믿음입니다.

결국 시편을 달달 외워도 다윗의 경험을 누리지 못했다는 겁니다. 오히려 그 반대의 위치에서

저 세리와 같지 않음을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저 저주 받은 다윗과 같지 않음을 하나님께 감사합니다.(다윗을 공격하는 지금 시편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
저 하나님의 저주인 나무에 달린 예수와 같지 않음을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라는 것이
유대인이나 모든 아담에 속한 자들 즉 오늘날과 미래의 모든 인간의 모습이였습니다.
교회 백날 다녀도 소용없다는 겁니다.
 

물론 이스라엘은 누굴 믿고 다윗을 공격한 것인가?

물론 여호와입니다.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라고 저 세리와 같지 않음을 그들만의 거룩 곧 분리성 단절성으로 감사한 겁니다.

 

다윗은 바로 그런 이스라엘백성으로부터의 공격에 다윗은 정작 여호와께 피합니다.

두 여호와가 졸지에 생긴 겁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에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라고 유대인이 외칩니다.
그런데 에수님은 내 영혼을 받아주소서 라고 하나님께 외칩니다.

이 역설!!

도대체 누구의 하나님이 진짜 냐 라는 겁니다.

하나님께 저주 받은 자와 거리를 두고자 하는 유대인이냐?
유대인의 성경해석처럼 나무에 달려 죽는 자 마다 하나님께 저주 받은자로써 못 박히는 예수님이냐?

우리는 이미 결정된 원인 없는 결과를 봐 버린 입장이지만
그 결과로써의 성령이 오기 전 까지는 도저히 알 길이 없다는 겁니다.
오죽 하면 예수님을 따라 다닌 예수님의 제자들도 우리가 사도행전에서 살펴봤듯이
다들 뿔뿔히 흩어져 버렸습니다. 이것이 제대로 된 단절성이요 제대로 된 3일의 간격인 거리두기 입니다.
인간의 거룩지키기는 트릭이다는 겁니다.

즉 각기 제 길로 가는 양이다는 겁니다.

난 절대로 예수님을 버리지 않겠습니다. 정도로 가겠습니다 라고 했던 자를 사탄아 라고
너는 사람의 일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일을 생각치 않는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 간격이 또렷해 지고 분명해지고 명료하고 명확하게 완료되었을때에
원인 없는 결과가 명료한 겁니다.

어딜 감히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눈에 보이는 교회로 사기를 치느냐 말이죠.

쿼바x스 라는 영화를 봤는데 성화론(불교사상,바리새인)자들이 만든 한국교회비판 내용인데
같은 마귀들끼리 서열싸움 때문에 우리도 좀 먹고 살수 있도록 장사 좀 하자! 니 혼자 다 먹지 말고!! 라는
불편 불만의 바리새인이 똥묻은 개를 비판하는 내용이었습니다.

거기에 예수님까지 동원 시켜 가면서 말이죠
그것도 모잘라서 마이클 무어 라는 사기꾼도 동원시키면서 말이죠.
사기꾼을 고발하기 위해 사기꾼을 역시나 동원시키는 식입니다.
정치 싸움에 밀려나니까
자신의 선함이 옳게 하기 위해서
저런 불의함을 도저히 못 보겠다는 겁니다.

남들은 다 예수님을 버려도 나 만큼은 절대로 버리지 않겠다는 겁니다.
반드시 옳은 길을 가겠다는 겁니다.

사탄아 너는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구나?

예수님께 피하고픈 마음이 없다는 겁니다.

? 같은!! 여호와인데?

어! 같은 하나님인데?
 

과연 같냐? 라고 다윗은 반문하는 겁니다.

 

이 다윗의 정신이 다윗의 죽음 뒤에 선지자들에게 나타납니다. 참선지자 입니다.

감사하게도 이스라엘에게도 선지자들이 나타납니다. 거짓선지자 입니다.

복음은 이 둘의 대조 입니다.
같은 하나님이라는 용어를 가지고서 두 진영이 갈라지는 겁니다.

 

이 두 쪽 진영의 선지자가 모두 여호와 라는 같은 이름을 가지고 싸웁니다.

그런데 한 쪽 선지자가 모두 죽고 사라지는 때가 있는데 바로 이스라엘 멸망 때입니다.

 

이스라엘이 멸망한 후에도 살아남는 선지자가 누구를 말하느냐 라는 문제이다는 겁니다.
살아남는 선지자가 누구냐가 아니라, 누구를 말하느냐? 어떤 하나님을 말하느냐 라는 겁니다.

 

우리가 알던 여호와가 전혀 아니였다는 거죠.

 

 

어제 제가 어머니께 이런 말을 했습니다.

예레미야가 또는 이사야가 이스라엘 중에 여호와를 봐 버립니다.

여호와의 영광을 이스라엘 중에, 백성들 속에서 봐 버립니다.

그리고 비로소 자신이 부정한 자임을 직시해버렸습니다.

그전 까지는 난 괜찮은 인간이였다고, 거룩하고 깨끗한 인간이였다고

그것을 보증해 주는 이스라엘이라는 선민의 역사와 공간이 뒷받침해 주는데
아까 성전의 바리새인처럼 성전이 눈에보이는 성전이 뒷받침해 준다고 믿었는데
그것이 졸지에 와르르 무너지고 해체되어버린 겁니다.

즉 과연 여호와의 영광 속에 그것들을 용광로 속에 처럼 집어넣어보자
과연 그것이 깨끗한지 말이죠.

 

화로다 화로다 나는 망하게 되었도다 라고 외치는 겁니다.

 

비로소

이제서야 이들 선지자는 이스라엘의 멸망을 외치고 돌아다닙니다.

완전히 돌변해 버려서
이스라엘을 어떻게 해서든 빨리 망하게 할려고
집요하게 쇠파리(등에)처럼 쏘아 붙여서 수셔대는 겁니다.
즉 죽음을 빨리 재촉하더라 말이죠
선지자의 죽음을 말입니다.

 

이로 인해 그 반작용으로써 거짓선지자가 발생합니다.

절대로 이스라엘은 망할 리가 없다.

절대 안 망한다 라고 말합니다.

어떻게 해서든 이스라엘에게 희망과 소망을 심겨주는 선민이다는 자긍심을 집어넣어줍니다.
곧 거짓선지자 자신의 삶도 보장되듯이. 그런 모습을 보여주어야 백성들을 안심 시켜주니까 말입니다.

절대로 실패란 없다 라는 겁니다.

 

이스라엘 전체 백성들은 이 거짓선지자의 말에 넘어갈 수밖에 없고

참선지자의 말을 반드시 무시 할 수 밖에 없는

 

이 두 양상을 그대로 가지고서

그 간극 사이에서 주님의 일하심이 나타난다는 겁니다.

그 일이 바로 미리 앞서서 선취되는 방식을 보면

오늘 본문이다는 겁니다.

 

이스라엘 조차도

각기 제 길로 갈 수 밖에 없었다는 겁니다.

 

그러나 그렇게 모독, 모욕, 무시를 받으면서까지

이스라엘의 멸망을 외쳤던 예레미야가

막상 이스라엘이 멸망하여서 바벨론으로 포로되어 갈 때는

혼자 지루박을 추면서 기쁘게 춤추고 있다는 겁니다.

 

이야 이스라엘은 이제 구원 받았구나

아니다 이제는 이스라엘이 아니라 예루살렘 딸이지 참

 

이스라엘 백성들은 저 예레미야가 밉기도 하면서

자신들이 거짓선지자의 말을 들었기에 이렇게 포로 잡혀 가는데 있어서

뭐라 댓꾸도 못하는 입장이라

체념하고 포기한 상태에 놓이게 됩니다.

이렇게 낙담할 때에

 

오히려 예레미야는 박수를 치면서 이렇게 이상한 희망을 줍니다.

아니 희망이 없는데 희망을 주니

얼마나 이상한 행동이냐 말이죠.
희망을 거부하는 희망이요
구원을 거부하는 구원이다는 겁니다.
즉 앞의 구원은 인간의 탐욕과 모든 것이 가미된 구원인데
그것을 거부하는 예수님만 구원 받았으면 되었다는 구원이다는 겁니다.
구원이 구원을 치는 겁니다.

 

너희가 출애굽 할때는 이스라엘 아들이였지만

돌아 올때는 예루살렘 딸이 될 것이다 라고 말입니다.

이것을 어머니께 설명하기를 앞의 하나님은 가짜요
뒤의 하나님이 진짜이다는 겁니다.

배신이지요
하나님이 하나님을 배신하는 식입니다.

인간이 볼때는 도저히 풀 수 없는 외설적인 매듭인 거죠.

아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기 싫다고 하나님 스스로가 스스로를 배신 때리면서

나 이제 예루살렘 딸의 하나님이 될래 라고 십자가에 못 박히니

이랬다 저랬다 하는 하나님을 누가 믿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믿을 놈은 다 믿더라 말이죠. 원인 없는 결과로써 말입니다.

 

패역한 딸들이아 너희는 구원 받았다 라는 겁니다.

 

(31:22, 개역) 패역한 딸아 네가 어느 때까지 방황하겠느냐 여호와가 새 일을 세상에 창조하였나니 곧 여자가 남자를 안으리라

 

해품달 달이 태양을 품듯이 곧 여자가 남자를 안는다는 겁니다.

 

(31:1, 개역)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때에 내가 이스라엘 모든 가족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되리라

(31:2, 개역)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칼에서 벗어난 백성이 광야에서 은혜를 얻었나니 곧 내가 이스라엘로 안식을 얻게 하러 갈 때에라

(31:3, 개역) 나 여호와가 옛적에 이스라엘에게 나타나 이르기를 내가 무궁한 사랑으로 너를 사랑하는 고로 인자함으로 너를 인도하였다 하였노라

(31:4, 개역) 처녀 이스라엘아 내가 다시 너를 세우리니 네가 세움을 입을 것이요 네가 다시 소고로 너를 장식하고 즐거운 무리처럼 춤추며 나올 것이며

(31:5, 개역) 네가 다시 사마리아 산들에 포도원을 심되 심는 자가 심고 그 과실을 먹으리라

(31:6, 개역) 에브라임 산 위에서 파수꾼이 외치는 날이 이를 것이라 이르기를 너희는 일어나라 우리가 시온에 올라가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로 나아가자 하리라

(31:7, 개역)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너희는 야곱을 위하여 기뻐 노래하며 만국의 머리 된 자를 위하여 외쳐 전파하며 찬양하며 이르기를 여호와여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구원하소서 하라

(31:8, 개역) 보라 내가 그들을 북편 땅에서 인도하며 땅 끝에서부터 모으리니 그들 중에는 소경과 절뚝발이와 잉태한 여인과 해산하는 여인이 함께 하여 큰 무리를 이루어 이곳으로 돌아오되

(31:9, 개역) 울며 올 것이며 그들이 나의 인도함을 입고 간구할 때에 내가 그들로 넘어지지 아니하고 하숫가의 바른 길로 행하게 하리라 나는 이스라엘의 아비요 에브라임은 나의 장자니라

(31:10, 개역) 열방이여 너희는 나 여호와의 말을 듣고 먼 섬에 전파하여 이르기를 이스라엘을 흩으신 자가 그를 모으시고 목자가 그 양무리에게 행함 같이 그를 지키시리로다

(31:11, 개역) 여호와께서 야곱을 속량하시되 그들보다 강한 자의 손에서 구속하셨으니

(31:12, 개역) 그들이 와서 시온의 높은 곳에서 찬송하며 여호와의 은사 곧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과 어린 양의 떼와 소의 떼에 모일 것이라 그 심령은 물댄 동산 같겠고 다시는 근심이 없으리로다 할지어다

(31:13, 개역) 그 때에 처녀는 춤추며 즐거워하겠고 청년과 노인이 함께 즐거워하리니 내가 그들의 슬픔을 돌이켜 즐겁게 하며 그들을 위로하여 근심한 후에 기쁨을 얻게 할 것임이니라

(31:14, 개역) 내가 기름으로 제사장들의 심령에 흡족케 하며 내 은혜로 내 백성에게 만족케 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31:15, 개역)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라마에서 슬퍼하며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 받기를 거절하는도다

(31:16, 개역)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네 소리를 금하여 울지 말며 네 눈을 금하여 눈물을 흘리지 말라 네 일에 갚음을 받을 것인즉 그들이 그 대적의 땅에서 돌아오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31:17, 개역)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의 최후에 소망이 있을 것이라 너의 자녀가 자기들의 경내로 돌아오리라

(31:18, 개역) 에브라임이 스스로 탄식함을 내가 정녕히 들었노니 이르기를 주께서 나를 징벌하시매 멍에에 익숙지 못한 송아지 같은 내가 징벌을 받았나이다 주는 나의 하나님 여호와시니 나를 이끌어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돌아오겠나이다

(31:19, 개역) 내가 돌이킴을 받은 후에 뉘우쳤고 내가 교훈을 받은 후에 내 볼기를 쳤사오니 이는 어렸을 때의 치욕을 진고로 부끄럽고 욕됨이니이다 하도다

(31:20, 개역) 에브라임은 나의 사랑하는 아들 기뻐하는 자식이 아니냐 내가 그를 책망하여 말할 때마다 깊이 생각하노라 그러므로 그를 위하여 내 마음이 측은한즉 내가 반드시 그를 긍휼히 여기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31:21, 개역) 처녀 이스라엘아 너를 위하여 길표를 세우며 너를 위하여 표목을 만들고 대로 곧 네가 전에 가던 길에 착념하라 돌아오라 네 성읍들로 돌아오라

(31:22, 개역) 패역한 딸아 네가 어느 때까지 방황하겠느냐 여호와가 새 일을 세상에 창조하였나니 곧 여자가 남자를 안으리라

(31:23, 개역) 나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말하노라 내가 그 사로잡힌 자를 돌아오게 할 때에 그들이 유다 땅과 그 성읍들에서 다시 이 말을 쓰리니 곧 의로운 처소여, 거룩한 산이여, 여호와께서 네게 복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 것이며

(31:24, 개역) 유다와 그 모든 성읍의 농부와 양떼를 인도하는 자가 거기 함께 거하리니

(31:25, 개역) 이는 내가 그 피곤한 심령을 만족케 하며 무릇 슬픈 심령을 상쾌케 하였음이니라 하시기로

(31:26, 개역) 내가 깨어보니 내 잠이 달았더라

(31:27, 개역)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내가 사람의 씨와 짐승의 씨를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뿌릴 날이 이르리니

(31:28, 개역) 내가 경성하여 그들을 뽑으며 훼파하며 전복하며 멸하며 곤란케 하던 것 같이 경성하여 그들을 세우며 심으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31:29, 개역) 그 때에 그들이 다시는 이르기를 아비가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아들들의 이가 시다 하지 아니하겠고

(31:30, 개역) 신 포도를 먹는 자마다 그 이가 심 같이 각기 자기 죄악으로만 죽으리라

(31:31, 개역)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

(31:32, 개역)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세운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파하였음이니라

(31:33, 개역)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31:34, 개역)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니라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31:35, 개역) 나 여호와는 해를 낮의 빛으로 주었고 달과 별들을 밤의 빛으로 규정하였고 바다를 격동시켜 그 파도로 소리치게 하나니 내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니라 내가 말하노라

(31:36, 개역) 이 규정이 내 앞에서 폐할진대 이스라엘 자손도 내 앞에서 폐함을 입어 영영히 나라가 되지 못하리라

(31:37, 개역)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위로 하늘을 측량할 수 있으며 아래로 땅의 기초를 탐지할 수 있다면 내가 이스라엘 자손의 행한 모든 일을 인하여 그들을 다 버리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31:38, 개역)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이 성을 하나넬 망대에서부터 모퉁이 문까지 여호와를 위하여 건축할 것이라

(31:39, 개역) 측량줄이 곧게 가렙 산에 이르고 고아 방면으로 돌아

(31:40, 개역) 시체와 재의 골짜기와 기드론 시내에 이르는 데까지와 동편 말문 모퉁이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밭에 이르리니 다 여호와의 성지가 되고 영영히 다시는 뽑히거나 전복되지 아니하리라

 

 

남자는 마치 뱀과 같이 뱀의 후손인 듯 여자를 정죄만 할 줄 알았지

여자의 부정성을 담당 할 줄 모른다는 겁니다.

 

그런데 여자는 그런 남자가 아닌 자신의 부정성을 새남자를 통해서 새롭게 지음을 받게 되는 겁니다.

 

그것이 야곱의 우물물도 아닌 이스라엘의 예루살렘도 아닌

 

(4:12, 개역)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었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먹었으니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

(4:13,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4:14, 개역)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4:15, 개역) 여자가 가로되 주여 이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4:16, 개역) 가라사대 가서 네 남편을 불러오라

(4:17, 개역) 여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4:18, 개역) 네가 남편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4:19, 개역) 여자가 가로되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4:20, 개역)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4:21, 개역)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4:22, 개역)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

(4:23, 개역)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4:24, 개역)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4:25, 개역) 여자가 가로되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고하시리이다

(4:26, 개역)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그로라 하시니라

(4:27, 개역) 이 때에 제자들이 돌아와서 예수께서 여자와 말씀하시는 것을 이상히 여겼으나 무엇을 구하시나이까 어찌하여 저와 말씀하시나이까 묻는 이가 없더라

(4:28, 개역)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에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4:29, 개역)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4:30, 개역) 저희가 동네에서 나와 예수께로 오더라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는 영의 제사를 드린다고 합니다.

 

영의 제사가 될려면 육의 제사 곧 눈에 보이는 것들의 제사는 종결되는 방식이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구약을 종결 폐기 시키는 신약으로써 구약의 배신이요 해체인 겁니다.
그런데 율법이 폐기 되느냐? 오히려 더 강화되어서 완성이 되는 겁니다.

(마 5:17, 개역)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

(롬 3:28, 개역)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롬 3:29, 개역) 『하나님은 홀로 유대인의 하나님뿐이시뇨 또 이방인의 하나님은 아니시뇨 진실로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느니라』

(롬 3:30, 개역) 『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또는 무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

(롬 3:31, 개역)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율법의 완성은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롬 13:8, 개역)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그렇다면 그 실체인 예수님이 오셔야 완성이다는 거지요.
사랑이 오셔야 하고, 믿음이 오셔야 한다는 겁니다. 인간의 믿음은 모호한 것이기에 사랑이 아닙니다.

 

주인공이 없이 계속 제사드리는 시대는 이제 끝났다는 겁니다.

 

그 완료가 부정성 곧 여자의 부정성을 다 해결해줄 새남편이다는 겁니다.

 

이 새남편이 하는 일이 바로 십자가 완성입니다.

모든 부정함을 제거 하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주의 팔이 오른편을 든다는 겁니다.

오른편을 들지 않으면 우리는 저주입니다.

 

이미 저주 였지만 최종적인 오른편의 변호가 없다면 우리는 더 더 더 저주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패역한 딸에게 부어지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불합리, 부조리, 스캔들이다는 겁니다.

 

제가 오늘 본문 시편 바로 밑에 잠언서를 올렸는데

 

(30:21, 개역) 세상을 진동시키며 세상으로 견딜 수 없게 하는 것 서넛이 있나니

(30:22, 개역) 곧 종이 임금된 것과 미련한 자가 배부른 것과

(30:23, 개역) 꺼림을 받는 계집이 시집간 것과 계집 종이 주모를 이은 것이니라

 

 

세상이 팔짝 뛰고 화를 내며 도저히 견디지 못하는 것이 있는데

즉 세상의 이치(규례, 법) 또는 악마의 세상이 말입니다.
바리새인처럼 율법을 손에 쥔 자들이 도저히 견디지 못해 미치고 팔짝 뛰어 적개심을 품도록 하는 일이 있는데,

 

그것은 곧 섬겨야 하는 종이, 섬김을 받는 임금이 되는 것

즉 이것이 십자가에서 이루어졌다는 겁니다. 이것이 율법의 완성이다는 겁니다.

결국 반드시 율법을 쥔 자들이 상대적으로 배치 되어야 한다는 거죠.

 

노예가 주가 되는 것은 바로 너희가 죽인 예수가 하나님이 3일 만에 살리셔서 주가 되게 하셨다 라는 겁니다.
미리 앞서 보여준 사건이 바로 요셉 사건입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의 약속 성취이다는 겁니다.
이 원리를 무시하는 애굽을 또 탁란 삼아서 또 초과잉적으로 확장 시키는 겁니다.

 

이것이 마귀가 미치고 환장하는 소리, 곧 나팔소리 뿌뿌뿌 희년 복음이다는 겁니다. 십자가 사건이지요.


자신들의 노예가 예수님의 자녀가 되는 꼴을 못 보겠다는 겁니다.
출애굽을 미리 맛배기로 보여준 것도 실상은 십자가 사건이다는 겁니다.
 

또 희년의 대상자들인 흑암의 백성들(고아), 사망에 폭삭 주저 앉은자(과부), 개같은 이방인(나그네)들이

졸지에 팔복의 대상이 되었다는 겁니다.

(마 4:11, 개역) 『이에 마귀는 예수를 떠나고 천사들이 나아와서 수종드니라』

(마 4:12, 개역) 『예수께서 요한의 잡힘을 들으시고 갈릴리로 물러 가셨다가』

(마 4:13, 개역) 『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에 가서 사시니』

(마 4:14, 개역)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마 4:15, 개역)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 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마 4:16, 개역)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취었도다 하였느니라』

(마 4:17, 개역)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가라사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하시더라』

(마 5:1, 개역)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마 5:2, 개역) 『입을 열어 가르쳐 가라사대』
(마 5:3, 개역)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마 5:4, 개역)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마 5:5, 개역)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마 5:6, 개역)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마 5:7, 개역)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 5:8, 개역)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마 5:9, 개역)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마 5:10, 개역)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마 5:11, 개역)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마 5:12, 개역)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이 원인 없는 결과로써의 복이 주어지는 것을 견디지 못하는 겁니다.
복음은 결국 마귀 보란 듯이 펼쳐지는 겁니다.

 

(30:22, 개역) ... 미련한 자가 배부른 것과

 

(30:23, 개역) 꺼림을 받는 계집이 시집간 것과 계집 종이 주모를 이은 것이니라

 

여자의 생산력이 없게 되는 것은 저주 상태인 겁니다. 다들 미워할 수 밖에 없습니다.

바로 그렇게 저주받은 여자가 여자 구실도 못하는데 시집을 가게 되고

천하고 비천한 여자가 안방주인이 되는 마나님 소리 듣는다는 것을

 

세상은 견디지 못한다고 하는데

바로 그것을 이루고자 하는 것이 십자가이다는 겁니다.


지옥간 부자와 천국간 거지 나사로의 비유도 그런 의미 입니다.
너희는 불가능하지? 그러나 하나님은 하신다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보내신 자가 이 비유를 알려주시는 겁니다.
 

그 십자가의 완성을 누리는 것이

마치 여자가 남자를 안은것처럼

당신이 나의 죄악을 책임져 주실 분이시군요 라는 겁니다.

 

왜 앞에서 안지 않고 뒤에서 안는가?

 

이것은 위치상의 문제가 아니라 

자세와 연관된 바로 품었다는 표현입니다.

즉 저렇게 세상이 요동하고 미친 듯이 싫어하는 일이

 

바로 마리아가 아기 예수님을 품은 사건으로써 표현한 겁니다.

 

지난 시간에도 말했듯이

남자를 알지 못하는 마리아가

배가 불러 오니까

남정네들은 돌삐를 들고 달려드는 그런 율법을 쥔 모습이고

약혼자 요셉 조차도 종용히 조심스럽게 조용히 처리하고자 관계를 끊고자 했다는 겁니다.


즉 남자들 세계의 시선은 이렇게 심각했던 겁니다.
거기에 덩달아 여자들까지 불안해져서 심각한 겁니다.

그 심각성을 제거하는 방식이 남자는 여자를 돌삐로 쳐 죽이는 방식입니다. 십자가 입니다. 하나님의 저주 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힌 여자를 율법(의문의 증서)이 아닌 율법의 완성인 십자가 사랑으로 완성하시는 겁니다.

저들에게는 저주 이지만 예수님에게는 사랑이였다는 겁니다.

남정네들의 사고방식에서는 걸림돌 제거 방식이지만
여자의 후손인 예수님은 오히려 그 걸림돌을 제시하시는 방식입니다.

너희가 죽인 예수를 하나님이 3일만에 살려내셔서 주가 되게 하셨다 라는 겁니다.

이렇게 맞물리는 겁니다. 영과 육은 서로 원수 지간으로써 말입니다.
 

누가 이 여자를 책임 져 줄수가 있겠습니까?

책임 졌다가는 율법에 의해 정죄 받아야 하는데


누워서 침 뱉기를 누가 자발적으로 하겠냐 말이죠.
더러운 죄악 속에 뛰어들자는 없습니다.
 

이 부정성을 남자는 감당할 수가 없는 겁니다.

깝깝하죠. 답답합니다. 지도 못 푸는 주제에 율법을 쥐고 있으니 의문만 더더욱 커지는 겁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구나 누가 나를 이 사망의 몸에서 건겨내랴

화로다 화로다 나는 망하게 되었구나


라고 회개 해야 할 판국인 겁니다. 

그런데 여자가 품은 이 남자 아기가 이 문제를 해결한다는 겁니다.

율법의 완성인 바로 사랑을 말입니다.

 

수수께끼의 완성인 사랑 말입니다.

외설적인 매듭을 푸는 겁니다.

막힌 담을 허는 겁니다.



(엡 2:12, 개역)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엡 2:13, 개역)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엡 2:14, 개역)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엡 2:15, 개역)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엡 2:16, 개역)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엡 2:17, 개역)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엡 2:18, 개역)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그 사랑이 부정성에 뛰어드는 겁니다.

 

나의 죄악에 예수님이 뛰어드심입니다.

대신 죄 값을 치르고자 말입니다.

 

누가 나의 죄악을 위해서 오른편에 서서 변호 해 주겠습니까?
나의 원수 됨을 끊을 자가 누가 있겠습니까?

(사 53:1, 개역)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

(사 53:2, 개역)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사 53:3, 개역)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사 53:4, 개역)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사 53:5, 개역)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사 53:6, 개역)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뉘가 알았으리요?


(롬 11:34, 개역)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뇨』

(롬 11:35, 개역)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

(롬 11:36, 개역)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모든 인간들은 다 치우쳐져서 다들 왼편에서 고소하고 송사하는 마귀의 위치인 왼편에 서 있는데 말입니다.

 

다윗은 자신이 왕의 자리가 아닌

 

세상이 견디지 못하는 


개 만도 못한 노예의 자리

고아의 자리

이방인의 자리에서

 

이 오른편의 여호와를 봐 버렸습니다.

 

그리고 이 다윗을 정죄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의 왼편에서 정죄하고 공격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저들이 견디지 못하는 주의 오른팔이 나타났다고 외치면서

인생의 수수께끼를 풀어버린 행복을 외치고 있는 겁니다.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죄 용서 받았다는 그 행복에 대해서 말입니다.


(롬 4:1, 개역)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된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롬 4:2, 개역)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롬 4:3, 개역)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 바 되었느니라』

(롬 4:4, 개역)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롬 4:5, 개역)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롬 4:6, 개역)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 바』

(롬 4:7, 개역)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롬 4:8, 개역)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이것이 희년이 너희에게 임했다는 겁니다.

 

이 이사야의 예언이 너희 귀에 응했다 라는 겁니다.

 

너희가 누구입니까?

 

바로 의인이 아닌 죄인에게만 말입니다.

 

많은 이스라엘 사람을 비켜가고

또 이방인들을 비켜가고

또 이방인들 많은 과부를 비켜가고

 

오직 단 한 명의 이방인 과부인 한 사람에게만

 

많은 이스라엘사람 비켜가고

또 이방인들 비켜가고

또 이방인들 중에 많은 문둥병자들 다 비켜가고

오직 단 한명의 이방인 문둥병자 한 사람에게만

 

찾아가는 희년이다는 겁니다.

99마리 양을 버리고 잃어버린 한 마리 양에게만 찾아가는 
보내심을 받은 희년 복음 곧 십자가 말입니다.

 

누가 봐도 병자요 실패자요 저주 받은자요 인생 쫑난 자들입니다.

 

그들에게만 복음이 기쁜소식이다는 겁니다.

 

다윗은 왕의 위치가 아닌

쫑난 실패한 왕으로써 이 오른편을 누리는 겁니다.

 

맞습니다. 이스라엘 전부가 의인의 위치에서

다윗을 탕자 취급하면서 정죄하기 바쁩니다.

 

너는 저주 받은자야


다윗 마귀야 꼴 좋구나 너가 사울왕을 살인하더니 꼴 좋구나 너가 너 자식 압살롬에게 쫏겨나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구나

아이고 고소해라 

하나님이 살아계셔서 너를 벌하심이 마땅하다 하나님이 살아계신 증거이다 이놈 마귀 다윗아!!!

하나님으로부터 저주 받았기에 너가 그런 일을 당하는 거야

너는 마귀야 우리가 여호와께 물어보니까 넌 마귀자식이야 라고

 

바로 저들이 정죄하는 그 자리에서 주의 오른팔이 짠 하고 나타남으로써

 

오른편의 기능인 바로 세상이 견디지 못하고 요동하는 지혜

바로 십자가의 지혜인

 

세리와 강도와 죄인이 먼저 천국에 간다 라는 어리석은 지혜인 십자가의 용서를 완성하시는 것이다 라는 겁니다.

 

다윗이 새남편이 나타났다고 물동이 던지면서 안기쁘고 배기냐 말이죠?

동네 사람들 동네 사람들 나의 죄를 용서하시는 예수님이 나타났어요 라고 안 외치고 배기냐 말이죠.

 

다윗은 이렇게 예수님을 외쳤습니다.

 

그러나 다윗의 시편을 따라하는 자들은 자기가 옳고

자신은 십의 이조를 드리며 저 세리와 같지 않다는 이유로

 

예수님을 시편을 외웠기 때문에 죽였다는 겁니다.

차라리 시편을 몰랐다면 ...

 

시편 대로 행하고 지켰고 시편대로 살려고 했기 때문에

예수님을 죽인 겁니다.

 

우리는 이 역설에서 못 벗어납니다.

다윗도 뭐 못 벗어난 판국인데요 뭘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에게는 오른팔이 나타났고

그는 멸망의 자리에서 여호와의 구원을 보았습니다.

 

이것이 다윗을 버려도 백부당 만부당 하신 주님이신데

다윗을 새롭게 딸로 만들어서

시온에서 곧 예수님으로 새롭게 창조하심으로써

 

예수 안에는 결코 정죄함이 없도록 하신

주님의 끝까지 섬기심이다는 겁니다.

 

이 예수님의 고난의 종 되심이

나의 주로써

 

주의 주 되심을 우리는 아니 외치고는 못 배기는 겁니다.

 

할렐루야!!!!

 

나를 실패케 만드시는 여호와를 찬양하라

나를 쫄딱 망하게 멸망케 하시는 예수님을 찬양하라

나를 지옥 보내시는 예수님으로 인해 기뻐하라

그런 나를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않으시고 내어주신 여호와를 찬양하라

 

(롬 7:24, 개역)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롬 7:25, 개역)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롬 8:1, 개역)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롬 8:2, 개역)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롬 8:3, 개역)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롬 8:4, 개역)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롬 8:5, 개역)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롬 8:6, 개역)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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