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른손으로 구원하시는 주의 기이한 인자를 나타내소서 (시편 17)

 

 

(17:1, 개역) [다윗의 기도] 여호와여 정직함을 들으소서 나의 부르짖음에 주의하소서 거짓되지 않은 입술에서 나오는 내 기도에 귀를 기울이소서

(17:2, 개역) 나의 판단을 주 앞에서 내시며 주의 눈은 공평함을 살피소서

(17:3, 개역) 주께서 내 마음을 시험하시고 밤에 나를 권고하시며 나를 감찰하셨으나 흠을 찾지 못하셨으니 내가 결심하고 입으로 범죄치 아니하리이다

(17:4, 개역) 사람의 행사로 논하면 나는 주의 입술의 말씀을 좇아 스스로 삼가서 강포한 자의 길에 행치 아니하였사오며

(17:5, 개역) 나의 걸음이 주의 길을 굳게 지키고 실족지 아니하였나이다

(17:6, 개역) 하나님이여 내게 응답하시겠는고로 내가 불렀사오니 귀를 기울여 내 말을 들으소서

(17:7, 개역) 주께 피하는 자를 그 일어나 치는 자에게서 오른손으로 구원하시는 주여 주의 기이한 인자를 나타내소서

(17:8, 개역) 나를 눈동자 같이 지키시고 주의 날개 그늘 아래 감추사

(17:9, 개역) 나를 압제하는 악인과 나를 에워싼 극한 원수에게서 벗어나게 하소서

(17:10, 개역) 저희가 자기 기름에 잠겼으며 그 입으로 교만히 말하나이다

(17:11, 개역) 이제 우리의 걸어가는 것을 저희가 에워싸며 주목하고 땅에 넘어뜨리려 하나이다

(17:12, 개역) 저는 그 움킨 것을 찢으려 하는 사자 같으며 은밀한 곳에 엎드린 젊은 사자 같으니이다

(17:13, 개역) 여호와여 일어나 저를 대항하여 넘어뜨리시고 주의 칼로 악인에게서 나의 영혼을 구원하소서

(17:14, 개역) 여호와여 금생에서 저희 분깃을 받은 세상 사람에게서 나를 주의 손으로 구하소서 그는 주의 재물로 배를 채우심을 입고 자녀로 만족하고 그 남은 산업을 그 어린 아이들에게 유전하는 자니이다

(17:15, 개역) 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보리니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

 

 

 

예수님이 옳지 않다 라는 표현을 지지난 시간에 사용했습니다.

즉 이 말은 상대적으로 [나는 옳다] 라는 겁니다.

그런 나의 옮음에 대비해서 주님은 옳지 않는 방식으로만 일하신다는 겁니다.

그것이 불편함, 거리끼는, 걸림돌이라는 무례한 거룩한 복음 곧 숭고한 복음입니다.

 

이 숭고한 복음은 오로지 한 사람에게만 보냄을 받았습니다.

이것 조차도 얼마나 거리끼는 불편함입니까?

 

99마리 양에게 보냄을 받지 않고 오직 한 마리 잃어버린 양에게만 보냄을 받은 복음입니다.

 

이방인 많은 과부 중에 한 사람 수리아 여인에게만 엘리야는 보냄을 받았고

많은 이스라엘은 애초부터 재껴놓고

요즘으로 치면 교회 다니는 사람을 처음부 재껴놓고

또 많은 이방인 문둥병자 다 재껴놓고 오직 문둥병자 나아만 장군에게만

복음이 보냄을 받았다는 겁니다.

 

이것을 마귀들 보란 듯이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선지자의 글을 읽어서

이 말씀이 오늘날 응했다 라고

희년을 선포했다는 것은

 

즉 기쁜은혜의 해를 선포했다는 것은

상대적으로 저들에게는 불편함이 선포되었다는 겁니다.

 

선포된 시점부터 계속해서 그 불편한 숭고함 때문에

이들의 행사가 계속해서 맞물려서

저들에게 걸림돌로, 실족함으로 나타난다는 겁니다.

 

오늘 시편 17편도 그러합니다.

이스라엘 전체 백성에게 있어서 다윗은 졸지에 가시와 같은 불편한 존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스라엘 전체가 이 다윗 하나 죽일려고 달려드는데 있어서

다윗은 얍삽하게 여호와께 피신해 버리는 겁니다.

 

주의 오른편이 있지롱 이라고 놀리듯이 샥 피해 버리는 겁니다.

 

이스라엘 전체는 그야말로 더더욱 얄미워서 이빨을 갑니다.

 

이 장면을 제가 어머니께 자주 설명하는 장면묘사로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율법을 쥔 머슴아들이 배가 불러온 마리아를 돌삐로 쳐 죽일려고 달려드는 겁니다.

이 얼마나 살벌하기 짝이 없는 심각한 상황입니까?

마리아를 뒤 쫏아가면서 돌삐로 쳐 죽일려고 말이죠.

 

딸랑 한명의 연약한 여자를 수많은 머슴아들이 때거리로 달려들어서 쫏아가는 장면 말입니다.

 

그런데 전혀 원인 없는 결과로써 그 다음 장면은 정반대입니다.

 

딸랑 한 명의 여자가 수 많은 머슴아를 뒤 쫏아가는 장면

 

흔히 슬래스틱 코메디에서 나오는 찰리 채플린 영화에서 자주 나오는 장면이고

이것을 심형래의 변방의 북소리에서 자주 나오는 장면으로써

심각했던 상황을 전복시키는 웃음을 보여주는 내용으로써 제가 어머니께 설명하니까

 

웃스워 죽겠다고 정신없이 웃으시더군요

이것이 지독스럽게 설명을 잘 못하는 제가

우연히 잘 먹혀 들다 보니

 

이 이야기만 하면 자즈라지게 웃으십니다.

그러니 설명하기가 참 쉬어지던데

오늘 장면도 마찬가지입니다.

 

다윗 하나를 죽일려고 이스라엘 전체가 다 달려듭니다.

얼마나 심각 합니까?

그런데 다윗은 전혀 요동하지 않는 곳에 얍삽하게 숨어버립니다.

곧 피난처입니다.

 

아니 피난처게 가더니만

다윗의 태도는 완전히 돌변하여서

이제 거꾸로 수천만명을 다윗 혼자 쫏아가고 있고

저들은 도망치기 바쁜 모습이다는 겁니다.

 

결국 다윗이 죽고 난 뒤에

다윗의 정신을 이어 받은 선지자가

딸랑 혼자서 이스라엘 전체를 멸망으로 몰고 갑니다.

 

그 선지자 딸랑 한 명을 죽여버리면

그것은 유도 아니지요 딸랑 한 명 죽이는데 뭐가 어렵겠냐 말이죠.

그래서 죽여 버리면

또 한 명을 주님이 또 세우고

또 죽여 버리면 또 세우고

 

누가 더 센가 하는 식으로 씨름이 벌어지는 겁니다.

 

그래서 결국 선지자들 말대로 이스라엘이 멸망하여서 포로로 잡혀 가니까

비로소 선지자는 춤을 추면서 여호와의 구원이 시작 되었다고

춤을 추는 겁니다.

 

너희가 애굽에서 아들로써 불려 와서

이제는 예루살렘 딸로써 바벨론 포로되었다가 되돌아 오게 될 테니 표시를 해 둬라 라는 겁니다.

 

즉 구원은 여호와께 있다는 겁니다.

인간은 이 구원에 전혀 보탬이 될 수 없다는 겁니다.

믿어도 안되고, 행해도 안되고, 충성 봉사 한다고

구원에 보탬이 될 수 없다 라는 겁니다.

 

이 발상이, 구원에 보탬이 되어 보겠다는 발상이 바로 사람의 일이고

남을 7번 용서 하겠다는

남들은 예수님을 버려도 나는 절대로 예수님을 버리지 않겠다는

사람의 일 곧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사람의 일을 생각한다 라는 의미이고

 

하나님의 일은 바로 그런 인간 구원의 초점에서

간극 벌리는 770번의 용서를 주님이 홀로 하시는 겁니다.

구원은 여호와께 속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일

곧 하나님이 보내신 자를 믿는 겁니다.

예수님만 구원 받으면 됐다 라는 겁니다.

 

이것으로 사도들은 너희가 죽인 예수를 하나님이 3일이라는 간극을 두고 살려내셔서

너희의 주가 되게 하셨다 라는 겁니다.

 

나사로가 죽을 듯 말듯한 애매한 상황에서 빨리 오라는 소식을 받고서도

예수님은 일부러 아직 덜 죽었다는 식으로

일부러 죽기까지 기다리시고자

3일을 일부러 지체하면서 골프나 치고 있었던 겁니다.

 

골프 카니 생각하는게 골프 치는게 죄라고 하던데 참 기가막히더라 말이죠.

골프 칠 줄 모르면 죄 지을 줄 모른다고 ㅋㅋㅋㅋㅋ

 

죄라는 것은 법에 의해서 마땅히 사형이 되는 입장이 되어야 죄가 성립이 되는 겁니다.

사형이 문제가 아니라 법에 의한 것이다는 거죠.

골프 치냐 안치냐가 법에 의한 것이 아니다는 거죠.

 

법에 의하면 모든 인간은 다 사형에 해당되는 사항을 예수님은 완성했습니다.

곧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이라는 단서에 의해서 저주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뭘 해도 다 죄가 된다는 거죠.

자기가 할 줄 아는 것으로 죄를 규정하고 있으니 원
할 줄 모르는 것 조차도 다 죄 일 뿐입니다.

얼마나 사기를 쳤으면 그것이 먹혀들줄 알고 ㅋㅋㅋㅋ


그래서 간극을 일부러 벌려서

죄에 대해서 죽고

즉 꼭지점을 확실히 찍고

 

그 다음 의에 대해서 살고

즉 꼭지점을 확실히 찍고

 

그 중간의 간극인

그 두 꼭지점 사이의 그 빈공터에서

 

주님의 사건

곧 창조

곧 원인 없는 결과가 나타난다는 겁니다.

 

이것이 기이하다 라는 겁니다.

 

그 일의 전담부서가 있는데 바로

인자의 나타나심이다는 겁니다.

 

인자야 인자야 라고 사람인줄 알았는데

사람이 아니라

 

너희가 그 인자를 쳐다봐야할 입장이다는 겁니다.

즉 인자란

저는 신학 모릅니다.

그냥 이 내용에서 발견한 것인데

인자란

그것도 기이한 인자란

장대 높이 달림으로써

두 패로 갈라서

한 쪽은 나 같은 놈은 인간도 아닙니다.

보세요 저는 불뱀에게 물려서 죽게 된 자입니다.

이 죽게 된 자는 여호와께서 처음 창조한 인간의 모습이 아닙니다 라는

고백을 하게 하는 인자로써 한 쪽을 가르고

 

또 다른 한 쪽은

아니 불뱀에게 물려 죽게 되었는데

약을 주고, 기적을 주고, 병원 갈수 있도록 돈을 주고, 병원을 주고, 의사를 주고,

고침을 받을 수 있도록 해 줘야지

 

아니 인자를 쳐다만 봐도 낫게 된다고 하니 그게 말이 되냐 라는

 

왜 인자를 나타내었는지를 그 이유를 전혀 모르도록 가로막힌 상태로 막으시는

인자로써의 한 쪽 패거리로 갈라 놓는

 

바로 그런 인자 라는 겁니다.

 

좀 설명이 길죠

 

인자가 누구냐??

 

두 패로 갈라 놓는 자

어떻게?

 

한 쪽은 나는 인간 아닙니다. 가짜 인간입니다.

! 당신이 참 인간이군요. 라고 고백케 만드는 인자라는 거죠.

 

그렇다고 참 인간이다는 뜻은 아니고요 자신이 가짜이다는 뜻에서 그렇게 표현한 것이고

참된 인간이다 라는 의미 보다

? 참된 인간은 선악과 따먹은 뒤라서 인간은 몰라요

그러니 막연한 느낌일 뿐이고 참인간을 본적도 없는데 어떻게 그렇게 표현하겠습니까?만은

달리 표현할 길이 없어서 그렇고

참인간이라는 의미에서 인자 라기 보다

 

저는 오늘 본문에서 나오듯이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수 있는 하나님의 형상으로써의 인자 라는 거죠.

하나님 형상 카니까 또 어려워서 그냥 넘어가죠

저는 이 표현을 설명하는 자들을 많이 봤습니다만은 다들 엉터리라서(하나님형상론)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얼굴과 얼굴을 맛대고 보아도 안타죽을 수 있는 얼굴을 지닌 자는 인자 뿐이다는 거죠.

 

과연 안타죽을수 있는 인간 있으면 나와보라 말이죠.

그런 의미에서 인간은 없죠. 그런 인간이 없으니까?

 

 

(17:15, 개역) 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보리니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

 

그래서 인자 그것도 그냥 인자가 아닌 기이한 인자는

 

우리를 죽이는데 일관하고 있고

다시 의로 살리는 일을 한다는 겁니다.

 

불뱀을 누가 풀었느냐?

결국 인자인 거죠.

 

결국 모든 인간은 다 죽은 겁니다. 이미 죽은 겁니다.

 

? 뱀을 푸냐 말이죠? 왜 마귀를 푸냐 말이죠!!!

 

(벧전 2:24, 개역)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벧전 2:25, 개역)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


죄에 대해서 죽고, 의에 대해서 다시 살리고자

 

스스로 친히 나무에 달린 분이 바로 인자 라는 겁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제물입니다. 화목제물

 

(8:3, 개역)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8:32, 개역)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3:25, 개역)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요일 2:2, 개역)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1:22, 개역)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케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

 

(5:10, 개역)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2:16, 개역)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요일 4:10, 개역)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원하는 구절이 안나와서 계속 찾던 중에 그래도 연관 되어 올렸습니다.

 

즉 인자는 너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를 분명히 찍어주는 분으로써 인자인데

 

그럼 그런 자를 저주 하면 되는데 우리 죄를 위해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냈는데

 

그 하나님이 보내신 자가 곧 하나님의 일을 하시는 분이 바로 인자 라는

친히 곧 스스로 나무에 달리는 분이시다는 겁니다.

 

?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리고자 말입니다.

 

그래서 죄에 대하여 죽어야 하니까

일부러 3일을 지체해서 안 가는 겁니다.

드디어 3일이 지나서

그 간극이 분명히 해 짐으로써 분기점을 찍고서

비로서 가는 겁니다.

 

당연히 늦게 왔으니 오빠 나사로는 죽어서 이미 장사를 치러 무덤에 묻어버렸지요

 

이제 와서 뭐하냐? 말이죠.

 

불가능하죠.

 

애곡으로 온 동네가 울음 바다입니다.

 

치 치 치 비웃으면서 동네 사람들은 아니 나사로를 사랑한다메?

그런데 일부러 늦게 왔어? 라고 소문이 다 퍼지고

비아냥 거리고 비웃는 겁니다.

 

바로 이런 모습을 제대로 규정짖도록 분기점을 찍고서

 

예수님은 더 울어버리는 겁니다. 예수님 쪽에서의 분기점을 찍는 거죠.

 

분기점이라는 생소한 표현을 서서 죄송한데 저도 잘 모르는데 갑자기 생각나서 적었는데

 

사건이 발생해서 갈리지는 시점이나, 바꿔지는 지점 또는 시기 라는 의미입니다.

 

뭔가 변화되는 그 시점이 되는 것이 분기점이라는 거죠.

 

왜 예수님이 더 우시느냐?

내가 부활이다 라고 하니까

 

네 믿지요 믿지요 저는 부활교리 믿습니다. 교회에서 배웠습니다.

부활 믿고 말고요 그러든 말든 빨리 오빠 살려내라 왜 늦게 왔니 라고 우는 겁니다.

다들 그런 식으로 눈물로 시위를 하는 겁니다.

 

그러니 예수님은 더 초과잉적으로 예루살렘을 보시고 우시는 겁니다.

왜 내가 부활임을 믿지 않느냐 라고 말이죠.

 

아니 부활 믿는다니깐요

 

아니 너희들은 안 믿는다니깐

 

어허 믿는다니깐

 

어허 안 믿는다니깐

 

제가 이 표현을 어머니께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예수님을 안 믿는 것이 어렵습니까?

예수님을 믿는 것이 어렵습니까?

 

하도 제가 반복을 하다 보니

어머니는 더 헷갈려 하셨고

그러다가 저도 헷갈려서 서로 웃기도 했는데

 

오죽하면 저런 질문을 했냐 하면

예수님을 안 믿는 것이 어렵다는 겁니다.

 

즉 하도 다들 너무 너무 예수님을 잘 믿기 때문에

 

그들 속에서 빼내시는 작업을 예수님이 하시는 겁니다.

 

제발 제발 예수 믿지 말라고

 

지금 시편에서 지난 시간에 15편이였던가요?

하나님이 저들은 없다고 다윗은 일방적으로 선언해 버립니다.

 

마치 그 전에는 저들이 다윗에게 공격했던 내용이였지요

다윗아 하나님께 빌어보렴 과연 응답이 있는지?

너에게는 하나님이 응답하지 않아

절대 절대 하나님은 너의 부르짖음에 듣지도 않을거야 라고

저들이 공격했는데

 

다윗은 그들로부터 쫏겨다니고 피하면서도 할 말은 또 다 합니다.

너희들은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구나 라고 말이죠.

 

아니 저들은 교회에 다니고 있는데 말입니다.

 

지금 세상 사람들을 보고 다윗이 말하는게 아닙니다.

이스라엘 보고 그러고 있습니다.

 

로마서였던가요?

사도바울이 저희는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한다고

일방적으로 선언해 버리는 겁니다.

 

세상사람들을 향해서요?

천만의 말씀

 

유대인을 포함한 겁니다.

 

?

자신도 그 속에 있어 봤거든요

 

하나님께 대한 열심으로 일심이였던 특심이였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했다고 일방적으로 편파로 규정해 버리는 겁니다.

 

? 십자가 속에서 보니 다 엉터리 였거든요.

 

지금 교회에 열심히 다니면서 하나님을 섬기는 모습들이

사도바울의 눈에는

다윗의 눈에는

 

하나님이 없다고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한다고 규정하는 겁니다.

 

다윗이 뭘 믿고 그렇게 규정하냐 말이죠.

 

자기 하나님만 옳다 라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밋딤

자기가 직접 경험한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냐?

죄에 대해서 죽여 버리고

의에 대해서 살리는 하나님인데

 

바로 죄에 대해서 죽여서 애곡함으로 위로함을 받기를 거절당한 라헬과 같은 경험을 하게 만드는 하나님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름 없는 아기를 살려달라고 아무리 기도하고 눈물로써 회개로써 금식으로써 아무리 해도

 

된다? 안된다?

 

안되는 겁니다.

 

그런데 갑자기 먹고 마시고 춤추고 노래부르면서 지루박을 추는 겁니다.

 

의에 대해서 살았으니 춤 안 추고는 못 배기는

그 정도로 기쁘지 짝이 없다는 겁니다.

 

누가 더 기쁘냐 말이죠?

누가 더 승리했냐 말이죠?

 

주님이 승리했고

주님이 희년을 완성했으면 된 겁니다.

 

이것이 오른손에서 나타나는 인자 라는 겁니다.

 

이 인자가 나타나는 것이 기이하지 않느냐 말이죠.

 

창조란 원인 없는 결과입니다.

이 새창조가 이스라엘이 쫄딱 망해도 상관없을 정도로

새창조로써 새이스라엘이 이 인자의 나타나심으로 벌어짐을 다윗을 봐 버렸습니다.

 

봐 버려 버린 이상

본 것만 말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 새 것 앞에 이전 것을 내밀지 말라는 거죠.

 

이 신상품 앞에 중고품을 들이대지 말라는 겁니다.

 

이것이 승리요 완료인데

어딜 감히 모호하고 미흡하고 의문의 것들을 들이대냐 말이죠.

 

이 인자를 나타내지 못하는 것들은 가라

 

껍데기를 가라 ~~~~~~~~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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