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기이하고 뜨거운 열정(공포보다 더 공포스러운 기괴한, 엽기적인)의 오른팔 사랑을 나타내소서

 

오른손으로 구원하시는 주의 기이한 인자를 나타내소서 (시편 17)

공포에서 열정(사랑)으로

 

 

(17:1, 개역) [다윗의 기도] 여호와여 정직함을 들으소서 나의 부르짖음에 주의하소서 거짓되지 않은 입술에서 나오는 내 기도에 귀를 기울이소서

(17:2, 개역) 나의 판단을 주 앞에서 내시며 주의 눈은 공평함을 살피소서

(17:3, 개역) 주께서 내 마음을 시험하시고 밤에 나를 권고하시며 나를 감찰하셨으나 흠을 찾지 못하셨으니 내가 결심하고 입으로 범죄치 아니하리이다

(17:4, 개역) 사람의 행사로 논하면 나는 주의 입술의 말씀을 좇아 스스로 삼가서 강포한 자의 길에 행치 아니하였사오며

(17:5, 개역) 나의 걸음이 주의 길을 굳게 지키고 실족지 아니하였나이다

(17:6, 개역) 하나님이여 내게 응답하시겠는고로 내가 불렀사오니 귀를 기울여 내 말을 들으소서

(17:7, 개역) 주께 피하는 자를 그 일어나 치는 자에게서 오른손으로 구원하시는 주여 주의 기이한 인자를 나타내소서

(17:8, 개역) 나를 눈동자 같이 지키시고 주의 날개 그늘 아래 감추사

(17:9, 개역) 나를 압제하는 악인과 나를 에워싼 극한 원수에게서 벗어나게 하소서

(17:10, 개역) 저희가 자기 기름에 잠겼으며 그 입으로 교만히 말하나이다

(17:11, 개역) 이제 우리의 걸어가는 것을 저희가 에워싸며 주목하고 땅에 넘어뜨리려 하나이다

(17:12, 개역) 저는 그 움킨 것을 찢으려 하는 사자 같으며 은밀한 곳에 엎드린 젊은 사자 같으니이다

(17:13, 개역) 여호와여 일어나 저를 대항하여 넘어뜨리시고 주의 칼로 악인에게서 나의 영혼을 구원하소서

(17:14, 개역) 여호와여 금생에서 저희 분깃을 받은 세상 사람에게서 나를 주의 손으로 구하소서 그는 주의 재물로 배를 채우심을 입고 자녀로 만족하고 그 남은 산업을 그 어린 아이들에게 유전하는 자니이다

(17:15, 개역) 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보리니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

 

 

(17:1, 공동) 이 몸의 죄없음을 밝혀주소서. 야훼여, 들으소서. 이토록 울부짖는 소리 모르는 체 마옵소서. 이 애원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소서. 이 입술은 거짓을 모르옵니다.

(17:2, 공동) "너는 죄없다." 판결하소서. 당신의 눈은 결백한 사람을 알아보십니다.

(17:3, 공동) 내 마음을 샅샅이 뒤져보시고 밤새도록 심문하고 불에 달구어 걸러보셔도 무엇 하나 나쁜 것이 내 입에서 나왔사옵니까?

(17:4, 공동) 남들이야 무얼 하든지 이 몸은 당신의 말씀을 따라

(17:5, 공동) 그 험한 길을 꾸준히 걸었사옵니다. 가르쳐주신 길을 벗어난 적이 없사옵니다.

(17:6, 공동) 나는 당신을 부릅니다. 하느님, 대답해 주시리라 믿사옵니다. 귀를 기울이시어 나의 말을 들어주소서.

(17:7, 공동) 한결같은 그 사랑을 베풀어주소서. 당신께로 피하오니 오른손으로 잡으시어 나를 치는 자들의 손에서 건져주소서.

(17:8, 공동) 당신의 눈동자처럼, 이 몸 고이 간수해 주시고 당신의 날개 그늘 아래 숨겨주소서.

(17:9, 공동) 이 몸을 짓밟는 악인들에게서 지켜주소서. 원수들은 미친 듯 달려들어 나를 에워싸고 있사옵니다.

(17:10, 공동) 그들의 심장은 기름기로 굳어졌고 그들의 입은 오만불손합니다.

(17:11, 공동) 달려들어 이 몸을 에워싸고는 땅에다 메어치려 노려보고 있습니다.

(17:12, 공동) 먹이에 굶주린 사자와도 같고 숨어서 노려보는 새끼 사자와도 같습니다.

(17:13, 공동) 야훼여! 일어나소서, 악인들 맞받아 때려 누이시고 칼로써 끝장내어 이 목숨 구하소서.

(17:14, 공동) 야훼여! 손을 펴소서. 흥청거리며 사는 자들의 손에서 이 몸을 구하소서.저들이 당신의 곳간에서 배를 채우고 그 자식들도 배 터지게 먹고 남아 또 그 어린것들에게 물려주게 하시렵니까? / 히브리어 본문의 뜻이 분명치 않다.

(17:15, 공동) 나는 떳떳하게 당신 얼굴을 뵈오리이다. 이 밤이 새어 당신을 뵙는 일, 이 몸은 그것만으로 만족합니다.

 

 

오독 즉 인자 인애와 자비를 인자[사람인 아들자]로 오독하는 바람에

새롭게 적어야 겠구나 생각했는데

막상 말하고자 하는 취지는 크게 벗어난 것이 아니어서 그냥 그대로 냅뚤까 싶었다가

정작 시편 본문을 보니 의아한 점을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다윗의 기도 라고 타이틀을 달아놓았는데

타이틀이라고 해야 하나요? 뭐라 해야하나요?

전문가가 아니어서 잘 모르겠는데

하여튼

 

다윗의 기도, 또는 다윗의 시, 다윗의 노래 등등으로 각각 달리 표현을 하더라 말이죠.

 

우리 같은 일반인들은 왜 그런 의미가 달리 표현되는지를 잘 모릅니다.

그건~~ 잘 모르겠고~~~~

하여튼 오늘 본문은 다윗의 기도 라고 되어 있습니다.

 

기도, , 노래를 각각 다르게 구분지을 때 우리는 잘 구분이 안가는

그게 그거다고 생각하겠지만

분명히 뭔가 다르기 때문에 각각 차이나게 적었을 겁니다.

 

그런데 제가 하나 힌트 삼게 된 것이

출애굽기 15장의 구조와 같다 라는 주장을 보게 되어서

아 그런 것 같구나 라고 마음에 들어서

이 부분으로 오늘 시편 17편을 말하고자 합니다.

 

오독해서 본 내용과 차이나게 다른 방식으로 접근해 봅니다만

정작 결론, 결과는 같습니다. 원인 없는 결과 말입니다.

 

 

영화 엑소더스 : 신들과 왕들 이라는 모세 이야기가 나오는 영화인데

14장이 그 내용이겠지요

 

그리고서 나오는 노래 곧 찬양이 출애굽기 15장입니다.

 

그럼 시편 17편과 구조가 같다면

다윗의 기도 라고 하지 말고

다윗의 노래, 또는 찬양 이라고 해야겠지요

 

그런데 지금 다윗은 그 출애굽기 14장과 15장의 내용을 알고 있다는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 사건을 곧 출애굽의 그 사건을 다시 재현해 달라고

요청한다는 점에서 노래나 찬양이나 시 와는 조금 차이가 난나고 생각합니다.

 

즉 요청이지요 기도죠.

이미 그 결과를 알기 때문에
그 결과를 요청하는 겁니다. 곧 하나님의 일입니다.

 

뭐 우리 일반인이야 기도나, 노래나, 시나, 그게 그거지만

 

요청 간구 기도 라는 입장에서 보면

지금 다윗이 이스라엘을 뭐로 보고 있다?

애굽 곧 마귀들로 보고 있다는 겁니다.

 

실제로 17편 내용들이 원수 갚아 달라는 겁니다.

 

이상하죠?

이스라엘을 다윗의 원수가 아닌

하나님의 원수로 보고 있고

일방적으로 애굽이라고 편파해석을 하고 있다는 겁니다.


모세가 정작 애굽의 귀족이였는데 거기서 빠져나왔듯이
이스라엘 입장에서 다윗은 이스라엘을 빠져나와서 비이스라엘로써 이런 기도를 한다는 겁니다. 


저들을 심판해 달라고 기도로써 요청하고 있는 겁니다
.

 

마치 마리아의 기도와 같다는 겁니다.

(눅 1:46, 개역) 『마리아가 가로되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눅 1:47, 개역)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눅 1:48, 개역) 『그 계집종의 비천함을 돌아 보셨음이라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

(눅 1:49, 개역) 『능하신 이가 큰 일을 내게 행하셨으니 그 이름이 거룩하시며』

(눅 1:50, 개역) 『긍휼하심이 두려워하는 자에게 대대로 이르는도다』

(눅 1:51, 개역)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눅 1:52, 개역)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눅 1:53, 개역)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를 공수로 보내셨도다』

(눅 1:54, 개역) 『그 종 이스라엘을 도우사 궁휼히 여기시고 기억하시되』

(눅 1:55, 개역) 『우리 조상에게 말씀하신 것과 같이 아브라함과 및 그 자손에게 영원히 하시리로다 하니라』



권세자를 낮추시고 비천한 자를 높이는 팔을 어긋맞게 하는 구원의 역사를 펼쳐 달라고
기이한 인자를 나타내 달라고
출애굽 곧 구원사건을 벌려 달라고 말입니다.

 

출애굽기 14장을 거쳐서 그 결과로 15장을 노래하는 찬양이 아니라

15장을 미리 앞당겨 노래하고 14장을 요청해 달라는 식입니다. 기도로써 말입니다.

 

애굽에게 심판을 퍼붓듯이 지금 저들 애굽과 같은 저 이스라엘을 심판을 퍼부어 달라는 겁니다.
물론 제대로 된 이스라엘이 아니니까 말이죠.


그런데 여기서 같이 참이스라엘도 그 심판 속에 놓여집니다.
그래서 위로 받기를 거절 당한 라헬의 상태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이 참이스라엘에게는 구원인 겁니다.

 

이런 다윗의 기도는 선지자들이 그대로 이어 받아서

이스라엘을 심판케 해달라는

너희들은 망했다 라는 선언으로 이어지는 종말선포입니다.


반대로 거짓선지자는 절대 이스라엘은 안 망한다. 선택된 민족인데 왜 망하냐 라는 겁니다.
 

참선지자는 이 종말을 그대로 맞이하는 자가 구원받은자 라고 또 역설적으로

실패로 돌아가자 라고 하는 겁니다. 자기구원을 보는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막상 실패 곧 쫄딱 망하니까

예레미야 선지자는 덩실 덩실 춤을 추면서 이제 예루살렘 딸은 구원 받았구나
돌아오게 될 테니 표시를 헤 두어라 라고 합니다.

시온에서 시온 산, 거룩한 산에서 구원 받았구나

예언이 성취가 되었구나 라고 하는 겁니다.

시온산이 산인줄 알았는데

인물이였다는 겁니다.

 

하여튼 그 인물 하나 떳다

그 인물이 너희들에게 보내진바 되어버렸다면 그것으로 게임오바 라는 겁니다.

그 인물이 바로 오늘 말하는 피난처 라는 겁니다.

시편 16편에도 언급된 피난처입니다.

 

(17:7, 개역) 주께 피하는 자를 그 일어나 치는 자에게서 오른손으로 구원하시는 주여 주의 기이한 인자를 나타내소서

 

피난처 되는 그 인물의 등장이

마치 모세의 등장처럼

 

아니지 모세가 요청한 그 인물의 등장처럼

 

(15:11, 개역) 여호와여 신 중에 주와 같은 자 누구니이까 주와 같이 거룩함에 영광스러우며 찬송할만한 위엄이 있으며 기이한 일을 행하는 자 누구니이까

(15:12, 개역) 주께서 오른손을 드신즉 땅이 그들을 삼켰나이다

(15:13, 개역) 주께서 그 구속하신 백성을 은혜로 인도하시되 주의 힘으로 그들을 주의 성결한 처소에 들어가게 하시나이다

 

바로 요 부분이 오늘 시편의 구조와 같은 것처럼

 

1. 기이하고 이상하고 놀랍고,

 

2. 오른손 오른편의 기능은 빼내는 기능에 탁월한데 상대적인 왼쪽의 세력을 들추는 식인 구원기능이다는 겁니다.

 

3. 인자 곧 은혜, 긍휼과 자비를 베푸시는

 

바로 이것이 사람의 일이 아닌 하나님의 일(고끼오~~ 꼬끼오 ~~ 꼬끼오 ~~)이다는 겁니다.

 

애굽왕 바로를 강퍅케 해서 애굽군사와 애굽왕으로 인해 영광받으시는 여호와 자신의 등장

 

이 인물의 등장을 요청하는 기도라는 겁니다.

 

이 기도를 이 요청을 다윗이 지금 하고 있는 겁니다.

그 정도로 지금 이스라엘은 다윗의 시선에서는 애굽이다는 겁니다.

지옥이다는 겁니다.

 

그리고 마지막 절은 많은 사람들이 요한복음 11장과 연관 시켜서

부활교리와 연결시키는데

 

얼굴을 본다는 것은 완성의 상태로써 예수님만 부활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부활의 첫열매로써 성도 또한 부활한다는 의미로써

연관시키더라 말이죠.

 

(17:14, 개역) 여호와여 금생에서 저희 분깃을 받은 세상 사람에게서 나를 주의 손으로 구하소서 그는 주의 재물로 배를 채우심을 입고 자녀로 만족하고 그 남은 산업을 그 어린 아이들에게 유전하는 자니이다

(17:15, 개역) 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보리니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

 

그런데 정작 요 11장은 
해석자들이 부활교리만 가득차있지

예수님 자신이 부활이라는 것을 안믿는 것을 드러내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어머니께 이런 말을 했지요

 

하나님 믿는게 어렵습니까?

하나님 안 믿는게 어렵습니까?

 

이게 어려워서 요한복음 11장을 가지고 설명을 했던 겁니다.

 

부활교리를 믿는 것이 어려울까요?

예수님이 부활이심을 믿는 것이 어려울까요?

 

즉 이 둘이 맞물려서 서로가 서로를 못 소유하도록 한다는 겁니다.

마치 육과 성령의 소욕처럼

 

그 어려운 부활교리를 믿어버리면

예수님이 부활이다는 것을 못 믿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부활이다면

부활교리를 못 믿도록 되어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오독 해서 적은 글에서도 말했듯이

우리는 예수님이 부활입니다 라는 것 보다

부활교리가 우리 신체에 딱 맞다 보니까


어렵게 어렵게 그 부활교리를 습득하는데 성공하다 보니
때려죽어도 포기를 할 수 없는 신체가 되어버린 겁니다.

부활교리가 가득차 있기에

예수님이 부활이다는 것이 들어갈 틈이 없도록 촘촘히 부활교리로 가득차 있다는 겁니다.

 

믿음은 예수님입니다 라는 말이 들이갈 틈이 없을 정도로

우리 신체는 믿음으로 가득차 있다 라는 겁니다.
나 말고 다른 인물 개념인데 타인이 들어 올리가 있겠습니까?
그러니 그것이 교리 플러스 실천 곧 실천한 나
이것이 불교인 겁니다.

 

즉 나 외에 다른 한 인물이 들어갈 틈이 없다는 거죠.


믿음은 정 반대 입니다.

나를 때려 죽어도 거부하고 남에게 모든 것을 일임시켜 버리는 겁니다.

그런데 불교는 자기부인 조차도 자기가 해야할 실천이기 때문에

철저하게 갇혀있는 군상을 제대로 보여주는 겁니다.

바리새인이 불교잖아요 저 세리와 같지 않음을 하나님께 감사드리면서
십의 이조, 이레에 두번 금식, 토색치 않게 해 주심을 감사 감사


하니 말이죠.
 

지금 이스라엘이 그러하다 라는 겁니다.

애굽과 같다는 겁니다.

 

여기에 놀랍고도 기이한

그리고 오른손의 등장과

그 오른손이 인애와 자비를 베푸시는 방식이

 

바로 애굽의 심판 곧 이스라엘의 심판과 다윗의 부활이다는 겁니다.

 

다윗의 부활은 곧 다윗 속의 또 다른 인물의 부활이지

다윗 개인이 아니다 라는 것은 여러분도 이제 아실 겁니다.

 

다윗은 그저 포장지일 뿐입니다. 포장지는 뜯으라고 있는 것이기에

뜯어보면 그 상자 안에 누가 있느냐 라는 겁니다.


해체 해 보니
다윗에게 담겨진 비밀을 풀어보니 

그러니 다윗은 포장지 상자 로써 그 누구를 말할 수 밖에 없는 것이고

 

여기에 상대적인 애굽이 되어버린 이스라엘은 자꾸 자기 부활, 자기 구원, 자기 천국을

강퍅한 애굽왕처럼 말할 수 밖에 없기에

 

그 누구 라는 인물을 말하는 다윗을 공격하고 핍박하고 다윗죽이기를 할 수 밖에 없는 겁니다.


애굽왕 바로가 말했잖아요? 여호와가 누군데? 난 모르겠는데 라는 겁니다.
 

이런 상황에서 다윗이 말하는 인물이다는 겁니다. 뭐 모른다고 쪼매 기다려봐 곧 알려줄께 라는 겁니다.

 

그 분이 바로 인자를 나타낸다는 겁니다.

 

단순한 인애와 자비가 아닌

기이한 인자 곧 저 쪽을 박살냄으로써 말입니다.

 

저번에도 말했듯이

복이란 뭔가 자꾸 주고 주고 주어서 복받았다고 하는게 아니라

 

오히려 지옥에서 꺼내줌으로써 받은 것 없이 복받았다고 하는 겁니다.

즉 이미 다 받았다는 겁니다. 그것도 전부를 몽땅 말입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않고 내어주신바 이니까 말입니다. 이 표현은 믿음의 표현입니다.

성경은 모조리 행함의 표현이 아니라. 즉 선악적인 표현이 아니라.

은혜의 표현이다는 겁니다.


믿음으로 하지 않는 것은 다 죄이거든요. 즉 법이거든요.

그 정도로 자기가 있었던 지옥이 얼마나 살벌한 곳인줄 몰랐는데

그 속에서 빠져나와보니

비로소 저 곳이 생지옥인줄 미쳐 몰라서 거기서 빠져나왔다는 건짐받았다는 그 자체가

복을 받았구나 라는 겁니다.


보통 기쁨이 아닙니다.

어느 정도냐?

잃어버린 동전 1원을 찾았는데

전재산을 팔아서 잔치를 열 정도로의 기쁨인 초과잉적 기쁨인 겁니다.

 

이것이 일만달란트 탕감받은 비유인 겁니다.

 

즉 소유개념이 아닌 관계 개념이다는 겁니다.


죽었다가 살아난 자식이 돌아왔다는 겁니다.

 

그런데 애굽화 된 이스라엘의 복 개념은 즉 구원개념은 뭔가를 받아서 소유해서 그 소유물로써 남과의 비교가 되는 겁니다.

 

성전의 두 사람 중 바리새인이 그러했고

정작 바리새인은 저 세리와 같지 않음을 감사합니다 라고 하나님께

자신의 소유성을 말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정작 세리는 그런 사고방식으로 가득차 있는 지옥에서 빼내달라는 것 뿐입니다.

관계를 말하고 있는 겁니다.

 

이것이 기이한, 인자(긍휼과 자비), 오른팔의 기능과 부합된다는 겁니다.


의인을 부르러 온게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는 겁니다.

피는 죄인에게만 해당되는 겁니다.
 

즉 신약에서는 위의 세가지(기이한, 오른손, 긍휼과 자비)를 하나로 줄이면

피흘리심(십자가)입니다.

 

일부러 3일의 간격, 간극을 만들어서 나사로에게 가는 겁니다.

기이하고, 인애(제사를 원치 않고 인애와 자비를 원하심), 오른팔의 기능을 보여주시고자 하시는

 

설레임으로 갔는데

 

저들은 이런 관계성 보다

 

소유를 주장하는 겁니다. 부활교리 믿었다고 주장하고

왜 나사로를 사랑했다면서 왜 죽도록 방치했냐 라는 비아냥과 눈물로써의 시위데모를 펼치는 겁니다.

 

이것이 이 세가지 기이하고, 인자하시고, 오른손으로 구원하시는

십자가와 대비되는 모습으로써 저들에게서 드러나는 겁니다.

 

마리아와 마르다를 나사로를 빼내듯이 그 지옥소굴에서 빼내시는 겁니다.

 

부활교리 가득한 지옥에서 말입니다.

 

그 간극을 벌리는 겁니다. 초과잉적으로 말입니다.

 

법을 쥐면 된 줄로 알았는데

법의 초과잉적인 내적 초과로 인해서

법 보다 더 법적인

 

죽음이라는 공포 보다 더 무서운 사랑을 완성해 버렸다는 겁니다.

 

아니 지옥 보다 더 무서운 사랑이다는 겁니다.

 

그 무서운 지옥이 벌벌벌 떠는 사랑이다는 겁니다.

 

다들 나사로의 죽음으로 덜덜덜 떨고 불안과 공포와 그로 인한 무능한 예수님에 대한 원망으로 비아냥 거리는데

 

이 죽음 보다 더 무서운 사랑으로 인해 졸지에 공포의 죽음이 전복이 되어버리는 겁니다.

죽은 자도 살리더라 말이죠.

 

모든 인간은 죽음 앞에서는 손은 떼어버리는데 말입니다.

그래서 자기에게 탓이 올까봐 미리 남에게 탓을 돌리는

불안과 공포가 자리 잡는데 말입니다.

 

다른 말로 부활교리라는 살리지도 못하는 공포와 불안을

예수님은 더 공포스러운 사랑으로 인해서 저들의 죄악마저도 다 씻고도 남을 정도의

사랑의 승리로 죽음의 공포와 불안이 전복되어 버렸다는 겁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을 향해 우셨던 겁니다. 언제까지 구라를 칠꺼냐 라고 말입니다.

조금 있다가 벗겨 주마 라고 말입니다.

 

(벧전 2:24, 개역)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벧전 2:25, 개역)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

 

그래서 죄에 대해서 죽고, 의에 대해서 살리는

예수님 자신이 부활이다는 겁니다.

 

부활교리(율법) 보다 더 무섭고 더 공포스러운 사랑이다는 겁니다.

 

이 사랑을 완성한 겁니다.

 

뭐가 진짜 공포인가? 마귀가 우리를 괴롭히고 애굽왕의 강퍅함이 펼쳐지는 것이 공포가 아니라

 

공포의 공포인

부정의 부정인

 

저들의 공포 마저도 잠재워 버리는 십자가가 더 공포다운 공포이다는 겁니다.

 

이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누가 꾀더냐 말이죠.

 

(8:6, 개역) 너는 나를 인 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 같이 팔에 두라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고 투기는 음부 같이 잔혹하며 불 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

(8:6, 공동) 가슴에 달고 있는 인장처럼 팔에 매고 다니는 인장처럼 이 몸 달고 다녀다오. 사랑은 죽음처럼 강한 것, 시샘은 저승처럼 극성스러운 것, 어떤 불길이 그보다 거세리오?

(8:6, 쉬운) 나를 옥새같이 그대 마음에 두세요. 나를 도장같이 그대 팔에 새기세요. 사랑은 죽음같이 강하고, 그 질투는 무덤같이 끈질기니, 그 사랑은 불꽃처럼, 강력한 불길처럼 타오르네.

(8:6, 킹흠정) 나를 도장같이 네 마음에 새기고 도장같이 네 팔에 새기라. 사랑은 죽음같이 강하고 질투는 무덤같이 잔인하니 그것의 숯은 극히 맹렬한 불꽃을 지닌 불붙은 숯이니라.

(8:6, 한글킹) 네 마음에 인장처럼, 네 팔 위에 인장처럼 나를 새기라. 사랑은 죽음처럼 강하고 질투는 음부처럼 잔인하니, 그 곳의 숯은 불타는 숯, 곧 심히 맹렬한 불길을 가진 것이라.

(8:6, 현대인) 여자: 당신은 나를 인장 반지처럼 당신의 마음에 간직하고 도장처럼 당신의 팔에 새기세요. 사랑은 죽음처럼 강하며 질투는 무덤처럼 잔인하여 맹렬한 불처럼 타오릅니다.

(8:5, 현대어) (아가씨들) 사랑하는 임에게 바싹 기대어 광야에서 올라오는 저 아가씨는 누구인가? [사랑은 죽음처럼 강하여라] (신부) 여기, 사과나무 아래에서 나 그대를 흔들어 깨웠네. 그대 어머니 그대를 낳은 곳 그대 어머니 그대 낳느라 고통당한 곳.

 

 

진짜 공포는 지옥이 아니라

사랑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저런 되도않는 공포에 겁먹지 말라는 겁니다.

사랑은 모든 두려움을 내어 쫏는다는 겁니다.

 

(요일 4:18, 개역)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요일 4:18, 공동)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몰아냅니다. 두려움은 징벌을 생각할 때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두려움을 품는 사람은 아직 사랑을 완성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자꾸 내 쪽의 믿음, 내 쪽의 이웃사랑 실천을 몸에 가득 채우니까

정작 불안과 공포를 이겨낼수 없다는 겁니다.

 

주님 쪽에서 넘어온 사랑이 따로 있다는 겁니다.

 

(요일 4:10, 개역)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어느 정도로 명료한 사랑이냐?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물이 되는 아들을 보내신 사랑이다는 겁니다.

 

그 사랑 아니면 다 가짜요 다 공포를 이겨낼수 없는 사랑이다는 겁니다.

 

이 열정의 사랑

이 뜨거운 기이한 사랑

 

아 제목 드디어 생각났다

 

주의 기이하고 뜨거운 열정의 오른팔 사랑을 나타내소서

 

기생수가 생각나네 ㅋㅋㅋ (일본 애니메이션, 곧 영화로 나오죠)

저 나쁜 공포의 괴수 보다 더 무서운 공포 오른팔이 ㅋㅋㅋ

 

내 몸에 오른쪽이가 산다 라는 겁니다.

 

신이치는 다윗처럼 심심하면 오른쪽아 어디있니? 자꾸 자꾸 찾는 겁니다.

제발 제발 저놈들을 처리해 달라는 겁니다.

뻔뻔스럽게 오른쪽이 에게 모조리 다 떠 맡겨 버리는 겁니다.

이것이 뗄래야 뗄수 없는 관계성입니다.

 

어차피 저들도 마찬가지로 마귀의 숙주들이니까 말이지요.

 

저 공포 라고 우기는 자들에게 제대로 된 공포 즉 심판을 퍼부어 주소서 라는 겁니다.

 

이것이 3일이라는 간극

어떤 인간의 믿음으로도 만들어 낼 수 없는 간극이다는 겁니다.

 

제가 세월호를 언급했는데

과연 우리의 마음과 비슷한 엘리야처럼

비가 오지 않기를 그것도 3년 반 동안 오지 않기를 기도할 수 있겠느냐 라는 겁니다.

이것이 행함이 있는 믿음이다는 겁니다.

 

과연 그렇게 할 수 있냐 말이죠?

오늘 시편 17편의 다윗의 기도가 딱 그 기도요 요청입니다.

 

간극을 벌리고 있는 겁니다. 기도의 요청으로 간극을 벌려 달라고 합니다.

 

모호한 것들은 다 가라

의문의 것들은 다 가라

 

명료하고 또렷한 것만 보이라 라는 겁니다.

 

인간의 구원이 왜 헛되냐 하면

결국은 모호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만 구원 되었으면 됬다는 것은

그 정도로 명료하다는 겁니다.

 

이 완성에 다윗이 동원이 되고

그를 이어서 선지자들이 동원이 되는 겁니다.

 

이스라엘 구원 이스라엘 구원 외치던 모호한 소리들은 다 사라지고

거짓선지자들은 다 죽어 없어져 버립니다.

 

누가 더 공포 답나요?

공포 조차도 두려워 떠는 죽음 보다 강한 사랑이다는 겁니다.

 

사랑이 이스라엘의 구원을 실패케 하고 멸망시킨 겁니다.

그런 가짜 구원, 모호한 구원, 모호한 부활 철폐시키고

 

진짜 제대로 된 구원을 보라는 겁니다.

명료한 또렷한 명확한 구원 말입니다.

 

다윗이 바로 그 구원을 외치고 있습니다.

엉터리 구원 속에서 말입니다.

엉터리 부활 속에서 말입니다.

엉터리 공포 속에서 말입니다.

 

간극을 제대로 벌려서 말입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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