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과 그 후손에게만 나타난 구원 (시편 18)

 

(18:50, 개역) 여호와께서 그 왕에게 큰 구원을 주시며 기름 부음 받은 자에게 인자를 베푸심이여 영영토록 다윗과 그 후손에게로다

 

(18:1, 개역) [여호와의 종 다윗의 시, 영장으로 한 노래, 여호와께서 다윗을 그 모든 원수와 사울의 손에서 구원하신 날에 다윗이 이 노래의 말로 여호와께 아뢰어 가로되]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18:2, 개역)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자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피할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

(18:3, 개역) 내가 찬송 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얻으리로다

(18:4, 개역) 사망의 줄이 나를 얽고 불의의 창수가 나를 두렵게 하였으며

(18:5, 개역) 음부의 줄이 나를 두르고 사망의 올무가 내게 이르렀도다

(18:6, 개역) 내가 환난에서 여호와께 아뢰며 나의 하나님께 부르짖었더니 저가 그 전에서 내 소리를 들으심이여 그 앞에서 나의 부르짖음이 그 귀에 들렸도다

(18:7, 개역) 이에 땅이 진동하고 산의 터도 요동하였으니 그의 진노를 인함이로다

(18:8, 개역) 그 코에서 연기가 오르고 입에서 불이 나와 사름이여 그 불에 숯이 피었도다

(18:9, 개역) 저가 또 하늘을 드리우시고 강림하시니 그 발 아래는 어둑캄캄하도다

(18:10, 개역) 그룹을 타고 날으심이여 바람날개로 높이 뜨셨도다

(18:11, 개역) 저가 흑암으로 그 숨는 곳을 삼으사 장막 같이 자기를 두르게 하심이여 곧 물의 흑암과 공중의 빽빽한 구름으로 그리하시도다

(18:12, 개역) 그 앞에 광채로 인하여 빽빽한 구름이 지나며 우박과 숯불이 내리도다

(18:13, 개역)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뇌성을 발하시고 지존하신 자가 음성을 내시며 우박과 숯불이 내리도다

(18:14, 개역) 그 살을 날려 저희를 흩으심이여 많은 번개로 파하셨도다

(18:15, 개역) 이럴 때에 여호와의 꾸지람과 콧김을 인하여 물밑이 드러나고 세상의 터가 나타났도다

(18:16, 개역) 저가 위에서 보내사 나를 취하심이여 많은 물에서 나를 건져 내셨도다

(18:17, 개역) 나를 강한 원수와 미워하는 자에게서 건지셨음이여 저희는 나보다 힘센 연고로다

(18:18, 개역) 저희가 나의 재앙의 날에 내게 이르렀으나 여호와께서 나의 의지가 되셨도다

(18:19, 개역) 나를 또 넓은 곳으로 인도하시고 나를 기뻐하심으로 구원하셨도다

(18:20, 개역) 여호와께서 내 의를 따라 상 주시며 내 손의 깨끗함을 좇아 갚으셨으니

(18:21, 개역) 이는 내가 여호와의 도를 지키고 악하게 내 하나님을 떠나지 아니하였으며

(18:22, 개역) 그 모든 규례가 내 앞에 있고 내게서 그 율례를 버리지 아니하였음이로다

(18:23, 개역) 내가 또한 그 앞에 완전하여 나의 죄악에서 스스로 지켰나니

(18:24, 개역)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내 의를 따라 갚으시되 그 목전에 내 손의 깨끗한대로 내게 갚으셨도다

(18:25, 개역) 자비한 자에게는 주의 자비하심을 나타내시며 완전한 자에게는 주의 완전하심을 보이시며

(18:26, 개역) 깨끗한 자에게는 주의 깨끗하심을 보이시며 사특한 자에게는 주의 거스리심을 보이시리니

(18:27, 개역) 주께서 곤고한 백성은 구원하시고 교만한 눈은 낮추시리이다

(18:28, 개역) 주께서 나의 등불을 켜심이여 여호와 내 하나님이 내 흑암을 밝히시리이다

(18:29, 개역) 내가 주를 의뢰하고 적군에 달리며 내 하나님을 의지하고 담을 뛰어 넘나이다

(18:30, 개역) 하나님의 도는 완전하고 여호와의 말씀은 정미하니 저는 자기에게 피하는 모든 자의 방패시로다

(18:31, 개역) 여호와 외에 누가 하나님이며 우리 하나님 외에 누가 반석이뇨

(18:32, 개역) 이 하나님이 힘으로 내게 띠 띠우시며 내 길을 완전케 하시며

(18:33, 개역) 나의 발로 암사슴 발 같게 하시며 나를 나의 높은 곳에 세우시며

(18:34, 개역) 내 손을 가르쳐 싸우게 하시니 내 팔이 놋 활을 당기도다

(18:35, 개역) 주께서 또 주의 구원하는 방패를 내게 주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들고 주의 온유함이 나를 크게 하셨나이다

(18:36, 개역) 내 걸음을 넓게 하셨고 나로 실족지 않게 하셨나이다

(18:37, 개역) 내가 내 원수를 따라 미치리니 저희가 망하기 전에는 돌이키지 아니하리이다

(18:38, 개역) 내가 저희를 쳐서 능히 일어나지 못하게 하리니 저희가 내 발 아래 엎드러지리이다

(18:39, 개역) 대저 주께서 나로 전쟁케 하려고 능력으로 내게 띠 띠우사 일어나 나를 치는 자로 내게 굴복케 하셨나이다

(18:40, 개역) 주께서 또 내 원수들로 등을 내게로 향하게 하시고 나로 나를 미워 하는 자를 끊어버리게 하셨나이다

(18:41, 개역) 저희가 부르짖으나 구원할 자가 없었고 여호와께 부르짖어도 대답지 아니하셨나이다

(18:42, 개역) 내가 저희를 바람 앞에 티끌 같이 부숴뜨리고 거리의 진흙 같이 쏟아 버렸나이다

(18:43, 개역) 주께서 나를 백성의 다툼에서 건지시고 열방의 으뜸을 삼으셨으니 내가 알지 못하는 백성이 나를 섬기리이다

(18:44, 개역) 저희가 내 풍성을 들은 즉시로 내게 순복함이여 이방인들이 내게 복종하리로다

(18:45, 개역) 이방인들이 쇠미하여 그 견고한 곳에서 떨며 나오리로다

(18:46, 개역) 여호와는 생존하시니 나의 반석을 찬송하며 내 구원의 하나님을 높일지로다

(18:47, 개역) 이 하나님이 나를 위하여 보수하시고 민족들로 내게 복종케 하시도다

(18:48, 개역) 주께서 나를 내 원수들에게서 구조하시니 주께서 실로 나를 대적하는 자의 위에 나를 드시고 나를 강포한 자에게서 건지시나이다

(18:49, 개역) 여호와여 이러므로 내가 열방 중에서 주께 감사하며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이다

(18:50, 개역) 여호와께서 그 왕에게 큰 구원을 주시며 기름 부음 받은 자에게 인자를 베푸심이여 영영토록 다윗과 그 후손에게로다

 

 

상당히 깁니다. 다음번도 나누어서 시편 18편을 하겠습니다.

우리가 자주 노래로 부르던 시편 18편입니다.

 

출애굽기 15장에서 이스라엘이 출애굽으로 홍해를 건넌 후

애굽의 군사들이 멸절 당하는 것을 보고

기뻐서 노래부르는 승리의 완결처럼

시편 18편은 지난 시간의 17편의 주의 인자를 나타내달라는 기도요청에

화답으로써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라는 노래입니다.

 

그러나 출애굽은 이스라엘 전체가 노래를 불렀고

안 부르고는 못 배길 정도로 감격이 컸음은

그 정도로 애굽의 기세가 보통이 아닌 무서운 공포 그 자체였다는 겁니다.

그 속에서 건짐을 받았으니 이것 또한 보통 보다 더 넘는 기쁨인 겁니다.

 

결국 심판 속에서 맞이한 구원이였던 겁니다.

 

그런데 왜 제가 그러나 라고 단서를 붙였는고 하니

그 때 곧 모세때의 출 15장은 비록 약소민족이였지만

그 정도로 기쁨을 나누고 함께 할 수 있는 옆에 있는 사람들이

적어도 2-3명 이상인 다수 였다는 겁니다.

 

가족도 함께 하면 얼마나 신납니까?

 

왜 제가 그러나 라고 단서를 붙였나?

지금 애굽화 된 이스라엘로부터 심판 속에서 구원을 이룬 그 상태가

 

마치 휭하니 썰렁하기 짝이 없을 정도로 다윗 딸랑 혼자 노래를 부르고 있다는 겁니다.

 

그것도 출애굽기 15장의 이스라엘 전체가 신나서 노래 부르는 그 찬양 보다

더 신나게 딸랑 혼자 아주 아주 신나게 말입니다.

 

혼자인데 말입니다.


더 놀라운 점은 애굽화 된 이스라엘이 10가지 재앙을 당하는 장면이 벌어졌다거나
홍해를 가르는 기적이 나타났거나
사울왕 패거리가 모조리 다 사라졌거나
그런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그 어떤 효과들

영화에서 보듯이 출애굽다운 그런 장엄한 시각적인 효과들이 전혀 없습니다.

오로지 다윗 자기 혼자만의 개인적인 감정처럼 보인다는 겁니다.

왕이시여 어찌하여 먹고 마시고 춤추고 노래부르십니까?
좀 전 까지만 해도 회개와 금식과 기도로 눈물 흘리셨잖습니까?

이런 아무런 어떤 눈에 보이는 기적 따위가 없이 저렇게 노래 부르고 있다는 겁니다.
 

저 원수 곧 애굽화 된 이스라엘은 전부 사울에 속한 자들뿐이다는 겁니다.

이스라엘 전체가 사울편입니다.

 

그 속에서 딸랑 지 혼자 다윗은 신나게 노래 부르는 겁니다.

출애굽 15장과 너무 너무 다른 모습입니다.

 

그런데 만만치 않게 초과잉적으로 노래 부르고 있으니

 

과연 그 혼자 부르는 노래가 우리는 전혀 기쁘게 와 닿지 않는 겁니다.

여럿이 불러야 실감이 나는데

혼자 부르고 있으니 말이죠.

 

그렇다고 다윗이 기가 눌리느냐? 전혀 아니올시다.

아주 아주 신났어

지금은 눈에 하나도 안 보이지만

다윗은 지금 다윗의 후손이라고

 

아주 아주 독특한 해석을 하는 겁니다.

오로지 여호와의 구원을 보고 압도당해 버린 자 처럼 말입니다.

 

즉 구원이 이스라엘에게 있는게 아니라

이스라엘 속에서도 다윗의 후손이라는 단서를 붙임으로써

 

구원이 지극히 제한적이다는 식으로 표현한 겁니다.

 

또 이렇게 말하니까 우리는 당연히 본능적으로 숫자를 계산하고 있습니다.

 

공장에 다닐때에 사장님 부인께서 지금은 권사님이 되었지만

계시록의 14만 4천이 아무리 아무리 계산해 봐도 너무 작다 라는 겁니다.

 

요즘 신x지 이단의 정체를 밝히겠다고 나서다가 도리어 그들이 더 이단적인 속성이 드러나고 있는데

반대로 남의 이단성을 들추어내는 프로그램을 보내고 있다는 겁니다.

 

그 내용 속에서 신x지 교인들이 한결같이 이 144천에 들고 싶어서 전도에 목을 맨다는 거죠.

그래서 트래이드 마크가 오로지 전도인 겁니다.

끼리 끼리 경쟁 붙이면 이것은 불처럼 번지는 거죠.

그 전도 방법이 오늘날 보이싱 피싱과 같은 식으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식인 거죠.

 

저는 신x지가 그냥 새로운 신흥집단인줄 알았는데

신x지 뒤에 장x회가 붙더라구요

하하하 아 이 놈들?

 

신학교 때 군대에 다녀오니까 동기 놈이 완전히 장x회에 빠졌던데

그냥 웃고 치웠는데 제가 다니던 신학교 절반의 전도사가 여기에 완전히 빠져 초토화 될 정도였습니다.

학교는 허구한날 데모를 하고 학생들은 심심하면 휴강에

그러니 그것이 마침 전도라는 트레이드 마크를 내세운 장x회에 다들 빠졌더라 말이죠.

말이 정통일 뿐이지 툭 건드리면 다 무너지는 허술하기 짝이 없는 짝퉁 정통이였던 것을 계속 떠들어야 했던 겁니다.

 

그러니 십사만 사천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보통 경쟁을 하는게 아닌 거죠. 지금 인구가 몇인데?

에게 에게 너무 적다는 겁니다. 그 권사님 말이!!!

그래서 불안을 더욱더 부풀려지듯이

일반인들도 그 불안을 이미 누가 안 심어도 가지고 있는 것을 노리더라 말이지요.
아니 누가 톡 하고 건드려 주길 바라고 있더라 말이지요.

 

그 때 당시의 숫자 개념과 지금 숫자 개념이 다르듯이

이것은 애초부터 숫자개념을 말하고자 함이 아니라

십일조 질문도 지독하게 하는 이유도 결국 숫자 계산 뿐인 거죠.

 

144천이 결국 인물 개념이다는 겁니다.

 

오늘 본문 마지막을 고치면

다윗과 다윗의 후손 곧 예수님께 속한자는 다 구원이다. 이것을 다른 말로 144천 이다.

곧 양사방으로 3 3 3 3 세 개의 지파식 동서남북으로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다의 모래와 같이

언약의 완성이 된다는 초과잉성을 말하고 있는데

 

아무리 세알아 봐도 144천이 너무 조금이다는 겁니다.

 

쪼끔 올랐어요 쪼금 이런 씨급 ㅋㅋㅋㅋ

내 기준, 인간 기준, 시대 마다 다른 숫자개념에서의 숫자로 세알려(안동식 방언 ㅋㅋㅋ) 보니

웃끼는 거죠. 이게 아닌데 ~~~ 이게 아닌데 작아도 너무 작아 ㅋㅋㅋㅋ 이런 씨급 ㅋㅋㅋㅋ

 

이게 엄청난 줄 모른다는 겁니다.

 

자 시편 18편 보세요

다윗 딸랑 지 혼자 노래 부릅니다.

이게 신이 날까요?

 

혼자니까 신이 안나 보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지금 다윗과 다윗후손과 곧 예수님과 약속의 성취로 인한

예수님의 자녀들과 지금 신나게 노래 부르고 있는 겁니다.

 

출애굽기 15장의 오케스트라와 족히 비교 조차도 안되는 밴드와 악단과 합창단 모조리 다 모아서 말입니다.

 

오히려 출 15장 노래 부르고 바로 또 시험에 듭니다. 그 대표자가 바로 모세 누나 미리암입니다.

 

모세야 너는 저 천박한 여자와 결혼하면 안돼?

너 수준이 있지 저런 수준 낮은 여자와 왜 결혼하니?

그것도 우리 중에서 제일 낮은 수준인데?

 

이 수준 수준 땜에 제가 억수로 욕을 먹고 있는데요.

아니 제가 아무리 봐도 수준 높은 인간을 제가 본적이 없어요

다 도토리 키 재기 인데

하여튼 무식한 놈이 자기 좀 안다고 죄가 뭐냐고 자꾸 묻길래

대답을 하니까 치 피 흥 거리면서 자기가 제대로 안다고 죄가 뭔줄 알려줄게 라고 한수 가르칠려고 하더라 말이죠.

해서 들어보니까

 

속으로 얼마나 웃었는지

 

지도 죄를 역시나 모르면서

하여튼 군림하고파서 별에 별 발똥을 다 해요!!!

가만히 있지를 못하는 겁니다.

 

주님이 알아서 다 하는데

죄를 지어야 한다고 새삼스럽게 죄 짓겠데 ㅋㅋㅋ

뭐 그런 죄가 어디있냐 말이죠.

인간에게 규정되는 죄가 있긴 하나요?

 

법도 모르는 인간인데?

자기 신체가 법인 내가 곧 법이다 라는 엉터리 법이? 과연 법 축에나 끼이냐 말이죠.

사랑의 법 외에는 다 허상인데.

 

도찐 개찐 개나 소나 이거나 저거나 거기서 거기 

그게 그건데

뭔가 차이가 나면 참 좋겠는데?

알아서 무릎 꿇어줄게 말이죠. 그렇게 원한다면 말입니다.

그런데 뭐가 차이가 나야 말이죠.

따로 나가서 살림차려서 말하는 내용을 보니
이제는 더 가관
이미 전에 있던 곳에서 해먹은 방법을 다 써먹더라 말이죠,

돈으로 끌어 모아요, 돈으로 다 쳐 발라서 말입니다.

뭔가 차이 나는게 없어요.

예수님과 비교해야지
왜 인간끼리 비교해서 수준 타령을 하냐 말이죠.
결국 결론은 누워서 침뱉기만 하니
그런 모습인것도 모르더라 말이죠.
저런 자가 어떻게 장로를 하는 지 원.

 

신x지나 변x욱이나 도찐 개찐 ㅋㅋㅋㅋ

4부 까지 보고 배꼽잡고 웃었습니다.

 

둘 다 똑같은 이단들인데 왜 싸우지?

결국 돈 싸움인 거지요.

서로가 이용당하는 줄도 모르는 거죠.

자꾸 장사가 이익을 남기지 못하고 줄줄 세는 손해가 나니까

더 이상 못 참아서 돈 더 이상 안 빼앗길려고 하는 겁니다.

 

방금 찬양해 놓고

그 입으로 한 입에서 저주가 나오는 겁니다.

 

우리 라고 해서 예외가 안되는 겁니다.

 

그러니 인간 밖의 인물을 아예 다윗은 쳐다보는 겁니다.

이스라엘 밖의 인물 말입니다.


인간 끼리의 비교가 아닌
인간 속에서 찾는게 아니라 말입니다.
 

이스라엘이 줄기차게 외치는 하나님이 아닌 하나님 밖의 하나님

 

여호와 밖의 여호와를 보는 겁니다.

 

다윗은 전혀 다른 차이나는 여호와를 보고서 외치는 겁니다.


인간이 경험해 본 적도 없는 여호와 이다는 겁니다.
오죽 하면 참선지자도 오해를 해서 심심하면 차라리 날 죽여라 라고 외쳤겠습니까?

엘리야도, 요나도, 기타 등등 모세도 마찬가지.
 

물론 이것 또한 바리새인들과 묵시문학운동가들이 카피 복사해서 어차피 다 따라 하지만 말이죠.

따라해본들 이미 헌 정보인 겁니다

일부러 주님께서 헌 동앗줄을 흘려보낸 겁니다.

새동앗줄을 따로 준비해 두시고 말입니다.


그들은 스폰지처럼 흡수 빨아들여서 바로 바로 써먹지만

이미 저 멀리 차이나는 새여호와는 도망치고 없는 겁니다.

아무리 임금 삼고자 따라붙어 본들 도망치는 겁니다.


도망치는 여호와

 

진짜 차이나는 것은 인간 속이나, 자기자신에게서 찾으면 안돼죠!


다윗 조차도 그런짖 하다가 단절 당한 겁니다.

 

아예 바깥에서 찾아라 말이죠.

죄가 뭔지 알려면 바깥에서 찾아야 합니다.

갇힌 놈들끼리 도토리 키 재기 하듯이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갇혀있는 줄을 모르니까

잃어버린 자를 찾는 목자를 거부하는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죄란 예수님이 규정하지

인간의 신앙이 규정 못하는 거죠,


예수님과 비교하라 말이죠.

모든 인간이 다 허탄한데 빠졌는 것을 말이죠.

도토리 키 재기 하듯이 수준 타령 하는지를 말입니다.

예수님과 비교하면 모든 인간의 수준은 아무리 발버둥 쳐도 지옥갈 수준 밖에 없어요.


(엡 3:15, 개역)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엡 3:16, 개역)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 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

(엡 3:17, 개역)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엡 3:18, 개역)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엡 3:19, 개역)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그래서 예수님은 죄인을 부르러 왔지

의인을 부르러 오신게 아닌 겁니다.


(마 9:13, 개역)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막 2:17, 개역) 『예수께서 들으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눅 5:32, 개역)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잃어버린 자를 부르러 오신 겁니다.

예수님이 잃어버렸지

우리가 잃어버린게 아니거든요.

당사자는 예수님이예요.


우리가 예수님의 신앙의 대상물이지

인간 신앙의 대상이 예수님이 아닌 겁니다.
우리 소관을 없다 말이죠.
 

바로 그런 의미에서 숫자가 아닌 인물이다는 겁니다.

다윗은 남들이 다 할 줄 아는 보통 해석을 한게 아닙니다.

이스라엘 중에 아무도 이런 시선을 가진 적이 없는 새로운 시선을 고백하는 겁니다.


성령을 받아서 지금 찬양을 하는 겁니다.

다윗의 후손이라는 인물을 제시한다는 것은

이스라엘에게서 나올수 없는 의미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졸지에 여호와를 대상물로 삼았기에 삼고있기에 나올수 없는 거죠. 차이가 나지 않습니다.

 

물론 이 때부터 다들 따라하고 제일 많이 써먹는 자들이

마치 오늘날 신x지나 변x욱 쪽의 cb에소 들의 정통 우려 먹는 자들처럼

바리새인이 제일 많이 써먹듯이

바리새인은 눈 빠지게 다윗의 후손을 기다리고 있었던 겁니다.


그런데 그들 보다 더 기다렸다는 자를 일부러 의도적으로 주님이 배치 시킵니다.

앉은뱅이. 예루살렘 입성 때의 두 소경이

더욱더 다윗의 자손을 외치니까

바리새인과 같은 패거리는 시끄럽다고 소동을 잠재울려고만 했다 말이죠.

빈틈을 노리고 오신 다윗의 자손인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정작 대놓고 우리는 다윗을 기다리는 의인답잖아 라는 자들은 피해버리고

전혀 의인 다운 구석이 없는 오히려 저주 받은 앉은뱅이, 두 소경에게만, 호산나 찬양하는 어린아이에게만 나타내는

다윗 자손이다는 겁니다.

(눅 10:20, 개역)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

(눅 10:21, 개역) 『이 때에 예수께서 성령으로 기뻐하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눅 10:22, 개역)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군지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가 누군지 아는 자가 없나이다 하시고』

(눅 10:23, 개역) 『제자들을 돌아보시며 종용히 이르시되 너희의 보는 것을 보는 눈은 복이 있도다』

(눅 10:24, 개역)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많은 선지자와 임금이 너희 보는 바를 보고자 하였으되 보지 못하였으며 너희 듣는 바를 듣고자 하였으되 듣지 못하였느니라』


결국 다윗 자손이 자기 백성을 택하는 거지

인간의 신앙이 다윗 자손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인간은 대상물인데 자꾸 주체가 될려고 한다는 거죠.
 

아무리 그 의미를 소유하고 지식화 하고

자신의 신체에 새겨서 신체화 시켜 실천 해 본들

 

그 인물은 포착이 안된다는 겁니다.

 

그 인물 쪽에서 시작하시는 일이어야 한다는 겁니다.

 

오히려 그러면 그럴수록

오늘 시편 18편에 나오는 사울 패거리와 다를바 없는 모습임을

오히려 더 잘 들추어지는 꼴이다는 겁니다.

 

거짓 정보, 이미 지나가버린 헌 정보를 받고서

좋아라 하다가 말려드는 거지요.

 

다윗 보세요

다윗 바깥에서 찾았고

이스라엘 밖에서 찾은 겁니다.

 

그 바깥에서

그 밖에서 출발하니까

 

잃어버린 자의 의미와

죄인 이라는 의미가

제대로 서는 겁니다.

 

그 외에는 모조리 다 의인이다는 주장일 뿐입니다.

내가 옳다 내가 옳은데 뭐가 잘못이냐 라는 주장 뿐입니다.

 

이것이

자칭 의인

자칭 선민

자칭 구원인 겁니다.

 

이것이 사람의 일이요

 

이것과 맞물려서 대충돌하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다는 겁니다.

 

반드시 육의 소욕과 더불어서 맞물려 대비되는 차이로써

하나님의 일은 드러나는 겁니다.

서로가 서로의 소욕을 못하도록 말입니다.

 

그러니 지금 다윗은 [혼자가 아니야]입니다.

과거 웃찾사에서 혼자가 아니야 라는 개그코너가 있었는데

보이지 않는 동수를 개그맨들이 의식을 해서 행동하니까

다들 미친놈으로 취급하는 겁니다.

 

맞습니다. 혼자만 보이는 겁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다윗은 다윗 혼자서 다윗의 후손을 보고 있는 겁니다.


앉은뱅이에게만 보이는 다윗의 후손입니다.

이스라엘은 아무리 볼려고 해도 안보입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율법사 대제사장은 아무리 볼려고 해도 안 보입니다.


오히려 두 소경에게만 보입니다.

호산나 라고 찬양하면서 떠들고 있는 어린아이들에게만 나타낸바 되었습니다.


그래서 시끄럽다고 반응이 반드시 나타나는 겁니다.

 

이스라엘 전체는 아예 안 보이는 겁니다.

 

그러니 다윗 혼자 웃고 춤추고 마시고 노래 부르는 것으로

아이고 아이고 드디어 미쳤구나 라고 보고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상황이 참선지자의 등장도 똑같은 방식이다는 겁니다.

아무리 봐도 지 혼자 딸랑 미쳐서 이스라엘의 멸망을 외치고 있지

 

모든 백성 모든 이스라엘 선지자들은 절대 이스라엘의 멸망이 없다고 합니다.

 

누가 비정상적입니까?

 

푸코는 지 혼자 돈키호테 래!! ㅋㅋㅋ

 

아무리 봐도 다윗이 비정상적으로만 행동하고 일부러 더욱더 그렇게 오독 했뿌라 라는 식으로 행동을 한다 말이죠.

 

그럼 다윗 빼고?

모든 사람은 다 정상적입니다.

절대 절대 비정상적인 행동 안 합니다.

신x지가 비정상적이다고요?

아니지요

저는 아무리 봐도 신x지 또한 정상적이고 cb에소 또한 정상적입니다.

오로지 돈 버는 것 밖에 안 보이 거든요.

쿼바x스 라는 한국교회 고발 영화를 보니까

아주 웃끼는 코메디 하나가 있던데

작은 교회 4 사람이 니 혼자 먹지 말고 나도 좀 먹자 라고

역시나 그 우물에서 같이 놀고 싶어 하더라 말이죠.

결국 같은 놈들인 겁니다. 도찐 개찐

 

그런 놈들이 그런 영화를 만들어서 비슷한 영화가 몇 년전에 나왔던에

제자 옥한x ? 뭐 옥 한 x ~~~~~

그 유명한 4인방 중에 한 명

 

참 기가 차더라 말이죠.

 

유명세는 오히려 전형적인 마귀다 라는 증거라고 자기가 말해 놓고!

오히려 그것을 권력화해서 자신들을 옹호하고 있으니

x의 교회가 아닌, 사탄의 교회를 물려준 꼴 아닙니까?

아니 단 한 놈도 대드는 제자를 못 만들었는가 말이죠?

그러면 빨랑 도망이라도 치면 될텐데

 

(24:15, 개역) 그러므로 너희가 선지자 다니엘의 말한 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 (읽는 자는 깨달을진저)

(13:14, 개역)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서지 못할 곳에 선 것을 보거든 (읽는 자는 깨달을진저)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어다

 

도찐 개찐 ㅋㅋㅋㅋ

 

그런 xx꾼을 우리는 저들과 같지 않음을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라고 내세운 인물이더라 말이죠.

 

다윗이 지금 자신을 내세우던가요?

아니지요?

누구를 내세웁니까?


오히려 다윗은 저 지옥 소굴에서 건짐받은 겁니다.

 

그 인물을 우리는 다들 대답할 줄 안다고 자신만만해 합니다만

그 인물은 반드시 이스라엘을 멸망시키는 분으로써 다윗은 언급했지

이스라엘을 모조리 다 원수로 안 몰아가는 인물로써 말하지 않고 있습니다.

다윗 자신도 그 원수에 속하기는 마찬가지이니까요.

 

즉 안에서가 아닌 밖에서 나타난바 된 겁니다.

그러니 다윗이 이스라엘로부터 쫏겨나 보니까 안 거죠.

 

다윗은 결국 자폭은 구한 겁니다.

 

봤거든요

이스라엘 중에 있으면서 안전빵인줄 알았는데

악마의 소굴이였다는 것을 말입니다.

 

빠져나오게 되니까

안이 아닌 바깥에 놓여져 지게 되니까

 

복을 따로 받을 필요가 없이

우와 지옥 불에 타 죽을 뻔 했는데

건져주셔서 저는 복 대박 이미 받았군요 라는 겁니다.

 

쫏겨난게 억울한 것인줄 알았는데

이게 복 중의 복이다는 겁니다.

이미 다 받은 채로써의 복 말입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않고 내어주사

빼내었다는 겁니다.

값을 치르고 말입니다.

 

그런데 쿼바x스 영화의 4 교회는 지옥을 니 혼자 차지 하지 말고 나도 좀 주라 라고 하고 있으니

그런 저주 받은 자를

그 영화는 도리어 옹호하면서 제발 같이 지옥 나누어 먹자 혼자 먹지 말고 라고 하고 있냐 말이죠.

 

그런 시선이 cb에소 도 똑같다 라는 겁니다.

 

10명의 문둥병자가 예수님으로부터 고침을 받으니까

유대인 9명은 그 동안 아웃사이드로 몰려서 못 누린 것을 이제는 누릴수 있는 조건이 되다 보니 얼른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는 겁니다.

 

그 지옥을 말이죠.

 

그런데 왜 한 명 사마리아인 너는 왜 저들처럼 안 가냐 말이죠?

 

병고침을 구원의 조건으로 안 본 겁니다.

 

9명은 조건 갖추기 였던 겁니다. 병고침이 말이죠.

악한 세대가 구하는 기적이였던 겁니다.

 

그런데 딸랑 한 명은

주님이 여기 계신데 제가 어딜 갑니까 라는

관계성을 본 겁니다.

 

아니 나 같은 놈을 왜 고쳐주시느냐 말이죠?

전 고침 받을 자격 조차도 없는데 말입니다.

 

이것이 복음을 제대로 만난

복음이 한 사람에게만 나타난

보내진바 된 것이다는 겁니다.

 

즉 우리의 시선은 누가 복음을 받았느냐 라는 인간 그 누구를 본다는 겁니다.

그런데 복음은 그게 아니라

복음이 보내졌구나 라는 그 증상으로 보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 애초부터 인간의 믿음에 복음은 아예 기대를 하지 않았던 겁니다.

그냥 복음 자기 마음대로 자기가 원하는 사람을 복음이 뽑은 겁니다.

복음 중심이지

 

복음을 수용하는 사람, 인간 중심이 아닌 겁니다.

 

그래서 복음은 지 혼자 알아서 하는 겁니다.

여기에 보탬을 그 어떤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해도 다 튕겨날 뿐이다는 거죠.

 

그것을 적나라 하게 보여주는 것이 시편 18편으로써

이스라엘이라는 원수를 격파하고서 이룬 구원이

다윗과 다윗의 후손에게 찬양이 되는 겁니다.

 

이스라엘은 정작 하나도 안 기쁜 겁니다.

애초부터 관심이 없었던 겁니다.

이스라엘은 오늘날 한국교회처럼 돈이 되면 기쁠 뿐이지

돈 안되는 것은 교리가 되었든 십자가가 되었든 복음이 되었던

하나도 안 기쁜 겁니다.

그 안 기쁜 모습이 쿼바x스 라는 영화에서 오히려 저들 이단들을 더욱더 부러워 하는 모습으로써 나타난다는 거죠.

신x지 또한 마찬가지이구요

신x지가 무지 무지 부러워 죽어요.

결국 돈 인데. 너무 너무 솔직하게 신x지가 노골적으로 사업을 펼치니까

내꺼 빼들어가지 말라는 겁니다.

 

뭐뭐 신앙적인 용어

거기서 탈퇴한 목사의 주장

백날 다 동원해도

그 속내를 감출수가 없는 겁니다.

 

오히려 더 드러나죠.

 

한국교회는 이단인게 문제가 아니라

이단 중의 이단이 못 되기 때문에 문제인 겁니다.

 

다윗 보세요

아예 이스라엘 밖의 인물만을 운운하니까

다들 미친놈이라고 하는 겁니다.

 

이스라엘 자체가 이단인데

그들 이단들이 이단으로 몰고 있는

이단 중의 이단인 다윗이 본 [밖의 인물]

이 분이 오히려 제대로 된 [언약의 실상]이다는 겁니다.

그 나머지는 다 그림자일 뿐이다는 거죠.

 

다윗 본인이 그 껍데기 그림자 속에서 바깥으로 나오게 되는 쫏겨남을 당하게 되니까

비로소 보게 된 겁니다.

 

이 경험담은

즉 밋딤은

 

다윗이 죽은 뒤의 선지자 들에게도 나타납니다.

요나 선지자 자살시도 합니다.

 

아니 내가 이스라엘 선지자이지

니느웨 백성 회개시킬려고 선지자 됐습니까?? 까 도 아녀 껴?

됐습니껴???

 

그런데 주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 뿐만이 아니라

니느웨의 하나님이다는 겁니다.

 

여기에 요나는 반발을 하다가

박넝쿨에 굴복 굴욕을 당하는 겁니다.

 

이것이 구원은 여호와께 있지

 

사람의 일 곧 구원의 조건 갖춘다고 되는게 아니다는 겁니다.

 

그래서 간격 벌리라고 3일을 벌리는데

그거 무시하고 하루 만에 돌고서 삐치는 것을

니 한 번 그 간격 당해 보라는 겁니다.

 

미리암처럼 이스라엘 바깥에 놓여지는 겁니다.

주님의 온유로 구원이지

인간의 믿음이 아니다는 겁니다.

 

(요일 4:10, 개역)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요일 4:10, 공동) 내가 말하는 사랑은 하느님에게 대한 우리의 사랑이 아니라 우리에게 대한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보내셔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려고 제물로 삼으시기까지 하셨습니다.

 

제사와 번제가 아닌 인애와 자비라는 겁니다.

 

그래서 제사와 번제 바깥에서

이스라엘 바깥에서

 

더 나은 인애와 자비를 보고서

주님 쪽에서 시작하신일

곧 구원은 여호와께 있다 라는 출발로써

 

다윗은 비록 이스라엘 전부가 외면해도

자기 혼자 피리를 불고

자기 혼자 애곡을 해도

(마 11:12, 개역)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마 11:13, 개역) 『모든 선지자와 및 율법의 예언한 것이 요한까지니』

(마 11:14, 개역) 『만일 너희가 즐겨 받을진대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니라』

(마 11:15, 개역)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마 11:16, 개역)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꼬 비유컨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제 동무를 불러』

(마 11:17, 개역) 『가로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애곡하여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마 11:18, 개역)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아니하매 저희가 말하기를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

(마 11:19, 개역)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마 11:20, 개역) 『예수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베푸신 고을들이 회개치 아니하므로 그 때에 책망하시되』

(마 11:21, 개역) 『화가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가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면 저희가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마 11:22, 개역)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날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이스라엘은 전혀 요동하지 않는

 

비록 자기 혼자 춤추고 노래 부르고 피리를 불어서라도

이 인물의 등장을

주의 인애와 자비가 나타났음을 아니 부르고는 못 배기는 겁니다.

 

다음시간에는 사무엘하 22-24장을 살펴보겠습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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