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을 실패케 만드시는 예수님의 끝까지 섬기심 (시편 18)(2)


다윗의 인구 조사

 

(삼하 24:1, 개역) 여호와께서 다시 이스라엘을 향하여 진노하사 저희를 치시려고 다윗을 감동시키사 가서 이스라엘과 유다의 인구를 조사하라 하신지라

 

(대상 21:1, 개역) 사단이 일어나 이스라엘을 대적하고 다윗을 격동하여 이스라엘을 계수하게 하니라


시편 18편의 내용이 사무엘하 21-24장 사이에 22장에 있습니다.

제가 스토리에 약해서 여러분들이 알아서 이 부분을 읽고서 이해하시면 될 것 같구요

제가 느낀 점은 이겁니다.


강이아빠가 한 말이 생각납니다.

? 창세기 요셉이야기에서 갑자기 그 중간 사이에 전혀 무관한 다말이야기가 나오느냐 하는 점입니다.


저도 늘 궁금했는데 덕분에 알게 된 것이

요셉이 형들을 도둑놈 간첩으로 몰고 가는데 무엇을 가지고 오느냐를 뺑뺑이 돌리는데 있어서

시아버지 유다는 바로 긍휼을 가지고 온다는 겁니다.


유다가 긍휼을 베푸는게 아니라 (남을 7번 용서 하는 것이 아니라)

유다가 저는 이렇게 용서받았습니다 라는 것을 가지고 오는데 있어서(770번 용서 받았음)

요셉은 드디어 뺑뺑이 세 번 돌리는데 있어서 그 간극에서 나올 것이 나왔다고 하는 겁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제가 이렇게 어머니께 설명을 했습니다.

요한복음에 있는 내용인데 (11)


예수님께서 나사로가 죽어간다는 소식을 종으로부터 듣고서

바로 나사로에게 달려가는 것이 아니라 일부러 3일이라는 간격을 벌리고서

늦게 늦게 의도적으로 늦추어서 가시는 겁니다.


3일이 지나서 도착하니 다들 왜 이렇게 늦게 왔냐고 원망하는 겁니다.

심지어 동네 사람들도 아니 사랑한다메? 그래 놓고 늦게 오냐? 라고 비아냥 거리는 겁니다.


마르다 마리아도 이미 늦어 버렸다고 죽어버렸다고 어떻게 하면 좋냐 라는 식으로

예수님이 좀 일찍 오셨으면 했는데 하는 아쉬움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가 부활인줄 믿느냐 라고 물으니까

물론입죠 으헤 으 - 헤 여부가 입겠습니까 막둥이입니다요 으헤 으  헤


아니 내가 부활인 것을 믿느냐고?

물론이굽쇼 믿는다니깐요


어허 안 믿네

어허 믿는데요


어허 안 믿네

어허 믿는데요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부활이란

교리나 신앙의 대상물로써의 부활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이 부활이기에

단 한번도 준적이 없는 감추어진 의미입니다.


곧 인물로써의 부활의 의미였습니다.(관계: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


그런데 마르다와 마리아는 부활 믿을려고 교회 다녔고

하나님을 믿었기에 그것 때문에 평생 신앙을 해 왔다는 겁니다.(대상물이 된 부활신앙)

이 말은 내가 너를 용서할 이웃이란다. 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시니까

자꾸 우리는 물론입죠 원수를 7번 용서해야지요 아무럼요 그래야 부활할수 있겠죠.

 

아니 너는 강도 만난 자야

아니 저는 이웃 사랑을 7번 실천하는 선한 사마리아인이 될꺼라니깐요

 

어허 너는 강도만난 자로써 내가 너의 이웃이야

어허 저는 원수를 사랑하는 이웃사랑을 실천해야 할 자이라니깐요

 

어허 너가 원수야 너 같은 원수를 내가 사랑해야 한다니깐????

 

이웃 개념을 예수님 본인으로 말하는 인물(관계언어)인데

인간들은 이것을 자신의 숙제인 믿음문제, 실천 문제, 행함 문제(시스템언어)로 보고 있다는 겁니다.


자꾸 이렇게 대답하는 겁니다.

이웃사랑을 실천해야 한다고 우기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내가 이웃사랑을 이루고자 너를 원수로 삼겠다는 겁니다.

즉 너는 이웃이 될려고 할게 아니라 원수가 되어야 한다니깐????


인간의 이웃사랑 실천은 원수 삼기가 아니라, 죄인만들기가 아니라,

자기를 옳게 보이고자 하는 의미이다는 거죠.


그러니 아무렴요 아무렴요 저는 부활교리 믿는다니깐요 라고 대답하는 것은

나는 옳다 라는 주장과 같은데(저 세리와 같지 않음을 감사합니다)


바로 이것을 예수님은 겨냥하고 우리의 원수성을 들추어낸다는 점입니다.

곧 우상숭배 입니다. 마귀가 심은 가짜 하나님을 주장하는 것을 건드리시는 겁니다.


빛과 소금의 기능을 말함으로써 천국을 설명하는데 있어서

빛과 소금이 되자 라고 우상숭배자(성화론자, 개혁주의)들은 말하고 있는데

 

예수님은 내가 빛이다 고로 너는 어두움이다 라는 말이다는 거죠.

내가 소금이다 고로 너는 썩어빠진 냄새나는 썩고 부패한 죽은 시체이다 라는 겁니다.

 

이것이 관계 입니다.

이것을 인정을 못하니까

다들 예수님을 비아냥 거리는 겁니다.

자신들이 예수님을 비아냥 거릴 정도의 판단력이 있다고 여기는 겁니다.

이것이 시스템 사고방식 곧 선악적인 사고방식으로써의 시스템언어로 포장한 겁니다.

 

말씀을 실천했다고 우기는 거죠

즉 성경 전체 말씀을 다 지킨게 아니라 믿고픈 것만 믿고

행할 줄 아는 것만 행했던 것으로 전체를 다 지켰는냥 우기는 겁니다.

 

정작 사랑은 없는채, 인애와 자비는 없는 채. 그 껍데기를 지키는데 달인들로 자신들을 만들었던 겁니다.

 

나사로 사랑한다메? !! 관계 ~~~~ 관계! 꼬라지 좋다????

그래서 예수님이 민망해서

하도 하도 쪽팔려서 우시는 겁니다.


대화 자체가 안통하는 겁니다.

그렇다고 예수님이 포기하시느냐 말이죠.

 

그래서 저들의 소통언어인 시스템언어 바벨언어를 단절 시켜 버리는 겁니다.

 

간격을 벌리는 겁니다.

 

그리고 무시했던 사랑이라는 빈터에서 새로운 관계를 맺는 겁니다.

주님 쪽에서 말이죠. 너희가 나를 사랑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사랑하고자 빈터에서 화목제물 로써 새로운 관계를 맺겠다는 겁니다.

 

너희가 무시했던 죽음 말입니다. 십자가

 

이 십자가가

절대 끊을수 없는 넉넉한 사랑을

우리 원수들에게 보이시는 겁니다.

우리는 이런 우상성을 지적당함으로써

주님의 승리를 보게 되는 겁니다.


이렇게 옥신각신하면서 누가 정작 누락되고 빠져있는고 하니

바로 죽은 나사로입니다.

아무도 이런 부활 논쟁에 죽은 나사로가 참여 할 수 없다고 여기는 겁니다.

바로 이 나사로를 예수님은 너희들은 내가 부활인 것을 안 믿는다는 증거로써 깨뜨리시는 겁니다.

즉 유일하게 예수님이 부활이시다 라는 것을 믿는 자는 나사로 뿐이였다 라는 겁니다.

 

아무도 나사로를 산 자로 여기지 않는 그 가운데서

그 빈터에서 올라오게 해서 말입니다.

그래서 이 간극 사이에서 우리가 누락 시켰고 무시했고

아무런 가치가 없다고 죽은자 취급했던 자가

예수님이 부활이시다를

하도 하도 안믿기 때문에

천국에서 편히 쉬고 있는 나사로를 불러낼 수밖에 없는 겁니다.


이 사이 간극에서 우리가 무시했던 자가 올라오는 겁니다.

그 인물이 바로 예수님 자신이다는 겁니다.


나사로의 부활을 믿어라가 아니라, 나 예수 라는 인물을 믿어라 라는 관계를 말하는 겁니다. 인물.

즉 모든 자는 이미 정녕 죽은 자 라는 겁니다. 오로지 산 자는 예수님 뿐이며

모든 인간은 죽기를 무서워 마귀의 종노릇하는 죽은자 일 뿐이다는 겁니다.

 

그래서 미리 맛배기로 나사로는 앞으로의 예수님이 바로 이런 모습으로써

부활이심을 보여주신다고 그림자로써 샘플로 동원이 되는 겁니다.

실상은 예수님이다는 거죠.


곧 부활은 종교에서 흔히 말하는 교리나

인간의 우상성 곧 탐욕으로써의 영혼불멸을 말하는게 아니라

인물이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 인물 때문에

우리는 정작 부활과 단절된 자로써 동원이 되는 겁니다.

그래야 차이가 드러나는 겁니다. 저 분이 산 자요 나는 죽은자임을 말입니다.


그런데 자꾸 우리는 부활을 믿는다니깐 이라고 자기는 잘못이 없다고 본다는 겁니다.

단절된 존재가 아니라 나는 소통이 잘 되고 있다고 여기는 개방적인 존재이다 라고 우기는 겁니다.


10명의 문둥병자 중에서 9명은 낫자마자 바로 예루살렘 시스템으로 복귀를 하는 겁니다.
단 한명의 문둥병자 사마리아인은 왜 저들과 함께 가지 않느냐 라고 물으니

주님이 여기 계신데 제가 어디 가냐고 비로소 제대로된 인물 곧 관계성을 보게 된 겁니다.
죄인과 피와의 만남입니다.

 

그런데 이 관계를 무시하고 시스템(바벨언어)를 쫏는 이것이 

우리 속에 우상이 들어가있다는 증거로써

예수님이 부활이시다. 인물이 부활이시다를 증거하는데 동원이 되는 겁니다.


차이로써 말입니다.
엉터리 부활을 따르는 우상숭배자로써 대립되는 겁니다
.


마치 예수님이 의사이시다를 증거하는데 환자로써

예수님이 구원자 이시다를 증거하는데 죄인으로써

예수님이 옳았습니다를 증거하는데 우리는 무조건 이유없이 틀린자로써

예수님이 살아계신다를 증거하는데 우리는 무조건 이유없이 죽은자로써

예수님은 생명이시다를 증거하는데 우리는 무조건 죽음입니다 로써

예수님은 선한 자이시다를 증거하는데 있어서 우리는 무조건 원수입니다 로써

예수님은 빛입니다를 증거하는데 있어서 우리는 무조건 어두움입니다로써

예수님은 소금입니다를 증거하는데 있어서 우리는 썩어빠진 시체입니다 로써

예수님은 사랑이십니다를 증거하는데 있어서 우리는 죄인 중의 괴수 로써

동원이 된다는 겁니다.


자 이렇게 볼때에 오늘날 교회에서 가르치는 복음이 사실상 다 우상이다는 거죠.

우상을 가르치고 있는 겁니다.

탐심을 가르치고 있는 겁니다.

부할을 탐하고 천국을 탐하고 교회를 탐하는 탐심 곧 우상숭배를 말입니다.

그것도 교회가 말이죠.

 

그러니 교회가 아니니까

땅에는 교회는 없다고 여기시면 됩니다.

 

(3:1, 개역)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3:2, 개역)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3:3, 개역)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3:4, 개역)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3:5, 개역)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3:6, 개역) 이것들을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

 

어딜 감히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누가 꾀냐 말이죠.


예수님이 부활이심을 가장 안믿는 자들이 역설적으로 오늘날 교회이다는 겁니다.


그것이 시편 18편을 통해서 사무엘하 20장 이후로 볼때에

오늘날처럼 이스라엘이다 라는 겁니다.


또 누구냐? 사울이 아니라 다윗이다 라는 겁니다. 물론 사울도 포함 되구요. 다윗을 빼면 안된다는 겁니다.

예수님의 족보에 다윗을 의도적으로 빼잖습니까

곧 우리가 바로 우상숭배자인 겁니다.


예수님이 구원이시다 라는 것을 가장 안 믿는 원수성이 가장 심한 자들이

이스라엘이요 오늘날 교회요 우리이며 다윗이다 라는 겁니다.


즉 예수님이 구원이시다는 것은 아무리 나를 쳐다봐도 내가 구원 받은 그 어떤 건덕지기가 아무것도 없는 죄인으로써 동원이 되어야 하는데

우리는 거꾸로 우리의 원수성이 들추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꾸 나는 구원받을만해 라는 조건으로써

 

(18:9, 개역)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18:10, 개역)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18:11, 개역)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8:12, 개역)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18:13, 개역)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저 세리와 같이 토색하지 않음을 감사합니다 라고 성전에서 기도하고

부활도 믿고

이웃사랑실천도 하고

말씀도 해석하고

성경공부도 하고

찬양도 하고

기도도 하고 다 이런 식이다 라는 거죠.

남을 7번을 용서했다 라는 겁니다.


자신은 어두움이 아니라 빛이다는 겁니다. 빛의 자녀 답다 라는 겁니다.

빛의 자녀 답게 행동하는 마음자세이다 라는 겁니다.


자신은 썩고 부패가 심한 냄새나는 시체가 아니라 소금이다 라고 우긴다는 겁니다

소금의 사명을 가진자 라고 우기는 겁니다.


아니 누가 자기 자신을 어두움이라고 여기며

아니 누가 자기 자신을 썩고 냄새나는 시체로 여기는 자가 있겠냐 말이죠.

아무도 없잖아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죄인을 새롭게 창조해야 한다는 겁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숙제요

인간에게 맡겨진 숙제가 아닌 겁니다.


이 창조가 바로 원인 없는 결과로써 새창조로써

우리의 원수성인 원인 있는 결과의 선악법칙을 무너뜨리면서

깨뜨리면서 작용하신다는 겁니다.


여기에 다윗이 말려드는 겁니다.

다윗도 예외없이 나는 이런 찬양 기도 노래를 했기 때문에

옳다라고 여겼는데

 

찬양하자 마자 바로 제명이 되어버리는 겁니다.

역시나 안될 놈은 안된다 라는 겁니다.

모든 인간은 안된다는 겁니다. 단절입니다.

모든 원인을 차단 단절 시키는 겁니다.

 

이것이 거룩 곧 행함이 있는 믿음이다는 겁니다.

누가? 저들을 단절시키는 자가 믿음이다는 겁니다.

곧 빈터, 3일의 간극인 화목제물이 입니다.

인물이 화목제물이예요 화목제물

 

그 어떤 인간도 화목제물은 없는데 말입니다.

 

이런 믿음을 보일자는 없다 라는 겁니다.

예수의 영 곧 예수님의 마음이 와야 한다는 겁니다.

준적이 없는데 어떻게 부활을 믿냐 말이죠.


엉터리 우상적인 부활이 깨어지지 않는데 어떻게 부활이신 예수님을 보겠느냐 말이죠.

이미 마귀가 심은 가짜 부활이 모든 종교 모든 인간에게 가득차 있는 육체에 갇혀있는데 말입니다.


그래서 간극을 벌리고

그 간극은 반드시 우리가 무시한 것이 그 텅빈 자리에서 나와서 우리를 지적하시는 겁니다.

이것이 사랑이요 용서인 겁니다.


나의 원수성을 깨뜨리지 못하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라는 겁니다.

이제 다윗의 원수성을 어떻게 깨뜨리는지를 봅시다.


다윗은 여호와의 구원을 보는데 있어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과 사울왕 쪽 사람들을 치시는 심판을 보고서

여호와의 구원을 찬양합니다.

 

시편 18편입니다.

 

마치 출 15장의 찬양구조와 같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역시나 여호와의 구원을 오해합니다.


저들과의 구별을 통해서 여호와의 구원을 보고

원수를 심판하시는 모습 속에서 찬양을 했으나

그 찬양에 마치 자신은 뭔가 저들과 차이나는 더 나은 모습과

옳음 모습이 있는냥


저들을 심판하시고 나는 심판을 안하시니까 이렇게 노래하고 찬양하는 나는 옳잖아 라는 식이 되고 만 겁니다.


지난 시간에도 언급했듯이

애굽에서 막 건져내서 저들 원수들을 홍해에 다 빠뜨려 죽이시는 모습을 보고

이스라엘은 너무 너무 기뻐서 여호와의 구원을 찬양합니다.

그 속에 모세의 누나 미리암이 그들 속에서 함께 여호와의 구원을 찬양했음에도 불구하고

바로 그 연이어서 터진 사건이

 

모세의 온유로 구스여인을 아내로 삼는데 있어서

 

미리암 누나가 모세가 어떤 자인데 감히 지도자의 아내가 가장 천박한 여자가 될 수 없다고

구스여인을 취해 결혼하고자 하는 모세에 반대를 하는 겁니다.

 

자신의 주장이 옳다 라는 겁니다.

여기서 미리암이나 다윗이나 구원을 오해함으로써 인간 속에 있는 우상성을 들추어내는 겁니다.

 

아니 오해가 아니라 반드시 거부해야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작전입니다.

 

바른소리 했으니 옳다 라는 주장인데

인간은 애초부터 바른소리 할 자격이 없고, 옳다고 여길 권한이 일체 없다 라는 겁니다.

마치 마르다와 마리아가 부활을 여전히 오해하듯이 말입니다.


인간을 부활 할 자격이 없는 애초부터 부활을 믿을 자격조차 없었다는 겁니다.

그것 조차 예수님의 숙제가 다 이루어 지심으로써 비로 알게 되는 것이니까 말입니다.

우리 인간들이 생각하는 구원과 부활은 결국 나를 위한 우상적인 요소였다는 겁니다.

 

관계가 아닌, 구지 예수님이라는 인물이 없어도 종교가 그런 역할을 한다는 겁니다.


왜 구지 하늘에 가만히 있으면 될껄

왜 구지 십자가라는 아무것도 의미 없는 그 죽음에 충성하셨는가 말이죠.

종교가 유대교가 기독교가 다 구원의 장치로써 작용을 하잖아요?
기독교도 마찬가지이고 모든 종교가 바로 그런 이유로 사람들 곁에 있다는 겁니다
.

예수님은 그것을 탐심이라고 거부하시는 겁니다.

구원의 장치는 커녕 지옥의 장치였다는 겁니다.

 

악한 세대가 기적을 요구하듯이, 부활도 요구하고, 믿음도 요구하고, 천국도 요구하고, 구원을 요구한다는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보여줄 기적. 구원, 부활, 믿음은 오로지

요나의 표적, 뿐이다는 겁니다.

 

너희들에게 반드시 무시받는 십자가 이다는 겁니다.

 

아무리 건전하다고 하는 신학계의 구원과 부활을 살펴보면

역시나 마찬가지이다는 겁니다.

다 우상적이다는 겁니다. 탐심 입니다. 천국을 탐하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천국비유는 놀랍게도 그런 인간의 탐심 곧 악한세대가 요구하는 그런 천국관에

천국 넣어줄려고 하시는 분이 아닌

 

정반대로 천국 비유 때문에 도리어 단절성을 느끼게 하는 정반대의 천국이다는 겁니다.

살벌하기 짝이 없는 불편한 천국비유들 뿐이다는 겁니다.

계속 계속 짤라낼려고 실족케 하는 천국이다는 겁니다.

 

어린아이와 같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못 간다. 즉 못 간다 를 강조하는 겁니다.

어린아이는 그럼 될 수 있냐? 말이죠.

 

오죽 하면 이스라엘 선생으로써도 제대로 단절을 당했으면

달리 방법이 오죽 하면 없어서, 얼마나 다른 방법이 오죽 없었으면

어머니 뱃속에서 들어갔다 나와야 합니까? 라고 여전히 가능성으로 해석할려고 끝까지 가능성을 펼치더라 말이죠.

 

불가능성을 말했으면 단절을 느껴야 하는데

유대인이기에 더더욱 포기 못하겠다는 겁니다.

하다 하다 안되니까 그 방법을 고안해 낸 겁니다.

 

제가 보기에는 천재 입니다. 그 답변이 정말 유대인 답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주여 나는 죄인입니다. 나를 떠나소서 라는 포기 단절의 답을 원했는데

그 불가능성 앞에서의 포기 단절을 말할 수 있는 유대인이란 있을 수 없다는 겁니다.


유대인이 저런 판국인데 우리는 오죽 더 하겠냐 말이죠.

그래서 모세의 누나 미리암을 이스라엘 진영에서 빼서 진영 밖에서 여호와의 긍휼을 기다리게 합니다.

피부병이 들게 해서 너도 구스 여인처럼 아주 아주 천박한 자리에 있어봐라 라는 겁니다.

그리고 모세의 온유를 통해서 누나 미리암을 위해 기도케 하심으로써

다시 긍휼을 얻어서 이스라엘 진영으로 들어오게 합니다.


시편 18편을 통해서 찬양은 인간이 하는게 아니라

다윗이 하는게 아니라

주님 쪽에서 찬양하심을 다윗이 받아서 노래를 하는 겁니다.


작곡작사는 예수님이고 나만 가수다 로써 예수님이 부를 뿐입니다.

다윗은 그저 그냥 소리요 스피커일 뿐입니다.

그런데 이 스피커가 지가 노래를 부르는 줄 착각한다는 거죠.

그 노래가 나오니까 마치 자신이 주인공인냥, 가수인냥 착각한 거죠.

 

(16:13, 개역) 예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가라사대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16:14, 개역) 가로되 더러는 침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16:15, 개역) 가라사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16:16, 개역)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16:17,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16:18, 개역)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16:19, 개역)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16:20, 개역) 이에 제자들을 경계하사 자기가 그리스도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라

(16:21, 개역)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 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

(16:22, 개역)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여 가로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16:23, 개역)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그러다 보니 주변의 장군들이 이제 대세는 다윗이다 싶어서 다윗에게 모여듭니다.

그 진영이 마치 계시록에 나오는 천국의 배치처럼 보입니다.

333 333 333 333 3지파씩 동서남북 12 곱하기 12 144천 말입니다.

 

(7:4, 개역) 내가 인 맞은 자의 수를 들으니 이스라엘 자손의 각 지파 중에서 인 맞은 자들이 십사만 사천이니

(14:1, 개역) 또 내가 보니 어린 양이 시온 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사만 사천이 섰는데 그 이마에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도다

(14:3, 개역) 저희가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르니 땅에서 구속함을 얻은 십사만 사천 인 밖에는 능히 이 노래를 배울 자가 없더라

 

장군들(군사)의 배치가 말이죠. (역대상에 나오는 찬양대 배치 입니다.)

 

그런데 이들 장군들이나 다윗이나

이런 모습에 있어서 자신들의 우상성은 역시나 저들 원수 사울이 지녔던 사고방식과 같은 겁니다.

다윗이 대세이다 보니

그 힘을 보고 힘으로 모이는 겁니다.

 

예수님을 임금삼고자 하니까 예수님은 도망치시는 겁니다.


그래서 다윗을 인구조사케 만들어서

다윗을 죄인만들어서

이스라엘을 치시는 겁니다.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라고 방금 찬양했는데

바로 3번씩이나 닭 울기 전에 부인케 만들어 버리고서는

주님 쪽에서 다가와

너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세번 물을때에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십니다 라고 뻔뻔스럽게 대답케 하신다는 겁니다.


(요 21:14, 개역) 『이것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 세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이라』

(요 21:15, 개역) 『저희가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요 21:16, 개역) 『또 두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양을 치라 하시고』

(요 21:17, 개역) 『세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가로되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양을 먹이라』


사무엘하에서는 하나님이 다윗을 감동케 했다고 하고

역대상 에서는 사단이 다윗을 감동케 했다고 합니다.

사무엘하 24장과 역대상 21


자 이렇게 되면 성경말씀이 틀리게 되잖아요

그렇죠??


그런데 그게 아니라

하나님이든 사단이든 다윗의 입장에서는 갇혀버린 입장이기에

이들을 거부할 수 있는 입장이 못 된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시켜 놓고서는

인구조사케 해 놓고서는

니가 뭔데 숫자를 세냐고 치시는 겁니다.


이것은 의도적으로 다윗을 죄인 중의 괴수로 만들어서

주님 쪽에서 빛이요 소금이지

니가 뭔데 숫자를 세냐고

너는 빛도 소금도 아닌

내가 인애와 자비를 베풀어 주어할 입장 뿐인

너는 죄인이야

너는 어두움이야

너는 썩어빠진 시체야 라고 지적해주심으로써

여전히 주님 쪽에서 그 관계를 유지케 하신다는 겁니다.


그러나 인간 쪽에서 맺을려고 하는 관계는

의인으로써 예수님과의 만남인데

그게 예수님은 사단의 일 곧 사람의 일이다 라는 겁니다.

 

천국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이라는 빤듯한 나라를 원하는 겁니다.

모형이 실상이 되어버렸고

가짜 실상이 마음에 몸에 가득차 버린 이상

진짜 실상인 천국은 안중에도 없는 겁니다.

 

관계 보다 시스템을 원하는 겁니다.

 

죄인 보다 의인을 원하는 겁니다.

 

긍휼(인애와 자비) 보다 제사를 원하는 겁니다.

 

예수님은 의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신 겁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인데

자기가 찬양을 하니까 그 찬양을 하는 자기가 멋있어 보여 그만 빠져버리는 겁니다. 뿅 가는 거죠.

그래서 치시는 겁니다.

 

인간은 찬양 자체를 할 줄 모른다는 겁니다.

 

그래서 벙어리를 통해서 지적합니다. 넌 찬양 할 자격이 없어 라고 말입니다.

소경을 통해서 지적 합니다. 너는 본다고 하나 못 보는 소경이다고 말입니다.

귀머거리를 통해서 지적합니다. 너가 들을 귀 있다고 우기나 너는 듣고 깨달을 까봐 나는 걱정한다고 말입니다.

속죄란 곧 구원이란

바로 나는 찬양 할 줄 안다 라는 우상성, 이런 원수성을 들추어내면서 구원하시지

심판 없는 구원이란 없다 라는 겁니다.

진노 속에서 긍휼을 베푸시는 겁니다.

 

즉 지적 받는 자가 관계인 자녀요

지적 받지 않는 자는 사생아 인 겁니다.

 

즉 이런 지적 자체가 구원이요

진노 자체가 주님의 승리가 나타난 겁니다.

이 지적과 간섭과 매를 대심이 사생아가 아닌 자녀라는 증거로써

사랑을 드러내시는 겁니다.

 

성경말씀은 관계 언어입니다. 단 하나도 행할 것이 없는 관계언어이지

나의 숙제가 단 한 개라도 있는 시스템의 언어가 아닌 겁니다.

아무리 이스라엘 장군들이 다윗이 대세라고 다윗에게 모여든다고 해서

또 그 군대진영의 모습이 천국의 모습을 갖추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바로 우상이다 라는 겁니다.

 

그런 우상성을 주님은 기쁘시게 치시는 겁니다.

옳지 옳지 요것이 들통나야 나는 너의 구원자이다 라는 겁니다.


이것이 주님 쪽에서 맺으시는 관계이지

나는 그런 지적을 받지 않고

나는 그것을 미리 빼버리고

나의 멋진 모습

나의 빛나는 모습

나의 옳게 바르게 찬양하는 모습으로써 예수님을 주님으로 만나고자 했는데

주님은 그게 우상이다 라는 겁니다.

 

성화론이 그래서 마귀사상이다는 겁니다.

엉터리 하나님인 우상이다는 겁니다.

자기가 자신을 깨끗케 하겠다는 겁니다. 힘에 부치면 성령이라는 배터리를 도움받아 가면서 말이죠.

해 볼 수 있는데 까지 다 해보겠다는 겁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구나 나는 저주 받은 자이구나 라는 실상을 거부하면서

저런 허구에 빠져 사는 겁니다.

 

그래서 마귀를 거쳐서 오라는 겁니다. 마귀에게 사로잡혀 오라는 겁니다.

 

말씀을 지키기는 커녕 탕자처럼 맨날 어기는 존재로써 마귀에게 고소당해 오라는 겁니다.

 

그래야 주님이 포로된 자를 자유케 하시는 희년 복음의 의미를 드러내겠다는 겁니다.

이미 갇혀있다는 것을 모르기에 자꾸 남들은 다 버려도 나는 절대로 예수님을 버리지 않겠다고 우기는 겁니다.

바로 이런 우상이 유대인을 장악했기에

예수님은 허무하게 죽으셔야 했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허무하다는 것은

상대적으로 저쪽은 가치있었고 가치 있게 행동했었다 허무하지 않다는 주장인 겁니다.

그런데 그것이 바로 우리의 어두운 눈이 그를 때렸다는 증거였다는 거죠.

 

(53:1, 개역)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

(53:2, 개역)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53:3, 개역)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53:4, 개역)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53:5, 개역)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53:6, 개역)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진짜 사랑은 허무하게 죽으셨으면서도 주님은 우리를 용서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다 라는 겁니다.


이 허무가 이 어리석은 지혜가 옳았다 라는 겁니다.


정작 사울이 원수가 아니라

다윗을 원수 만드시는 그 사랑이 옳았다 라는 겁니다.

 

둘다 매 마찬가지 도찐개찐 거기서 거기

주님 쪽에서 오는 긍휼을 누가 봤느냐 하는 겁니다.

표준어 도긴 개긴 긴은 사이 간극이다는 겁니다. 그것도 간극이라고 벌려 놨느냐 라는 겁니다.
간극을 벌릴려면 제대로 벌리라는 겁니다. 7번 간극이 아닌 7에 70번 간극
백 데나리온 간극이 아닌 일만달란트 간극 말입니다.

저 세리와 같이 되지 않음을 감사합니다 라는 간극이 그게 간극이냐 도긴 개긴 거기서 거기 라는 겁니다.

 

사울왕은 죄인 된 적이 없이, 의인 짖만 하다가 지옥가는 겁니다.

다윗은 예수님의 충실한 섬김 때문에 죄인 중의 괴수가 되어

주님 쪽에서 마련한 화목제물 곧 피로써 구원받는 겁니다.


얼마나 제대로 간극을 예수님께서 벌려 놨는지 죄인이 아니여
죄인 중의 괴수여

이중 부정이다는 겁니다. 무한대
 

이것이 거룩이지

사울왕도 다윗왕도 서로가 자기가 더 거룩하다 라는 육적인 싸움에 빠진 겁니다.

영적인 싸움은 바로 그런 것을 지적하는 겁니다.


내 쪽에서는 그 어떤 것도 없는자로 규정된자가
,(어린아이)

내가 무가치한자로 여긴자가,(며느리 다말)

무능한 자가 내가 못 보는 부활이신 예수님을 보는 겁니다.(나사로)

 

허무한 아벨이 바로 예수님을 보았던 겁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보호로 이마표를 받은 가인은 못 보는 겁니다.

보호 한번 못 받고 허무하게 죽은자가 보았다 라는 거죠.


그것도 엄청난 간극의 예수님을 말입니다.
아브라함은 예수님의 때를 보고 기뻐했다고 합니다. 이게 보통 간극입니까?
 

피난처란 결국 내 쪽에서는 그 어떤 의로움이 아무리 찾아 봐도 없기 때문에

피난처를 보는 겁니다. 외부 입니다.

 

아무리 내 손으로 교회를 지어도

영문 밖에서,

외부에서 예수님을 보는 겁니다.

관계를 맺는 것은 밖에서이지

내가 맺을 수 없는 겁니다.


밖에서 맺는 관계가 바로 십자가 라는 하나님의 어리석은 지혜인 겁니다. 제대로 된 간극이다는 겁니다.

 

불뱀에게 물렸는데 불뱀을 쳐다 보면 낫는다?

내가 내 손으로 하나님의 저주를 퍼부으면서 죽인 예수인데

그 예수님이 나의 구원자 이다는 이 어리석은 지혜가

관계 이다는 겁니다.


방금 이렇게 시편 18편을 찬양해 놓고서는

은근히 다윗은 자신이 옳다고 여긴(인간은 어쩔수 없는 거죠)


이 찬양을 했기 때문에 가진 생각을

주님은 여지 없이

기쁘게 치시는 겁니다.

 

옳지 옳지 너 말려들었구나 이제서야 내가 너를 구원하는 구나 라고 

죄인 하나가 돌아오면 천군천사들이 다 기뻐하듯이 말입니다.


그래서 주님 쪽에서 맺으시는 새로운 관계로 형성하는 겁니다.

위로 받기를 거절 당하는 모습처럼 말이죠.

아니 주님이 인구조사 하라 캐서 했는데

주님이 뒤짚어 씌워서 죄인 만들어 심판하시니

억울하다 말이죠.


그런데 그렇게 말려들어야

내가 내 손으로 만들어 낼 수 없는


피난처

반석


새로운 성전(산성)

새로운 의의 옷


전혀 본적도 들은적도 없는 새 옷을 주님 쪽에서 준비하셔서

입혀 주시고자

빨리 빨리 마귀에게 잡혀 오라 라는 겁니다.


그리고 이 새 옷의 가치

피의 가치를 높이시고자

죄인 중의 괴수로 만들어서

이 피의 기능을 높이 높이 높이시는 겁니다.

 

마귀가 고소하고 송사하면 송사할수록 주님은 신나시는 겁니다.

주의 오른편의 기능이 있으니까 말입니다.

 

마귀에게 잡혀 오지도 않는다면

자기의 옳은 것을 가지고 천국을 가겠다는 취지 밖에 안되는데

그것이 마귀에게 속은 거다 라는 겁니다.

 

마귀가 송사하지 않는 성도란 가짜인 겁니다.

 

이렇게 잡혀 있으면서도 예수님을 안 쳐다보는 겁니다.

광야에서 불뱀에게 물렸는데

불뱀 형상의 구리놋뱀을 장대 높이 달아서 그거 쳐다 본다고 낫겠냐 말이죠

무시하는 겁니다.

 

미쳤습니까 쳐다보게?

 

상처는 그 찌른 창에 의해서만 치료된다는 것이 말이 안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내가 무시했던 그 무시한 것이 나를 구원한다는 겁니다.

내가 무시한 십자가가 나를 구원하기에

걸림돌이다는 겁니다. 거리끼게 하는 지혜라는 겁니다.

(고전 1:18, 개역)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고전 1:19, 개역) 『기록된 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고전 1:20, 개역)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뇨 선비가 어디 있느뇨 이 세대에 변사가 어디 있느뇨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케 하신 것이 아니뇨』

(고전 1:21, 개역)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고전 1:22, 개역)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고전 1:23, 개역)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고전 1:24, 개역)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고전 1:25, 개역)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꺼림직 한 겁니다. 거북스럽기 짝이 없는

불편한 숭고인 십자가이다는 겁니다.

이것이 주님 쪽에서 마련한 구원이다는 겁니다.


내 소유가 될 수 없는 구원
불가능성으로써의 구원


내 믿음으로는 믿을 수 없는 구원을

불가능성으로써의 믿음


주님의 믿음으로 마련한 구원이다는 겁니다.

그래서 다윗과 그 후손에게만 나타난 구원이다는 겁니다.


즉 다윗이라고 해서 다윗이 포함되는 것이 아니라

다윗은 하나의 껍데기일 뿐이고

다윗 속에 감추워진 약속을

땅콩 껍데기를 까서 그 주님이 심었던 약속을 드러내시겠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다윗은 개인으로써가 아닌

우리라는 관계 속에서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는 약속이 톡하고 껍질을 깨고 나와서

 

곧 다윗을 깨뜨리면 약속되신 주 예수 그리스도가 그 속에 들어있었다는 겁니다.

그 인물을 끄집어내는 구원이다는 겁니다.

인간 구원은 없다 라는 겁니다.

 

깨면 깰수록 그 약속은 더욱더 또렷하다는 겁니다. 명료하다는 겁니다.

아무도 믿은적도 본적도 깨달은적도 없는 약속을

약속 스스로가 이루시면서 다윗언약을 성취하신다는 겁니다.


마치 예수님이 죽고 난 뒤에 다들 허탈에 빠져 다들 각자의 고향으로 돌아가버리는데

오히려 예수님은 신나게 예루살렘으로 다들 모으시는 겁니다.

아무도 예루살렘으로부터 도망쳐서 멀리 멀리 떠나 흩어지고자 했지

모을려고 시도 조차 한 적도 없는

생각 조차 한 적도 없는

그야말로 허무에 빠져버렸습니다.


아무도 시작할 수 없습니다.

이 단절 속에서 쳐다볼 것은 오로지 나의 피난처, 오로지 나의 산성 나의 요새 뿐이다는 겁니다.


오로지 예수님의 믿음만 시작하시는 겁니다.

다윗으로부터 새시작이 되는 겁니다.


새판을 짜시는 겁니다.

그 새판이 새언약 바로 예수님 판입니다.


상대적인 옛동앗줄은 이미 지나가버린 겁니다.
다윗의 후손이라는 새 판으로 옮겨타는 겁니다. 불가능성으로써 말입니다.

그래서 다윗이 죽고 난 뒤에는

이스라엘 개판 됩니다.

이미 그 이전에도 개판이였지만

다윗이라는 정점을 찍고 내리막길로 갑니다.

이스라엘은 멸망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다윗의 정신은 더욱더 맹렬하게 살아 있습니다.

다윗의 약속

다윗의 언약은 더욱더 생생하게 말입니다.

육은 날로 날로 후패하고

이스라엘은 날로 날로 망해가는데

영은 날로 날로 새로운 겁니다.


다윗의 정신인 다윗의 언약은 점점점 날로 생생하고 또렷해 지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심지어 흔적도 없이 다 사라져 나라도 쫄딱 망해 다 흩어져도

이 다윗의 언약만큼은 더욱더 생생하게 살아서 움직여서

심지어 쪼개기까지

찌르기까지 한다 라는 겁니다.

위플래쉬 채찍질을 한다는 겁니다. 등에 처럼 쏘아댑니다. 막수셔대는 겁니다.


뭐 인간이 그 언약을 제대로 전수하겠다고?

말도 안되는 소리인 겁니다.


뭐 남을 7번 용서 했는데 몇 번 더 용서해야 하냐고?

말도 안되는 소리입니다.


인간은 안되는 정도가 아니라

주님 쪽에서 아예 썩게 하십니다.

 

어둡게 만들어 버립니다.

 

그렇게 해서 너가 빛이 아니라

너가 소금이 아니라

내가 빛이다 내가 소금이다

그런 소금으로부터 770번을 소금 뿌림 당하는 관계로써

새언약과의 관계를 생생하게 명료하게 또렷하게 하겠다 라는 겁니다.


즉 다윗을 인구조사케 해서

죄인 중의 괴수 만들어서

저들의 우상적인 하나님관에서 빼내시겠다는 취지이다는 겁니다.


성전에 두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는 바리새인 당대의 최고의 의인들입니다.


우리는 결과를 알려주심 때문에 바리새인이 마귀자식인줄 알았지
예수님이 아니였으면 아무도 몰랐던 자들입니다.


요즘으로 치면 성화론자들 개혁주의자들입니다.


또 한 사람은 세리입니다. 매국노죠.

요즘으로 치면 이단 중의 이단입니다.

악하다고 소문난 삭개오가 세리입니다. 이단이죠.

가난한 자의 돈을 빼앗아 세금을 독재자에게 바치는 자들입니다.

(마 22:14, 개역)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마 22:15, 개역) 『이에 바리새인들이 가서 어떻게 하여 예수로 말의 올무에 걸리게 할까 상론하고』

(마 22:16, 개역) 『자기 제자들을 헤롯 당원들과 함께 예수께 보내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참되시고 참으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며 아무라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심이니이다』

(마 22:17, 개역) 『그러면 당신의 생각에는 어떠한지 우리에게 이르소서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하니이까 불가하니이까 한대』

(마 22:18, 개역) 『예수께서 저희의 악함을 아시고 가라사대 외식하는 자들아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마 22:19, 개역) 『셋돈을 내게 보이라 하시니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왔거늘』

(마 22:20, 개역)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이 형상과 이 글이 뉘 것이냐』

(마 22:21, 개역) 『가로되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이에 가라사대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마 22:22, 개역)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기이히 여겨 예수를 떠나가니라』

 


쿼바디스 라는 영화가 순엉터리이다는 겁니다. 개혁주의자들이 만든 영화로써 인간의 가능성을 주장하는 겁니다. 단절성이 아니라



그런데 정작 누가 더 우상적인고 하니

당대의 최고의 의인

하나님의 말씀을 지킬려고 그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말씀을 사수하고자 하는


이들이 바로 엉터리 하나님을 믿는 우상숭배자들이였다 라는 겁니다.


그런데 누가 봐도 악한 세리는

자신이 죄인 중의 괴수인줄 알기 때문에

긍휼을 바랄 뿐인 겁니다.

소금을 쳐 달라고 합니다.

빛된 모습이 아예 없는 어두움 그 자체이기 떄문에

빛 되신 예수님을 보기를 원했던 겁니다.

 

바리새인은 썩은 한국교회를 고발하는 위치이지

자신이 썩고 부패나서 소금쳐 달라고 하는 자들이 아니다 라는 겁니다.

남이 아닌 내가 어두움 그 자체로써 소경으로써 예수님의 빛을 보게 고쳐달라고 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반대로 남을 지적하기 바쁘다 라는 겁니다.

이 둘 다 십자가에서 마땅히 지옥갈 자들 중에

누가 예수님을 영접하겠습니까?

 

즉 누가 가 아니라

사실상 예수님이 누구를 영접할까 말입니다.

한 쪽 강도와 다른 한 쪽 강도 중에 누가 말이죠?


예수님이 둘 다 똑같은 강도 중에서 둘로 갈라서 차이나게 했다는 겁니다.

다윗이나 사울이나 도찐개찐 똑같은 놈입니다. 둘다 원수 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섬기심이 둘을 갈라서 차이나게 간격을 벌렸다 라는 겁니다.

 

이 간극에서 뭐가 나오느냐 말입니다.

꼭지점에 선 양쪽의 사울과 다윗이 중요한게 아니라

두 강도가 선 위치의 꼭지점이 아니라

그 사이에서 나오는 그 간극에서 나오는

내가 무시했던 것을 보고 그것을 베풀어 달라고 하느냐 하는 점이다는 겁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것을 드러내는 겁니다.

다윗 구원할려고 환장하신 분이 아니다는 겁니다.

자신이 어두움에 빠졌다 라는 것을 직시하는 자가

건져달라고 하는 겁니다.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어두움에 빠지지 않았다면 피난처가 왜 필요하겠으며

자신이 환자인줄 모른다면 의사가 왜 필요하겠습니까?

 

내가 충분히 대처할수 있는 능력이 있는데 왜 피난처라는 전적무능에 빠져야만 피난처를 보게 되는

그 피난처를 찾겠냐 말이죠.

즉 장소가 아닌 인물이다는 겁니다. 피난처 되신 예수님 말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 쪽 강도는

자신이 환자인줄 모르기에 의사가 필요없는

건강하다 라는 겁니다.

타인이 필요할 이유가 없습니다.

자기가 잘났는데 왜 타인이 필요하냐 말이죠.

그저 재수 없게 걸려서 억울하게 사형당할 뿐이다는 겁니다.

안 걸릴수도 있었을 텐데

나는 가능한데 말입니다.


주님께서 새롭게 맺으시는 관계 때문에

다윗은 죄인 중의 괴수가 되기 위해

사단에게 사로잡혀야 하는 겁니다.

마귀에게 잡혀와야

주님께서 마련한 피가 의미가 있는 겁니다.

마귀가 자신만만하지 않으면

다윗언약은 의미가 없는 겁니다.

 

자신 만만하게 잡아서 두 강도처럼 십자가에 매달아 죽이는데

사울왕과 다윗왕과 둘 다 매달아 죽이는데

죽는 와중에 중간에 이들 간격 사이에 예수님이 같이 죽는데

사울은 치! 니도 죽도 나도 죽고 예수도 죽는데

왜 너 다윗은 죽어가는 예수에게 살려달라고 하느냐 라는 겁니다.

 

다윗은 죽어가는 예수님께 주여 당신의 나라에 저를 기억하소서 라고 하는 겁니다.

즉 나는 원래 태어날때부터 가망 없는 소경 중에 소경이요

벙어리 중에 벙어리요

귀머거리 중에 귀머거리요

마귀 중에 마귀인

죄인 중의 괴수일 뿐입니다 라고 십자가에서 고백하는 겁니다.


그렇다고 은혜를 더하고자 죄를 일부러 지을수 없지요

그건 죄가 아니니까 말이지요


주님은 다윗을 상대하는게 아니라

마귀만을 상대하십니다.

어딜 감히 일부러 죄를 지어서 은혜를 더할려고?

마귀가 웃습니다.

인간을 상대하시지 않고 마귀만을 상대하시는 이유는

 

빨리 다윗을 잡아오라는 겁니다.

베드로를 잡아오라는 겁니다.

그래서 송사 하고 고소 하라고 부측이는 겁니다.


욥을 누가 부측이는 겁니까?

죄인 중의 괴수에게 은혜를 베푸시고자 하시는 겁니다.

그래야 마귀가 발악을 할 것 아니겠습니까?

범인을 당사자 마귀 본인이 잡아 왔으니 말입니다.

 

그저 다윗은 법을 쥐고서 송사하는 마귀에게 잡혀와야할 죄인 중의 괴수일 뿐인 겁니다.

베드로가 주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요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자다 라고

고백하니까

주님의 주의를 주시는데 베드로야 그건 니가 한 고백 니가 한 찬양 니가 한 기도가 아니라

성령께서 하신 것이다 라고 해도

이미 베드로는 스피커로써 자신의 입에서 나왔다는 그 자체로 자신에게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방금 찬양해 놓고

반드시 예수님은 베드로를 세 번 부인케 만들어서

 

한 입에서 찬양과 저주가 나도록 만들어 버리시는 겁니다.

그 간격 속에서 나오는 베드로가 무가치 무시 했던 닭의 믿음과 부르짖음과 울부짖는 기도를 통해서

건지시는 겁니다.


닭 때문에 건짐받은 베드로


베드로는 닭아 너는 나보다 옳구나 라는 것을 통해서

자신에게 있었던 우상성을 지적 받음으로써

그 자체로써 구원을 보게 되는 겁니다.

이 관계를 우리 쪽에서가 아닌

예수님께서 바리새인 보다 나은 의로써 주님 쪽에서 타넘어 와서

(우상숭배자 보다 더 나은 의)


(5:20, 개역)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어리석은 십자가로 관계를 맺는 겁니다.


(요일 4:10, 개역)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마귀 보란 듯이 말입니다.

사람의 일과 하나님의 일의 차이로써

그 차이가 간극이요 바로 거룩으로써

내가 내 스스로 깨뜨릴수 없는 우상성을 깨시면서 맺는 관계를 말입니다.

이것이 다윗을 죄인 중의 괴수로 만드시는 끝까지 섬기시는 끊을수 없는 십자가사랑입니다.


(8:31, 개역)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8:32, 개역)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8:33, 개역)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8:34, 개역)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8:35, 개역)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협이나 칼이랴

(8:36, 개역)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8:37, 개역)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8:38, 개역)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롬 8:39, 개역)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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