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어있는 자기 허물을 깨달을 자 누구리요 (시편 19)

 

(19:1, 개역) [다윗의 시, 영장으로 한 노래]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19:2, 개역)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19:3, 개역) 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19:4, 개역) 그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 말씀이 세계 끝까지 이르도다 하나님이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베푸셨도다

(19:5, 개역) 해는 그 방에서 나오는 신랑과 같고 그 길을 달리기 기뻐하는 장사 같아서

(19:6, 개역) 하늘 이 끝에서 나와서 하늘 저 끝까지 운행함이여 그 온기에서 피하여 숨은 자 없도다

(19:7, 개역)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케 하고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로 지혜롭게 하며

(19:8, 개역)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도다

(19:9, 개역)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 여호와의 규례는 확실하여 다 의로우니

(19:10, 개역) 금 곧 많은 정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

(19:11, 개역) 또 주의 종이 이로 경계를 받고 이를 지킴으로 상이 크니이다

(19:12, 개역) 자기 허물을 능히 깨달을 자 누구리요 나를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19:13, 개역) 또 주의 종으로 고범죄를 짓지 말게 하사 그 죄가 나를 주장치 못하게 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정직하여 큰 죄과에서 벗어나겠나이다

(19:14, 개역)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실수를 통해서 일하신다고 합니다.

즉 인간의 죄를 통해서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신다는 겁니다.

그렇다고 은혜를 더하고자 죄를 일부러 지을 수가 없는 거죠.

이미 죄가 인간을 다루는 겁니다.

 

여기에 이 우연을 가장한 미필적 고의의 주님의 자작극에

인간도 마귀도 다 말려드는 겁니다.

 

즉 인간은 갇혔다는 겁니다.

그러니 제발 자살 하지 마세요.

뭐 !! 바로 잡기 위해서 희생을 하겠다. 그래서 자살하겠다????

바로 잡기는 뭘 바로 잡아요? 갇혔다니깐!!!

복음을 위해 목숨을 버리겠다는 것은 쉽습니다.
그러나 복음을 위해 죄인 중의 괴수가 되는 것은 더 어렵습니다.

 

심심하면 자살을 하는데

이것은 자기가 자기 목숨을 다룰 수 있다는 권한이 있는냥 착각해서인 겁니다.

분명히 말하지만 인간은 갇혔습니다.

 

그러니 벗어날 자가 없다 라는 겁니다.

그 어떤 권리도 인간에게는 없다 라는 겁니다.

 

그래서 제목을

 

(19:12, 개역) 자기 허물을 능히 깨달을 자 누구리요 나를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벗어날 자가 없다는 뜻에서

 

자기 허물을 능히 깨달을 자가 없다고 하는 겁니다.

 

그것도 숨어있는 허물 말입니다.

 

인간은 평생 자신의 허물을 감추고자 전 인생을 걸고 허비 합니다.

그런데 옆에서 주님께서 그 덮고 있는 죄, 그 허물 보다

더 크디 큰 숨어있는 죄, 나도 전혀 몰랐던 죄악을 옆에서 주님이 들추어내고 있는 겁니다.
설마 그 죄가 드러나 알게 되어도 그게 왜 죄인 줄도 모르는 도무지 알지 못하는 죄까지 들추어내십니다.

 

한 쪽은 삽으로 모래를 파서 자기 죄악을 덮고 있고
바로 옆에서는 예수님이 우리의 죄악을 그것도 인간이 전혀 모르는 죄악을 들추어내고자 삽으로 퍼내고 있다는 겁니다.

 

인간은 자기 죄악 7개를 덮을려고 별짓을 하면서 때로는 뇌물을 주면서 이박 친박 주면서

그렇게 덮고자 하는 겁니다.

 

그런데 주님은 바로 옆에서 770의 숨은 허물을 퍼내고 있습니다.
숨어있는 허물입니다. 허물인지도 전혀 모르는 ...

 

아이고 예수님 수고하십니다. 지금 뭐하세요? 예수님!!!

너는 너가 손가락으로 세고 있는 니가 인식한 죄 7개를 덮고 있는데

나는 지금 너의 숨어있는 죄악 770을 퍼내고 있단다.

 

누구껄요? 너 꺼. 니 꺼

 

 

(19:12, 개역) 자기 허물을 능히 깨달을 자 누구리요 나를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이 문구를 보면 불교가 딱 떠오릅니다.

유대교죠

물론 기독교도 대부분 유대교이지만 즉 불교이지만 말이죠.

 

벗어날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하는 자들이다는 겁니다. 성화론자 개혁주의자들입니다.

 

자 이렇게 가능성을 제시해 버리면 결국 종교라는 장사에 빠지는 겁니다.

안 빠지는 자가 없다 라는 겁니다.

 

복음은 오히려 그 가능성을 단절케 만들어 버리는 겁니다,

복음 혼자서 말입니다.

 

그런데 성화론자들이나 개혁주의나 다들 가능성과 개방을 외치고 있지

단절을 주장 할 줄 모른다는 것이 참 신비롭다 라는 겁니다.

 

그것은 모순을 해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모순 그 자체로 그대로 가는 것이 복음인데

모순이 있으면 안된다고 보는 겁니다.

그러다가 모순에 부딧히면 자신의 믿음이 꺠져 버려서 자살하게 되는 겁니다.
성화론자와 개혁주의자들이 자살하기 딱 좋은 환경에 사는 자들이다는 겁니다.
노무현 보세요.

그러나 전두환은 때려 죽어도 절대 자살하지 않습니다.

어떤 철학자 글에 진보는 분열 때문에 망하고, 보수는 부패 때문에 망한다 라고 하지만
정작 그렇게 말하는 본인도 성화론자 같은 성격에 살고 있는 겁니다.
유일한 희망은 결국 인간 자기자신, 자기에게로 회귀하거든요.

본인이 말한 신념이 깨지면 어떻게 하실려구?

주님은 그렇게 인간이 세운 공로를 깨는 짖만 골라서 하시는 분입니다.


자기 모순에 빨리 부딧히도록 하신다는 겁니다.
 

마치 불교가 인간을 신으로부터 떼어놓는데 성공했지만

정작 인간 자신으로부터 떼어놓는 데는 실패했다는 겁니다.

해탈이 안된다는 겁니다.

 

자유가 안된다는 겁니다.

 

당연하지요 갇혔는데 어떻게 해탈 되겠습니까?

 

그런데 성화론자들이나 개혁주의는 성령의 도움으로 자유케 된다고 우깁니다.

벗어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성령이 중요해서가 아닌

인간의 자유를 위해서 성령이 동원되는 교리를 주장하더라 말입니다.
성령은 그저 시다바리요, 배터리 충전용이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가능성이 그만 장사가 되고 돈이 되어버리는 겁니다.

대표적인게 신천지인데 다들 부러워 죽습니다.

정통도 이단이기는 마찬가지인데 너무 우리들의 밥그릇을 신천지가 버릇없이 빼앗아 가니까

늦게나마 나서는 거지 둘 다 돈 장사는 마찬가지이다는 겁니다.

 

신천지 보다 더 심각한게 쿼바디스 라는 영화에서 강조하듯이

시비s가 신천지 보다 자기들 고발하는 쿼바디스를 반영하겠습니까?

 

누가 자기 허물을 깨달을 자가 있겠습니까?

갇혔는데

 

신천지 뿐만 아니라 다들 갇혀버린 겁니다.

 

그렇다면 예수님만 쳐다볼 수 밖에 없는데


이건 뭐 구원의 장치들이 너무 난립해 있는 겁니다.
예수님만을 쳐다 볼 수 없도록 하는 장치들이 너무 많다라는 겁니다.

 

교회도 있지요

목사도 있지요

다들 눈에 보이는 구원의 장치들이 있다 보니

그 사기물에 놀아나는 겁니다.

 

그러니 가인과 아벨의 상황인 아담 때나

예수님과 바리새인의 대립상태인 예수님의 때나

지금이나

 

한 발짝도 벗어난 적이 없는

 

갇혀 있는 상황이다는 겁니다.


모조리 다 십자가의 사건 속에 놓여진 겁니다.

 

그렇다면 죽음을 우리는 봐야 하는 겁니다.

갇혀있다는 것에 머물지 말고

그 갇혀있음을 더욱더 강화 시키기 위한 죽음의 발생을 우리는 봐야 한다는 겁니다.

 

인간의 죽음 말고요

전혀 다른 새로운 죽음 말입니다.


죽지 말아야 할 분의 죽음을 말입니다.


신은 죽었다!! 왜?

신들이 있는 곳에 어떤 한 신이 나타나 신은 죽었다 라고 외치니까

아니 어떻게 신이 죽냐 라고 신들이 비웃었습니다.
하도 웃겨서 웃다가 신들이 다 죽었습니다.


비웃다가 말이지요.


이 허무 말입니다.

 

인간은 갇혀있다는 것에서 벗어나고자 한 것이 살인 사건입니다.

또는 자살입니다. 해탈입니다. 구원받기입니다.

 

뭔가 나의 뜻대로 되지 않았을때에 인간들의 선택은 자살이든 타살이든 하여튼 죽음이 발생한다는 겁니다.

신이라는 창조주가 기껏 만들어낸 피조물인 나, 이 내 꼬라지가 이것 밖에 되지 않느냐 라고

신에 대한 복수를 하듯이 자신을 가해 하는 겁니다.
나 같으면 이렇게 불완전하게 만들지 않았겠다 라고 말이죠.

나 라는 허구에서 벗어나고 싶다 라는 겁니다.

완벽주의자들이 자살하거든요.


결국 여기에도 신이라는 실재가 개입하는 겁니다.


인간과 인간 끼리의 죽음이 아닌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의 살생극 말입니다.

 

즉 갇혀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벗어나고자 하는 방식이 바로 자살이나 타살이나 죽음을 통해서 뚫어볼려고 한다는 겁니다.

막힌 담을 허물어 보겠다는 것 말입니다.

 

그런데 이 막힌 담은 우리 쪽에서 뚫을수 있다면 갇혀있는게 아니지요

막힌 담은 그 가로막힘을 뚫을 수 없기 때문에 막힌 담이라고 하는 겁니다.

 

불가능 합니다. 그래서 반대로 막힌담 넘어 저쪽에서 허물어 버리지 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다른 방법으로는 허무는 방법이 없다 라는 겁니다.

 

즉 인간은 갇혀 있는 상태에서 막힌 담을 뚫고자 손을 대면 댈수록

그 담은 더욱더 곤고하고 높아지고 두꺼워 진다는 겁니다.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따르고자 하나

육체로는 다른 법을 따른다 라는 겁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구나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즉 갇혔다 라는 겁니다.

 

그래서 오죽하면 얼마나 벗어나고 싶었으면 자살까지 하겠습니까?

 

자기 허물을 깨달을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바로 즉시로 시간과 공간을 해탈하고자 바로 자살해 버린다는 겁니다.

벗어나고자 갇혀있는 것에서 자유코자 말입니다. 구원받고자 말입니다.

 

그게 안 되니까 종교를 만들고 바벨탑을 세우고 교회를 지어서

구원이라는 자유를 추구하고자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게 자유가 될 것 같으면 저라도 지금 당장 자살 하겠습니다.

자살한다고 갇혀있음에서 벗어나냐 말이죠.

택도 없다는 겁니다.

 

완전히 웃기는 소리죠.

 

그러면 교회 다니면 자유가 될까요?

오히려 사기꾼들이 더 등쳐 먹는 겁니다.

 

자유는커녕 노예가 되는 택도 없는 소리이다 라는 거죠.

 

그래서 나 말고 다른 분을 보자 라는 겁니다.

 

다른 인물 말입니다.

 

그분이 벗어난 유일한 분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라고 한 유일한 분이다 라는 겁니다.

 

지난 시간부터 자꾸 다른 인물을 보자 라고 다른 인물을 자꾸 언급하는 이유는

 

그 분이 인간이 자기 일 곧 사람의 일에 빠져서 평생을 죽기가 무서워 종노릇하는 가운데

유일하게 하나님의 일을 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 하나님의 일이 바로 간극 곧 3일이라는 간극을 벌린 자이다는 겁니다.

즉 거룩 성취입니다.

 

이 일에 모든 피조물이 다 동원이 된다고 했습니다.

곧 허무에 굴복한다고 했습니다.

 

여기에 유독 인간만이 배제 되었습니다.

그래서 숨어있는 것을 모르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 숨은 것을 그 분이 모든 실상을 드러내셨다 라는 겁니다.

 

다윗은 초반에 아주 아주 놀라운 고백을 합니다.

 

모든 피조물은 이 하나님의 일에 동원이 되는데

곧 숨어 있는 3일 이라는 간극을 벌리는 일에 동원이 되는데

 

이 일에 모든 인간은 숨어있음으로 인해 무시한다는 겁니다.

그리고 자기 일만 심각하게 보기 때문에

이 숨은 일을 무시함으로써

자신의 일을 관철 시키고자 자살을 한다는 겁니다.

아니면 타살을 한다는 겁니다.

 

가룟 유다는 자살과 타살을 동시에 다 이룬자입니다.

사실 모든 인간은 여기에 다 해당됩니다.

자살과 타살을 늘 꿈꾸고 있는 겁니다.

 

여기에 차이가 나는 선지자 노선의 사람들은

바로 이 무시 받는 일을 하는자 이다는 겁니다.

허무하게 무시 당하고 허무하고 죽임을 당하고자 하는 자가 바로 선지자이다 라는 겁니다.

마치 모든 피조물이 허무에 굴복하듯이 말입니다.

 

그러나 성령을 받지 않은자

거룩이 입힘을 당하지 않은 자의 삶은 이 허무와 무시가 아닌

정반대로

남을 죽이지 못해서 자살하는 것이고

자살을 통해서 타살을 이루는 겁니다.

 

해탈? 웃기는 소리죠 그게 타살입니다.

 

제가 성화론자들을 살인자로 보는 이유는

결국 타살하고 싶어서 자신을 쳐서 성숙 시키겠다는 짖이다는 겁니다.

 

저 세리와 같이 토색치 않게 해 주심을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라고 말입니다.

 

결국 성숙 되면 남을 정죄하는 입장의 위치에 놓여지는 겁니다.

그 정도로 나는 악한 놈이다 라고 인정한다면 그렇게 하면 됩니다.

문제는 나는 악한 자이다 가 안 될려고 성숙한다는게 문제인 겁니다.

 

완장효과라는 것이 있는데 경찰 알바와 범죄자 알바와 15일 씩 나누어서

높은 알바비 이런 씨 ~~ 시급을 주고서 심리상태를 조사했는데

경찰완장을 팔에 찾을때에 더욱더 폭력적이 된다는 겁니다.

 

법이 보장해 주니까 말입니다. 법이 내 편이니까 말입니다.

저 범죄자 같이 되지 않음을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라고

하나님이 내 편이 되어 주니까 말입니다.

 

범죄자 보다 더 폭력적이다는 거죠.

? 책임감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울을 왕 자리에 앉히고

다윗도 왕 자리에 앉혀 보는 겁니다.

둘 다 폭력적이기는 마찬가지 도찐 개찐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가급적이면 선생이 되지 말라고 하는 이유가 바로 저런 이유인 겁니다.

남을 가르치는 위치에 가급적이면 앉지 말라고 하는 겁니다.

어쩔수 없이 앉게 되면

자신의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한 입에서 나오는 것을 직시해야 한다는 겁니다.

 

즉 혀를 다룰 수 있는 자가 없다는 겁니다.

 

오늘 본문처럼 자신의 허물을 깨달을 자 누구랴? 없다 라는 겁니다.

자유로울수 없다는 겁니다. 갇혔다는 겁니다.

 

그래서 더더욱 자살을 재촉하는 환경에 빠지게 되는 겁니다.

시험에 안 빠지고는 못 배긴다는 겁니다.

 

이 상황을 다윗은 정작 본인이 격어 본 입장이라서 지금 고백하는 겁니다.

 

그런데 놀라운 점이 있다는 겁니다.

 

그 왕 자리 포기 하시면 이 심각한 것이 아주 아주 쉽게 해결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포기 할 자도 없고

그 자리가 놓아 주질 않는다는 겁니다.

 

잡고자 끝까지 책임지라 라고 붙잡고 놓아주질 않는다는 겁니다.

마치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반지처럼 반지가 유혹하듯이

왕 자리인 왕의 의자가 왕의 보좌가 놓아주질 않습니다.

 

너 아니면 왕 할 사람이 없다고 주변에서 가만히 놓아두지 계속 붙들어 놓습니다.

 

여기서 빠져나올수 있는 자 있을까요?

 

다윗 본인이 직접 격어 봐서 하는 소리입니다.

 

그래서 왕은 강도인 겁니다.

두 강도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힙니다.

한 쪽 강도는 사울왕이요

다른 한 쪽 강도는 다윗 왕입니다.

 

저 마다 교회를 세워 하나님 나라 답게 해 보고자 했는데

그것이 강도 짖만 했던 겁니다.

 

그래서 한 사람은 억울하다 이고

다른 한 강도는 그 실패를 통해서 당신의 나라에 저를 기억해 달라고 합니다.

 

이와 비슷한 상태가 바로 사도바울이 로마서 7장을 통해서 고백합니다.

율법을 한번 맛 본 자들은

두 개의 세력이 자신 속에서 싸운다고 합니다.

그 싸움 자체가 종결이 되지 않기 때문에

 

졸지에 곤고함에 빠져버린다 라는 겁니다.

 

바울이 만만치 않게 율법으로 자신을 거욱하게 만들어 볼려고 했던 최전방의 사람이였고

거기에 확신과 자부심이 그 어떤 누구 보다 강한 자였다는 것을 우리는 다 압니다.

 

그런 그도 결국 실패입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졸지에 지옥의 상태가 되었다 라는 겁니다.

 

지옥

 

천국 흉내 낼려다가 졸지에 지옥이라는 현실을 직시하게 됩니다.

 

그것도 이루 말도 못하는 숨어있는 은폐된 허물을 누가 깨닫냐 말이죠.

그러니 지옥상태의 마음이다 라는 겁니다. 곤고함

 

이것이 십자가와 제대로 꽝 하고 부딧힌 자의 모습인 겁니다.

 

드러나는 죄도 감당이 불감당인데

숨어 있는 허물까지 깨달을 정도면 해탈의 해탈을 770번 해도 소용이 없다 라는 겁니다.

안 뚫힌다 안통한다 라는 거죠.

막힌 담은 더욱더 견고해 진다는 겁니다.

단단한 회칠한 무덤처럼 말입니다.

 

백날 등신불해서 자기 몸을 태워도 옥구슬 사리가 나와도

숨어 있는 허물은 안 나옵니다.

몸뚱아리는 몇 번을 태워야 합니까?

 

나는 MB 파가 아니라

나는 그네 파인데 왜 나를 건드리나 라고 억울하다고 백날 자살해도

허물은 안 벗겨지는 겁니다.

 

이유는 간단 합니다.

 

내가 죄를 짖는게 아니라 죄가 나를 가지고 놀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제발 자살하지 마시고

제발 뻔뻔스럽게 막 사세요.

 

이것이 예정입니다.

 

예정이란 막살기가 예정되어 있다 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예정은 십자가만 예정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십자가의 기능을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는 막살기 싫어도 막 살 수밖에 없고

반대로 예정되지 않은 자는 절대로 막살수가 없도록 되어 있다 라는 겁니다.

 

나는 주께만 범죄 했다 라고 말입니다.

 

이야 이것처럼 은헤로운 말씀이 없습니다.

 

내가 모친의 죄 중에 태어났습니다 라는 아는 것 보다 로또 맞은 대박이 없는 겁니다.

최고의 지혜입니다.

이것을 아는 자가 없다 라는 겁니다.

주님의 끝까지 섬기심 곧 십자가의 죽음 때문에 비로소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구지 없어도 저런 소리 할 줄 안다 라고 주장하는 것이

오늘날 가짜 교회들이다는 겁니다.

 

성화론자들이 제일 공격하는 내용입니다.

은혜를 공격하는 자들입니다.

 

죄 죄 죄 그만 카라 라고 합니다.

 

마치 부끄러운 구원이라고 교회가 성경말씀을 공격하는 식과 같습니다.

 

구원이 얼마나 영광스러운데 부끄러운 구원이라고

구원은 구원인데 부끄러운 구원이라고 말할 정도로

교회는 이단들이다는 겁니다.

구월을 얼마나 얍잡하 봤으면 저들의 입에서 만들어내는 용어가 생성 되는 겁니다.

단어로 최면을 거는 겁니다. 마약이요 집단 최면인 겁니다.

 

그것을 숨길려고 신천지나 공격하는 거죠.

 

신천지 신흥집단이 돈 때문에 서러움을 받다가 이제 돈이 되니까

겁 없이 조폭형님들에게 덤벼드는 겁니다.

 

둘 다 그렇게 물갈이를 하는 거죠.

 

힘의 싸움, 육적 전쟁이지

영적인 전쟁인 자기부인은 없는 겁니다.

 

오히려 자기부인의 달인인 불교인들만 종교인의 달인들만 난무하는 겁니다.

 

즉 영적 전쟁은 자기 허물을 깨닫는 것이 영적전쟁에 속한 문제이다는 겁니다.

 

그럼 갇혔는데 어떻게 자기부인이 가능합니까?

 

그러니까 불가능하다는 겁니다.

 

그런데 불가능함에도 불구하고 늘 이미 그 불가능성이 함께 했다 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에

 

(19:1, 개역) [다윗의 시, 영장으로 한 노래]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19:2, 개역)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19:3, 개역) 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19:4, 개역) 그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 말씀이 세계 끝까지 이르도다 하나님이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베푸셨도다

(19:5, 개역) 해는 그 방에서 나오는 신랑과 같고 그 길을 달리기 기뻐하는 장사 같아서

(19:6, 개역) 하늘 이 끝에서 나와서 하늘 저 끝까지 운행함이여 그 온기에서 피하여 숨은 자 없도다

 

늘 이미 숨겨진 것이 없이 다 드러날 정도로 그 불가능성이 늘 함께 해 왔다 라는 겁니다.

 

즉 우리가 늘 무시했던 3일이라는 간극이

늘 함께, 3일이라는 불가능성이 늘 우리를 붙잡아서 자살하지 못하도록 섬겨왔다 라는 겁니다.

 

즉 우리가 만들어 낸 적도 없는 공기가 늘 함께 해 왔다 라는 겁니다.

즉 불가능성의 공기가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공기 안 마실 거야 라고 할 권리가 없다 라는 겁니다.

그리고 나는 좋은 공기만 마실 거야 라고 말할 권리 조차도 없습니다.

그런 의식 조차 없이도 마시도록 하신 은혜가 곧 불가능한 은혜가 이미 늘 함께 했다 라는 겁니다.

 

너가 손가락으로 공기의 은혜를 세든 안세든 이미 너가 계산을 하면서 세는 것과 무관하게

이미 공기가 너를 다루도록 공기의 바닥 속에 풍덩 빠드렸다 라는 겁니다.

공기에 갇혀 버렸다 라는 겁니다. 감히 건방지게 공기에서 벗어날려고 뭐 자살?

그래서 권리가 없다 라고 자꾸 주장하는 이유입니다.

공기에게 허락 받았냐 말이죠?

 

오늘 본문에는 그것이 해로 표현 되어 있습니다.

곧 빛입니다. 너가 빛에서 벗어나겠다고?

 

태양을 피하고 싶어서

태양이 안 비추이는 곳에 피할수 있다고 여기냐 라는 겁니다.

절대로 태양에서 못 벗어나도록 했다 라는 겁니다.

즉 빛에서 벗어날 숨어있는 것이란 없다 라는 겁니다.

 

그렇게 주장하고서는

갑자기 숨어있는 자기 죄악을 깨달을 자 누가 있느냐 라고 반전의 내용을 언급합니다.

그 이유는 태양과의 관계

해 와의 관계

빛과의 관계를 염두하고서

표현 한 겁니다.

 

나는 태양을 피하고 싶어서 숨어버렸는데

정작 태양은 나의 숨은 것 들추어내는 것에 멈추지 않고

늘 나를 발가벗기는데 까지 더더욱 나아간다는 겁니다.

 

나는 내 7가지 죄를 덮는데 모래를 덮는데 평생을 허비하는데
(우상숭배, 평생 기도 찬양, 예배 봉사, 이웃사랑 실천 이런 것들로 평생 허비

내가 알아냈기 때문에 내가 인지 한 죄만 덮는데 허비)

옆에서 태양은 나의 770의 죄악을 발가벗기는데 평생을 섬기더라 말이죠.

(니는 그거 해라 나는 이거 할란다. 전혀 내 속에 저런 것이 숨어있었는가? 나도 모르는 죄를 발가벗기는 겁니다.)

 

 

숨어있는 자기 죄악을 깨달을 자는 없지만

그 숨어있는 것을 모조리 다 들추어내는 빛은 있다 라는 겁니다.

 

고로 나는 어두움 이다 라는 겁니다.

 

바로 이 관계를 예수님은 유지하는 겁니다.

빛은 유지하는 겁니다.

소금은 유지하는 겁니다.

태양은 계속해서 이 관계를 유지하는 겁니다.

 

즉 빛과의 관계를 누리는 자는 어두움인 죄인 중의 괴수 뿐이다 라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평생 우상숭배만을 하는 겁니다.

늘 뭘 해도 다 죄 뿐이요

우상숭배인 겁니다.

 

구원자 와의 관계 속에 놓여진 자는 바로 죄인이지

의인이 아니다 라는 겁니다.

 

의원과의 관계에 놓여진 자는 환자이지

건강한 자가 아니다 라는 겁니다.

 

그래서 뻔뻔스럽게 나는 해와 연관 된 자로써

빛과 연관 된 자로써

 

나는 죄인입니다 라고 지금 다윗은 고백하고 있는 겁니다.

이런 죄인 중의 괴수도 주님과의 관계에 놓여졌다 라는 이것이

바로 선물로써의 시편 곧 노래 찬양이다 라는 겁니다.

 

이 관계 때문에 우상숭배자로 만드시는 겁니다.

인구조사케 만드시는 겁니다.

관계는 누가 유지한다? 예수님 쪽에서 말입니다.

 

즉 우리는 벙어리요 이런 노래를 할 줄 모르는

찬양도 못하는 자인데

 

즉 원수인데

 

이런 노래를 선물을 받아서 화답하게 된 것은

바로 나는 죄인 중의 괴수로써 예수님은 빛으로써

그 빛에 비추임을 당하고

섬김을 당함으로써

나오게 된

 

원인 없는 결과이다 라는 겁니다.

 

나는 7번의 죄악을, 숨어있지 않은 죄악을 의식해서 그거 덮을려고 땅파서 모래를 덮을려고 하는데

 

예수님은 바로 옆에서 그게 우상숭배라고 오히려 예수님은 나의 숨은 죄악 나도 모르는 숨은 허물 770의 죄악덩어리를 퍼내고 있다 라는 겁니다.

 

그러니 그런 헛짓하지 말라 라는 겁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나에게로 오라 내가 쉬게 하리라

 

왜 쓸데 없고 곤고함에 빠지느냐 말이죠.

 

니가 뭐 너의 어두움을 해결하겠다고?

어두움도 해결 못하는 주제에

~~~~~~

 

빛이 되겠다고?

 

너가 너의 썩은 부패나는 냄새도 해결 못하는 주제에

~~~~~~~~

 

소금이 되겠다고?

 

너가 도리어 소금 뿌림 당하는 섬김 받아야할 썩은내 나는 썩은 자 이다 라는 겁니다.

곤고한 자이다 라는 겁니다.

 

주님의 섬김이 얼마나 놀라우면

원인 없는 결과로써

 

곤고함에서 언제 갑자기 바뀌어서

예수 안에는 결코 정죄함이 없도다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라고 하는 겁니다.

 

너가 새것이 되는데 보탬이 된 적이 있니? 없다는 거죠. 원인 없는 결과다 라는 겁니다.

 

 

우리가 해를 만들어 낼 수 없듯이 불가능성이 덮쳤다 라는 겁니다.

백날 과학과 종교와 모든 신들을 다 동원해 보세요 태양을 만들어 낼 수 있는가?

 

없잖아요

 

그런 불가능성으로써의 태양이 늘 우리에게 이미 늘 항상 함께 해 왔다 라는 겁니다.

 

불가능한데 말입니다. 늘 함께 그 불가능성이 우리에게 늘 덮쳐왔다 라는 겁니다.

원인 없는 결과로써 말입니다.

공기도 말입니다.

 

더 깊이 들어가면

 

(19:1, 공동) 하늘은 하느님의 영광을 속삭이고 창공은 그 훌륭한 솜씨를 일러줍니다.

(19:1, 쉬운) <하나님의 솜씨와 말씀-다윗의 시. 지휘자를 따라 부른 노래>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창공은 주님의 솜씨를 알립니다.

(19:1, 현대어) [위대하신 하나님의 법; 다윗의 노래. 지휘자의 지휘에 따라]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이야기하고 창공이 주님의 솜씨 널리 알려 줍니다.

 

하늘은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창공은 하나님의 손으로 만들어낸 솜씨를 자랑하고 뽐내고 나타낸다 라는 겁니다.

 

여기에 인간이 개입이 되겠느냐 하는 점입니다.

인간이 힘을 보탠적이 있냐 라는 겁니다.

지금 해 보세요

태양아 떠라 라고 보탤수 있는지?

 

오히려 놀랍게도 철저하게 배제 소외 단절 되었다는 것을 직시할 겁니다.

그런데도 태양을 우리는 누리는 겁니다.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누리는 겁니다.

공짜로 말입니다.

 

놀랍게도 인간은 여기에 하등의 조금도 개입은커녕

단절만 된 배제된 소외된 입장이다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이 하는 짓이란 놀랍게도 갇혀있습니다 라는 증거로써

죄짖기 빡에 없다 라는 겁니다.

 

뭘 해도 다 죄 밖에 없다 라는 겁니다.

 

예배 드리는 죄

말씀증거하는 죄

찬양하는 죄

기도 드리는 죄

성경공부하는 죄

 

인간이 할 줄 아는 것은 이것 밖에 없습니다.

 

즉 갇혔다 라는 증거요

베제 소외 단절 되었다는 증거이다는 겁니다.

 

그래서 외부에서 와야 하는 겁니다.

인간이 얼마나 건방지면 자기가 그 갇혀있는 상황을 뚫어볼려고 시도한다는 점에서

하다 하다 안되니 자살까지 동원하는 겁니다. 타살까지 동원하는 겁니다.

 

구원을 뚫어볼려고 말입니다. 바벨탑 세운 이유도 그런 이유입니다.

벽돌과 역청이라는 본드와 강한재질은 인간의 소통을 가능케 했습니다.

화폐가 결국은 썩지 않는 영원불멸을 담고 있기 때문에

돈에 집착할 수 밖에 없도록 되는

즉 돈에 갇혀버리는 겁니다.

 

바벨탑은 최초의 국가요 최고의 네트워크 최초의 와이파이 최초의 유비쿼터

최초의 신이 인간의 손에서 만들어진 겁니다.

 

그 정도로 갇혀있는 막힌 담을 뚫어보겠다 라는 욕망

그 결핍을 더욱더 갈증나게 만들어 버리는 겁니다.

에덴동산을 내 놔라 라는 시위요 데모인 거죠.

 

천국 내 놔라 라는 시위입니다.

 

차단된 길을 뚫겠다 라는 겁니다.

 

안 내 놓으면 니가 만든 나를 자살시켜 버리겠다.

나는 너의 피조물이 되기 싫어 라고 자기를 죽여버림으로써 복수하는 겁니다.

 

그것도 안되면 아벨을 죽여 버리겠다

예수님을 죽여 버리겠다 라는 식입니다.

 

빨리 천국 내놔 라고 협박하는 겁니다.

 

그래서 생긴 것이 허무입니다.

허무한 간극이 벌어지는 겁니다.

 

너희가 죽인 예수를 하나님이 3일 만에 다시 살려내셔서 주가 되게 하셨다 라고 합니다.

 

그 허무가 나의 주가 될 줄 누가 알았으리요????

 

그런데 천국 내놔 라고 협박하는 성화론자들은 양의 탈을 쓴 늑대의 모습인 겁니다.

개혁주의도 마찬가지 이구요

돈으로 힘을 모아서 결국 바벨탑을 또 쌓겠다 라는 겁니다.

타살이든 자살이든 살인을 벌리겠다 라는 겁니다.

구원을 달성하고야 말겠다 라는 겁니다.

 

날 막지마 날 막으면 다 죽여버리겠어 라는 것이 갇혀있다는 증거인 겁니다.

 

(4:19, 개역) 라멕이 두 아내를 취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며

(4:20, 개역) 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막에 거하여 육축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4:21, 개역) 그 아우의 이름은 유발이니 그는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

(4:22, 개역) 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동철로 각양 날카로운 기계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이었더라

(4:23, 개역)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창상을 인하여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을 인하여 소년을 죽였도다

(4:24, 개역)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하였더라

 

 

다윗도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다 죽여버리겠다 라는 겁니다.

우리야도 그렇게 죽임 당했습니다.

허무하게 말입니다.

 

그런데 그 허무가 다윗을 건지는 겁니다.

다윗이 잘나서가 아니라

그 죽음이 도리어 다윗을 건지더라 말입니다.

원수를 말입니다.

 

그래서 이 사랑을 이 십자가의 용서를 순환의 고리로 만드는 겁니다.

그래서 꼬끼오 곱하기 3 병살타의 간극이라는 단절이

이 허무가 주님 쪽에서의 섬김으로써 배려로써 작용하는 겁니다.

 

그것도 연달아 삼병살타

 

우리야의 죽음

이름 없는 아기의 꺽으신 뼈

남편도 아들도 다 죽임 당한 잃어버린 밧세바

 

이것이 숨어 있는 허물을 들추어내기 위한 더 더 더 숨겨진 은혜이다는 겁니다.

 

즉 숨어있다는 것은 드러나지 않는다는 겁니다. 언젠가는 드러날 것 같으면 숨어있다고 말 할 필요가 없습니다.

 

유혹이 왜 유혹입니까? 이길 수 없기 때문에 유혹입니다.

이길 수 있다면 유혹이라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 믿음을 믿음이라고 하겠습니까? 도저히 믿는 것이 불가능하기에

불가능성으로써 믿음입니다. 행함으로는 안 된다는 의미이다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어느새 가능성으로써의 믿음으로 다 바꿔 버렸습니다.

성령도 마찬가지

그것이 행함인 거죠.

 

그래서 사도바울은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누가 꾀더냐 라고 하는 겁니다.

 

특히 구원은 저들이 모조리 가능케 만들어 버렸습니다.

 

단절성만 빼만 밥벌이가 되고

불가능성의 단절성을 그대로 놔 두면 하여튼 타살이든 자살이든 사건이 벌어지니까 싫은 겁니다.

 

에덴동산과 같게 만들어야지

 

가인과 아벨의 사건의 상황에서 한 치도 못 벗어나는 사건이 벌어지는 삶은 싫타 라는 겁니다.

 

다윗도 오로지 이스라엘을 에덴동산과 같은 천국을 만들어 볼려고 환장했지요

사울도 그렇게 할려다가 악령이 씌였구요

 

그런데 다윗은 하나님의 간섭으로 인해 매(선물: 몽둥이)를 대시는데

오히려 이제는 이스라엘을 쫄딱 망하게 하는 기준점 시작점으로써

다윗은 비로소 알게 된 것이

 

하늘은 주의 영광을 외치고 창공은 주의 솜씨를 뽐내고

낮은 넞에게 밤은 밤에게 하나님의 지식을 전파 하고

언어도 없이 들리는 소리도 없이

하늘 이쪽에서 하늘 저쪽까지 온 천지에 이 소식이 가득하다 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즉 이 간극만 있으면 됐다 라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없어도

이미 이루어졌다 라는 겁니다.

 

그러니 이스라엘 자체가

성도 자체가 하나의 미끼로써 작용해서

이 허무에서 나오는

이 간극에서 나오는

긍휼을

인애와 자비를

주의 지혜를 나타낸다는 겁니다.

 

있음에서 있음으로가 아닌

없음에서 없음으로가 주의 지혜를 오히려 또렷하게 나타내더라 말이지요.

 

그래서 허무를 쳐다 보는 겁니다.

예수님을 쳐다 보는 겁니다.

 

그의 후손에게 주여 라고 부르는 겁니다.

 

주를 쳐다 보는 겁니다.

 

자신을 찌른 창이 바로 자신을 구원할 십자가이다 라는 겁니다.

 

다윗은 예수님의 때를 바라 본 겁니다.

아브라함이 본 예수님 말입니다.

허무였던 아벨이 봤던 예수님 말입니다.

 

낮은 낮에게

밤은 밤에게 전하는 그 소식을 들었뿟다 아이가

 

그 십자가라는 기쁜 소식

즉 나는 모친의 죄 중에 태어난 죄인이라는 소식을 말입니다.

 

희년의 소식을 들었뿟다 아입니까

 

그래서 갇혀도 상관이 없는 겁니다.

허무 해도 상관이 없는 겁니다.

즉어도 상관이 없는 겁니다.

실패 해도 상관이 없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쫄딱 망해도 상관이 없다 아이가 말입니다.

 

이미 불가능성이 항상 함께 하기 때문입니다.



Posted by 김 대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