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의 진짜 원수인 다윗 자기자신을 향한 영적전쟁

주여! 들으소서 응답하소서 야곱의 그 하나님 이름으로 (시편 20편)


 

(20:1, 개역) [다윗의 시, 영장으로 한 노래] 환난 날에 여호와께서 네게 응답하시고 야곱의 하나님의 이름이 너를 높이 드시며

(20:2, 개역) 성소에서 너를 도와주시고 시온에서 너를 붙드시며

(20:3, 개역) 네 모든 소제를 기억하시며 네 번제를 받으시기를 원하노라(셀라)

(20:4, 개역) 네 마음의 소원대로 허락하시고 네 모든 도모를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20:5, 개역) 우리가 너의 승리로 인하여 개가를 부르며 우리 하나님의 이름으로 우리 기를 세우리니 여호와께서 네 모든 기도를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20:6, 개역)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속한 바 기름부음 받은 자를 구원하시는 줄 이제 내가 아노니 그 오른손에 구원하는 힘으로 그 거룩한 하늘에서 저에게 응락하시리로다

(20:7, 개역) 혹은 병거, 혹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

(20:8, 개역) 저희는 굽어 엎드러지고 우리는 일어나 바로 서도다

(20:9, 개역) 여호와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부를 때에 왕은 응락하소서

 

 

제가 좋아하는 곡으로써 합창으로 부르면 무지 신나는 곡입니다.

제목을 노래 시작하는 부분으로 했습니다.

 

지난 시간에 시편 18편을 통해서 이제 원수가 더 이상 없는

다 사라진 입장인 것 같았는데

정작 비로소 진짜 원수가 나타나는데

다윗의 원수는 바로 다윗 자신이였다는 겁니다.

아니 하나님의 진짜 원수는 다윗이다는 겁니다.


이 원수로 부터 다윗은 건져달라고 외치는 겁니다.

 

다윗은 과연 자신의 숨은 죄 까지도 깨달을자 있느냐 라고 묻습니다.(시편 19편)

본인도 결국 자신의 숨은 죄 까지 못 깨닫는 자인 원수이다는 겁니다.

 

죄란 죄라고 이름을 붙일려면

내가 그것을 의식해야 합니다.

그런데 의식할 수 조차 없는

나의 영역을 벗어난 입장이기에

오히려 죄 아래 갇혀있다는 겁니다.


죄 밖에서 죄가 없는 상태에서 죄 라고 규정해야 하는데
죄 아래에 갇혀 있는 주제에 죄를 논할 자격 조차도 없게 된 철저하게 갇혀버린 자이다는 겁니다.
 

이제 더 이상 원수가 없고

다윗을 괴롭히는 자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여호와는 진짜 원수를 들추어내시는데
(그리고 본격적인 이스라엘이라는 종말성이 드러나는 겁니다.
원수도 없는데(사울왕 세력) 오히려 이스라엘은 쫄딱 망하는 길로 본격적인 내리막길을 가는 겁니다.
끝을 미리 앞당겨서 종말을 보여주는 자로써의 이스라엘이다는 겁니다.)

 

다윗은 비로소 자신의 허물을 덮어 주시는 상황이 왔다고 여겼는데

오히려 여호와는 비로소 다윗의 허물을 들추어내는 상황이 비로소 되었다고 들추어내시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시편 18편 원수로부터 구원을 찬양을 외친 그 다음 사건이 바로 사무엘하 22-24장까지의 다윗의 인구조사 사건입니다.

 

바로 이렇게 다윗을 죄인 중의 괴수로 만드는 사건을 통해서

다윗을 구원시키는 겁니다.

다윗의 숨어 있는 허물 속에서 건지시는 구원이다는 겁니다.

 

다윗 하나를 보고 힘센 장군들이 이제 대세가 되어버린 다윗에게 몰려서

찬양대가 결성이 되는데

이것이 천국의 모습을 보여주는데

정작 이 모습을 힘으로 보고 힘으로 모이게 되자

주님은 다윗을 넘어뜨리시고자 인구조사케 하신 것이다 라는 겁니다.

 

그리고 힘으로 모이게 되면 아무리 천국을 지상에 구현해도

정작 천국에 가고픈 마음이 없는

어디까지나 그림자는 그림자일 뿐 따라하지 말자 인데

실상은 내 버리고 그림자만이 그 마음에 가득차 버리게 되니까

 

바로 넘어뜨리는 겁니다.

 

그리고 다윗을 처음자리 곧 죄인 중의 괴수의 자리에서

고백케 하시는 겁니다.

 

주여 들으소서 응답하소서 야곱의 그 하나님 이름으로

 

이 시편 20편에서 늘 궁금했던 것이

왜 아브라함의 하나님은 안되는가?

이삭의 하나님은 안 되는가?

요셉의 하나님은 안 되는가?

모세의 하나님

다윗의 하나님은 왜 안 나오고

 

하필이면 야곱의 하나님일까? 라는 궁금증입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이삭의 아내 리브가가 원수의 성문을 여는 자여 너는 축복된 여자이다 라고 했는데

네 씨가 원수의 성문을 연다고 했습니다.

 

(24:60, 개역) 리브가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우리 누이여 너는 천만인의 어미가 될지어다 네 씨로 그 원수의 성문을 얻게 할지어다

 

(22:17, 공동) 나는 너에게 더욱 복을 주어 네 자손이 하늘의 별과 바닷가의 모래같이 불어나게 하리라. 네 후손은 원수의 성문을 부수고 그 성을 점령할 것이다.

 

그래서 야곱은 전쟁과 관련되어있다는 겁니다.

싸움꾼 이스라엘 말입니다.

 

즉 전쟁을 말하는데 있어서 야곱이요

그 전쟁에는 결국 원수가 있다는 거죠.


그러나 정작 그 씨는 야곱도 아니요 다윗도 아닌 결국 예수님이였다는 거죠.

나를 원수 삼는 자는 예수님 뿐이다는 겁니다.
나를 상대로 전쟁 벌리는 분이니 말입니다.
 

결국 다윗의 시편 20편은 출애굽 사건을 지금 말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애굽이 원수인데

지금은 누가 원수입니까?

 

시편 18편에 원수 곧 사울왕 세력에서 건짐을 받았는데

역시나 힘을 추구하는데 있어서

한 입에서 찬양과 저주가 동시에 나오게 되는

인구조사를 하게 되는 죄를 짖게 되더라 말이지요.

 

그래서 이제 숨어있는 원수가 누구인가?

숨어 있는 허물이 누구인가를 말하는데 있어서

 

다윗은 다윗 세력 내부에 있는 자기자신을 포함해서

오늘 본문

 

(20:6, 개역)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속한 바 기름부음 받은 자를 구원하시는 줄 이제 내가 아노니 그 오른손에 구원하는 힘으로 그 거룩한 하늘에서 저에게 응락하시리로다

(20:7, 개역) 혹은 병거, 혹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

 

(20:6, 공동) 야훼께서 기름 부으신 임금에게 승리 주심을, 그 거룩한 하늘에서 그의 기도 들으시고, 오른손 힘차게 뻗어 승리 주심을!

(20:7, 공동) 누구는 병거를 믿고 또 누구는 기마를 믿지만, 우리만은 우리 하느님 야훼의 이름을 믿사옵니다.

 

힘을 추구하는

병거를 믿고

기마를 믿는

바로 애굽적인 요소를 지적 당함으로써

이 원수의 손에서 건지시는 오른손이다 라는 겁니다.

 

즉 오른손은 나의 외부의 사울왕 패거리에서만 건져 구원해 주시는 것이 아니라

나의 내부의 나의 숨어있는 원수성으로부터도 건져 주시는 구원의 손이다 라는 겁니다.

 

이중구원 즉 구원은 한 번 구원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관계성이기 때문에 무한반복의 구원이다 라는 것입니다.

 

물론 단번에 피흘리심이기에 단회성 맞습니다. 바로 그것이 관계이다 라는 겁니다.

즉 숫자를 세알릴수 있는 그런 의미가 아니다 라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은 기어코 구원을 숫자로 세는 겁니다.

즉 구원을 힘으로 보는 겁니다.

병거로 보는 겁니다.

기마로 보는 겁니다.

 

아니 구원이 바로 병거로부터 구원인데

기마로부터 구원인데

엉터리 구원, 숫자 구원으로부터 구원받는 구원인데

 

우리는 기여이 힘으로 세알리고자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인구조사해서 쫄딱 망해가

주여 이렇게 또 지적해주시고

사생아 같이 내버려두시지 않고 간섭해 주시니

제가 구원을 얼마나 얍잡아 봤으면 이렇게 고쳐 주십니까?

 

내 구원이 중요한게 아니라

구원이 이 정도로 깊고 넓고 높다 라는 것을 나타내고자

나를 의도적으로 죄인 중의 괴수로 만든다 라는 겁니다.

 

선 줄로 생각하지 말라 넘어질까 두려워 하라

정작 두려운 것은

 

남들이 다 죽어나갈 때 나도 같이 따라 죽게 되면 안 두려운데

진짜 두려운 공포는 남들이 다 죽을 때 왜 나는 안 죽느냐 라는 겁니다.

 

똑같은 잘못을 했고

똑같은 불 속에 들어갔는데

자신은 안 타죽는 이유는

 

진짜 두려운 분의 등장 때문이다 라는 겁니다.

 

내가 잘나서가 아니라 말이죠.

 

그래서 사랑은 두려움을 내어 쫏는다고 합니다.

즉 사랑 자체가 진짜 두려움이기에

되도 않는 가짜 두려움은 두려움 속에도 안 속한다 라는 겁니다.

 

진짜 두려움은 바로 사랑이다 라는 겁니다.

 

진짜 두려움 되신 주를 두려워 하는 것이 사랑이다 라는 겁니다.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을 지어다

라고 아주 무시 무시한 말씀을 예수님이 하시는 겁니다.

 

이 예수님만을 두려워 하는 자는

주를 사랑하는 자입니다.

 

인간의 말에 두려워 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인간이 추구하는 것이 바로 힘 병거 기마를 내세우기 때문인데

그것이 하등 두려울 것이 없는 것이

 

그것을 다 없애버리는 구원이기 때문에

반드시 구원을 말하는데 있어서

 

이것 까지 나타나 주어야 한다는 겁니다.

 

애굽 왕을 강퍅케 하심으로써

구원을 말하는데 동원 시켰듯이

 

우리가 구원을 노래하는 선물을 받게 된다면 반드시

나의 외부와

나의 내부에서 이것들이 동원이 되어서

아작 나고 지근 지근 밟혀나가는

 

주의 승리를 직접 목도하게 된다는 겁니다.

 

결국 나를 죄인 중의 괴수 만들어서

창녀 만들어서

세리와 강도 만들어서 구원시키는 사건으로써

 

병거와 기마를 곧 힘을 추구하고픈 그 마음을 품케 하셔서 아작 내시는

그 관계를 주님께서 늘 유지시키는데 있어서

 

사생아처럼 내버려 두지 않는 그 사랑을 보게 되는 겁니다.

물론 1초이지만

 

얼마나 야무지게 준비하셨는지를 보게 하시는 겁니다.

 

도대체 왜 이러시나?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는데

주님 쪽에서 하시겠다는 그 믿음 때문에

나의 믿음과 신념 오기들은 다 거짓으로 판명이 나야만 하고

내 믿음을 구지 가질 필요성이 전혀 없을 정도로

주님의 믿음이 이런 관계성으로써 몰고간다는 것을 다윗은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힘과 병거와 기마가 딴게 아니라

기여이 내 힘으로 내 의지로 내 믿음으로 내 행함으로

나를 반드시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로 내가 만들겠다는 그것이

결국 힘의 사고방식이였지

 

구원을 깨뜨리는 구원의 사고방식이 아니였다 라는 거죠.

십자가의 사고방식이 아니였다 라는 겁니다.

 

즉 딴 사람은 몰라도 나 만큼은 절대로 예수님을 버리지 않겠다

예수님이 죽으시는 십자가에 까지 따라가 주와 함께 죽겠다 라는

이 되도 않는 힘을 와르르 무너뜨린다는 겁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세 번 씩이나 절대로 나는 예수를 모른다고

오리발 닭발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해서

예수님을 절대로 모른다고 해야할 판국으로 예수님은 나를 몰고가셔서

 

내가 전혀 준비한 적도 없는 긍휼을 용서를 준비하셔서 용서 하시더라 말이죠.

바로 예수님의 피 흘리심 곧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말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원치 않습니다.

그것 없이 충분히 구원의 여러 가지 길이 있다고 우기면서 주장합니다.

오히려 교회가 더 그렇게 외쳤고

우리는 그런 교회의 구성원으로써 힘을 추구한 겁니다. 병거 기마 말입니다.

사실 우리들도 구지 예수님이 죽으실 필요까지 없는 구원의 장치를 원했던 겁니다.

 

그런데 주님은 오로지 이 구원 밖에 없다고 오로지 십자가만 밝히 보이는데 누가 꾀더냐 라고

이 방법 외에는 없다고 하시는 겁니다.

 

결국 나를 원수 만드시는 방법 뿐이다 라는 겁니다.

 

나를 죄인 중의 괴수 만들어서 구원 시키는 방법 뿐이다는 겁니다.

 

그 정도로 우리는 단절되었고

죄인 중의 괴수이다 라는 것을 또 새삼 새롭게 알게 하시는 겁니다.

 

그 정도로 우리는 교회에 다녀도

십자가를 믿어도

이웃사랑 실천을 해도

그것 자체를 다 힘을 추구하는

병거와 기마를 의지하는 것과 같다고 주님은 무조건 뒤짚어 씌워서

 

오히려 반대인 무능하고 싫어버린바 되고 걸림돌이 되는

거리끼는 십자가를

 

나를 구원하는 장치로써만 쓰겠다고 하시는 겁니다.

즉 피흘리심이 없이는 사함이 없다 라는 겁니다.

 

시편 18편을 통해서 이제 다윗의 원수는 역사 속으로 사라져 없습니다.

그래서 구원을 찬양 했습니다.

찬양 하자 마자

그 자기 찬양에 매료되어 그만 자기에게 뿅갑니다.

자기 자신이 옳게 보이지

자기 자신이 원수로 보이지가 않는 겁니다.

 

찬양은 선물입니다. 인간이 할 수 없는 겁니다.

불가능성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찬양하게 되니까

자신이 올게 보이고 자신이 괜찮아 보이는 겁니다.

 

이렇게 찬양까지 하는데 자기가 미워지겠습니까?

자기를 미워 할수 있겠냐 말이죠.

그렇게 원수로부터 쫏겨다니면서 얼마나 수고를 했는지

자기가 자기를 다독 거려 주기 바쁜데

그래 그래 많이 힘들었지

이제 고생 끝이네

잘 참았어 라고

자기를 위로하기 바쁘고

자신을 도닥여 주기 바쁜데

 

어떻게 자신을 원수로 보고 미워하겠냐 말이죠.

 

그래서 인구조사를 시킨 겁니다.

 

더군다나 다윗은 유대인의 왕입니다.

이제 더 이상 다윗을 적대하는 세력이 없기에

모든 이들은 다윗의 외모를 보고

즉 힘과 병거와 기마를 보고 모이게 됩니다.

그리고 바로 천국을 지상에 옮겨 놓은냥

찬양대를 동서남북 333 333 333 333 십사만 사천으로 구성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이 십사만 사천은

신천지나 여호와증인이 주장하는

다단계 판매의 VIP가 되는 것이 아니라

 

짐승에게 인 맞지 않은 자들이다는 겁니다.

즉 힘과 병거와 기마를 의지하지 않아서

핍박받는 자들이다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신천지는

여호와증인은

힘을 모으고자

병거를 의지하고파서

기마를 의지하고파서

십사만 사천 안에 들려고 했다는 것에서

우리는 우상 숭배자 이다 라는 겁니다. 항상.

 

뭘 해도 다 우상숭배뿐이였다는 거죠.

 

힘을 추구하는 것은 다 우상 숭배요

탐심은 곧 우상 숭배라는 겁니다.

 

여기서 다윗이 시편 18편을 찬양했지만 정작

힘을 추구했고

또 장군들은 그 힘을 보고 모여들게 되었으니

이것이 우상숭배이니까

 

치시고자 인구조사 하라고 하신 겁니다.

 

사생아로 내버려 두지 않고 매를 대서라도 죄인 중의 괴수 만들어서

진짜 두려워 해야할 것이 무엇이냐 라고 묻는 겁니다.

 

베드로가 물에 빠졌습니다. 죽음이라는 공포 때문에

풍랑을 보고 죽을까 싶어서 물에 빠져 죽게 되었습니다.

 

제가 어머니께 이 부분을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형수도 그날 있어서 같이 나누었는데

 

믿음이 부족한 자여 라고 나무래시니까

아 그러면 믿음이 강하면, 믿음이 크면, 많으면 이길수 있겠구나 라고

다들 그렇게 설교하는 것을 들었기에

 

왜 빠졌는가? 믿음이 부족해서 믿음이 없어서 라고

 

대답하는 것이 틀렸다 라고 제가 말했습니다.

 

믿음이 부족해서를 우리는 오해 하기를 아 그러면 믿음을 강하게 가지면 되겠구나 라고 생각하는데

그것이 아니라 믿음을 정작 주님이 주시지 않는다는 겁니다.

 

문제는 예수님이 문제였지

베드로가 아니였습니다.

베드로는 처음부터 문제아 였기 때문에

새삼스럽게 이 사건에서 문제아로 낙인 찍힌게 아니다 라는 겁니다.

 

요나 선지자는 시키는 대로 했습니다.

문제는 하나님 쪽에서 배신 때렸던 겁니다.

 

다윗의 인구조사도 마찬가지

엘리야의 내 열심히 특심이다는 주장도 마찬가지

 

즉 하나님의 배신이다는 겁니다.

 

그러나 이 하나님의 배신이 아니면 그들은 예수님을 바라볼 수가 없었던 겁니다.

죄인 중의 괴수 만들기가 아니였다면 그들은 자기가 옳다는 것만 주장할 뿐입니다.
구지 예수님을 쳐다볼 이유가 없고 예수님의 때를 바라볼 필요가 없는 겁니다.


왜 배신을 하시느냐? 왜 속이시느냐?

안 속이면 안되나? 배신 하지 않으면 안되는가?

주님은 인간을 상대하시는게 아니라
마귀만을 상대로 하기 때문에
마귀를 거쳐 오라는 겁니다.
마귀를 거쳐서 예수님을 보면
하나님이 시키는대로 했는데 이렇게 배신 때리는 것을 격었을때에
나는 옳은데 왜 주님은 배신 때리는가?
바로 그런 사고방식이 우상숭배로써 그 힘의 사고방식을 들추어낸다는 겁니다.
주님의 배신이 아니면 안 들추어지니까 말이지요.

나는 옳기는 커녕 늘 항상 뭘 해도 다 죄 밖에 없었다 라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배신 때문에 나의 옳음이 무너지니까 그것을 탓하고 원망한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배신 때리지 않았다면 나의 옳음에 금에 가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 때문에 그만 나는 틀린 존재가 되어버렸다는 겁니다.

그 원망을 들추어내시니까 마귀를 거쳐서 드러내는 숨은 허물이다는 겁니다.

그것 마저도 용서하시겠다라는 겁니다.

7에 70의 허물 말입니다.
 

자신이 옳은데(남을 7번씩이나 용서 할 줄 아는데) 왜 예수님이 구지 필요하냐 말이죠. 7에 70번의 초과잉적인 용서는 필요 구지 필요 없다 라는 겁니다. 그 정도로 나는 나쁜 놈이 아니다 라는 겁니다.


죄인에게만 의사가 필요한 겁니다. 병든 자에게는 필요 없다 라는 겁니다.


남을 7번 용서하는 의인은 필요가 없다 라는 겁니다.

 

의인을 부르러 오신게 아닙니다.

자기가 옳은데 왜 예수님이 필요합니까?

왜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복종하시냐 말입니다.

정작 내가 옳은데 주님은 배신 때렸다면 주님이 나쁜 예수님이어야 하는데
또 놀랍게도 나의 우상숭배를 들추어내시고서는 그 죄악을 덮고자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신다는 겁니다.


(엡 2:16, 개역)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롬 12:20, 개역)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롬 12:21, 개역)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롬 11:20, 개역) 『옳도다 저희는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우고 너는 믿으므로 섰느니라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롬 11:21, 개역) 『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

(롬 11:22, 개역)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와 엄위를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엄위가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 바 되리라』

(롬 11:23, 개역) 『저희도 믿지 아니하는 데 거하지 아니하면 접붙임을 얻으리니 이는 저희를 접붙이실 능력이 하나님께 있음이라』

(롬 11:24, 개역) 『네가 원 돌감람나무에서 찍힘을 받고 본성을 거스려 좋은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얻었은즉 원 가지인 이 사람들이야 얼마나 더 자기 감람나무에 접붙이심을 얻으랴』

(롬 11:25, 개역)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있다 함을 면키 위하여 이 비밀을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 비밀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완악하게 된 것이라』

(롬 11:26, 개역)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 기록된 바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사 야곱에게서 경건치 않은 것을 돌이키시겠고』

(롬 11:27, 개역) 『내가 저희 죄를 없이 할 때에 저희에게 이루어질 내 언약이 이것이라 함과 같으니라』

(롬 11:28, 개역) 『복음으로 하면 저희가 너희를 인하여 원수 된 자요 택하심으로 하면 조상들을 인하여 사랑을 입은 자라』

(롬 11:29, 개역)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

(롬 11:30, 개역) 『너희가 전에 하나님께 순종치 아니하더니 이스라엘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이제 긍휼을 입었는지라』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럼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정작 물에 빠졌다면

베드로 생각 마따나 죽게 되었다면

죽어야 합니다.

 

죽음 보다 더 두려운게 뭐가 있냐 말이죠.

죽음 보다 더 두려운게 없는데 말입니다.

 

죽어야죠 뭐 어쩔수 없잖아요

남들도 다 죽는데 나도 죽을 수 밖에 없는 겁니다.

 

오히려 여기서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내만 죽는게 아니구나 라는 것은 아는 순간 위안이 되어 더 이상 안 두려워집니다.

마땅함을 알게 되면 말이죠.

 

그런데 진짜 두려움은 죽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안죽는다는 점이

진짜 두려움이다 라는 겁니다.

 

즉 무서운 죽음 보다 더 무서운 분이다 라는 겁니다.

 

죽기는커녕 도리어 살더라 말이죠. 이게 세례 아닙니까?

왜 사느냐? 이 분 때문인데

 

이 분이 내가 조금전 까지만 해도 물 위를 걸으면서 알던 그 분이 아니다 라는 겁니다.

 

아주 아주 낯설기 짝이 없는 분이라서

감히 감히 이렇게 밖에 다른 말이 나오지 않는 겁니다.

 

주여 당신 도대체 누구십니까?

 

이것을 불가능성(진짜 두려움)과 함께 머물기 라고 표현했었습니다.

아래에 이미 승리한 것을 누리는 것도 불가능성(이미 승리)과 함께 머물기입니다.

 

그래서 실패해도 상관 없는 겁니다. 불가능성을 이미 누려왔고 누리고 있고 누릴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사울이라는 원수 패거리를 없애주시는데 있어서

신나게 구원을 노래했습니다.

 

신나게 물 위를 걸었습니다.

 

그런데 갑지기 물에 빠지게 되어 죽게 되니

살려달라고 외치게 되고

거기서 죽지 않고 건짐받게 되니

 

도대체 나에게 구원을 베푸시는 주님 당신은 누구십니까? 라고 노래하는 겁니다.

 

오늘 시편 20편의 내용이 저에게는 그렇게 와 닿는 겁니다.

 

아 내가 믿고파 했던 예수님은 힘이 되고 병거가 되고 기마가 되는 존재이길 바랬는데

그것이 와르르 무너져서

 

나를 원수 삼아서 나를 애굽왕 삼아사

그 힘과 병거 기마를 모두 와르르 무너뜨리는 예수님으로써

 

도통 당신 누구요? 나는 당신이 도통 누구인지 모르겠오 라고 나올 수밖에 없도록 하시는 주님이 바로 진짜 두려움 그 자체인 예수님이다 라는 겁니다.

괴물 예수

 

도대체 나에게 왜 이러시는 겁니까? 아 영어 까먹었네

뭐였더라

쿼바디스는 아니고

보이

케 보이

 

아 맞다 케 보이

 

나에게 사건으로써 다가와서 그 사건이 나를 찔러

그 틈에서 나오는 전혀 다른 나를 구원하시는

 

야굽이 아닌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이스라엘(유대인)이 아닌 많은 과부 중에 한 과부 사렙다 여인

많은 문둥병자 중에 단 한명의 문둥병자 나아만 장군을 구원하시는

 

희년으로써의 복음이다는 겁니다.

 

진짜 영적인 전쟁은 바로 우상 그 자체인 나를 깨뜨리는

출자아를 벌리시는 전쟁이다는 겁니다.

 

자주 어머니와 나누는 이야기 중에

 

여리고성 곧 가나안에서 최고로 난공불락의 성곽인 여리고성은

그 어떤 무기도 없이

그냥 증거궤를 메고 하루에 한 바퀴 6일 동안 돌다가

마지막 일곱째 날에 7바퀴 돌아서

여리고성이 무너졌는데

 

바로 돌면서 나는 이렇게 하나님을 광야에서 원망했습니다 라는

죄인 중의 괴수임을 회개하는데 있어서

그 증거가 이 증거궤 안에 담겼다고 실토하였는데

 

그 어떤 원인도 없는 결과로 여리고성이 무너졌는데

 

이제는 제일 작은 아이성을 12 지파 모두가 다 달려 들어도

무너뜨릴수가 없게 된 겁니다.

 

이 차이의 간극이 뭡니까?

 

아이성을 칠때는

아무리 봐도 우리가 강하고 저들은 약하다 라는 겁니다.

 

나는 옳고 저들은 틀렸다 라는 겁니다.

(요나선지자 생각나죠.

이 믿음이 부서져 버리면 모든 것이 무너지기에 자살을 하는 겁니다.

선지자들과 자살요청이 괜히 연관된게 아닙니다.

 

이미 승리했기에 자기부정 속에 살고 있는데

새삼스럽게 자아가 생기니까 차라리 날 죽이세요 하나님 이라고 나오는 겁니다.

이미 주의 뜻대로 잘 이루어졌고 승리한 채로 나타나는 것 뿐인 사건들 뿐입니다.

나의 뜻이 구지 있을 필요가 없다 라는 겁니다.)

 

그리고 증거궤가 우리 손에 있고 저들에게는 없다 라는 겁니다.

 

졸지에 하나님의 선물이 힘을 추구하는 우상숭배로 빠진 겁니다.

 

지금의 우리들 또한 이런 사고방식이기는 마찬가지이다 라는 겁니다.

 

그래서 그 어떤 조건도 빠짐없이 완벽한데

아이성을 무너뜨릴 수가 없다 라는 겁니다.

 

여리고성은 그럼 왜 무너졌냐 말이죠?

 

졸지에 아이성이 빈공터가 되어 버린 겁니다.

 

방금 여리고성 돌때는 광야에서 하나님을 우리는 원망했습니다.

그 증거가 이 증거궤에 담겨있고

우리는 이 증거궤를 메고 갑니다.

라고 했는데

 

다시 아이성에서는 그 광야를 또 재반복하게 된다는 겁니다.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는 마음을 조건인냥 갖추었는데

그것 자체가 이미 우상숭배인 탐심 곧 힘 추구이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렇게 말하면 또 짜증내는 자들이 있습니다.

에이 그럼 안 그러는자 어디있노? 다 우상숭배이지 라고 말이죠.

 

우상숭배 하지 말라가 아니라 이미 우상숭배에 우리는 갇혀버렸기에

이 우상숭배라고 지적하시는 관계를 보자 라는 겁니다.

 

우리는 우상숭배하지 않는 것으로 구원받는게 아닙니다.

그것 자체가 또 힘이 되기에

역시나 우상숭배입니다.

 

우리가 했다 안했다 라는 행동으로 판가름이 나는게 아닙니다.

그것은 영적전쟁이 아닙니다.

 

이미 갇혔는데 했다 안했다가 무슨 의미 있습니까?

우상숭배 속에 갇혔는데

 

그렇다면 영적전쟁은 예수 안에 갇히는 것인데

그런 우상숭배자인 우리를 그 속에서 빼내셔서 예수 안으로 옮기시는 방식은

나에게서는 아무것도 나올수 없다 라는 것을 아는 것이 영적전쟁이다 라는 겁니다.

 

즉 이미 승리한 전쟁이 영적전쟁인데 새삼스럽게 나는 우상숭배 안해서 이 유혹에서 승리해야지 라는 생각을 할 필요가 없다 라는 겁니다.

 

아이성과 같은 짖을 안해야지가 아니라

 

우리는 백번 만번 그 짖을 반복할 수 밖에 없는데도 불구하고

 

왜 주님은 나를 떠나지 않고 계속해서 간섭하시느냐 라는

그 관계가 더 두려운 겁니다.

 

진짜 두려운거다 말이죠. 즉 사랑이다 라는 겁니다.

 

다들 낙심하고 돌아서고 난 안되는 군요 라고 돌아서야 하는 것이

남들이 탈락 당할 때 나도 탈락 당하는 원리인데

 

분명 탈락 당했는데 안당했다는 무시험 합격 통지서가 진짜 두려움 그 자체이다 라는 겁니다.

 

그럼 우리는 묻게 되죠?

 

?

 

도대체 당신 누구요?

 

나는 모친의 죄중에 태어난 죄인 중의 괴수인데

왜 내같은 이런 벌레 만도 못한 자에게

당신은 찾아오셨나요?

 

도대체 당신 누구십니까? 케보이???

 

다윗은 그런 자신에게 찾아온 예수님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미 처음부터 승리한 채로 벌어진 영적전쟁

출애굽전쟁이 그때로 끝난게 아니라

오늘 또 발생했다고

그 사건이 나를 찔렀다고

 

그 틈에서 나오는 소리가 이 노래이다고 말입니다.

 

(20:6, 개역)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속한 바 기름부음 받은 자를 구원하시는 줄 이제 내가 아노니 그 오른손에 구원하는 힘으로 그 거룩한 하늘에서 저에게 응락하시리로다

(20:7, 개역) 혹은 병거, 혹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

(20:8, 개역) 저희는 굽어 엎드러지고 우리는 일어나 바로 서도다

(20:9, 개역) 여호와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부를 때에 왕은 응락하소서

 

이미 승리했기에 나오는 노래요 선물인 겁니다.

 

다윗은 노래의 노래, 도는 노래 중의 노래,

구원 중의 구원을 선물 받아서 노래하게 되는 겁니다.

 

이중 노래

이중 구원

 

이 전의 노래를 전복시켜서 훨씬 더 나은 노래, 노래를 넘어서는 노래

노래 중의 노래

 

아가서가 노래 중의 노래 아닙니까?

사랑 중의 사랑

 

사랑을 뛰어넘는 더 나은 사랑의 노래

 

이제는 자신을 원수로 삼아서 벌리는 영적전쟁을 노래하는 겁니다.

 

전쟁 중의 전쟁

희한한 전쟁입니다.

 

칼 없이도 병거 없이도 기마가 없이도 힘 없이도 승리하는 노래 아니 전쟁

 

이미 승리하고 들어가는 전쟁

 

전쟁 중의 전쟁이다는 겁니다.

 

기존의 전쟁 개념을 전복시켜서 뛰어넘어서는

전쟁을 넘어서는 전쟁인 겁니다.

 

이스라엘은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승리하는 겁니다.

칼도 쥔 적도 없고 힘을 추구하고팠는데 힘을 단절당해 버린 상태에서

얼떨결에 승리하는 전쟁 말입니다.

 

나의 원수성을

그것도 숨어있는 허물을

 

즉 원수 중의 원수를

 

내가 절대로 절대로 인정하지 못하는 죄악을 들추어내시는 예수님만이 진짜 영적전쟁을 벌리시는 분입니다.

 

나를 원수 삼아서 말입니다.

그 분이 수 많은 가짜 예수 속에서의 진짜 예수님입니다.

 

아니 진짜 예수라고 주장하는 많은 예수들 속에서 가짜로 취급받는 예수님 이십니다.

 

이 십자가 전쟁을 나를 대상으로 삼아서 벌리시는 겁니다.

 

주여 응답하소서 야곱의 하나님 나를 치소서

나를 이기소서

그 승리로 응답하소서

 

사울왕을 이기신 예수님을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 다윗을 이기시는 예수님을 이제야 찬양하는 겁니다.

주여! 들으소서, 응답하소서. 야곱의 그 하나님 이름으로

나, 다윗을 치소서.


어서 응락 하소서

마라나타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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