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과 창에 있지 아니하는 여호와의 이름 전쟁(구원) (시편 21)

 

법의 외설성에 말려든 다윗이 말하는 영적전쟁

 

 

(삼상 17:47, 개역)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로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

 

(삼상 17:43, 개역) 블레셋 사람이 다윗에게 이르되 네가 나를 개로 여기고 막대기를 가지고 내게 나아왔느냐 하고 그 신들의 이름으로 다윗을 저주하고

(삼상 17:44, 개역) 또 이르되 내게로 오라 내가 네 고기를 공중의 새들과 들짐승들에게 주리라

(삼상 17:45, 개역)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

(삼상 17:46, 개역) 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붙이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 머리를 베고 블레셋 군대의 시체로 오늘날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주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줄 알게 하겠고

(삼상 17:47, 개역)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로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

(삼상 17:48, 개역) 블레셋 사람이 일어나 다윗에게로 마주 가까이 올 때에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로 마주 그 항오를 향하여 빨리 달리며

(삼상 17:49, 개역) 손을 주머니에 넣어 돌을 취하여 물매로 던져 블레셋 사람의 이마를 치매 돌이 그 이마에 박히니 땅에 엎드러지니라

(삼상 17:50, 개역) 다윗이 이같이 물매와 돌로 블레셋 사람을 이기고 그를 쳐 죽였으나 자기 손에는 칼이 없었더라

(삼상 17:51, 개역) 다윗이 달려가서 블레셋 사람을 밟고 그의 칼을 그 집에서 빼어 내어 그 칼로 그를 죽이고 그 머리를 베니 블레셋 사람들이 자기 용사의 죽음을 보고 도망하는지라

 

 

(21:1, 개역) [다윗의 시, 영장으로 한 노래] 여호와여 왕이 주의 힘을 인하여 기뻐하며 주의 구원을 인하여 크게 즐거워하리이다

(21:2, 개역) 그 마음의 소원을 주셨으며 그 입술의 구함을 거절치 아니하셨나이다(셀라)

(21:3, 개역) 주의 아름다운 복으로 저를 영접하시고 정금 면류관을 그 머리에 씌우셨나이다

(21:4, 개역) 저가 생명을 구하매 주께서 주셨으니 곧 영영한 장수로소이다

(21:5, 개역) 주의 구원으로 그 영광을 크게 하시고 존귀와 위엄으로 저에게 입히시나이다

(21:6, 개역) 저로 영영토록 지극한 복을 받게 하시며 주의 앞에서 기쁘고 즐겁게 하시나이다

(21:7, 개역) 왕이 여호와를 의지하오니 지극히 높으신 자의 인자함으로 요동치 아니하리이다

(21:8, 개역) 네 손이 네 모든 원수를 발견함이여 네 오른손이 너를 미워하는 자를 발견하리로다

(21:9, 개역) 네가 노할 때에 저희로 풀무 같게 할 것이라 여호와께서 진노로 저희를 삼키시리니 불이 저희를 소멸하리로다

(21:10, 개역) 네가 저희 후손을 땅에서 멸함이여 저희 자손을 인생 중에서 끊으리로다

(21:11, 개역) 대저 저희는 너를 해하려 하여 계교를 품었으나 이루지 못하도다

(21:12, 개역) 네가 저희로 돌아서게 함이여 그 얼굴을 향하여 활시위를 당기리로다

(21:13, 개역) 여호와여 주의 능력으로 높임을 받으소서 우리가 주의 권능을 노래하고 칭송하겠나이다

 

 

전쟁(구원)은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하고, 여호와의 이름에 있다 라고 합니다.

 

지난 시간에 시편 20편에서 전쟁 시작도 하지 않았다는데 이미 승리하고 들어가는 전쟁

곧 전쟁의 시작이 시편 20편입니다.

 

오늘은 21편은 승리하고 돌아오는 전쟁

그래서 감사를 돌리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 20편과 21편이 이상하고 희한하다는 생각입니다.

 

도대체 누구와의 전쟁이냐 라는 겁니다.

 

지난 시간에도 언급했다 싶이

 

원수가 이미 다 죽었고 다 사라졌습니다.

그런데 이제야 비로소 본격적인 진짜 전쟁

 

곧 영적전쟁이라고 하죠

 

그 전쟁을 시작했고, 20

그 전쟁에 승리를 거두었다, 21편 라는 겁니다.

 

그럼 적이 있어야 하는데

전쟁을 했다 라는 것은 상대방인 적국이 있어야 하는데

그 원수가 과연 누구냐 하는 겁니다.

 

사울 세력은 이미 다 제거 되었고 사라졌습니다. 18편에서 감사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맛배기에 지나지 않는 샘플이고

 

진짜 전쟁은 20편에서 나오는 겁니다.

 

그런 누가 원수냐 하는 겁니다.

 

지난 시간 20편에서 하나님의 진짜 원수는 바로 다윗 자기 자신이다 라는 겁니다.

 

자기자신과 싸우시는 여호와를 보는 것이 영적전쟁입니다.

 

흔히 에베소서 내용을 가지고서 성도는 악마의 세계와 싸우는 자라고 하는데

사실상 그것이 바로 육의 전쟁입니다.

 

혈과 육의 싸움이 아니다 라고 했는데

그 본분을 오히려 혈과 육이 싸움에 이용하더라 말이죠.

 

왜냐하면 악한 영들에 대한 싸움이다 라고 하고서는 알고보면 자기가 싫어하는 사람을 그렇게 마귀로 몰아서 자기안위를 지키는데 이용하더라 말이죠.

 

그 사람이 누굽니까 지난 시간에도 오늘 본문도 결국 다윗 자기자신이였지 않습니까?

 

그래서 영적전쟁 때문에 여호와께서는 다윗을 넘어뜨리는 겁니다.

너 빠져 라고 말이죠,

이것이 구원이다는 겁니다. 영적전쟁

다윗을 뒤로 빼돌리는 겁니다.

 

그 정도로 우리는 갇혔다 라는 겁니다.

 

(6:12, 개역)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6:10, 개역) 종말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6:11, 개역)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

(6:12, 개역)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6:13, 개역)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6:14, 개역)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띠를 띠고 의의 흉배를 붙이고

(6:15, 개역)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6:16, 개역)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화전을 소멸하고

(6:17, 개역)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6:18, 개역)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고

(6:19, 개역) 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벌려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할 것이니

(6:20, 개역) 이 일을 위하여 내가 쇠사슬에 매인 사신이 된 것은 나로 이 일에 당연히 할 말을 담대히 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분명 외모로 취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외모 외에는 보는 눈이 없습니다.

중심을 못 본다 라는 겁니다.

 

외모로 보기에 자기 눈에 차지 않는 자는 다 마귀로 몰아버리는 겁니다.

 

원수로 몰아 붙이는 거죠.

 

바로 그런 사고방식이 진짜 원수이다 라는 겁니다.

 

분명 다윗은 힘과 칼과 방패에 구원이 있지 않다고 했습니다.

 

위에서 사무엘상을 올렸는데요

제가 깜짝 놀랬는게

 

다윗이 어린아이때 저 소리를 했다 라는 겁니다.

그것도 블래셋 골리앗 앞에서 말입니다.

 

우리가 익히 아는 골리앗을 물맷돌로 이기는 장면 말고요

 

구원은 칼과 창에 있지 않다는 말 말입니다.

어린아이 다윗이 어떻게 저런 말을 할 수가 있냐 말이죠, 불가능하다 라는 겁니다.

단절성이다 라는 겁니다.

 

너희가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못 들어간다고 하셨잖아요

이것은 단절성이다는 겁니다.

불가능하다 라는 겁니다.

 

하나마나 한 소리를 하시는 겁니다. 안되는 불가능한 일인데 왜 하시냐 말이죠.

말장난으로 보이는 겁니다.

 

무시하기 싫어도 무시할 수 밖에 없다는 거죠.

 

그런데 유대인들은 무시하기 싫은 자신의 믿음을 관철시키고자

어떻게 해서든 그 불가능성을

가능하게 만들어 볼려고 오죽하면 니고데모가 어머니 뱃속에서 다시 들어갔다 나와야 합니까 라고 물을 정도잖아요

 

어떻게서는 이 불가능성을 뚫어서 가능성으로 바꾸고자 하는 것이 유대인의 사고방식이니까 말입니다. (기적을 요구하는 사고방식)

 

그런데 그런 사고방식 자체가 그만 힘이 되어 버렸다 라는 겁니다.

유대인을 결속 시키는 힘 말입니다.

 

악한 세대가 기적을 바라는 겁니다.

주님이 보여주시고자 하는 표적은 요나의 표적 밖에 없다 라는 겁니다.

 

즉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 기적입니다.

기적은 기적인데 아무것도 아닌 기적

 

도리어 화나게 만드는 기적

짜증나게 만드는 기적

싫어버린바 되는 기적

하나 마나 한 기적

진절머리 나도록 하는 기적

 

아무런 유익이 없는 기적

 

무시 받는 기적이다는 겁니다.

 

분명 애굽을 쳐서 여호와의 구원을 보고 찬양했습니다.

그런데 광야에서 10번 이상을 원망합니다.

그런 원망하는 자기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는 것이

 

주님의 기적인데

 

우리는 그 기적은 싫은 겁니다.

 

장대 높이 달린 인자를 쳐다 보면 구원 받는다 라는 요나의 표적은 싫은 겁니다.

 

? 불뱀에게 물려야 하고

마귀에게 송사 당해야 하고

 

그런 범죄인이 되어서

장대 높이 달린 예수님

곧 나의 숨어있는 죄가 예수님을 악마로 몰아서 생긴 사건을 십자가를 쳐다 본다는 것이

 

나에게는 엄청난 걸림돌이 된다는 겁니다.

 

내가 죽인 예수를 나의 주로 쳐다봐야 하니까 말입니다.

 

이것이 영적전쟁입니다.

 

불뱀에게 물렸는데 불뱀을 쳐다 봐야 낫는다 라는 말은

내가 달려 심판과 저주를 받아 마땅히 죽어야 하는 내 모습을 쳐다 봐야 한다는 겁니다.

 

고개를 돌리는게 뭐가 어렵겠습니까?

그런데 안 돌아가는 겁니다.

그래서 광야에서 다 죽었습니다.

 

나는 그 정도로 나쁜 놈이 아니다 라는 겁니다.

 

그 증거로 나는 남을 7번 용서하는 놈이다 로 버티는 겁니다.

그러니 나는 그 정도로 나쁜 놈이 아니다 라고 우기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내가 전혀 알지 못하는 숨어있는 허물을 770번을 파서 들추어내십니다.

 

십자가란 요나의 표적이란 영적전쟁이란

결국 나의 숨어있는 770의 죄악을 들추어내시는 나를 겨냥한 전쟁

나와 싸우시는 십자가 라는 겁니다.

 

어린아이가 어떻게 되바라지게 구원은, 전쟁은, 칼과 창에 있지 않다고 했을까요?

그런데 이 말은 결국 블레셋과 그 힘을 보고 벌벌 떠는 사울왕 곧 이스라엘 전체가

사실상 창과 방패를 의지하는 모조리 다 하나님의 원수였다 라는 겁니다.

 

단 한 명 여호와의 이름만이 전쟁의 승리, 그것도 넉넉한 승리요, 이미 승리한 전쟁이다 라는 겁니다.

 

그랬던 어린아이 다윗이 지금 어른이 되어서

다윗 또한 다 까먹어 버린 그 어른아이 때의

사울왕과 블레셋 군사들처럼

 

칼과 창에 의지해서 여호와의 구원을 외치다가

왕창 무너지는 겁니다.

 

안 무너뜨린다면 여호와가 아니다는 거죠.

 

즉 진짜 영적전쟁 곧 여호와의 거룩한 전쟁은

다윗을 무너뜨리는 전쟁이다 라는 겁니다.

 

다윗은 도리어 목격자입니다. 증인입니다.

무엇의 목격자?

다윗 나를 겨냥해서 싸우는 영적전쟁을 목격해야만 하는 전쟁

나와 싸워 무조건 이기는 여호와의 이름을 목격하는 전쟁 말입니다.

혈과 육의 전쟁이 아니기에 말입니다.

 

흔히 자기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기라 라고 합니다.

그 자기자신이 바로 자기 투사인데

자기가 만들어낸 자기가 무슨 싸움의 대상입니까?

아무리 아무리 대상으로 만들려고 해도 안만들어지는 겁니다.

그저 어느 적정선에 가면 친해지는 겁니다.

그저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을 고치고자 하는 소리인 겁니다. 도닦는 것과 같은 거죠.

그것이야 말로 하나 마나 한 소리, 말장난 아니냐 말이죠.

 

이것을 화용론의 역설이라고 하는데

 

선생님이 화장실에 낙서하지 마세요 라고 하니까

학생들이 화장실에 낙서금지라고 쓰는 겁니다.

 

마치 예수님 자신이 부활이라고 하니까

네네 저희들은 평생 교회 다니면서 부활교리 배워서 믿고 있습니다 라고 하는 겁니다.

 

저는 이것을 화용론의 역설이라는 표현 보다

율법의 올무에 걸려든 말려든 것이다 라고 보는 겁니다.

 

모든 명령어 곧 법의 외설성이다 라는 겁니다.

 

즉 누가 뭐라고 해도 법 할배가 와도 하나님이 와도

나는 법 지켰으니 나는 잘못이 없다 라는 겁니다.

설사 법을 어겼다 손 치더라도 그에 따른 처벌을 받으면 잘못이 없다 라는 겁니다.

뭘 해도 나는 옳다 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럴줄 알고 영적전쟁은 곧 요나의 표적은

십자가는

 

너는 뭘 해도 다 죄다 라는 겁니다.

뭘 해도 우상숭배이다 라는 겁니다.

뭘 해도 탐심이다 라는 겁니다.

뭘 해도 자기를 위한 것이다 라는 겁니다.

 

여기에 다윗이 걸려들었습니다.

 

자 이제 다윗은 이 외설적인 매듭을 어떻게 풀어야 합니까?

 

여호와께서 뒤짚어 씌우는 판국인데 말입니다.

 

인구조사 하라고 해서 숫자를 셋더니만

마귀로 몰렸습니다.

 

자 이 난국을, 이 매듭을 어떻게 푸냐 말이죠.

 

불뱀에게 물렸는데 불뱀을 쳐다 보라고 하니

참으로 난감하지요.

 

그런데 답은 의외에 간단합니다.

 

외설적인 법에 말려들어서

이 법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법 바깥을 보는 길 밖에 없습니다.

 

율법 외에 한 의

 

칼과 방패에 있지 않고 여호와의 이름에 있다고 합니다.

 

칼과 창은 실질적인 현실 그 자체입니다.

요즘으로 치면 돈 자본입니다. 권력이 되고 힘이 되니까 말입니다.

 

돈 없으면 인간 취급 못 받습니다.

 

그런 현실에서 이름은 뭡니까?

아무것도 아닌 겁니다.

이름 캐봐야 하나의 단어일 뿐입니다.

 

여러분 백날 이름 들이대 보세요 돈이 되나?

 

하나 마나 한 말장난에 지나지 않는 겁니다.

무시꺼리 밖에 안되는 거죠.

 

하나님 이름 들이대 보세요 누가 인간 취급이나 하나요?

안 하잖아요

 

박그네? 지금은 쪼매 무 줍니다. 아직까지는 그 이름에 우르르 몰려드니까 말이죠.

혹시 힘이 될까 싶어서

 

그런데 얼마전까지 해먹던 엠비 이름 들이대 보세요

아무도 취급하지 않습니다. 유효기간 지났거든요. 이미 유통은 끝났다 말이죠.

 

이런 판국에 여호와의 이름이 무슨 대수냐 말이죠.

 

종교를 가진 자들의 신의 이름을 들먹이는 것은

자기를 위한 자기투사성이지

일종의 주문처럼 부적처럼 중언부언처럼 자기를 위한 것일 뿐이지

하나 마나 한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라는 겁니다.

 

그런데 칼과 창을 의지하지 않고 여호와의 이름을 의지한다?

 

그것도 이스라엘도 의지 하지 않는 여호와의 이름을?

요즘으로 치면 교회 기독교인들도 의지하지 않는 예수님의 이름을 의지한다?

 

다른말로 돈되고 부자되고 잘먹고 잘사는 축복받기 위해 예수님의 이름을 의지하는게 아니라

정반대로 돈과 힘을 의지 하지 않기 때문에 예수님만을 의지한다?

 

즉 그 말은 나는 법의 외설성에 갇혔기에

율법 바깥의 한 의 만을 의지한다 라는 말입니다.

 

즉 죄인 중의 괴수 만드심에 말려들었기에

말입니다.

 

죄인 중의 괴수 만드심에 말려들지 않았다면 절대로 의지하지 않는 이름이 바로 예수 라는 이름이거든요.

 

말려든자에게만 필요한 이름입니다.

 

아니 건강한 자에게 무슨놈의 의사가 필요하냐? 말이죠.

 

오로지 환자에게만 필요한 것이 의사이다 라는 겁니다.

 

 

제가 아주 아주 건방지에 어머니께 이렇게 물었습니다.

 

아마 이 내용 때문에 화내는 자들이 무지 많을 겁니다.

 

어머니 다윗을 예수님께서 어떤 놈으로 만들어야 구원이 될가요?

 

1번 맏아들 2번 탕자

 

당연히 다들 탕자라고 합니다.

딩동댕

 

단순히 탕자로만 끝나는게 아닙니다.

 

탕자로 반드시 만들어야 자살을 하지 않습니다.

 

그럼 같은 질문 다시

 

다윗을 누구로 만들어야 구원이 될까요? 아니 이미 구원일까요?

 

1번 노무x 2번 이명x

 

우리 어머니께서 하도 mb를 욕을 많이 하셔서 정곡을 찌르는 질문을 했습니다.

 

웃으시면서 하하하 xxx

 

딩동뎅 맞습니다.

 

그래야 자살을 안 합니다.

 

부메랑 피하기 기술입니다.

 

왜 제가 댓글에서

 

만약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 자살했을 것이다 라고 했냐 하면

 

세 번 부인하지 않으면 자기가 옳다 라는 것만 남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옳다 라는 주장에 마귀가 방해를 할까요

아니면 도와 줄까요?

 

유일하게 내가 옳잖아 라는 깨뜨리는 이름은

 

바로 내가 아무것도 아닌

있으나 마나

하나 마나

말장난처럼 여겨서 비웃던 그 이름 밖에 없다 라는 겁니다.

 

매듭을 끊는 방법이요 부메랑을 피하는 길은 이것이 유일하기 때문에

 

요나의 표적 외에는 보여줄 표적이 없다 라는 겁니다.

 

그럼 오늘 본문 시편 21편은

 

바로 우리가 무시했던

그 있으나 마나 한 이름

말장난처럼 여겼던 그 이름

 

이름이 뭔데 아무것도 아닌데

 

그 아무것도 아닌 그 이름을 지금 찬양하는 겁니다.

 

? 승리했다고

 

누구랑 싸웠는데?

 

세상에 다윗이래

 

나 자신이래

 

나랑 싸운 이름이래

 

왜냐하면 내 이름 조차도 허상임을 들추어내기 때문입니다.

 

아무것도 아닌 나 라는 김대식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 자가

마치 존재하는냥 까불면서

 

칼과 창이 현실이라고 우기는 그 생각을 바이러스처럼 퍼트리다 보니

 

이 세상 전체가 칼과 창을 의지하더라 말이죠.

 

즉자는 없이 모조리 다 타자에 의해 칼과 창을 의지하더라 말이죠.

 

즉자는 즉각적으로 보는 자아로 자신을 보는 자신의 시선입니다. 거울단계죠.

대자는 타인을 통해서 보는 자신에 대한 정보입니다. 상징계죠.

 

그러니 세상은 나의 시선을 인정 안합니다.

타인을 통해서 보는 내가 있을 뿐입니다.

그런 나는 칼을 들기 싫어도 칼을 들어야 하고 창을 들어야 합니다.

 

여기에 한 발짝도 벗어나는 자가 없다 라는 겁니다.

이런 구조에 갇혀 버린 겁니다.

 

한국에 살면서 지금 현재 지구 상에 없는 언어를 구상해서 그 언어만 쓴다고 합시다.

무슨 수로 살아가겠습니까?

 

오죽하면 미국사람도 한국에 와서는 한국말을 해야 남이 아닌 정작 본인이 덜 답답해 지고

편해지는 겁니다.

 

자 이렇게 볼 때

십자가 라는 방언은 유독 소통이 되지 않는 단절의 언어로만 되어있다 라는 겁니다.

무슨 수로 살아갈까요?

 

그런데 이미 항상 이겼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처럼 승리하고 돌아왔다 라는 겁니다.

 

그럼 과연 통용이 되었나 봅시다.

 

1초도 되지 않아서 통용되기는커녕 더더욱 단절이 됩니다.

소통이 안되는 겁니다.

 

이것이 여호와의 이름을 의지한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이 영적전쟁이다는 겁니다.

 

혈과 육의 싸움을 해야 살아갈수 있는데

어떻게 무슨 수로 저 불가능한 영적전쟁을 해서 살아간다는 말입니까?

이름이 밥 먹여 주냐 말이죠.

 

이름은 그야 말로 아무것도 아닌

하나 마나 한

있으나 마나 한

 

말장난에 불과하다 라는 겁니다.

 

그런데 다윗이 그 이름을 의지하고

상대적으로 창과 칼은 의지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것이 오히려 더 외설적이지 않냐 말이죠.

 

여기에 엎친데 덮친격으로

여호와께서 이 고백으로 인해

 

이제 본격적으로 이스라엘 전체를 치시는 겁니다.

 

사울왕 세력이 다 장악했을때가 아니라

 

다윗이 비로소 이 이름의 의미를 알았을때에

본격적으로 이스라엘 전체를 멸망시켜버리고 없애버리시는

종말성을 벌리는 겁니다.

 

이스라엘 자체가 전에는 사울왕 사고방식이였는데

이제는 이 단 한명의 다윗 땜에

다윗화 시키는 겁니다.

 

여호와 화 시키는 겁니다.

 

예수 화 시키는 겁니다.

 

여기서 대립물의 일치와 등가물의 양립불가가 있는데

 

선과 악은 대립물인데 오히려 하나로 일치하고

 

교회와 십자가는 등가물인데 오히려 양립불가인 불일치이다는 겁니다.

 

실로암 소경의 죄가 누구 죄냐고 묻는 소경아닌 자는 대립물인데 오히려 본다고 하니 소경이다 라는 일치를 이루고

 

맞습니다 저 개 맞습니다. 그러나 개도 주인의 밥상에서 떨어진 부스러기를 먹지 않습니까 라고 하는

 

절대로 유대인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보냄을 받지 않았다고 예수님 본인이 양립불가이다 라고 선언했는데 이 원수 사마리아인이 주님이 찾던 잃어버린 양이였습니다.

 

예수님의 비유가 다 이렇습니다.

대립물은 일치요 등가물은 양립불가가 되는

팔을 어긋맞게 하는 식

 

판 뒤짚기 말입니다.

 

이스라엘 전체가 예수님의 숙제로 인해서

물론 이스라엘이 이룰수 없는 숙제입니다.

예수님의 숙제로 인해서 다윗의 자손화 되는 겁니다.

 

다윗의 자손을 품기 위한 하나의 태로 말입니다.

마치 죽은 태 말입니다.

 

그런데 그 죽은 태에서 참생명이 나오는 겁니다.

다윗이 그렇게 되었던 것처럼

 

여기에 반드시 동원이 되는 것이 산 태라고 주장하는 자들이

마치 쌍둥이 에서와 야곱처럼 등장하듯이

맏아들과 탕자

사울왕과 다윗왕

가룟유다와 베드로

 

등등처럼

 

반드시 등장해 줌으로써 그 간극을 벌리는 겁니다.

 

그래서 오른손의 기능이 설명되니까 말입니다.

 

(21:8, 개역) 네 손이 네 모든 원수를 발견함이여 네 오른손이 너를 미워하는 자를 발견하리로다

 

반드시 좌우 패로 가르는 거룩성을 담고서 나타나는 겁니다.

 

(2:28, 개역)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

(2:29, 개역)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2:30, 개역)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2:31, 개역)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2:32, 개역)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하니

(2:33, 개역) 그 부모가 그 아기에 대한 말들을 기이히 여기더라

(2:34, 개역) 시므온이 저희에게 축복하고 그 모친 마리아에게 일러 가로되 보라 이 아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의 패하고 흥함을 위하여 비방을 받는 표적되기 위하여 세움을 입었고

(2:35, 개역)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라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 하더라

 

 

한 쪽 패거리는 항상 자신이 옳다 라는 불뱀에게 물린 티를 팍팍 내도록 되어 있고

 

다른 한 쪽은 패거리는 나는 불뱀에게 물려도 싸다 뭘해도 나는 죄 뿐인 자이구나 라고

구리놋뱀을 쳐다보도록 만드시는 죄인 중의 괴수 만드시는 주님의 섬김을 받는자 라는 겁니다.

 

한 쪽은 맏아들

 

다른 한 쪽은 탕자 말입니다.

 

그래서 맏아들은 실제적인 힘 창 칼 방패를 의지하는 겁니다.

또는 의지하지 말하고 해서 의지 안했습니다 그러니까 나는 옳잖아요 라는 식입니다.

 

그러나 탕자는 뭘 해도 나는 항상 죄 뿐입니다 그저 그저 아버지의 사랑만 의지할 뿐이다 라는 겁니다.

 

사랑이 뭐가 현실적이겠냐 말이죠. 실질적인 실천 만이 현실적이지 않냐 말이죠.

 

하라 하면 하고

하지 말라 하면 하지 않는

 

이 실천력만이 현실 아니냐 말이죠.

 

그런데 사랑이 뭔데?

사랑이 밥 먹어주냐 말이죠?

 

얼마나 추상적이고

하나 마나 한 소리고

말장난이고

있으나 마나 한 소리이냐 말이죠.

 

마치 여호와의 이름처럼

힘이 안되는 겁니다.

 

그런데 이렇게 무시 받는 사랑만이 진짜 구원의 능력이다 라는 겁니다.

 

 

(21:8, 개역) 네 손이 네 모든 원수를 발견함이여 네 오른손이 너를 미워하는 자를 발견하리로다

 

결국 사랑은 폭력 그 자체이다는 겁니다.

오른손 때문에 원수를 의도적으로 만들어 내어서 진멸시킨다는 겁니다.

 

진멸 시키지 않는 사랑은 가짜 사랑이다는 거죠.

 

오른손이 미움을 발견해내어서 끝까지 복수한다 라는 겁니다.

 

즉 맏아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마귀가 전혀 시기하지 않는 자이다는 겁니다.

아버지 말씀을 단 하나라도 어긴 적이 없으니까 말입니다.

 

그런데 탕자는 눈에 보이지는 않는 마귀를 시기케 하는 겁니다.

탕자가 뭐가 잘나서가 아니라

탕자에게 오른손의 기능 때문에 마귀가 시기하는 겁니다.

 

마귀보란 듯이 펼쳐지는 오른손이다는 겁니다.

 

(8:6, 개역) 너는 나를 인 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 같이 팔에 두라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고 투기는 음부 같이 잔혹하며 불 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

 

사랑 자체가 폭력 이듯이

 

전쟁 자체가 평화로써 적국에 대한 진멸을 나타내는 겁니다.

즉 평화 자체는 전쟁이다는 겁니다.

 

처음부터 원수를 겨냥한 겁니다.

처음부터 영적전쟁이였습니다.

 

그래서 오른손은 마귀만을 상대한 겁니다. 인간을 상대하지 않습니다.

백날 다윗이 사울왕과 같은 세력들을 다 없애버린다고 해서

마귀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다윗에게는 오른손이 없기 때문입니다.

오른손이 새롭게 나타나야 합니다.

 

율법 외에 한 의가 나타나야 합니다.

 

구원이 뭡니까? 원수로부터 이지 않습니까?

 

원수가 나타나 주어야 하고

그 원수는 진멸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 겁니다.

 

원수를 새롭게 만드시는 겁니다.

내가 설정한 원수는 원수가 아닌거죠. 마귀가 아닙니다.

 

원수가 살아있는 이상 구원은 없는 거죠,

평화는 없는 거죠.

안식은 없는 거죠.

승리는 없는 겁니다.

 

원수가 있다는 것은 전쟁 자체가 없는 겁니다. 그것은 거짓평화입니다.

거짓선지자의 주장이 늘 전쟁은 없다 라는 주장이였잖습니까?

 

니체 들뢰즈 쪽 계열의 철학자들이 전쟁찬성론을 자꾸 들고 나오는 이유는

사랑이란 전쟁이다 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라캉 쪽에서도 플라톤계열 쪽에서도 따라서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싸운다 라는 개념을 알고 있는 거죠.

 

물론 그거 안다고 그들이 구원받은 자는 아닌거죠.

그렇게 말하는 자신들은 옳다 라고 여기니까 여전히 사랑의 의미를 정작 모르는 겁니다.

 

그들이나 성화론자들은 결국 두 패로 가르는 영적전쟁은 모르고

혈과 육의 싸움만을 주장할 뿐인 겁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다윗처럼 우리를 원수로 만드셔서

전쟁을 벌리시는 겁니다.

 

밑도 끝도 없이 나와 싸우시는 겁니다. 이것이 영적전쟁이요

사랑입니다.

 

그 사랑은 여호와의 이름만을 의지하는 불가능성으로써

 

이미 넉넉하기 늘 항상 함께 해 온 겁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사랑 되시는 예수님으로부터 공격받고

예수님으로부터 치료받는 그 관계속에 놓여지는 이 다윗처럼

 

우리를 그렇게 십자가로 확정하신 겁니다.

 

(3:1, 개역)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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