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시편 22)

 

성경에 저희가 내 옷을 나누고 내 옷을 제비 뽑나이다 한 것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22:18, 개역)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뽑나이다

 

(19:24, 개역) 군병들이 서로 말하되 이것을 찢지 말고 누가 얻나 제비 뽑자 하니 이는 성경에 저희가 내 옷을 나누고 내 옷을 제비 뽑나이다 한 것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군병들은 이런 일을 하고

(19:28, 개역) 이 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룬 줄 아시고 성경으로 응하게 하려 하사 가라사대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

(19:36, 개역) 이 일이 이룬 것은 그 뼈가 하나도 꺾이우지 아니하리라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함이라

 

(22:1, 개역) [다윗의 시, 영장으로 아얠롓사할에 맞춘 노래]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옵시며 내 신음하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22:2, 개역) 내 하나님이여 내가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잠잠치 아니하오나 응답지 아니하시나이다

(22:3, 개역)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거하시는 주여 주는 거룩하시니이다

(22:4, 개역) 우리 열조가 주께 의뢰하였고 의뢰하였으므로 저희를 건지셨나이다

(22:5, 개역) 저희가 주께 부르짖어 구원을 얻고 주께 의뢰하여 수치를 당치 아니하였나이다

(22:6, 개역)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훼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

(22:7, 개역) 나를 보는 자는 다 비웃으며 입술을 비쭉이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되

(22:8, 개역) 저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걸, 저를 기뻐하시니 건지실걸 하나이다

(22:9, 개역) 오직 주께서 나를 모태에서 나오게 하시고 내 모친의 젖을 먹을 때에 의지하게 하셨나이다

(22:10, 개역) 내가 날 때부터 주께 맡긴바 되었고 모태에서 나올 때부터 주는 내 하나님이 되셨사오니

(22:11, 개역) 나를 멀리하지 마옵소서 환난이 가깝고 도울 자 없나이다

(22:12, 개역) 많은 황소가 나를 에워싸며 바산의 힘센 소들이 나를 둘렀으며

(22:13, 개역) 내게 그 입을 벌림이 찢고 부르짖는 사자 같으니이다

(22:14, 개역) 나는 물 같이 쏟아졌으며 내 모든 뼈는 어그러졌으며 내 마음은 촛밀 같아서 내 속에서 녹았으며

(22:15, 개역) 내 힘이 말라 질그릇 조각 같고 내 혀가 잇틀에 붙었나이다 주께서 또 나를 사망의 진토에 두셨나이다

(22:16, 개역) 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

(22:17, 개역) 내가 내 모든 뼈를 셀 수 있나이다 저희가 나를 주목하여 보고

(22:18, 개역)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뽑나이다

(22:19, 개역) 여호와여 멀리하지 마옵소서 나의 힘이시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

(22:20, 개역) 내 영혼을 칼에서 건지시며 내 유일한 것을 개의 세력에서 구하소서

(22:21, 개역) 나를 사자 입에서 구하소서 주께서 내게 응락하시고 들소 뿔에서 구원하셨나이다

(22:22, 개역) 내가 주의 이름을 형제에게 선포하고 회중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

(22:23, 개역)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너희여 그를 찬송할지어다 야곱의 모든 자손이여 그에게 영광을 돌릴지어다 너희 이스라엘 모든 자손이여 그를 경외할지어다

(22:24, 개역) 그는 곤고한 자의 곤고를 멸시하거나 싫어하지 아니하시며 그 얼굴을 저에게서 숨기지 아니하시고 부르짖을 때에 들으셨도다

(22:25, 개역) 대회 중에 나의 찬송은 주께로서 온 것이니 주를 경외하는 자 앞에서 나의 서원을 갚으리이다

(22:26, 개역) 겸손한 자는 먹고 배부를 것이며 여호와를 찾는 자는 그를 찬송할 것이라 너희 마음은 영원히 살지어다

(22:27, 개역) 땅의 모든 끝이 여호와를 기억하고 돌아오며 열방의 모든 족속이 주의 앞에 경배하리니

(22:28, 개역) 나라는 여호와의 것이요 여호와는 열방의 주재심이로다

(22:29, 개역) 세상의 모든 풍비한 자가 먹고 경배할 것이요 진토에 내려가는 자 곧 자기 영혼을 살리지 못할 자도 다 그 앞에 절하리로다

(22:30, 개역) 후손이 그를 봉사할 것이요 대대에 주를 전할 것이며

(22:31, 개역) 와서 그 공의를 장차 날 백성에게 전함이여 주께서 이를 행하셨다 할 것이로다

 

 

지난 시간에 전쟁에서 승리하여 돌아와 여호와 하나님께 찬양하는 내용에서

 

그 전쟁의 승리 요인이 바로 칼과 창이라는 힘에 있지 않고

 

바로 여호와의 이름에 있다고 했습니다.

 

원인 없는 결과이다 라는 겁니다.

 

원인 없다고 하니까 원인 자체가 없다 라고 어렵게 생각말고

결과 자체가 원인으로써 덮쳐왔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오히려 그게 더 어렵나요? ㅋㅋㅋ

미래완료가 현재에 덮쳐서 현재를 이룬다는 겁니다.

 

과거에서 미래로 시간이 흘러서 현재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미래가 현재에 쳐들어와서, 소급해서 우연히 발생하는 것이 현재라는 결과이다 라는 겁니다.

 

결국 원인이 있으면 결과가 없고 (의인 바리새인)

 

결과만 있다면 원인이 없다 라는 겁니다. (세리 창기라는 죄인 중의 괴수들)

 

누가 방명록에 질문을 했는데 질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렇게 답했습니다.

 

성령이란 관계성으로써 원인 없는 결과입니다.

원인이나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 성령을 결과로 안 보고 원인으로 보고 있기 때문에

내가 졸지에 결과가 되어버리니까

성령 받은 내가 중요해 지니까

나를 함부로 해서는 안되는 겁니다.

 

나는 절대 나쁜놈 되면 안되고

어떻게 해서든 하나님이 보시기에 옳은 인간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래서 절대로 죄인 중의 괴수가 되면 안되는 거죠.

(저 세리와 같지 않음을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십의 이조, 이레에 두 번 금식 등등)

 

그래서 법을 끝까지 지키는 겁니다.

 

제가 지난 시간에 부제목을 법의 외설성에 말려든 다윗이라고 했습니다.

다윗이 말하는 영적전쟁이라고 했습니다.

육의 전쟁과의 차이로써 말입니다.

 

법은 법 지키라고 주는 것이 아니라

법을 못 지키는 구나

아 나는 곤고한 자로구나

갇혔구나를 알게 하기 위한 것인데

상한 심령 되라고 준 것인데

 

지켰다고 우기는 자들이 나타났기에

 

어 못 지키도록 했는데 어떻게 지켰지?

그럼 그렇지 엉터리로 지켰다고 착각한 자들이다 라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썩 물렀거라

사탄이 떨어지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생명책에 네 이름이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고 했습니다.

 

네 이름이 기록된 것이라고 하니까

또 착각하기를 내 이름이 기록된 줄로 아는데

나의 존재 이전에 내가 생기기도 전에

피조물들이 창조 되기도 전인

존재 이전의 존재이다는 겁니다.

 

결국 이것이 이름인데 바로 여호와의 이름 곧 예수님의 이름을 말하는 겁니다.

 

이 이름이 아무런 힘도 칼도 창도 권력도 안 된다는 겁니다.

 

이름이 뭡니까 아무것도 아닌 겁니다.

텅빈 기표입니다.

 

과연 기뻐할 수 있냐 말이죠.

 

이상하잖아요

 

주여 주여 제가 주의 이름으로 사탄을 물리쳤다고 했을때에

오히려 이 쪽이 주의 이름을 운운하고

 

도리어 예수님은 네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 된 것을 기뻐하라고 합니다.

 

뭔가 바뀐 것 같지 않습니까?

 

이렇게 바꿔 봅시다.

 

주여 주여 제가 저 김대식 이름으로

아니 아니 이 이름은 아무런 힘이 안되기에

예수님 이름으로

아니 아니 이것도 아무런 힘이 안되기에

주여 제가 마귀의 세가지 유혹을 물리친 예수님이름으로

마치 구약에 법궤 이름으로(홉니와 비느하스처럼 효과를 체험했기에)

저도 예수님 이름으로 마귀를 물리쳤습니다.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나는 너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너가 이용하는 너 자신을 위한 이름이 아니라

창세전에 나 예수 이름이 생명책이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이렇게 하면 뭔가 아구가 잘 맞지 않냐 말이죠.

이래야 정상 아닙니까?


그런데 정반대로

 

저쪽은 예수 이름을 운운하고

예수님은 정작 너의 이름이 라고 운운합니다.

 

이 역설은 너가 행하거나 믿거나 하는 너의 존재로 출발하기 훨씬 이전에

창세전에 이미 결정된 생명책에서 운운할 상황인데

 

왜 너는 너 자신의 존재로 출발하고

너의 행함에서 너의 믿음에서 출발한 것은 운운하느냐 라는

 

역설인 겁니다.

예수의 이름 조차도 법과 힘으로 만들어 버린 것을 역에 역으로 지적하시는 겁니다.

 

법의 외설성이 바로 이런 식입니다.

 

학생에게 선생님이

 

친구들!! 화장실에 낙서 하지 마세요 알겠죠!!

 

네 선생님!! 제가 화장실에 낙서금지 하라고 적었어요 라고

학생은 아주 당당하게 기쁘게 자랑스럽게 말하더라 말입니다.

 

아무리 이야기 해도 그것이 왜 잘못되었는지를 알지 못하는 겁니다.

마르다와 마리아야 내가 부활이라니깐
네 저희들은 부활교리 믿는다니깐요

아니 부활교리 믿지 말고 나 예수가 부활 그 자체라는 것을 믿으라니깐
아니 부활 믿는다니깐요 성전에서 늘 예배드리면서 믿어 왔다니깐요.

아무리 이야기 해도 안통하는 겁니다. 그 간격만 더 벌어지는 겁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아무도 살았다고 여기지 않는 나사로를 그 벌어진 간극에서 올라오게 하는 겁니다.
 

아니 내이름도 아닌 예수님 이름으로 마귀를 물리쳤는데

왜 기뻐하지 말라고 하지?


이미 무존재 비존재로 인식되는 창세전의 내 이름이 무슨 의미가 있다고
창세전에 네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된 것을 더 기뻐하라고 하시는 지 도통 이해가 안되네
 

바로 이것이 법의 외설성입니다.

법을 지키면 지킬수록 법을 더욱더 어기게 되는 범법자가 되는 겁니다.

법에 의해 무가치가 된 긍휼은 무시할 수 밖에 없는 겁니다.

 

또 요 말을 듣고 범법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 이 말을 또 지키면 된다고 보는 겁니다.

 

이것이 관계성을 모르고, 거부하고, 자꾸 자신의 숙제로만 보는 사고방식이다는 겁니다.

 

관계성은 내 쪽에서는 아무리 해도 답이 안나오는 곤고함이다는 겁니다.

즉 갇혔다 라는 겁니다. 그래서 답을 외부에서

 

율법 외에 한 의

 

에서 찾는 겁니다.

(롬 3:19, 개역)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롬 3:20, 개역)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롬 3:21, 개역)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롬 3:22, 개역)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롬 3:23, 개역)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롬 3:24, 개역)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롬 3:25, 개역)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롬 3:26, 개역)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

(롬 3:27, 개역)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뇨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롬 3:28, 개역)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뻔뻔스럽게 예수님에게 모든 숙제를 이양시키는 겁니다.
 

한번 맛보고 다시 자신의 숙제로 돌리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그 관계성에 놓여지는

곧 사랑의 폭력성에 놓여지는 겁니다.

 

사랑은 하나님께 있다 라는 겁니다.

남을 사랑하는 자가 율법의 완성이기에

 

사랑은 여기에 있다 너희에게 있지 않고

화목제물을 보내신 하나님께 있다 라고

 

(요일 4:10, 개역)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폭력성입니까?

양보 없다 라는 겁니다.

 

나의 죄에 대한 양보 없음 때문에 자기 독생자를 아낌없이 내어주사 갈기 갈기 찢으셨다 라는 겁니다.

 

이것이 영적전쟁이다는 겁니다.

 

바로 나를 겨냥한 전쟁이다는 겁니다.

 

내가 마귀와 싸우는 육의 싸움이 아니라 말이죠.

 

주여 주여 내가 주의 이름으로 마귀를 물리쳤습니다 사탄이 하늘에서 떨어집니다 라는 것은

혈과 육의 싸움이지 영적 전쟁이 아니다 라는 겁니다.

 

괜히 그것 때문에 자신이 우쭐되니

아무도 자신을 건드릴수 없는 딱딱한 인간

라멕처럼 자기를 건드리면 가인은 벌이 7배인데 자기는 77배라는

말도 안되는 법을 자신이 창조하는 겁니다.

법의 창시자가 되는 겁니다. 자기가 하나님이 되는 겁니다.

괜히 맛보는 바람에 말입니다.

 

사울왕은 괜히 성령을 맛보는 바람에 나중에 성령이 임의로 부는 바람 같아서

성령을 자기 소유처럼 잡아 가둘 권리가 없다 보니

그 성령의 빈자리를 오히려 악령으로 채우는 겁니다.


그래서 답답해 미치니까 자꾸 자꾸 신당을 찾아서

여자 무당을 통해 신접을 하는 겁니다.


이것이 율법을 지키는 자의 모습인 겁니다.

낙서금지라고 낙서하는 아이들과 자신을 차별화 시키는

일일이 낙서금지라고 칸칸마다 적어나가는 열심히 특심인 열심

 

낙서를 보면 볼수록 더더욱 낙서금지라고 적는 겁니다.
안 적고는 견디질 못하는 겁니다. 낙서금지라고 낙서하는 그 일을 멈출 수가 없는 겁니다.

사울왕이 그랬고, 가룟유다도 그랬고
가인도 온 주변의 상황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도배를 합니다.
에녹성도

자녀 이름도


그것을 그대로 전수받은 라멕은 77배로 더욱더 부풀리듯이 말입니다. 


본인은 그렇게 깨끗하다고 자부하는 겁니다.

주여 제가 주의 이름으로 마귀를 물리쳤습니다 라고 말입니다.

 

? 나는 성령 받았으니까!!!

 

이것을 다시 반전시켜 보면

 

나는 저런 죄를 짖지 않았다고 저렇게 나의 죄를 정당화 시키지 않았다고 정당화하는 겁니다.

 

그 유명한 [죄인이니까] 라는 핑계를 나는 대지 않는다는 겁니다.

 

결국 답을 인간 쪽에서 승패를 보자는 것인데

 

여기에 아무런 도움이 안되는 것이

바로 이름입니다.

 

논리도 아닌 이름

싸움 꺼리도 안되는 이름

 

어린아이가 이 이름만을 의지한다는 것이

어른들의 싸움인 칼과 창의 전쟁에서

무슨 의미가 있냐 말이죠.

그것도 양쪽 진영의 중앙 한 가운데서

이 젖먹이의 전쟁이 저들의 전쟁과 따로

다른 양상으로 그들 전쟁 속에서 발생하는 겁니다.

혈과 육의 싸움 속에서 영적전쟁이 발생하는 겁니다.

 

혈과 육의 싸움 따로 영적전쟁 따로

따로 따로 국밥이 아닌

각자 따로 발생하는게 아니라

엉터리 속에서 진짜 복음이 그 속에서 발현되는 겁니다.

같이 터져 나와야 차이나는 것을 보는 거죠, 그것이 거룩입니다. 

또렷하게 분리가 되니까 말입니다.

 

혈과 육의 전쟁 속에서 한 가운데 중앙에 영적전쟁이 전혀 다른 방식으로 벌어지는 겁니다.

칼과 창의 전쟁 속에서 칼과 창이 전혀 없는 다른 양식의

 

이름 전쟁이 그들 속에서 반드시 그들 싸움 속에서 말입니다.


사울왕과 블레셋의 전쟁 속에서 어린이 다윗의 전쟁이 중앙에서 벌어지는 겁니다. 여호와의 이름 전쟁 말입니다.
 

결국 다윗왕을 말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사울왕이 나와줘야만 하고

다시 다윗 왕은 껍데기 가짜이고

그 속에서 진짜인 다윗의 후손(미래가)이 결과물로써 다윗에게 덮쳐서

다윗이 긍휼을 입게 되지

 

다윗 자기 자신에게서는 아무것도 나오는 것이 없다 라는 겁니다.

 

그것을 정직한 영이 없어서

그 정직한 영을 주셔서

받아서 보게 되니

 

주님은 제사를 원치 않고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원한다는 것을 알게 되고

 

비로소 다윗의 후손에게 주여 라고 합니다.

 

어떻게 다윗이 자기 자손에게 주여 라고 하냐 말이죠.

후손인데

조상이 후손에게 주여 라고 하냐 말이죠.

 

말 장난 하냐 말이죠.

 

후손이라는 껍데기가 중요하냐 아니면 이름이 중요하냐 말이죠.

 

인간은 후손이라는 서열이 중요하지 그것이 질서요 법이니까

이름은 하등 중요하지 않다 라는 겁니다.

질서와 법을 어기는 자는 범법자가 되거든요.

어떻게 죄인이 될려고 하겠습니까?

 

죄인이 되어서라고 이 사랑을 이루겠다?

어림 반푼어치도 없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에게는 사랑이 없는 겁니다.

법만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범법자가 되어서라도 사랑을 이루겠다 스캔달을 이루겠다.
불륜을 이루겠다 하시는 겁니다.

그러나 인간은 사랑도 법적으로만 이룰려고 할 뿐인 겁니다.

 

바로 이것을 복음은 놓치지 않고 파고 드는 겁니다.

십자가로 수셔댑니다. 스캔들입니다.

 

그가 나보다 옳도다 라는 시아버지 유다의 고백은

비로소 나온 성령을 통한 고백입니다.

그 전에는 꿈에도 몰랐던

저 며느리가 모든 것을 망쳐놓는다는 생각 뿐이였습니다.

 

바로 이렇게 십자가는 무한반복으로 수셔댑니다.

인간은 제사를 원하지 인애와 자비를 원치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말입니다.

 

자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원인 없는 결과로 전쟁의 승리를 찬양하는데

이 찬양이 어떻게 선물로써 다윗에게 넘어왔는가?

 

내가 찬양하지도 않았는데

내가 원수와 싸워서 이기지도 않았는데


도리어 내가 원수이고

이미 사울왕 원수는 죽었는데


도대체 누구를 원수로 삼아서 싸워 이겨서 승리한 전쟁이냐 라는 겁니다.

 

그 승리의 원인이 바로 여호와의 이름인데

이 이름의 내용이 바로


나 다윗과 싸운 이름인데
내가 무시했던 그 이름이 승리했는데

그 원인이 바로
 

오늘 시편 22편이다는 겁니다.

 

즉 결과 자체가 원인인데

여호와의 이름의 결과가 원인인데

 

그 결과의 내용은

즉 창세전에 이미 생명책에 기록된 내용은

 

역설적이게도 예수님을 버리심이다는 겁니다.
독생자를 버리심이다는 겁니다.

 

다윗을 승리케 하는 요인은 역설적이게도

다윗을 버리는 겁니다.

 

다윗 자체를 버린다고 해서 그 껍데기 백날 버려본들 의미는 없고요

다윗 속에 진짜 알맹이가 있다는 겁니다.

 

그 알맹이의 내용이 바로 약속이라는 알맹이 인데

 

다윗 따로 약속 따로가 아닌

엉터리 다윗 속에서 약속이라는 알맹이가 버림받는 모습으로써


(다윗은 버림받은적 없습니다. 다윗의 겉옷이 찢겨져서 나누어진 적이 없습니다. 다윗의 신체 말입니다.
그리고 다윗의 속옷도 제비뽑기 당한 적도 없습니다.

그럼 누가? 더대체 누가 버림받고 찢겨지고 제비뽑기 당하는 수모를 당하냐 말입니다.
다윗의 후손 입니다. 곧 실상이신 예수님의 육체가 찢겨지고 예수님의 속마음을 제비뽑기 하듯이 장난하고 훼방하는 겁니다.
다윗은 이 실상을 보여주는 증상물인 스크린이요 영사기 입니다.
감기라는 실체는 신체 속에 잠복이 되어 있지만

그 증상인 콧물 재채기 기침 가래 등으로 
즉 증상으로 감기가 잠복되었다는 것을 알듯이
예수의 영이 들어오니까
다윗은 스크린을 상영하듯이 미래의 예수님이 격는 사건을 미리 앞당겨서 외치는 겁니다.

자기 혼자 당하는 것이 아니다 라는 겁니다. 예수님의 모습을 미리 보여주는 겁니다.

다윗이 죽고난 이후의 참선지자들은 바로 이 영사기의 스크린을 보고 자신들도 갈기 갈기 찢기는 겁니다.)

(히 11:1, 개역)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히 11:2, 개역)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히 11:3, 개역)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히 11:36, 개역) 『또 어떤 이들은 희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히 11:37, 개역)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히 11:38, 개역)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 저희가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이 찬양이라는 선물

전쟁의 승리라는 선물

구원이라는 영적전쟁인 선물이 왔다 라는 겁니다.

 

마치 엉터리 시아버지 유다 와 무관계인 따로 국밥으로써 구원이 선물로 온게 아니라

 

시아버지 유다가 싫어하는 며느리 다말과의 관게 속에서 구원의 선물이 왔다 라는 겁니다.

 

그 선물의 포장을 뜯어보니

 

그가 찔림으로 나는 나음을 입었고

그가 채찍질 맞음으로 우리가 고침을 받았다 라는 겁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겁니다.

(고전 15:9, 개역)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로라』

(고전 15:10, 개역)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내가 병 낫고 내가 고침을 받는 것과

무관하게 저 예수는 찔림을 받고

저 예수는 채찍질을 받는다고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다고

나는 그렇게 생각했는데

 

그래서 내가 십자가에 예수님을 하나님의 심판을 대신 하듯이 못 박았는데,

저 년을 당장 불에 태워 버려라 라고 시아버지 유다가 다말을 임신했다고 부정한 여자라고 증거를 잡아서 불태우는 법을 제대로 시행했다고 우겼는데

 

그 임신한 뱃속의 아기 아빠가 이 물건의 주인이요 라고

도색 도색끈 지팡이를 들이내밀더라 말입니다.

진짜 약속에 목숨을 건 자는 내가 저주한 며느리 다말이여였고, 예수님이였다 라는 겁니다.

 

이렇게 우리는 십자가의 스캔들에 말려들어서 구원이 된다 라는 겁니다.

 

내가 옳아서가 아닌

 

예수님이 부정한 십자가(하나님의 저주)를 나를 대신해서 지시면서 까지

약속을 이루더라 라는 겁니다.

 

나는 약속을 이룰려고 하면 할수록 약속을 더더욱 방해하는 훼방꾼 노릇 뿐인데 말입니다.

 

그가 나 보다 옳았음이

 

너무 너무 제대로

정확하게

한치 오차도 없이

명료하고 또렷하게

엉터리 나를 맛물리게 하셔서
죄인 중의 괴수로 만드셔서
십자가의 사랑을 확정하셨다 라는 겁니다.


제대로 약속을 성취하더라

다 이루었도다 라고

십자가를 이루었다 라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저 어두운 눈으로 그의 속옷을 찢어서 제비뽑기를 하는 겁니다.

겉옷 곧 신체를 십자가에 못 박아서 갈기 갈기 창과 칼로 찔렀고
그의 마음을 썩어 뭉드러지게 상하게 만든 것이 남이 아닌 나 자신이였다 라는 겁니다.
 

? 나와 무관하다고 봤기에

 

그런데 그것이 바로 제대로 말려드는 십자가와의 관계성에 놓여지게 되는 겁니다.
여기서 관계성이란 결국 피와 죄인으로써의 만남인 관계 입니다.

피와 의인의 만남이 아니라 ~~~

 

이것이 창세전에 기록된 생명의 말씀책에 기록된대로 응해지는 것인줄 몰랐던 겁니다.

 

예수님은 오로지 이 생명책에 기록된 대로 응하게 하고자 하신 겁니다.

 

심지어 버림 받으심 으로도

 

그리고 다시 되찾으심도 말입니다.

 

되찾으셔야 우리에게 걸림돌이 될 것 아니겠습니까?


찔림이 될 것 아니겠습니까?
 

이 모든 것이 바로 말씀에 기록된 대로 응하고자 함이다는 겁니다.

 

그런에 우리는 나의 구원이 더 크게 보이다 보니

창세전에 기록된 말씀 보다

 

어떤 개인의 구원이 나의 구원과 연관되어서 그것의 승패로 보는 강박에 시달리게 되는 겁니다.

 

참으로 다행이도

성경에는 개인구원이 없습니다.


집단 구원 뿐인 바로 새이스라엘 구원 뿐입니다.
곧 그리스도의 몸 입니다.
 

그렇기에 개인 개인의 어떤 행함 행동 행위에 얽매일 필요가 없습니다.

 

다 도토리 키 재기입니다.

 

오히려 정말 중요한 것은

아무도 귀히 여기지 않는

 

이 아무것도 아닌 예수라는 인물

그 이름이

 

내가 마귀를 물리치는 것 보다

 

창세전에 생명책에 기록 되었다는 것

이것만 중요하다는 겁니다.

 

즉 아무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것이

유일한 중요한 단 하나 이다는 겁니다.

 

그럼 남들은 몰라도 나는 절대로 이 유일한 중요한 것을

오직 나 만큼은 중요하게 여겨야지 한다고 해서

 

중요해지는 개인문제가 아닌

 

이미 성령을 주셨기에

성령이 집단적으로 중요하게 만드시기 위해서

집단은 십자가 스캔들 사건에 말려들어서

 

아 맞구나 그가 나보다 옳구나 라고

늘 관계를 저 쪽에서 맺고자

사건을 터트린다는 사실에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뭘 해도 다 죄 뿐이지만
비록 그렇다 하더라도

뭐든지 예가 되는 예수님의 사랑의 완료가
나를 수셔대면서 나타나는 십자가 사건과의 관계에 놓여졌다는 것을 누리는 것만 있을 뿐입니다. 


 

(53:1, 개역)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

(53:2, 개역)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53:3, 개역)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53:4, 개역)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53:5, 개역)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53:6, 개역)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53:7, 개역)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53:8, 개역) 그가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 갔으니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산 자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을 인함이라 하였으리요

(53:9, 개역) 그는 강포를 행치 아니하였고 그 입에 궤사가 없었으나 그 무덤이 악인과 함께 되었으며 그 묘실이 부자와 함께 되었도다

(53:10, 개역) 여호와께서 그로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케 하셨은즉 그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그 씨를 보게 되며 그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의 뜻을 성취하리로다

(53:11, 개역) 가라사대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히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라

(53:12, 개역) 이러므로 내가 그로 존귀한 자와 함께 분깃을 얻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었음이라 그러나 실상은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지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하시니라

 

 

 

 

 

Posted by 김 대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