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대체 그가 누구죠? (시편 23)

 

푸른 초장에 누이시고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 그가 누구인가?

 

(23:1, 개역) [다윗의 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23:2, 개역)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

(23:3, 개역)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23:4, 개역)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23:5, 개역)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23:6, 개역)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53:5, 개역)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53:6, 개역)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53:7, 개역)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53:8, 개역) 그가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 갔으니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산 자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을 인함이라 하였으리요

(53:9, 개역) 그는 강포를 행치 아니하였고 그 입에 궤사가 없었으나 그 무덤이 악인과 함께 되었으며 그 묘실이 부자와 함께 되었도다

(53:10, 개역) 여호와께서 그로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케 하셨은즉 그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그 씨를 보게 되며 그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의 뜻을 성취하리로다

(53:11, 개역) 가라사대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히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라

(53:12, 개역) 이러므로 내가 그로 존귀한 자와 함께 분깃을 얻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었음이라 그러나 실상은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지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하시니라

 

(8:26, 개역) 주의 사자가 빌립더러 일러 가로되 일어나서 남으로 향하여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까지 가라 하니 그 길은 광야라

(8:27, 개역) 일어나 가서 보니 에디오피아 사람 곧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모든 국고를 맡은 큰 권세가 있는 내시가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왔다가

(8:28, 개역) 돌아가는데 병거를 타고 선지자 아사야의 글을 읽더라

(8:29, 개역) 성령이 빌립더러 이르시되 이 병거로 가까이 나아가라 하시거늘

(8:30, 개역) 빌립이 달려가서 선지자 이사야의 글 읽는 것을 듣고 말하되 읽는 것을 깨닫느뇨

(8:31, 개역) 대답하되 지도하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깨달을 수 있느뇨 하고 빌립을 청하여 병거에 올라 같이 앉으라 하니라

(8:32, 개역) 읽는 성경 귀절은 이것이니 일렀으되 저가 사지로 가는 양과 같이 끌리었고 털 깎는 자 앞에 있는 어린 양의 잠잠함과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8:33, 개역) 낮을 때에 공변된 판단을 받지 못하였으니 누가 가히 그 세대를 말하리요 그 생명이 땅에서 빼앗김이로다 하였거늘

(8:34, 개역) 내시가 빌립더러 말하되 청컨대 묻노니 선지자가 이 말 한 것이 누구를 가리킴이뇨 자기를 가리킴이뇨 타인을 가리킴이뇨

(8:35, 개역) 빌립이 입을 열어 이 글에서 시작하여 예수를 가르쳐 복음을 전하니

(8:36, 개역) 길 가다가 물 있는 곳에 이르러 내시가 말하되 보라 물이 있으니 내가 침례를 받음에 무슨 거리낌이 있느뇨

(8:37, 개역) (없음)

(8:38, 개역) 이에 명하여 병거를 머물고 빌립과 내시가 둘 다 물에 내려가 빌립이 침례를 주고

(8:39, 개역) 둘이 물에서 올라갈새 주의 영이 빌립을 이끌어 간지라 내시는 흔연히 길을 가므로 그를 다시 보지 못하니라

 

 

 

오늘은 세 군데의 성경내용을 인용해서 올렸습니다.

 

도대체 그가 누구냐 라는 겁니다.

그래서 제목을 그가 누구냐 라고 적었습니다.

 

이것은 시편 22편과 23편을 한 세트로 보고

 

22편의 버림받는 그가 바로 오늘 본문에 그다 라는 겁니다.

 

즉 지난 시간에 22편을 두 번으로 나누어서 할려다가

23편 자체에 다 나오다 보니

오늘 23편을 하는데

 

22편에서 후반부에 갑자기 생뚱맞게 찬양과 감사로 반전이 됩니다.

23편처럼 감사와 찬양으로 넘치는 겁니다.

 

그 어떤 연결점이 있어서 감사와 찬양이 나오는게 아니라

전혀 그 어떤 연결점이 없이

오히려 단절 그 자체가 이런 결과가 원인 없이 덮쳐버리는 겁니다.

 

분명 버림받는다고 어찌하여 버리십니까 라고 외쳤는데

지금은 감사합니다 라고 합니다.

 

결국 23편은 22편이 없이는 나올수 없는 감사이다는 겁니다.

 

그럼 감사는 뭐 없이는 나올수 없다는 말입니까?

 

고난입니다.

 

고난이 원인이 되어서 감사가 나온다는 말이 아니라

고난 자체가 감사 그 자체가 되는 겁니다.

 

즉 감사라는 미래완료를 누리는 이유는

고난 때문이다 라는 겁니다.

 

그럼 고난을 우리가 받으라 라는 말인가?

 

감당해 낼 자가 없다는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고난 속에서 감사를 누리고 있다는 겁니다.

그것도 넉넉히 말입니다.

 

그것이 바로 고난의 의미인데

고난은 아프고 아프니까 청춘 아니 얼굴을 찡그릴 수밖에 없고

그런 감추고 싶은 모습들인데

 

그런게 고난이 아니라

 

(더더욱 고생도 아닙니다. 고생은 자기 죄 때문에 당연히 격을 수 밖에 없는 것이고,

정반대의 의미인 고난은 자신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타인의 허물 때문에 대신 매 맞는 것,

대신 저주를 당해 죽기까지 복종하는 것을 말하는 겁니다.)

 

고난이란 이름이다 라는 겁니다.

 

지지난 시간에 여호와의 구원은 창과 칼 곧 힘에 있지 않고

이름에 있다고 했습니다.

 

이름이 뭡니까?

 

좀 어려운데

 

다윗이 주께만 범죄했는데 오히려 다윗은 주께서 내 주께 말씀한

원수가 네 발등상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는다 라는 사건이 덮치게 됩니다.

저 내용 자체가 다윗에게 덮쳐서 다윗은 졸지에 저 내용을 목격할 뿐만 아니라

증거하는

 

증거 판대기, 다윗 자신이 바둑판처럼 되어서 이 사건을 생중계하는 하나의 증상물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 감기에 걸리면 콧물이라는 증상물이 안나오고는 못배기듯이

생중계를 안 하고는 못 배기는 겁니다. 하기 싫어도 저절로 할 수 밖에 없도록 되어있는

불가항력적이다는 겁니다.

 

(110:1, 개역) [다윗의 시]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

 

(22:44, 개역)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냐

(20:43, 개역) 내가 네 원수를 네 발의 발등상으로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니라

(2:35, 개역)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으니

(1:13, 개역) 어느 때에 천사 중 누구에게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느뇨

(10:13, 개역) 그 후에 자기 원수들로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시나니

 

 

그런데 다윗은 주께서 내 주께 라고

여호와께서 내 주께 라고

 

두 주님으로 분열되어 있다는 겁니다.

 

한 쪽은 여호와 라는 다들 알고 있는 여호와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여호와께서 내 주께 라고 했는데

 

이 두 번째 언급된 주가 누구냐 라는 겁니다.

 

여호와 자신이 감추어 놓고 비밀스럽게 아무도 알지 못하게 한 감춘 비밀의 이름이 있다는 겁니다.

감추워 놓은 여호와 자신의 이름 말입니다.

 

여호와가 자신의 감추워 놓은 여호와의 이름에게 나타낸다는 겁니다.

 

오늘 제목처럼 도대체 그가 누구냐 라는 겁니다.

 

에디오피아 내시가 이사야 53장을 보고 이사야 선지자가 말하는 그가 도대체 누구냐 라고 묻습니다.

 

초신자라서 모르는게 아닙니다.

 

사실 수십년, 아니 날 때부터 모태 신앙이라는 용어로 자신을 도배하는 자들도

 

이 주가 누구인지를 정작 모른다는 겁니다.

 

이스라엘 민족도 모르는 이름이니 어떻게 알겠습니까?

 

목사도 모른다는 겁니다.

 

 

칼과 창에 있지 않은 구원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이루어 진다고

어린아이 다윗이 말했을때에

 

정작 이스라엘의 사울왕과 블레셋의 골리앗이 대립되어 있는

 

그 양진영의 중간에서 생뚱맞게 여호와의 이름이 나온다는 겁니다. 무시 받는 이름으로써 말입니다.

 

이스라엘 사울왕에게 여호와가 있습니다. 블레셋 골리앗에게는 그들의 신이 있습니다. 악마죠.

 

이 중앙에 여호와의 이름이라는 아주 낯설기 짝이 없는 말을 어린아이 다윗이 말하는 겁니다.

 

즉 어린아이 라는 의미는 무의미 무능하다는 의미인데

여호와의 이름이 이 무능한 어린아이에게 붙어서 증거함으로써

 

양쪽 진영의 신들이 다 틀렸다 라는 겁니다.

사울왕의 하나님은 결국 가짜라는 거죠.

블레셋 쪽의 신은 마귀이구요.

 

그럼 이 다윗이 말한 여호와의 이름이 누구냐?

 

여호와가 아닌가?

 

네 여호와가 아닙니다.

 

이래서 어려운거죠.

 

여호와란 전쟁의 신이라는 뜻이지 이름이 아닙니다.

선생님은 이름이 아니라 호칭이지요

여호와는 전쟁을 아주 끝내주게 잘하는 백전백승의 전쟁의 신이라는 기능

곧 별명입니다.

 

바리새인이 예수님께 붙인 별명이 있잖아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요 먹기를 탐하는 자요 포도주를 즐기는 자 라고

 

어떤 행동을 하는가를 주시하고 붙인 별명이지 이름이 아닙니다.

 

하나님도 하늘에 계신 분 또는 한 분 이라는 뜻이지 이름이 아니듯이 말입니다.

 

결국 인간 쪽에서는 답을 찾을 수가 없는 겁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사울왕에게는 나는 너 사울의 하나님이 안될래 라고 선언한 셈이니

누가 그것을 알겠습니까?

그래서 그 빈공백을 어떻게 해서든 채울려고 신접한 무당을 만나서 죽은 사무엘을 불러들이는 둥 등등의 일을 하는 겁니다.

그런데 사울왕은 더더욱 그 결핍을 채울려고 할테니

누가 사울왕의 하나님이 가짜라는 것을 알겠냐 말입니다.


이스라엘 왕이라는 타이틀 때문에 다 속을 수 밖에 없는 겁니다.

괜히 거짓선지자들에게 다들 속았겠습니까?
 

우리야 지금 이미 결정난 입장에서 보니까 쉽겠지만

지금도 그런 분열은 계속해서 일어나는 입장에서 누가 알겠냐 말이죠.


(사 53:1, 개역)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
 

모를 수밖에 없는데

사건이 벌어짐에 있어서

여호와의 이름이 다윗에게 붙어서 구원을 성취하는데 있어서

사울왕은 창과 칼로 구원을 이룰려고 하고

다윗은 아무리 창과 칼을 쥐고서 구원을 이룰려고 해도 땍쥐 하면서 간섭을 받아서 안되도록 하고, 실패케 만들어서,

오히려 고난을 받아서 구원을 이루도록 하더라 말이죠.

 

이 고난 자체가 바로 여호와의 이름이다는 겁니다.

욥은 이 여호와의 이름 때문에 격게 되는 겁니다.

저들이 믿는 하나님으로부터 빼내시는 작업을 여호와의 이름으로 부터 당하는 겁니다. 덮치는 겁니다.

(행 2:21, 개역)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하였느니라』

(롬 10:13, 개역)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그 동안 구약에서는 누구 누구의 하나님이라고 마치 기생수 같이 누구라는 이름에 붙어있는 의미였던 겁니다. 그랬던 주님이 본격적인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기 시작하는데 그 때가 바로 이스라엘의 하나님으로써 이스라엘이 누락 되면서 시작되는 참선지자 시대입니다. 물론 거짓선지자도 반드시 동원이 되면서 이 이름을 위해 동원이 되어야 하듯이 말이죠. 네 원수가 발등상에 놓여져야 오른편에 누가 앉는지가 드러나니까 말입니다.)

 

구약의 남은자는

이스라엘이 아닌 이스라엘 속에서의 남은자는

여호와를 믿는게 아니라 여호와의 이름을 믿는 겁니다.

주께서 내 주께 처럼 분절이 되듯이

이스라엘도 교회도 성도도 믿는자도 여호와의 이름처럼 분절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속에서 이스라엘이 또 숨어있고
교회 속에서 교회가 
믿는 자가 믿는 자를 핍박하듯이

신자 속에 성도가 숨겨져 있는 겁니다.

 

(과거는 전쟁의 시대입니다. 그래서 무조건 전쟁 잘하는 신에게만 붙어있으면 되는 겁니다.

여호와 말입니다.

그런데 여호와의 이름이라는 고난은 다들 싫을 수밖에 없으니 아무도 믿을수가 없는 겁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저주인데 누가 믿겠습니까? 이스라엘 조차도 말입니다.


(사 53:1, 개역)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

)

 

그 이름의 실상이 신약에 이 이름이 누구냐 라고 했을때에
(구약에서는 이름을 알려줬는데 임마누엘입니다. 그런데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은 그 사건 속에 놓여지지 않고서는 그 이름이 누구의 이름인지 알 길이 역시나 없는 겁니다. 니 하나님이 아니라 내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 라는 겁니다. 역시나 두 개의 하나님으로 분절 됩니다. 결국 이사야만이 말하는 하나님만 진짜고 다른 사람 곧 이스라엘 사람 중에 이사야 빼고 다들 하나님을 운운할때 다 가짜 라는 겁니다. 이것이 보냄을 받았다 라는 의미로써의 선지자의 의미 입니다.)

예수님을 가리킨다고 빌립이 말하는 겁니다.

 

예수라는 이름이 우리가 평상시에 운운하면서 말하는 이름 들이댄다고 그 이름을 말하는것이 되는게 아니라

마치 부적처럼 또는 주문을 외우는 그런 이름이 아닌

 

예수님이 바로 나의 죄악을 대신해서 십자가의 저주를 받은 그 당사자로써의 이름이다는 겁니다.

다른 이름을 준 적이 없다 라는 겁니다.


(행 4:11, 개역)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행 4:12, 개역)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행 4:13, 개역) 『저희가 베드로와 요한이 기탄 없이 말함을 보고 그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 또 그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줄도 알고』

(행 4:14, 개역) 『또 병 나은 사람이 그들과 함께 섰는 것을 보고 힐난할 말이 없는지라』


버린 돌로써의 이름 입니다. 건축자들이 버린 돌 말입니다.

그와 동시에
 

보편적 단독자 라는 겁니다.

 

나의 모든 것을 책임지는 분이다 라는 겁니다.

과거 광고 내용에 하이카가 다 알아서 처리 한다고 했을때에

내가 나를 책임지는 일이 이제는 없다 바로 보편적 단독자가 다 알아서 처리했다 라는 겁니다.

 

? 예수님이 보편적 단독자어어야 하는데?

십자가에서 내 죄를 대신해서 죽으신 분은 이 이름 밖에 없고

다른 이가 없기 때문이다 라는 겁니다.


(사 53:1, 개역)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

팔 때문입니다. 오른팔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자는 오른편에 앉는이 뿐이다는 겁니다.

다른 이는 없고 다른 이름을 준 적이 없다 라는 겁니다.
원수가 발등상에 놓여짐을 거쳐서 말이죠.
 

그래서 모든 사람의 운명은 예수님의 십자가로 결정이 나 버린 겁니다.

 

보편적 단독자는 모든 인간을 대표하는 자 이거든요.

십자가에 달려 죽어야 하는 운명을 대표해서  다 이루었도다 라고 외치신 겁니다.

 

그렇게 됨으로서 너는 내 운명 이라는 영화 제목처럼

 

십자가는 내 운명이다 라는 겁니다.

 

다윗은 주께서 내 주께 라는 그 이름

여호와께서 내 여호와의 이름에게 이르시기를 라는

그 이름이 누구인가를 봤다 라는 겁니다.

보는 것을 훨씬 넘어서

그 이름이 격는 일을 소급해서 그 이름의 운명이 쳐들어와 덮쳐져 버리니 자신이 당하는 겁니다.

자신의 운명이 된 겁니다.

 

그 이름이 뭐냐? 고난 받는 종 이라는 이름이다는 겁니다.

또 이것을 흉내 내듯이 요즘은 안합니다만 얼마전까지 필리핀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을 실제로 재현하는 축제를 벌리곤 했는데

그것은 예수님의 운명이 덮친게 아닌 거죠. 마귀 짖인 겁니다. 오히려 교회가 그런 짖을 하도록 부추기잖아요.


그것은 오로지 예수님의 숙제일 뿐입니다.

 

선지자는 이 이름 때문에 졸지에 자신의 운명이 예수님의 운명을 미리 앞당겨서 보여주는 증상물이 되는 겁니다.

 

고난 의 종 말입니다.

고난의 종을 말하기 위한 껍데기 스피커인 광야의 소리요 그는 흥하고 나는 망해야 할 사건으로써 덮친거지
내 숙제는 아닙니다. 내 숙제가 되면 그것은 이름이 아닌 사울왕과 같은 결핍채우기 위한 여호와가 되니

우상숭배인 거죠.

 

고난의 종 이것이 그의 이름입니다.

그러니 기표, 언어, 문자가 아닌

내용물을 담기에

예수님이라는 이름이 신약에 본격적으로 나오기 전인

구약에서는 인자야 또는 임마누엘 또는 연한 순

등등의 표현으로 나오는 겁니다.

사건을 담아서 표현되는 이름으로서 말입니다.

그것도 십자가의 사건이 덮쳐져서 미리 보여주는 영사기 스크린처럼 선지자의 신체를 영사기로 삼은 겁니다.

 

지지난 시간에 말했듯이 이름은 아무것도 아니거든요

돈도 안되고

힘도 안되고

심지어 구원도 안됩니다.

이 이름에 상대적인 칼과 창 곧 힘은

돈도 되고요 힘도 되고요 심지어 구원도 됩니다.
경찰이 총을 허가받은 자로써 총을 소유하고 있지 않으면 누구를 구하겠습니까?


그런데 상대적인 그 반대의 의미인 [이름]은 그야 말로 아무런 힘이 안되는 겁니다.

어린아이가 여호와의 이름만을 가지고서 골리앗을 물리치겠다고 하니까

누가 비웃습니까?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 비웃는 겁니다.

사울 왕은 심지어 자신의 전신갑주를 어린아이에게 입히고자 했던 겁니다. 과연 어린 다윗을 생각해서 일까요?

그 정도로 끝까지 힘을 믿었고 하나님을 그런 힘으로 본 겁니다.

 

그러나 이 아무것도 아닌 이름에 모든 운명을 건다 라는 것은

마치 점쟁이에게 찾아가서 작명하는 것과 같아 보여서 입을 삐죽거리면서 비웃음 꺼리가 된다는 거죠.

 

부정 보다 더 부정성이니 미신도 아니고 말이죠.
(사울왕이 부자연스럽게 자신의 갑옷을 입히고자 한 것보다, 더 더 더 부정하게 여호와의 이름은 더 생뚱맞다 라는 겁니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고 맨몸으로 발가벗은것과 같이 여호와의 이름만을 외치는 겁니다.
결국 사울왕은 여호와의 이름을 무시한 겁니다. 골리앗과 같이 말입니다.)

 

그만큼 미신 보다 더 미신적으로 취급해 버릴 수밖에 없는 비웃음 속에서, 조롱 속에서,

 

반드시 무시 받는 식이다 라는 겁니다. 반드시 무시하는 상황과 맞물리게 한다는 겁니다.

 

우리는 또 무시 안하는 척 할려고 이름을 또 반대로

주문 외우듯이 드라큐라 쫏아내는 식으로 썩 물렀거라 예수 이름으로 물러가라

 

라는 식으로 떠들어대는 겁니다.

그건 이름이 아니지요.


그렇게 한다고 안맞물리는 것도 아니요

또 그렇게 안한다고 안맞물리는 게 아니다는 겁니다.

이름은 내 쪽에서 어떻게 할 수 없는 그냥 밀어 붙이는 불도져입니다.

그냥 그 이름에 깔려 죽으면 그만인 겁니다.

 

저렇게 모욕하든 이용을 하든

우리는 뭔가 그게 힘이 되는냥 도움이 되는냥 아쉬워서 붙드는 겁니다.
그러나 붙든다고 되는게 아니다는 거죠. 더욱더 홈이 파져서 그 빈공백에 더욱더 갈증만 더하게 되는 결핍만이 될 뿐이니까 말입니다.

 

(20:7, 개역)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를 죄없다 하지 아니하리라

 

출애굽 후에 십계명이 주어질 때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일컫지 말라고 했잖아요

 

그래서 이 이름 때문에 광야에서 뺑뱅이 돌리는 겁니다.

 

? 유월절 어린양의 피를 상기 시킬려고 말입니다.

 

즉 이 말은 바로 다 무시하고 다 잊어버렸다 라는 증거입니다.

또 율법으로 십계명을 이렇게 말씀하시는 이유는

바로 바로 어길 수밖에 없다 라는 겁니다.


또 이거를 안 어길려고 억지로 겉모양으로 다 지킨냥 갖추는 바리새인의 사고방식을 통해서

 

역시나 여호와의 이름은 무시 당할 수밖에 없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여호와라는 신을 믿는 것에는 달인들인데

여호와의 이름은 도저히 믿을 수가 없는 겁니다.

왜냐 하면 여호와를 믿기 때문에 말입니다.

 

그 이름이 바로 예수 이거든요.

 

즉 누가 알았겠습니까? 누가 믿겠습니까? 도통 믿을수가 없다는 겁니다.

 

바리새인들이 당대의 최고의 신앙인들로써

여호와는 믿어도 여호와의 이름은 못 믿는 겁니다.

 

하나님은 믿어도 하나님의 이름인 예수님은 못 믿는 겁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믿는 다는 이유로 하나님의 이름이 이 땅에 왔다고

올타구나 드디어 상속자가 왔구나 이 상속자만 죽여버리면 모든 것은 내 것이 되겠구나 라고 하는 겁니다.

(마 21:33, 개역) 『다시 한 비유를 들으라 한 집 주인이 포도원을 만들고 산울로 두르고 거기 즙 짜는 구유를 파고 망대를 짓고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더니』

(마 21:34, 개역) 『실과 때가 가까우매 그 실과를 받으려고 자기 종들을 농부들에게 보내니』

(마 21:35, 개역) 『농부들이 종들을 잡아 하나는 심히 때리고 하나는 죽이고 하나는 돌로 쳤거늘』

(마 21:36, 개역) 『다시 다른 종들을 처음보다 많이 보내니 저희에게도 그렇게 하였는지라』

(마 21:37, 개역) 『후에 자기 아들을 보내며 가로되 저희가 내 아들은 공경하리라 하였더니』

(마 21:38, 개역) 『농부들이 그 아들을 보고 서로 말하되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고 그의 유업을 차지하자 하고』

(마 21:39, 개역) 『이에 잡아 포도원 밖에 내어쫓아 죽였느니라』

비유란 믿으라고 주시는 말씀이 아니라 도저히 못 믿도록 하는 단절케 하는 의미로 비유를 주시는 겁니다.

비밀이거든요,

 

이해 될수 있는 이야기 일까요?

믿으라는 소리일까요?

도저히 못 믿는 불가능한 이야기

하나 마나 한 소리 이다는 겁니다.


성경은 믿으라고 준 적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불가능한 소리만 성경 전체에 담겨져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놀랍게도 이 불가능성을 가능성으로 바꾸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너무 너무 잘 믿고

여호와를 너무 너무 잘 믿는 겁니다.


다행스럽게도 여호와를 너무 너무 잘 믿어서, 하나님을 너무 너무 잘 믿는 이유로

여호와의 이름은 도저히 믿을수 없게 되는 겁니다.


제사가 가능한 자는 순종이 불가능하거든요.

번제를 잘 바치는 자는 도저히 인애와 자비가 나올수 없거든요,

율법은 결국 시이소 처럼 한 쪽을 누르면 다른 한 쪽은 튀어나오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불가능성이 이미 함께 우리에게 늘 있었다는 겁니다.

 

우리가 이 불가능성(부정성)을 다루는게 아니라

그 동안 이 불가능성이 우리는 다루어왔다는 겁니다.

 

내가 성경말씀을 읽는게 아니라

성경말씀이 나를 읽는 겁니다. 스캐너 하는 겁니다. 감찰하는 겁니다.

진료 진단하는 겁니다. 현미경으로 들따 보는 겁니다. 주객이 뒤바뀐 겁니다.

 

이것이 여호와의 이름입니다.

즉 대상물이 될 수 없다 라는 겁니다.

 

그냥 여호와는 인간의 대상물이 졸지에 되어 버린 겁니다. 그러니 자기부정이 안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와의 이름은 거꾸로 인간의 대상물이 될수 없는 단절, 불가능성으로만 일관하는 겁니다. 그러니 자기부인 하기 싫어도 자기부정케 하시는 성령이 덮쳐서 상하고 통회하는 자복한 심령을 허락하시는 겁니다.

 

방명록에 질문에 답한 내용이 바로

사울왕에게서의 여호와는 신앙의 대상물일 뿐입니다. 종교꾼입니다.

자기부인이 되지가 않습니다.

 

그러나 다윗왕에게서의 여호와는 졸지에 분절이 되어서

주께서 내 주께가 되어버려서

 

여호와의 이름인 에수님의 운명이 졸지에 미래완료로 다윗에게 덮쳐버리는 식입니다.

 

그러니 사울 왕 같은 식으로 신앙한 자에게

예수님께서 물으시니까 대답을 못하는 겁니다.

신학박사들 성경박사들이 말입니다.

 

 

(22:45, 개역)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

(12:37, 개역)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더라 백성이 즐겁게 듣더라

(20:44, 개역) 그런즉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으니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뇨 하시니라

 

 

(22:41, 개역) 바리새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물으시되

(22:42, 개역)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뉘 자손이냐 대답하되 다윗의 자손이니이다

(22:43, 개역) 가라사대 그러면 다윗이 성령에 감동하여 어찌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여 말하되

(22:44, 개역)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냐

(22:45, 개역)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

(22:46, 개역) 한 말도 능히 대답하는 자가 없고 그 날부터 감히 그에게 묻는 자도 없더라

 

 

결국 여호와의 이름은 여호와의 이름 되신 예수님이 직접 알려주시기 까지는 아는 자가 없다 라는 겁니다.

 

성령은 결국 예수의 영이다는 겁니다.


참선지자는 이 성령을 받았고

거짓선지자는 악령을 부은 겁니다. 그들이 악한 놈이라서가 아니라

주님 쪽에서 그렇게 하신 겁니다.


거짓선지자는 자나 깨나 이스라엘을 어떻게 바르게 이끌어 가느냐만 생각했던 자들입니다.

그러니 이스라엘이 멸망 당하니까 다 사라지는 겁니다.

멸망 당하는 절대로 안된다 라고 여기니까

멸망 후에 그들은 다 사라지는 겁니다. 사울왕이 그런 사고방식이였고

가룟유다도 어떻게 하면 유대인을 저 로마로 부터 해방하느냐에만 신경섰던 겁니다.
 

사울왕이 외치는 여호와가 아니라

사울왕에게 싫어버린바 된 여호와의 이름이다는 겁니다.

예수님은 사울왕에게 핍박 받으셔야만 하기 때문에 말입니다.
그런 사고방식의 유대인들(바라새인)로 부터 말입니다.


곧 우리들도 그런 사고방식 뿐인 겁니다.

 

우리들 역시나 예수님을 핍박하는 자들이다는 겁니다.


그렇기에 여호와의 이름이다는 겁니다.

구원은 여기에 있습니다.

사랑은 여기에 있습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사랑해서 독생자 예수를 화목제물로 주었다 라는 겁니다.

 

이 화목제물이

고난 받는 종 바로 여호와의 이름이다는 겁니다.

 

여호와가 아니라 말입니다.

 

여호와는 어떤 인간도 핍박안하거든요
하나님을 핍박하는 자는 아무도 없거든요,

오히려 하나님을 대신해서 예수님께 하나님의 저주를 퍼붓잖아요.

이게 우리의 모습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하나님(여호와)을 아무도 핍박하는 자가 없는 겁니다. 아무도 영접 안하는 자가 없는 겁니다.

그런데 여호와의 이름은 모든 인간들이 다 핍박하고 무시하거든요. 즉 아무도 영접치 않는 겁니다. 

(마 25:29, 개역)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마 25:30, 개역)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 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

(마 25:31, 개역)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마 25:32, 개역)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분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 같이 하여』

(마 25:33, 개역)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마 25:34, 개역)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마 25:35, 개역)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마 25:36, 개역)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 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마 25:37, 개역)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을 보고 공궤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마 25:38, 개역)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마 25:39, 개역)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마 25:40, 개역)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마 25:41, 개역)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

(마 25:42, 개역)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마 25:43, 개역)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아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

(마 25:44, 개역) 『저희도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치 아니하더이까』

(마 25:45, 개역)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마 25:46, 개역) 『저희는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즉 나와 맞물리는 것은 여호와의 이름이지

여호와가 아니다 라는 겁니다.
나의 숨은 죄악과 말입니다.

 

나도 알고 남도 눈치 채는 그런 죄악 7개 말고요, 사울왕은 평생 이거 덮는다고 허비한 겁니다. 우리도 마찬가지.

땅에 파 묻어서 어떤 누구도 못 보겠끔 평생토록 파 묻는 짖만 하는 그 죄악 말고요

 

반대로 나도 모르고 남도 모르는 그런 7에 70개의 숨은 죄악을 들추어 내시는 분이 바로 여호와가 아닌 여호와의 이름이다는 겁니다.

예수님 곧 여호와의 이름이 들추어내시는 나도 전혀 모르는 나의 죄악 770개의 죄악을

깊은 수렁에서 퍼내고 퍼내고 들이수시고 들추어내고 있는 그 이름이 바로 여호와의 이름 곧 예수님

고난 받는 종

십자가에 달리신 분이다는 겁니다.

용서 하시고자 말입니다.

나도 모르고 남도 모르는 나의 숨은 죄를 왜?

 

그러니 이해가 되겠냐 말이죠? 누가 믿을수가 있겠습니까?


거짓선지자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믿는 하나님을 외치니까 거짓선지자인 겁니다.

 

그러나 참선지자는 사울왕도 아는 사울패거리도 다 알고 믿고 떠는 그런 여호와가 아닌

그들이 전혀 모르는 여호와의 이름인 예수님을 증거했다 라는 겁니다.

감추인 이름 말입니다. 감추어진 이름이니 더더욱 모를수 밖에요.

 

그럼 간단하죠 거짓선지자는 예수님을 증거하고 싶어도 못한다는 겁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 교회의 모습은 예수님을 증거하는데 있어서 두 패로 나누어지는 겁니다.

사울왕과 다윗왕으로 나누어지듯이 말입니다.

 

예수님이 여호와의 이름으로써 나의 죄악을 들추어내는 식인가?

아니면 들추어낸 적도 없이 모든 허물을 다 덮어주는 좋으신 하나님인가 하는 점입니다.

 

찢은적도 없는데 어떻게 싸매주냐 말이죠.

찢겨진 적이 있어야 싸매주심이 의미가 있을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야 감사가 나오니가 말이죠.

 

오늘 시편 23편은 그래서 감사하다는 겁니다.

이것이 여호와의 이름이다는 겁니다.

? 고난의 종 때문에, 곧 여호와의 이름 때문에 (시편 22편의)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다 라는 겁니다.

다윗은 그 고난 속에 졸지에 동참되어버린 겁니다.

예수님의 운명으로써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사울왕들 패거리는 다윗이 고난 받으니까 하나님의 저주라고 퍼붓는 겁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운운하는 쪽은 저쪽이 더 잘하고 모든 대세를 다 쥘 수 밖에 없는 겁니다.

 

아무리 사울왕이 죽고 없어도

그런 인간의 군상은 어쩔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등에 업었거든요.

바리새인이 괜히 예수님을 죽인게 아닙니다.

자칭 겸손한 자들도써 실천가로써 칭찬이 자자한 자인데

왜 예수라는 이 인물 하나 죽이는데 모든 것을 다 걸었냐 말이죠.

 

사울왕이 틈만 나면 다윗을 죽일려고 했듯이 말입니다.

 

그러고보니 사울왕과 다윗의 스토리가

 

예수님과 바리새인의 스토리 아니냐 말이죠.

 

이게 보편적 단독자의 운명이 모든 이의 운명이다는 겁니다.

? 대표 니까

 

늘 쫏겨다니는 겁니다.

다윗이 그랬듯이

 

예수님도 말입니다.

 

늘 쫏겨나고


모든 인간들은 예수님을 쫏아내는 겁니다.

 

여호와는 쫏아내지 않거든요

그런데 여호와의 이름은 쫏아내는 이 역설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것이기에

 

걸림돌이다는 겁니다.

 

부정적이다는 거죠,

 

그런데 이 부정성 불가능성이 우리와 늘 함깨했다라는 겁니다.

 

다윗은 오늘 찬양합니다. 감사합니다.

늘 함께 했기 때문에

저는 저런 일을 격을 수 밖에 없군요,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 하나님이여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우리는 늘 감사 속에 늘 찬양 속에 누릴 수밖에 없게 하기 위해서

 

예수님의 운명이 덮쳐서 고난을 받을 수 밖에 없다 라는 겁니다.

 

내가 고난 받는것이 조건이 아니라

자꾸 내가 고난 받아야 한다는 그 따위 사고방식 때문에

그 정도로 어두운 내 때문에 예수님이 고난 받았구나 라는 것을 우리는

누리는 겁니다.


그래서 막살아라는 의미가 이런 보편적 단독자를 말하기 위함인데

도저히 막 살수 없는, 절대로 막살면 안된다는 자들은 여호와의 이름이 더 중요한게 아니라

자신이 믿는 신앙 대상물인 여호와가 중요해서 곧 우상숭배죠

자기투사인까

절대로 절대로 막살수 없다고 하는 겁니다.

이제껏 늘 막 살면서 말이죠.

 

그러니 의인이 아닌 죄인을 부르러 오신 것에 무조건 이유 없이 감사 할 수 밖에 없다 라는 겁니다.

 

아니오 함이 없이 뭐든지 예수 안에는 예가 될 수 밖에 없다 라는 겁니다.

 

? 늘 누려 왔기에

 

누구 때문에

 

도대체 그가 누구냐?

여호와의 이름이 누구냐 라는 겁니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쉴만한 물가로 인도해 왔었다 라는 겁니다.

부족함이 없이 넉넉히 말이죠.


이사야 53장에 나오는 계속해서 나오는 


그 

그가 

그가 째찍에 맞음으로


그 

그 

 

(11:24, 개역)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하시니라

(11:25, 개역)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11:26, 개역)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11:27, 개역)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11:28, 개역)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11:29, 개역)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11:30, 개역)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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