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괴롭히는 문으로써 예수라는 그 이름(시편 24)

 

일어나라 문들아 (의인화된 문)

 

(24:1, 개역) [다윗의 시] 땅과 거기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중에 거하는 자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

(24:2, 개역) 여호와께서 그 터를 바다 위에 세우심이여 강들 위에 건설하셨도다

(24:3, 개역)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 누구며 그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군고

(24:4, 개역)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 데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치 아니하는 자로다

(24:5, 개역) 저는 여호와께 복을 받고 구원의 하나님께 의를 얻으리니

(24:6, 개역) 이는 여호와를 찾는 족속이요 야곱의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로다(셀라)

(24:7, 개역)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

(24:8, 개역) 영광의 왕이 뉘시뇨 강하고 능한 여호와시요 전쟁에 능한 여호와시로다

(24:9, 개역)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

(24:10, 개역) 영광의 왕이 뉘시뇨 만군의 여호와께서 곧 영광의 왕이시로다(셀라)

 

 

제가 제목을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어서 의인화 라고 했습니다.

그렇다고 사물화 된 문 이라고 하기에는 일어나라 라는 표현이 안 맞고

또 그렇다고 바로 신격화 된 의미로 말하기에는

여호와와 여호와의 이름의 차이를 벌려야 하기에

안맞다고 생각해

 

어쩔수 없이 그저 가장 근접한 표현으로써 의미는 전혀 다르지만

저렇게 밖에 쓸수 없어서 표현했습니다.

 

지난 시간에 그가 누구냐 라는 겁니다.

 

그가 누구인줄 알려면

일단 [뭐 뭐는 ~ ~ 아니고]를 먼저 거쳐야 합니다.

 

그가 [여호와]는 아니다 라는 겁니다.

여기서 기존의 해석과 반대 또는 대립 또는 적대성이 되기에

받아들이기가 대략난감해져 버립니다.

 

그럼 [여호와]는 아니다 라면 일단 너는 이단이다 라는 욕을 먹고 시작하는 셈인 거죠.

그럼 누구냐? 지난 시간에

[여호와]가 아니라

[여호와의 이름]이다 라고 했습니다.

 

[여호와]란 [이름]이 아닙니다. 일종의 별명이라고 했습니다.

인간 쪽에서 붙일수 있는 이름이 없다 라는 겁니다.

그저 인간의 눈에 보기에 가장 어울리는 별명을 붙인 것이

전쟁의 신이라는 별명이 바로 여호와 라는 뜻입니다.

 

여호수아가 칼 싸움 하나는 이스라엘 중에 제일이였잖아요

그 이름이 바로 여호와 라는 언어의 변주에서 왔듯이 말입니다.

 

그럼 [여호와]가 아니고 [여호와의 이름]은 뭐냐?

구약에서는 알려준 적이 없다 라는 겁니다.

인간이 붙인 별명이 아닌

주님 쪽에서 주님 자신의 이름을 말해 준 적이 없다 라는 겁니다.

비스무리하게 힌트를 줘도 인간 쪽에서는 알길이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다윗이 성령을 받아 고백한

주께서 내 주께

여호와께서 내 주께 라는 표현입니다.

 

주님이 두 개의 주님으로 분절이 되는 겁니다.

 

앞의 주는 [여호와]이고

뒤의 주는 [여호와의 이름]이고

 

[여호와]가 [여호와의 이름]에게 말한다 라는 의미입니다.

 

(110:1, 개역) [다윗의 시]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

(110:2, 개역) 여호와께서 시온에서부터 주의 권능의 홀을 내어 보내시리니 주는 원수 중에서 다스리소서

(110:3, 개역) 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니 새벽 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오는도다

(110:4, 개역) 여호와는 맹세하고 변치 아니하시리라 이르시기를 너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한 제사장이라 하셨도다

(110:5, 개역) 주의 우편에 계신 주께서 그 노하시는 날에 열왕을 쳐서 파하실 것이라

(110:6, 개역) 열방 중에 판단하여 시체로 가득하게 하시고 여러 나라의 머리를 쳐서 파하시며

(110:7, 개역) 길가의 시냇물을 마시고 인하여 그 머리를 드시리로다

 

 

(22:44, 개역)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냐

 

(12:36, 개역) 다윗이 성령에 감동하여 친히 말하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발 아래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니라

 

(20:41, 개역)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사람들이 어찌하여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 하느냐

(20:42, 개역) 시편에 다윗이 친히 말하였으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20:43, 개역) 내가 네 원수를 네 발의 발등상으로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니라

(20:44, 개역) 그런즉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으니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뇨 하시니라

 

(2:29, 개역) 형제들아 내가 조상 다윗에 대하여 담대히 말할 수 있노니 다윗이 죽어 장사되어 그 묘가 오늘까지 우리 중에 있도다

(2:30, 개역) 그는 선지자라 하나님이 이미 맹세하사 그 자손 중에서 한 사람을 그 위에 앉게 하리라 하심을 알고

(2:31, 개역) 미리 보는 고로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을 말하되 저가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더니

(2:32, 개역)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2:33, 개역)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2:34, 개역) 다윗은 하늘에 올라가지 못하였으나 친히 말하여 가로되 주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2:35, 개역)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으니

(2:36, 개역)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2:37, 개역)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2:38, 개역)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2:39, 개역)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2:40, 개역) 또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가로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하니

(2:41, 개역) 그 말을 받는 사람들은 침례를 받으매 이 날에 제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갑자기 이런 생각이 떠오릅니다.

구약부터 내려온 이스라엘 사람들의 특이한 행동 중에 하나가

성경을 배끼는 사람들 서기관이지요.

인쇄술이 발달이 되지 않았기에 직접 일일이 배끼는 수 밖에 없었지요
.

그 사람들이 쭈욱 글을 따라 적다가 [여호와] 라는 이름이 아닌 단어를 딱 만나게 되면

하던 일을 멈추고 목욕을 하고서 자신을 정결케 해서 다시 적어나간 겁니다.

단어가 계속 연달아 나오면 또 어떻게 해서든 융통성을 부려서
중요한 것은 "정결케 했냐" 라는 여부를 자기검열을 한 뒤에 적어내려갔다 라는 겁니다
.

 

이것이 그들의 특이성이라고 하겠지만

실상은 어느 종교든 이런 내용들은 한번쯤은 다 있다 라는 겁니다.

 

문제는 이런 사고방식을 그대로 전수한 자들이 오늘날 성화론자들입니다.

지금 저들 서기관의 행동을 물론 그대로 따라하지는 않지요. 미신처럼 취급받으니까!

그러나 그런 변형을 취함으로써 여전히 저런 사고방식인 겁니다.

 

대표적인 것이 막살면 안된다 라는 겁니다.

 

사실 막사는 인간은 없어요. 다른 말로 자유한 인간은 없다 라는 겁니다.

그러니 불가능성이다는 거죠.

이것을 그들은 역으로 가능성으로 만든 것이 막살면 안된다 라는 겁니다.

그러니 목욕을 해서 정결케 한 뒤에 다시 여호와 라는 단어를 적어나가는 서기관들인 거지요.

 

저나 여러분이나 안 그러는 인간이 없는 겁니다.

안식일날 그래서 예수님께서 일부러 그들 코 앞에서

그들 보란 듯이 안식일날 안식을 어기는 겁니다.

 

아무튼 각설 하고

 

제가 성경구절을 인용해서 올렸는데요

성령에 감동하여서 다윗이 고백하기를

 

여호와께서 내 주께 말씀하시기를 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여기에는 여러 가지 부딧히는 것들이 많은데요

 

먼저 왜????  [여호와]가 [여호와]에게 라고 말 하지 않고 ???

[여호와]가 [여호와의 이름]에 말씀하냐 라는 겁니다.

 

그 이전에는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기를] 이라고 엄청나게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이 본문 이전에 말입니다.

 

그런 [내게 이른다] 라는 표현이 이제는 누락이 되어

새로운 판에서는 내게 이르지 않고

 

다윗 식으로 표현하자면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이르시기를]

[나 다윗에게 이르시기를]

[내게(다윗) 이르시기를] 이라고 해야 그 전의 표현들에서는 맞는데

이제는 새 판에서는 다윗언약에서는 다윗은 누락이 되는 겁니다.

다윗언약을 성취할 자는 다윗이 아니기에

정작 다윗을 누락 시켜서

그럼 누가 성취하느냐? 여호와의 이름이 성취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전쟁의 승리로 돌아와서 찬양이 펼쳐지는데

그 이름을 찬양하는 겁니다.

 

그래! 그래! 그래! [여호와]를 찬양하잖아

 

땡 틀렸다 라는 겁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 한다 라는 겁니다.

 

[여호와]를 찬양 하면

원수는 사울 선에서 까지만 멈춰 버리고

나는 원수가 아닌 채로 여호와를 찬양하는 식이고

그런 찬양대가 144천명으로 모이게 된 것인데

 

그것은 가짜 천국이지 진짜 천국이 침범한 것이 아니다 라는 겁니다.
인간이 이룬 천국인 가짜 천국인 겁니다. 인간 다윗이 이룬 천국 말입니다.
그럼 예수님이 오실 이유가 전혀 없는 겁니다.

 

진짜 천국을 가고 싶은 마음은 없는 채

이 땅의 제대로 된 천국의 가시화를 보고서 뿅가버리는 겁니다.
힘으로 이룬 천국 말입니다. 칼과 창에 의해서 세워진 천국.

그래서 일부러 인구조사케 만들어서 다윗을 탈락 시키는 겁니다.

 

다윗의 탈락이 다윗의 실패가 곧 다윗이 구원이 되는 겁니다.

어딜 감히 다윗 지가 뭔데 구원자 행세를 하냐 말이죠.
어딜 감히 남을 7번이나 용서하겠다고 하냐 말이죠.

성화론자들의 특징이 다들 [구원자 행세]를 해요


그래서 도리어 거꾸로 구원 받아야 할 입장에 놓이게 하고자

악령을 집어넣어 인구조사케 해서 다윗을 징계함으로서

 

다윗이 못 보는 맏아들을 보게 한다는 겁니다.
욥이 못 보는 율법 외에 한 의를 보게 하시는 겁니다.


7에 70번 용서 받아야 할 정도로 그 정도로 죄인 중의 괴수이다는 겁니다.
죄인 중의 괴수 만들기를 하시는 겁니다.

다윗은 정작 [죄인 행세]를 하는데, 바리새인이나 성화론자나 다들 [구원자 행세]를 한다는 겁니다.


전혀 보도 듣도 못한 인물인 맏아들

제가 맏아들이라고 쓴 표현은 신약에서 따왔습니다.

대신 형벌 받는 분 말입니다. 징계받는 분

이것이 바로 여호와와 여호와의 이름의 차이 이다는 겁니다.

사울왕은 구원자 행세를 하는 겁니다.

다윗은 반대로 죄인 중의 괴수 행세를 하게 됩니다. [여호와의 이름]이 그렇게 비로소 만든 겁니다.
십자가에 달려서 말입니다.

 

다윗은 그래서 그가 누구냐? [여호와의 이름]이 대신 매 맞는 분으로써 등장하는 겁니다.

전혀 못 본 인물이라는 겁니다.

 

이것을 또 신학자들은 인격화 된 신이라고 표현하는데 틀린 표현입니다.

그래서 제가 제목을 의인화 라고 표현하는게 찝찝하다 했는데

달리 떠오르는 표현이 없습니다.

신이라하면 사울왕 식의 여호와 개념으로 바로 생각할 테니 그건 엉터리 가짜 하나님이고

의인 곧 인물화 로 표현 하면 자꾸 우리처럼 사람이 되었다고 인간적인 면 인간이 되신 하나님이라고 

마치 인간이 뭐 대단한 줄 알고 있는 착각성


성화론자들이 대표적이고, 당사자인 인간들이 그런 착각을 하니 말입니다.

 

그러니 저는 의인화 라는 표현을 썼지만

우리 인간 편으로써의 인간이 되심이 아닌


정반대로 인간을 모조리 다 말살시키고자 하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스파이 인간?

또는 괴물 이다 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신적인 표현 곧 예수님의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하고 믿는 하나님이 아닌

역시나 정반대의 하나님이다는 거죠.

 

실제로 이 대충돌은 비언약백성이 아닌

언약의 백성 이스라엘 내부에서 벌어져서

사울 왕 때문에 이스라엘이 망하는게 아니라


다윗왕이 말한 여호와이름 때문에 여호와가 아닌 여호와의 이름을 고백하는 바람에

실제적인 종말적인 집단이 되어버린 겁니다. 유령 말입니다.

 

여호와의 이름만이 괴물이 된게 아니라

그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도 유령이 되어버린 겁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즉 유령이 된 겁니다.

(행 2:21, 개역)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하였느니라』

구원을 뿔이 나를 뜷어버려서 구멍이 뻥뻥 뚫혀진채로 오드라덱과 같은 시체가 된다는 겁니다.

(시 18:2, 개역)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자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피할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

(눅 1:68, 개역) 『찬송하리로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그 백성을 돌아보사 속량하시며』

(눅 1:69, 개역) 『우리를 위하여 구원의 뿔을 그 종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으니』

(눅 1:70, 개역) 『이것은 주께서 예로부터 거룩한 선지자의 입으로 말씀하신 바와 같이』

(눅 1:71, 개역) 『우리 원수에게서와 우리를 미워하는 모든 자의 손에서 구원하시는 구원이라』


(호 6:1, 개역)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그래서 여호와의 이름만 주었지 정작 그 실상은 신약에서만 나오지 그 이전에는 안 나오는 겁니다.

 

그 이전에는 힌트 맛배기 식으로 표현한게

 

지난 시간에 바로

 

라는 표현입니다.

그가 도대체 누구냐 라는 겁니다. 고난 받는 종, 연한 순, 임마누엘 등등으로써 그

 

그 란 직접적인 사건으로써 내 신체에 흔적을 남기는 자 라는 겁니다.

 

[여호와]는 내 신체에 흔적을 남기지 않습니다. 인간의 신앙 대상물이니까 말입니다.

 

그런데 [여호와의 이름]은 나의 신체에 직접적인 흔적 곧 상처를 남긴다는 겁니다.
거꾸로 [여호와의 이름]의 대상물로써 나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여호와]를 믿는자와 [여호와의 이름]을 믿는 자의 차이입니다. 원수지간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눈치 채셨지요?

누가 그 흔적, 그 상처를 입었습니까?

 

사울왕일까요? 다윗왕 일까요?

에서일까요? 야곱일까요? 야곱의 허리를 괜히 뿌랏뿐게 아닙니다.

가인일까요? 아벨일까요? 아벨을 돌삐 맞아 죽도록 그냥 내버려 둔 겁니다.

마귀일까요? 예수님일까요? 창자국 못자국을 만져봐라 말이죠!!

 

이 상처가 구원을 얻는 겁니다.

그 실패가 구원을 얻는 겁니다.

왜? 누가 손댔다 라는 겁니다.


구원의 뿔이 나를 뻥뻥 구멍 뚫어서 말입니다.
 

그것을 실행, 실천하시는 분이 바로

[여호와]가 아닌

[여호와의 이름]이다는 겁니다.

 

그래서 [여호와]를 찬양하는 시편 23편이 아니라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는 시편 23편이라는 겁니다.

 

승리와 평화의 종식으로써 안식의 완성이라는

[다 이루었다]를 이루시는 분은 [여호와의 이름]이기에

 

그래서 그 가 누가냐?

[여호와의 이름]이다는 겁니다.

 

자기 이름을 위하여 우리를 쉴만한 물가와 푸른초장에 인도하신다 라는 겁니다.

(시 23:1, 개역) 『[다윗의 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시 23:2, 개역)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 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시 23:3, 개역)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그렇다면 뭐뭐는 아니다
? [여호와]는 아니다 라는 겁니다.

즉 [여호와]에 빌어 붙었던 사울왕 패거리는 아니다 라는 셈입니다.

 

그럼 [여호와]와 [여호와의 이름]의 차이가 역시나 또 위에서 알려줘도 더 감추워지는 겁니다.

지난 시간들 중에 언급했지만 다시 말해본다면

이번에는 내용의 차이로써

 

여호와는 힘이 됩니다.

그러나 여호와의 이름은 힘이 안됩니다.

 

대표적인 사례로 룻기 이야기입니다.

어버이날에 사기를 치듯이 효도를 강조할 때 써먹는 룻기 이야기 말입니다.

 

나오미의 남편 이름이 엘리멜렉입니다.

 

(1:1, 개역) 사사들의 치리하던 때에 그 땅에 흉년이 드니라 유다 베들레헴에 한 사람이 그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 지방에 가서 우거하였는데

(1:2, 개역) 그 사람의 이름은 엘리멜렉이요 그 아내의 이름은 나오미요 그 두 아들의 이름은 말론과 기룐이니 유다 베들레헴 에브랏 사람들이더라 그들이 모압 지방에 들어가서 거기 유하더니

 

여기서 구원자 역할은 룻 이라는 며느리입니다. 그것도 개같은 이방인 여자입니다.
즉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비거룩한 존재요 그것은 곧 무능한, 아무것도 아닌 없음의 존재인 겁니다.

그 룻이 예수님의 족보에 들어간 인물입니다.

사사기에서 일부러 톡 하고 떼어낸 의미입니다.

칼과 창에 의한 구원이 아니라 이름이 구원하는데 그 이름이 뭐냐?

창 칼이 아닌 고난받는 종의 희생이다는 겁니다.

 

즉 [여호와의 이름]은 아무것도 아닌 무능 그 자체 이다는 겁니다.

[없음] 이다 라는 거죠.

 

이 없음에 없음으로 취급받는 것에 의해 상처난 시어머니 나오미가

바로 남편의 이름 속에 새겨진 하나님에 의해 구원 받는게 아니라

정반대인 [그런 하나님]을 거부하는(엘리멜멕의 하나님을 거부하는)

[하나님의 이름]에 의해 구원받는데 바로 [룻의 하나님]이다 라는 겁니다.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다 라고 한 말은 효도 효성의 말이 아닌 겁니다.

정반대인 거죠.

 

십계명에 네 부모를 공경하라 라고 했는데 여기서 부모란 출애굽 경험을 한 부모입니다.

그래서 선지자로써의 부모입니다.

[선지자란?] 항상 생각할때에 [보냄을 받은자] 라는 개념을 항상 잊지 않으면 됩니다.

즉 그 말은 딴데로 보냄을 받지 않고 한 과부, 딱 한명의 문둥병자에게만 보냄을 받은 자로써의 선지자 라는 겁니다.
단절로써의 선지자인 겁니다.

 

그럼 거짓선지자는 다수라는 개념과 연결 되지요. 그들은 소통의 선지자 입니다. 말이 통해요!!

 

그렇기에 참 선지자는 당연히 고향으로부터 배척을 받는 거지요.

결국 누구 운명입니까? 자기 백성으로부터 죽임 당한다는 의미 아닙니까?

 

그러니 자신이 참선지자라고 우기는 자들은 그 말로 자기팬클럽을 도리어 형성하고 있고

그들로부터 죽임을 당하고자 하는 사건이 안 발생한다는 거지요.


자기 백성들이 다 영접한다는 거죠.

같은 하나님이까 말입니다.


그러나 참선지자는 듣고 보도 못한 여호와의 이름을 증거하기 때문에 딱 한 명 대 다수의 대립이 되는 겁니다.
고향 곧 자기 백성으로 부터 버림 받는 겁니다.

그가 누굽니까? 버림 받는 하나님이다는 겁니다. 자기 백성으로 부터 말입니다.

 

다시 옆길로 빠진 것을 각설하고 본론으로 돌아오면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처럼 하나님은 왕이다 고로 나도 왕이다 라는 사고방식을 치시는(창과 칼에 의한 구원)

룻의 하나님(여호와의 이름)의 전쟁이다 라는 겁니다.

 

사울왕이 저런 사고방식이였거든요 하나님은 왕이다 라는

 

그런데 다윗왕은 다릅니다. 역시나 똑같았는데
주의 이름이 먼저 다윗을 쳐서 그게 아니다 라고 땍쥐를 한 다음에
새판 곧 여호와의 이름이라는 새로운 세계에 들어가는 겁니다
.
다윗 스스로 깨달아서 부른 이름이 아닌 겁니다.
여호와의 이름이 일방적으로 쳐들어 온 겁니다. 구원의 뿔로써 말입니다.

그 새로운 세계가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라는 겁니다.

(마 1:1, 개역)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마 1:2, 개역)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를 낳고』

 

그럼 다윗은 나오미처럼 전능자에게 지근 지근 밟혀서 그 상처로 구원되는 겁니다.

 

(15:23, 개역) 마라에 이르렀더니 그 곳 물이 써서 마시지 못하겠으므로 그 이름을 마라라 하였더라

(1:20, 개역) 나오미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를 나오미라 칭하지 말고 마라라 칭하라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니라

 

 

칼과 창에 의한 구원이 아니다 라는 겁니다.

힘이 되는 여호와에 의한 구원이 아니다 라는 겁니다.

 

아무것도 아닌, 있으나 마나 한

아무 힘도 능력도 없는 무능의 희생이

바로 [여호와의 이름]이요 그 이름으로 구원 된다 라는 겁니다.

 

다윗은 나오미처럼 이름을 갈아없애버리는 그 이름에 의해 구원받는 겁니다.

 

그래서 그 이전에는 이름이 자꾸 바뀌잖아요

아브람에서 아브라함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등등

 

누가 어떤 분이 저에게 질문하기를 성경에서 저런 의미로 이름이 바뀌어지니까

나도 나도 이름 바꿔 달라고 바꿔줘잉 ~~~ 저에게 질문해 온 분이 있었어요

 

그래서 안 바뀌어도 이미 바뀌어졌다 라고 했지요.

다윗은 이름 바뀌었나요? 안 바뀌었잖아요

사도바울 곧 사울은 큰 자에서, 바울 작은 자로 바뀌었거든요.

그럼 저 김대식도 큰 것을 심는다에서, 작은 것을 심는다 라고 김소식으로 바꿀까요? ㅋㅋㅋ

 

이미 바뀌어졌다 라는 것은 예수 안에서 다 이루었기에

나 개인 하나 하나에 신경 쓸 필요가 없이

위의 큰 판대기가 다 바뀌어졌으면 이미 다 이룬 것이다 라는 겁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런말은 말장난 같고(무능하기에, 아무것도 아닌, 있으나 마나) 

실질적으로 나에게 남은 우찌되든 말든

나의 변화가 와야 한다고 우기는 자들이 바로 

성화론자 라는 겁니다. 내가 성화되어야 한다는 거죠.


남이 성화되는 것은 배 아프지만

남이 성화 못 되면 꼬시지만

어쩻든 저쨌든 나 나 나 나나나나나

 

나는 반드시 성화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이것이 왜? 힘이 없는 무능하기 위해서?

천만의 말씀

힘이 되기 위해서

교인들 속에서 인기스타가 되기 위해서 말이죠.

 

세상에 누가 무능하기 위해서

힘을 안 추구하고자

죽기를 위해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자가 있겠습니까?

 

다들 힘 달라고 능력을 부어달라고 [하나님]을 부르지

엘리멜렉

하나님은 나의 왕이시다

왕 곧 힘이다 라는 겁니다.

 

힘이 안 될 것 같으면 왜 하나님을 부르냐 말이죠
힘이 될 것을 알기에 하나님을 부르는 겁니다. 참 믿음 좋죠!!!

 

댓글에 달겠습니다만 예수님을 왜 임금 삼고자 했냐 하면

그 이전에는 소문이든 기적이든 뭐든 직접적으로 와 닿지가 않는 겁니다.

그런데 눈 앞에서 오병이어로 오천명을 먹이고 12광주리가 남으니까

눈으로 포착이 되어버린 이상
왕으로 안 삼고는 못배기는 겁니다
.

 

그런데 예수님이 둘로 나누어 집니다.

임금으로 세우고 싶을 정도로 미치는 인간이 원하는 왕 예수


즉 인간의 믿음으로 믿음 가능한 예수
 

그리고 다른 하나는 그것을 거부하고 도망치는 예수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예수
 

두 왕으로 나누어지는 겁니다.

 

나를 성화되게 하는 임금 예수

 

전혀 성화되는데 도움이 안되는 싫어버린바 된 십자가의 죄인 예수

 

 

자 이렇게 서두를 길게 했는데

문들아 일어서라 라고 합니다.

 

문을 일종의 의인화 되게 표현하니까

우리 인간처럼 인간의 신체처럼

 

문들아 일어나라

문들아 머리를 들어라

머리가 들릴지어다 라고 표현한 것은

 

의인화의 목적이 아니라

그렇다고 문아 세움받아라 라는 사물화도 아니고

 

저는 개인적으로 사물화된 의인화?

아 이것도 뭔가 아쉬운데 아무튼 부정적인 의미이다 라는 겁니다.

 

아하 그래 차라리 부정화 라고 하면 나을 듯 저것 보다는 나을듯

 

즉 그 이전에는 단절 되었다 라는 겁니다.

세워져라가 아닌 일어나라 라고 표현한 것은 뭔가 잠에서 못일어났다 라는

나타난 적이 없었다 라는 표현으로써 그 이전에는 단절이다는 것이고


결국 안 보였다 라는 거죠. 마치 에덴동산을 철수시켜 동쪽의 문을 화염검 든 천사로 차단했듯이
그 이후로 본 적이 없는 문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없는 문인 셈입니다.

좁은 길로 가라 즉 없는 문으로 가라 라는 겁니다. 없는데 어떻게? ㅋㅋㅋㅋ

(마 7:13, 개역)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눅 13:24, 개역)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머리를 들어라 라는 것은

뭔가의 방향성 벡터

 

쳐다보라 라는 것이겠지요.

 

즉 그 이전에는 보기는 보아도 뭔지 몰랐다 라는 겁니다.

안 보였다 라는 역시나 단절이다는 겁니다.

 

또 여기서 머리를 들다와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라는

들다와 들릴지어다의 차이가 있던데

 

(24:9, 개역)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

(24:9, 공동) 문들아, 머리를 들어라. 오래된 문들아, 일어서라. 영광의 왕께서 드신다.

(24:9, 킹흠정) 오 너희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너희 영존하는 문들아, 곧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광의 왕께서 들어가시리로다.

(24:9, 현대인)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어라. 태고의 문들아, 열려라. 영광의 왕이 들어가신다.

(24:9, 현대어)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어라. 고색 창연한 문들아, 활짝 열려라. 영광스런 임금이 들어가신다.

 

저는 왠지 문자주의 세대주의 같겠지만

인자는 들려야 한다는 표현과 연관 시킨다면(물론 억지스럽지요. 저는 전문가가 아닙니다만)


인자가 들려야 한다면 그 말은 믿을 수 있다는 소리이겠습니까? 아니면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소리이겠습니까?

 

고개를 돌려서 쳐다보는게 뭐가 어렵겠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가장 쉬운 것이

도리어 가장 어려운 것이 된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불가능하다는 겁니다.

 

마치 비유가 그렇잖아요?
예수님의 비유는 그 당시 유행하는 어린아이도 다 알아먹는 이야기를(마치 씨뿌리는 비유처럼)
도저히 무슨 소리인지 모르는 패쓰워드를 걸어버리는 비밀이야기가 되어 버리는 식과 같다는 겁니다.

 

시편이 바로 그겁니다. 노래 아닙니까? 찬양 아닙니까? 그런데 아무도 찬양 못하도록 해 버렸다 라는 겁니다.

 

그럼 찬양은 어떻게 해야 하는데?

 

나오미처럼 다윗처럼 뚫히는 자가 한다는 겁니다.

어떻게 뚫히는데?

 

문이란 통로 아닙니까? 통로란 구원의 문 곧 성전은 인간의 손으로 세워지지 않는 겁니다.

주님 쪽에서 마련 된 성전이 있는데 예수님 자신의 신체입니다.


그 신체는 인간들에게서 가짜 문으로 취급받아서 버림받은 문입니다
.

즉 이 말은 인간들 자신들 마다 구원의 문짝을 개발해 놓고 있다 라는 겁니다.

 

그 성전을 일일이 허물어 버리는 문이라야 진짜 문 진짜 통로

예수님 자신이 친히 그 문이 되시는 문 통로로써

내 쪽에서 뚫어서 천국 가는게 아니라

천국이 쳐들어와서 도리어 내 쪽에서 뻥뻥 뚫힘 당하는

그런 구멍을 뻥뻥 뚫는 문으로써 천국에서 쏟아져 나오는 것이

성전이라는 문, 여호와의 산 이라는 문에서 나오는 것이 바로


진짜 찬양
곧 뭡니까
? 전능자 께서 나를 괴롭게 하셨다

나를 나오미라 부르지 마라 나를 기쁜자라 부르지 마라 라는 노래 입니다.

나를 마라 라 하라 나는 전능자에게 상처를 받아서 아프다 라는 겁니다.

전능자 께서 나를 괴롭게 하셨다. 라고 노래 부르는 겁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 식으로 하면

즉 다윗 식으로 하면
[여호와의 이름]이 원수와 싸워 승리했다 라는 찬양 입니다.

(시 24:9, 개역)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
 

그래서 의인화 된 표현처럼 문을 사람취급하듯이 우리 인간처럼 뭔가 동일시 일치성처럼 느껴지는데

인간은 인간인데 전혀 다른 인간 곧 낯설기 짝이 없는 인간

 

신은 신인데 인간이 믿을 수 없는 신

 

인간 같은 인간

신 같은 신

 

등등이 아니라 정반대로

 

인간과 전혀 다른 인간

신 아닌 신 이라는 겁니다.

 

기존의 신학자들의 표현과 정반대로 표현하고 싶어서 저렇게 쓴 겁니다.

 

인간 없는 인간 (인간 아닌 인간)

신 없는 신 (신 아닌 신)

폭력 없는 폭력 

카페인 없는 커피

 

등의 의미라는 거죠.

 

[인간 없는 인간]에는 인간의 속성이 전혀 들어가 있지가 않다 라는 겁니다.

[신 없는 신]에는 신의 요소가 전혀 없다 라는 겁니다. 물론 [인간이 생각한 신]이 없다 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은

 

문 없는 문 이다는 겁니다. 부정의 부정인 거죠.

제목을 차라리 문 없는 문으로 할까?

에이 뭐 오독을 하라지 뭐 ㅋㅋㅋㅋ

성경 말씀 자체가 오독을 유도하잖아요?

그래서 그 다음 정독은 예수님의 영으로 하는 겁니다.

인간이 성경 말씀을 읽을수가 없다 라는 겁니다.

예수님의 영이 나를 읽어나가는 겁니다.

거꾸로입니다.


문 아닌 문

통로 아닌 통로

구원 아닌 구원
 

그러니 사울왕을 원수로 삼아서 승리한 것이 [여호와의 이름]이 아니라

그것은 사울왕이 믿던 여호와죠

사울왕의 원수는 다윗이니까 말입니다.

 

정반대로 다윗왕을 원수로 삼아 승리한 것이 바로 [여호와의 이름]이다 라는 겁니다.

[여호와]가 아니라

[여호와의 이름]

 

결국 [여호와의 이름]을 우리는 바로 접할수 없고

오독으로 사울왕처럼 여호와에게 빠져서

성화론을 추구하다가

 

정독으로 성령으로 감동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에 의해

내가 하나님의 원수로써 나를 지근지근 밟아서 십자가에 못 박을때에

그 이름이 인자가 들리는 모습처럼 다가오는 겁니다.

그때는 비로소 안 보고는 못배기는 겁니다.


내가 못 박았기에

내가 못 박는 순간 나의 원수성이 들추어지면서 그 오른팔의 기능이 보이는 겁니다.

 

그렇다면 찬양 안 부르고는 못 배기는 거죠.

죄수복을 벗고서가 아닌 죄수복을 입고서 특별사면을 이루신 [여호와의 이름]을 화답하는 겁니다.

특별사면이 주님 쪽에서 나를 읽었다는 나를 찬양했기에 화답하는 것이 답가이지

찬양은 우리가 무슨 권한으로 나를 나에게 특별사면 합니까? 나는 갇혔는데

죄인인데

 

이것이 시편의 의미이다 라는 겁니다.

 

그렇기에 유대인의 시선에서는 시편 없는 시편으로써
시편 아닌 시편
찬양 아닌 찬양 그 자체로써

예수님 그 자체이다는 겁니다.

 

그런데 유대인은 차라리 찬양 못 부르는 벙어리 이다고 했으면 주님께서 찬양 부르게 했을텐데

찬양 부를줄 안하고 하니까

그들은 시편 그대로 오신 예수님을 시편 대로 죽이는 겁니다.


한 입에서 찬양과 저주가 동시에 난 겁니다.

그 외설성의 매듭을 풀 수가 없었던 겁니다.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 누굽니까?

영원한 문이 누구입니까?

 

이 말은 차단 되었다, 단절 되었다 라는 겁니다.

 

이 차단성의 심각성을 정작 여호와를 부르는 자는 전혀 심각하지 않았던 겁니다..

이 차단성의 심각성을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심각했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건져내랴

 

즉 죽은 목숨이다 라는 겁니다.

저주 받은 몸이다는 겁니다.

자신이 원수이다는 것을 알게 된 겁니다.

 

[여호와의 이름]에 의해 찔린바 된 자들은 이 곤고함을 아는 겁니다.

 

그런데 생뚱맞게 갑자기 원인 없는 결과로

 

예수 안에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결과물이 덮쳐와 버린 겁니다.

여호와의 이름이 승리한 그 공로로 말입니다.
찬양을 받아 버린 겁니다.

찬양 할 수 없는 원수임을 알았고 곤고한 자 라는 것을 성령을 통해 알게 되었는데

죄인 중의 괴수임을 성령을 통해 비로소 알게 되었는데

졸지에 찬양이 덮쳐 버린 겁니다.

 

그리고 주님이 부른 직접 승리의 찬가의 화답으로써

 

우리는 "그는 나 보다 옳도다"라고 [그 이름]을 부르는 겁니다.

 

나를 나오미라 부르지 말로 마라라 부르라 라고

그 이름이 이렇게 했다는 흔적

상처를 가지고서 말입니다.

십자가를 자랑 하면서 말입니다.

 

사람들의 믿음이 가능한 하나님이란 먹음직 보암직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운 의미입니다.
그래서 다들 임금 삼고자 왕으로 세우고자 하는 [하나님] 입니다.

그러나 정반대로 [하나님의 이름]은 아무런 도움도 안되는 싫어버린바 된 이름이요 고개를 돌리며

아무도 쳐다 볼려고 하는 마음이 전혀 들지 않는 모습으로써 사건 그 자체인 겁니다.

입을 삐죽 거린다고 다윗이 표현 했듯이
치 피 흥 거리는 다들 싫어하는 것이 [하나님의 이름]이다는 겁니다.

 

며느리 룻은 그런 일을 벌린 분이 사건으로써 진짜 [여호와의 이름]이 했다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다 라고

여호와의 이름의 의미를 증거하고 있는 겁니다.

 

이 세상 모든 만물은 바로 이 이름 때문에 동원이 되는 겁니다.

아무 힘도 아니되는 무능하기 짝이 없는

어리석은 이름 말입니다.

 

모든 만물은 바로 이 [영원한 문] 되신 [예수라는 이름]을 위해 동원이 되는 겁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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