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의 왕따 (시편 25)

 

(25:1, 개역) [다윗의 시] 여호와여 나의 영혼이 주를 우러러 보나이다

(25:2, 개역)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의지하였사오니 나로 부끄럽지 않게 하시고 나의 원수로 나를 이기어 개가를 부르지 못하게 하소서

(25:3, 개역) 주를 바라는 자는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려니와 무고히 속이는 자는 수치를 당하리이다

(25:4, 개역) 여호와여 주의 도를 내게 보이시고 주의 길을 내게 가르치소서

(25:5, 개역) 주의 진리로 나를 지도하시고 교훈하소서 주는 내 구원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종일 주를 바라나이다

(25:6, 개역) 여호와여 주의 긍휼하심과 인자하심이 영원부터 있었사오니 주여 이것을 기억하옵소서

(25:7, 개역) 여호와여 내 소시의 죄와 허물을 기억지 마시고 주의 인자하심을 따라 나를 기억하시되 주의 선하심을 인하여 하옵소서

(25:8, 개역) 여호와는 선하시고 정직하시니 그러므로 그 도로 죄인을 교훈하시리로다

(25:9, 개역) 온유한 자를 공의로 지도하심이여 온유한 자에게 그 도를 가르치시리로다

(25:10, 개역) 여호와의 모든 길은 그 언약과 증거를 지키는 자에게 인자와 진리로다

(25:11, 개역) 여호와여 나의 죄악이 중대하오니 주의 이름을 인하여 사하소서

(25:12, 개역)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 누구뇨 그 택할 길을 저에게 가르치시리로다

(25:13, 개역) 저의 영혼은 평안히 거하고 그 자손은 땅을 상속하리로다

(25:14, 개역) 여호와의 친밀함이 경외하는 자에게 있음이여 그 언약을 저희에게 보이시리로다

(25:15, 개역) 내 눈이 항상 여호와를 앙망함은 내 발을 그물에서 벗어나게 하실 것임이로다

(25:16, 개역) 주여 나는 외롭고 괴롭사오니 내게 돌이키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25:17, 개역) 내 마음의 근심이 많사오니 나를 곤난에서 끌어 내소서

(25:18, 개역) 나의 곤고와 환난을 보시고 내 모든 죄를 사하소서

(25:19, 개역) 내 원수를 보소서 저희가 많고 나를 심히 미워함이니이다

(25:20, 개역) 내 영혼을 지켜 나를 구원하소서 내가 주께 피하오니 수치를 당치 말게 하소서

(25:21, 개역) 내가 주를 바라오니 성실과 정직으로 나를 보호하소서

(25:22, 개역) 하나님이여 이스라엘을 그 모든 환난에서 구속하소서

 

 

다윗이 수치를 당하지 않게 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게, 구경거리가 되지 않게 말입니다.

 

마침 저에게 이런 질문이 왔습니다.

 

Q) 다윗이 시편에 보면 정말 사면초가 궁지에 몰려 간절히 기도하는 것이 많이 나오는데요. 저는 사람들과 천사들에게 구경거리가 되는 세상으로부터 왕따를 당한다는 느낌시 들때 돌연 저런 기도가 나옵니다. 이런 다윗의 심경을 일상 어느때에서 느끼시나요?

 

A) 다윗이 왕따 당하는 이유는 정작

 

다윗이 하나님의 이름을 왕따 시키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저도 마찬가지이고 다들 그러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힘으로써는 잘 도 믿습니다.

그러나 힘이 되지 않는 여호와의 이름은 거부합니다. 즉 왕따 시킵니다.

 

그래서 다윗이 하나님을 붙잡는 그것을 주님께서 왕따 시키고

다윗이 왕따 시키는 그 [여호와의 이름으로] 다윗을 구원 시키는 겁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로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으로 인함이다 라는 겁니다.

 

(53:5, 개역)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53:6, 개역)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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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제목을 다윗의 왕따 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제목을 일부러 애매모호하게 헷갈린 표현을 했습니다.

 

다윗이 왕따를 당한다는 말인지?

아니면 다윗이 왕따를 시키는 가해자인지를 말입니다.

 

저는 둘 다를 포함 시켜서 오늘 제목을 저렇게 한 겁니다.

 

그런데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표상은 누가 봐도 다윗이 왕따를 당하고 있습니다.

질문하신 분도 그런 의도였고요

오늘 본문 시편 25편도 그러합니다.

 

그런데 저의 답변은 아닙니다. 정반대입니다 라는 투로 바꾸어 말했습니다.

 

다윗이 왕따를 당하는게 아니라

도리어 다윗이 왕따를 시키고 있다고 말입니다.

 

그럼 누가 왕따 당하느냐 라는 숨겨진 인물로써 갑자기 초점이 바뀌게 됩니다.

그 숨어 있는 인물이 누구냐 라는 겁니다.

 

도대체 그가 누구죠?

 

지난 시간에 다윗을 괴롭히는 문으로써 영원한 문 곧 예수 라는 이름이다고 했습니다.

 

이 내용을 어머니와 나누면서 사도바울이 아니지 그때는 사울이였죠

사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는 장면을 가지고서 설명을 했습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눈이 멀어버린 사울이(큰 자) 곧 바울이(작은 자)

 

자신의 눈 먼 눈에만 보이는 자가 있었습니다.

이상하죠 눈이 멀었는데 눈이 비로소 멀게 되니까 보이게 되는 그 누구?

 

도대체 당신 누구요?

 

딴 사람 눈에는 안 보이는 그 분의 역량에 의해 자신은 넘어지는 겁니다.

그래서 직감적으로 나 보다 큰 이 라는 것을 알고 이렇게 묻습니다.

 

묻는다는 것은 자신의 영역에서 벗어난 존재와의 충돌 곧 만남 때문인 겁니다.

매일 매일 우리는 이런 물음을 던질 수밖에 없는 위험 속에 사실은 살고 있는 겁니다.

아무튼 이렇게 묻습니다.

 

주여 누구십니까?

 

그런데 그 답이 아주 아주 신비롭고 희한합니다.

 

니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다 라는 답변입니다.

 

분명이 바울은 그의 죽음을 목격한 자입니다.

 

어떤 신학자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대제사장이나 로마의 빌라도

등등은 일종의 허수아비라고 말입니다.

요즘 역사드라마처럼 몇 년전부터 광해가 계속 적으로 나오는 이유도

일종의 메시아니즘이다는 거죠

한국의 예술가들은 좌파를 주장하는게 아니라

예언자적으로 국제적인 환경이 광해 때와 같지 않냐 라는 시선에서 접근하듯이

일단 왕은 그저 허수아비일 뿐인데

대제사장도 마찬가지이고요

이런 허수아비를 뒤에서 조정하는 대중을 움직이는 자들이 바로

사도바울과 같은 인물이였다 라는 주장이였습니다.

 

이것이 정치인데 정치란 결국 대중을 실제적으로 움직이는 매시아니즘이다는 거죠.

 

왕도 이것에 의해 세워지는 겁니다. 마귀의 세가지 시험도 마찬가지인 거죠.

 

그러니 실제적으로 예수님의 죽음을 대중적으로 움직인 최전방의 저격수는 사도바울이였다는 주장인 겁니다.

 

그랬던 그가 이제 거꾸로 돌변한 겁니다.

 

어머니께 말한 부분은 이런 겁니다.

분명 자신의 손으로 죽인 거나 마찬가지이다는 겁니다.

그 연장선상에 스데반 집사의 죽음도 동일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어떻게 살아나냐 말입니다.

 

그래서 이 답변이 너무 너무 중요합니다.

 

주여 누구십니까? 라는 질문에

그냥 나 예수다 라고 하지 않고

 

너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다 라고 합니다.

 

(9:1, 개역) 사울이 주의 제자들을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9:2, 개역)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좇는 사람을 만나면 무론 남녀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라

(9:3, 개역) 사울이 행하여 다메섹에 가까이 가더니 홀연히 하늘로서 빛이 저를 둘러 비추는지라

(9:4, 개역)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 있어 가라사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9:5, 개역) 대답하되 주여 뉘시오니이까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9:6, 개역) 네가 일어나 성으로 들어가라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하시니

(9:7, 개역)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 섰더라

(9:8, 개역)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9:9, 개역) 사흘 동안을 보지 못하고 식음을 전폐하니라

 

 

말이 핍박이지 실제적으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모든 진두지휘를 실행한 당사자 이다는 겁니다.

 

즉 죽였다 라는 겁니다.

 

자신의 손으로 분명히 죽였는데

남의 손으로 의탁한 것도 아닌

자신이 직접 말입니다.

 

그런데 그가 다시 살아나서 이런 답변을 한다는 것은

 

바울이 아무리 완벽한 신학과 신앙으로 무장을 해도

그 앞에서는 그야말로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는

헛짓을 했다는 것이 들통나게 되었다 라는 겁니다.

 

평생을 목숨을 걸었는데 말입니다.

그 목적을 상실 당해 버렸는데

 

그것이 다시 예수님으로 바뀌었다 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 정반대라는 겁니다. 예수님의 목적대상에 바울이 되어버렸기에

이런 사건이 거꾸로 발생했다 라는 겁니다.

 

이 거꾸로의 쳐들어 옴에 저항 한번 못하고 바울은 넘어지는 겁니다.

이것이 바울을 괴롭히는 영원한 문의 등장이다는 겁니다.

 

다윗 또한 똑같은 셈인 거죠.

 

영원한 문은 그 전에는 없었다 라는 겁니다.

그런데 없어서 없는게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았고

눈에 보이지 않았다는 것을 인간은 없음으로 취급해 버리는데

그 없음이 영원히 그 동안 함께 해 왔다 라는 겁니다.

그런데 단절 된 거죠.

 

단절이 뭡니까? 배제와 소외와 차단이 되었기에 접근불가능했다 라는 겁니다.

거룩으로 나타나시는 여호와 앞에서 항상 믿음의 선배들은 단절성을 격었습니다.

그 정도로 더럽다 라는 겁니다.

거룩을 만난 자의 특징입니다.

 

영원한 문이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늘 항상 함게 했는데 즉 이 말은 불가능이요 단절인데

느닷없이 등장했다 라는 것은

다윗을 여호와에게서 빼내기 위해서 여호와의 이름으로 등장했다 나타났다

문을 열었다 라는 겁니다.

 

다윗 쪽에서 찾아감이 다 차단 당하고

영원한 문 쪽에서 다윗 쪽으로 향하면서 구멍을 뚫어서 소통이 되었다 라는 겁니다.

 

그 구멍이 뻥뻥 뚫힘의 흔적으로써 다윗은 안 외치고는 못배기는 것이

영원한 문들아 머리를 들지어다 라는 외침이다는 겁니다.

 

이것을 목소리 속의 뼈 라고 철학자들이 말하곤 하는데

삑사리가 낫는데 허걱 거리면서 나온 소리이다는 거죠.

 

화로다 화로다 나는 망하게 되었도다 라는 헉

허걱

 

그 동안의 내가 알던 여호와가 아니다 라는 겁니다.

여호와의 이름이 덮치니까 전혀 다른 딴소리 삑사리를 외치더라 말입니다.

 

그것이 전능자 여호와께서 나를 괴롭혔다 라는 겁니다.

남편의 하나님이 아니라

며느리의 여호와가 말입니다.

 

다윗이 동일하게 그 전능자가 이제는 영원한 문 으로써 표현 되면서 등장하는데

바로 예수님이다는 거죠.

그 여호와의 이름이 나 다윗을 괴롭혔다 라는 겁니다.

 

나를 나오미라 기쁜자라 부르지 말라

나를 마라라 하라 전능자 께서 나를 괴롭혔다 라는 겁니다.

 

그런데 사실상 오늘 본문을 통해서 보면

 

그가 나를 괴롭힌 이유는

정작 내가 그를 괴롭혔다 라는 겁니다.

 

내가 왕따 당하는 이유는

정작 내가 여호와의 이름을 왕따 시켰다 라는 반증이다는 겁니다.

 

 

사도바울이 바로 그러하다 라는 겁니다.

 

하나님 또는 여호와 라는 힘이 되는 이유로 믿었는데

그것이 정작 여호와의 이름을 핍박하는 이유가 된 겁니다.

 

이것이 역설이라고 했잖습니까?

내 열심히 특심이니 왜 여호와 하나님은 나를 왕따 시키는 겁니까? 라고 엘리야가 반박하듯이

열심히 특심일수록 더 그러하다 라는 겁니다.

 

그런데 여호와의 이름은 도리어 니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다 라고 나오는 겁니다.

 

이 차이의 간극이 바로 진리이다 라는 겁니다.

이 단절이 말입니다.

 

일치라고 동일성이라고 여겼던 것은 적대적인 관계였고

양립불가라고 여겼던 것이, 그 단절의 간극이라고 여겼던 것이 바로 진리 곧 사랑이였다 라는 겁니다.

 

도저히 양립할수 없는 일치 할 수 없는 불가능성이 말입니다.

이 불가능성이 항상 함께 해 왔었다 라는 것이고

눈에 안 보였다고 없었던게 아니라 항상 곁에 있어왔고

 

정작 반대로 내가 눈으로 인식해서 있다 있음 존재 라고 여겼던 것은

전혀 존재하지도 않았던 겁니다. 허구였던 겁니다.

 

(고후 4:16, 개역)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 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고후 4:17, 개역)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고후 4:18, 개역)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11:1, 개역)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11:2, 개역)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11:3, 개역)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그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나 라는 존재 이다는 겁니다.

데카르트는 의심하고 있는 나는 절대 의심할 수 없다 라고 했는데

정작 정반대로 그것이 가장 잘 보이는 나 라는 존재인데 오히려 나란 없다 라는 것을

요즘 철학자들은 눈치를 챘는 겁니다.

 

결국 하나님이나 여호와를 힘으로 인지한 것은 결국 그렇게 보기를 원하는 나를 인지한 것으로써 가시화 한 것이 하나님이다는 겁니다. 자기투사한 것이 하나님이다 라는 거죠.

그러니 힘이 안되고는 못배기는 거죠, 내가 의미를 부여했기 때문인 겁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동시에 배제된 즉 왕따가 된 안보이는 존재가 바로

여호와의 이름인데

전혀 전혀 힘이 안되는 겁니다.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라고 했습니다.

 

쓸모 없다고 무기능이다고 아무 쓰잘데기가 없다고 버린 겁니다.

건축기술자들이 괜히 버린게 아니다 라는 거죠,

 

아무리 따져도 따져도 기능이 없다 라는 겁니다.

성전을 지을 때 말입니다.

 

그런데 그 성전의 머릿돌이 바로 영원한 문 즉 성전 그 자체가 되는 여호와의 이름

영원한 문이였다 라는 겁니다. 안보이는 문이, 눈에 보이는 성전을 허물고서 등장하는 겁니다.

 

그럼 눈에 보이는 성전인 인간의 손으로 지은 성전을 대변해 주는 자가 다윗 아닙니까?

 

다윗언약은 한 마디로 성전개념인데 문제는 성전이 누구냐 라는 겁니다.

인물 개념으로서의 성전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인간의 손이 개입 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교회는 성령의 전으로써 인간의 손을 탈 수 없다는 의미에서 교회이다는 겁니다.

그리스도의 몸을 어떻게 인간이 구성할 수가 있겠습니까?

불가능하다는 겁니다. 인간은 아무리 힘서도 교회를 만들어 낼수가 없다는 겁니다.

 

보이는 성전을 짖는데 혈안이 되어 있는 그 다윗을 거부하면서 짓는 성전으로써 등장하는 것이 영원한 문이다 라는 겁니다.

 

다시는 허물어지지 않는 참성전 말입니다.

 

그래서 누가 다윗을 왕따 시키는가?

 

여기서 다윗이 주체가 되는 분명 시편 25편에서는 다윗이 왕따 당한다 말이죠.

 

그런데 정작 주님은 정반대로 누가 나를 핍박하느냐 라는

눈에 보이지도 않는 참성전이신, 영원한 문이신,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배제당한 여호와가 아닌 여호와의 이름인 자신을(영원한 문) 나타내시면서

누가 핍박하느냐 라고 묻는 겁니다.

 

그 동안 없었던 문이 등장하면서 말입니다.

 

바울은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버렸기에 분명 자신의 손으로 없애버렸습니다.

이제 그의 존재는 없는 겁니다.

없는데 갑자기 나타난 겁니다.

 

그래서 눈에 보이는 것과 일치 동일시 하는 것이 도리어 대립적인 원수라는 의미로써 증거하시고

 

여호와의 이름이 직접 그렇게 증거하시고

다윗은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 저 대립적인 원수 속에 놓여졌는데

그 속에서 빼냄을 당하는 자로써 동원이 되는 겁니다.

 

결국 시편 232425편은 다윗이 저자가 아니라

시편 전체는 저자가 여호와가 아닌 여호와의 이름이다 라는 겁니다.

 

그런데 이 시편이 여호와를 믿는 자들에 의해서 외워지고

시편을 전혀 모르는 자들에게는 여호와의 이름이 부른바 되는 겁니다.

 

이 역설

이 양립불가로써 증거 되는데 있어서

여호와의 이름이 그렇게 하셨다 라는 겁니다.

 

그러니 다윗은 일방적으로 당하면서 외치게 되는 겁니다.

나 이렇게 당했다 라고

 

알고 보니 내가 핍박당한게 아니라 내가 도리어 여호와의 이름을 핍박했단다 라고

 

이것이 복음입니다.

 

복음이 희한하죠?

내가 핍박한 예수를 외치는 겁니다. 전하는 겁니다.

 

내가 영접한 예수를 전하는게 아니라

내가 핍박한 예수를 말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뻔뻔스럽냐 말이죠.

 

그러니 다윗은 이 역설을 이 모순을 다 장착해서 증거하는 증인이 되는 겁니다.

 

하나는 예수님을 핍박하는 자로써 들통내시는 나사렛 예수의 되물음입니다.

네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라

 

또 하나는 예수님이 그런 다윗을 왕따 시킴으로써 구원하심 말입니다.

 

말이 되나요?

 

말이 안되는 것이 구원입니다.

얼토 당토 않는 것이 구원입니다.

 

상처는 그 찌른 창에 의해서만 치료된다는 겁니다.

외설적인 매듭을 푸는 방법인 거죠.

 

아무리 봐도 내 같은 놈은 구원 받을 자격 자체가, 그 근거가 아예 없는 것이

구원이기에

 

그 모든 조건을 무용지물로 만드는 것이 구원 곧 십자가라는 쑤시개입니다.

 

구원은 그야말로 황당한 겁니다.

 

구원이 정당하다면 그 사람은 마귀자녀입니다.

구원은 아무리 봐도 아무리 뜯어봐도 말이 안되는 것이어야 한다 라는 겁니다.

 

얼마나 말이 안되면 오늘 시편 25편을 달달달 외운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일 정도로

그 정도로 구원은 불가능성 그 자체이다는 겁니다.

 

유대인도 안되는 판국에 내가 무슨 수로?

천재들도 구원 안되는 판국에 내가 무슨 수로?

그것도 죄인 중의 괴수로만 드러날 뿐인데 말입니다

 

다윗도 바울도 모세도 베드로도 모조리 다 예수님을 죽여라 죽여라 라는

죽이는데 일등 공신으로써 활동하던 자들인데

 

그런 자들이 구원 받았다 라는 겁니다.

 

도대체 왜?

 

어떤 조건을 갖추었길래?

 

그런데 없다 라는 겁니다.

 

그 어떤 연결점이 없다 라는 겁니다.

 

연결점이 없도록 완성한 것이 십자가 이다는 겁니다.

 

수많은 거짓증거자들은 어떻게 해서든 그 연결점을 설명해서

이어주고자 열심입니다.

 

그런데 참선지자는 정반대입니다.

 

연결은커녕 넌 끊어진 자야 라고 아예 단언을 하고 돌아다닙니다.

 

그래서 다윗은 직시를 합니다.

 

주여 끊어지지 않게 해 주세요

제발 제발 수치를 당하지 않게 해주세요 라고 합니다.

 

나의 죄과를 내가 아오니 제발 제발 그 허물을 덮어주시옵소서 라고 합니다.

 

그런데 사실상 안 덮어주고

도리어 세상의 구경꺼리

웃싸꺼리

비방받는 놀림꺼리로 만들어 버립니다.

 

이것은 다윗을 상대하는게 아니라

다윗을 예수님의 운명에 초대하는 겁니다.

 

그 예수님의 운명이 다윗이 운명이 되도록

다윗은 졸지에 목적대상물이 되어버린 겁니다.

 

다윗이 기도하는게 아니라 거꾸로 예수님이 다윗에게 기도하는 겁니다.

 

그러니 다윗의 이런 기도 요청은 하나도 안 이루어지는 단절성으로써

예수 안에서 다 이루어 지는 겁니다.

 

즉 예수님이 다 당하는 겁니다.

 

다윗은 자신이 심각한 줄 알았는데

다윗 자신 때문에 모든 허물을 예수님이 다 당하는 것을 목도하는 겁니다.

 

그러니 시편 25편은 이렇게 되는 겁니다.

 

다윗 왈 주여 주여 나를 수치 당하지 않게 해 주소서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게하소서 나의 죄를 도말하여 주소서

주의 인자로 자비를 베푸소서 라고 말입니다.

 

거기에 대한 주님의 답변은 이겁니다.

그래 그래 너를 수치 당하지 않게 여호와의 이름인 예수를 수치 당하게 하마

너를 부끄럼 당하지 않도록 모든 이들에게 싫어버린바 되는 예수를 보내마

그래 그래 너의 모든 죄악을 예수에게 뒤짚어 씌워 죽임을 당케 하마

그래 그래 너를 주의 인자로 자비를 베풀어 용서하고자 여호와의 이름인 예수를 장대 높이 달아서 십자가에 죽이도록 하마

 

 

이렇게 대답을 하는 겁니다.

 

자 이렇게 되면 믄 말을 못하게 만드는 식이 되는 겁니다.

 

우리는 얼마나 당당했습니까? 핍박당할 때 주여 도와 달라고

그런데 예수님은 더 당당합니다. 그래 너 핍박 당하는 구나 그럼 나는 십자가에 죽으마 라고

 

믄 말을 못해요 겁나서

 

주여 실로암 망대가 무녀져 7명이 죽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저주 받은 사람 맞지요?

 

그래 그래 그 다음은 니 차례야

 

믄 말을 못해 ㅋㅋㅋㅋ

 

즉 핍박 당해도

왕따 당해도

죄 이다 라는 겁니다.

 

피해자 되면 나는 가해자가 아니다 라는 정당성을 확보한다는 것이 그것이 바로

마귀가 노린 것이다 라는 겁니다.

 

그 어떤 이유로도 나에게는 정당할 것이 아예 없다 라는 것이

갇혔다 라는 증거이다 라는 겁니다.

 

여전히 갇혔다 라는 것을 인지 못하니까

예수님이 핍박 당하는 모습을 보여진다는 겁니다.

그럼 가해자가 누구인가를 보니

제일 선두에 내가 있다는

 

너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다 라는 것이

 

바로 이것이 복음의 정수이다 라는 겁니다.

 

즉 복음의 정수는 나에게 정곡을 찌르는 것이지

나는 하나도 안 기쁘다는 것이 복음 기쁜소식이다는 거죠.

 

바로 이것이 기쁜소식입니다.

 

기쁜 소식이 아닌데 기쁜소식인 복음

 

노래가 아닌데 노래이다는 시편

 

누가 이걸 노래 부르겠습니까?

 

오직 성도인 뻔뻔스러움만이 노래를 하는 겁니다.

 

이렇게

 

주여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십니다.

주여 제가 주님을 억수로 사랑하는 줄 주께서 더 잘 아십니다.

 

걱정 스럽게 주여 제가 주님을 이빠이 사랑하는 줄 주님이 더 잘 아시잖아요 왜 이러세요 자꾸 ~~~~~~~~ 사랑합니다 안 캅니까 자꾸 물어봐잉 잘 아시면서잉

 

 

(21:15, 개역) 저희가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21:16, 개역) 또 두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양을 치라 하시고

(21:17, 개역) 세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가로되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양을 먹이라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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