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륜으로만 완성된 예수님(여호와의 이름) 족보 (시편 26편)

 

(26:1, 개역) [다윗의 시] 내가 나의 완전함에 행하였사오며 요동치 아니하고 여호와를 의지하였사오니 여호와여 나를 판단하소서

(26:2, 개역) 여호와여 나를 살피시고 시험하사 내 뜻과 내 마음을 단련하소서

(26:3, 개역) 주의 인자하심이 내 목전에 있나이다 내가 주의 진리 중에 행하여

(26:4, 개역) 허망한 사람과 같이 앉지 아니하였사오니 간사한 자와 동행치도 아니하리이다 

(26:5, 개역) 내가 행악자의 집회를 미워하오니 악한 자와 같이 앉지 아니하리이다

(26:6, 개역) 여호와여 내가 무죄하므로 손을 씻고 주의 단에 두루 다니며

(26:7, 개역) 감사의 소리를 들리고 주의 기이한 모든 일을 이르리이다

(26:8, 개역) 여호와여 내가 주의 계신 집과 주의 영광이 거하는 곳을 사랑하오니

(26:9, 개역) 내 영혼을 죄인과 함께 내 생명을 살인자와 함께 거두지 마소서

(26:10, 개역) 저희 손에 악특함이 있고 그 오른손에 뇌물이 가득하오나

(26:11, 개역) 나는 나의 완전함에 행하오리니 나를 구속하시고 긍휼히 여기소서

(26:12, 개역) 내 발이 평탄한 데 섰사오니 회중에서 여호와를 송축하리이다


(마 1:1, 개역)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마 1:2, 개역)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를 낳고』

(마 1:3, 개역)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헤스론은 람을 낳고』

(마 1:4, 개역) 『람은 아미나답을 낳고 아미나답은 나손을 낳고 나손은 살몬을 낳고』

(마 1:5, 개역)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마 1:6, 개역)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마 1:7, 개역) 『솔로몬은 르호보암을 낳고 르호보암은 아비야를 낳고 아비야는 아사를 낳고』

(마 1:8, 개역) 『아사는 여호사밧을 낳고 여호사밧은 요람을 낳고 요람은 웃시야를 낳고』

(마 1:9, 개역) 『웃시야는 요담을 낳고 요담은 아하스를 낳고 아하스는 히스기야를 낳고』

(마 1:10, 개역) 『히스기야는 므낫세를 낳고 므낫세는 아몬을 낳고 아몬은 요시야를 낳고』

(마 1:11, 개역) 『바벨론으로 이거할 때에 요시야는 여고냐와 그의 형제를 낳으니라』

(마 1:12, 개역) 『바벨론으로 이거한 후에 여고냐는 스알디엘을 낳고 스알디엘은 스룹바벨을 낳고』

(마 1:13, 개역) 『스룹바벨은 아비훗을 낳고 아비훗은 엘리아김을 낳고 엘리아김은 아소르를 낳고』

(마 1:14, 개역) 『아소르는 사독을 낳고 사독은 아킴를 낳고 아킴은 엘리웃을 낳고』

(마 1:15, 개역) 『엘리웃은 엘르아살을 낳고 엘르아살은 맛단을 낳고 맛단은 야곱을 낳고』

(마 1:16, 개역)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

(마 1:17, 개역) 『그런즉 모든 대수가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열네 대요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이거할 때까지 열네 대요 바벨론으로 이거한 후부터 그리스도까지 열네 대러라』
 

 

아침에 일어나기 바로 전에 꿈을 꾸는 경우가 있습니다.

형수가 아들 즉 조카가 이스라엘의 의미를 잘 안다고 말하면서 갑자기 꿈에 나타난 겁니다.
아마 제가 이스라엘이 뭘까 하는 고민 중에 나타난 것 같습니다.

그러더니 조카도 갑자기 나타나길래 이스라엘이 무슨 의미인데? 라고 물으니

이스라엘의 의미는 쌍둥이다 라고 말하더군요.

음 쌍둥이 의미도 있긴 하지 하고

어느새 다들 사라지고

그 다음 부터는 저 혼자 지난 시간에 살펴본 시편의 내용들이 연결이 되면서

 

가만히 보니 예수님의 족보 형성이 반드시 불륜의 스캔들로만 형성된다는 의미가

계속해서 맴돌면서

그래 그래 이거네 이거 이거

꿈에서 깻습니다
.

 

영원한 문되신 예수님이 문으로써 괴롭히는 자 곧 전능자라고 했습니다.

이 부분을 어머니와 나누면서

약속의 땅을 살면서도 엘리멜렉이라는 나오미의 남편은 베들레헴을 벗어나

곧 약속의 땅을 벗어나서 요즘말로 성공해서 돌아올려고 했는데

정작 쫄딱 망한 아니 아예 죽임을 당하고 남자들은 다 죽은채로

베들레헴에 돌아오는 겁니다.

 

사사기에 포함 되어야 할 룻기를 효도사상으로 가르치지만 정작 정반대로써
(한국기독교는 유교기독교라는 혼합주의의 전형적인 모습인 거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내 하나님이다 라는 룻의 말은

 

어머니의 하나님이 엉터리 하나님이다 라고 여호와의 이름이 하나님을 치시는 것을

며느리 룻은 봤다 라는 겁니다.

하나님을 여호와의 이름이 지근 지근 밟는 겁니다.

우상을 예수님이 지근 지근 말입니다.

 

그러니 기존의 해석은 완전히 정반대의 해석이였던 거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내 하나님이다 라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옳다 라는 것이고

 

저는 정반대로 어머니의 하나님이 엉터리 하나님이기에
진짜 하나님이신 여호와의 이름이 이 어머니의 하나님을 제대로 지근지근 밟는 하나님으로써
그 하나님을 보고서 나의 하나님이다 라고 한 겁니다
.

 

말이 무지 헷갈리죠. 함정을 파 놓은 겁니다.

 

나오미는 이런 하나님인데도 믿을래? 날 봐라 내 하나님을 믿었다가는 이 꼬라지 된다.

그냥 너희들은 각자 민족의 신을 믿으러 고향으로 돌아가라 라고 한 겁니다.

참 기기막히게 전도 참 잘하죠.
이래 전도 하라고 했다면 한국기독교에서는 이단으로 취급받을 겁니다.

 

그때 며느리 룻이
아니 왜요
? 어머니

어머니를 괴롭히는 진짜 하나님을 제가 봤는데 그 보다 제대로 된 하나님을 못 봤는데요?


즉 정작 시어머니 나오미는 남편 따라 엉터리 하나님을 믿었던 겁니다.

남편 따라 믿었던 그 하나님에게서 빼내시는 여호와의 이름을 제가 봤다니깐요.

그 엉터리 하나님을 가만히 두지 않고 간섭하는 하나님을

어디에서도 본 적이 없는데

고향 돌아가 봤자 어머니의 그런 하나님은 새고 샜다는 겁니다.

그런 우상들은 교회 가면 쌔고 쌧다는 겁니다.
교회가면 그런 엉터리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 대부분 100%이다는 겁니다.


그런데 아 그런 엉터리 하나님을 제대로 치는 하나님을 내가 봤는데

왜 고향으로 돌아가냐 말이죠?

 

여기서 고향 이라는 말이 나오면 저는 선지자가 생각납니다.

선지자의 특징 중에 하나는 고향에서 대접을 못받고 대접은커녕 죽임을 당하는 운명이다는 겁니다.

 

(13:57, 개역) 예수를 배척한지라 예수께서 저희에게 말씀하시되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느니라 하시고

(6:4, 개역)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친척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느니라 하시며

(4:24, 개역) 또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가 고향에서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

(4:44, 개역) 친히 증거하시기를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높임을 받지 못한다 하시고

 

 

이 의미가 오늘 본문에 [기이함] 이라는 표현과

[평탄] 이라는 의미를 통해서 볼수 있습니다.

 

아무튼 룻은 선지자로써 졸지에 두 개의 하나님으로 갈리는 입장에서

전혀 듣도 보도 못한 전혀다른 하나님을 선지자는 전하는 입장이다는 겁니다.

거꾸로 된 거죠. 누가 누구에게 복음을 전하나요?
억수로 잘 믿는 자에게 한번도 믿어 본적이 없는 사람이 전도 하는 겁니다.

 

결국 룻을 통해서 나오미는 접붙임 당하듯이 사는 겁니다.

룻이 사사인 겁니다.

 

예수님의 족보 속에 들어가는 자로써 말입니다.

이것이 영의 활동입니다.

육의 개입을 단절 시키면서 말입니다.

 

사사기에 나오는 사사의 특징이 어중이 떠중이 아닙니까?

이런 불경스러운 이방여자가 왜 예수님의 족보에 오르냐 말이죠.

 

꿈에서 자꾸 반복되면서 되뇌인 내용이 바로

 

어떻게 해서든 불륜스럽게 만들어서 계시 곧 묵시를 이어간다 라는 겁니다.

특히 자식이 그냥 태어나는 법이 없습니다.

아주 아주 불륜스럽게 태어나는 겁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준비한 주님을 비웃었습니다.

오히려 정상적인 방식은 이스마엘입니다.

그 정상이라는 것이 육의 방식입니다.


육의 방식에서 육의 방식을 차단 단절하고서 나타나는 영의 방식은 비정상적인게 되는 겁니다.
부정의 부정이지요.
 

결국 육의 방식은 영의 방식이 안 나타나면 지극히 정상이 될 수 밖에 없겠지요.

? 영이 안 나타나면 저절로 성령의 불참에 의한 승리로 자동 승리가 되겠지요.

그것이 정상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꼭 마지막 1초 남겨두고 이삭이 뒤늦게 태어나고

이 이삭은 반드시

그 당사자 본인들이 무시하는 가운데 나타난다는 겁니다.

아브라함이

그리고 그의 아내 사라 말입니다.

 

이렇게 아브라함도 그의 아내 사라도 이삭을 비웃는 가운데서 웃음이라는 이름이 의미가 있는 겁니다.

 

즉 하나님이 아닌 하나님의 이름은 이렇게 무시 무가치 무의미로 취급받는 내용물을 담고서

우리의 죄악을 담고서 등장하는 이름이다 라는 겁니다. 약속 말입니다.

 

그럼 베들레헴의 의미는 이스라엘 본인들이 못 지키는 겁니다.

흉년이 들면 별수 없습니다. 다 살려고 도망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 이 약속의 땅이라는 문은 누가 결국 의미를 되살리는 겁니까?

아무도 베들레헴에 살면서 이 장소 개념이 인물로써 영원한 문이라고 여기지 않습니다.

끝까지 어떤 사람이 그 의미를 담고 남는다고 치면 그 사람을 죽여서라도

베들레헴의 의미를 인간 쪽에서는 의미 두지 않게 하시고자

그 사람을 죽이든 아니면 전부다 흉년이 들던

결국 인간은 감당이 못 되도록 해 버린다는 겁니다.

 

그럼 결국 누가 베들레헴 이라는 영원한 문

그것도 약속의 땅에서 가장 작은 미약한 도시인 이 도시를 누가 크게 여기며

누가 이 무의미한 아무것도 아닌 것에 충성을 하겠습니까?

정작 그 도시민들도 스스로 귀히 여기지 않는데 말입니다.

 

예수님 혼자서 이 베들레헴을 영원한 문으로써 의미를 귀히 여기시는 겁니다.

즉 이 말은 아무도 귀히 여기지 않는다는 겁니다.

 

베들레헴이 영원한 문이라고? 아니요 베들레헴이라는 마을은 에수님을 말하기 위한

하나의 그림자일 뿐이니 우리 또한 귀하게 새롭게 여기겠다고 여길게 아니라

영원한 문은 결국 베들레헴이 아니라 예수님이다는 거죠.

 

결국은 예수님이 와도 우리는 역시나 베들레헴처럼 또는 흉년이 들어버린 약속의 땅을

귀히 여기지 않는다는 겁니다.

의미를 아무리 두어도 그 자체가 괴로움이 되는 겁니다.

의미를 둔다는 자체가 한계점과 부딧혀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누가 의미를 두면 괴로워진다는 표현에 제가 이런 댓글을 달았습니다.

 

김대식

 

518일 오후 8:53 · 수정됨 ·

 

의미?

 

모친의 죄 중에 태어났다는 것을 아는 것은 곧 뭘해도 의미 없다는 거죠. 다 헛된 것을 아는 지혜

 

태중에 죽었어야 했다는 것을 아는 것 보다 가장 자유한 자가 없는 거죠.

 

자기 생일을 저주 하는 자가 가장 행복한 자 입니다.

 

(3:1, 개역) 그 후에 욥이 입을 열어 자기의 생일을 저주하니라

(20:14, 개역) 내 생일이 저주를 받았더면, 나의 어미가 나를 생산하던 날이 복이 없었더면,

 

 

나 라는 근원의 자리를 없애야 그 자리에 딴 인물 곧 지혜가 앉으니까 말입니다.

 

(51:1, 개역) [다윗의 시, 영장으로 한 노래, 다윗이 밧세바와 동침한 후 선지자 나단이 저에게 온 때에]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좇아 나를 긍휼히 여기시며 주의 많은 자비를 좇아 내 죄과를 도말하소서

(51:2, 개역)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기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51:3, 개역) 대저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51:4, 개역)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판단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51:5, 개역)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51:6, 개역) 중심에 진실함을 주께서 원하시오니 내 속에 지혜를 알게 하시리이다

 

 

아무것도 아닌 무의미한 것에 전부를 걸기

 

이 부정한 (불가능한) 것만이 유일한 의미이다. 곧 십자가이다.

 

---

 

 

그래서 의미 둔 것에 실패케 만들고자 지근 지근 그 의미를 밟아버리는 겁니다.

 

전능자 하나님께서 하나님은 왕이시다 라는 엘리멜렉의 사고방식과 그의 아내 나오미 또한 그런 남편과 같이 그렇게 의미를 둔 그 하나님을 지근 지근 밟아 버리는 겁니다.

 

즉 하나님을 전능자 하나님이 치는 겁니다. 여기에 동원이 되는 자가 바로 선지자

고향에서 밑둥치가 짤려버린 이제 이 땅을 발로서는 딛일수 없는 발목이 짤린자의 등장입니다.

 

그러니 돌아갈수가 없다고 하는 겁니다. ? 발목 짤렸으니까?

? 전능자 여호와가 어머니의 하나님도 나의 민족의 신도 모조리 다 목을 제대로 친 진짜 하나님이까

 

가 봤자 소용이 없다 라는 겁니다.

 

차라리 이 의미없는 무의미한 아무도 귀히 여기지 않는

아무것도 아닌 이름

이 이름 때문에 룻은 사로잡힌 바가 되었다 라는 겁니다.

 

이것이 얼마나 제대로 된 부정성 곧 불륜인 스캔들이냐 말이죠.

 

육의 정상성을 거부하는 영으로써의 정상성이면

육 보다 더 깨끗하고 거룩한 의미인줄 알았는데

오히려 정반대로 육 보다 더 더러운 방식으로써의 비정상인 거룩이다는 겁니다.

 

그럼 육이 다들 알아서 무릎 꿇어 경배하는게 아니라

정반대로 육은 반드시 끝까지 거부하는 식으로써의 영이니

 

육의 눈에는 비정상 중의 비정상인 겁니다.

 

죄인 중의 괴수인 겁니다.

 

그 어떤 연결점 하나 없으니까 가능성이 일체 없는 불가능성이요 철저한 단절이니 말입니다.

 

예수님의 족보는 이렇게 단절로써, 불가능성으로써만 완성이 된 것이다 라는 겁니다.

 

육이 증거하는 성령은 그래서 가능성과 어떻게 하면 구원을 해주고파서 안달이 난 예수로 증거하는 개방성이지만

 

정작 성령은 불가능성으로만 불륜으로써만 완성한다는 겁니다.

 

아니 단절인데 불가능성인데 어떻게 완성하냐 라고 따지는 그 반발성을

반드시 우리 한테서 들으시고

그런 우리의 원수성을 들추어내시면서

그 원수도 용서한 십자가라는 불륜성을 앞세워서 증거하기에 영원하다 라는 겁니다.

 

이 보다 또렷한 것 있으면 나와보라 라는 거죠. 영원이 ~~~~

 

 

자 그럼 오늘 본문에 들어가서

 

분명 다윗의 시 이지만 다윗 없는 다윗이라는 것입니다.

즉 다윗에게는 해당 사항이 전혀 없는 겁니다.

그 예로

 

(26:1, 개역) [다윗의 시] 내가 나의 완전함에 행하였사오며 요동치 아니하고 여호와를 의지하였사오니 여호와여 나를 판단하소서

 

다윗에게 해당 사항 없습니다.

완전하지 않은게 아니였죠

요동했지요

여호와를 의지하지 않았죠. 그런 적이 엄청 많았습니다.

 

(26:2, 개역) 여호와여 나를 살피시고 시험하사 내 뜻과 내 마음을 단련하소서

 

단련 되었던 가요? 시험을 통과 하던가요? 해당 사항 없습니다.

모조리 다 실패한 다윗입니다.

 

(26:3, 개역) 주의 인자하심이 내 목전에 있나이다 내가 주의 진리 중에 행하여

(26:4, 개역) 허망한 사람과 같이 앉지 아니하였사오니 간사한 자와 동행치도 아니하리이다

(26:5, 개역) 내가 행악자의 집회를 미워하오니 악한 자와 같이 앉지 아니하리이다

 

점점 가면 갈수록 더욱더 해당사항이 없습니다.

 

진리 중에 행하지 못했지요

허망한 사람과 같이 있었지요

간사한 자와 동행했지요

행악자의 집회를 미워했던가요? 자신이 그런 집회를 도리어 열였지요.

악한 자와 같이 했지요.

 

계속해서 할까요?

요기까지 하죠

 

즉 분명 다윗에게는 해당 사항이 단 하나도 없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율법을 단 하나도 지킨 적이 없다 라는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이렇게 다윗은 뻔뻔스럽게 노래부르는 것일까요?

지난 시간의 결론에서 나왔습니다.

 

다윗 없는 다윗

다윗을 다윗 되게한 율법 외에 한 의가 그렇게 다윗을 만듬으로써

베드로를 그렇게 만듬으로써 그 분의 스스로의 영광 받으심 때문에

 

뻔뻔스럽게 다윗은

베드로는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께서 잘 아십니다 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다윗 속의 다윗의 자손이 말입니다.

 

그러니 다윗을 입으로 꽉 물고서

십자가의 원수인 베드로를 입으로 꽉 물고서

예수님이 안고 외치는 겁니다. 베드로가 스피커로써

광야의 소리로써 말입니다.

 

선지자로써 말입니다.

 

죄인 중의 괴수로서

 

불륜의 이방여자 모압여인 룻으로써 예수님의 족보에 들어가는 선지자 사사로써 말입니다.

 

십자가의 의미 때문에 십자가가 죄인인 나를 꽉 물고서 들어가는 문이였던 겁니다.

그러니 그렇게 안 외치고는 못 배기는 겁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께서 더 잘 아시잖아요 라고 아주 아주 뻔뻔스럽게 말입니다.

 

 

이것이 기이하다는 겁니다.

이것이 평탄이라는 성령의 활동 영의 역사 라는 겁니다.

 

즉 우뚝 솟아난 것은 거세를 하듯이 다 짤라버려서 평평케 하고

또 반대로 움푹 파인 그 상처는 꿰매듯이 매꾸어서 평평케 한다는 겁니다.

 

이것이 마리아의 찬양에서도 나왔듯이 그 어떤 이도 자랑치 못하도록 하는

하늘의 전쟁이 이 땅에서의 가시화입니다.

 

잘난놈은 목을 꺽어버리고

못난놈은 그들의 기업이 되어 주겠다 라는 겁니다.

 

이것이 정치인데

 

이런 정치 본 적이 있나요?

 

오히려 정반대의 정치가 다윗에게서 벌어졌습니다.

가난한 자의 딸 같이 여기는 어린 양 한 마리가 전부인 양을 빼앗아서

손님에게 대접했고

 

정작 부자의 살진 소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가난한자의 것을 빼앗았다는 겁니다.

 

그럼 위의 시편 26편은 다 거짓말이잖아요

네 맞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그를 간섭했습니다.

다행히 다윗은 실패게 됩니다.

즉 이 말은 다윗은 자기가 왕이 아니다 라는 것을 안 겁니다.

왕 포기입니다.

누가 나를 대신해 줄 왕이 없나요? 라고 나온 겁니다.

 

실패한 명백한 증거가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연히 솔로몬과 시바 여왕이라는 영화를 우연히 보게 되었는데

그냥 솔로몬 재판 부분이 어땠는가를 보기 위해 짤막하게 봤습니다.

 

율브린너가 대머리 그대로 나올줄 알았는데 가발을 살짝 얹어서 나왔길래

아 내가 이 영화를 안 봤구나

나중에 제대로 봐야징 하고 보니

너무 짤막하게 나와서 뒤를 빨리 감기 식으로 대충 보니

거의 시바여왕과의 불륜이 대부분이었지 않나 예상이 되였습니다.

 

아무튼 앞서 조카가 이스라엘은 쌍둥이 개념이다

즉 반드시 갈리진다는 겁니다.

두 패로

 

한 쪽은 형 에서 쪽을 보여주는

다른 한 쪽은 야곱 쪽을 보여주는

 

이것이 한번 분절로 끝나는게 아니라 계속해서 끊없이 무한반복으로 분절이 되는

(선 줄로 알거든 넘어질까 두려워 하라, 먼저 된 자가 나중 된다.)

 

결국 최종으로 남는 것은 예수님 딸랑 혼자 뿐이다는 겁니다.

 

그럼 우리는 실패하란 말이냐?

딩동댕 축하합니다. 정답입니다.

 

정작 이스라엘이라는 의미 그 실패성을 이미 담고 있는 겁니다.

그는 흥하고 나는 쇠하여야 한다는 선지자기능

누락성 말입니다.

 

우리는 실패해서 누락 당해도 상관이 없다 라는 겁니다.

 

그런데 누가 자기가 이스라엘인데 실패를 바라겠냐 말이죠.

그러니 그 실패라는 관계성도 결국 주님 숙제로 하시는 겁니다.

나오미가 그래서 그 실패로 예수님의 족보에 오르는 겁니다.

이 아무것도 아닌 것에 충성하는 자는 예수님 뿐이거든요.

 

짤막하게 나온 솔로몬과 시바 여왕의 재판내용에서

진짜 어미는 이 재판의 부당함

부조리에 항거하는 겁니다.

 

오히려 이 부조리한 재판에 박수를 치는 쪽이 가짜인 겁니다.

즉 법에 동조하는 자가 가짜이고

 

법이라는 부조리에 항거하는 자가 진짜 어미인 겁니다.

그렇다고 진짜 어미가 되라는 말이 아니라

누가 긍휼을 자비를 담은자인가를 드러내는 불륜이 오히려 솔로몬

즉 예수님 쪽에 있었다는 겁니다.

 

내 안에 사는 이는 예수 그리스도이지 내가 아니거든요

실패해도 상관없으니 빨리 누락 당하자 라는 겁니다.

 

나는 나만 의미를 둘 뿐입니다.

예수 잘 믿는 나

 

이것이 법과 일치할려는 악마성인 겁니다.

 

에수 잘 믿는 나

라고 끝까지 나 에게로만 회귀 됩니다.

멈출수가 없습니다. 지독한 자기 애입니다.

 

주님은 번제를 원치 않고 인애와 자비를 원하시는데

 

그럼 그런 자기애를 누가 멈추게 하냐 말이죠. 누가 나서야 매듭을 풀수 있겠습니까?

이런 부조리를 끊는 것은 이 보다 더 나은 부조리인 십자가 라는 불륜입니다.

 

그래서 약속한 성령을 주시는 겁니다. 다 이루었도다 하신 주가 약속한 성령.

오죽 하면 인간이 안되기에 성령 아니면 안되기에 ~~~~~

 

여기에 주님은 의도적으로 실패케 만드셔서

다윗 없는 다윗으로써 오늘 이 시편 26편을 예수님이 완성하십니다.

다윗 아닌 다윗으로써 말입니다.

 

평탄케 하시는 겁니다.

 

(26:7, 개역) 의인의 길은 정직함이여 정직하신 주께서 의인의 첩경을 평탄케 하시도다

(3:3, 개역) 저는 선지자 이사야로 말씀하신 자라 일렀으되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하였느니라

(1:3, 개역)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기록된 것과 같이

(3:4, 개역) 선지자 이사야의 책에 쓴 바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울퉁불퉁 산과 계곡을 깍아버리고

그리고 움푹파인 절벽과 홀

요즘 싱크홀 때문에 난리들이지요

갑자기 길 가다가 땅 밑으로 훅 빠지는 겁니다.

 

자 그렇다면 원래 땅은 다 홀이였습니다.

그 동안 안 빠지도록 누가 배려했던 겁니까?

누가 그 동안 쓰나미에 휩쓸리지 않도록 경계를 그으신 겁니까?

 

(5:22, 개역)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가 나를 두려워 아니하느냐 내 앞에서 떨지 아니하겠느냐 내가 모래를 두어 바다의 계한을 삼되 그것으로 영원한 계한을 삼고 지나치지 못하게 하였으므로 파도가 흉용하나 그것을 이기지 못하며 뛰노나 그것을 넘지 못하느니라

 

우리는 아무것도 알지 못한채 당연한 줄로 안 겁니다.

 

그렇다고 안 빠질려고 땅만 쳐다만 보고 갈수 없잖아요

스마트폰 보고가다 머리를 꽝하고 부딧히기도 바쁜데 누가 땅만 보고 가겠습니까?

 

그런데 혼자 길거리에서 홀이 갑자기 생겨서 지옥에서 빨아댕기듯이

혹 하고 빨리듯이 빠지거나

 

집 전체가 와르르 무너지듯이 빨려들어간다면

 

왜 그동안은 왜 안 빠졌었던가? 가 오히려 더 기이했던 겁니다.

 

(26:7, 개역) 감사의 소리를 들리고 주의 기이한 모든 일을 이르리이다

 

자 그렇다면 다윗이 다윗 스스로 다윗 답게 만들고자 한 모든 것은 헛짓이였다 라는 겁니다.

그거 다리미질로 쭈우욱 평평하게 대림질을 하면

 

쭈우욱 시원하게 굴곡진거 다 없어지는 겁니다.

 

이제는 또 반대로 다윗의 그런 흡집을 꼬투리 삼아서 모든 세력들이 들고 일어날때에

 

다윗은 괜찮다 저들이 일어나는 것 또한 주님의 뜻이라면 어쩔수 없다 라고 합니다.

 

약점을 하나 물고서 덤벼들때도

다리미질로써 그 움푹파인 홀로 쭈우욱 평평하게 펴 버립니다.

 

그럼 누가 정죄하겠습니까?

 

사도바울이 자신 스스로가 해결 할 수 없는 교착점을 발견했습니다.

뫼비우스의 띠처럼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따를려고 하나 육의 소욕이 앞선다고

이 모순을 해결할 방법이 자기 쪽에서 없다 라는 것을 발견한 겁니다.

 

아니 자신만만했잖아요 누가 보다 많이 지켰기에 타인과 비교하면 꿀릴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하고 꽝 부딧히니까

자기는 그 동안 아무것도 지킨 것이 단 하나도 없다는

그 실상을 비로소 본 겁니다.

그 동안은 다 헛짓, 허구, 허살들만 잔뜩 모았던 것을 꽝 부딧혀 보니 안 겁니다.

배설물만 잔뜩 말입니다. 얼마나 썩은내가 난 줄도 모르고

그 동안 그 썩은 것을 자랑했으니 원 ~~~~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구나 이 사망의 몸에서 못 벗어나는 구나

 

이 모순의 띠를 예수님이 십자가라는 도끼, 가위질로

그 심각한 것 짤라 버립니다.

 

그리고 정작 우리가 쓸모없다고 여긴 버린돌

무가치 하다고 취급해 버린 그 원수된 바를 십자가로 하나로 이으셨습니다.

 

이건 개그 우먼 안영미 버전으로 해야 하는데 ~~~

 

야야야 들어와 들어와 뭐든지 외설적인 매듭 다 들고 들어와

다 싹뚤 가위질 해 버리는 겁니다.

 

선지자는 외칩니다. 다 들고 들어와

뭐든지 다 다림질 해 버립니다.

 

십자가와 원수된 것 하나되게 다림질 가위질 하는 겁니다.

 

부딧히는 돌에 부딧히는 겁니다. 들어와 들어와

 

나 원수입니다 라고 해야할 것을

나는 죄인입니다 라고 해야 할 것을

그 외설적인 매듭을 더 엉킬려고 막살면 안된다고 하니

얼마나 가위질과 다리미질을 무시했냐 말이죠.

 

사냥꾼의 올무에서 벗어나는 것은 외부에서의 가위가 나타나서

그 그물

곧 율법이라는 그물을 찢어버리는 것이다는 겁니다.

 

의문의 증서를 찢으셨지요.

 

나의 선을 넘어서는 문제를 만났다면 무조건 십자가라는 가위질로 짤라달라고 하시면 됩니다.

그것이 실패 속의 구원입니다. 그냥 실패를 누리시면 되는 겁니다.

무조건 평탄케 하는 다리미로 밀어붙이세요 라고 기도하시면 다 됩니다.

 

그럼에도 율법이 필요한 이유는 저 사냥꾼을 도로 잡는 기능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 율법에서 빨리 손 때는게 낫지

붙들고 있으면 있을수록 손해입니다.

 

주여 저는 저 세리와 같지 않음을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저눈 이레에 두 번 금식 십의 이조 토색치 않음

 

이것이 마귀들의 특징입니다. 빨리 손 때면 되는데

절대로 손 놓지 못하는 겁니다.

 

실패하면 구원인데 도저히 실패를 무시하기 때문에 손 못 놓는 거죠.

 

지도 못 지키면서 어떻게 남보고 지키라고 하냐 말이죠.

자기도 안들어가고 남도 못들어가게 하는

절대로 막살면 안된다는 겁니다.

 

지도 제대로 못 살면서 남보고 막살면 안된다고 하냐 말이죠.

 

막살기라는 것은 결국 교착점을 푸는 유일한 가위인 것을 모르는 겁니다.

 

이것을 제일 쉽게 설명한 것이 바로

625때 북한 장교가 어느 교회에서

교인들을 잡아놓고 예수의 사진을 밟고 지나가면 살려주고

안 밟으면 죽여버리는 경우와 같습니다. 행함이 있는 믿음의 기생라합과 사건과 같죠.

 

그런데 정말 똑똑한 목사는 교인들을 살리기 위해서

자기 차례도 아닌 제일 끝에 장교가 줄 세웠는데

빨리 제일 먼저 와서 여러분 이 반동 예수를 지근 지근 밟아 버립시다 라고

먼저 솔선수범을 하는 겁니다.

교인들을 살리기 위한 희생정신일까요?

아닙니다 천만의 말씀

에수 사진 그림 영화 이거 다 엉터리라는 설교를 즉흥적으로 한 겁니다.

북한 장교의 판대기 조차 허용치 않는

그 순간은 복음이 펼쳐지는 판대기로써 오히려 북한장교가 복음에 말려들어서 활용이 되는 겁니다. 그 기회를 놓칠수 없지요. 불의한 청지기 비유가 그런 의미입니다.

 

자 그렇다면 오늘 시편 26편은 그아먈로 누가 봐도 다윗에게 해당 되지 않는

완전 거짓말 뿐인 겁니다만 (불의한 청지기입니다만)

 

오히여 가장 자유로운 새가 구원받았다고 감사해서 외치는 소리로 밖에 안들리는 겁니다.

(누가 편파적인 편애의 해석으로 모순적인 문제를 해결해 버리는 원인 없는 결과로 만들어 버린 겁니다.)

 

저는 이 시편 26편이 지난 시간의 결론처럼 이렇게 들립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께서 잘 아시잖아요 (곱하기 세 번) 이라고 말입니다.

 

얼마나 완벽합니까? (26:1, 개역) [다윗의 시] 내가 나의 완전함에 행하였사오며~

 

편파적인 용서인 사랑인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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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식

23시간 · 수정됨 ·

 

예수님을 매일 매일 날마다 세 번 배신 하자

 

제목이 거시기 한가?

 

당연히 반발하는 자는 예수님을 배신하면 안된다 라는 것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을 배신하지 않겠다는 즉 막살지 않겠다는
그 예수는 과연 진짜 예수인지 아니면 내가 투사한 가짜예수인지 어떻게 아는가?

다시 말해서 인간이 어떻게 하든 이 양쪽의 어떤 쪽을 선택하든

천국가는 것과는 무관하다는 것이다.

아니 선택할 수 있다고 착각한다는 자체가 이미 지옥 속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미 늘 매일 매일 예수님을 날마다 배신하고 살고 있기 때문이며 앞으로도 그러하다

각기 제 길로 가는 양 같을 뿐이다.

 

천국 가지도 못하는 것들을 붙잡고 인간들끼리 시시비비로 싸우고 있는데

결국 같은 패거리인 거다.

 

그래서 예수님을 자신들 민족을 해방케 하는 일에 아무런 도움이 안된다는 철저한 분석 끝에 가룟유다는 예수님을 팔아넘겼다.

 

그렇다고 베드로는 안 그렇겠는가? 자신의 열심을 안 받아주는 예수님을 원망하기는 매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정작 예수님 쪽에서 넘어오는 것은 둘 다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누가 더 예수님과 부합되는고 하니

예수님은 자신의 십자가 곧 뫼비우스의 고리를 끊어버린 그 십자가랑 가장 잘 어울리는 베드로를 택했다.

 

?

 

가룟 유다 보다 더 나쁜 놈이기 때문이다.

 

가룟유다는 깨닫고 뉘우치고 자살했지만

 

베드로는 깨닫거나 뉘우치지도 않았다. 끝까지 자신은 옳았다는 것이다. 십자가를지지 못하게 막는 것이 말이다.

 

바로 이런 도저히 가망없는 자에게 성령은 딱이다.

성령은 그야말로 불가능성이기 때문입니다.

진짜 제대로 단절 된 놈은 베드로다.

 

탕자와 맏아들 중에 탕자는 베드로, 더 나쁜놈이다.

그러나 아버지 말씀을 단 한번도 어긴 적이 없는 맏아들은

자나깨나 로마로부터 유대인의 해방을 꿈꾸는 가룟유다이지 않는가?

십자가가 펼치는 사건에 말려든 두 사람 중에 가룟유다는 십자가를 접할 기회 조차도 아예 없었으니 철저한 단절이였다. 주시지 않았다. 귀도 눈도 들어도 보아도 막으셨다.

 

가룟유다는 오로지 어떻게 하면 이 세상이 아름답게 되겠는가 라는 오늘날 양심가들의 울부짖음이 아닌가? 유대민족의 해방 곧 구원이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런것에 아예 관심조차 없다.

더 나쁜놈 탕자같은 베드로에게 성령을 주셨고

베드로는 그야말로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뻔뻔스럽게

 

아주 뻔뻔스럽게

 

내가 예수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더 잘 아시잖습니까? 라고

입에 침을 철퍼덕 철퍼덕 바르면서 외치고 있는 것이다.

입에 한 가득 유월절 어린양의 살코기를 뜯고,

입 주위에는 어린양의 피를 잔뜩 묻혀서 말이다.

아니 방금 예수님을 세 번 모른다고 부인해놓고서는

어떻게 저렇게 뻔뻔해질수가 있을까?

 

그러니까 성령이다.

 

성령으로 하지 않는 것은 모두 다 죄다.

인간쪽에서의 모든 것이 단절된 채로 나온 결과 곧 원인 없는 결과로써의 성령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배신하자 라는 말이 기분 나쁜가?
다른 말로 하면 율법이란 어기라고 준 것이다 라는 말이다.

 

이래 말하니까 어기자 라는 법을 또 지키고 있다.

 

그런 말이 아니라 인간 쪽에는 답이 없다.

그래서 외부에서 어떻게 이 모순을 해결하는지를 보자 라는 것이다.

도대체 그가 무슨 일을 저지르고 있는지를 말이다.

 

또 다른 말로 하면

너희가 사랑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사랑해서 화목제물을 주었다 라는 것이다.

 

율법은 처음부터 예수님을 겨냥했고 예수님이 이루시는 순종에 의한 것이다.

인간은 아무리 순종이였다고 우겨도 제사일 뿐이다.

 

법을 어기자 라는 것도 법을 지키는 제사일 뿐이다. 순종은 인간 쪽에는 없다.

 

순종이 제사 보다 낫다.

율법을 절대로 어기지 않고 절대로 막살지 않겠습니다 라는 말은

 

나는 절대로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지 않겠다는 말과 같다. 즉 거짓말이다.

 

그렇다고 새삼스럽게 이제 와서 그런 거짓말도 하지 않겠다고 해서

거짓말에서 벗어나는 것도 아니다.

이미 거짓말이 우리를 장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뭘 해도 우리는 거짓말이다. 거짓되다.

 

갇혔기에 ...

 

외부에서 무슨 일을 벌리시는 가를 봐야 할 것이다.

 

십자가 라는 생소하고 낯선 것을 준비하셨다.

베드로는 쳐다 봤다.

그러나 가룟유다는 쳐다볼 기회도 얻지 못했다.

베드로는 그럼 잘 나서 쳐다 봤나? 아니다 목을 꺽어 들게 하신 것이다.

그럼 가룟유다는 쳐다볼 기회도 없었으니 불공평하지 않는가?

천만에 불공평한게 아니라 더 나은 불공평이다. 아무리 쳐다 보고 있어도 안 보이도록 했다.

이미 가룟유다의 모든 관심사는 자기구원이 아닌 남의 구원, 유대인 민족만의 독립이요 구원이다. 거기에 메시야 예수는 전혀 도움이 안돼 다른 메시아를 찾는 것일 뿐이다. 인간이 조작한 메시아 말이다.

 

그 십자가가 바로 나는 절대로 예수님을 배반하지 않겠다는

외설적인 매듭을 풀어주는 열쇠가 된 것이다.

말도 안되는 나 라는 외설덩어리를 푸는 가위로써의 십자가가 제대로 못박는 것이다.

 

이것이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이것 곧 상처(십자가)가 말이다.

 

예수님을 매일 매일 신나게 배신 하자

기쁘게 즐겁게 배신하자

아니 예수님의 배신을 매일 매일 누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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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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