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끼 뒤의 빈 터로써 십자가 (시편 27)


다윗 죽이기 


(
27:1, 개역) [다윗의 시]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27:2, 개역) 나의 대적, 나의 원수된 행악자가 내 살을 먹으려고 내게로 왔다가 실족하여 넘어졌도다

(27:3, 개역) 군대가 나를 대적하여 진 칠지라도 내 마음이 두렵지 아니하며 전쟁이 일어나 나를 치려 할지라도 내가 오히려 안연하리로다

(27:4, 개역) 내가 여호와께 청하였던 한 가지 일 곧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나로 내 생전에 여호와의 집에 거하여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앙망하며 그 전에서 사모하게 하실 것이라

(27:5, 개역) 여호와께서 환난 날에 나를 그 초막 속에 비밀히 지키시고 그 장막 은밀한 곳에 나를 숨기시며 바위 위에 높이 두시리로다

(27:6, 개역) 이제 내 머리가 나를 두른 내 원수 위에 들리리니 내가 그 장막에서 즐거운 제사를 드리겠고 노래하여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27:7, 개역) 여호와여 내가 소리로 부르짖을 때에 들으시고 또한 나를 긍휼히 여기사 응답하소서

(27:8, 개역) 너희는 내 얼굴을 찾으라 하실 때에 내 마음이 주께 말하되 여호와여 내가 주의 얼굴을 찾으리이다 하였나이다

(27:9, 개역)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지 마시고 주의 종을 노하여 버리지 마소서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나이다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시여 나를 버리지 말고 떠나지 마옵소서

(27:10, 개역)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

(27:11, 개역) 여호와여 주의 길로 나를 가르치시고 내 원수를 인하여 평탄한 길로 인도하소서

(27:12, 개역) 내 생명을 내 대적의 뜻에 맡기지 마소서 위증자와 악을 토하는 자가 일어나 나를 치려 함이니이다

(27:13, 개역) 내가 산 자의 땅에 있음이여 여호와의 은혜 볼 것을 믿었도다

(27:14, 개역) 너는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강하고 담대하며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지난 시간에 불륜으로써만 이루어진 예수님의 족보라고 했습니다
.

 

우리는 다윗을 보는 입장에서 다윗 너머의 다윗의 후손을 봐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 보다 월등했던 유대인들은 다윗 너머의 다윗의 후손인 예수님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즉 단절 되었다는 것이죠.

유대인들도 못 보는 판국에 우리가 어떻게 볼 수가 있겠습니까?

안 보이는 데 말입니다.

 

이것을 외설성이라고 합시다.

그럼 이 외설성을 푸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합니다.

가위로 자르면 뫼비우스의 띠를 풀리는 겁니다.

 

즉 유대인들도 못 보는 판국에 우리는 더 못 본다는 거죠.

? 안 보이니까?

 

그럼 이렇게 하면 됩니다.

주여 저는 못 보는 자입니다. 두 눈이 있어도 두 귀가 있어도 말하는 입이 있어도

주여 저는 아무것도 아닌 자입니다 라고 말입니다.

눈이 분명히 존재하는데 다른 것은 다 본다고 우기는 눈이라는 존재인데

정작 봐야만 반드시 봐야만 할 것은 정작 못본다 라는 것은

이 눈의 무용지물임이 드러나는 겁니다.

눈이 있으나 마나 한 외설성에 빠져버리는 겁니다.


그렇기에 주여 나는 소경입니다. 나를 떠나소서

 

이것이 주여 나는 죄인 중의 괴수입니다 라는 겁니다.

 

잉여의 세계를 감히 볼려고 한다는 것은

그럴 권한도 없는 주제에 넘볼려고 한다는 거죠.

아니 그런 능력도 없습니다.

 

두 눈의 무용지물임을 즉각적으로 시인해야 할 판국인데

그 즉시적인 회개 보다.

오히려 더 넘볼려고 하는 욕망이

오히려 금기가 욕망을 더 재촉하게 만든다는 겁니다.

 

초자아의 명령은 곧 욕망하라 입니다.

얼마나 외설적입니까?

 

이 초아자적 명령인 당신의 징후를 즐겨라 라는 말은

곧 막살아라 라는 말은

동시에 막살지 못하는 자신의 신체의 한계성에 부딧히고 마는 겁니다.

 

이 초자아적 명령인 막살아라를 계속적으로 유지할려고 할려면

적정한 거리를 유지해 주어야 합니다.

너무 가까이에 가면 죽게 되는 거죠. 그것이 대부분의 자살입니다.

그 자살방지기술 곧 부메랑을 피하면서 받는 기술이 바로

진짜 초자아의 명령인 당신의 증상을 즐겨라 막살아라의 취지인

나는 죄인 중의 괴수입니다 라는 외설성을 끊는 겁니다.

이 나는 죄인 중의 괴수입니다를 인간 쪽에서 못하기에

주님 쪽에서 다 이룬 것이 바로 십자가에서 나오는 나는 죄인 중의 괴수입니다 라는 겁니다.

 

자 이렇게 되면 분명 막사는 것 같아 보이긴 하는데

철저하게 즉각적으로 즉시로 순종이 넘어오더라 말이죠. 복종 말입니다.

 

분명 공적으로는 자유인데

사적으로는 복종이더라 말이죠.

 

이 양립불가능한 것이 오히려 일치해 있고

오히려 누가 봐도 일치해 보이는 하나님의 백성인 유대인과 하나님은 적대적인 관계였었다는 그 실상들이 드러난다 라는 겁니다.

즉 유대인은 육의 대표성이 되어버린 겁니다.
영의 대표성은 오히려 이방인 개같은 이방인
그것도 한 과부, 한 문둥병자
그들이 잘나서가 아닌 보냄을 받은 자 때문이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일이란 보냄을 받은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저들은 사람의 일의 대표성을 보여주게 된 거죠.
처지가 뒤바뀌게 된 겁니다.
유대인은 졸지에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버린 겁니다.

구약의 이방인이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었는데 이제는 거꾸로 된 겁니다.

 

오늘 본문은 대적의 실상을 드러내는 입장에서의 미끼라고 제목을 붙였습니다.

그리고 그 미끼 너머의 빈공터인 십자가 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무슨 말인고 하니

 

진짜 혈통적인 유대인들이 메시아를 기다리는 입장에서 그들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으로써의 동일성 일치성 또는 결혼이

정작 일치는커녕 대적으로써 드러난다는 겁니다.

 

그럼 일치는 뭔데?

바로 그 대적자들이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그들의 시선에서의 대적자인

개같은 이방인이 오히려 예수님과 일치성을 이루는

죄인 중의 괴수로써의 하나됨이다 라는 겁니다.

무엇때문에?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원인 없는 결과 때문이다는 겁니다.

즉 십자가로 원수된 것이 하나 되었다 라는 겁니다.

그럼 유대인은 십자가라는 걸림돌을 치워버리니까 화해가 될 수가 없게 된 겁니다.

 

이런 하나 마나한 불필요한 과정을 구지 구지 거쳐야 하느냐 말이죠.

다 말장난 같아 보이고 필요 없어 보이고

있으나 마나 한 짖꺼리 같아 보이는데 말입니다.


즉 헬라인에게는 어리석은 지혜일 뿐이다. 아무런 가치가 없어보이는 어리석고 미련한 짖이다는 겁니다. 


그러나 성경전체가 바로 하나 마나 한 소리를 하는 이유입니다
.

 

그래서 예수님의 족보인 개같은 이방여자 또는 부정한 여자들이 예수님의 족보에 놓이고

이 여인들 덕분에 머슴아들이 접붙임 당해서 족보에 오르는 겁니다.


그것이 다섯 여인  누구 누구 에게서  ~~~ 에게서 입니다.
다섯 여인들은 다들 한결같이 의인이라고 주장하는 남정네들에게 마귀취급받는 여인들 곧 부정성 그 자체였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괜히 바알세불 걸린 마귀의 대마왕이라는 소리를 반드시 들을 수 밖에 없었다 라는 것을 아실 겁니다.
 

그 중에 가장 중요한 다윗은 정작 예수님의 족보에서 탈락이다는 겁니다.

유대인에게 있어서 다윗이 탈락 당하면 다 탈락 당한 겁니다.

이제 악한 세대가 구하는 기적 따위는 없어져 버린 겁니다.

그럼 다윗이 없는데 [없는 그 다윗]이 어떻게 예수님의 족보 속에 들어가 있는가?라는 겁니다.

말이 되나요? 말이 안되지요?

다윗 너머의 다윗으로써. 빈터로써, [없음]으로써 들어가 있다는 겁니다.

다윗이 없는데 다윗이 들어가 있다는 겁니다. 어떻게? [다윗없다]로써 말입니다.

[영구 없다] 로써 말입니다.

이것을 믿음이라고 하는데 어렵기 때문에 쉽게 말하면

분명 이삭 없다 라고 아브라함도 사라도 그렇게 취급해 버렸기에 이삭없다 입니다. 그래서 비웃었습니다.

그런데 반드시 그 비웃음으로써 웃음을 집어넣습니다.

비웃음이란 웃음은 없다 라는 겁니다.
이삭 따위는 있을 수 없는 존재 라는 겁니다. 비존재죠.
그럼 존재는 오로지 이스마엘 뿐이다 라는 겁니다.

아이고 하나님 농담하지 마세요 웃음 따위는 없어요 라고 [웃음없음]인데, [이삭없음]인데

그래? 그럼 있는지 없는지 한 번 두고 보자 라고 믿음이 개입해 버리는 겁니다.

즉 믿음은 역사를 부정하고 들어오는 겁니다.
왜냐하면 역사는 믿음을 부정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반드시 역사는 믿음을 거부하는 짖을 반드시 하도록 되어 있는 행함입니다.

[이스마엘만 있음]에 아브라함이든 사라든 다 동의를 해 버린 입장에서
그 속에서 불가능한 [이삭없음]을 그대로 가지고 와서 개입시키는 겁니다.
과연 없는지 두고보자 라고 말입니다.


행함(이스마엘)은 믿음(이삭)을 부정하고. 믿음(약속)은 행함(육)을 부정합니다.
이것이 그 유명한 갈라디어서 4장 이야기 아닙니까?


(갈 4:21, 개역) 『내게 말하라 율법 아래 있고자 하는 자들아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

(갈 4:22, 개역) 『기록된 바 아브라함이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계집종에게서 하나는 자유하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나』

(갈 4:23, 개역) 『계집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하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갈 4:24, 개역)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 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가라』

(갈 4:25, 개역) 『이 하가는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 산으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데니 저가 그 자녀들로 더불어 종 노릇 하고』

(갈 4:26, 개역)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갈 4:27, 개역) 『기록된 바 잉태치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구로치 못한 자여 소리 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였으니』

(갈 4:28, 개역)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갈 4:29, 개역)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갈 4:30, 개역)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계집종과 그 아들을 내어 쫓으라 계집종의 아들이 자유하는 여자의 아들로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

(갈 4:31, 개역) 『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계집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하는 여자의 자녀니라』



육의 소욕은 영의 소욕을 거부하고, 성령의 소욕은 육의 소욕을 부정하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그 행함의 영역 밖에서 곧 역사죠. 역사 밖에서 믿음이라는 것이 쳐들어 오는 방식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행함 또는 역사 속에 흡집. 흔적을 내니까

나는 무조건 틀렸고 당신은 무조건 옳았습니다.

비웃음인 나는 무조건 이유없이 틀렸고. 내가 비웃었던 틀렸다고 아니다고 했던 그 아님이 무조건 이유없이 옳았습니다 라고

믿음을 시인하니까 졸지에 믿음의 조상이 되어버림을 당해 버린 겁니다. ㅋㅋㅋㅋ
믿음을 거부하고 비웃는 자의 조상이 졸지에 팔이 뒤 바뀐 겁니다. 편파적으로 말입니다.


자 그럼 다윗 또한 마찬가지 입니다.
가장 믿음 없는 자로써의 조상인 아브라함이 아무것도 한 것 없이 단절 그대로 들통났음에도 불구하고

믿음의 조상이 된 것처럼 


다윗은 가장 이스라엘의 왕 다움이 없다 라는 겁니다.
사울왕이 아니죠? 사울왕이 이스라엘 왕 다움이 없는게 아니라 다윗이라는 겁니다.

오히려 이스라엘 왕 다움이 전혀 없는 자는 다윗왕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에게 이스라엘 왕 다움이 덮치는데 그것이 바로 다윗의 후손입니다.

다윗 속의 다윗이요. 다윗 너머의 다윗입니다.

예수님의 족보에 다윗은 다윗있음으로써 기록되지 않고
다윗없음으로써 다윗이 들어가 있는 겁니다.
그럼 다윗이 있다는 말입니까? 없다는 말입니까? ㅋㅋ

다윗이 이런 판국이면 우리의 존재는 애초부터 없는 겁니다
. 신경 쓸 필요가 없습니다.

그럼 다윗은 있으나 마나 한 거네?

네 그렇습니다. 있으나 마나입니다.

 

그럼 나 안할란다 라고 삐질게 아니라

 

없는데도 불구하고 

있으나 마나 한 데도 불구하고 

거기에 충성하시는 실상, 실체가 누구냐 라는 겁니다.

곧 믿음을 보자 라는 겁니다.

저 아무것도 아닌, 있으나 마나한 다윗이라는
죄인 중의 괴수에게 충성하는 자가 누구냐 라는 겁니다.
그럼 다윗 뒤를 봐야 한다는 거죠.


자 그렇게 되면 껍떼기(다윗)가 이 믿음되시는 다윗의 후손의 증상으로써 미끼(다윗)로 등장하는 겁니다.


자 이래 되면 숨어있는 마귀의 가시화 곧 등장도 구체화 되는 겁니다.

죄를 인간이 들추어내거나 가시화 시킬수 없습니다. 


숙주인 주제에 무슨

이미 다 장악당했는데
그럼 그 숙주로 삼은 죄라는 보이지 않는 실체 곧 마귀를 들추어내는 것은

미끼를 통해서 입니다.

자 그렇다면 예수님은 다윗 또는 우리를 상대하는게 아니라 

왜 있으나 마나한 다윗에게 누가 충성을 하는지 알것입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이 다윗에게 충성하는지

반드시 있어야 해서, 필요적 존재에 대한 충성하는 예수를 볼게 아니라

 

반드시 있으나 마나한 무의미함에도 불구하고 그 무의미, 무가치, 무능에 충성하시는 예수님만을 보자 라는 겁니다.

 

그럼 다윗을 예수님은 어떻게 다루십니까?

참 여기서 우리가 예수님을 반드시 있어야 하는 존재로 볼게 아니라

역시나 우리는 늘 예수님을 있으나 마나 한 무시하는 존재로 보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해서

이야기를 계속해서 이어 나가 봅시다.

즉 우리는 그를 싫어버린바로 취급했고 귀히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래 놓고 이제 와서 막살면 안된다 라고 하면 반칙이지요.
그렇다고 막살기를 정당화 해서도 안되구요.
그런 나 중심이 아닌 예수님 중심의 사건이다 라는 겁니다.

 

예수님은 이 있으나 마나 한 다윗을 어떻게 다루십니까?

없음으로 다루십니다. 무시함으로 다루십니다. 이것이 기이함 이라는 성령의 일하심과 연관이 됩니다.
 

미끼로 다루십니다.

 

미끼가 없다면 숨어있는 대적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즉 자신이 소유한 힘 자랑을 언제 하겠습니까? 꼭 힘 없는 자들 앞에서만 과시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 앞에서는 절대로 그 힘을 과시 안합니다.
그러니 사탄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지 않을려고 얼마나 얼마나 노력한 줄 모릅니다.

아무튼 더 큰 힘이 있을때는 물 속에 잠겨서 빠 밤 빠 밤 밤밤밤밤 죠스처럼 안 나타나는 겁니다.

그 죠스를 잡는 방법은 미끼를 던져야 합니다.

어리석은 십자가 지혜이어야 약한 놈이다. 무시받는 놈이다 라고 덮썩 무는 겁니다.

 

그것도 죠스가 가장 좋아하는 것을 말입니다.

싫어하는 것 주면 안 올라오지요.

 

그 미끼가 바로 다윗입니다.

욥을 미끼로 삼아야 마귀는 내기에 참가 합니다.

욥 아닌 다른 사람은 마귀가 내기에 참여하지 않습니다.

 

얼마전에 어머니께서 다니엘서를 읽으시다가 이런 질문을 하셨습니다.

 

다니엘 전체는 다 환상이더구나, 환상으로만 말하네? 환상 아니면 말하지 않네!! 라고 말입니다.

 

그러자 제가 또 신이나서 몸에 불이 붙은냥 열불내기 시작했습니다.


우와 어머니 그것을 어떻게 아셨어요????

 

어머니!! 전에 말했듯이 환상을 안 보면

즉 성령을 받지 않았으면 다니엘은 여전히 예루살렘을 향해서 절하고

그랬을 겁니다.

그런데 계시를 받으니까 예루살렘을 향하여 절하지 않고

여기에도 주님의 살아계심을 보게 되는 거죠.

 

그런데 주의 살아계심이 뭡니까?

즉 여기에도 주님이 살아계시는 구나를 안다는 것은

곧 자신은 죽임을 당하는 존재로써 바벨론 전체가 이 다니엘 하나 죽일려고

들썩 들썩 거린다 라는 겁니다.


곧 다니엘 죽이기. 다윗 죽이기. 욥 죽이기. 예수님 죽이기, 사도바울 죽이기 라는 겁니다.
 

참 신기하잖아요 기이하지요?

지난 시간에 기이 하다 라는 의미도 같은 의미입니다.


죽은자 같으나 산 자 라는 겁니다. 누가 봐도 죽은자인데~~~
 

예수님 하나 죽일려고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가 다 들썩 들썩 거리는 겁니다.

사도행전에는 사도바울 하나 죽일려고

온 지역에 흩어져 있는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이 딸랑 하나 때문에 다들 들썩 들썩 거리는 겁니다.

정작 다니엘이 죽은자가 아니라 다니엘을 죽일려고 모든 사람들이 들썩 거린 그들이 좀비였다는 겁니다.
이 사실이 나타나는 것이 바로 기이하다는 겁니다.

어떻게 가장 비천한 자가 최고의 자리에 놓여지는가에 대해서 잠언서에서는 기이하다고 했습니다.
그것도 주의 주 자리 
이렇게 되면 잠언서가 말하기를 배아파 죽는다는 겁니다. 실제로 배아파 죽습니다.

(잠 30:18, 개역) 『내가 심히 기이히 여기고도 깨닫지 못하는 것 서넛이 있나니』

(잠 30:19, 개역) 『곧 공중에 날아 다니는 독수리의 자취와 반석 위로 기어 다니는 뱀의 자취와 바다로 지나다니는 배의 자취와 남자가 여자와 함께 한 자취며』

(잠 30:20, 개역) 『음녀의 자취도 그러하니라 그가 먹고 그 입을 씻음 같이 말하기를 내가 악을 행치 아니하였다 하느니라』

(잠 30:21, 개역) 『세상을 진동시키며 세상으로 견딜 수 없게 하는 것 서넛이 있나니』

(잠 30:22, 개역) 『곧 종이 임금된 것과 미련한 자가 배부른 것과』

(잠 30:23, 개역) 『꺼림을 받는 계집이 시집간 것과 계집 종이 주모를 이은 것이니라』



종이 어떻게 주인이 되냐 말이죠? 요셉 다윗 다 종이였잖아요
결국 예수님을 미리 앞당겨 보여준 겁니다.
이 꼴을 마귀가 견디질 못하는 겁니다.

그것을 아예 사도행전은 대놓고 이야기 합니다.
너희가 죽인 예수가 하나님께서 살리시사 3일만에 다시 살아나 우리들의 주가 되셨다 라고 말입니다.


결국 이것을 막기 위한 마귀는 인간 속에 들어가서
전체 판대기가 딱 한 명 죽일려고 들썩 들썩 거리도록 한 것입니다.

 

지금 오늘 본문에 다윗 하나 죽일려고 이스라엘 전체가 들썩 들썩 거리고 있다 라는 겁니다.

 

이것이 환상을 보고 계시를 받았고 성령을 받았음으로 나타난

주님이 여기 살아계심의 증상이다 라는 겁니다. 즉 기이함 입니다. 다른 말로 평탄케 하심 입니다.


성령을 받지 않으면 다윗 또한 여호와의 이름이 아닌 사울왕처럼 여호와라는 우상숭배 때문에
자신이 주인이다. 자신이 이스라엘 왕이다 라고 끝까지 이스라엘 왕 답게 행세 할려고
절대로 포기 못하는 짖만 골라서 할 것입니다.
 

다니엘은 이스라엘이 실패함으로 바벨론으로 포로당한 그 증상을 보여주는 하나의 증상물입니다.

그런데 더 나은 증상으로써 성령 곧 환상을 받은 증상으로써 중첩이 되어 나타나는 것이

 

온 바벨론 덩치 큰 놈이, 이 수천만 명이, 이 조그마한 다니엘 한 사람 하나를 죽일려고

온 전체 판대기가 들썩 들썩 거린다 말이죠.

 

그런 입장에서 오늘 본문을 보세요

 

다윗 하나 죽일려고 들석 들썩 거리는 겁니다.

심지어 다윗도 다윗을 죽일려고 말입니다.
왜? 나 다윗은 [다윗없음]이 아니라, 오로지 [다윗있음]으로 존재하고 싶다를 주장하고픈 겁니다.

 

마치 우리가 예수님을 죽일려고 했듯이 말입니다.

 

왜냐하면 다윗은 다윗 자신이 미끼가 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 라는 겁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없음]으로 취급해서 비웃었듯이 말입니다.
결국 웃음이란 이런 역사의 판대기를 뒤엎는 묵시인 겁니다.

웃음은 역사 체제, 행함체제, 우상체제를 전복시키는 겁니다.

뭐든지 [예]가 되지 [아니오] 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유대인이 바라는 기적에 거스리는 걸림돌로써의 십자가는 다윗도 원치 않았던 겁니다. 베드로가 그래서 세번 부인한 겁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 당신의 유대인이나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미끼의 운명이 되기 싫어합니다. 완강히 거부합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뭡니까? 미끼와의 정반대의 운명이 되기를 원해서 믿는다는 거죠.

그러나 예수님이 주시는 믿음은 니가 거부하는 그 십자가가 너를 구원한다 라는 겁니다.

아무도 자발적으로 십자가를 원하지 않는 불편한 숭고함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인간의 믿음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인간 믿음의 대상물이 아닙니다.

정반대로 십자가가 나는 상대로 자신의 믿음을 펼치는 겁니다.
오늘날 기독교는 완전 정반대로 가르치는 거죠.

 

그래서 제 조카가 꿈에서 나타나 이스라엘의 의미가 쌍둥이 이다 라고 말한 것은

사실은 저번에 우리가 쌍둥이 의미에서 다루었잖아요 그러니 개꿈인 거죠.

 

그 쌍둥이의 의미로써 예수님이 졸지에 우리가 되기 싫은 미끼의 모습이 되니까

십자가에 못박아라 못박아라 라고 외친 겁니다.

십자가에 달려야 할 자는 나인데. 예수님을 못 박음으로써 모든 아담이 못 박힌 겁니다..
예수님만 못 박은줄 알았는데 자기 발등에 자기를 찍어내린 겁니다.
예수님이 아니라 나를 내가 박은 겁니다.


최근에 본 영화들 모두가 이 쌍둥이 개념으로써 인간의 모양으로 온 인공지능로봇개념인데

우찌 쌍둥이가 나의 사본 즉 복제인간로봇이 원본 보다 더 원본 노릇을 하고

인간이 실패한 욕망인 하나님 같이 되는 초월적 존재를 로봇이 대신 그 욕망을 채워 버리니까
졸지에 인간이 과거 에덴동산의 반역이 입장이 바뀌어서 펼쳐지게 되니
나는 이 아벨을 안 죽이고는 못 배기는 가인이 되어 버리는 겁니다.

형제 가인과 아벨 또는 쌍둥이 에서와 야곱 등등의 이야기 속에서

이 쌍둥이를 죽여버리든지 아니면

죽임을 당하는 말살당함인지 이 두 운명밖에 없다는 것이 요즘 나온 영화들의 내용이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인간 보다 더 인간적인 피노키오로 오신 겁니다. 거짓말 하는 로봇으로 말입니다.


지는 거짓말 하면서 정작 자기가 만든 로봇은 거짓말하면 안된다는 것에

정면적으로 부딧히게 되는 겁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 자신이 외설적인 부조리의 모습에서 벗어날 길이 없기 때문에 원수의 실상을 드러내기 위해서

물 속에서 기어 나오지 않고 숨어있는 죠스를 들추어 내기 위해서

친히 미끼가 되신 겁니다.

우리는 좋타구나 하고 덮썩 물었습니다.
 

불뱀을 잡을려면 불뱀을 쳐다보라고 하니 다들 비웃었던 겁니다.

피부병을 낫게 할려면 똥물에 7번 씻으라고 하니 다들 비웃었던 겁니다.

그런데 쳐다 본자는 낫게 되는

그야 말로 말도 안되는
기이한 현상이 벌어지는 겁니다.
그런 일만 골라 골라 골라서 하시는 겁니다.

세상이 격동하면서 절대 일어나면 안되는 일이라고 완강히 거부하는 일이 벌어지는 겁니다.

(잠 30:21, 개역) 『세상을 진동시키며 세상으로 견딜 수 없게 하는 것 서넛이 있나니』

(잠 30:22, 개역) 『곧 종이 임금된 것과 미련한 자가 배부른 것과』

(잠 30:23, 개역) 『꺼림을 받는 계집이 시집간 것과 계집 종이 주모를 이은 것이니라』


그 어리석은 지혜가

나보다 옳도다 가 되는 겁니다.

이것이 부정의 부정입니다.

 

아니 내가 남을 7번 용서하고

남을 똥물에서 7번 건져내어야 천국 갈까 말까?

그래서 의심이 되어서 8번 할까요?

9번 할까요 라고 하고 있는데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죠? 니고데모의 질문)

 

예수님은 그 의문의 증서를 확 찢어버리고

7? 8? 웃끼고 있네 라고 확 찢어버리고

 

너나 770번 똥물에 제발 좀 담겨져라 라고 하시는 겁니다.

남이 아닌 너나 잘 하세요

너나 좀 나에게 건짐을 받아라 라는 겁니다. 나의 용서나 좀 받아라 라는 겁니다.
(우물가의 여인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영생의 물 곧 자신을 주시는 겁니다.)

그러니 탕자가 십자가에 딱입니다. 맏아들은 완강히 거부합니다. 격동합니다.
죄인을 부르러 오셨지 의인을 부르러 오신게 아닙니다.


그것도 가능성의 7번이 아닌, 상상도 못할 부정의 부정인 770번 정도로 너는 그 정도로 건짐받을 가치도 없는

구원받지 말아야 할 정도로 770번 용서 받아야 할 판국이다는 겁니다.

 

이것이 요나의 표적입니다.

악한 세대가 구하는 기적인 7번 남 용서가 아닌

 

770번의 용서 받아야 할 판국에 놓여진 요나의 표적이다는 겁니다.

이거 받으면 게임오바입니다. 얼마나 신날까요?

지금도 이 십자가의 용서를 글로 적을 때 마나 설레고 가슴이 꿍딱 꿍딱

심쿵 합니다.

얼마나 설레냐 말이죠.

요나든 엘리야든 자꾸 내 열심이 특심이다고 우상숭배에 빠집니다.
안 받아준다고 자살시위를 합니다.

즉 이들도 거짓선지자이기는 매 마찬가지이다는 겁니다.
결국 누가 참선지자로 새롭게 만들어야 합니까?
악한세대가 구하는 기적 따위나 바라고 있는 요나와 엘리야 기타등등을
어떻게 십자가 라는 표적으로 이들을 참선지자로 만들어야만 하냐 말이죠

이들을 무시하는 겁니다. 그들이 행한 업적을 모조리 다 똥물에 쳐박아 넣어버리는 겁니다.
이것이 성령의 일입니다.

사람의 일을 생각지 않고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게끔 주께서 전복시키는 십자가에 못 박는 일을 하셔야

그들이 참선지자가 되지 
그들 자체로써는 가망 없는 그저 그런 거짓선지자일 뿐입니다.
그래서 7번 똥물에 쳐 박아 버리고
7에 70번 용서받아야 할 판국에 놓이게 만들고
7천명이라는 남은자로 엘리야의 모든 경험, 믿음, 행함을 깡그리 무시해 버리시는 겁니다.
오직 예수님의 살과 피로만
십자가의 용서로만 일하심을 증거케 하는 겁니다.

 

도저히 구원 받을 가치도 없는 자에게 770번 씩이나 말입니다.

 

이것이 사건입니다. 사건이란 미끼 만들기입니다.

죄인 중의 괴수 만들기입니다.

그러면 이 죄인 중의 괴수 하나 죽일려고 온 전체 판대기가

평상시에 점잖은 척 가만히 있더니

이제는 미친 듯이 들썩 들썩 거리는 겁니다.

 

다윗도 이 다윗 속에 있는 약속을 무시하는데 있어서

온 전체의 힘들을 다 동원해서 무시할려고 다윗 전체의 인생이 들썩 들썩 거리는 겁니다.
사울왕과 똑같은 짖을 자기가 당해놓고서는 역시나 마찬가지로 하는 겁니다.

오죽하면 얼마나 심각했으면 우리야 장군 하나 죽일려고 별에 별 머리를 다 짜내고 짜내어서
철저한 계획 아래에
우연을 가장해서 미필적 고의로
기여이 죽이고 마느냐 말이죠
.

그런데 그것이 바로 자신을 자기가 죽인 겁니다.

그 칼이 자기를 찌르는 겁니다. 쌍둥이 개념이 이런 의미죠.


다윗의 속의 다윗을 자기가 핍박했던 겁니다. 무시한 거죠.

주님이 다행 스럽게 다시 살려 냅니다. 즉 치십니다.

그 간격 때문에 다시 사는 겁니다.

요나도 그 간극을 무시했다가

도리어 그 간극 때문에 다시 삽니다.

왜 하루 만에 도냐 말이죠 ㅋㅋㅋㅋ


이 간극이 십자가요 도장 도장끈 지팡이 입니다.

내가 부정을 감추기 위해서 했던 그 부정이 나를 도리어 살리는 부정이 되어 버린 부정의 부정이다는 겁니다.

여디디야 여디디야 여디디야 말입니다.

 

베드로도 똑같았다고 수십번 강조했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예수님은 죽으시면 안됩니다 라고 말리고 말렸죠.

그게 사람의 일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않은 거다 라는 거죠.

 

자 그럼 우리는 지금 이 말을 듣고 사람의 일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면 되겠구나 라고 하면 되지 않냐 라고 하겠지만

그게 가능하면 왜 이런 소리를 하겠습니까?

 

불가능성의 세계이다는 겁니다.

단절된 겁니다.

 

우리는 여전히 예수님을 하나 죽일려고 들썩 들썩 거리는 그 세상 속에서

벗어날 수 없는 그 모습 그대로 예수님께 대적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못 벗어납니다.

 

우리는 이렇게 막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안 사는 자가 없으며

난 절대 막살지 않을 거야 라고 하면서 막살고 있는 겁니다.


막살아라 라는 말은 실제로 막살아라 라는 뜻이 아니라
아니 원래 막살고 있는데 뭘 또 새삼스럽게 막사냐 말이죠.

막살아라는 것은 이미 우리는 갇혀있다 라는 실상을 보라 라는 겁니다.

자 그렇다면 나에게서 나오는 것은 모두다 거짓이다는 겁니다.

그럼 외부에서 어떤 일을 벌리시는 분이 누구며 그가 도대체 왜 이런 일을 벌리느냐 라는 것을 보자 라는 겁니다.

오늘 시편의 내용이 이런 일들을 벌리는 내용으로써 나온다는 겁니다. 


기이하고 평탄케 하는 다리미질을 말입니다.
무시하고 무시하고 대 무시를 하는 다리미질이다는 거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세계다 승리했고 다 이루었다 라는 사실에

감격하는 겁니다.

 

어떻게? ? 우리의 끈질긴 방해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어떻게 성공하셨는가?

아니 성공 할 수 밖에 없었는가?

 

요즘 나온 영화를 몇편 봤는데 참으로 재미있는 것이

쌍둥이 권법에 관한 겁니다.

 

로봇도 그냥 고철상자로 하지 않고

꼭 모양을 인간의 모양으로 하면

이 로봇이 지가 인간인줄 착각한다는 겁니다.

자 이렇게 쌍둥이가 되면

당연히 제일 나쁜 것을 제일 먼저 습득하도록 되어 있는데 그것이 바로 거짓말입니다.

 

거짓말 속임수를 배우면 아니 저는 배움 보다 이미 타고난 것이기에

타고나면 인간은 졸지에 원본이면서 사본으로 밀려나고

오히려 사본이 더 원본보다 더 원본처럼 된다 라는 겁니다.

 

여기에 인간의 대처방안은 법으로 통제할 수 밖에 없고

타협과 공유로써 제발 좀 함께 잘 살도록 하자 라는 식입니다.

 

그런데 이런 패턴은 이미 창세기부터 구약 전체에서 무한적으로 반복이 된 겁니다.

 

이스라엘이 꼭 이방나라에서의 시선에서는 꼭 인공지능 로봇같아 보인 겁니다.

위기 의식을 느껴서 다들 죽일려고 달려드는

이스라엘 민족 하나 없앨려고 다들 들썩 들썩 거리는 겁니다.

? 통제력에서 벗어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얼룩이 그렇잖아요

아름다운 그림에 삑사리 하나 얼룩이 그런 역할을 하는 겁니다.

미워 죽습니다. 저 얼룩점을 안 빼고는 잠을 못 자겠다는 겁니다.

그것이 이스라엘의 의미였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도리어 예수님이라는 얼룩 점 하나를 빼낼려고

이스라엘 전체가 들썩 들썩 거립니다.

 

오늘 본문이 그렇다고 했잖아요

다윗이라는 얼룩점 하나 빼고 싶어서 들썩 들썩 거리는 겁니다.

 

안그러면 잠이 안와요 잠이 !!!!

 

평안이 없는 전쟁의 상태이다는 거죠.

 

지금 시편 27편에서 다윗은 중간에 낑긴 다윗죽이기가 펼쳐지는 그 중앙에 있는 겁니다.

얼룩점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을 믿는 자와 하나님의 이름을 믿는 자의 대립으로써

졸지에 두 갈래가 형성된 분명한 선

그 경계선이 또렷해졌다 라는 겁니다.

 

사울왕이 살아 있을때에 사울왕이 다윗왕을 괴롭혀서가 아니라

사울왕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또렷하다는 겁니다.

사울이 죽고 없는데

오히려 이스라엘 전체가 이 다윗왕 하나 죽일려고 전체가 들석 들썩 거리는 것이

사울 생전 보다 더 또렷하다는 겁니다.

 

더 명료하고 분명하게 두 갈래로 나누어졌다는 겁니다.

이것이 거룩입니다.

 

그럼 이스라엘의 멸망은 당연하다 라는 생각이 우리는 드는 겁니다.

 

그럼 우리가 앞서서 예수님 하나 죽일려고 들썩 들썩 거림에

우리는 못 벗어난다고 했잖아요

그럼 우리는 실패나 멸망당함이 마땅하다 라는 생각도 우리는 당연히 가져야 한다는 겁니다.

 

다들 막살고 있지

제대로 사는 자가 없다 라는 겁니다.

앞으로도 제대로 사는 자는 결국 없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조치가 어떤 조치인가를 보자 라는 겁니다.

당연히 멸망이지요 그것은 감사해야 합니다.

또 실패죠 물론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를 불평과 원망 속에 집어넣음으로써 때리시고 간섭한다는 자체가

주님의 살아계심의 조치로써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말입니다.

 

자 그럼 우리는 그럴 자격이 비록 없지만

우리가 그랬듯이 주님의 미끼 되심을 싫어했지만

주님이 이제는 우리를 미끼로 삼아서 주변의 판대기가 들썩 들썩 거릴때에

이것이 주님의 살아계심을 나타내시는 주님의 뜻이다 라는 겁니다.

 

우리는 분명 그게 싫습니다. 미쳤나요 내가 미끼 되게?

그런데 그런 나에게 죽임을 당하신 주님이

너희가 죽인 예수를 하나님이 다시 삼일만에 살려서 우리들의 주가 되게 하셨다 라는

거부하고 싶지만 거부할 수 없는 일방적인 쳐들어옴 앞에

즉각적인 무릎꿇힘 당해서 우리는 안 외치고는 못 배기게 되는 겁니다.

 

사도바울이 스데반이라는 미끼를 덮썩 무는 바람에 본인도 졸지에 미끼가 되는 운명이 된 겁니다.

이것이 주님의 전도이지

인간의 전도는 밥풀떼기 삼아서 조폭조직의 일원이 되게 하는 거죠.

 

그런데 누가 더 폭력적일까요?

 

사도바울이라는 그때는 사울청년이라는 깡패 보다

더 나은 깡패가 바로 스데반 집사였습니다.

 

주여 저들은 아무것도 알지 못하나이다 저들을 용서해 주세요 라는

사랑 보다 더한 폭력은 없거든요.

 

그러니 사도바울이 그 스데반 미끼에 완전히 낚이는 겁니다.

사람잡는 어부 라는 의미가 바로 이런 의미입니다.

 

죠스 잡는 미끼 라는 겁니다.

 

어떻게 해서든 이 미끼 하나 잡아 먹을려고 상어 전체가 들썩 들썩 거리는 겁니다.

 

그 중간에 낑긴 미끼의 심정이 되어보세요

이 시편 27편이 이해가 되실 겁니다.

 

아니 사울왕이라는 대적도 원수도 이미 다 죽고 없는데 왜 이런 시를 반복적으로 적을까요?

다윗이 오락 가락 할 정도로 이랬다 저랬다

하나 마나 한 소리를 계속 적으로 반복하는 것일까요?

 

한 개인의 이런 모습이 마치 이스라엘의 앞으로의 역사 속에 반영 투영이 되는 겁니다.

비록 망해도 약속이라는 하나님의 영광은 안 떠나는 역사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마치 앞으로 이스라엘이 당할 운명을 미리 앞당겨 보여주듯이

주변의 국가들이 이스라엘을 뜯어 먹을려고 달려들다가

도리어 망하는

 

아니 이미 망해버린 이스라엘 국가요 민족인데

그거 하나 제대로 못 잡아먹어서

다들 달려들어 뜯어먹을려다가

도리어 자신들이 당하는 그런 역사를

 

사울왕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 원수와 대적들은 주님은 미리 꼼꼼하게 준비해 놓고서는

이런 다윗이라는 딸랑 한명을 통해서 그 계획을 미리 앞당겨 발산 시키고 있는 겁니다.

 

다윗 참 불쌍해 보이죠?

아닙니다 그 다음은 우리 차례입니다.

우리가 에수님께 그랬듯이 말입니다.

우리는 유대인이 나치로부터 당하는 모습을 보고서

유대인 불쌍하다 라는 의식만을 가졌지

그 다음 우리 차례이다는 것을 모르고 있는 겁니다.

이미 우리는 그 속에 놓여졌습니다.

 

그런데 낙망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이것이 주님의 살아계심을 나타내는 주님 자신의 뜻이다는 겁니다.

참아도 못하고 눈물 많이 흘려도 못하고

견뎌도 안 됩니다.

언젠가 바닥이 나고 그 한계점에 도달하면 원망과 불평이 튀어나오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때 그 원망과 불평이 튀어나올때에

비로소 주님의 복음의 시작이 실감이 나는 겁니다.

 

? 그래야 내 영역에서 벗어난 일이기에

기이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빨리 빨리 내 겉은 후패하여서

내 속의 주님의 기이한 새것을 나타내신다는 사실을

그 관계에 놓여졌다 라는 것을 아시고

 

마음껏 주님을 3번 부인하는

그래서 진짜 주님으로부터 당하는 배신을 누려야 할 것입니다.

물론 인간은 역시나 안 될 뿐입니다.

그래서 실패를 누리는 겁니다.

 

그러나 거짓선지자는 끝까지 희망을 주고자 할 뿐일 것입니다.

 

복음은 우리를 물없는 곳 양식 없는 곳으로 인도합니다.

자신의 믿음 따위가 하나도 마귀에게는 흥미꺼리가 되지 않기 때문에

그런 믿음이 다 탈탈탈 털려서 빈털터리가 되도록

광야로 인도합니다.

 

즉 미끼가 되기 전에 미끼를 물어서 다 털리는 겁니다.

 

이제 주님은 죄인 중의 괴수 라는 가장 맛나보이는 죠스의 먹잇깜으로 만드십니다.

하나님을 원망도 했겠다. 예수님을 세 번 씩이나 부인도 했겠다.

마귀가 얼마나 군침을 질질 흘리겠습니까?

 

그래서 마귀가 덮썩 물었을때에

다윗이라는 미끼 뒤에

그 미끼 넘어에 예수님의 십자가라는 죽음을 덮썩 무는 바람에

오로지 마귀만을 상대로 한 이 말씀이 성취가 되는 겁니다.

내 믿음이나 나의 이웃사랑 실천력이 성취가 되는게 아니라

나의 구원이 아니라

예수님의 구원이 성취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죄인 중의 괴수를 만드시는 이유입니다.

7번 남 용서가 아닌

770번 용서 받아야 할 판국인 죄인을 부르러 오신 겁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죽음의 의미만을 드러내시고자

우리를 미끼로

성령으로

환상으로 꿈으로

즉 계시로

말씀으로

십자가로만 인도하시는 겁니다.

 

미끼 뒤에는

미끼 너머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 아무것도 없는 것에 예수님은 충성하셨고

다 이루셨습니다.

 

다 이루어진 것은 딱 하나 뿐입니다.

십자가입니다.

 

다른 것은 이룬 것 없습니다.

나의 구원을 이루지 않았습니다.

헛물 캐지 말고. 허구에 빠지지 맙시다.

 

오로지 다 이룬 것은

십자가가 밝히 보인다는 것 뿐입니다.

 

(고전 1:17, 개역)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침례를 주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케 하려 하심이니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고전 1:18, 개역)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고전 1:19, 개역) 기록된 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고전 1:20, 개역)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뇨 선비가 어디 있느뇨 이 세대에 변사가 어디 있느뇨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케 하신 것이 아니뇨

(고전 1:21, 개역)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고전 1:22, 개역)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고전 1:23, 개역)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고전 1:24, 개역)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고전 1:25, 개역)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고전 1:26, 개역)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고전 1:27, 개역)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고전 1:28, 개역)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고전 1:29, 개역)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Posted by 김 대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