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발 살려주세요×3 ? &  은혜가 네게 족하다!! (시편 28)

 


(
고후 12:7, 개역)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고후 12:8, 개역) 이것이 내게서 떠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고후 12:9, 개역)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고후 12:10, 개역)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

 

 

(28:1, 개역) [다윗의 시]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으오니 나의 반석이여 내게 귀를 막지 마소서 주께서 내게 잠잠하시면 내가 무덤에 내려가는 자와 같을까 하나이다

(28:2, 개역) 내가 주의 성소를 향하여 나의 손을 들고 주께 부르짖을 때에 나의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소서

(28:3, 개역) 악인과 행악하는 자와 함께 나를 끌지 마옵소서 저희는 그 이웃에게 화평을 말하나 그 마음에는 악독이 있나이다

(28:4, 개역) 저희의 행사와 그 행위의 악한 대로 갚으시며 저희 손의 지은 대로 갚아 그 마땅히 받을 것으로 보응하소서

(28:5, 개역) 저희는 여호와의 행하신 일과 손으로 지으신 것을 생각지 아니하므로 여호와께서 저희를 파괴하고 건설치 아니하시리로다

(28:6, 개역) 여호와를 찬송함이여 내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심이로다

(28:7, 개역) 여호와는 나의 힘과 나의 방패시니 내 마음이 저를 의지하여 도움을 얻었도다 그러므로 내 마음이 크게 기뻐하며 내 노래로 저를 찬송하리로다

(28:8, 개역) 여호와는 저희의 힘이시요 그 기름 부음 받은 자의 구원의 산성이시로다

(28:9, 개역) 주의 백성을 구원하시며 주의 산업에 복을 주시고 또 저희의 목자가 되사 영원토록 드십소서

 

 

(28:1, 공동) 야훼, 나의 반석이여 이 몸이 당신께 부르짖사오니, 귀를 막지 마소서. 당신께서 외면하시면, 이 몸은 깊은 구렁에 떨어지는 사람과 다름없사옵니다.

(28:2, 공동) 당신의 지성소로 두 손을 들어 올릴 때, 살려달라 애원할 때, 내 소리를 들어주소서.

(28:3, 공동) 악인들과 더불어, 죄인들과 더불어 이 몸을 끌어내지 마소서. 입으로는 이웃에게 상냥하게 말하지만, 속으로는 엉큼한 생각을 품는 자들입니다.

(28:4, 공동) 그들의 행실 따라, 그들이 저지른 죄악 따라, 그들의 소행 따라 마땅히 갚으소서.

(28:5, 공동) 야훼께서 하신 일, 손수하신 일을 아랑곳하지 않는 그들을 다시는 일어서지 못하게 짓부수어주소서!

(28:6, 공동) 나를 어여삐 보시고 내 기도 들어주신 야훼여, 찬미받으소서.

(28:7, 공동) 야훼는 나의 힘, 나의 방패, 나는 진심으로 그분을 믿고, 믿어 도움받은 것, 내 마음 기뻐 뛰놀며 감사하리라.

(28:8, 공동) 야훼, 당신 백성의 힘이시며, 손수 세우신 왕을 건지시고 지키시는 분이여,

(28:9, 공동) 당신의 백성을 건지시고 당신의 유산에 복을 내리소서. 언제까지나 메고 다니며 보살피소서.

 

 

 

예수님께서 원수 곧 마귀를 세상에 푸시는 이유는 은혜를 더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왜? 악을 허용하는가? 은혜 때문이다는 겁니다.

은혜란 예수님 쪽에서 말하는 은혜이지

인간이 말하는 은혜는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이 말하는 은혜란 누구든지 공감하는 생각이지

정작 성경에서 말하는 은헤와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오죽하면 사도바울이 은혜가 안되기 때문에 사단의 가시를 빼달라고 세 번 씩이나 기도하는데

얼마나 은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으면 그렇게 기도까지 했겠습니까?


그 정도로 아무리 생각해도 은혜는커녕 방해만 된다고 생각했기에 가시를 빼달라고 했습니다
.

즉 억지로 참는 문제가 아니다 라는 것은 사도바울이 인식했는데

가시를 빼는 것이 최선의 방책이고 은혜를 은혜 답게 된다고 본 겁니다.

 

그런데 천하의 사도바울도 틀렸습니다.

철저하고 완벽했던 그의 논리도

논리를 떠나서 이루어지는 은혜의 세계를 종잡을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은혜인 겁니다.

 

은혜를 바울이 말한바 있습니다.

 

(11:6, 개역)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하느니라

 

이 앞에 내용이 무엇인고 하니 바로 엘리야 이야기입니다.

즉 선지자 이야기입니다.

 

선지자란 행함을 공격하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그 행함을 공격할려면 선지자 자신들은 행함 속에 있어야 할까요?

은혜 속에 있어야 할까요?


그런데 행함 밖인 은혜 속에 있을려면 무슨 수로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

제 말은 선지자 조차도 행함 밖에 있을 방법이 없다 라는 겁니다.

행함에서 벗어날 인간이 없다는 거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함을 공격하는 자로써

은혜 속에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11:1, 개역)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나도 이스라엘인이요 아브라함의 씨에서 난 자요 베냐민 지파라

(11:2, 개역) 하나님이 그 미리 아신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셨나니 너희가 성경이 엘리야를 가리켜 말한 것을 알지 못하느냐 저가 이스라엘을 하나님께 송사하되

(11:3, 개역) 주여 저희가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으며 주의 제단들을 헐어버렸고 나만 남았는데 내 목숨도 찾나이다 하니

(11:4, 개역) 저에게 하신 대답이 무엇이뇨 내가 나를 위하여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 칠천을 남겨 두었다 하셨으니

(11:5, 개역) 그런즉 이와 같이 이제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그런데 무슨 수로?

방법이 없어요 방법이!!!!

 

지난 시간에 엘리야, 요나, 욥 이야기 하면서

그들이 거짓선지자로 출발해서

참선지자로 탈바꿈하게 되는데

그 거짓선지자에서 벗어날 재간이 그들에게는 없었다 라고 했습니다.

즉 빼내주시지 않으면 그들 또한 벗어날 수가 없다 라는 거죠.

그 숙제도 결국 예수님 손에 달려 있다 라는 겁니다.

 

어떻게 행함에서 벗어나서 은혜 속에 거할수 있냐 말이죠

 

은혜로 남은자가 생긴다는 겁니다.

즉 남은자란 [있을 수 없는 존재]가 생겨났다 라는 겁니다.

이것이 쌍둥이입니다. 이스라엘은 쌍둥이 개념이다는 겁니다.

선지자는 쌍둥이개념으로써 등장하는 겁니다.

 

전에도 말했듯이 요즘 나오는 드라마 [가면] 첫편을 봤는데

도플갱어로써 나와 똑같은 존재의 등장 때문에

나는 죽고 그는 오히려 죽은자와 같았는데 도리어 살게 되더라 라는 내용입니다.

이스라엘은 없는 존재로써 등장해서 나를 죽이고

죽은자로써 이스라엘은 사는 겁니다.

야곱은 죽이고 그 속의 이스라엘로써 전혀 다른 존재가 사는 겁니다.

 

어린이 구전동화 자기를 잃어버린 사람, 또는 자기를 도둑맞은 사람 이라는 동화처럼 말입니다.


이것이 부조리 중의 부조리입니다.

종말 속의 종말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종말의 존재입니다.


선지자는 다른 민족에 있는 예언자나 점쟁이 아니다는 겁니다.

그들 속에서 빼내시는 방법이

오히려 사단의 가시를 푹 하고 찔러 넣는 겁니다.

아무리 기도해도 안 빼준다는 겁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는 겁니다.

 

만약 사단의 가시를 푹 찔러 넣지 아니하면

다른 이방나라의 예언자나 별 다를바가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 그런 거짓선지자의 속성

곧 행함에서 

빼내는 방법은 오로지 사단의 가시를 푹 찔러 넣는 겁니다.

 

왜 이런 극단의 조치

곧 극과 극으로 벌려 놓는 차이를 벌려놓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사단이라는 극의 차이를 없애버리도록

사도바울의 몸에 사단가시를 푹 찔러 넣는 것일까요?

 

왜 그것이 은혜일까요?

 

다른 말로 오늘 본문에 다윗 왕에게 원수를 좀

쫌 쪼~~~~~~~~~~

제발 좀 시원하게 뽑아버리지 않고

이미 사울왕도 죽고 없음에도 불구하고

제발 좀 뭔가 시원스럽게

또렷하게 명료하게 원수가 사라지는

뭔가 시원하게 극적인 차이가 벌어지는 그 일이 벌어지는게 아니라

 

왜 찜찜하게 계속적으로 원수 문제는 계속해서 여운이 남아서

계속 이렇게 다윗을 괴롭히냐 말이죠.

 

다윗 자신이 원수라면 다윗 속의 원수 문제도 좀 시원하게 해결하지 않고

왜 이렇게 질질질 끈질지게 다윗을 괴롭히면서

죽지도 않고

그렇다고 숙주인 다윗도 죽지도 않고

괴로움만 계속 더해가냐 말이죠.

 

죽은것도 아니고

산 것도 아닌

오드라덱

또는 아감벤이 말한 호모 사케르


또는 좀비처럼


이도 저도 아닌

그래서 다윗은 계속해서 울부짖는 겁니다
.

 


이게 누가 봐도 우와 은혜다
? 라고, 참 은혜스럽고 감동이다 라고,  정말 은혜처럼 보이냐 말이죠?

 

그런데 복음은 곧 말씀은 고집스럽게 그것이 은혜라고 합니다.
인간이 원했던 은혜가 아닌 거죠.
철저하게 주님의 일방적인 편파은혜라는 겁니다.

 

즉 사단이 극과 극으로 은혜 멀리서 차이로 벌어져서 은혜 반대편에서 놓여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은 하나인 셈입니다.

적대적 관계로 누구나 보이는 것은 오히려 그것이 한통속이요

진짜 둘의 차이는

내적인 간극에서 사단과 은혜로 나누어진다는 겁니다.
행함과 은혜가 갈라서게 되는 겁니다.

 

초간극인 겁니다.

눈에 비일까 말까 하는

 

누가 봐도 너무 극과 극으로 벌어진 외부적인 차이는

사실상 없다 라는 겁니다.

 

천국과 지옥의 차이도 마찬가지입니다.

외부의 차이가 아닌 겁니다.

 

내적인 초간극입니다.

그 간극은 아주 비일까 말까 하는

누가 봐도 둘로 나누어져 보이는게 아니라

하나처럼 보인다 라는 겁니다.

오로지 그 간극은

초미세간극으로써 세미한 음성이다는 겁니다.


비일까 말까

보일까 말까

듣낄라 말라

듣길 듯 말 듯

안 보이고 안듣긴다는 겁니다.

 

그 초미세간극은 바로 제발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라는 물음에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라는 답변과 같은

그 간극입니다.

 

있으나 마나 한 간극인거죠.

그런 답변은 하나 마나 한 소리 같다는 겁니다.
 

에이 저게 무슨 능력이고 저게 무슨 은혜냐? 라는 비아냥만을 오히려 듣기 딱 좋은 식입니다.

 

바로 그 무능 무가치 무시받음이 바로 성령의 일이다 라는 겁니다.

 

심지어 하나님의 일을 사도바울이 지금 무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왜 왕따 당한다고 했습니까
?
여호와는 안 무시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여호와를 안 무시 했기 때문에 됐다 라고,
난 괜찮은 인간이야 라고,


도리어 여호와의 이름을 무시하기 때문에 왕따 당한다고 했습니다
.

 

똑같습니다. 하나님은 안 무시하는데

예수의 이름은 무시하기 때문에 사도바울에게 사단의 가시는 필요하다는 겁니다.

 

뭔가를 잘못해서가 아니라

먼저 사단의 가시를 찔러 놓고 후차적으로 은혜가 뭔가를 알려주신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육이기 때문에 육적인 은혜에 대한 해석이 먼저 나온다는 겁니다
.

그 은혜에 대한 해석이 오히려 행함이다는 겁니다.

거봐 거봐 너가 그런 은혜에 대한 엉터리 해석 때문에

행함을 공격할 수가 없다 라는 겁니다.

그러니 너 먼저 이유없이 먼저 당해 보라 라는 겁니다.


왜 행함을 공격해야만 하는 은혜인지를
?

그것은 나를 공격하는 주의 이름이다 라는 겁니다.

그 이름에 죽어야

그 사랑에 죽어야

그 사랑을 증거할 수 있지 않냐

은혜를 증거할 수 있지 않냐 라는 겁니다.

 

그러니 시간에 갇혀 있는 우리는 엉터리 해석을 할 수 밖에 없고

그 엉터리 해석이 뻔히 나올줄 알았기에

먼저 때렸다 먼저 왕따 시켰다 라는 겁니다.

 

우리는 그것이 왜 사랑의 간섭이요 은혜인지

비로소 아는 겁니다.

 

물론 다른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그게 반발의 근거가 되는 겁니다.

난 잘못한게 없는데 때린다?

도저히 못 참겠다 라는 겁니다.

아니 참아도 소용없습니다.

 

믿음이 아닌 것은 다 죄 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 다윗이 또 살려달라고 제발 살려달라고 외칩니다.

앞에서도 자주 다루었던 내용입니다.

얼마나 예수님이 다윗을 죽일려고 다윗을 목 졸랐으면

제발 살려달라고 했겠습니까?

 

저도 환상 중에 누가 나의 목을 조르는 것을 하도 많이 당해봐서

그 공포를 압니다.

 

아픈 것은 조금만 참아버리면 죽어버리니까 차라리 속 시원한데

 

죽지도 않고 그렇다고 목을 조르는 것은 멈추지 않고

목졸리면 숨막혀 죽으면 되는데

계속 숨만 턱턱 막혀서 계속 헐떡 헐떡 거리기만 하고

끝나버리는 것은 없이 계속해서 그 상황이

죽은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산것도 아닌

계속 목 졸리는 상황만 계속해서 되더라 말이죠.

 

중간에 낑긴 겁니다.

오늘 다윗이 그런 존재가 되었다 라는 겁니다.

 

제발 살려달라고 외치는 것은 죽은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산 것도 아닌

 

계속해서 사단의 가시가 박힌 채로

사단과 은혜가 멀리 벌어진 차이가 극과 극으로 벌어지는 것이 아닌

딱 달라 붙어서

사도바울을 볼 때 마귀인지? 은혜받은자인지? 분간이 안될정도로

자기관리를 할 수 없는 존재

 

중간에 낑겨서 들짐승도 아니고 날짐승도 아닌 박쥐(영화 박찬욱) 처럼 모호한

마귀 씌인자인지? 성령 씌인자인지?

인간들이 해석할 수 없게 된

 

잠행자가 되어버린 겁니다. 박쥐처럼 말입니다.

포착 불가능한 자 가 잠행자 라는 뜻입니다.

사도바울은 감히 어떤 누구도 해석 불가능하게 되었다 라는 겁니다.

사도바울이 잘나서가 아닌
예수님이 사단의 가시를 푹 찔렀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다윗을 그렇게 만드셨다 라는 겁니다.

다윗을 아무도 해석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라는 겁니다.

 

제발 살려달라고 울부짖는 것을 보니

죽게 되었구나

또는 하나님이 그를 버렸구나 라고
사람들이 해석할 수 밖에 없도록 오독케 만들어 버립니다.

 

그런데 뒷 부분에는 항상 찬양과 감사로 은혜가 넘치더라 말이죠.

 

왜 이랬다 저랬다 하죠?

 

? 차라리 저럴 것이면

 

왜 하나 마나 한

사단의 가시를 꼿았을까 말이죠.

 

다윗을 해석 할 자가 없도록 만드신 겁니다.

오죽하면 이것이 얼마나 해석이 안되면

예수님이 시편 그대로 행해도

예수님을 시편 외운자들이 죽이느냐 말이죠.

시편을 차라리 안 외웠다면 안죽였을텐데

시편을 어릴적부터 외웠기 때문에 죽일 수 밖에 없었다 라는 겁니다.

다른 말로 하면 다윗을 해석했기 때문에 죽였다 라는 겁니다.

 

다윗은 해석이 안됩니다.

예수님은 해석이 안됩니다.

사도바울은 해석이 안됩니다.

 

까짓꺼 다 같은 인간인데 뭐 별난 인간이라고 해석을 못하냐 말이죠.

그렇게 달려들다가

정작 본인도 해석불가능성에 놓여 버리면


이건 마귀인지
? 성령의 사람인지? 분간이 안되는

모호한 존재가 되어버리는 겁니다.

 

모호해서 모호한게 아니라

인간 쪽에서 행함이 먹혀 들지 않는 존재이기에

해석을 못한다 라는 거죠.
아무리 해석할려고 해도 도리어 모호한 것만 더 증폭이 되는 겁니다.

 

이것은 다른 말로 하면

그래서 이런 존재는 세상에 던져진 찌끄래기가 될 수 밖에 없다 라는 겁니다.

 

미말에 던져진 세상의 구경꺼리 라는 겁니다. 곧 미끼 말입니다.
미끼 뒤에는 아무것도 없어요. 텅빈 빈터만 있을 뿐입니다.

 

사람들이 멍청해서 구경꺼리로 만드는게 아닙니다.

그 정도로 선을 분명하게 긋는 모습이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말로는 분명히 하나님의 은혜를 말하는데

그의 육신에는 사단의 가시가 박혀 있으면

이 이중성을 백이면 백

웃사꺼리로 만든다 라는 거죠.

지도 지 병을 못 고치면서 남을 구원할려고 해?

 

아니 예수님이 먼저 사도바울이나 다윗이나 요나나 엘리야나

이런 선지자들을 웃사꺼리로 예수님이 그들을 그렇게 만들어 버리는 겁니다.

왜 그렇게 만드시는 겁니까? 예수님이 그 길을 가셨기 때문입니다.
즉 십자가의 죽음 외에는 곧 은혜 외에는 빼내는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원래대로 거짓선지자들일 뿐이다는 겁니다.

 

결국 예수님 자신의 모습을 그들에게 투영시켜서 땡기는 겁니다.

 

선지자들이 거짓선지자에서 참선지자로 될 방법은 없습니다.

오로지 예수님 자신의 운명을 그들에게 투영시켜서 땡겨 빼내시는 방법 뿐입니다.


그것이 바로 사단의 가시

곧 사단을 풀어서

십자가사건을 무한반복시키는 겁니다.


그래야 미끼를 덮썩 물어야 십자가 사건이 터질것 아니겠습니까?

 

정작 사단과 예수님의 차이는 극과 극의 차이가 아니라

오히려 사단은 세가지 시험을 통해서 거짓메시아를 제시했잖아요

결국 인간은 예수님과 마귀가 제시한 거짓메시아의 차이를 구별 못합니다.

그래서 예수님 쪽에서 금을 긋는 것은

오직 단 하나

 

내적인 간극

그것도 초미세 간극

아무도 볼 수 없는

성령이라는 선물

오직 은혜받은 자만이 보는 간극

그것이 바로

 

7번 남을 용서하는 그 행함을 공격하는

770번 용서 도리어 받는 은혜라는 겁니다.
이건 보통 뻔뻔스럽지 않으면 안되는 불가능한 일이라는 겁니다.

에게! 에게! 이게 무슨 간극이고! 참으로 잘도 간극이 벌어졌네? 라고 다들 비웃습니다.
아브라함도 마찬가지 ㅋㅋㅋ

이 간극이 너무 너무 초미세여서

엘리야도 이 간극을 못 알아보기는 매 마찬가지인데

주님의 끝까지 섬김 때문에 7천명이라는 남은자를 은혜로 선물 받은 겁니다.

베드로는 세 번이라는 닭(무시받는) 울음 때문에

예수님의 사랑을 비로소 뻔뻔스럽게 입에 침 바르고 세 번씩이나 외치는 겁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께서 잘 아십니다 라고

 

7천명,
770번 용서하기가 아닌 용서 당하기,

문둥병자에게 똥물에 7번 담궈라 등등,

다들 싫어하는 십자가 용서 라는

초미세간극이다 라는 겁니다.

 

하나 마나 한

있으나 마나 한 사건

 

여기서 은혜가 나온다는 겁니다.

이 무능해 보이는 하나 마나 한 

3일 이라는 간극 속에서

은혜가 나오는 겁니다.

 

다윗도 무시했고

엘리야도 무시했고

모세도 무시했고

심지어 사도바울도 무시했던

3일이라는 간극에서

 

정작 우리를 살리는 은혜가 나오는 겁니다.

 

즉 다윗이 제발 살려주세요 라고 외치는 그 소리에

그냥 일반적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육이 생각하는 은혜로 살려줘 버리면

그것은 전혀 마귀가 시기 하지 않는 살려줌이요 은혜이기에

은혜가 아닌 가짜 은혜입니다.

 

진짜 은혜는 마귀가 요동하면서 극구거부반응을 일으키는 은혜야 진짜 은혜입니다.

 

(28:3, 개역) 악인과 행악하는 자와 함께 나를 끌지 마옵소서 저희는 그 이웃에게 화평을 말하나 그 마음에는 악독이 있나이다

 

(3:10, 개역) 한 입으로 찬송과 저주가 나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3:11, 개역) 샘이 한 구멍으로 어찌 단 물과 쓴 물을 내겠느뇨

(3:12, 개역) 내 형제들아 어찌 무화과나무가 감람 열매를, 포도나무가 무화과를 맺겠느뇨 이와 같이 짠 물이 단 물을 내지 못하느니라

(3:13, 개역) 너희 중에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가 누구뇨 그는 선행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보일지니라

(3:14, 개역) 그러나 너희 마음 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라 진리를 거스려 거짓하지 말라

(3:15, 개역)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세상적이요 정욕적이요 마귀적이니

(3:16, 개역)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요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니라

(3:17, 개역)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벽과 거짓이 없나니

(3:18, 개역) 화평케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

 

이것을 지금 누구한테 말하고 있습니까?

시편을 외운 유대인 보고 하는 말 아닙니까?

아니 시편을 기록한 다윗에게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다윗이 다윗 자신에게 말하고 있는 겁니다.

요즘으로 하면 예수 믿는다는 우리 자신에게 말하고 있는 겁니다.

 

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난다 라는 겁니다.

 

안 그런자 있냐 말이죠.

 

그럼!! 안 그런자 없기 때문에 우리를 정당화 할 수 있나요?

 

없잖아요? 그래서 찌르겠다 라는 겁니다.

사단을 풀겠다 라는 겁니다.

 

사단이라는 가시를 찌르지 않으면

우리는 이 모순에서 빠져 나올수 없다 라는 겁니다.

 

아니 그런데 그 모순에서 빠져 나오는 방법이

도리어 모순이 되는 것 같아 보이잖아요

 

바로 그겁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가시를 빼 달라고 세 번씩이나 간구 하잖아요

 

부조리 속에서 빼내는 방법이

부조리 속에 집어 넣는 겁니다.

 

한 입에서 찬송 과 저주가 나는 이 육체에서 벗어나게 하는 방법이

마귀의 가시를 찔러 넣는 겁니다.

 

그래서 미말에 둔 세상의 구경꺼리 찌그래기 쓰레기로 만드는 겁니다.

 

(고전 4:9, 개역) 내가 생각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한 자 같이 미말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8:32, 개역)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8:33, 개역)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8:34, 개역)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8:35, 개역)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협이나 칼이랴

(8:36, 개역)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8:37, 개역)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선지자의 운명은 다 이런 식입니다.

누가 봐도 인간 같지 않습니다. 진짜 인간의 참모습입니다.

오드라덱 즉 걸어다니는 좀비 걸어다니는 시체

이것이 진짜 참 인간의 모습이다는 겁니다.

 

? 가짜 인간들이 손가락질 할 수 밖에 없거든요

 

누구의 운명입니까?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그런데 이것이 예수님을 구원하시는 방법입니다.

하나님이 저들에게서 독생자를 건지시는 방법 곧 십자가라는 어리석은 지혜입니다.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도리어 모퉁이 돌로써 세워지고

정작 건축자들이 세운 집은 다 무너지는 다시는 세워지는 법이 없다 라는 겁니다.

 

(28:5, 개역) 저희는 여호와의 행하신 일과 손으로 지으신 것을 생각지 아니하므로 여호와께서 저희를 파괴하고 건설치 아니하시리로다

 

(118:22, 개역) 건축자의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21:42, 개역)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 함을 읽어 본 일이 없느냐

(12:10, 개역)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20:17, 개역) 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그러면 기록된 바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함이 어찜이뇨

(4:11, 개역)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고전 3:10, 개역)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우기를 조심할지니라

(벧전 2:7, 개역)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의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즉 주님은 기이하게도 건축자들이 버린 돌로만 모퉁이 돌로써 집을 세운다 라는 겁니다.

시온 이라는 의미는 그런 의미입니다.

그러나 장소 공간 개념을 훨씬 뛰어넘는 인물 개념이 된다는 것은

 

(28:1, 개역) [다윗의 시]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으오니 나의 반석이여 내게 귀를 막지 마소서 주께서 내게 잠잠하시면 내가 무덤에 내려가는 자와 같을까 하나이다

(28:2, 개역) 내가 주의 성소를 향하여 나의 손을 들고 주께 부르짖을 때에 나의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소서

 

반드시 울부짖는 기도로써 하나님의 집이 기능한다는 겁니다.

반드시 버림 받는 돌로써 세워진다 라는 겁니다.

 

그러니 마귀를 풀어야지요

마귀가 풀리면 풀릴수록

 

은혜가 왕 노릇함을 보게 된다는 겁니다.

은혜로만 족한다 라는 겁니다.

 

즉 내 쪽에서는 그 어떤 것도 기대할 것이 없이

다 손 탈탈탈 털리고

은혜로만 들어가는 문으로써 예수님이라는 문에

예수 안에

은혜로만 들어간다 라는 겁니다.

 

지금 이 시편을 통해서 도저히 안 보이고 도저히 안들리는 다윗이 말하는 예수님을

 

반드시 오독하고 오해하고 해석을 엉터리로 해서

“~~ 해서가 아닌 반드시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지만

그런 거짓선지자 됨 속에서

가짜인간

마귀의 숙주로써

빠져나올수 없는 그 단절 속에서

 

십자가라는 못이 못박아 균열을 일으켜서

내가 믿을만한 그 어떤 것도 다 깨뜨려서

하나님이든 십자가든 예수님이든 다 엉터리요

나의 투영으로써 믿을만해서 믿었던 것들 다 깨부셔서

 

오로지 사단의 가시를 찔러서

그 은혜로만 들어간다 라는 겁니다.

 

전혀 우리가 원했던 구원이 아니였던 거죠.

멋들어진 세상의 구경꺼리가 아닌

가족도 친지도 아내도 자녀도 다 등돌리게 하는

 

찌끄래기

똥덩어리로

 

만들어서

 

구원시키는 겁니다.

 

다윗이 아닌 다윗 속의 약속을 말입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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