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의 목소리 (시편 29)

 

내가 막즐기니 너희도 막즐길지어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10:1, 개역)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10:2, 개역) 문으로 들어가는 이가 양의 목자라

(10:3, 개역)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10:4, 개역) 자기 양을 다 내어 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 오되

(10:5, 개역)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

(10:6, 개역) 예수께서 이 비유로 저희에게 말씀하셨으나 저희는 그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니라

(10:7, 개역)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10:8, 개역)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10:9, 개역)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10:10, 개역)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10:11, 개역)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10:12, 개역) 삯꾼은 목자도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늑탈하고 또 헤치느니라

(10:13, 개역) 달아나는 것은 저가 삯꾼인 까닭에 양을 돌아보지 아니함이나

(10:14, 개역)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10:15, 개역)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10:16, 개역)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저희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10:17, 개역)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10:18, 개역)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

(10:19, 개역) 이 말씀을 인하여 유대인 중에 다시 분쟁이 일어나니

(10:20, 개역) 그 중에 많은 사람이 말하되 저가 귀신 들려 미쳤거늘 어찌하여 그 말을 듣느냐 하며

(10:21, 개역) 혹은 말하되 이 말은 귀신 들린 자의 말이 아니라 귀신이 소경의 눈을 뜨게 할 수 있느냐 하더라

(10:22, 개역) 예루살렘에 수전절이 이르니 때는 겨울이라

(10:23, 개역) 예수께서 성전 안 솔로몬 행각에서 다니시니

(10:24, 개역) 유대인들이 에워싸고 가로되 당신이 언제까지나 우리 마음을 의혹케 하려나이까 그리스도여든 밝히 말하시오 하니

(10:25,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되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거하는 것이어늘

(10:26, 개역)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

(10:27, 개역)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29:1, 개역) [다윗의 시] 너희 권능 있는 자들아 영광과 능력을 여호와께 돌리고 돌릴지어다

(29:2, 개역)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며 거룩한 옷을 입고 여호와께 경배할지어다

(29:3, 개역) 여호와의 소리가 물 위에 있도다 영광의 하나님이 뇌성을 발하시니 여호와는 많은 물 위에 계시도다

(29:4, 개역) 여호와의 소리가 힘 있음이여 여호와의 소리가 위엄차도다

(29:5, 개역) 여호와의 소리가 백향목을 꺾으심이여 여호와께서 레바논 백향목을 꺾어 부수시도다

(29:6, 개역) 그 나무를 송아지 같이 뛰게 하심이여 레바논과 시룐으로 들송아지 같이 뛰게 하시도다

(29:7, 개역) 여호와의 소리가 화염을 가르시도다

(29:8, 개역) 여호와의 소리가 광야를 진동하심이여 여호와께서 가데스 광야를 진동하시도다

(29:9, 개역) 여호와의 소리가 암사슴으로 낙태케 하시고 삼림을 말갛게 벗기시니 그 전에서 모든 것이 말하기를 영광이라 하도다

(29:10, 개역) 여호와께서 홍수 때에 좌정하셨음이여 여호와께서 영영토록 왕으로 좌정하시도다

(29:11, 개역)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힘을 주심이여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평강의 복을 주시리로다

 

(29:1, 공동) 하느님을 모시는 자들아, 야훼께 돌려드려라. 영광과 권능을 야훼께 돌려드려라.

(29:2, 공동) 그 이름이 지니는 영광 야훼께 돌려드려라. 거룩한 빛 두르신 야훼께 머리를 조아려라.

(29:3, 공동) 야훼의 목소리가 바다 위에 울려 퍼진다. 영광의 하느님께서 천둥 소리로 말씀하신다. 야훼께서 바닷물 위에 나타나신다.

(29:4, 공동) 야훼의 목소리는 힘차시고 야훼의 목소리는 위엄이 넘친다.

(29:5, 공동) 야훼의 목소리에 송백이 쩌개지고 레바논의 송백이 갈라진다.

(29:6, 공동) 레바논 산이 송아지처럼 뛰고 시룐 산이 들송아지처럼 뛴다. / 헤르몬 산을 말한다.

(29:7, 공동) 야훼의 목소리에 불꽃이 튕기고,

(29:8, 공동) 야훼의 목소리에 광야가 흔들거린다. 야훼 앞에서 카데스 광야가 흔들리고

(29:9, 공동) 야훼의 목소리에 상수리나무들이 뒤틀리고 숲은 벌거숭이가 된다. 모두 주의 성전에 모여 '영광'을 기리는 가운데

(29:10, 공동) 야훼, 거센 물결 위에 옥좌를 잡으시고 영원히 왕위를 차지하셨다.

(29:11, 공동) 야훼의 백성들아, 그에게서 힘을 얻고 복을 받아 평화를 누리어라.

 

(15:1, 개역)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

(15:2, 개역)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시고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 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

(15:3, 개역) 너희는 내가 일러 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으니

(15:4, 개역)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15:5, 개역)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15:6, 개역)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워 말라지나니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15:7, 개역)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15:8, 개역)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

(15:9, 개역)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15:10, 개역)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15:11, 개역)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

(15:12, 개역)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15:13, 개역)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15:14, 개역)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15:15, 개역)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

(15:16, 개역)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

(15:17, 개역)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명함은 너희로 서로 사랑하게 하려 함이로라

(15:18, 개역)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15:19, 개역)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 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15:20, 개역) 내가 너희더러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핍박하였은즉 너희도 핍박할 터이요 내 말을 지켰은즉 너희 말도 지킬 터이라

(15:21, 개역) 그러나 사람들이 내 이름을 인하여 이 모든 일을 너희에게 하리니 이는 나 보내신 이를 알지 못함이니라

(15:22, 개역) 내가 와서 저희에게 말하지 아니하였더면 죄가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그 죄를 핑계할 수 없느니라

(15:23, 개역) 나를 미워하는 자는 또 내 아버지를 미워하느니라

(15:24, 개역) 내가 아무도 못한 일을 저희 중에서 하지 아니하였더면 저희가 죄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저희가 나와 및 내 아버지를 보았고 또 미워하였도다

(15:25, 개역) 그러나 이는 저희 율법에 기록된 바 저희가 연고 없이 나를 미워하였다 한 말을 응하게 하려 함이니라

(15:26, 개역)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

(15:27, 개역)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증거하느니라

 

 

오늘 시편 29편은 여호와의 소리를 말하고 있습니다.

즉 음성입니다. 노래입니다.

 

인간의 찬양은 구별 분리작업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껏 한다는 짓이

자신의 목소리로 이렇게 크게 외칩니다.


그것이 바로 외적인 간극 벌리기 입니다. 나는 저 세리와 같지 않음을 하나님께 감사하다는
그런 외적인 간극 말입니다.

엘리야 선지자도 그런 외적인 간극을 안 알아준다고 여호와께 시위를 합니다.
내 열심이 특심이라고 ...

그런데 이런 외적인 간극, 육의 목소리의 시초는
성경에 나오는 최초의 노래인데

 

라멕의 노래입니다.

 

나의 두 아내 실라와 아다여 날 건드리는 놈 내가 다 죽여버렸다 라는 찬가입니다.

 

(4:19, 개역) 라멕이 두 아내를 취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며

(4:23, 개역)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창상을 인하여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을 인하여 소년을 죽였도다

(4:24, 개역)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하였더라

 

이런 가인의 족보 곧 가인의 세계에서 나오는 노래에 대조되는


상대적인 아벨 족보의 노래는

죽었더라 죽었더라 죽었더라 라는 노래입니다.

 

이게 무슨 거룩입니까? 죽었더라 곱하기 세 번 ㅋㅋㅋㅋ

이게 무슨 간극입니까? 구별입니까? 구분입니까? 갈라서기 입니까?
죽음 밖에 없는데?????
 

무슨 장난치는 것도 아니고 말이죠.

 

이것은 상대적으로 무조건 반대를 위한 반대로써의 노래인 겁니다.

가인의 족보를 겨냥한 노래이다 라는 거죠.
저들의 목소리에 대한 반대의 노래

 

그렇다면 시편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바로 여호와의 소리인데

 

여호와의 소리 곧 음성 자체가

분리와 거룩을 입히는 작업을 하고 있지

인간 자체가 자신을 거룩케 하거나

말씀을 지켜서 분리적인 존재가 되는게 아니다는 겁니다.

곧 인간의 찬양을 거부한다는 겁니다

즉 그렇다면 다윗의 찬양도 거부하고 대조되는 여호와의 목소리로써
도리어 다윗이 자신의 찬양에서 빼내임을 당해야 할 판국에 놓여진 것이
바로 여호와의 목소리로 빼내임을 당한다는 겁니다.

인간이 하나님에 대한 찬양이 아니라,

왜냐하면 저번에도 말했듯이 인간의 하나님에 대한 찬양은

곧 거룩이 없다. 단절이 없다. 차단이 없다. 차이가 없다 라는 겁니다.

 

오히려 그런 자가 도리어 이 여호와의 소리를 거부하는

목자의 양이 아니다 라는 거죠.

즉 목자의 음성 자체가 자기 양을 분별 분리 구분 거룩케 하는 작업을 벌리지

인간이 이 목자의 음성을 찾아낼수 있다는 것이 아니다 라는 겁니다.

 

이것이 관계성입니다.

여호와의 찬양으로 인해 빼내임을 당해야 할 판국
어디로 부터? 다윗 자신의 찬양으로 부터 말입니다.

 

왜? 저들은 바리새인의 의로움처럼 거룩을 갖추었지만

주님의 음성은 비로소 저들의 거룩이 거룩이 아니다 라고 하는 것일까요?


지금도 성화론자들에게 다들 속아 넘어가듯이

아무도 바리새인의 의에 대해서 안 속아 넘어간 자들이 없는데

예수님만이 비로소 저들의 의로움을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외쳤던 목소리 라는 겁니다.

 

왜 저들의 의로움은 안될까요?

바로 거룩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외적인 간극은 그들보다 뛰어난 자들이 없다고

예수님께서 바리새인 보다 낫지 아니하면 천국에 못 간다고 할 정도로

추겨 세워 높이 띄워줍니다만

사실상 이런 외적인 간극

곧 저 세리 저 더러운 세리와 같지 않음을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라는

그 외적인 간극이 거룩이 아니라

 

내적인 간극

즉 아무도 볼 수 없는 초미세 간극이

바로 7번 남을 용서하는 것과 770번 용서 도리어 받아야 함의 간극이다는 겁니다.

이 간극은 안 보입니다.

세미한 음성입니다.

 

바로 세미한 음성 들릴 듯 말 듯

아예 안 들리는 음성이

오늘 말하고자 하는 여호와의 목소리 라는 겁니다.

 

오늘 시편 기자는 자기 목소리가 엄연히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목소리를 거부하면서

타인의 목소리에 의지를 합니다.

 

이거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럼 타인의 목소리 라면 자신의 목소리 보다 더 나은 목소리이어야 활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시편기자는 지난 시간에 언급했듯이

다니엘이 환상으로 하지 않은 것은 다 엉터리라고 했듯이

오직 성령으로 한다고 했습니다.

그럼 아무리 자기 보다 좋은 목소리

가치있는 목소리

권력있는 목소리 로써의 타인이 아니라

인간 중에는 없는 목소리를 그는 들었기에

자기 목소리, 인간의 목소리를 철회하면서

그의 목소리 그의 음성에 귀를 기울인다 라는 겁니다.

 

자기 목소리가 엄연히 멀쩡하게 있는데

자신을 벙어리로 취급해 버리고

심지어 모든 인간의 목소리를 벙어리로 취급해 버리고 듣는다는 것은

묵시가 쳐들어 오지 않으면 안되는 시선으로써의 사유인 겁니다.

 

그래서 듣게 되는 목자의 음성이다 라는 겁니다.

 

참 재미있는 것이

 

(10:3, 개역)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10:4, 개역) 자기 양을 다 내어 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 오되

 

(10:27, 개역)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양이 목자의 음성을 안다고 합니다.

저는 이 부분이 신비합니다.

 

왜냐하면 목자가 양을 안다 라는 표현을 안 쓰고

양은 목자를 안다 라고도 안쓰고

양은 목자의 음성은 안다 라고 합니다.

 

즉 양이 먼저 선택권이 있는냥 주체로써 먼저 나오고

뒤에 그 선택의 대상으로써 목자가 아닌 목자의 음성이 대상 소문자 a로 나온다 라는 거죠.

 

결국 주체는 양인 듯 보이나 대상 소문자 a가 모든 주체로써 나온다 라는 겁니다.

 

왜 이럴까요? 차라리 처음부터 목자의 음성이 주도권을 쥔듯냥 말하지 않고

꼭 양의 대상물로써의 목자의 음성이라고 하는 이유는

 

내적 간극 때문이다 라는 겁니다.

 

즉 다른 목자와의 차이라는 것이 드러나는 겁니다.

요한 복음에는 그 다른 목자를 삯꾼 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삯꾼목자와의 차이점은

 

참으로 신비하게도 자기목숨을 버리는 목자라는 겁니다.

이것이 보통 신기한게 아닙니다.

곧 목자의 음성, 곧 목소리는 자신의 목숨을 버리는 것으로써 양과의 관계를 주장한다 라는 겁니다.

 

우리는 각기 제 길로 가는 양 맞지만

그런 망아니 양 임에도 불구하고

자기 목자 만큼은 알아보는 그 관계는

바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써의 목자요

목자의 음성이다 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십자가의 죽음을 말하지 못하는 목자는 결국 가짜이다 라는 거죠.

 

또 바리새인들은 당연히 자기 의로움만 외적으로 완벽하게 갖추었지만

십자가의 죽음과는 전혀 상관이 없었으니 독사의 자식이 맞지만

 

오늘날은 그럼 어떻게 구별을 하냐 말이죠.

삯꾼목자들도 십자가를 외치지 않으면

돈이 안되기 때문에

교회를 운영하고 이끌고 갈려면 십자가를 외칠 수밖에 없다 말이죠.

 

그럼 성도들의 입장에서 무슨 수로 이 삯꾼을 알수 있냐 말이죠.

 

그것은 간단합니다.

 

교회에 관심이 없다면

당연히 그는 복음 때문에 죽을려고 환장한 자이다 라는 겁니다.

결국 교회에 빠진 자들과 충돌되는 사건이 발생 할 수 밖에 없는 겁니다.

이것은 결국 내적인 간극이 되는 겁니다.

 

지난 주에 말했듯이

사도가 은혜만을 주장하기 위해서

사탄의 가시를 빼는게 아니라

도리어 은혜 때문에 사탄의 가시가 박힌 채로 간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다들 이 사람이 사단이 씌인자인지? 아니면 은혜가 씌인자인지를 알 길이 없게 되는

모호한 모습이다는 겁니다.

분명 말은 말씀 전파 내용은 십자가인데

정작 외적인 것은 본인이 그 사단을 이기지 못하고 잠식당한채로 있다면

사람들은 모호할 필요가 없이 다들 떨어져 나가버리는 겁니다.

 

저번에도 언급한 적이 있는데

천기누설 이라는 프로그램이였던가요?

어떤 목사가 A형인지 B형인지 모르지면 간염환자인데

중형 교회에서 담임으로 있는데

쓸쓸 다 빠져나가버리는 겁니다.

나가면서 목사님이 싫어서가 아니라

아이들이 걱정이 되어서 그러니 죄송합니다 라고 다 빠져나가 버리는 거죠.

 

결국 목회를 그만 두고 자기 병 고친다고 농사를 지어서

자신과 같은 사람을 위해 병 회복이 되는 일을 하게 되었다는 내용으로 나오던데

 

그것을 보면서 그가 십자가의 복음을 증거했는지 안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주님께서 빼내시는 작업을 보여주는 겁니다.

 

여기서 모호성이라고 했는데

더 정확한 번역은 양가성

곧 사단의 가시를 뺀게 아니라 사탄의 가시가 박힌 채로 은혜가 증거되는

이 양립불가의 서로 대조적인 것이 하나의 신체 속에 있을때에

오히려 은헤 라는 겁니다.

즉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이시듯

이 얼발란스가 공명을 이루는 하나 됨 한 몸 일치성이다 라는 겁니다.

분명 외적으로는 양가성(모호성)인데 한 몸이고

 

오히려 누가 봐도 일치성을 추구한 바리새인은

정작 일치는커녕 그것도 가장 적대적인 너희 아비는 마귀다 라는 식으로

들추어지는 겁니다.

외적인 간극이 너무 너무 또렷하기 때문에

그 외적인 간극이 하나가 아니라

도리어 적대성을 제대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라는 겁니다.

 

라멕의 노래도 그런 식인 거죠.

 

무슨!! 죽었더라 족보인 아벨의 족보가 어떻게 말을 하느냐 말이죠.

 

(11:4, 개역)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한다고 합니다.

증거한다. 외친다. 목소리를 내고 있다 라는 식으로 말입니다.

 

자 이렇게 참목자의 음성이 요한복음에서 증거되듯이

시편 기자는

자기 목소리의 상실 곧

제발 살려주세요 라는 외침에 대한 응답이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라는 음성으로 인해

구지 자신의 목소리를 높일 하등의 이유가 전혀 없게 되어버린 겁니다.

그냥 770번 용서 받기만 할 뿐이고

주님의 노래를 듣기만 할 뿐이다 라는 겁니다.

 

목자의 음성이 다 알아서 처리한다 라는 겁니다.

 

이 음성이 바로 창조 때의 있으라 라고 외친 그 음성이요

모든 만물을 지은 음성이요

그 어떤 힘보다 더 큰 능력의 목소리 이다 라는 겁니다.

 

분명 안 들리는 [없음] 취급 당하는 세미한 음성인데도 불구하고

그 어떤 음성 보다도 더 큰 음성으로써의 세미한 음성이다 라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목소리

 

곧 복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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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 자는 더 받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불평등(부익부 빈익빈), 부당함, 부조리 로써의 잉여흐름(성령의 흐름)

허브, 교착점, 간극, 항공허브, 불공평 네트워크


(마 13:12, 개역)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무릇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마 25:29, 개역)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막 4:25, 개역) 『있는 자는 받을 것이요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눅 19:26, 개역) 『주인이 가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릇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평등에 대한 부르주아 논리의 한계에 대한 맑스의 근본적인 통찰을 상기하자. 자본주의적 불평등(착취)은 평등 원칙의 무원칙한 부당한 위반이 아니라, 전적으로 평등의 논리에 속해 있는 내재성의 문제이다. 그 불평등은 자본주의적 평등의 일관된 실현의 역설적 결과물이다. - 시차적 관점 638p

KBS 창의인재 프로젝트 생각의 집 정하웅교수, "복잡한 세상과 네트워크"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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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즐기니(누리니), 너희도 즐길(누릴)지어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벧전 1:16, 개역) 『기록하였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

(벧전 1:10, 개역)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벧전 1:11, 개역)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얻으실 영광을 미리 증거하여 어느 시,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
(벧전 1:12, 개역) 『이 섬긴 바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임이 계시로 알게 되었으니 이것은 하늘로부터 보내신 성령을 힘입어 복음을 전하는 자들로 이제 너희에게 고한 것이요 천사들도 살펴 보기를 원하는 것이니라』
(벧전 1:13, 개역)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올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
(벧전 1:14, 개역)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이전 알지 못할 때에 좇던 너희 사욕을 본 삼지 말고』
(벧전 1:15, 개역)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벧전 1:16, 개역) 『기록하였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
(벧전 1:17, 개역)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판단하시는 자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의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벧전 1:18, 개역)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벧전 1:19, 개역)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
(벧전 1:20, 개역) 『그는 창세 전부터 미리 알리신 바 된 자나 이 말세에 너희를 위하여 나타내신 바 되었으니』
(벧전 1:21, 개역) 『너희는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영광을 주신 하나님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는 자니 너희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 있게 하셨느니라』
(벧전 1:22, 개역)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하라』
(벧전 1:23, 개역)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벧전 1:24, 개역)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벧전 1:25, 개역)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레 11:43, 개역) 『너희는 기는바 기어다니는 것을 인하여 자기로 가증하게 되게 말며 또한 그것을 인하여 스스로 더럽혀 부정하게 되게 말라』
(레 11:44, 개역) 『나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몸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하고 땅에 기는바 기어다니는 것으로 인하여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레 11:45, 개역)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레 11:46, 개역) 『이는 짐승과 새와 물에서 움직이는 모든 생물과 땅에 기는 모든 기어다니는 것에 대한 규례니』
(레 11:47, 개역) 『부정하고 정한 것과 먹을 생물과 먹지 못할 생물을 분별한 것이니라





바리새인 보다 낫지 아니하면

(마 5:17, 개역)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
(마 5:18, 개역)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마 5:19, 개역)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마 5:20, 개역)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그럼 바리새인 보다 더 나아야 한다는 말인가? 어머니께서 질문하셨다.

네 그럼요 그럼요. 바리새인 보다 더 낫지 아니하면 지옥이예요.


즉 처음부터 불가능한 말만 성경에 기록되었다.
성경은 전부 불가능한 말만 적었다.

사람은 할 수 없으나 하나님은 능히 하시는 일만 말이다.

그래서 하나 마나 한 소리로만 들릴 뿐이다.


(눅 18:23, 개역) 『그 사람이 큰 부자인고로 이 말씀을 듣고 심히 근심하더라』
(눅 18:24, 개역) 『예수께서 저를 보시고 가라사대 재산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떻게 어려운지』
(눅 18:25, 개역)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신대』
(눅 18:26, 개역) 『듣는 자들이 가로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나이까』
(눅 18:27, 개역) 『가라사대 무릇 사람의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느니라』
(눅 18:28, 개역) 『베드로가 여짜오되 보옵소서 우리가 우리의 것을 다 버리고 주를 좇았나이다』
(눅 18:29, 개역)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자는』
(눅 18:30, 개역) 『금세에 있어 여러 배를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하시니라』


인간 중에 최고의 달인들이 바리새인이다.

그런 바리새인을
가장 높게 의도적으로 높이는 이유는
사실은 가장 비하 시키는 의미이다.
독사의 자식들이기 때문에 그들의 아비는 마귀다.


바리새인 보나 더 나을 생각 하지 말라고

즉 바리새인의 의로움 보다 더 나은 의를 너에게 주기 위해
내가 바리새인을 타넘어서 너에게로 넘어가겟다 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리새인들이 하는 행동 곧 외적인 간극이 아니라

예수님의 내적인 간극 
즉 보일라 말라
하나 마나 한 
있으나 마나 한
듣낄듯 말듯 한
세미한 음성으로 다가오시는


7천명 남은자, 7에 70의 용서하심이다.
곧 은혜의 간극이다.
단절 곧 행함의 간극(외적)과 반대되는 차단의 간극이다.


그러나 인간들은 바리새인처럼 외적인 간극
남을 7번 용서하겠다는 그 악마성으로 간극을, 거룩을 이룰려고 한다.


그러나 주님의 거룩은

내가 막사니까 너희도 막살아라
내가 즐기니까 너희도 막즐겨라 이다.


즉 이 말은 절대로 막살지 않았다 라는 탕자의 형 맏아들을

뛰어 넘어서

맨발로 집 밖에서 탕자를 기다리는 아버지의 사랑이다.


아버지의 편파적인 용서의 여부에 달린
긍휼을 베푸심이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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