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의 목소리]와 [진노 속의 구원] (시편 29)

 

(29:1, 개역) [다윗의 시] 너희 권능 있는 자들아 영광과 능력을 여호와께 돌리고 돌릴지어다

(29:2, 개역)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며 거룩한 옷을 입고 여호와께 경배할지어다

(29:3, 개역) 여호와의 소리가 물 위에 있도다 영광의 하나님이 뇌성을 발하시니 여호와는 많은 물 위에 계시도다

(29:4, 개역) 여호와의 소리가 힘 있음이여 여호와의 소리가 위엄차도다

(29:5, 개역) 여호와의 소리가 백향목을 꺾으심이여 여호와께서 레바논 백향목을 꺾어 부수시도다

(29:6, 개역) 그 나무를 송아지 같이 뛰게 하심이여 레바논과 시룐으로 들송아지 같이 뛰게 하시도다

(29:7, 개역) 여호와의 소리가 화염을 가르시도다

(29:8, 개역) 여호와의 소리가 광야를 진동하심이여 여호와께서 가데스 광야를 진동하시도다

(29:9, 개역) 여호와의 소리가 암사슴으로 낙태케 하시고 삼림을 말갛게 벗기시니 그 전에서 모든 것이 말하기를 영광이라 하도다

(29:10, 개역) 여호와께서 홍수 때에 좌정하셨음이여 여호와께서 영영토록 왕으로 좌정하시도다

(29:11, 개역)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힘을 주심이여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평강의 복을 주시리로다

 

 

시편 29편을 새롭게 올리겠습니다.

토요일에 글을 올리고 난 뒤에

잠 자기 바로 전에 다시 한번 살펴봤습니다.

 

어 그런데 제게 새롭게 보인 부분이 있었는데

분명 번역 본에는 암사슴의 잉태로 보였는데

다시 보니 낙태였습니다.

(시 29:9, 개역) 『여호와의 소리가 암사슴으로 낙태케 하시고

 


아마 제가 안면 인식 장애가 있듯이 난독증 때문에 글자가 다르게 보였나 봅니다
.

아 그렇다면 새로운 관점에서 다시 봐야겠구나

 

이 전 글은 그럼 틀렸느냐

구지 그렇게 볼 필요까지는 없고

더욱 풍성하게 보게 된 것이

여호와의 목소리가 포인트로 잡았는데

지금 보니 진노 절망 심판 저주 낙태 벌거벗김이라는 더 좋은 포인트가 있어서

그 관점에서 다시 볼려고 합니다.

여호와의 목소리가 바로 진노 속에서 세미한 음성으로 들린다는 겁니다.

마치 십자가는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걸림돌의 표적으로써
이방인에게는 어리석고 미련한 지혜로써 들리는 겁니다.

사랑은 죽음 보다 강하기에
죽음 속에서 펼쳐지는 것이 사랑이다는 겁니다.

복음 곧 주의 음성은 바로 십자가 라는 저주 속에서 펼쳐진다는 겁니다. 

여호와의 목소리가 진노 속에서 심판 속에서 구원의 기능을 펼치는 겁니다.

 

(29:2, 개역)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며 거룩한 옷을 입고 여호와께 경배할지어다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거룩한 옷을 입으라 라고 합니다.

이것은 그 유명한 아들을 위한 임금님의 혼인잔치 비유에서 잘 볼 수가 있습니다.

말이 분명 혼인 잔치인데

실상은 그야말로 공포 잔치입니다.


시편 29편에서는 그 거룩이 바로 물위에서, 낙태 속에서, 삼림의 발가벗김 속에서. 물 위, 많은 물 위에서, 광야의 진동 속에서 등등
거룩이 그런 단절 속에서 펼쳐진다는 겁니다.

마치 사단의 가시를 통해서 더더욱 은혜를 은혜답게 하듯이
오늘 본문은 영광이 이런 저주와 낙태 심판 등등으로 인해 더더욱 영광이 되게 한다는 겁니다.
도통 이해 불가능한 소리입니다.

왜 악을 허용하는가? 은혜를 더욱 더 은혜 답게 하기 위해서 라는 겁니다.
 

즉 엽기적인 살인잔치 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혼인잔치인 이유는

결혼을 설명하는데 있어서 이것보다 더 좋은 비유가 없다 라는 겁니다.


구원을 설명하는데 이것 보다 더 좋은 비유가 없는 겁니다.
영광을, 거룩을, 은혜를 설명하는데 있어서 말입니다.

오늘 본문은 여호와의 목소리를 설명하는데 있어서 말이죠.

이 주의 음성, 목자의 음성은 토요일 글 올린것 보시면 되고,
 

사랑이란 그야 말로 폭력입니다.

폭력 없는 폭력으로써의 사랑이다 라는 겁니다.

모든 것을 다 빼앗지 않으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라는 겁니다.

나의 모든 전권을 다 장악할 수 있는 사랑이어야

그 신랑은 신부와의 결혼이 성사 된다 라는 겁니다.

 

혼인잔치 비유가 엽기적인 살인잔치 비유이지만

 

이런 것을 유시민 씨는 저게 무슨 사랑의 신이냐 라고 비웃지만

인간들이 말하는 사랑은 실상은 악마성이니까

그 악마성을 해결하지 못하는 폭력적인 사랑이 아니면

죽기를 무서워 평생 마귀의 종노릇 하게 되는 거죠.

 

그들은 이성으로 충분히 인간이 할 수 있다고 합니다.

아니 그런데 인공로봇에게는 살살 하자 라고 말하니 웃기잖아요


인간이 정작 창조주가 되어 피조물을 만드니까 이것이

인간 자신을 투영한 악마였던 겁니다.

이 악마가 더 인간 보다 뛰어난 존재가 되니까

도리어 죽음이라는 공포가 덮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 친하게 지내면서 살살 하자 라고 합니다.

 

그것도 공포일까요?

뇌과학자 김대식 교수는 그래서 2049년 까지만 살겠다고 자살을 암시하는 발언을

너무 너무 자주 말하고 있습니다. 안봐도 뻔한 비디오다 라는 거죠.
뭐 그 나이 정도 쯤이면 충분히 살았다 라고 자평하는 거죠.

이미 공포가 덮친 겁니다.

 

그런데 그건 공포도 아닙니다.

진짜 공포는 뭔 줄 아십니까?

 

십자가의 공포입니다.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누가 꾀더냐 라는 겁니다.

이 사랑의 공포 보다 더 끊을 수 없는 공포는 없습니다.

넉넉한 공포요 넉넉히 이기는 공포입니다.

 

오늘 본문은 여호와의 목소리가 사실은 사랑으로써의 공포이다 라는 겁니다.

 

암사슴을 낙태케 하는 것이

이 음파 음성 이다는 겁니다.


목소리가 무슨 낙태케 합니까?

그런데 여호와의 목소리는 살리기도 죽이기도 하는 심판의 기준이 된다는 겁니다.
 

말 한 마디에 모든 운명이 좌우 된다는 이 공포정치

 

사람은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 산다고 했습니다.
여호와의 목소리로 사는 겁니다.

 

유대교는 경제적인 상징계로써 마귀의 3가지 시험 속에서 잘 나타납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정치적인 실재계로써 그야말로 공포 그 자체인 십자가 이다는 겁니다.

 

십자가는 다 이루었도다 라는 여호와의 목소리를 남겼습니다.

 

이 음성으로 모든 운명이 결정나 버렸습니다.

 

이 목자의 음성이 듣기 싫어서 도망쳤지만

절대로 벗어날 수 없는 사랑인 겁니다.
끊을 수 없는 사랑입니다.

(롬 8:35, 개역)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협이나 칼이랴』

(롬 8:36, 개역)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롬 8:37, 개역)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롬 8:38, 개역)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롬 8:39, 개역)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29:3, 개역) 여호와의 소리가 물 위에 있도다 영광의 하나님이 뇌성을 발하시니 여호와는 많은 물 위에 계시도다

 

저는 물 위에 있도다, 많은 물 위에 계시도다 라고 했을때에 무슨 소리인가 했더니

 

바로 출애굽 사건의 홍해를 기억하시면 됩니다.


물은 심판이자 곧 세례 연합입니다. 심판 속에서 구원이다는 겁니다.
 

즉 구원자의 음성이 물 위에 있다 라는 겁니다.

물은 심판이요 진노입니다.

그 물 위에 이스라엘과 애굽인이 같이 놓여지게 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뭘 해도 무조건 용서로써 물 위의 여호와의 목소리를 맞이하게 되고

애굽인은 뭘 해도 무조건 미움받는 그릇으로써 물 위의 여호와의 목소리를 만나게 되는 겁니다.

 

즉 이 경계선에 놓여진 자가 바로 여호와의 목소리 이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생명과 죽음을 좌우하는 것은

 

나의 경제력이나

돈으로 사서 먹는 떡에 달려있는 것이 생명이 아니다 라는 겁니다.

 

물론 인간은 이미 잠식된 상태라서 마귀의 숙주로써

반드시 먹어야만 산다는 세계 속에 갇혀삽니다만

주님은 그런 인간을 가지고서

부스러기라는 먹을 것으로

더 나은 양식을 주님께서 증거하고 계십니다.

 

그것이 바로 내 살과 피 라는 겁니다.
유월절 어린양의 피 라는 겁니다.

 

내(예수님)가 죽어서 그 떡이라는 연결고리를 끊어

나의 살과 피 라는 긍휼을 먹지 않고서는 살수 없도록 하셨다 라는 겁니다.

 

물론 우리는 이 사단의 가시와 같은 떡을 뽑아낼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 보다 더 나은 주님의 살과 피 라는 긍휼을 먹음으로써

주님의 세계가 있다 라는 것에

주님께서 친히 마련하신 세계가 있다 라는 겁니다.

 

이번 주에 어머니와 예배를 드리면서

 

선지자에 대해서 언급했는데

선지자는 반드시 자기 고향에서 버림받는다

반드시 자기 고향에서 환영을 받는 자는 없다.

싫어버림 받는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원하고 고대하고 좋아하는 것을 말해달라고 아무리 외쳐도

거기에 대해 호응을 절대로 해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 두 번째로 선지자 하면 무슨 생각이 떠오르냐 하면

기이하고 신비한 것을 제시 한다 라는 겁니다.

즉 다른 말로 하면 선지자 본인도 이게 무슨 의미인줄 잘 모르는 때가 많을 정도로

오로지 성령으로만 묵시로만 계시로만 일한다 라는 겁니다.

그러니 해석불가가 되는 겁니다.

인간이 단 한 번도 격어본 경험이 없는 완전 새로운 낯설기 짝이 없는 것만 들이대는 겁니다.

 

요즘 광고에 이상하자 이상하자 라는 광고가 나오는데

처음 것이기 때문에 기존의 시선을 깨뜨리면서 오기 때문에 낯설고 기이하게 느껴지는 겁니다.

물론 이것도 경험화 육체화로 자꾸 인식이 반복이 되면

다시 이 잉여성을 깨뜨리고 새로운 잉여성으로 전복이 되겠지요.

그럼 이미 낡은 동앗줄을 붙잡는 자들이 반드시 생길테고

새로운 동앗줄로 갈아타는 자도 생긴다 라는 겁니다.

 

그러니 이런 잔여적인 사건 조차도 다 기이하다 라는 겁니다.

 

그 다음 세 번째로 선지자가 하는 일은 바로 평탄케 하는 겁니다.
평탄이란 평화를 이룬다는 화평 화평을 외치는 거짓선지자의 평화가 아닙니다.
도리어 소동과 진노와
오늘 본문의 내용인 심판을 말하는 겁니다. 단절성인 거죠.

 

주의 첩경을 예비하라 라고 했을때에

첩첩산중의 굴곡을 다리미질로 다려놓으면 거기에 선 자들은 다 미끄러 지는 겁니다.


그 다음 움푹파인 호수나 강도 다 매꾸어서 평평케 함으로써

억울하다 라고 자신이 피해자 다 라는 자도 없도록 한다 라는 겁니다.
즉 모든 인간이 예수님을 죽인 가해자 이다 라는 겁니다.

 

오로지 우리는 미끄러지고 자빠지고

오늘 본문에 나오는 벌거벗음 당해 부끄 부끄 부끄 당하는 일만 남았을 뿐이다 라는 겁니다.

머리에 숯불을 얻어 놓으면 머리가 뜨거워서 얼굴이 빨개 부끄러운 새색시 마냥
부끄 부끄 부끄럽게 만드시는 일이 성령이다 라는 겁니다,

(롬 12:20, 개역)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즉 오로지 원수를 사랑하시는 그 사랑으로만 사랑을 증거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의도적으로 원수로 만드시는 겁니다.
죄인 중의 괴수로써 말입니다.

죄인 중의 괴수 만이 오늘 본문이 왜 영광이 되는지를 아는 겁니다.
많이 탕감 받은 자가 많이 사랑하거든요.

(눅 7:42, 개역)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저를 더 사랑하겠느냐』

(눅 7:43, 개역) 『시몬이 대답하여 가로되 제 생각에는 많이 탕감함을 받은 자니이다 가라사대 네 판단이 옳다 하시고』



결국 선지자란 즉 성령은 오로지 이것만 주장합니다.

 

(4:1, 개역) 예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 강에서 돌아오사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성령에게 이끌리시며

(4:2, 개역)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더라 이 모든 날에 아무 것도 잡수시지 아니하시니 날 수가 다하매 주리신지라

(4:3, 개역) 마귀가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 돌들에게 명하여 떡덩이가 되게 하라

(4:4,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기록하기를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였느니라

(4:5, 개역) 마귀가 또 예수를 이끌고 올라가서 순식간에 천하 만국을 보이며

(4:6, 개역) 가로되 이 모든 권세와 그 영광을 내가 네게 주리라 이것은 내게 넘겨 준 것이므로 나의 원하는 자에게 주노라

(4:7, 개역) 그러므로 네가 만일 내게 절하면 다 네 것이 되리라

(4:8,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기록하기를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4:9, 개역) 또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여기서 뛰어 내리라

(4:10, 개역) 기록하였으되 하나님이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사 너를 지키게 하시리라 하였고

(4:11, 개역) 또한 저희가 손으로 너를 받들어 네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시리라 하였느니라

(4:12,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말씀하기를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하였느니라

(4:13, 개역) 마귀가 모든 시험을 다 한 후에 얼마 동안 떠나니라

(4:14, 개역) 예수께서 성령의 권능으로 갈릴리에 돌아가시니 그 소문이 사방에 퍼졌고

(4:15, 개역) 친히 그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시매 뭇 사람에게 칭송을 받으시더라

(4:16, 개역)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자기 규례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4:17, 개역)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한 데를 찾으시니 곧

(4:18, 개역)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4:19, 개역)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4:20, 개역) 책을 덮어 그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시니 회당에 있는 자들이 다 주목하여 보더라

(4:21, 개역) 이에 예수께서 저희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하시니

(4:22, 개역) 저희가 다 그를 증거하고 그 입으로 나오는 바 은혜로운 말을 기이히 여겨 가로되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4:23, 개역)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반드시 의원아 너를 고치라 하는 속담을 인증하여 내게 말하기를 우리의 들은 바 가버나움에서 행한 일을 네 고향 여기서도 행하라 하리라

(4:24, 개역) 또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가 고향에서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

(4:25, 개역)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세 해 여섯 달을 닫히어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되

(4:26, 개역) 엘리야가 그 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

(4:27, 개역) 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문둥이가 있었으되 그 중에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뿐이니라

(4:28, 개역) 회당에 있는 자들이 이것을 듣고 다 분이 가득하여

(4:29, 개역) 일어나 동네 밖으로 쫓아내어 그 동네가 건설된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쳐 내리치고자 하되

(4:30, 개역) 예수께서 저희 가운데로 지나서 가시니라

 

 

주의 은혜가 너희에게 임했다 라고 하니까

사람들은 육적인 자신의 안목시선을 절대로 놓을수가 없는 겁니다.

 

지금 영의 이야기를 하는데

은혜의 세계를 말씀하시는데

주의 음성이 말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비로소 물 위에서의 주의 목소리로 인해 두 패로 갈라지는 겁니다.

 

육이 튀어나오는 겁니다.

 

? 너 요셉의 아들 아니냐?

너의 출생지는 나사렛 아니냐

나는 너 잘 알고 너의 아비도 내가 잘 안다 라는 식입니다.

 

즉 고향사람이다 라는 겁니다. 육적인 출생의 비밀을 다 안다는 겁니다.

그러니 그 선지자를 어릴적부터 사촌의 언니 고모 사돈 팔촌까지 다 아는데

선지자 노릇을 하고 돌아다닌다고 하면 말릴까요? 안 말릴까요?

 

심지어 예수님의 친척들은 제발 제발 빈다. 이제 더 이상 이런 미친짖좀 그만하고

제발 고향 집으로 돌아가자 라고 가는 곳곳 마다 따라다면서 말리는 겁니다.

 

그 정도로 어릴 적부터 잘 안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고향사람들로부터 환영을 못 받는 것은 당연하지요

 

여기에다 업친데 덥친격으로

? 가버나움에는 기적을 많이 행하는데

니 고향에서는 행하지 않느냐 라고

 

저들의 속담을 가지고 저들이 시비를 거는게 아니라

예수님이 미리 그럴줄 알고 예수님이 도리어 언급을 하십니다.

 

왜 가버나움에서처럼 고향에는 축복을 안 주냐?

왜 기적을 안 주냐?

 

아니 가버나움이 축복받았고 기적을 받은 겁니까?

기적을 베푼 이유는

소돔과 고모라 보다 더 견디기 어려운 심판을 퍼붓기 위함이다 라는 겁니다.

 

자기 유익이 된다는 기적은 탐나서 왜 고향에는 기적 안 베풀고

가버나움에는 기적을 주느냐?

각성하라 각성하라 라고 데모를 한다는 거죠.

 

기적이 과연 좋은 것일까요?

있는데 더 받는 것을 바라는 겁니다.

 

그래서 고향에서도 아니고 즉 유대인이지요

그 다음 가버나움도 아니고 즉 기적을 가장 많이 행하신 곳이지요.

 

그럼 이 은혜의 해가 어디로 가는 겁니까?

 

참 하나 뺴먹은 것 있는데

선지자 하면 가장 첫 번째로 생각하는 것이

보냄을 받았다 라는 겁니다.

가장 중요한 것인데 빼먹었네요 헤헤

 

그럼 누구 한테 보냄을 받은 겁니까?

가버나움도 아니요

그럼 기적 행할려고 선지자가 보냄을 받은게 아니다 라는 거죠.

 

그 다음 고향도 아니요

즉 환영 받기는커녕 처음부터 선지자는 버림받고 싫어버림 받을려고 환장한 모습인 겁니다.

완전 정반대인 겁니다.

 

그럼 이 둘이 아니면 누꼬?

 

바로 이 은혜의 해가

주의 성령이 내게 임했으니

가난한 자에게 부요케 함을

눈먼 자에게 보이게 함을

포로된 자에게 자유케 하기 위한

보냄을 받았는데

 

이 둘의 세계로부터 저주 받은 자로 취급되는

 

한 과부 사렙다 여인과

 

한 문둥병자 나아만 장군에게만

 

보냄을 받았다 라는 겁니다.

 

성령은 받은 선지자는 이들에게만

즉 긍휼이 필요 없는 자들 말고

그야 말로 긍휼 아니면 저 살수 없다 라는 이 딸란 한 명에게만 보냄을 받았다 라는 겁니다.

 

주의 음성이 누구에게만 들리느냐?

원수에게서 죽임을 당하는 자에게만

 

곧 다윗에게만 여호와의 목소리가 나타난 겁니다.

 

즉 다윗은 지난 시간처럼 사단의 가시를 뺄수 없는

진노 속에 심판 속에

저주 속에 놓여졌음에도 불구하고

여호와의 목소리가 찾아온 겁니다.

 

그 자에게만 주의 음성이 들리는 겁니다.

 

다니엘이 불 속에 들어가게 되니까?

친구들과 어떤 낯선이와 함께 춤추고 노래를 부르게 되는 겁니다.

불 바깥에서는 나타나지 않는 분이다 라는 겁니다.

 

원해서 들어가게 된 것이 아니지요.

십자가 라는 죽음이요, 공포요, 저주요. 진노 속에

사람들에게

원수들에게 등 떠밀려 들어가게 되었는데

정작

내 은혜가 네게 족한

넘치는 은혜가 있는 곳이였다 라는 겁니다.

누구 때문에?

 

여호와의 목소리

예수님의 외침

주의 음성 때문에 말입니다.

 

결국 경계선에 놓이는 이 진짜 음성만이

분리라는 구별이라는 제대로 된 경계선을 긋는 겁니다.

모호하고 흐릿한 것들이 이제는 또렷이 구별되는 겁니다.

 

창조란 결국 이 여호와의 목소리가 경계선에 놓여서(미끼) 제대로 구별케 하는 겁니다.
은혜(거룩)로 창조된 세상은 이렇게 인간의 행함을 거부하면서 그 창조성을 은혜성을 더욱더 풍성케 나타나는 겁니다.

내가 거룩(은혜)하니 너희도 거룩(구별, 은혜)할 지어다.



십자가의 공포정치



정치란 지극이 기독교 적이다. 실재계다.
반대로 경제는 지극히 유대교적 이다. 즉 상징계다.


이 둘은 반드시 맛물리면서 돌아간다. 
늘 새로운 판을 짜고, 그로인해 사건이 발생한다.


똥물에 일곱번 몸을 담구면 피부병인 문둥병이 낫는다는 것이다.

이 말은 니가 똥물에 피부병 걸린 몸이 더러워 지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너의 죽음의 피부병이 똥물을 더 더럽힌다는 것이다.


시선을 반대로 보라는 것이다.
너가 똥물을 인식하는 주체가 아니라
반대로 똥물에 너를 불쌍히 여져주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주체는 똥물(정치)이다. 똥물이 나(경제)를 판단하는 것이다.

나는 주체도 아니면서 똥물을 해석할 권리가 처음부터 없었습니다.
오히려 반대로 똥물이 나를 해석해 주어야 할 판국인 겁니다.

긍휼을 아는 자 곧 긍휼의 그릇은
시선을 반대로 보는 자이다.


닭이 세번씩이나 울어야만 베드로는 건짐받는 것이다.
베드로가 주체가 아닌 닭이 주체이다.
그 동안 내가 늘 무시했던 닭이 말이다.

이렇게 대신 울어주는 긍휼을 베푸는 자가 없다면


너는 너의 시선으로 똥물을 더럽다고 인식하는 그 시선 때문에 지옥간다는 것이다.
똑같은 시선으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께서 오셔야만 했는가?


사탄아 너는 사람의 일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않는구나!!


똥물 덕분에, 세번 우는 닭 때문에
하나님의 일의 시선에서 새롭게 자신을 보는 것이다.


맞다 나는 뭘 해도 죄인 중의 괴수일 뿐이다.


내가 현미경으로 벌레는 관찰하는게 아니라
벌레가 나 같은 죄인을 현미경으로 감찰하는 것이다.


주체는 벌레다.

즉 너는 나을 자격이 없다 라는 것이다. 
너가 똥물 보다 더 더러운 죄인이다는 것이다.


이로소 공포는 사라진다.


괴물은 메르스가 아니라 너다 너 ~~~


다윗이 자신감 충만하게 당당하게 외친다.
당장 그 놈을 율법 대로 4배나 징계해라 ~~~


나단 선지자는 너가 그놈이야 너야 너


뭐? 7번 남을 용서하겠다고?
너야 너


너가 도리어 7에 70번 용서 받아야 해


이것이 십자가 사랑의 공포 정치다.


폭력 없는 폭력이요. 공포 없는 공포정치이다.


맞습니다 주여 저 개 맞습니다. 그러나 개도 주인의 밥상에서 떨어진 부스러기를 먹지 않습니까?


주여 불쌍히 여겨주소서 ~~~


(마 15:21, 개역) 『예수께서 거기서 나가사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시니』
(마 15:22, 개역)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질러 가로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들렸나이다 하되』
(마 15:23, 개역)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보내소서』
(마 15:24,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신대』
(마 15:25, 개역)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마 15:26, 개역) 『대답하여 가라사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마 15:27, 개역) 『여자가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마 15:28, 개역)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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