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시편 30)

 

도저히 잠잠할 수가 없다, 잠잠치 아니하며 주를 찬송케 하심이라

 

성전언약의 완성


 

(30:1, 개역) [다윗의 시, 곧 성전 낙성가] 여호와여 내가 주를 높일 것은 주께서 나를 끌어내사 내 대적으로 나를 인하여 기뻐하지 못하게 하심이니이다

(30:2, 개역)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부르짖으매 나를 고치셨나이다

(30:3, 개역) 여호와여 주께서 내 영혼을 음부에서 끌어내어 나를 살리사 무덤으로 내려가지 않게 하셨나이다

(30:4, 개역) 주의 성도들아 여호와를 찬송하며 그 거룩한 이름에 감사할지어다

(30:5, 개역) 그 노염은 잠간이요 그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기숙할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

(30:6, 개역) 내가 형통할 때에 말하기를 영영히 요동치 아니하리라 하였도다

(30:7, 개역) 여호와께서 주의 은혜로 내 산을 굳게 세우셨더니 주의 얼굴을 가리우시매 내가 근심하였나이다

(30:8, 개역)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고 여호와께 간구하기를

(30:9, 개역) 내가 무덤에 내려갈 때에 나의 피가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어찌 진토가 주를 찬송하며 주의 진리를 선포하리이까

(30:10, 개역) 여호와여 들으시고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여호와여 나의 돕는 자가 되소서 하였나이다

(30:11, 개역) 주께서 나의 슬픔을 변하여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

(30:12, 개역) 이는 잠잠치 아니하고 내 영광으로 주를 찬송케 하심이니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영영히 감사하리이다

 

 

다윗언약은 성전언약입니다.

오늘 본문은 낙성가 곧 성전이 완성되었다 라는 선언의 선포노래입니다.

 

예수님은 시편 그대로 오셨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시편을 달달 외우는 유대인들은 정작 노래를 부르지 않고

오히려 노래를 부르는 어린아이를 어떻게 해서든 입을 막을려고 한다는 겁니다.

 

지난 시간에 목소리가 대상 소문자 a 역할을 한다고 했습니다.

즉 대상 인 듯, 대상 아닌, 대상 같은 목소리가

모든 주도권을 쥔 주체로써 활동한다는 겁니다.

얼룩이 말입니다. 제거 대상인데 ~~~

 

목소리가 뭔데? 아무것도 아니잖습니까?

허공에 떠도는 공허한 메아리와 같은
아무것도 없는, 의미도 가치도 없는

무능 중의 무능이요

있으나 마나 한 것이

졸지에 숭고 곧 불쾌한 거룩으로써

불가능성으로써 도리어 주변의 모든 것을 배치시키는 주체가 되는 겁니다.

마치 닭의 울음 꼬끼오가 말입니다. 닭소리가 뭐가 그리 대단해서 말이죠.

 

예수님이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드디어 입성을 하십니다.

그래서 어린아이들이 호산나 호산나

주의 이름으로 오신 이여 찬송하리로다 라는 찬양을 외치는데

 

한쪽이 이렇게 찬양을 하게 되면

반드시 다른 쪽은 그 찬양을 듣고 반응하도록 되어 있는

 

진노와 화풀이 원한을 갖게 되는 자들이 반드시 생기도록 되어 있습니다.
없는데서 생깁니다. 이것도 원인 없는 결과로써 말입니다.

이 어린아이의 찬양 때문에 말입니다.

 

찬양도 원인 없는 결과이지만

그에 따른 반작용의 분노와 화내는 것 또한 원인 없는 결과입니다.

 

지옥가는 자들 또한 죄를 지어서가 아닌

이미 죄에 잠식 된 상태인데 죄를 짖기를 뭘 짖겠습니까?

지옥 조차도 원인 없는 결과로써 간다는 겁니다.

 

어른의 찬양이 아닌

어린아이 곧 무능한 자의 찬양 때문에

이를 반드시 무시하는 자들이 반드시 우발적으로(필연 보다 더 필연적인) 발생하는데

그들을 자극 시킨 것이

그들의 원래의. 본래의 본성을 드디어 드러내는 것이 바로 목소리 라는 겁니다.


마치 씨 뿌리는 비유처럼 농부가 씨앗을 뿌리니까? 복음을 뿌리니까?
땅의 감추어졌던 속성이 돌짝밭 가시밭 길가, 그리고 무조건 이유 없이 열매 맺는 밭으로 드러난다는 겁니다.

 

아이들의 노랫 소리가 드디어 본성을 들추어내는 겁니다.

오히려 저들은 성전 속에서, 율법 속에서 자신들을 감추었던 거죠.
그래서 더 당당했습니다. 천국은 따 놓은 당상이라고,

먼저 된 자 나중 되게 하는 복음은 모른채 말입니다.
예수님이라는 새로운 기준이 온 줄도 모르고 말입니다.

성경 박사가 되면 될수록 더 잘 감추었다고 생각했으니

본인들이 그 속성을 알겠습니까?

외부적으로는 완벽한 방어인데

 

그런데 성경 지식 아무것도 모르는, 이 어린아이들의 내적인 간극의 목소리로써

어린아이가 일으킨 소동을 잠잠케 할려고

반드시 칼 권력 총 힘을 동원하도록 되어 있다 라는 겁니다.

자신들의 배운 가닥을 드디어 표출하도록 되어 있다 라는 겁니다.

 

이상하죠?

이 의미 없어 보이는 얼룩을 하나 제거 할려고

예루살렘 전체가 들썩 들썩 거린다 라는 겁니다.

총 칼을 들고 말입니다.

 

아주 아주 신기 합니다.

신기하다 하면 성령의 개입이다는 거죠.

 

어린아이 죽이기를 펼치는 겁니다.

마치 다니엘 죽이기

사도바울 죽이기 처럼

 

예수님 죽이기를 어린아이 죽이기로 앞서서 발생케 되는 겁니다.

 

정치적 상황입니다.

 

묵시가 역사 속으로 침입했을때의 사건발생이 바로 정치(기독교, 종말의 종말)이라고 합니다.

 

반대로 경제는 역사가 묵시를 대상으로 삼아서 연구하고 공부나 인식, 의식이나 감각화 해서 종말을 대비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종말 속으로 들어가겠다고 하는 겁니다.

마치 메시아를 고대하는 유대인의 종말론처럼 말입니다

회개하는 자세, 거룩한 생활로 메시아를 맞이하자 라는 거죠

바로 이런 바리새인 보다 낫지 아니하면 천국에 못 간다 라는 겁니다.

 

(21:9, 개역)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질러 가로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11:9, 개역)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자들이 소리지르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11:10, 개역)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12:13, 개역)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

 

호산나 라고 외치는 어린아이의 찬양에 동참해도 모자랄 판국에

비로소

 

비로소

 

(21:15, 개역)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의 하시는 이상한 일과 또 성전에서 소리질러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 아이들을 보고 분하여

 

분히 여기는 겁니다.

 

맞습니다.

 

이것이 진짜 찬양입니다.

 

우리가 부르는 찬양은 거짓인 이유가 바로 이런 이유입니다.

가스펠을 부르면서 백날 찬양한다고 우겨도

분노케 만들지를 못한다는 겁니다.

 

종말의 종말이 안된다는 겁니다. 불가능입니다.

 

물론 짜증내면서 듣기 싫다고 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찬양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

소음 때문입니다.

소음은 불법이거든요.

얼마나 못 불렀으면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을까요? 반응이 없다는 겁니다.

 

그런 것은 법을 잘 지키는 악마도 화나 분노를 내지를 않습니다.

인간의 찬양은 그저 불가능성을 가능성으로 바꾸는 식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광명한 천사 노릇을 하는 악마도

이 어린아이의 찬양에는 분노하게 마련입니다.

이것이 진짜 찬양입니다.

마귀가 분히 여기지 않는 찬양은 찬양이 아니다 라는 거죠.

 

결국 예수님의 찬양만이 진짜 찬양이지

인간이 부르는 노래는 마귀가 오히려 더 잘 따라부른다는 겁니다.

메시아 신앙은 즉 인간의 종말론은 가능성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뭘 해도 죄라고 여겨야지(불가능성, 거리두기)

내가 좀 찬양할 줄 안다고 그것이 옳다고 여기면 곤란하다 라는 겁니다.

찬양에 대한 자부심

시편에 대한 자부심이

누구 보다 강했던 그 유대인들이

진짜 찬양자인, 아니 찬양(대상 a) 그 자체이신 예수님을 죽인 이유도 그러하니까 말입니다.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이 어린아이의 찬양소리를 듣고

비로소 화를 내었다 라는 것은

이것이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라는 겁니다.

 

대제사장과 서기관 곧 성전종사자입니다.

성전과 관련된 자들인데

 

이 다윗의 언약인 성전언약 때문에 그들이 이런 행동을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정작 성전종사자는 오히려 성전언약과 무관한 자들로써 동원이 되고 (외적 간극)

 

정작 성전언약의 완성을 외치는 어린아이의 노래로 이 성전언약의 완성이 (내적 간극)

잠잠치 아니할 정도로 감사와 영광이 바로 이런 어린아이를 통해서 찬송케 된다 라는 겁니다.


외적 간극은 바리새인이 저 세리와 같지 않음을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항상 외부적으로는 그 누구도 지적할 수 없을 정도로 완벽했습니다.
그러나 내적 간극인 세리는 감히 얼굴도 못 들고 주여 불쌓이 여겨달라는 주님이 벌리신 그 불가능의 간극을 보고서
화로다 화로다 나는 망하게 되었구나 만을 외치는 겁니다. 아무도 볼 수 없었던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비로소 여섯날개로 천사들도 감당하기 힘든 그 영광앞에서 타 죽어도 마땅한 죄인임을 알게 된 겁니다.
 

(19:40, 개역)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지르리라 하시니라

 

(19:33, 개역) 나귀 새끼를 풀 때에 그 임자들이 이르되 어찌하여 나귀 새끼를 푸느냐

(19:34, 개역) 대답하되 주께서 쓰시겠다 하고

(19:35, 개역) 그것을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나귀 새끼 위에 걸쳐 놓고 예수를 태우니

(19:36, 개역) 가실 때에 저희가 자기의 겉옷을 길에 펴더라

(19:37, 개역) 이미 감람 산에서 내려가는 편까지 가까이 오시매 제자의 온 무리가 자기의 본 바 모든 능한 일을 인하여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여

(19:38, 개역) 가로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하니

(19:39, 개역) 무리 중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 하거늘

(19:40, 개역)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지르리라 하시니라

(19:41, 개역)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19:42, 개역) 가라사대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

(19:43, 개역)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성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19:44, 개역)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권고 받는 날을 네가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

(19:45, 개역) 성전에 들어가사 장사하는 자들을 내어 쫓으시며


낙성가 곧 다윗언약의 완성 

즉 성전언약의 완성에 있어서

비성전적인 요소들

다른 말로 비언약적인 요소들을 다 제거하시는데 있어서의 전쟁이 벌어지는 겁니다.

 

서로가 눈에 가시적인 예루살렘 곧 성전을 놓고서

예수님께서 천국을 침략하듯이 침노하십니다.

 

(11:12, 개역) 침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자 그러면 더더욱 이 예루살렘을 사수할려는(이미 장악했기에) 대제사장 바리새인들 등등이

마치 가나안 족속들처럼(여리고성처럼) 더더욱 방어태세를 취하게 되고

더더욱 이 예루살렘 공간의 중요성을 그들이 지각하게 됩니다.

마귀들이 예민하게 예루살렘을 구원의 문이라고 더 떠들고 다닌 다는 셈이다는 겁니다.

 

그러나 정작 예수님이 차지하게 되는 예루살렘은 공간해체가 됩니다.

실컷 차지하고서는

공중분해가 되어서

전 세계 어떤 곳이든이

복음이 들어가는 곳은 다 예루살렘이 되어

 

중요한 것은 십자가 사건이 가는 곳 마다 벌어지는 예루살렘이 된다는 겁니다.


즉 예루살렘을 힘으로 차지한게 아니다 라는 겁니다. 오히려 정반대로 힘 없음으로 차지한 겁니다.
어리석은 지혜, 유대인에게는 걸림돌로써 말입니다. 십자가의 용서로 말입니다.
 

곧 십자가사건은 무한반복적으로 세상 어느 곳이든 발생케 됩니다.

어떻게?

 

공간을 사수할려는 자와

그 공간을 빼앗는 침략자인 십자가를 증거하는 자와

그리고 공중분해 말입니다.

 

이것은 공간의 문제가 아닌

인간의 몸에 대한 문제인 겁니다.


인간 신체의 해체 입니다. 성전언약의 완성은 곧 인간 신체 해체 입니다.

다른 몸이 따로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몸 입니다.

십자가란 인간이 믿는 하나님의 해체 입니다. 곧 인간 신체 해체 입니다.

그것을 예수님 자신의 몸의 해체로 다 이루신 겁니다.

성전 파괴인 겁니다. 이제 전혀 다른 인간의 손으로 짓지 않음 성전이 완성 되었다 라는 겁니다.


들뢰즈가 생각나는데요 불교죠 즉 인간 몸 해체 조차도 그들은 긍정으로 여기고

무자아를 외치는 겁니다.

무자아를 주장하는 자아는 그럼 뭐냐 말이죠?

그들이 말하는 진리란 인간의 몸 즉 공간, 육신의 천막의 해체까지 주장하는 이유가 그런 이유입니다. 그것이 진리요 자유라는 거죠.

 

누구 마음대로 ㅋㅋㅋ

그들에게는 육으로부터의 자유란 없는 겁니다.

십자가라는 새언약을 빼버리고 자유할수 있다는 가능성을 주장하는 겁니다.

그것이 기관없는 신체 라는 신의 몸 이라나 초인이라나 뭐라나

 

유대인도 똑같습니다. 유대인이 인간의 대표성으로써 이런 악마의 속성을 드러내었듯이

우리 또한 모든 인간은 바로 이런 속성을 감춘채로써 탐심 속 우상숭배를 하나님을 동원해서 펼치는데

 

그것이 예수님에 의해 들통나는 겁니다.

 

다윗 또한 들통당하는 모습으로써 오늘 본문을 말하고 있는 겁니다.

 

이것이 이미 예루살렘에서 다 완성된 채로써 십자가 사건으로 지금 이순간에도 벌어지듯이

다윗언약 곧 성전언약은 이렇게 완성이 되는데

바로 이것이 악마들이 싫어하는 분노케 하는 것이 된다는 겁니다.

 

? 어디에도 설 자리가 없게 된다는 것은

존재성이 없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반대로 저들의 존재를 없애 버리게 되는 살인이 벌어진다는 거죠.

역시나 십자가에서 못 벗어나고

가인과 아벨 사건이 역시나 반복이 되게 되는 겁니다.

 

이것은 형제지간 아닙니까?

부모의 복사본 아닙니까?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놓고 싸우는

도플갱어로써 예루살렘이 등장한 겁니다.

하나는 인간들이 차지하는 공간적인 예루살렘

또 하나는 예수님 자체가 예루살렘으로써 구원의 문으로 등장하는 겁니다.

쌍둥이 도플갱어 로써 말입니다.

 

존재를 없애버리면 존재가 사라져야 하는데

오히려 없애버린 것이 더욱더 존재를 확장케 만드는 꼴이 되니

 

누가 더 폭력적이냐 말이죠?

예수님을 죽여 버린 그 살인은 이제 최고의 무기인줄 알았는데

무기 축에도 못 드는 꼴이 들통납니다.

 

오히려 진짜 폭력은 죽음 보다 강한 사랑 곧 십자가의 용서가 되는 겁니다.

[폭력 없는 폭력]인 사랑은

바로 이렇게 죽음 보다 강하다 라는 겁니다.

 

즉 사랑은 반드시 죽음 속에서 펼쳐진다는 겁니다.

그래야 죽기를 무서워 평생 종 노릇 하는 자에게

십자가가 고맙게 보일 것 아니겠습니까?

 

죽음이라는 부정성을 끌어들이지 않는 사랑은 가짜라는 거죠.

그 부정 보다 더 부정적인 사랑이다는 겁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정치 곧 사랑이다 라는 겁니다.

공포 보다 더 공포적인

모든 것을 용서하는 사랑입니다.

 

바로 십자가 사건은 이렇게 펼쳐지는 겁니다.

 

두 거지가

두 소경이 외칩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저를 불쌍히 여겨주소서

 

예수님의 제자나 주변 사람들이

하도 이 두 사람의 목소리가 너무 큰 고함을 쳐서

잠잠케 만들려고 무지 무지 애를 씁니다.

 

우리 예수님 건들지 말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발등에 불이 떨어진 놈이 급하지

목마른 놈이 우물 파듯이

답답한 자는 두 소경인 겁니다.

 

남이 뭐라든 말든 상관없습니다.

맞습니다. 위에서 말했듯 불법입니다.

 

그런데 이 불법을 거슬려가면서도 긍휼을 비로소 봤다면

이 두 소경은 보는데 정작 소경 아닌자는 뭐가 아쉽다고

다윗의 자손을 소리쳐서 부르겠습니까?

 

이미 다윗의 자손의 제자라는 타이틀을 땃는데?

 

그러나 두 소경은 제자 타이틀 따위 필요 없습니다.

지금 당장 창조의 손길

은혜의 손길

긍휼의 손길을 베푸는 긍휼자

구원자를 봐 버렸거든요.

 

피조물의 자동반사로써 외치는 겁니다.

따질려면 예수님께 따지고

 

잠잠케 만들려면 예수님에게 고자질 하라 말이죠.

 

(9:27, 개역)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 가실새 두 소경이 따라오며 소리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더니

 

뭐 너희가 아브라함 자손이라고?

아니 왜?

그런 소리

 

그런 목소리

 

그런 외침을 발설하지 말라고 합니다.

 

아니 왜? 니가 아브라함 자손이니?

아브라함 자손은 목소리를 외칠 수 있는 입이 없어야 한다는 겁니다.

 

즉 목소리 없는 목소리 이다는 겁니다.

 

목소리 속의 목소리 이중 목소리

 

그것을 아주 잘 표현한 것이 입도 없는 돌들입니다.

 

차라리 이 돌들을 통해서 외치게 하겠다는 겁니다.

 

저들의 부조리를 입도 없는 목소리를 낼수 없는 죽은 오드라덱과 같은

돌들이 부조리 보다 더 부조리 스럽게

 

불가능 보다 더 불가능으로써 외친다는 것이 []들입니다.

 

즉 아니 외치고는 못 배긴다는 존재 보다 앞선 당위가

정작 하나님의 선민인 유대인 곧 자칭 아브라함 자손이 아니라

돌 이라는 겁니다.

 

(3:9, 개역)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3:8, 개역)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19:40, 개역)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지르리라 하시니라

 

 

이 외치는 자 돌의 노선에

선지자와 어린아이가 놓여진 겁니다.

 

바로 예수님의 노선입니다.

 

(3:3, 개역) 저는 선지자 이사야로 말씀하신 자라 일렀으되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하였느니라

(1:3, 개역)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기록된 것과 같이

(3:4, 개역) 선지자 이사야의 책에 쓴 바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8:8, 개역)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나서 백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이 말씀을 하시고 외치시되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1:23, 개역) 가로되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 하니라

(12:13, 개역)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

 

 

과연 어린아이의 외침을 막을 자 있을까요?

총이랴? 칼 이랴?

그 어떤 것도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에서 끊을 자가 없다 라는 겁니다.

 

즉 반대로 끊어지는 자는 어떤 자인가?

성전을 붙잡은 오늘 내용의 성전종사자 라는 겁니다.

썩은 동앗줄을 잡은 겁니다.

 

외적으로 누구 보다 완벽한 동앗줄이였습니다.

그런데 실상은 그들의 외적인 모습은

오히려 가장 원수적인 모습이였던 것이죠.

동일성이란 결국 일치성이 사실상 불일치성의 간극을 제대로 보여줬고

 

누가 봐도 불일치 양립불가였던

원수와 피의 만남

죄인과 구원자의 만남이

바로 죄인을 부르러 온 의사의 기능이였다 라는 겁니다.

 

그러니 불가능을 불가능 그대로 남겨 두어야 하는데

자꾸 가능성으로 바꾸어 버리니까?

다들 유대교 곧 불교가 되는 겁니다.

 

회개도 그 불가능이 가능으로 바꾸워 버리고

찬양도 그 불가능성이 가능성으로 바꾸고

금식 십일조 이런 불가능성이 가능성으로

율법도 가능성으로

신앙도 가능성으로

무자아도 가능성으로

 

하여튼 성경에 나오는 모든 의미는 불가능성인데

기여이 다 가능성으로 바꾸는 바램에 지옥에 가는 겁니다.

그것이 강요된 선택인줄도 모르고 말이죠.

 

불가능성을 가능성으로 바꾸는게 아니라

불가능성을 그 불가능성으로 누리는 것 뿐이다는 겁니다.

 

그것이 남을 7번 용서 하는게 아니라

도리어 770번 용서를 당하는, 용서를 누린다는 의미입니다.

 

지금 오늘 본문 시편 30편도 바로 이 불가능성을 누리는 겁니다.

자 이렇게 되면 의무적으로 찬양을 부르는게 아니라

누가 말려도 소용이 없는

아니 외치고는 못 배기는 찬양이 덮치는 겁니다.

 

존재로써 외치는게 아닌

존재 보다 앞서는 당위로써 외치는 겁니다.

 

내가 존재하고 즉 태어나서 입이 생기고 입으로 노래 연습하고

악보를 보고 해석해서 나오는 찬양이 아니라

 

입이라는 존재가 생기기도 전에 찬양이라는 목소리가 먼저 있었기에

아니 외치고는 못 배긴다는 겁니다.

 

나에게 입이 만들어지기도 전에 생겨버린 목소리 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잠잠할 수가 없는 거죠.

 

입도 없는 돌들도 외치는데?

 

막살아라 라고 하니까 실천문제로 따지는 자들은 말려드는 겁니다.

막살아라 라는 것은 불가능성의 의미입니다.

그런데 그 동안 가능성으로 외치는 놈들이 이 표현에 말려든다는 겁니다.

실천이란 나의 존재가 먼저 형성 된 뒤에 후차적으로 나오는 행위가 되는 겁니다.

결국 모든 사고방식이 실천여부로 따지는 법이 되는 겁니다.

 

그러나 법 보다 먼저 앞선 것이 은혜요 곧 찬양입니다.

종교꾼들의 찬양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자들에게서는 절대로 나올 수 없는

주의 이름에 대한 찬양

곧 예수님 다윗의 자손을 부르는 외침이지

하나님을 외치는 외침 목소리가 아니다 라는 겁니다.

 

그러니 실천의 여부로 찬양을 따지는 놈들은

도리어 예수님이라는 찬양에 의해 걸려 넘어지는 겁니다.

 

나로 인하여 실족치 않는 자는 복이 있도다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곧 여호와로 인하여 실족하는 자는 없습니다.

그런데 여호와의 이름 곧 예수님으로 인하여 실족하는 자

곧 복음은 실족케 할려고 왔다 라는 겁니다.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착각하지 말라는 겁니다.

검을 주러 왔다 라는 겁니다.

불화를 일으키러 왔다 라는 겁니다.

 

여기에 인간의 무슨 놈의 실천력이 개입할 여지가 어디 있습니까?

 

어머니와 말씀을 나누면서

사단의 가시와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라는 의미를 나누면서

바로 이 내용 고린도 후서 12장의 은혜의 의미가 로마서 8장에서는 엘리야를 언급하면서 증거 외쳐지고 있다고 했습니다.

 

(고후 12:7, 개역)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11:1, 개역)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나도 이스라엘인이요 아브라함의 씨에서 난 자요 베냐민 지파라

(11:2, 개역) 하나님이 그 미리 아신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셨나니 너희가 성경이 엘리야를 가리켜 말한 것을 알지 못하느냐 저가 이스라엘을 하나님께 송사하되

(11:3, 개역) 주여 저희가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으며 주의 제단들을 헐어버렸고 나만 남았는데 내 목숨도 찾나이다 하니

(11:4, 개역) 저에게 하신 대답이 무엇이뇨 내가 나를 위하여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 칠천을 남겨 두었다 하셨으니

(11:5, 개역) 그런즉 이와 같이 이제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11:6, 개역)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하느니라

 

은혜는 반드시 행위 라는 반대적인 의미와 대조를 이루면서 증거가 되는데 엘리야를 언급하더라 말이죠.

 

왜 엘리야 일까 생각해 보니

어머니께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8501로 싸우면서 저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의 외침

곧 목소리를 비아냥 거립니다.

그래가꼬 듣기겠냐? 더 크게 불러야지

안듣끼네 내가 잘못들었나 안듣끼네

 

즉 열을 내어서 불을 붙여라 라는 거죠.

저들의 방식이 바로 행함이라는 겁니다.

 

그럼 엘리야 본인은 뭐냐?

 

오히여 정반대로 불을 붙여야 하는 판국에

불이 도저히 못 붙도록 하는 불가능성의 불가능성이 되는 겁니다.

이게 복음이요 기독교요 사랑인 겁니다.

 

저들은 가능성이요 평등이요 경제이지만 말이죠.

 

그래서 불을 잘 붙는 조건을 만드는 것이 아닌

불이 도리어 도저히 붙을수 없는 조건으로 만드는 겁니다.

 

불가능성을 불가능성 그대로 만드는 더 불가능하도록 말이죠.

 

이렇게 저들의 우상숭배를 이겼던 엘리야가

이제는 거꾸로 내 열심히 특심인데 라고

자신의 행함으로 어느새 바꾸어 버리니까

 

주님은 너가 했던 그 의미가 뭔줄 몰랐기에

마치 출애굽할 때 어린양의 피로써 출애굽하고 저들 애굽왕을 싹쓸이 했는데

그 의미를 다시 상기 시키기 위해서

다시 물 없는 곳 양식 없는 곳으로 몰고갈 때 원망을 의도적으로 받아내어서

옳지 옳지 내가 다시 보여주고 싶었어 라고

다시 어린양의 피의 의미를 다시금 광야생활 속에서 보여주는 겁니다.

주님만 신났지요 뭐

 

그래서 엘리야에게 다시 보여주는 겁니다.

엘리야의 우상숭배 곧 행함을 무슨 수로 삭제 시킬수 있겠습니까?

엘리야의 믿음으로? 천만의 말씀!

자기 믿음으로 자기 행함을 삭제하면 도저히 이것 만큼은 삭제 못하겠다고
이것 때문에 내가 내 이름을 날렸는데 라는 그것은 놔뚜고 다 삭제했다고 우길것 아니겠습니까?

내 열심이 특심인데 나만 남았나이다 라는 것은 이것 만큼은 때려죽어도 못 지우겠다 라는 겁니다.
다른 것은 다 지워도 때려죽어도 이것 만큼은 ~~~~

바로 그것을 지우겠다고 7천명을 남겨 두었다는 겁니다.

파국인줄 알았는데 심각하지 않았던 겁니다. 전복이 되면서 심각한 막장 드라마에서 더 더 더 심각한
그것도 심각이냐 라고 개콘으로 더 웃기는 우연을 가장한 미필적 고의 사건이 되는 겁니다.
웃음 곧 전복이 되는 거죠.

그래서 엘리야의 행함을 삭제하고자 등장하는 것이 바로 예수님의 믿음이다 라는 겁니다.
십자가 입니다.

십자가가 아니면 우리의 행함 곧 우상숭배
나만 남았나이다 를 도저히 삭제 시킬수가 없는 겁니다.


나의 행함을 제대로 삭제 시킬수 있는 것은 은혜 뿐이다는 겁니다. 사단의 가시를 거친 십자가의 은혜 입니다.

사단의 가시를 뽑아달라고 하는 그 열심의 기도를 삭제 시키는 ... 말입니다.
더 큰 주님의 탄식, 상한 심령, 썩어 문드러진 마음 말입니다.
 

오히려 너 엘리야는 정작 바알 아세라와 같은 울부짖음으로 더 크게 외치고 있고

아이고 그것도 열심히 특심이가? 더 특심이어야지? 더 더 크게 불러야지? 듣끼겠냐?

 

라는 듯

 

엘리야의 하나님은 (엘라이야를 비언얀에 놓고, 엘이야와 싸우시는 하나님 곧 여호와가 아닌 여호와의 이름)

오히려 7천명 남겨 두었다 라는 불가능성을 제시해 버립니다.


두 명만 있어도 원망안했을텐데

7천명 씩이나?

 

아니죠
두 명만 있어도 원망 안했을텐데? 천만의 말씀 원망 합니다.

두 명도 결국 인간의 행함 곧 실천여부를 끝까지 따지겠다는 거죠.

아예 불가능하게 만들어 버리는 것이


7
70번 용서요

7천명이요

막사세요 라는 겁니다.

 

내가 막사니 너희도 막살아라 라는 겁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 지어다 라고 말이죠.

 

제가 이렇게 거룩을 막살기와 동일한 표현으로 쓰니까

장난하는 줄 알아요?

 

분명히 말합니다. 막살줄 모르면 다 지옥갑니다.

거룩을 누리지 못하면 다 지옥갑니다.

 

즉 거룩을 지키는 자는 다 지옥간다는 겁니다.

 

실천여부가 아닙니다.

그래 따지는 놈은 막살면 안된다 라고

안막살기를 외치는 놈이죠.

 

또 막살기를 또 지키는 놈도 있어요

그것도 지옥가는 겁니다.

 

주님의 간섭이 다시 왜 불을 붙이는 조건에 물을 뿌리느냐입니다.

예수님을 바리새인의 말씀실천에 왜 물을 뿌리듯이

일부러 바리새인 코 앞에서 안식일을 어기느냐 말이죠.

 

왜 안식일날 막사느냐 말이죠.

 

왜 먹기를 좋아하고 포도주를 즐기며 왜 강도와 세리와 창녀의 친구이냐 말이죠.

 

저들의 거룩 개념을 확 다 깨버리냐 말이죠.

 

행함으로 하지 않고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고자 함이다 라는 겁니다.

불가능성에서 불가능성으로 이르게 하고자 함이지

 

불가능성을 가능케 해서 하고자 함이 아니다 라는 겁니다.

 

너희는 불가능하나 주님은 다 하신다

할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들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다 라는 뜻입니다.

 

즉 불가능성을 불가능성으로 남겨 놓는 일에 매진하신다 라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의 행함, 공로, 열심을 지우고 삭제 하는 일만 골라 골라 하시는 거죠.

누가? 믿음이 말입니다.

 

예루살렘은 결국 그 일을 하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의 시선에서의 예루살렘은 자신들의 신앙 곧 행함 실천

내 열심히 특심들만 가득 채워 넣는 곳이다는 거죠.

 

그거 공중해체 시키는 겁니다.

 

그리고 너가 가는 곳곳 장소 마다 이제

초월적 공간으로써 십자가 사건

즉 믿음으로써 그런 인간의 공로 행함을 해체하는 일만 골라 골라서

오로지 믿음만을 남기는

 

7번 남을 용서를 삭제 시키고

오로지 770번 용서 받는 일만 남기는 일을 하는 주체가 믿음 곧 예수님이다 라는 겁니다.

 

거기에 지금 다윗이 걸려 들어서

사단의 가시를 빼서

주님 이제야 저를 살려주시는 군요! 가 아니라

 

도리어 사단의 가시를 푹 푹 더 깊숙이 찔러 넣어서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라고

 

도저히 이게 무슨 믿음이고 라고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는 그 약함에서

 

오히려 아무것도 힘이 되지 않는 있으나 마나한 그 약함이

은헤를 더욱더 잘 누리게 되는 강함이라는 것을

 

거룩을 누리는 거룩의 덮침이 되었다는 것을

그래서 고맙고 고마워서 아니 외치고는 못 배기는

 

찬양

 

즉 찬양 부르지 말고

다윗 자체가 찬양이 되는

목소리가 되는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가 되는

울려퍼트리는 악기가 되는 겁니다.

 

찬양을 지키는게 아니라 누리게 되는 거죠.

 

그 불가능성을 누리는 겁니다.

거룩을

막살기를 말입니다.

 

이것이 여호와의 목소리 곧 듣낄라 말라 카는 세미한 음성에 화답하는

주님의 찬양이 덮쳐진 자의 외침입니다.

 

아니 외치고는 못 배기는 겁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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